[박창원의 기록여행] 백성의 명절 추석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조선에는 3대 명절이라는 것이 있어 하나는 정월원단 둘은 오월단오 셋은 추석이 그것이다. ~원단은 모든 사람들의 명절인 것 같이 되어 있으되 그는 주로 권문세가들의 것이며 단오는 백성의 것인 것 같으되 주로 중산 이상의 부녀자 및 기타 유한 한객들의 것이다. 이 중에 가장 백성의 것이며 동시에 조선적 정취의 것은 추석이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9월 17일자)

1948년의 추석은 9월 17일이었다. 그 시절 한식을 제외하면 설과 오월단오, 추석을 3대 명절로 쳤다. 그런데 그 명절의 색깔이 달랐다. 설날은 권문세가들의 명절로 통했다. 사흘 밤낮으로 정월 초하루의 설 차림을 준비할 수 있는 집은 권문세가나 만석꾼뿐이었다. 게다가 창포에 머리를 감거나 활쏘기를 즐기는 단오는 여유로운 부녀자나 풍류객의 몫이었다. 이에 비해 추석은 백성의 명절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햇곡식을 수확하고 풍년을 기원하며 가을밤을 수놓았으니 말이다.

추석은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에도 멈추지 않았다. 천도교에서는 추석날에 어린이들을 모아 노래하고 춤추며 송편을 나눠 먹었다. 추석놀이를 열어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대구의 화원유원지 같은 곳에서는 투우대회나 궁술대회, 씨름대회 등을 열어 추석 분위기를 자아냈다. 추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도둑이 들끓었다. 도둑들은 명절 장사로 현금이 많은 잡화점이나 포목점을 호시탐탐 노렸다.

해방 후 한 달 만에 맞은 첫 번째 추석은 후딱 지났다. 이듬해인 1946년 추석은 그야말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그해 5월부터 발병한 콜레라로 경북에서만 4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추석을 공휴일로 정하고 콩쿠르 대회 같은 주민 위안잔치를 열어 명절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갈수록 식량난이 심한 데다 명절 수요로 쌀값이 더 올랐다. 소두 1말에 500원 남짓 하던 쌀값은 단번에 200원이 오른 700원에 거래될 정도였다.

살림살이와 상관없이 추석은 아이들 추석빔을 장만하는 일을 빠뜨릴 수 없었다. 최고의 선물은 고무신이 차지했다. 사탕(캔디)과 설탕도 빠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달달한 사탕은 배급품이기도 했다. 사탕을 빼돌리고 되팔아 폭리를 취한 업자가 적발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설탕은 한참 동안이나 추석 선물의 단골 메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물을 둘러싼 부작용도 나타났다. 학부형들로부터 돈을 거둬 교사에게 선물하려다 말썽을 빚기도 했다. 추석을 쇠려고 사람들이 피를 뽑기 위해 병원에 몰려드는 일도 있었다. 다 대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향을 찾는 귀성 발걸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대구역에서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승객 때문에 열차 운행이 정지된 적도 있었다. 열차표 없이 무작정 열차에 오른 승객들 때문이었다. 정원 80여 명의 객차 안에 200여 명이 빽빽이 들어찬 경우를 상상해 보라. 힘겹게 고향을 찾는 귀성 모습을 보노라면 추석은 영락없이 백성의 명절이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귀성을 말리는 추석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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