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⑨대구읍성 허물던 날

곡괭이 끝에 나뒹구는 성돌…남자들이 통곡하고 아녀자도 따라 울고

잿불에 타서 익어가는 개의 고린내가 성을 가득 메웠다. 인부들은 일을 마치고 맛보게 될 고기 익는 냄새에 입을 쩝쩝 다셨다. 냄새를 맡고 몰려든 개들이 성 안팎에서 하늘을 물어뜯을 듯 짖어댔다.

1906년 10월 밤, 대구 군수 겸 경북관찰사 서리이던 박중양이 비밀리에 부산에서 데리고 온 인부 60명이 대구 읍성을 허무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인 무리에서 선비 한 명이 분을 못 이긴 채 앞으로 나섰지만, 주위의 만류로 물러났다. 얼마 전 60명의 조선인이 화적으로 몰려 처형된 사건은 아직도 조선인에게 공포로 남아 있었다. 화적떼라 명명된 자들은 일본 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규모의 교살 사건은 당시 조선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조선인들은 두려움을 집어먹고 있었다. 한 달 전에도 그러한 이유로 조선인 3명이 끔찍하게 총살당했다. 총알이 심장과 폐를 관통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이 수백이 넘었다. 죽은 자들은 용맹하고 용감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분노를 안고 있었고, 분노는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용감한 자들의 끝은 적막했다. 시신은 불타버린 개의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은 비명을 목구멍에 삼킨 채 성의 남문 밖 측후소 아래 삼일 동안 뻣뻣이 매달려 있었다.

박중양은 물러서는 조선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무력한 조선인이 기껏 덤비는 꼴이라니….' 그리고 인부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시작하라! 동트기 전 지시한 바를 차질없이 수행하라!" 박중양의 벽력같은 호령과 함께 성벽이 파괴되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곡괭이질 한 번에 남자들이 울었고, 그 울음소리에 아녀자가 뛰어나와 울었다. 울음소리는 성벽에 붙어 우는 가을벌레의 소리처럼 측은하고 가여웠다. 박중양은 조선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울음 속에 서식하고 있는 무력함이 지긋지긋했다. 박중양은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적임을, 적은 일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그 가여움임을 알았다.

낙동강을 끼고 형성된 곡물 집산지였던 대구는 조선 후기 이래 경상도 내륙지방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에 가면 내륙으로 바로 들어가 큰돈을 번다"는 일본 정부가 장려한 조선 내륙 이주 정책으로 인해 일본 상인들은 개미떼처럼 대구로 몰려들었다. 설탕, 담배, 술과 된장 등의 일본 잡화로 대구 읍성 밖의 상권은 순식간에 일본 상인들의 무법천지가 되었다. 특히 1903년 경부철도의 대구건설로 인해 대거 이주한 일본 노동자와 상인들은 불법으로 토지를 침탈하며 대구 외곽지역까지 퍼지기 시작했고, 돈을 번 상인들은 대구 외곽의 토지를 매입하며 세를 확대해 나갔다. 그것은 대구의 토착 상인들의 상권을 붕괴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이주의 중심에, 그들의 복된 미래를 약속하는 일본인을 위한 조선인 정치가-일명 야마모토 군수라고 불리던 박중양이 있었다.

본관은 반남(潘南), 경기도 양주 출신의 박중양이 친일파 관료로 승승장구한 데는 시절에 따른 빠른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조선의 이름을 버리고 야마모토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그는, 그 이름과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찍이 일본 관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토 총독이 일본을 내왕할 때 어김없이 박중양을 동행한 것은 박중양의 통역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진 위급한 찰나에 하늘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 일은 이토 총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여자를 구한 박중양은 이토 앞에 나직이 엎드렸고, 그때 이미 박중양의 가슴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토착민의 저항이 심하지 않고 땅값이 싼 성 밖의 동부와 북부에 터전을 잡고 있었다. 읍성 내부에는 권력과 부를 가진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터전이었기에 일본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성 안을 드나들 수 없는 점에서 성벽은 일본인에게 큰 장벽으로 작용했다. 경부철도가 건설되면서 대구역은 각지의 물건들이 집산되는 경부선의 중심역이 되었으나, 역 주변에 도로들이 개통되지 못한 탓에 일본인들이 터를 잡은 북부지역은 중심 시가지가 되지 못했다. 일본인이 역으로 통하는 주변 상권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도로 건설을 위해 성벽 철거가 불가피했다. 또한, 일본인들이 유곽용 부지로 대량 사들인 역 주변 도원동 지역은 건축물을 세울 수 없는 습지대였기 때문에 진펄을 메울 건축자재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았던 일본 거류민들에게는 매음을 위한 전문적인 집창촌이 필요했고, 읍성 철거 후에 나온 벽돌은 도원동의 습지를 메우고 그 위에 유곽을 비롯한 상점들을 세우기에 훌륭한 자재였다. 그러한 이유들로 일본 상인들 사이에서 성벽무용론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읍성을 허물고 그 자리에 4성로의 개통을 촉구하는 요구가 공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성 내의 세력가인 조선인 토착계층들은 일본인들의 성 내 진입을 완강히 거부했다.

