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 산책] 접시꽃(蜀葵花) 최치원

탐스럽고 향기롭지만, 알아주는 이 없는 비극

접시꽃(蜀葵花) 최치원

적막도 적막할사, 묵정밭 가에 寂寞荒田側(적막황전측)

흐드러진 꽃에 눌린 가지 휘우듬 繁花壓柔枝(번화압유지)

장마가 그칠 무렵 향기 가볍고 香輕梅雨歇(향경매우헐)

보리누름 바람에 모습 기우네 影帶麥風欹(영대맥풍의)

수레 타고 말 탄 이 누가 봐줄까 車馬誰見賞(거마수견상)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볼 뿐일세 蜂蝶徒相窺(봉접도상규)

천한 곳에 태어남이 부끄러워서 自慙生地賤(자참생지천)

버림받은 그 한을 참고 견디네 堪恨人棄遺(감한인기유)

다 알다시피 이 시의 작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말기의 지성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다. 그를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고운은 실상 실의와 좌절의 대명사에 더욱더 가깝다. 우선 그는 신라 말기의 엄격한 골품제 사회에서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이룰 수가 없었다. 고운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간 것도 바로 그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단 한 번 만에 과거에 합격했고, 당시 민중 봉기의 우두머리였던 황소(黃巢)를 토벌하자는 격문(檄文)을 써서 이름을 온 천하에 떨치기도 했다. 하지만 고운은 변방 출신의 외국인이 겪는 소외 의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의 대부분이 상관인 고변(高騈)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었기 때문에, 작품을 쓸 때마다 한 작가로서의 모멸감을 견디기가 어려웠을 터다. 우여곡절 끝에 귀국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쳐보려 했지만, 신라 땅에서 한번 육두품은 영원한 육두품일 뿐이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접시꽃은 아주 탐스럽고 향기로운 꽃이다. 그러나 이 꽃은 적막하기 짝이 없는 묵정밭의 한쪽 구석에 피어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이 꽃의 비극은 아름답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출신 성분이 비천하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 신분적 비애야말로 넘으려고 해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이 꽃의 비극적 운명의 모태다.

이렇게 볼 때 작품 속의 접시꽃은 당대의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았던 최치원의 모습을 꼭 빼 닮았다. 작품 속의 접시꽃을 작자의 소외받은 삶이 총체적으로 응축된 자화상으로 읽게 되는 이유다.

AD

관련기사

최신기사

기획 & 시리즈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