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4>동산 스토리 ③여성, 주인공으로 서다

"대구 내려다보는 곳에 여학교를 짓다니"…신명학교 결국 방향 바꿔

1930년대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실습 모습. 가사와 김장까지 실습을 했다. (사진제공=신명90년사) 1930년대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실습 모습. 가사와 김장까지 실습을 했다. (사진제공=신명90년사)
신명여학교 본관. (사진제공=신명90년사) 신명여학교 본관. (사진제공=신명90년사)

여자들은 밖에 다닐 때 장옷을 써야 했던 시절, 하얀 저고리에 짧게 자른 머리로 책보를 들고 동산을 오르내리던 여학생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평민이라면 남자조차 꿈꾸지 못했던 배움을, 그것도 코쟁이 서양인 아래서 받아야 하는 여학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수천 년 역사의 장면에서 어쩔 수 없이,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돼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성들은 근대에 들어 겨우 사회 전면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에게 어떤 권리도 주지 않고, 사회 모든 부문에서 차별하던 상황은 근대화의 파도가 닥치고서야 조금씩 달라졌다. 식민지 지배는 여성들의 사회적 처지를 더욱 열악하게 하였지만 그에 대한 반발은 더욱 컸다.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주체로서의 여성을 부르짖고, 생명을 다루는 의료 현장에 여성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는 여성의 가치를 새롭게 받아들였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가정과 사회에 주도적으로 나서도록 만든 건 교육이었다. 칠거지악의 고통, 효녀절부를 강요하던 억압 속에서 딸에게, 손녀에게 몰래 전하던 언문과 내방가사가 교육의 전부이던 여성들에게 신식 교육은 새로운 삶을 향한 출구였다.

대구의 교육기관은 1899년 설립된 달성학교를 시작으로 1900년대 들어 하나 둘 늘어났다. 하지만 대구의 교육여건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었다. 조선 유학의 중심지라는 보수성은 신문물 도입을 최대한 늦추었고 근대교육에 대한 저항도 그만큼 컸다. 1910년 전국에 2천200여개의 학교가 있었는데 대구에 세워진 학교 수는 고작 11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여성에 대한 교육은 더욱 열악했다. 1902년 애덤스 선교사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여성교육기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지만 역할은 크지 못했다. 학생들의 결석을 막기 위해 봄에는 복숭아와 살구, 가을에는 사과나 밤 같은 과일을 줬다. 미국에서 가져온 과자와 아이스크림 등은 학생들을 학교로 끌어들이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배움에 대한 열의보다 먹을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던 당시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1907년 애덤스의 부인 부르엔(Marda Bruen)에 의해 동산 위에 여자중등학교로 신명여학교가 문을 열면서 비로소 여성교육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효성여학교의 전신인 성립학교가 문을 열어 여성 교육의 또 다른 축을 형성했다. 이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배우는 것이 힘이다'는 사상이 번진 건 어렵사리 시작된 여성 교육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됐다.

교육은 여성을 변하게 했다. 할머니, 어머니가 겪었던 여성의 사회적 처지를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사회에서의 역할을 확장시켜갔다. 1919년 3·1운동에 여학생들이 적극 나선 것은 이 같은 교육의 결과였다. 1920년대가 되자 학교에 다니려는 여성이 크게 늘어 지원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4년 대구여자공립보통학교는 모집정원이 180명이었는데 지원자가 500명을 넘었다고 전한다.

◆여학교가 감히 대구를 내려보다니

1907년 10월 23일 오전 10시. 동산의 신명여학교 가교사 뜨락에는 흰 저고리 흰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서 있었다. 첫 입학식이었다. 신명여자소학교 과정을 마친 학생들 가운데 배움에 뜻이 있는 상당수는 서울이나 부산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남은 소학교 졸업생과 경북도내에 산재한 교회 소속 소학교, 의숙 졸업생 등을 모은 게 겨우 12명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학교를 키우려는 노력은 계속돼 1912년 신명여학교는 본관 설립을 준비했다. 이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동산 높이 여학교를 세운다는 소문이 나자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이 건물이 동향이라 대구를 내려다본다는 사실을 두고 시비를 건 것이다.

"공부를 해도 안온한 양지를 가려서 집을 세울 것이지 대구포중을 내려다보는 동산 팔풍받이에다 계집애들의 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무어냐. 양놈들이란 생김생김이 짐승 같으니까 윤리 도덕을 알아야지. 계집애들이 창문을 열고 방정맞게 거리를 내려다볼 터이니 대구의 꼬락서니도 이젠 다 됐어."

동산에 신명학교를 지으면 천복을 받을 수 없어 대구의 명맥이 끊어질 것이라는 헛소문까지 파다한 상황에 이 같은 여론은 학교 관계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대구부에서까지 이를 고려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신명여학교는 결국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고 말았다.(신명90년사)

◆간호사를 양성하다

1925년 동산에는 여성을 위한 또 다른 의미 있는 교육기관이 문을 열었다. 동산병원이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한 것이다. 1910년대까지도 서양 의학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는 크지 못했다. 그러나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병들이 서양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뒤 완치되는 모습이 갈수록 흔해지자 환자 수는 급증했다. 의사나 간호사 몇 명만으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이나 평양에는 간호사 양성소가 이미 설립돼 간호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지만 대구는 그렇지 못했다. 간호사 양성소 역시 서양 의학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가면서 지원자가 늘었다. 양성소에 보내면 학비가 면제되고 기숙사에서 숙식을 제공받는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졸업은 쉽지 않았다. 간호사 양성소의 1928년 첫 졸업생이 1명이고 해방 이전까지 10명을 넘은 해가 한번뿐이었으니 공부가 쉽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1930년 신입생 지원자는 27명. 그 중 10명만이 견습생으로 뽑혔지만 졸업한 학생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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