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기의 필름통] 더 파더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한 노인이 오페라 '킹아더'의 장엄하며 힘찬 아리아를 듣고 있다.

그를 찾아온 딸 앤(올리비아 콜맨)이 창문을 활짝 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아무 일 없었어"라고 답한다. 노인은 간병인을 쫓아낸 이유가 "내 시계를 훔쳐갔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딸이 런던을 떠나 파리에서 살 것이라고 하자 노인은 "난파된 배에서 쥐가 도망치듯 떠난다"며 화를 낸다. 그리고 딸은 집은 나선다.

"나 혼자 잘 할 수 있다"며 간병인을 세 번째 쫓아낸 괴팍한 노인과 딸의 대화. 영화가 시작된 후 10분 정도의 이 시퀀스는 여느 부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곧이어 이 모든 시간과 기억이 헝클어져버린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내 기억이 맞는가? 여기는 어딘가?

7일 개봉한 영화 '더 파더'(감독 플로리앙 젤러)는 치매 노인의 머릿속을 97분 동안 헤집으며 관객을 숨 막히게 하는 영화다. 무슨 상황인지 모를 때는 긴장감이, 상황을 알고부터는 공포심이 가슴을 짓누른다. 그 공포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슬프고도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우아한 클래식을 듣는 이 고상한 노인은 한때는 울창한 나무였을 것이다. 딸 둘에 아내도 있으며 직장에서 인정받고 유복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비친다. 사고로 둘째 딸을 잃었지만, 그의 삶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나이가 들어 불편하지만 아직 신체도 건강한 편이다. 문제는 치매가 온 것이다.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영화는 첫 시퀀스가 끝난 이후 문을 왈칵 열어 관객을 노인의 뇌 속으로 집어넣는다.

앤이 떠난 후 오페라 '노르마'의 마리아 칼라스 아리아를 듣고 있는데 문소리가 난다. 다가갔더니 낯선 남자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누구냐?"고 묻자 남자는 앤의 남편 폴(마크 게티스)이라고 말한다.

"10년이나 됐는데 모르냐?"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곧이어 앤이 집에 오는데 그녀(올리비아 윌리암스)는 조금 전 그 앤이 아니다. "앤은 어디 갔느냐"고 묻자 그녀는 "저 여기 있잖아요. 방금 쇼핑 보고 왔어요"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무슨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 노인의 눈빛은 당황하고 황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사람이 내 딸인지, 딸이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손목시계를 어디에 뒀는지 모든 것이 모호하다. 기억도 지워지고, 순서마저 뒤죽박죽이다. 이젠 내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더 파더'는 치매에 걸린 노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심리 드라마다. 감독 플로리앙 젤러는 이 희곡의 원작자로 2012년 연극으로 선보였다가, 본인이 각색해 첫 영화 연출까지 맡았다. 첫 영화지만 밀도 있는 연출에 안소니 홉킨스라는 걸출한 배우와 조연들의 호연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연극의 탄탄한 스토리가 영화로 옮아오면서 더욱 풍성해진다. 연극처럼 노인의 아파트가 주된 배경이지만, 배우들의 얼굴에 비친 섬세한 감정의 변화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영화 '더 파더'의 한 장면

'더 파더'는 올해 아카데미상에 작품상, 남우주연상(안소니 홉킨스), 여우조연상(올리비아 콜맨),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와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에서 경쟁한다.

안소니 홉킨스(84)는 '양들의 침묵'(1991)에 이어 두 번째 남우주연상이 점쳐지고 있다. 그는 '더 파더'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분노, 당황, 후회, 슬픔, 그리움 등 치매에 걸린 노인의 순간순간 변하는 감정을 놀라운 연기력으로 보여준다.

"내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것 같다"며 흐느끼는 장면은 가슴을 저민다. 안소니 홉킨스는 촬영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고 했다. 노배우마저 감정을 달래기 위해 촬영 후 휴식을 요구했을 정도였다.

'더 파더'는 치매 당사자 뿐 아니라 간병하는 가족의 어려움도 잘 묘사하고 있다. 앤 역할을 맡은 올리비아 콜맨이 이를 잘 연기해주고 있다.

오페라 아리아로 구성된 OST도 격조 높고, 기억의 흐름이 바뀌면서 닥치는 이야기의 구성도 밀도 있다. "시계가 없으면 시간을 알 수 없어"라며 노인은 손목시계에 집착한다. 시간의 기억을 부여잡으려는 행동을 은유하는 것으로 영민한 설정이다.

'더 파더'는 단순한 이야기에 등장인물도 대여섯 명이 고작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모두가 한때는 울창한 나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나뭇잎을 다 뱉어내고 앙상해진다. 이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안소니의 마지막 초상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97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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