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가을에는 연서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그냥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때, 당신은 모르는 척 혼자 걸었습니다. 가을볕 가득히 떨어지던 그 교정, 그 나무. 그늘을 키우던 나무 아래서 우리는 그저 까르르 웃음을 키웠고, 꿈도 키웠습니다. 당신은 그런 우리를 그저 모르는 척하셨지요.

옛날이야기군요. 시간은 어느덧 이토록 멀리 와 버렸네요. 이제야 고백하지만 그때 우리들은 온 밤을 숱하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설익은 시절이었다고 말씀하신다면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무는 거리를 걸을 때, 깊은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혹은 어느 성악가의 노래를 들을 때, 가을볕 내리는 어느 교정에 서 있을 때, 당신이 문득문득 떠올랐습니다. 오늘처럼 노을이 짙거나 혹은 청명하게 맑은 날엔 누군가에게 연서를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는 바람에 띄우고 싶습니다. 시간 지나고 나면 설령 이런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지라도 꼭 한 번은 그래 보고 싶습니다. 저무는 거리를 바라보며 어느 찻집 구석에 앉아 누군가가 읊어주는 시도 듣고 싶습니다.

어느 시절, 내가 그토록 즐겨 읽던 시집의 한 페이지에 집을 짓고 있는 당신. 그 페이지에서 나는 영원히 살고 있으니, 기록된 시처럼 당신은 허공의 연인 되어 영원히 내 가슴에 살고 계십니다. 나는 매 순간 세상의 언어를 엮어 그대에게 화답하고 싶으나 아직은 내 언어 한없이 서툴러 그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계절이 무르익는 오늘, 가을볕 쏟아지는 교정에서 조금은 어색해도 좋으니 뒤돌아보지 않는 그대를 따라 나도 걷고 싶습니다. 행여 우리 눈이 마주친다면 내가 먼저 수줍어 고개부터 숙일지 모르나, 꼭 한 번은 그리해 보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내가 그대를 연모하는 마음, 평생 그대는 알지 못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들꽃 흐드러지게 피는 금오지 둑길 다시 걸으며,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나는 차마 고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여고시절은 고백하지 못해 더 아름다웠습니다. 누군가의 뒤에서 연모하는 마음으로 따라 걷는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설령 설익은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그때는 최선이었고, 실로 어마어마한 떨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살면서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지금도 계절은 깊어지고 있고,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설렘이 일어납니다. 운동장 저만치에 꼭 당신이 서 있을 것만 같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못한 이 말, 그저 당신이어서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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