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책

 

[책 CHECK] 꽃밭을 서성이는 말들

꽃밭을 서성이는 말들 함명숙 지음 / 다층 펴냄 '이슬 먹은 새하얀 모시 / 이글거리는 숯불에 몸 달구어진 울낭자 / 주름진 모서리 마주보고 잡아당긴 사이를 / 스르륵 사르륵 쓱싹쓱싹 울낭자 지나간다. / 누가 뭐래도 내가 있어야 옷이 맵시가 난다고 / 울낭자 표정 해님처럼 밝다.' -'울낭자' 중에서 이 책은 여성으로서 겪은 수많은 일들을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표현한 함명숙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는 총 64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함 시인은 시집 첫머리에서 "고흐처럼 늘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지난 수십 년간 서툰 언어로 쓴 시들을 바깥에 내보낸다. 억새꽃 들길을 혼자 걷다 들킨 듯 마냥 조심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박재열 시인(경북대 명예교수)은 "함 시인의 시에는 흔히 보는 여인의 고생이나 한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멋과 조금은 낭만적인 여유가 녹아 있다"면서 "시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고 크게 가부장제도의 폐해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만큼 다치지 않은 소녀적 고운 정서가 묻어나온다"고 평했다. 함 시인은 안동 출신으로 '다층'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대구문인협회'국제펜대구협회'대구여성문협 회원, 반짇고리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116쪽, 9천원.

2017-11-04 00:05:00

'이불·샴푸·마스카라…' 화학물질 결합해 독성 만들어…『우리는 어떻게 화학물질에 중독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화학물질에 중독되는가/로랑 슈발리에 지음/이주영 옮김/흐름출판 펴냄 중요한 미팅이 있다. 미리 맞춰놓은 알람에 덮고 있던 이불을 걷는다. 샤워실로 가서 폼클렌징으로 세안하고, 천연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건조한 계절이니 보디로션은 필수다. 기초화장을 하고 마스카라로 한껏 '자존심'을 추켜올린다. 지난 주말 새로 장만한 니트를 꺼내 입는다. 손목과 귀 뒤에 향수까지 칙칙 뿌리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여기에 커피전문점에서 갓 내린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한 잔은 그야말로 패션의 완성이다. 평범한 일상이다. 여기 수명을 단축할만한 어떤 특별한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외출 준비에 걸린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우리는 수많은 화학물질, 그리고 유독물질에 노출돼 있다. ◆화학물질이 뭐길래 뉴스가 나올 때마다 떠들썩하다가도 실생활에선 곧잘 잊히는 존재에 대해 정리한 책이 나왔다. 영양학 권위자이자 프랑스 몽펠리아 대학병원센터 의사인 저자 로랑 슈발리에는 현대인의 삶 속에 건강을 위협하는 독소가 가득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일상 속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에 화학물질이 얼마나 들어 있으며, 우리가 이 물질의 유독성에 어떻게 중독되는지 밝힌다. 책은 화학물질의 정의로 시작한다. 도대체 화학물질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는 뜻이다. 책에 따르면 화학물질은 '질량을 가지고 있고,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구성요소에 친화력을 가진 특별한 개체'로 자연 상태에서도 발견된다. 그래서 살면서 섭취, 접촉할 수밖에 없고, 일정 수준까지는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런 화학물질은 다른 물질과 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든다. 환경호르몬, 살충제, 식품첨가물 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합성 화학물질로 건강을 위협하는 인자로 인식됐다. 이들의 특성은 A+B=AB가 아니라 'A+B=C'라는 데 있다. 인체에 들어온 화학물질이 예상 가능한 형태로 '혼합'되는 게 아니라 유전자, 세포를 변형시켜 신경, 기관을 변형시키고 내분비계를 교란시킨다는 얘기다. ◆실험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저자는 일상 속 대표적인 합성화학물질을 나눠 밝힌다. 색소, 방부제, 유화제, 감미료 등 식품첨가물이 그 첫 번째다. 즉석 수프, 퓌레 등에 들어가는 산화방지제 BHA, 식품 포장에 쓰이는 알루미늄은 각각 내분비계를 교란하고 암을 일으키거나 소화기를 손상시키고 퇴행성 신경장애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인스턴트식품, 각종 가공육, 통조림 등 가공식품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올 8월 유럽에서 비가열 가공육(소시지)에서 E형 간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검출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면서 유럽산 가공육 유통이 올스톱됐다. 대장균 같은 박테리아가 퍼지는 것을 막고자 암모니아 처리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식욕을 돋우려고 색소나 인공향을 첨가하기도 한다. 플라스틱 용기와 식기, 냄비, 조리도구 같은 주방용품에는 비스페놀A나 멜라민, 폼알데하이드가 자주 검출된다. 대부분 열에 약해 유독물질을 내뿜는 물질이다.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물도 마음대로 못 마시는 세상이다. 매연과 흡연은 당연시되고, 조리와 소각으로 발생하는 다이옥신, 고리형 방향족 탄화수소 등도 암 발생 원인이다. 책은 식초, 레몬, 베이킹소다나 소금 등으로 오염물질을 제거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프랑스와 달리 우리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적지만,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은 5%를 겨우 넘는 정도다. 수돗물 불신은 정수기와 생수 판매로 연결되는데, 저자는 생수보다는 수돗물이 낫다고 말한다. 시중에 팔리는 생수는 대부분 페트병에 담겨 있고, 플라스틱은 프탈레이트 등 다양한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형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먹지도 않고 피부에 양보했던 화장품은 어떤가. 자외선 차단을 위한 선크림은 피부암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비타민D 생산을 방해하기도 한다. 매년 바닷물로 흘러들어 간 선크림만 4천t에 달하는데, 이 탓에 전 세계 산호의 10%가 하얗게 탈색된다고 한다. 화장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음식보다 더 해롭기 때문이다. 소화액에 의해 유해물질 일부가 사라지거나 배출되는 음식과 달리 안전성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나노 성분을 포함한 화장품은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세안, 탈취(데오드란트), 보습과 클렌징, 안티에이징, 자외선 차단 등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화장 단계에다 향수, 색조 화장까지. 결국, 답은 유기농이고, 덜 쓰는 데 있다. 화학물질로 범벅된 저가 의류, 방화'내화 처리를 위해 가공을 거친 섬유도 친환경'유기농과는 거리가 멀다. ◆케미포비아에서 벗어나려면 올림픽 수영 경기장에 넣은 소금 알갱이 하나에 불과한 양으로도 충분한 위협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화학물질의 일상 침투는 통제 불능 상태에 가깝다. 편리와 이익을 앞세운 은닉 앞에 무릎 꿇을 수는 없다. 가려서 먹고 운동을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저자는 책 뒷부분에 로열젤리, 오메가3가 풍부한 식품 등을 추천한다. 또 수백 가지 합성화합물질의 이름과 이들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유독물질 가이드를 통해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유해물질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대한민국은 떠들썩했다. 가습기 살균제, 발암 생리대. 살충제 계란, 간염 소시지 등. 스티로폼 컵라면에서 환경호르몬이 나오고, 플라스틱 합성수지 도시락이 열에 약하다는 것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서 이런 위험성은 잊어버리기 일쑤다. 샴푸나 화장품의 뒷면을 일일이 확인하고 물건을 살 수는 없더라도 덜 위험한, 더 안전한 제품을 고르는 현명한 소비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272쪽, 1만 3천원.

