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대구시민 코바체프

어렸을 때 별표전축 한 대가 집에 있었다. 외제 오디오만큼 뛰어난 제품은 아니었지만 애용했다. 다양한 장르의 엘피(LP)음반을 자주 들었고 오디오와 레코드, 음악동아 등의 잡지를 탐독했다. 유명 아티스트의 내한공연이 드물었고 형편도 여의치 않아 공연을 직접 관람할 생각은 못했다. 언젠가는 명품 오디오를 장만해 오리지널 음반으로 세계적인 거장의 연주를 즐겨보겠다는 소망을 품고 지냈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소식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1984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베를린 필 내한공연을 꼭 보고 싶었지만 비싼 티켓 가격 때문에 포기했다. 카라얀의 내한공연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쌓아두었던 음악 잡지를 통째로 버렸다. 꽤 많이 소장했던 엘피음반은 부모님 집을 정리하면서 대부분 폐기처분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후회되는 일이다. 엘피음반의 부활을 다룬 '아날로그의 반격'이란 책이 나와서 화제가 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재작년부터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줄리안 코바체프가 지휘하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코바체프는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무대에서는 카라얀에 버금가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카라얀이 상임지휘자로 있었던 베를린 필에서 코바체프가 4년간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고 카라얀으로부터 직접 지휘법을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카라얀의 분신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지휘자의 음악을 대구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몇 달 전 공연이 끝난 뒤 대구콘서트하우스 주변을 서성이다가 코바체프와 마주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무척 복잡다난한 직업이기에 지휘자는 심리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지난 11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내한공연을 가족과 함께 관람했다. 공연을 앞두고 관객들은 사이먼 래틀의 사진이 인쇄된 대형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구에서는 코바체프와 함께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우쭐해졌다. 콘서트홀 로비에 음반 매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대구콘서트하우스가 본받을 만한 장점이라 느껴졌다. 베를린 필을 소개하는 두툼한 화보집과 베를린 필 연주가 담긴 CD 여러 장을 멋진 케이스에 담아 판매하는 것은 팬 서비스 차원에서 좋아 보였다. 베를린 필은 지난 11월 일본에서는 도쿄와 가와사키 두 도시에서 공연을 펼쳤다. 다음에는 대구에서도 베를린 필 공연이 개최된다면 좋겠다.

지난 12월 29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대구시향의 송년음악회를 관람했다. 이날 코바체프는 공연을 마친 뒤 무대에서 권영진 대구광역시장으로부터 대구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다. 2016년 2월 매일신문 기사에서 '할 수만 있다면 대구의 명예시민이 되고 싶다'고 밝혔던 코바체프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다.

지난 11월 대구시향 정기연주회를 마친 뒤 코바체프는 콘서트홀 로비에서 팬 사인회를 가졌다. 나는 해외에서 중고로 구입한 코바체프의 CD 음반과 DVD에 사인을 받았다. 코바체프가 발표한 음반은 대부분 품절되어 국내 음반 매장에서 구입이 불가능한 상태다. 코바체프가 지휘한 대구시향의 음반이 발매된 적은 없다. 2015년 10월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코바체프는 실황 녹음 앨범을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코바체프의 소망대로 대구시향 앨범이 CD와 엘피음반으로 제작되어 판매될 수 있다면 좋겠다. 코바체프를 사랑하는 대구 팬들에게 소중한 기념품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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