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비싸도 5만원"…미술계 팔방미인 김점선

왜 그림만 지랄같이 비싼지…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서울. 대단지 아파트 속에서 가장 언덕배기 단지. 현관문이 열려 있어 "계시냐?" 했더니 "들어오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유화가 잔뜩 쌓인 긴 통로를 지나 햇빛이 드는 거실의 창가 쪽에서 화가 김점선은 초록색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고 있었다. "다 그리신 뒤 인터뷰를 할까요?" 물으니 "입은 살아 있어. 시험치는 것도 아닌데 일하면서 실컷 한다 뭐!" 이랬다. 인터뷰는 이렇게 진행됐다. "물어라." "또 다른 거는?" "또 또?" 질문을 퍼붓고 거침없이 응하며 김점선은 그림을 계속 그렸다. "도심 속에 살고 계실 줄 몰랐다"고 기자가 말하자 "작품을 훔쳐가면 안 되잖아. 치안이 잘 된 청와대 인근에서 살고 싶어"라고 말했다.

◆김점선의 예술관

먼저 미술계의 그림값에 대해 물었다. "옛날 유럽의 귀족들은 음악을 듣기 위해 천정부지의 돈을 썼어. 하지만 에디슨 이후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이 만원밖에 안 해. 음악이 민주화, 인민화된 거잖아. 문학에서도 만원이면 괴테를 읽어. 오로지 미술만 지랄같이 비싸잖아. 지금 어떤 문명 세상인데! 그건 도도하고 고고하게 높은 데 있어야 한다는 우리나라 화가의 이기주의와 자기만 몰래 볼 거라며 사가는 상류층의 이기주의가 영합했기 때문이야. 영합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써야해."

그는 유화를 팔지 않는다. 컴퓨터로 그린 디지털 판화만 저가에 판다.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그림을 판화지에 출력해서 만든 것이다. 블로그나 싸이 등 미니홈피에 '펌질'을 해도 아무 상관없단다. 그걸 인쇄해서 팔지만 않으면.

그는 오십견이 찾아와 붓 들 힘이 없자 컴퓨터로 그림을 그렸다. "디지털 판화하니까 김점선이 대중과 영합했다고 예술계가 난리였지. 내 그림은 비싸도 5만원이지만 그것도 비싸. 연세대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했다면 나는 '테크놀로지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외칠거야. 예술을 감상하는데 돈에 대한 공포가 따라가면 안 돼."

덧붙여 신문사의 한 선배가 물어보라는 질문을 슬쩍 던졌다. "당신은 예술 지향이냐, 대중 지향이냐?" 그러자 그녀는 "진짜 나이 많은 꼰대 같은 선배의 질문이네. 매일신문에 그런 선배가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비극! 아직도 그런 질문하나?"

◆화가 된 사연

김점선은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졸업한 뒤 작은 사무실에서 통역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점선아, 일주일 전에는 존재도 몰랐던 놈하고 결혼하란다. 죽고 싶다." 그 말을 듣던 김점선은 "우리가 돼지가? 수놈하고 붙어먹으라면 붙게! 오냐, 같이 죽자." 친구는 동반자살을 함께 할 친구 여섯을 모으고 독약 6인분을 구했다. 다음날 죽기로 하고 죽기 전에 자신의 한(恨)에 대해 말하자고 했다.

"그날 밥을 먹는데 밥이 목구멍에 넘어 가겠나? 내일 죽는데. 엄마하고 동생들 얼굴 보고 누웠는데 잠도 안 오는기라. 새벽이 됐다. 나 죽기 전에 그림 한번만 죽도록 그려보고 싶더군. 어릴 때 잘 그렸거든. 그 다음날로 입시미술학원에 등록해 데생을 했다. 그 친구들? 나 안 와서 다들 자살 안 했다. 잘 살고 있다 히히."

그렇게 몇개월을 죽도록 그림을 그렸다. 다음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해 백남준과 이우환이 심사한 파리 앙데팡당전에 한국 대표로 뽑혔다. 이야기는 친구로 흘러갔다. 그의 '친구론'은 간단했다. "친구는 남들이 다 알아주는, 훌륭해서 다 알려진 뒤에 몰려오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드러나지 않는 '잠재태'(잠재력이라는 의미로 들렸다)가 있는데 그걸 알아보는 게 친구다. '니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말해주는 게 친구다. '자뻑'하게 도와주는 게 친구다." 그래서 그때 장 지지겠다던 친구들하고는 안 논단다. 잠재태를 몰라봤다나.