2017-11-04 00:05:00

[반갑다 새책] 펭귄도 사실은 롱다리다!

펭귄도 사실은 롱다리다!/ 이지유 지음'그림/ 웃는 돌고래 펴냄 책으로 엮어낸 '동물의 왕국'이다. 평생 오른손잡이로 살아온 저자는 손목뼈가 부러져 몇 달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왼손 그림이 페이스북 팔로어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정교해지는 그림은 훈련과 성장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대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발견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자는 한 줌 안 되는 지식으로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강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에 이로운가, 해로운가를 기준으로 동물의 효용과 존재 가치를 판단하려는 오만한 태도에 경고한다. 바다 위를 나는 동안 한쪽 뇌는 자고, 다른 쪽 뇌가 깨어 있다는 군함조나, 거미줄만 있으면 바다도 건넌다는 거미, 백 살이 넘도록 살며 여든 살이 넘어서도 새끼를 낳는다는 투아타라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완전 바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동물의 이야기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게 구성됐다. 152쪽, 1만2천원.

2017-11-04 00:05:00

[반갑다 새책] 냉전의 과학

냉전의 과학/ 오드라 J. 울프 지음/ 김명진'이종민 옮김/ 궁리 냉전의 잔재는 전 세계를 통틀어 한반도 한 군데에만 남았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 사드까지. 냉전시대는 끝났지만, 이념대립의 무대로, 냉전 과학기술의 시험대가 된 우리에게 냉전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필수다. 미국의 과학사가인 저자는 원자무기부터 달 탐험 경쟁, 인간 게놈 프로젝트까지 패권경쟁을 벌이던 미국과 소련이 국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 과학기술을 조명한다. 저자는 도시계획, 제3세계 개발. 생물학, 경제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룬 성취 하나하나가 두 강대국이 벌인 전투의 장이었다고 말한다. 원자폭탄이 기폭제가 돼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 막이 올랐고, 군산복합체를 통해 입자가속기, 원자로 연구가 착착 진행됐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과학기술에 미국은 열광했다. 하지만 1970년을 전후해 국력을, 국가안보를. 국제적 우호관계를. 경제성장을. 공공선을 선물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과학기술이 희망만을 안겨준다는 생각에 제동이 걸렸다. 책은 냉전의 산물인 과학기술을 살펴봄으로써 과학만으로는 현재의 위기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312쪽, 1만8천원.

2017-11-04 00:05:00

아동문학가이자 동화작가인 서정오 씨가 세상의 교훈과 해학을 담은 우화집 '우화'를 펴냈다.

