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예술가의 아내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우리 선생님 오늘 잘 말씀하셨나 궁금하네요. 요즘 컨디션이 안 좋으신데 알아서 잘 좀 정리해 주세요." 작곡가 우종억 선생님의 부인은 자택을 자주 드나드는 필자에게 늘 이런저런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시곤 한다. 필자와 만나는 스케줄 정리에서부터 혹시라도 빠뜨린 자료가 있어 전화 드리면 잘 찾아서 전달해 주신다. 원로 예술인과 작고 예술인의 집을 자주 찾다 보니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다. 특히 남성 예술인의 경우, 오랜 세월 예술 활동 뒷바라지를 하신 부인들에게서 이런저런 후일담을 듣다가 함께 울고 웃을 때가 적지 않다.

우 선생님의 부인은 "대구시향의 위상을 서울에 알려야 한다고 사재까지 털어서 가져가셨어요. 1980년대에 단원 수십 명 데리고 서울 공연 가는 게 어디 말처럼 쉬웠겠어요. 말도 못 해. 내가 이런데, 이기홍 선생님 부인은 더 힘드셨을 거예요"라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전하신다.

2018년 12월 이기홍(대구시향 초대 지휘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홀로 남은 부인은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선생님의 스크랩 자료와 앨범을 정리하는 데 보내신다. 안방 한쪽에는 70년 가까이 함께한 남편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써내려간 일기장이 놓여 있다. 이기홍 선생님은 1964년 대구시향을 창단한 이후에도 지휘 공부가 더 필요하다며 1969년 홀로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세 아이와 함께 대구에 남은 부인은 포목 장사로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유학 가시기 전에도 월급은 음악 활동에 쓰셨으니 늘 생활비가 부족했어요. 애들도 좋은 학용품 한번 못 사줬죠. 그래도 선생님 음악 하시는 게 좋았고 더 잘 뒷받침해 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는 부부가 같이 음악을 하는 사람은 무대 옆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지만, 평범한 아내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으로 평생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마음 졸이며 무대를 지켜보곤 했다.

올해 97세이신 바리톤 고(故) 이점희 선생님의 부인은 선생님의 예술 활동 자료들이 대구시 아카이브 자료실로 떠나는 날, 눈물을 보이셨다. "우리가 영선못 옆에 살 때, 그때 자료가 정말 많았는데, 집이 습해서 훼손된 책이나 음반들을 많이 버렸는데 그게 아까워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우리 선생님을 기억하고 챙겨 줘서 고마워요." 혹시나 덜 챙겨 보낸 게 있을까 이곳저곳 다시 살피시며 그저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평생 매일 저녁마다 음악 동료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늦게까지 술상을 차리게 한 남편이었지만, 그가 걸어간 길이 자랑스럽고 옳은 길이었다는 확신이 있다.

지난봄 연극인 고(故) 이필동 선생님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실 서재 등이 선생님의 생전과 똑같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필동 선생님의 부인은 집으로 배달돼 오는 택배의 대부분이 책이었다고 회상했다. "남편에게 저 두꺼운 책들을 다 읽고 또 사시는 거냐고 물으면, 책을 전부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단 한 줄만 얻어도 성공한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저는 잘 모르는 책들이지만, 하나하나 남편의 손때가 묻은 걸 아니 쉽게 치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곤 선생님의 예술 자료 정리에 나선 필자를 걱정하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우리 선생님만 챙기다가 임 선생이 피해를 보면 어떡해요. 다른 연극인들은…." 이 말을 듣고 나니 정말 말문이 턱 막혔다. 이필동 선생님은 지역 연극사에서 업적이 가장 뚜렷한 분이시니만큼,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으며, 인물 선정에 필요한 사전 절차를 다 거치고 왔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늘 세상과 부딪히며 새로운 길을 개척한 예술가 남편의 활동을 지켜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사셨을까 싶어 가슴이 아렸다.

내 남편이, 내 가족이 어떤 사람이라고 널리 알리고 자랑하며 그것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일평생 마음 졸이며 오롯이 그 뒷바라지에만 힘쓴 부인들, 그들이 있었기에 예술가들은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남편의 예술 활동에 빛을 더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평범한 아내의 시간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관련기사

AD

오피니언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