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홍명희의 '임꺽정'과 경세제민

조선일보 1928년 11월21일 자에 실린 임꺽정 제1회. 조선일보 1928년 11월21일 자에 실린 임꺽정 제1회.

일제강점기 조선 삼대 천재로 불리는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이광수, 최남선, 그리고 홍명희이다. 이 세 사람은 함께 일본 유학을 하며 근대를 배웠고, 함께 조선 신문학 건설의 꿈을 지녔으며 함께 조선의 근대와 자립을 향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독립이 요원해지자 사람들은 지쳐갔고 이광수와 최남선 역시 꿈을 버리고 친일을 향해 나아갔다. 그 신산한 세월 속에서 홍명희는 마지막까지 친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버텼다. 경술국치를 한탄하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자결한 부친 홍범식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다. 대하 역사소설 '임꺽정'(1928~1940)은 일제라는 폭력적 시대에 대한 홍명희 나름의 저항 기록이었다.

'임꺽정'은 연산조에서 명종조에 이르는 어지러운 시대의 상황묘사에 긴 분량을 할애하면서 시작된다. 소설은 세밀한 시대 상황 묘사를 통해서 왜 임꺽정이라는 도적이 조선 중기에 출현했으며, 왜 그가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간다. 여기에 이어서 임꺽정이 스승 갖바치와 함께 한라산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조선 전국토를 여행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홍명희는 '임꺽정'에서 조선의 역사와 조선 국토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억이란 일본제국이 조선인들의 머릿속에서 지우려 한 조선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임꺽정'에서 홍명희가 되살리고 있었던 것은 조선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었다. 의적 임꺽정의 반역 모티프를 통해 저항의 정신을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불러내고 있었다. 조선조 명문 사대부 집안 후손 홍명희가 백정 임꺽정의 반역 정신을 지지하다니, 도대체 홍명희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홍명희가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것은 한문 경전이며 한시였다. 그는 수백 년 전 역사 속 인물들이 남긴 한문 경전이나 한시의 문맥을 읽으면서 지식만이 아니라 경세제민(經世濟民) 의식과 정신을 함께 마음에 익히고 있었다.

조선조 명문 사대부 후손인 홍명희가 양반 지배계급의 척결을 외치던 임꺽정의 반역 정신에 눈을 돌린 것은 한문 경전에 내포된 '경세제민'이라는 정신의 틀에 비춰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제에 타협하지 않은 의지 역시 이 정신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시즘 같은 다양한 서구 학문을 공부하고,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소설을 탐닉했어도 홍명희 정신세계의 핵심은 언제나 한문경전과 맥이 닿아 있었다. 그의 정신은 스물두 살이던 1909년 지은 칠언율시 구절, '우국일심역로'(憂國日深易老·나라 걱정 날로 깊어 마음은 쉬이 늙고)의 세계 속에서 언제나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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