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스토리] '영원한 젊은 오빠' 남진

"난 트로트가수 아니야…'님과 함께'로 최초 댄스가수지"

가수 남진.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가수 남진.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이지현 기자가 가수 남진과 셀카를 찍고 있다. 이지현 기자가 가수 남진과 셀카를 찍고 있다.

오빠부대의 원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원조 가수왕…. 데뷔 52주년을 맞은 가수 남진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그의 노래 인생만큼이나 화려하다. 국내 대중가요 가수로는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열고 MBC 10대 가수왕을 휩쓸며 인기를 끌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소년 같은 외모와 여심을 녹이는 눈웃음이 여전히 매력적인 '영원한 오빠' 남진을 만났다.

◆부잣집 도련님, 풍각쟁이 되다

"아따 이놈의 인기는 전후방을 안 가리는 구마잉~."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능청스러운 연기로 영화 '국제시장'(2014)에 깜짝 출연했던 정윤호(남진 역)의 대사다. 외국 활동을 하려면 여권이 필요한데 여권을 발급하려면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말에 해병대에 입대했다. 입대 후 베트남전쟁에 파병돼 목숨을 맞바꿀 뻔한 순간을 몇 번이나 겪고서야 전역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 푸른 초원 위에이~"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극중 장면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고 귀띔했다.

'울려고 내가 왔나'(1965), '가슴 아프게'(1966)로 인기를 끌었던 그는 1971년 전역 후 '마음이 고와야지'를 내며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재기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마친 최고 인기가수였다. 그런 그에게 작곡가 남국인은 "어울리는 노래가 있으니 부산으로 오라"고 했고, 남진은 "방송'라디오'지역 순회공연에, 연애하기도 바쁜데 거기 갈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라며 부산행을 미뤘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레코드 임종수 회장은 "특별 보너스를 줄 테니 오라"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간 그의 앞에는 남국인이 있었다. 남국인은 화가 나서 그 곡을 다른 가수에게 주려던 참이었다.

"한 소절 부르자마자 '이건 내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마터면 못 부를 뻔했지 뭐. "불멸의 노래 '님과 함께' 였다.

그의 꿈은 배우였다. 가수 데뷔 이후에도 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가수를 선택한 데 대해 "영화는 수천 명이 작업해서 무대에 올리잖아. 그런데 가수는 무대에 오르면 혼자 주목받을 수 있어. 그게 좋더라"고 털어놨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 최고 유지이자 목포일보 발행인이었다. 아버지는 무대에 서고 싶어하는 늦둥이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당시 최고 배우인 김승호에 견주며 "야야, 세상에 김승호가 둘이 있냐, 셋이 있냐. 니가 김승호가 될 수 있겄냐"라며 그를 말렸다. 병상의 아버지에겐 비밀로 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나이트클럽에서 팝송을 부르던 술 취한 대학생을 눈여겨본 밴드마스터가 노래연습실을 소개해줬다.

비밀은 들통이 났다. 그의 아버지는 병실에서 보던 흑백 TV에 대타로 출연한 무명가수 남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풍각쟁이를 할 바엔 '몸빵'(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3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철없던 아들은 1천여 개의 레퍼토리를 가진 최고 인기가수가 됐다.

"아따 아부지 섭섭게 생각지 마시오."

◆나는 '유행'가수다.

노래방에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와 심수봉의 '비나리'를 즐겨 부른다는 그는 몇 해 전 TV프로그램 '나는 트로트가수다'에서 '비나리'를 편곡해 맛깔나게 불러내며 완벽한 무대를 만들었다. 1위를 차지하며 '트로트 제왕'에 등극한 그에게 트로트에 대해 물었다. 그의 답은 의외였다.

"나는 트로트가수가 아니야."

이유는 간단했다.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곡 중 '가슴 아프게' '울려고 내가 왔나'는 트로트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이나 '빈잔'은 슬로록(slow rock), 빠른 템포의 '둥지'는 고고(gogo), '마음이 고와야지'는 트위스트(twist)라는 것. 그러면서 그는 '님과 함께'는 무릎을 떨어가며 춤을 가미했으니 자신을 '최초의 댄스가수'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사실 목포 부잣집 도련님은 '팝'을 좋아했다. 그 영향에 데뷔곡도 팝 영향을 받은 '서울 플레이보이'(1965)였다. 그러나 진짜 가수가 되려면 한국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트로트는 프랑스'미국'영국 등에서 사교댄스의 리듬으로 세계적으로 대유행했던 장르다. 그러나 한국 트로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왜색 논란에 휘말렸다. 이난영'장세정'황금심을 지나 이미자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에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령이 내려졌다.