이 시대 비틀기, 해학 50편…『우화』

간결한 필치로 동심을 묘사한 글이 동화라면, 우화(寓話)는 거기에 교훈과 해학을 곁들인 장르다. 서양 문학에서도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修辭)나 은유의 표현 기교로 '알레고리'(Allegory)라는 장르가 발달했다. 이 책을 쓴 서정오 작가는 아동문학가이자 동화작가다. 전국 곳곳을 돌며 수집한 동화 시리즈가 10권이 넘고 단행본까지 합하면 20권이 넘는다. 방정환 이후 아동문학을 꽃피웠다는 작가가 이번엔 우화집 '우화'를 펴냈다. 저자는 "우화가 세상을 꼬집거나 일깨우려고 만든 이야기니 만큼 나름대로 세상을 '빗대어' 보았다"며 "시대적 교훈과 해학을 녹여낸다는 점에서 그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이 책엔 모두 50편의 글이 등장한다. 주제별로 5부로 나누고 각 부엔 10편의 글을 담았다. 1부 '여우의 충고'는 이 시대 '가진 자들'을 위한 충고를 담고 있다. 돈, 권력, 지식을 독점한 기득권층의 위선을 우화적 필치로 고발했다. 사회 현실을 외면하는 어용학자들에겐 메스를 들이댄다. 2부는 문명 세상에 딴죽을 거는 이야기들을 모았다. 수(數)에 매몰된 세태를 꼬집은 '숫자 나라 이야기' 등이 예화로 등장한다. 보라색 옷을 못 입게 하고 보라색을 쓰거나 입거나 먹는 것도 금지하는 어느 나라 예화를 통해 저자는 획일화된 사회를 고발하고 색깔로 편을 가르고 사상으로 국민들을 갈라놓는 정치를 고발한다. 3부 '백조마을로 간 보리'에서는 일그러지고 뒤틀린 우리 삶과 생각들이 빚어낸 얘기를 모았다. 산신령의 실수로 350년 미래 서울에 떨어진 김 선비가 돈을 신(神)으로 모시는 세태, 시장경제를 '돈 신을 모신 사당', 자동차를 '신분을 나타내는 물건'으로 비유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4부에서는 묵묵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하고 어리석고 뒤처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모았다. 느림보 바우가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한 얘기, 늘 손해만 보는 거래를 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던 농사꾼을 통해 이 땅의 약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5부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패러디한 글로 채웠다. 잘 알려진 원본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현재의 시각으로 다시 정리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등 10편이 수록됐다. 이 책은 저자가 잡지 '개똥이네 집'에 4년 동안 연재했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허명에 매인 권력자들의 횡포, 힘 있는 자들의 욕망, 강자에 빌붙는 지식인들의 말버릇, 가진 자들을 위해 복무하는 법 등은 저자의 예리한 붓끝에서 우화로, 경구(警句)로 정리됐다. 우화의 특징상 많은 주제들이 비틀기, 은유, 꼬집기를 통해 정리됐지만 저자는 이 풍자와 패러디가 누구를 특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각자 삶의 방향이 다르고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굳이 누가 '빗댄 대상'을 묻는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정답'이라고 대답한다. 경북 안동 출신인 저자는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어린이도서연구회에 몸담고 있으며, 옛 이야기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저서로 '옛 이야기 들려주기' '옛 이야기보따리' 시리즈(모두 10권), '팥죽 할멈과 호랑이' '정신없는 도깨비' '옛 이야기 들려주기'가 있다. 275쪽, 1만3천원.

2017-11-04 00:05:00

김소운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김소운의 '조선민요집'과 '한류'

1928년 일본 도쿄의 어느 늦은 저녁, 조선인 김소운이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집을 방문한다. 손에는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김소운은 스물두 살로 도쿄 노동판을 떠도는 노동자였고 기타하라 하쿠슈는 마흔네 살로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일본 최고 시인이었다. 두 사람은 초면인데다가 약속이 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기타하라 하쿠슈는 건강이 좋지 않아 모든 모임을 취소하고 쉬고 있었다. 스물두 살 조선 청년의 무례함을 기타하라 하쿠슈는 패기와 열정으로 느꼈던 것일까. 만남은 이루어졌다. 허름한 복장의 김소운이 보따리에서 꺼낸 것은 고생스럽게 채집한 조선민요 가사 하나하나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기록한 원고였다. 원고를 훑어보던 기타하라 하쿠슈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는 "이처럼 멋진 시심(詩心)이 조선에 있었네요"라는 찬탄이었다. 기타하라 하쿠슈는 자신이 속한 유명 시 모임에 김소운을 소개했고, 김소운이 채록한 조선민요 출판을 주선한 것은 물론, 서문까지 써주었다. 식민지 조선의 민요를 모은 '조선민요집'(1929)은 이렇게 일본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선민요집'은 말 그대로 조선 서민들의 노래를 수록한 책이다. 그리운 임이 오는 줄 모르고 잠이 든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담을 넘어 여인과 함께 누웠지만 너무 짧은 시간 탓에 제대로 회포를 풀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등, 남녀 간의 은밀한 사랑이 주된 내용이었다. '남녀상열지사'를 주제로 하고 있어서인지 민요를 채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인 노동자 집단 거주 지역을 걸어다니면서 노래 한 곡을 부탁해도 누구도 이 '쌍스러운 노래'를 불러주려고 하지 않았다. 김소운은 포기하지 않고 비 오는 날이면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동네에 가서 그들에게 두고 온 고향의 노래 한 곡을 부탁했다. 갠 날에는 일 다녀온 노동자들이 피로에 지쳐 노래 따위 할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김소운이 민요나 채집하고 다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열세 살 무렵 부모도 없이 일본으로 흘러들어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 혹은 조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김소운의 열정과 집요함이 없었으면 '조선민요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소운은 '조선민요집' 이후에도 조선 근대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조선시집' 등을 발행하는 등 조선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을 다했다. 김소운은 일본에 조선 문화를 소개한 최초의 문화기획자이자 최초의 한류 조성자였다. '조선민요집' 발행으로부터 90년이 지났다. 밤늦게 보따리를 들고 조선 문화 소개를 위해 일본 거리를 헤매던 때와는 많이 다른 시대가 왔다. 일본 젊은 세대가 한국 아이돌 그룹에 열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한국 사극에 빠진 일본 기성세대를 위해 알기 쉬운 한국사 연표까지 일본어로 출판되었을 정도로 한류는 일본 사회에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전파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한류' '한류'를 목청껏 외치는 대신 차분하게 우리 대중문화의 힘과 한계를 되짚어볼 때이다.

