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김광석은 떠났지만 노래는 남았다

김광석의 노래는 슬프다. 노래를 달콤하게 불러도 눈물이 나고 경쾌하게 불러도 가슴이 짠하다. 실패한 이에게 일어나라는 격려의 노래도 애잔하게 들린다. 삼덕성당 뒷골목에 있는 술집 '깡통차기'에 가면 생전에 그가 쓴 낙서가 아직도 벽에 남아 있다. "슬픈 날은 술 퍼, 술 펀 날은 슬퍼." 그의 일상도 늘 슬프다, 슬픔의 김광석, 그에게 자살은 필연이었다.

김광석은 대구서 태어나 살다 서울로 이사 갔다. 입대 전까지 노래하다 1987년 대구에 내려와 6개월의 방위병역을 마쳤다. 제대하고 나서도 노래를 불렀지만 여전히 무명가수였다. 1984년 김민기의 음반 '개똥벌레'에 참여한 게 음악에 발을 담그게 되는 시작이었다. 대구와의 음악 인연은 대구방송국 DJ였던 김병규가 1985~86년 사이에 그의 프로그램에 참여시킨 게 계기가 된다. 1987년에는 홍대 앞에서 그룹사운드 '동물원'에서 '거리에서'라는 노래를 불렀고 대구서는 대구대 대명캠퍼스에서 '사랑이 떠나간다네'를 부른다.

1988년 최초의 단독음반을 발간하게 되고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가을 축제 때 초대 가수로 와 예상외의 큰 반응을 얻게 된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그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한동안 동가식서가숙하는 낭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김광석을 위해 대구의 음악인 김승근이 1989년 11월, 배성혁이 1990년 11월 연달아 김광석 콘서트를 대구에서 열어 그의 이름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를 만든다.

김광석의 서울말은 어설프다. 서울은 갔어도 온전한 '서울내기'가 되지 못한 탓이다. 1964년 1월 22일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나 여섯 살까지 남도극장 근처와 지금 복개된 범어천에서 뛰어놀며 살다 서울로 간다. 그 아버지가 민주당 시절 교원노조(전교조 전신) 결성 때 간부로 참여했다가 해직을 당했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공부밖에 모르던 아버지는 금은방에서 일하다가 대봉동에서 '번개 전업사'라는 가게를 했다. 벌이가 신통치 않아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간다. 1972년 김광석은 아버지, 누나와 함께 대구로 다시 내려와 동도국민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말로는 할머니가 아파서 세 식구가 내려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버지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다시 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동도국민학교에 1년을 다니다가 다시 서울로 간다.

김광석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사업도 잘 되지 않아 서울 갔다 대구 왔다 또 서울 가고, 청소년 시절은 암울함 속에서 보낸다. 그의 슬픔의 씨앗은 그렇게 잉태되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그의 음악적 천재성은 대중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당시 대한민국 공연 사상 처음으로 1천 회 소극장 전국투어라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인기 절정의 김광석은 1996년 12월 24일에서 25일까지 그의 생애 마지막 공연을 경북대 강당에서 열었다. 공연이 끝난 뒤 경북대 북문 앞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염매시장 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보통 때는 공연 뒤 깡통차기에서 1차, 봉산동 학사주점에서 2차를 하고, 염매시장 포장마차나 효목동 동구시장으로 가서 입가심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그러나 죽음을 10일 앞둔 그날은 단출하게 1차로 쫑파티를 끝낸다.

김광석은 갔어도 노래는 남아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간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군입대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이등병의 편지', 젊은 직장인들에게는 '서른 즈음에', 절망에 빠져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가 정석처럼 불린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그의 노래가 익어갔다. 그는 고향 음악 선배와 팬들에게 고마움을 되갚아 주고 갔다. 방천시장 '김광석 골목'을 남겨 나라 안은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소문난 음악거리를 만들어 주고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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