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82년생 김지영', 악역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82년생 김지영’을 훨씬 재밌게 감상하는 법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소설 원작 때도 그랬지만 영화 개봉 전부터 성 대결 갈등 양상으로 인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평점테러까지 이어졌던 영화는 그러나 개봉과 함께 그 반응이 사뭇 바뀌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걸까.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적지 않은 무게감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그 원작 소설이 가진 적지 않은 무게감을 부담으로 안고 제작됐다. 2년 만에 백만 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 조남주 작가의 원작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순전한 소설적 성취라기보다는 이 소설이 던지는 성차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만든 신드롬에 가까웠다.

MBC 'PD수첩'의 메인 작가로 일하다 육아문제 때문에 전업 작가가 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우리네 사회가 그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했던 무수한 사례들이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가족사와 또 사회 경험을 통해 그려졌다. 여성들은 일제히 공감을 표했고, 이 소설은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했던 젠더 문제를 상징하는 작품처럼 회자됐다. 한 작가가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던진 목소리는 그렇게 비슷한 현실을 경험한 여성들의 공감대를 통해 신드롬이 됐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아시아권 전체에서도 벌어질 신드롬의 예고였다는 점이다.

2018년 12월 일본에서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은 이틀 만에 아마존 재팬 아시아문학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2019년 8월까지 13만 부 이상 판매됐다.

지난 9월 중국에서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반응도 심상찮다. 10월16일 기준으로 중국 최대 규모 온라인 서점인 당당에서 소설 부문 1위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중국의 소설에 대한 반응 중에는 "동아시아에 살아가고 있는 거의 모든 여성들은 김지영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볼 것"이라는 흥미로운 댓글들도 있었다.

그만큼 젠더 문제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그간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억압된 삶을 살아온 아시아권에 보편적인 공감대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게감은 일반적인 대중을 상대해야 하는 영화로서는 고스란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실제로 영화는 영화화가 결정되던 2017년부터 지금껏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2018년에 정유미가 주연배우로 결정됐을 때도 비난의 목소리가 배우에게 향한 바 있고, 영화 개봉에 즈음해서는 평점 테러가 이어졌다.

이유는 이 콘텐츠가 남녀 간의 성대결을 통해 갈등을 부추긴다는 것.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부터 쏟아져 나온 선입견과 젠더의식이 성대결을 야기한다는 오인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발목을 잡는 듯 싶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82년생 김지영', 개봉 후 공감으로 돌아선 이유

하지만 영화는 개봉 후 반전을 일으켰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가 평점테러를 할 만큼 성별 갈등을 부추기는 영화가 아니라는 걸 공감하게 되면서다. 사실 이건 젠더 문제에 대한 오인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여성들이 겪어온 성차별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건, 남성들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여성의 불행은 또한 성별을 떠나 우리네 사회 구성원 모두의 불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젠더 문제가 바로 이렇게 어느 한 쪽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가야 하는 문제라는 걸 오롯이 드러낸다.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경력 단절이 된 김지영(정유미 분)이 별 문제 없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에 빙의돼 버리는 정신과적 문제를 얻는다. 이를 알게 된 가족들(남편을 비롯해 엄마, 아빠, 동생, 언니 등)이 그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구성과 내용만으로 보면 사회극이라기보다는 가족극에 더 걸맞다. 실제로도 영화는 가족 간의 과거사가 현재의 결과들과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후회와 화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는 지점은 그래서 여성들이 겪는 공감대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왔던 시절의 가부장적 분위기가 현재 그 결과로서 만들어낸 자식의 비극을 목도하는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이 적지 않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주연 배우 정유미(사진 오른쪽)와 공유 영화 '82년생 김지영' 주연 배우 정유미(사진 오른쪽)와 공유

◆'82년생 김지영'이 악역을 세우지 않은 건

무엇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소설보다 훨씬 담담하게 그려진다. 소설은 마치 르포에 가깝게 당대의 여성들이 겪은 차별의 에피소드들이 김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줄줄이 나열했다. 영화는 그보다 김지영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주변 가족들이 가진 저마다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그 문제는 굉장한 사건을 통해 보여지기보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 우리도 모르게 먼지처럼 누적되어 있는 소소한 차별과 편견, 선입견 등의 디테일들을 통해 그려진다.

김지영이 집안에서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육아의 풍경들을 짧게 보여준 후, 저녁 노을이 퍼져가는 시간 베란다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건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담담함을 잘 보여준다. 성차별의 문제는 사실 특별한 사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상 속에서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넘어가는 그런 것이라는 걸 그 장면이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건 악역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시어머니나 아버지는 시대착오적인 말들을 김지영에게 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악역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악의가 없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들이라는 것. 그건 어쩌면 그 가부장적 시대를 살아왔던 분들이 당연히 감내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그 시대에서도 비극이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공유 분)도 어떻게든 아내를 돕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그 누구보다 그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육아를 전혀 책임지지 않는 사회와 그래서 경력단절 같은 희생을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그 현실 앞에서 남편도 아내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게 된다.

결국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성별 갈등을 부추긴다기보다는 우리네 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을 온전히 떠안고 있는 김지영이라는 인물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며 그 고통을 공감해보는 것이다. 김지영을 둘러싼 남편의 시선과 부모 그리고 남매, 직장 상사와 동료의 다양한 시선으로 그를 들여다보면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는 더더욱 분명해진다. 김지영의 문제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 그걸 이 영화는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김도영(오른쪽부터) 감독과 배우 정유미, 공유 영화 '82년생 김지영'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김도영(오른쪽부터) 감독과 배우 정유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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