2017-11-04 00:05:00

[책 CHECK) 소농의 공부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 비전문 분야에서 서툴지만 정성껏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손으로 벌레를 잡고, 직접 천연농약을 만들어 사용하는 텃밭농부도 한 예다. 자기 전문 분야의 일을 통해 효율적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채소를 구입하는 대신, 직접 농사를 지음으로써 불편과 비효율을 생활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왜 대량생산과 전문화의 편리함과 효율을 일부러 외면하고, 생산성이 낮고 불편한 방식을 생활로 끌어들이는 것일까. 책의 '서문'은 지은이가 말하려는 바를 함축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요즘처럼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 없었다. 집집마다 돼지와 소 한두 마리, 닭 대여섯 마리를 키웠다. 어떤 집에서 잔치나 제사를 위해 돼지나 소를 잡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까닭에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 날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서 돼지를 잡는 날 먹었다. 겨울에도 여름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요즘과 달리 봄채소는 봄에, 여름 과일은 여름에 먹었다. 돼지고기 국이 저녁 밥상에 올라오는 날이면, 나는 그날 누구네 돼지가 삶을 마감했는지 알았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로 돼지를 잡았으며, 돼지를 잡는 데 어떤 아저씨들이 수고했는지도 알았다. 돼지고기 국을 앞에 놓고 나는 한 생명의 탄생과 죽음, 여러 사람의 수고와 아침저녁으로 돼지죽을 날랐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자주 돼지고기를 먹는 내 아들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는 못한다. 내 아들에게 돼지고기는 엄마가 돈을 지불하고 마트에서 구입한 상품일 뿐이다. 나는 내 아들이 돼지고기를 먹을 때마다 깊은 상념에 잠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 공장 노동자의 피로한 얼굴을 떠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겨울에 여름 과일을 먹는 것이 죄악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無)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문- 중에서. 이 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전문화 덕분에 인류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됐음에 감사하는 한편, 그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파트 주차면 일부를 텃밭으로 조성한 대구 침산동 화성 2차 아파트, 대구시 수성구청이 운영하는 장애인 행복텃밭,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깊이 참여하는 수성구 시지의 '씩씩한 어린이 집', 서울시 도봉노인복지관이 시행하는 '꿈에 Green(그린) 텃밭' 등은 편리와 효율을 일부러 외면하고 불편과 비효율을 생활로 끌어들인 사례다. 불편과 비효율을 통해 그들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고 있다. 244쪽, 1만2천원.

2017-10-28 00:05:01

신고리 5, 6호기 공사현장.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탈(脫)원전…그 후엔 어떻게?

한적한 마을. 원자력 발전소 덕분에 먹고산다고 믿는 주민들이 사는 이 동네에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한다. 낡은 시설, 도사린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안전 불감증으로 원전의 상태가 위태로워진다.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까지 겹쳐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앞에 정부는 무기력하다. 마땅한 대책 없이 컨트롤타워도 마비되면서 방사능 유출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발전소 직원들은 뒤늦은 대피령에 탈출하려는 주민들로 아비규환이 된 마을에 남아 고군분투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판도라'의 내용이다. 허술한 전개와 과장된 설정에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불러온 쓰나미가 덮치면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의 기억이 생생한 관객에게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올 5월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도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고리 1호기 가동 영구 정지 기념식에 참석해 '탈핵'탈원전 시대'를 선포했다. 한 달 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중단 여부에 관한 여론 수렴을 위해 출범한 공론화위원회는 지난 20일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재개하되 탈원전 정책은 지속한다'는 최종 권고안을 발표했다. ◆원전 포퓰리즘? 탈핵'반핵론이 커질수록 에너지 정책의 급전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책 '탈핵비판'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하면서 우리 원전을 멈춰 세우려면 핵 대피 민방공 훈련이라도 실시해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신문기자 출신인 이정훈 외 33명이 썼다. 책 기획자는 책 출간을 위해 원고를 청탁하자, 2명을 제외한 모두가 흔쾌히 수락을 했다고 밝혔다. 불이익을 두려워한 5명은 '무명씨'로 이름을 감췄다. 책은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에서 시작한다. 자원 빈국, 에너지 섬인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의 역사를 개척하고, 산업 발전을 견인한 고리 1호기의 '퇴역'을 앞두고 장문희 교수는 탈핵 선언을 비판한다. 글에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교차해 실은 두 글은 대조적이다. 하나는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이고, 다른 하나는 고리 1호기 기공'준공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연설문이다. 수력'화력 발전을 대체할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1971년과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라는 대안이 더 생긴 2017년은 상황이 다르다. 국민의 자각도 다르다. 그럼에도, 책은 원자력 발전의 효율에 집중해 50년 세월을 간과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주장만을 펼치는 건 아니다. 탈핵과 탈원전을 필두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꾸겠다는 문 대통령의 공약이 민주적인지, 또 현실적인지 조목조목 따진다. 탈원전은 국가 에너지 정책이므로 대통령의 한마디가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의해 실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원자력 진흥과 육성, 시설 설치와 관리'감독'배상에 관한 법률 등 원자력에 관한 수많은 법률이 그랬듯, 탈원전도 법의 테두리에서 추진돼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성에 기초한 타협과 협의의 기구지만, 포퓰리즘의 우려를 안고 있다. 저자들은 탈원전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전문가가 아닌 집단에 맡김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무력화하고 책임을 회피할 출구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혼란만 더할 탈원전 정책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고리 1호기가 폐쇄되기 전인 지난해 1년간 원자력 발전량은 20만7천890GWh로 전체 연간 발전량의 37.5%를 차지했다. 저자들은 탈원전과 신재생을 택하면서 탈석탄을 하지 못한 독일을 예로 들며 탈원전이 오히려 환경친화적이라고 말한다. 또 현재 수준처럼 LNG와 대체 에너지 발전소 가동률이 20%대에 머무는 한 전기요금 폭등은 불 보듯 뻔하기에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줄 것이라고 경고한다. 탈원전 정책의 비용도 만만치 않다. 신규 건설 계획 폐지에 따른 매몰비용은 둘째치고라도 신재생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까지 연간 19조원 상당의 LNG를 수입해야 한다. 탈원전이 이뤄지면 원전 수출의 길이 막힌다. 책은 쏘나타 100만 대 수출과 맞먹는 효과를 낸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는 기적으로 끝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로 건설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도도 추락한다고 이야기한다. 계속 원자력 기술을 개발하는 다른 나라에 밀려 수출의 길이 막히고, 대체 발전량이 에너지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면 혼란이 더욱 가중될 것으로 예측한다. 저자들은 원전이야말로 탄소 배출 감축,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답이라고 입을 모은다. 탈원전 정책이 아니라, 안전한 원자로가 원전 강국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선을 넘은 북한의 핵 도발에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필요성을 역설한다. 핵에는 핵으로 대응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핵보유국이 될 수 없는 사정을 고려해 원자력추진잠수함이 필요하다는 것. 원전이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내 집 앞 원전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대책 없이 탈원전을 하겠다는 정부에 대한 비판 대신 대안이 담겼으면 어떨까 싶다. 책에는 경주 지진 이후 계속된 지진 불안, 원전 부품 납품 비리, 격납고 부식 및 부품'시설 노후화 등 가동 중인 원전 관리에 대한 제언이 빠졌다. 일방적인 탈핵도, 조건 없는 탈탈핵도 석연치 않은 이유다. 304쪽, 1만7천원. 이지현 기자 everyday@msnet.co.kr

