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27.끝> 미나카이 백화점과 일본 패망

"왜놈들은 이땅을 떠나라" 거리마다 조선인 만세 소리…

대구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미나카이 백화점. 여기서 엘리베이터를 한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구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미나카이 백화점. 여기서 엘리베이터를 한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인들은 떠나라!'

'너희들 나라로 돌아가라!'

천황이 패전을 알리는 방송을 하고 만 하루가 지나자 대구 북성로는 쏟아져 나온 조선인들로 북적댔다. 어제까지 북성로의 주인이었던 일본인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웅크리고 앉아 상황을 살폈다.

'현해탄을 헤엄쳐서 건너가라!'

'나가라!'

조선인들의 외침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솟아나는 야차의 울음 같았다. 북성로 미나카이 백화점(현 북성로 대우 주차장 자리에 있던 조선의 3대 백화점 중 하나) 사장 나카에 가쓰지로는 소파에 몸을 걸레처럼 쑤셔 넣은 채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를 들었다. 만세 합창은 어느덧 선동으로 변하고 있었다.

'왜놈들을 때려죽이자!'

'모조리 죽여 버리자!'

패전이 무엇이기에 하루아침에 이 꼴이란 말인가. 떠날 수밖에 없는가. 피와 땀을 바쳐 쌓아올린 백화점을 여기서 접어야 한다는 말인가. 죽어서 백화점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죽어서 지킬 수 있다면 죽을 것이다. 대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나카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북도청도 헌병대도 일단 기다려보라고만 할 뿐 어떻게 하라는 지침이 없었다. 대구경찰서도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는 눈치였다. 조선인 순사들은 아예 출근을 하지 않거나 고향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했다. 치안을 유지해야 할 순사들은 경찰서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본인 사업가들은 아무래도 떠나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눈치였다. 전화통을 붙들고 답도 없는 이야기를 아침부터 종일 주고받는 게 일과였다.

'떠나다니! 떠나면 백화점은 어떻게 되는가?'

나카에는 처음으로 조선인을 경영 전문가로 키우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조선인을 전문가로 키우지 않아도 운영에 문제는 없었다. 패전하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조선인을 전문가로 키우는 것은 위험하거나, 비용에 비해 수익이 적었다.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눈을 내리깔지만 진실로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처럼 유순하지만 결코 복종하거나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늑대와 같은 족속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조선인들의 드잡이질은 정도를 더해갔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미나카이 백화점의 대구점 본부장 이시무라였다.

"아베 노보유키 조선 총독이 어제(9월 19일) 경성을 떠났다고 합니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남았는데 미군정으로부터 업무 협조를 위해 남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계가 끝나는 대로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시무라를 노려보는 나카에의 눈이 이글거렸다. 이 자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마주 앉은 이시무라는 나카에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들고 온 서류에 눈을 붙박은 채 이야기했다. 나카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린 이시무라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이시무라도 늙어 버렸는가.'

길을 가로막고 선 조선인 불량배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길을 열던 그 젊은 날의 이시무라는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조선반도 곳곳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만주나 지나에서 피란 온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피해는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 철수해야…."

"이시무라!"

이시무라는 움찔 놀라 나카에 사장을 쳐다보다가 곧 눈을 내리깔았다. 나카에는 '꽃이라면 사쿠라, 인간이라면 사무라이'라는 일본의 속담을 평생의 신념으로 간직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신념으로 뭉친 사람에게 자신은 지금 '사쿠라 꽃은 바람에 떨어졌고, 사무라이도 세월을 따라 늙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평생을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나카에 사장이 백화점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쯤이야 알고도 남았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는 것도 예견했다. 그렇더라도 철수를 권유해야 할 만큼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그래, 한 줌도 안 되는 폭력배들한테 천하의 이시무라가 겁을 먹은 거야? 어? 우리가 조선에 처음 왔을 때는 길에서나 집에서나 총칼을 품고 다니지 않았나? 하물며 자기 집, 자기 방에서 잘 때도 칼을 품고 자야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 아닌가."

"…."

"대답을 해 봐!"

이시무라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카에 사장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쫓겨나듯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부귀영화를 더 볼 것이고, 무슨 앞날을 기약하자고 도망질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 이대로 머물다가는 개죽음뿐이었다. 남아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 말이 없어?"

나카에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상황이 생각보다 나쁩니다.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면서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헌병과 경찰은 이미 치안에서 손을 뗐습니다. 조선인 순사들 중에는 지레 겁을 먹고 어디론가 숨어 버린 자가 부지기수고, 현재 경찰력으로는 귀국하는 민간인을 보호하기에도 벅찹니다. 우선 소나기를 피하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소나기?"

이시무라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설명한다고 인식이 바뀌지는 않는다. 모르던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신념이 바뀌는 경우도 드물다. 신념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신념을 가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사소한 체험, 작은 감동이나 충격으로도 신념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한 번 신념이 서면 바꾸기는 무척 어렵다. 신념이란 것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강화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어떤 객관적 사실도 신념을 바꾸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대구점 총괄 본부장으로서 할 일은 해야 했다. 판단은 나카에 사장이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사장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소나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어? 나는 이보다 더한 소나기도 맞았다. 내가 조선에 왔을 때, 지금보다 상황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나? 자네가 그걸 모른단 말이야? 우리가 죽을 고비를 한두 번 겪었나? 그런데 기껏 조선인들의 폭동이 두려워 다 접고 떠나자고? 미나카이를 포기하자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살아온 세월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지금 제정신이야?"