◆남편 떠난 뒤

그녀의 글 속에는 남편이 자주 등장한다. 남편은 아주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등장한다. "우리 남편? 그 자(者)? 백수야 백수! 우리나라 사람은 백수하면 나쁘게 생각하재? 유럽이나 중세, 이조시대에 선비들의 귀족생활이 다 백수 아니가? 귀족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야. 내 남편이 그랬어. 백수는 귀족이고, 인간 본연이야. 머리에 축적해 놓은 결과로 놀면서 노동 하나 안 하다가 남들 365일 일할 때 그 10분의 1을 일하고 그들의 10배를 버는 거. 그게 백수야."

김점선과 아들은 남편이자 아빠가 백수임을 영광으로 알았단다. 부부 둘 다 백수면 굶어 죽으니까 자신은 속물다운 기술을 습득해 돈을 벌고 순수 백수인 남편은 평생 놀았단다. "어릴 때 내 사주를 보니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려도 무조건 유명해진단다. 내 운명을 시험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거지하고 결혼했어. 어차피 죽으려고 하다 화가가 됐고 평생 그림만 그리면 되니까." 대부분 여자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렸다면 자신은 겨울날 추운 냇가에서 기저귀를 빠는 삶을 선택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이었다. 남편은 몇 년 전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대한민국 엄마들에게

김점선의 서른살 먹은 아들은 지금 미국에서 컴퓨터관련 박사학위 공부 중이다. 그녀는 그만의 방식으로 아이를 키웠다.

"내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 안 들이고 대학(성균관대)에 갔을 거야. 과외 한번 안 해보고, 고3 올라가는 겨울방학에도 용평 가서 스키 탔거든. 입학원서도 한장 사서 들어갔어. 아이는 박사 과정 때문에 미국에 갔다. 그런데 하루는 메신저로 말을 걸더라. 박사과정 스터디를 하는데 지가 배우지 않은 커리큘럼이 있었던 거야. 내 아이는 학문적으로 정직하거든. '엄마, 내가 다시 학부로 돌아가 1학년 1학기부터 시작하면 엄마가 남들한테 창피하지 않을까?' 그러대. 그래서 내가 그랬다. 네가 태어나서 네 입에서 들은 말 중에 가장 훌륭한 말을 했다. 10년이고 20년이고 네 공부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이게 성공 아니가? 이 마음, 이 자세. 자기가 모르는 분야로 내려가서 처음부터 공부하겠다는 이 열정, 이게 바로 성공이야."

그녀는 예전에 한 중앙일간지에 자신의 육아법을 연재했다가 안티팬으로 인해 접어야 했다. 고3인 아들을 두고 아직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육아법이냐는 항의가 많았단다.

"대한민국 웃기제? 고3 두면 육아법 쓰지 말란다. 이제부터 엄마들을 좀 깔볼게. 나는 저거가(엄마들이) 어릴 때 쎄빠지게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에 만족 못 하니까 아이들을 들볶는 거야. 그 어린 아이들의 향학열이란 게 얼마나 웃기냐? 중·고등학교 때 공부 안 중요해. 진짜 공부는 서른을 넘고, 마흔, 쉰, 예순이 돼도 쉬지 않고 하는 것이야. 어릴 때 공부에 초를 쳐서 맛을 없애고 진 빠지게 하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책을 내던지는 게 지금 교육의 꼬라지야. 엄마가 지적으로 책을 읽고 소설, 잡지, 고등수학 닥치는 대로 공부하면 아이들에게 '나가 놀아라' 해도 누가 나가 놀겠냐? 공부는 안 하고 저하고 '반대인간'을 만들려고 하니까. 지가 공부 좋아했으면 지금도 해야지. 아이만 들볶잖아."

