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소설, 팬들은 열광하는 데 문단에선 왜 홀대받을까…『범죄소설의 계보학』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스틸컷.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스틸컷.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지음/ 소나무 펴냄

더블버튼 트렌치코트에 파이프 담배, 특이한 모자. 추리소설 하면 연상되는 탐정의 모습이다. 그들이 쓴 모자는 오죽하면 탐정 모자라는 이름 외에 뚜렷한 명명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은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든 모르는 게 없고, 조목조목 따져 들어가는 논리는 물샐 틈이 없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떻게 탐정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과도 퍽 어울리는 외모와 교양을 갖춘 인물이다. 날카롭고 지적인 그들, 그리고 그들은 주로 '백인 남자'다.

'범죄소설의 계보학'은 오랜 시간 한국을 포함한 세계 문단에서 저평가됐던 범죄소설이 문화적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는 것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계명대 영문학과 계정민 교수에 따르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 범죄소설은 사건의 선정성을 무기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단순한 상업적 장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자는 뉴게이트 소설, 추리소설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이어지는 영미 범죄소설의 흐름을 좇으며, 계급갈등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소설 속 범죄가 어떻게 발생하고 해결되는지 분석했다.

◆범죄소설의 이데올로기적 저항성

시작은 뉴게이트 소설이다. 1830~47년 사이 영국에서 출판된 범죄소설 중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서 처형된 범죄자들의 일대기를 담은 '뉴게이트 캘린더'에 등장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어머니의 말 한 필을 훔친 범인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걸 본 불워 리턴은 '피비린내 나는' 영국 형법을 거세게 공격하는 '폴 클리퍼드'를 써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피지배계층이 당대 법률과 제도의 피해자라는 급진적 관점을 담은 추리로 열렬한 지지를 받던 뉴게이트 소설에 대한 인기가 컬트현상(특정 영화를 수십 번 보거나, 대사를 따라하거나, 관객이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등 열광적인 행동)으로 바뀌자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이 선거권을 얻기 위한 차티스트 운동이 전개될 때였다. 하류층 범죄자를 영웅시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전폭적인 메시지를 유포시켰으니 노동계급의 환영, 지배계급의 억압은 당연한 결과였다.

뉴게이트 소설에 대한 탄압이 이뤄질 때 체제 절충적 소설도 나타났다. 저자는 새커리의 '캐서린',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예로 든다.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던 거의 유일한 범죄소설은 경계와 억압을 이기지 못하면서 문단의 이단아로 내몰렸다. 100년 넘게 비평가의 관심 영역에서 사라진 것도 같은 이유다.

◆추리소설 속 비밀

뉴게이트 소설이 물러난 자리에는 추리소설이 등장한다. 탐정과 범인의 대립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추리소설의 기본 틀은 미스터리 범죄-범죄자의 추적과 체포-미스터리 해결이라는 규범에 묶여 있다. 뉴게이트 소설의 저항적, 혁명적 성격은 사라졌다. 여기에 창조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는 분석도 추가됐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연작은 위대한 탐정이 흥미진진한 게임을 벌이는 고전 추리소설의 전형이다. 새로운 영웅 격인 탐정 역시 당시의 계급'인종'민족 등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는 사실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에드거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심지어 땅딸막한 외국인으로 통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적 명탐정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백인 남자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러한 탐정의 재현이 계급'인종'젠더의 원형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합리적 사유와 과학적 분석으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고도의 추리력과 전문성을 갖춘 완벽한 인물이 상류 계급 출신 백인 남자라는 설정은 기존 계급체제를 공고히 한다.

여성 탐정은 어떨까. 여성 탐정 추리소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다. 여성이 범죄를 수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기존의 젠더 규범이 교란되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노처녀 탐정 추리소설은 영문학 영토 내 입지를 다졌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이 대표적이다. 마플은 노화한, 무성적 존재,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어서 비위협적인 존재다. 마플이 젠더 규범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 점은 추리소설의 문화적 시민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삼류소설의 반란

저자는 특히 질 낮고 점잖지 못한 문학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꼽는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1920년대 펄프픽션(값싼 펄프지로 인쇄돼 간행된 대중소설)이라는 잡지를 통해 최초로 등장했다. 권위 있는 문학지가 아니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잡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여기에 폭력적 요소와 성적 자극까지 추가돼 상업성에 치우친 저속한 소설로 평가됐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팜므파탈을 핵심적 주제로 제시한다. 계 교수는 팜므파탈의 아찔한 섹슈얼리티나 젠더적 저항보다 계급과 자본이라는 논점에 집중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지배계급과 자본가계급이 범죄자로,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이 피해자로 설정된다. 그는 팜므파탈의 욕망이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물질적 성취를 향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의 속성이 내재한다고 설명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가려진 팜므파탈의 본질은 노동자 계급의 좌절과 분노라는 뜻이다.

범죄소설은 시대와 함께 호흡해왔다. 여러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고 경합하고 타협하면서 대중적 인기와 무관하게 저평가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소설 문학의 한 장르가 됐다. 문학적 시민권을 인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질문은 유독 장르소설을 천시하는 한국 문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면산장 살인사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지난해 서점가를 흔들었던 것을 본다면

'아케치 코고로'를 만들어 낸 에도가와 란포의 등장을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을까. 376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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