"사장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국내 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제관계도 전혀 달라졌습니다."

치안이나 상업 사정만 놓고 본다면 그들이 조선으로 건너왔던 시절보다 지금이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일본이 대(對)청 전쟁에서 이겼고, 대러 전쟁에서 이긴 직후였다. 승전국의 자부심이 있었고 만사가 뻗어나가는 형국이었다. 승전의 바람을 몰아 용기백배했고 손을 대는 사업마다 물심양면으로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반대 상황, 즉 패전국이 돼 버렸다.

나카에는 소파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가 갑자기 자세를 꼿꼿이 세우며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어쨌든 버텨낼 궁리를 해야지, 전쟁에서 졌다고 모두들 물러날 생각뿐이야? 일본인들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유약해졌나? 사십 년 전 우리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를 잊었나? 그때는 우리 손에 뭐가 있었나, 아앙? 나는 못 가. 절대로 안 가! 지금이라도 영사관을 설치하고, 사십 년 전처럼 조선거류민단을 조직하면 된다. 내 청춘, 내 재산, 미나카이가 여기에 있다. 맨몸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철수라니! 폭도들이 어쨌다고? 자경단을 조직하든, 새로 들어설 미군정을 요리하든 살 궁리를 찾아야지, 무턱대고 철수부터 생각하면, 뭘 어쩌자는 거야?"

이시무라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나카에는 숨을 식식 몰아쉬었고, 담배를 피웠고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사장님,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장님의 말씀을 거역해본 일이 없습니다. 거역이라니요, 사장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해본 일이 없고, 사장님의 판단에 의혹을 가져본 일도 없습니다."

"빙빙 돌리지 마라!"

"제가 사장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던 것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장님의 판단이 언제나 옳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미나카이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미나카이는 그대로 있었지만, 상황이 변해 버렸습니다. 어제까지 바위처럼 탄탄하던 땅이 늪이 돼 버렸습니다. 지금 미나카이는 늪 속으로…."

나카에가 탁자 위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이시무라의 얼굴에 맞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겨냥하고 던진 것은 분명했다. 이시무라는 당황했다. 나카에 사장이 이처럼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설 자리가 없어? 우리가 사업하러 왔지 전쟁하러 왔나? 전쟁에 진 것은 일본군이지 미나카이가 아니다! 설령 일본군이 떠난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미나카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 황군은 갈 테면 가라고 해! 경찰이고 헌병이고 도청이고 다 떠나라고 해! 나는 안 가! 못 가!"

전쟁을 하러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러 왔다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했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듯 일사천리로 미나카이를 진두지휘해온 나카에였다. 일본 군대의 뒤를 따라 사업을 펼쳐 온 것도 사실이었다. 군대가 확보한 물자를 바탕으로, 군대의 보호와 소비를 등에 업고 사업을 키워 온 것도 사실이었다. 나카에 스스로도 자기 말의 모순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떠나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황군과 함께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황군과 함께 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인이고 싶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나카에도 어찌할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카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대구 첫 엘리베이터 운영, 미나카이 백화점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만주와 사할린, 한국 등 식민지에 있던 일본인들은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 본토에서 가난한 자들이었고, 식민지에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일본 정부의 호소와 후원을 믿고 식민지로 이주했다. 그러나 패망과 함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결국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 피지배민뿐만 아니라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던 사람들 중에는 식민지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일본 본토를 밟아본 적이 없는 일본인 2세들도 많았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잃어버린 세대였다.

대구시 중구 북성로 현 대우 주차빌딩 자리에 있던 미나카이 백화점의 사장 나카에 가쓰지로 역시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조선에 온 가난한 상인이었다. 일본 시가현(滋賀縣) 곤도(金堂)에서 반농'반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집을 떠나 여러 상점을 전전하며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1903년 동생들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 3형제는 1905년 1월 대구에 잡화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미나카이 포목점을 열었고, 승승장구해 1907년 진주점, 1911년 경성점, 1919년 평양점, 1923년 도쿄지점, 1928년 흥남점, 함흥점을 열었다. 1933년 미나카이 백화점 대구 본점과 경성점을 열었고, 그해에 평양점, 1940년 신의주점, 1941년 남경점을 열며 승승장구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까지 미나카이는 조선 전국과 만주, 중국에 18개 지점, 종업원 4천 명, 연 매출 1억엔을 자랑하는 백화점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일본 패망과 함께 미나카이 백화점 전 재산은 몰수됐고, 미나카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나카이 백화점의 창업자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앞서 밝힌 나카에 형제가 설립했다는 설 외에 나카에 형제와 장남 나카에 가쓰지로의 장인 오쿠이 와헤이(奧井和平)가 공동투자해, 나카에 3형제를 뜻하는 삼중(三中)과 오쿠이 와헤이(奧井和平)의 이름 '井'자를 따서 미나카이(三中井)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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