2017-10-28 00:05:01

대지라고 읽고, 생명·어머니라고 부르다

얼마 전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엄마, 엄마, 엄마'라고 땅 저편으로, 하늘 높이 외쳐 부르면 더 큰 그리움이 저만치서 돌아오는 날들이다. 자식과 가족을 위한 희생을 감내하며 사셨던 어머니는 나에게 바르게, 잘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목표였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짐작 속에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어머니란 하늘이자 땅이자 세상이자 우주였다. 이런 까닭에 『대지』를 왕룽의 삶보다 그의 부인 오란의 삶에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노예에서 못생겼다는 이유로 처녀로 남아 농부 왕룽의 아내가 되고 여자로서보다 농부의 아내로서 땅과 노동에 매달리는 그녀에게서 우리 어머니 세대를 연상하게 된다. 오란은 말이 없고 부엌살림은 물론 살뜰하게 아버지를 모시고, 밭일도 잘하며, 자식을 낳아 번성한 가족을 일구었다. 왕룽과 오란의 땅에 대한 사랑과 애착은 가치의 불변함에서 오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란이 왕룽과 함께 생산을 했다면 작은 아버지네와 롄화, 그녀를 돌보는 토츄엔, 그의 자식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왕룽의 재산과 곡식을 축내는 인물들이자 땅의 의미를 왜곡하는 인물들로 여러 갈등을 빚어내고 있다. 그의 아들 세대는 땅의 소중함을 저버리고 사치와 환락으로 허물어진 황부자 집의 전철을 밟아간다. 청나라 말기부터 중국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농부의 삶을 그린 『대지』는 자연과 여러 역경을 딛고 대지주가 된 왕룽의 땅에 대한 애착이 담긴 작품이다. 중국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노예 제도, 여성의 지위, 처첩 제도 등 가족 제도, 사회 제도와 변발, 전족, 시장 풍경, 인력거 등 중국의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오란을 통해 또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이 겪은 고난과 인내의 삶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지은이 펄 벅(1892~1973)은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열여덟 살까지 보냈고 1930년 초까지 중국에 살면서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다. 펄 벅 재단을 통해 전쟁고아 혼혈 사생아를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과의 인연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박진주라는 이름도 갖고 있는 그녀는 여러 봉사활동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왕룽의 일대기이기도 한 『대지』는 성실, 고난, 풍요, 자식에 대한 사랑, 욕심, 만족, 욕망, 질투, 체념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감정이 잘 버무려져 있다. 인생이란 질문에 해답을 찾거나 혹은 그 질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을 왕룽의 인생사에서 엿볼 수 있다. 사상을 덧입지 않은 중국인다운 인물들, 중국의 시장과 들판 풍경, 생계를 이어가는 서민들의 보편적 삶을 읽어낼 수 있는 생활사 소설이기도 하다. 대지는 어머니이자 생명이다. 반면 제도와 정치가 서민에게 밥을 먹여주고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져본다. 변하지 않고 생산하는 땅의 의미가 재산으로서의,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만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땅을 일구고 가꾸는 노동과 그 보답으로서 생산의 소중함과 땅의 가치가 그 자체로 오롯이 인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을볕 아래 익어가는 벼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들판 사이를 걸으며 엄마 품을 느껴본다.

