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가 낳은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 <2>구국의 횃불을 들다

명성왕후 시해 을미의병 소식 듣고 김천서 거병 동참

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옆에 모셔져 있는 왕상 허위 선생 묘.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옆에 모셔져 있는 왕상 허위 선생 묘.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태어난 구미시 임은동 생가터. 현재 생가터는 기념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태어난 구미시 임은동 생가터. 현재 생가터는 기념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내가 조선의 국모다."

1895년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의 칼날에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가 외친 말에는 국권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당시 조선의 운명은 청과 일본, 러시아 등의 열강 속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갑오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을 겪으면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휘어잡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왕산 허위는 의병을 조직해 이듬해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충북 진천까지 진출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구국의 횃불을 밝힌 것이다.

◆바람 앞에 놓인 조선의 운명

1894년(고종 31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은 농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 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됐다.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탐관오리 조병갑이 1894년 2월 고부군수로 오면서 농민들에 대한 약탈은 도를 넘었다.

그는 기회가 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했으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해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세금을 거둬들였다.

부민(富民)을 체포해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만도 2만여냥(兩)에 달했다.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천여냥이나 되고, 대동미를 정미(精米)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서 상납해 그 차액을 착복하기도 했다.

전봉준은 더 이상 조병갑의 횡포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전봉준은 김도삼·정익서·최경선 등 동학 접주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을 작성해 봉기를 맹약했다.

농민들도 분노가 폭발했다.

민란의 불씨가 된 것이 고부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다.

이들은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됐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했다.

같은 해 4월 전봉준은 김기범·손화중·최경선 등의 동학 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민간에 포고했다.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했다.

창의문이 발표되자 인근 10여 개 읍에서 1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부안관아와 정읍, 고창, 영광, 전주 등을 점거하고, 관군과 맞서 싸우면서 연전연승을 이어갔다.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고종은 동학농민들의 파죽지세 같은 진격에 힘 한 번 써보지 못하자 청에 구원 요청을 했다.

일본은 청군의 출동에 일본 군인들도 조선으로 불러들였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허위 선생의 항일의병 활동과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됐다.

◆작전명 '여우 사냥'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이후 근대화를 이루며, 제국주의적 대외 진출을 도모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청과의 분쟁을 계속했다.

일본은 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교두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전쟁 준비를 했다.

반면 청은 부패한 나라로 전락했다.

1894년 6월∼1895년 4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은 청과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이다.

전쟁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일본은 전쟁 준비에 무성의하고 부패한 청나라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그동안의 동양 패권을 청으로부터 일본이 넘겨받는 계기가 됐다.

그 후 조선 등 대륙으로의 침략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일본은 국내의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사건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명성황후는 외교 파트너로 러시아를 선택했다.

러시아와 친한 친러파들을 주요 관직에 등용시켰다.

러시아와 손을 잡은 명성황후는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조선에서의 주도권 행사가 쉽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를 미우라 고로 육군 준장으로 교체하고, 대원군을 이용해 친일파 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한 궁중 쿠데타를 획책했다.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고로는 일본 자객 20여 명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잠입했다.

총, 칼로 무장한 일본 낭인들은 경복궁을 지키던 군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칼로 베었다.

경복궁 제일 안쪽인 건청궁 곤녕합으로 달려갔다. 곤녕합은 명성황후가 머물던 곳이다.

그들은 명성황후를 죽이려는 계획을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

일본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궁 안에 있던 여인들은 모두 일본 낭인들의 칼날에 꽃잎 떨어지듯 힘없이 쓰러졌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고종은 불안감에 시달리다 일본인들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소위 아관파천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많은 이득만 챙겼고,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됐다.

◆구국의 횃불을 들다

1894년 허위는 40세의 나이에 붓을 뒤로하고 풍운 속에 몸을 던져 구국의 행동 대열에 뛰어들었다.

허위는 동학농민운동을 피해 영양의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옮겼다.

청나라 군대가 출병하고 일본군이 파병되면서 허위는 청일전쟁을 우려했다.

외세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져든 나라를 생각하며 허위는 탄식했다.

"바닷바람에 돛을 걸기만 하면 방지(防止)하는 한계가 조금도 없다. 저들이 오고 우리가 가서 문득 바늘을 당기는 자석(磁石)같이 되었는바, 길을 빌려서 다른 나라를 쳐 없애던 것과 같은 화를 누가 능히 알겠는가."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산새는 시국 급한 줄은 모르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

1895년 허위는 흥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공포를 접했다.

그리고 을미의병 소식을 들었다.

이때 안동의진의 의병장 권세연으로부터 창의를 독려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유생들의 전국적인 봉기에 자극을 받아 허위 형제들도 창의를 결심했다.

맏형 허훈은 진보에서 창의하고, 허위는 김산(김천)에서 거병하기로 했다.

1896년 3월 상주·선산의 유생들과 함께 김산으로 간 허위는 이기찬·조동석·이기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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