◆암이 가져다 준 것들

그녀는 지난해 난소암을 앓았다. 수술을 했고 지금도 항암치료 중이다. 그 많던 머리숱이 왕창 빠졌다. 그래도 빗질은 여전히 하지 않는다. 성질대로 머리카락은 하늘 위로 향해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뒤 병원에 입원했는데 서울 야경을 보더니 이러더라. '서울도 아름답네.' 그리고 말하는 기능이 없어졌고, 죽었어. 그 말이 유언이 된 거야. 때로 병이 도움이 되는 게 뭔지 아나? 거기에서 살아나오면 나머지들이 굉장히 후레쉬하게 선명해져. 여행보다 나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켤 수 있다는 쾌감, 작은 풀 한 포기의 기적을 일에 쫓기는 사람은 몰라. 병은 멋있는 거야. 병에 걸려봐야 아름다움을 알아. 그 전에는 허욕에 쫓겨. 큰 집, 큰 냉장고, 더 높은 곳에 시달리다가 병에 걸리면 살아온 게 별거 아니구나, 들의 잡초가 이렇게, 초록색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느껴."

그녀는 가족들과 연락하지 않는다. "우리 언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이뻤어. 나는 못났지. 그런데 병에 걸려 생명력을 잃고 젊을 때 내 모습을 보니까 경이로움이 있는 거야. 내 매력을 아파봐서 알아봤어. 자기가 못생겼다고 평생을 알고 살았는데 병에 들고 그게 세상의 농간이었음을 알았어. 내가 키도 크고, 머리숱도 많고, 아파보니 빛나는 시커먼 숱 많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루는 남편이 친구를 데려온다는 거야. 그래서 집에서 내가 직접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어. 지금도 못났지만 더 못나게 만들어 마누라 자랑을 못하게 해야겠구나. 내가 아름답게 분칠하고 파티 가고 자랑하고 다니면 예술할 시간이 어디 있냐? 예술가는 절대고독이 필요해. 절체절명의 혼자 있는 시간! 결혼해서 예술하는 시간이 있겠냐? 악독해야 해. 악독하지 않으면 예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그림을 10시간 그리려면 생각을 맑게 조용하게 한 뒤 그리고 싶어지면 그리는 거야. 일상적인 사교나 외교적인 생활은 다 포기해야 해. 김치를 가지고 날 만나러 오면 그 김치를 면상에 던져야 해. 김치를 핑계로 우리집에 못 오게. 방해받는 게 싫으니까. 외로워서 눈까리 팅팅 붓게 울어도 너거는 안 만난다고 생각해야 해."

이 즈음 기자는 예술가가 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도 그림 그려."

그는 지난해 병상에서 동화책을 그렸다. 할머니가 어릴 때 들려준 얘기를 동화책으로 엮었다. 세편을 냈는데, 네번째 작품부터는 작가가 글을 쓰면 자기가 그림을 그려주는 식으로 105권까지 내고 싶다고 했다. "입원해 있으니까 얼마나 심심하냐. 기획사에서 이때다 싶어 동화책 내자고 졸라대더라고. 병원에서 스케치하고 컴퓨터에 들러붙어 그렸지. 암에 걸렸다고 그러는데 실제적인 힘은 더 세진 거야. 무지 많이 먹고 무지 많이 자고, 오십견은 다 나았어."

기자도 어릴 때 그림을 그렸고 많은 상장을 받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요즘은 생애가 길잖아. 100살까지 살 거잖아. 100년 동안 기자생활 못 하잖아. 너도 그림을 그려!"

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 김점선은?

1946년 개성 출생. 경남여고·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대학원. 대학원 입학 첫해(1972년)에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로 선정돼 화려하게 등단했다. 1977년 결혼해 1979년 아들을 낳았으며 찢어지듯 가난한 삶 속에서 매일 매일 그림을 그렸고, 굶어죽기 직전에 그림이 팔려 살았다. 1983년 첫 전시회를 연 뒤 20년이 넘도록 개인전을 60차례 열고 있으며 2002년부터 디지털 판화전도 개최했다. 1987, 1988년에는 예술평론가협회 미술부문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됐다. 1998년에는 '나, 김점선'이라는 자기 이야기를 펴냈다. 이후 붓을 놓지 않으면서 '10㎝ 예술' '김점선 스타일'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성인용이야' 등을 출간했고, 최근에는 동화책 '앙쾡이가 온다' '큰 엄마' '게사니'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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