2017-10-28 00:05:01

망국의 위기…현실과 이상 사이 다른 길 걷다

동양 문명의 오랜 관성 속에서 평온한 세월을 영위하던 조선은 19세기 거센 서양문명의 파도 앞에 낙엽처럼 흔들렸다. 문명 충돌과 국권 침탈, 망국을 넘어 망천하의 위기를 맞은 조선의 선비들은 여럿으로 갈렸다. 상투와 도포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선비가 있었는가 하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선비도 있었다. 개화와 개혁에 전념해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이 선비의 본분이라 여겨, '친일 매국노'의 오명을 감수한 선비도 있었다. 유교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현실 또한 외면하지 않으며 쇄신의 길을 모색한 선비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뒤엉키고 휩쓸리며 비틀비틀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이 책 '최후의 선비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신념으로 서양을 온몸으로 반대한 최익현부터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전우, 조선을 개혁하는 것이 선비의 지상 과제라고 생각했던 김옥균,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황현,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 유길준, 1905년 을사조약문에 대한제국 대표로 이름을 남긴 박제순, 세상을 '아(我)와 비아(非我)', '소아와 대아'의 대립으로 보았던 신채호, 불굴의 독립투사 이육사 등 선비 20명의 삶을 이야기한다. ◇"서양인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다" 최익현의 근심은 '더러운' 서양 문물이 조선의 강토를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 문물에 대해 극단적인 배척을 주장하면서, 1866년 75세의 노구에 병든 몸을 이끌고 궁궐 앞으로 나와 '척화'를 외쳤다. 도끼를 지고 궐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뜻을 밝힌 상소문(持斧伏闕斥和議疏:지부복궐척화의소)은 그의 염려를 절절하게 토해낸 글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곧 서양이며, 서양인은 삼강오륜도 모르니 곧 사람 탈을 쓴 짐승이나 같다. 사람은 사람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놀아야 하는데 이제 강화하고 개국한다면 기(氣)가 이(理)를 이기는 것이며, 사람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조선선비 최익현에게 서양과 강화는 한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외세를 받아들이느니 세상을 버리겠다. 전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크게 통탄하며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분개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섯 역적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請斬五賊疏: 청참오적소)'를 올렸다. 그는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했다. 황현은 나라가 외세에 먹혀들어가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천분(天分)은 글 쓰는 일에 있으며,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글을 쓰는 것이 선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국권 상실의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절명시'(絶命詩)를 쓰고 자결했다. 그는 목숨을 끊으면서도 "이 행동은 개인의 뜻일 뿐, 충성이 아니다"고 했다. ◇ 군주에 불충하고, 경전에 불순했던 선비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한다. 그러려면 경장(更張:부패한 제도를 개혁함)해야 하고, 경장하려면 개화의 법을 세워야 한다. 개화의 모델은 일본이다.' 김옥균의 개화사상이다. 그는 급진 개화파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볼모로 삼고 국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실행했다.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이 그것이다. 경장이라는 목표 아래 그는 군주에게 불충했고, 경전(經典)에 불순(不順)했다. 그런 인물을 선비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나 김옥균은 기회주의적 모리배들처럼, 자기 일신(一身)의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경장'이 중요했다. 어쩌면 일본을 등에 업고 턱도 없는 쿠데타를 벌인 친일 몽상가였는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 이완용이 친일파 대명사가 된 까닭 '친일파'의 대명사처럼 낙인찍힌 인물은 이완용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7일 경운궁 증명전에서 을사조약에 대한제국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완용이 친일파의 대명사가 됐을까. 박제순은 오랫동안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며 나라를 말아먹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의 순간, 그는 주저했다. 오히려 저항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종용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맞장구를 치며 조약장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이완용이었다. 그가 친일파의 대명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박제순은 나약한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책임을 회피하고 고개를 숙이며 평생을 살았다. 26세에 서기관으로 중국 톈진에서 근무했고, 7년 뒤에는 전권대신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5개국을 순방했다. 36세였던 1893년 당시 청나라의 떠오르는 별 위안스카이와 청의 원병을 두고 단독 회담했다. 1899년에는 전권대신으로 청나라와 '한청통상조약'을 맺었다. 대한제국의 외교사령탑이었다. 그가 그처럼 외교에 빼어났던 것은 뛰어난 어학실력뿐만 아니라 유연성 덕분이었다. 그의 약점인 나약함에서 비롯된 유연성이었는지도 모른다. ◇ 유교의 경장과 구신(救新)을 모색한 선비 구한말 선비들 중에는 개화를 일절 거부하고 절의를 위해 죽음을 택하거나 세상과 연을 끊어버린 사람, 개화에 전념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라 여겨 매국노라는 오명을 감수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유형의 선비들이 나타났다. 유교정신을 계승하되 사회적'시대적 현실 또한 외면하지 않으면서 유교의 경장과 구신(救新)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대표적 인물이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난 이상룡이다. 이상룡은 '민간단체를 잘 수립하고 잘 운영하는 것이 구국과 경장의 급선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가야산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1907년에 전통 예교와 신식 학문을 교육하는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에 대한협회의 안동지회를 설치했다. 그는 병학 연구에 골몰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승리하려면 사람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신흥무관학교를 꾸려 그 병력으로 한반도의 경찰서, 면사무소, 악질 친일파의 집 등을 습격했다. 이상룡은 유교를 버리지 않으면서 긍정과 포용의 자세로 새 시대에 임했던 최후의 선비였다. ◇ 한마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살다 떠난 선비 심산 김창숙은 국내에서 독립운동'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장지연'남궁억'오세창 등이 주동해 설립한 대한협회에 가입하며, 경북 성주군에 지회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중국에서 쑨원을 만나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홍콩에서 '한국독립후원회'를 만들고 의연금을 모금했다. 광저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신문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걷는 등의 일에 힘썼다. 김창숙은 엄격하고 맹렬한 사람이었다. 불의에 대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비타협적이었고,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찮다고 여기는 일(자신의 외모, 지위, 재산)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마음으로 평생을 산 선비였다. 김창숙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1879년 7월 경북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오랜 감옥살이와 밤낮으로 이어진 고문에도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태산처럼 굳건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 글로벌 표준만 추구하는 현대…선비 없는 세상 북송(北宋)의 범중엄(范仲淹)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제시한 인간상, 즉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기리라'는 정신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과 한국 선비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지배 수단은 칼과 총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에서는 선비들이 붓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조선과 중국이 민법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며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지은이는 "동양의 정신이나 전통의 가능성이 무시되고 오직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같은 시세에 따라 선비들은 사라졌다. 선비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떠한가. 유학이 예전처럼 유일한 삶의 법도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큰 가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 가치가 인간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고 말한다. 368쪽, 1만6천원. ▷ 지은이 함규진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있다.