박중양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 정부에게 읍성 철거에 대한 요청을 올렸다. "대구부 성첩이 오래되어 토석이 곳곳에서 붕괴하니 다니는 길에 방해된다. 성벽을 철거하여 5간 너비의 도로를 만들고 좌우의 민호는 모두 상점으로 만들겠다."

조선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 총독의 사랑을 등에 진 박중양은 두려울 것이 없는 자였다. 일본에게 대구 읍성의 철거는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조선인의 경제권을 허물 수 있는 경제적인 조치였고, 그것은 박중양에게 또 한 번 일본에 자신의 충성심을 쐐기 박을 기회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읍성 안의 부자 지식인들은 친일 세력인 박중양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타관 출신인 자신이 대구에서 입지를 굳히려면 그 반발심을 무력화시켜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것은 그의 결단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반대한 일을 박중양의 독단으로 감행한 것은 그의 목이 달아날 각오로 덤벼든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중양이 어떠한 자인가? 읍성의 철거는 일본을 향한 그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결단이기도 했으니, 일본이 자신들에게 이익되는 박중양의 목이 달아나게 둘리는 만무하였다. 그에게 정치술이란 많은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실리술이었다. 사람이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고, 정치란 그 심리를 노골적으로 알아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적이 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을 때는 적으로 만들지 않듯이, 편이 될 만한 확실한 이유 없이 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치였다. 권력을 쥔 자들이 어떻게 그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박중양은 지금 하는 일이, 그리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일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무너지고 있는 조선이었다. 무력한 조선이었다. 불확실할 때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현재의 공리는 일본으로 기울고 있었다. 조선은 곧 강한 자-일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박중양의 철거 명에 하룻밤 사이 수 개소의 성벽이 파괴되었고, 무너지는 돌무더기 위로 흰옷 입은 조선인들의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그들이 그토록 가여운 표정으로 우는 자들이 아니었다면 박중양은 어쩌면 조선의 편에 서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박중양이 조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은 그에게 강함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자신들의 자리에 일본인의 점포가 버젓이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그들 터전의 상징인 성곽이 무너지고 있는 때에 쇠줄에 묶인 짐승처럼 컹컹 울부짖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줄을 끊고 덤벼들어 적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으며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자들이었다.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하면서 에구 대구 타령으로 외쳐만 대며 그 부당함에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이 조선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강한 민족이었다. 섬 출신의 문맹하고 무식한 무산자들로 이루어진 일본 상인이었지만 그들은 지반으로 침투해 집을 허물어버리는 개미떼처럼 정확하고 빠른 속도로 조선 상인들을 허물어뜨렸다. 일자무식한 그 상인들만 보더라도 일본은 강했다. 박중양은 그들의 강함을 사랑했고, 조선인의 무력함을 경멸했다. 박중양은 일본인의 천성적인 강함을, 그 지독함을 믿었다. 그것은 '영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박중양은 통곡하는 조선인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얼마 후면 짖기를 포기해버릴 조선인의 무력한 울부짖음은 결국 불구덩이에 갇힌 개들의 비명처럼 차갑게 굳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박중양은 그 울부짖음 속에서 으드득으드득 이를 갈고 있는 누런 뼈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산 자의 눈물 속에 검게 배어나오고 있는 죽은 자의 뜨거운 피를, 그 피가 강산을 물들이고, 그 피로 생명을 이은 강철 같은 뿌리가 바로 조선의 힘이 될 것임을 알지 못했다.

광무 10년 10월의 밤, 무너진 성돌 위에서 수십 마리의 개들이 불 속에 뛰어들 사나운 기세로 일그러진 하늘을 향해 컹컹 짖었다. 불에 그슬린 짐승들의 눈동자에는 그들이 삶에서 마지막으로 본 조선의 하늘과 적의 얼굴이 딱딱하게 박혀 있었다.

김계희(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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