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채용신(1850-1941) ‘춘우정 투수도’

미술사 연구자

마에 담채, 74.5×50㎝, 개인 소장
마에 담채, 74.5×50㎝, 개인 소장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초상화로 이름을 떨친 채용신이 그린 '춘우정 투수도(春雨亭投水圖)' 또는 '춘우정 투강순절도(投江殉節圖)'로 불리는 그림이다. 춘우정이라는 호를 가진 인물이 물에 뛰어들어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제목이다. 화면의 아래와 위에 그려진 만경과 임피의 나루 사이 만경강 한 가운데에 클로즈 업 한 배 한 척이 있고, 그 배에서 뛰어내려 강물에 몸을 던진 한 사람이 있다.

춘우정은 전라북도 정읍에 살았던 유학자 김영상(1836-1911)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병탄이 순종의 조서로서 공포되자 김영상은 나라를 빼앗긴 이 사태를 자신의 죽음으로 항거하려 결심했다. 실현 계기가 된 것이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이다. 강제 병탄 후 일제는 일부 조선인들에게 일본 황실의 작위를 주고 은사금을 지급했는데 매국 대신, 왕족 등에게는 매국 행위와 협조에 대한 보상이었고, 여론에 영향을 미칠만한 전국의 유력 인사들에게 준 것은 돈으로 환심을 사 우호세력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매수하고 회유하기 위한 수단인 이 돈의 이름부터 교묘했다. 은사(恩賜)는 임금이 하사한다는 뜻이어서 '은사금'을 받는 것은 일왕의 신하나 백성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명분을 무엇보다 중시한 유학자들 중에는 이 돈을 결코 받을 수 없었던 사람이 많았다. 반대로 일제는 일본 왕을 조선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는 은사금 거부를 용납하지 않아 이 돈을 받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회유와 함께 가려내기까지 겸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춘우정 투수도'는 은사금을 거부하고 순절을 택했던 많은 유학자들 가운데 김영상의 사례가 그려진 기록화, 역사화이다.

김영상이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10월 24일부터 은사금을 수령시키려는 당국의 압박이 계속되었다. 사령서를 받게 하려는 면장과 군수, 일본인 관리 등 관(官)의 행정 절차는 이듬해까지 집요하게 이어졌고 이에 하나하나 맞서며 김영상은 거부의사를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결국 김영상은 군산의 감옥으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는 만경강을 건널 때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호송하던 일본 헌병이 구조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산감옥에 갇힌 이튿날인 1911년 5월 9일 순국했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은사금을 거부한 낱낱의 과정이 김영상의 문집 중 「각금일기(却金日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을 그림으로 남긴 채용신은 무과에 급제한 무장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는데 어진화사로 발탁되어 고종어진을 그리기도 했다. 1906년 관직을 그만두고 전라도로 내려온 채용신은 '춘우정 투수도'를 그릴 때 만경강을 끼고 있는 익산에 살고 있었고 이 일이 있기 전 해에 김영상의 초상화를 그린 일이 있다. 바로 이웃 고을 잘 아는 사람의 일이라 김영상의 순절에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 같다. 면암 최익현, 매천 황현, 간재 전우 등 항일 유림의 꼿꼿한 얼굴을 초상화로 남긴 화가도 채용신이다. 호국보훈의 달 유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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