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번역과 오역의 차이

이광수 이광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즉 'Uncle Tom's Cabin'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13년이다. 흑인 인권문제를 다룬 원작 의도가 무색하도록 조선어 번역판 제목은 '검둥의 설움'이었다. 번역자는 이광수이고 저본(底本)으로 삼은 것은 'Uncle Tom's Cabin'의 일본어판이다. 영어 해독 능력이 부족해서 이광수가 일본어판을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영어 수업 중심의 일본 메이지학원에 유학해서 영어를 공부했고, 여기서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영시까지 창작한 이광수였다.

원작을 두고 일본어판을 번역한 것은 이광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소개된 대부분의 서양문학은 일본어판을 조선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번역자 상당수는 이광수처럼 일본 유학을 통해 영어나 러시아어 혹은 불어 원서 해독 능력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원서 대신 일본어판을 조선어로 번역한 것일까. 외국어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순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그 나라의 문화가 함께 묻어오기 때문이었다.

쉽게 설명해보자. 1800년대 말, 우연히 영어를 익힌 조선의 누군가가 근대 영미소설을 원어로 읽다가 'ego'나 'individual' 같은 단어를 발견했다고 하자. 과연 그가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었을까?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그 사람의 삶에서 '나'는 언제나 '아버지'나 '임금'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 사람이 독립개체인 '나'를 의미하는 'ego'나 'individual'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번역이란 이처럼 외국어와 자국어 간의 거리를 이해하고, 낯선 개념의 외국어를 자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작업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힘을 쏟아부은 것이 바로 이 작업이었다. 'ego'나 'individual' 같은 단어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 속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일본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이 단어에 대응하는 일본어로 '自我'(자아)와 '個人'(개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었다. 일본은 그런 고민 속에서 서구의 근대적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해갔다. 이광수가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가지고도 영어판 'Uncle Tom's Cabin' 대신 일본어판을 번역한 것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서구문화 번역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한강의 2016년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오역(誤譯) 논쟁이 재개되고 있다.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는 원문을 훼손할 정도로 심각한 오역 문제에 대해 '직역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번역은 창조적이다'고 맞서고 있다. 물론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은 언어의 변환을 넘어 문화의 변환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보라 스미스는 근대초기 일본이 서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번역에 퍼부었던 노력이라든가, 원작 대신 일본어판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이광수와 같은 식민지 조선 엘리트들의 비애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데보라 스미스가 이 점에 대한 이해력을 지니고 있다면 식지 않는 오역 논란에 대해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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