2017-10-28 00:05:01

[반갑다 새책] 도시로 이주한 농민공 현실

농민공(農民工). 호적상으로는 농부지만, 도시로 이주해 일하는 중국 노동자를 일컫는 말이다. 3억 명에 육박하는 이들은 도시의 공장에서 일하지만 공인(노동자)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취업에서도, 임금에서도, 심지어 교육'의료'주택 등 사회보장제도에서도 배제된다. 이 책은 중국의 사회학자 려도가 '신노동자' 연구시리즈로 국내에 처음 내놓은 책이다. 중국 '농민공'을 '신노동자'로 정의하고, 이들의 현황, 활동, 미래에 대해 연구, 기록했다. 일자리가 없는 농촌에 돌아갈 수도 없지만 계속 도시에 살 수도 없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품팔이'들을 인터뷰해 고용, 임금뿐만 아니라 주거, 여가, 가족관계, 생활방식 등을 두루 분석했다. 급변하는 중국의 경제상황과 호적제도, 토지제도 등으로 남아있는 사회환경을 통해 모순과 혼란이 발생하는 배경을 들여다본다. 더는 '농민공'이 아닐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신노동자'라는 이름이 붙은 이들에게 주체의식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도시와 농촌 각 5곳에서 만난 신노동자의 입을 통해 개혁 개방 이후 중국사회에서 '신노동자'의 역할은 무엇이며, 이들은 중국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본다. 492쪽, 2만원.

2017-10-28 00:05:01

[반갑대 새책] 시인 13명의 시 60편 해설집

"시인은 외롭다. 외롭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다." 지역 문학 계간지 '시와 반시' 창간의 주역인 강현국 시인은 '내 손발의 품삯이 얼마나 송구스럽던지'에서 시인이 사는 세계의 불화가 외로움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강현국이 시와 시인을 있게 한 외로움의 정체를 밝히고자 펴낸 시 해설집이다. 김영근'김개미'채수옥'정하해'박순남'이준일'이효림'한국현'박이화'황명자'류경무'박언숙'이린 등 시인 13명의 시가 담겼다. 때로는 절박함이, 때로는 호기심이, 또 허무함, 그리고 무료함이 원동력이 돼 쓰인 시 60편을 조목조목 풀어냈다. 시구의 의미에 저자와 직접 나눈 대화나 시인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덧붙인 해설은 감칠맛이 압권이다. 230쪽, 1만5천원.

2017-10-28 00:05:01

[책 CHECK] 미국의 수필폭풍

미국의 수필폭풍 박덕규 엮음 / 청동거울 펴냄 이 책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작가 13인의 수필을 수록한 수필 모음집이자 그것을 중심으로 미주 한인 수필문학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스토리로 읽을 수 있는 미주 한인문학 해설서이다. 제1장과 제3장은 13인 작가의 수필을 수록해 놓았고 각 작가별로 수필을 쓰게 된 동기, 수필문학을 바라보는 관점, 미국에서 수필을 쓰는 의미 등을 내용으로 한 인터뷰를 수록해 놓아 디아스포라 문학이자 한국문학의 귀중한 자산으로서의 미주 한인문학에 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제2장과 제4장에서는 엮은이가 미주지역 한인문학의 역사와 의미, 작품 세계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설을 곁들임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작품도 읽을 수 있고 그 작품의 배경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대구 출신인 지은이는 1980년 '시운동'을 통해 시인 등단, 1982년 신춘문예 통해 평론가 등단, 1994년 '상상'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272쪽, 1만5천원.

2017-10-21 00:05:01

[책 CHECK] 캥거루 우리 엄마

캥거루 우리 엄마 권영세 동시'김가희 그림 / 아침마중 펴냄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본 세상을 노래한 동시집이다. 동시를 읽다보면 '아이다운 마음'인 '동심'(童心)이 느껴지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난다. 이 동시집은 1부 '굴참나무 그루터기', 2부 '캥거루 우리 엄마', 3부 '바다도 꽃을 피운다', 4부 '나도 사춘기인가 봐' 등 총 4부로 구성돼 있으며, 50여 편의 동시가 수록돼 있다. 김종헌 아동문학평론가는 "권 시인의 작품에는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동심을 바탕으로 한 동시가 많다. 그의 낭만적 동심은 늘 주변을 살피는 눈길이 있다. 낭만성과 현실성을 함께 가진 창작태도가 남다른 시적 세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지은이는 "동시는, 사람은 물론 자연 사물과도 잘 어우러지게 하는 힘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내가 동심을 지니고 사는 것은 동시가 내 마음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시가 참 고맙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창주문학상'(1980), '아동문학평론'(1980), '월간문학' 신인작품상(1981)으로 등단했다. 저서로 동시집 '겨울 풍뎅이' '참 고마운 발' '권영세 동시선집' 등이 있다. 124쪽, 1만2천원.