트로트 전성시대는 다른 곳에서 열렸다. 최희준이 부른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은 냇킹 콜, 패티 페이지, 조 스태포드 등의 색깔이 묻어나는 한국판 팝이었다. 미8군을 드나들던 남일해, 최희준, 이미자, 현미 등이 인기를 구가하며 가요계에는 트로트 붐이 일었다. (인터뷰 중)그는 이따금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려 박자를 맞춰 가며 한 소절씩 들려주기도 했다.

트로트 열풍은 천재 작곡가 박춘석과 남진을 이어줬다. 그의 곡 가운데 박춘석의 도움을 받은 곡이 70%나 될 정도라니 수많은 만남 가운데 가장 행운이라고 꼽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둥지'의 차태일을 만난 건 두 번째 행운이라고.

악단, 무용단, 합창단과 가수가 한 무대에서 흥을 돋우는 버라이어티쇼가 인기를 끌던 1971년 '남진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단독 콘서트를 소개한 것도 그였다. 유독 여성팬이 많았던 그는 전국 곳곳에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이후 나훈아, 펄시스터즈. 조영남, 김추자 등이 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선보이며 가요계는 수많은 유행가수를 배출했다.

◆남진, 그리고 두 가수

남진은 빼놓을 수 없는 숙명의 라이벌 나훈아와 자신을 제치고 1980년대 1인 독주시대를 연 조용필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군대 가기 전, 그러니까 훈아가 18살 때, 용필이는 20살 때 처음 봤어. 용필이는 시골 밴드 기타리스트였는데 노래가 기가 막히는 거야. 따로 불러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었지"라고 회상했다.

각각 '트로트의 황제', '가왕'이라는 별칭이 붙으면서부터 대형 공연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는 스타다. 변함없이 대중에 다가서고, 후배들과 컬래버레이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남진과 차이가 난다. 그런 두 사람을 두고 "연예인이라면 그런 맛도 있어야지. 그런데 난 그렇지를 못해. 내숭을 못 떨겠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들 어렵게 시작했잖아. 나는 부잣집에서 자라 누릴 것은 다 누렸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잖아. 그러니 신비주의 같은 건 나랑 안 어울리지"라고 했다.

"다들 잘 돼서 좋아. 그 친구들이 있어서 내가 초라하지도, 쓸쓸하지도 않거든."

'자장면과 짬뽕' '연대와 고대' 'HOT와 젝스키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남진과 나훈아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나훈아는 각종 루머에 휘말리며 칩거하다가 최근 11년 만에 콘서트로 복귀했다. 남진은 "정치권에 YS와 DJ가 있었잖아. 그런 관계 같아"라며 "훈아가 나오니까 나도 좋아. 조인트 공연도 하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의 기억에 두 사람은 30년쯤 전 한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한 무대에 섰다.

"오매, 함 봐야지!"

◆노래의 힘

산이 높아 골이 깊었다. 먼저 꺼낸 건 이혼 이야기였다. 당대 최고 '핫'한 스타 윤복희와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그 사람이 다른 인터뷰에서 '순진한 남진을 이용했다'는 내용으로 인터뷰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어.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셨고 끝내 혼인신고도 못했는데, 어쩌면 그때 어머니의 생각이 옳았나 봐"라고 했다.

이후에도 악재는 이어졌다. 신군부가 집권하고, 출연이 예정된 프로그램에서 취소 요청이 이어졌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 몇 번이나 방송 출연이 거부되자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떤 높은 사람이 "저 사람이 아직 많이 나오네"라고 한 말을 듣고 부하가 과잉 충성을 했다고 했다. 원치 않게 고향 목포에 다시 내려갔고, 1년쯤 쉬었다. 사들였던 빌딩을 텅 빈 채로 둘 수가 없어 유흥업소를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건 노래였다.

"유행가요, 대중가요는 힘이 되어야 해. 흥만 있고 애환이 없으면 대중가요가 아니야."

그나마 '울려고 내가 왔나' '님과 함께'를 부를 때엔 산업화 사회 서민의 애환과 꿈을 담았는데, 요즘에는 그런 노래가 안 보인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수치심이 들고 미안해지기도 한다. 일본식 가락을 받아들여 노래 부르기에 바빴던 젊을 때는 막상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나이가 드니 뿌리를 찾고 싶어졌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우리 민요, 창, 시조에 어린 민족의 필(feel)에 소름이 돋는다.

1970년대 초 대구 신도극장에서의 공연은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했다. 공연을 끝낸 그를 기다리던 여성팬들이 길을 막아 1시간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게 벌써 40년 전이라니.

남진은 3월 10일 대구 공연을 앞두고 있다. 이 공연에는 파월 장병 중 고엽제 피해자, 저소득층, 홀몸노인, 장애인 등 700명을 초청한다. 할머니가 된 팬과 전장을 누빈 동료가 함께하는 이번 공연은 그에게 새로운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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