2017-10-21 00:05:01

도심 공동화가 진행 중인 경북 중소도시-경북 김천 자산동. 매일신문 DB

작은 도시의 행복 생존 비결 "집중·압축하라"…『지방도시 살생부』

지방도시 살생부/마강래 지음/개마고원 펴냄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를 꿈꾼다. 인구계획은 도시기본계획을 통해 세워진다. 도시기본계획은 20년 후 도시의 공간구조와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마스터플랜'이다. 복잡한 통계모형을 이용해 지자체들은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한다는 결과를 내놨다. 예컨대 2009년 부산시는 350만 명이던 인구가 2020년 410만 명이 될 것으로 예측, 계획했고, 같은 기간 250만 명이던 대구시는 275만 명으로, 270만 명이던 인천시는 310만 명으로 부풀려 예측한다. 광역자치단체만 그런 것도 아니다. 경기도는 400만 명, 경북도는 120만 명이 증가한다고 계획을 세웠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예상한 지자체는 서울시가 유일하다. 이렇게 뻥튀기한 인구를 모두 합치면 1천300만 명 정도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는 5천176만 명(행정안전부 9월 집계 기준)이다. 말도 안 되는 계획만으로는 모든 지역이 '균형 발전'할 수 없다. 제목부터 충격적이다. 쪼그라든 지방 중소도시마다 살길 찾기 바쁜데 살생부라니. 도시계획 전문가 마강래 중앙대 교수가 펴낸 책이다. 저자는 한국 지방 중소도시의 쇠퇴는 예측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20년간 지방도시들은 지난 10년보다 심하게 쇠퇴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불길한 전망은 틀리지 않는다. 회귀분석 결과 '소멸 순위 1순위'로 꼽힌 전남 고흥군은 2040년에 인구가 '0'이 된다. 충북 보은군, 전남 해남군, 경남 하동군은 각각 2051년, 2059년, 2072년에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 ◆지방도시 쇠퇴 부추긴 메가 트렌드 저자의 확신에 반박하기 어려운 건 저출산'고령화'저성장이라는 메가 트렌드 때문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말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는 2031년 5천296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선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지난해 최고치(3천744만 명)를 기록하고 올해부터는 줄어들고 있다. 2065년 유소년인구는 413만 명으로, 고령인구는 1천827만 명으로 예측됐고, 생산가능인구 비중은 47.9%로 떨어진다. 2015년 생산가능인구 3명이 1명을 부양했다면, 50년 뒤엔 1명이 어린이나 어르신 1명 이상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면 일자리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버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2~3%대에 머문 경제성장률은 고착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로봇'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4차 산업혁명이라는 큰 물결도 고려해야 한다. 학자들은 지방도시가 쇠락한 원인에 대해 ▷제조업 경쟁력 상실 ▷자연자원 고갈, 수요 실종 ▷미군부대 이전 ▷교통망 변화 등으로 추려 설명해왔다. 경남 거제가 조선업 위기로 휘청거리듯 경북 포항, 구미 등 산업을 기반으로 한 도시도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 밖에 광업과 어업으로 먹고살던 강원 태백과 전남 여수에도, 오락가락하는 미군부대 이전 계획에 천천히 고사하고 있는 경기 동두천, 수상교통망이 도로 교통으로 바뀌면서 중심지 기능을 잃은 전남 나주와 도로가 연결돼 다른 도시로 인구가 빠져나간 전북 남원 등을 예로 든다. 활력이 떨어진 도시를 떠난 사람과 돈은 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몰린다. 수도권과 대도시는 집적 경제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수도권'대도시 일자리는 단순노무 종사자 비율이 높은 지방 중소도시보다 로봇'인공지능의 일자리 대체율이 낮아 생존에도 유리하다. 지방도시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국가'지방산업단지를 만들어 파격적인 조건으로 기업을 유치하려고도 해보고, 나비축제, 산천어축제, 머드축제, 국제탈춤페스티벌 등 축제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노력도 했다. ◆압축만이 살길 문재인 정부는 재임기간 연간 10조원씩 50조원을 쏟아부어 구도심과 노후주거지를 살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도시재생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저자는 매년 도시재생사업에 들어간 1천500억원 외에 일자리사업, 환경개선사업, 상권활성화사업 등의 이름으로 도시 살리기에 투입된 돈이 연간 4조원가량 된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방 중소도시 인구는 꾸준히 감소했다. 문제는 인구가 절반이 됐다고 해서 인프라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과 광역자치단체의 1인당 평균 세출액은 지난해 1천619만원이었지만, 축소도시 20곳에서는 4천822만원으로, 1인당 3배 가까운 돈을 써야 축소도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병원도, 학교도, 우체국도 지방 균형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버텼지만 더는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미국 디트로이트가 파산한 것도 산업 쇠퇴로 인구가 줄면서 재정악화가 이유였다. 저자의 답은 쇠퇴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작은 도시가 살아남으려면 '집중과 압축'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선 구도심을 쇠락시키고, 도시공간을 흩트려 비용을 늘리는 외곽 개발을 멈추거나, 개발 이익을 원도심 재생에 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 최초의 파산 지자체 유바리처럼 중소도시의 기능을 한두 곳으로 모아 공공서비스를 집중시키고 광역교통망을 연결해 거점 도시와의 접근성을 높이는 '스마트 축소'도 한 방법이다. 입지 적정화 계획으로 토지를 압축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조그만 도시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역 특성에 맞고 지역경제에 이바지할 마을기업을 만들고,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입점을 규제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모든 도시가 수도권이 될 수는 없다. 축소된 상태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모이고 빽빽해지면 대도시에 없는 비장의 무기가 생긴다. 248쪽, 1만4천원.

2017-10-21 00:05:01

[반갑다 새책] 실리콘밸리 스토리

실리콘밸리 스토리/ 황장석 지음/ 어크로스 펴냄 휴렛팩커드는 1939년 월세 45달러 주택에 딸린 차고에서 창업했다. 실리콘밸리가 태어난 곳이자 캘리포니아주의 랜드마크. 미국 연방정부가 지정한 역사적 장소인 이 차고에서의 창업 성공신화는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차고가 없어서 스티브 잡스가 없는 걸까? 신문기자였던 저자는 실리콘밸리에 살면서 기업 구성원이 아닌, 외부 관찰자로서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 책은 실리콘밸리의 성장과 성공에 관한 기존의 시각이 몇몇 독특하고 천재적인 기업가에 집중돼 있었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실리콘밸리를 있게 한 사람들과 그들의 욕망, 문화, 경험, 제도 등 '혁신의 심장'을 펌프질한 성공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차고 창업 외에도 교육과 기술, 자본이 선순환하는 토대로서 스탠퍼드대학, 너드와 투자가가 상호작용하는 벤처투자의 비법, 고등교육을 받은 이민자 등 실리콘밸리를 읽는 4가지 키워드를 살펴보고, 4차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세계의 표준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알아본다. 304쪽, 1만5천원.

2017-10-21 00:05:01

[반갑다 새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데이비드 콰먼 지음/ 강병철 옮김/ 꿈꿀자유 펴냄 조류독감, 사스, 에이즈, 메르스 그리고 '햄버거 병'으로 알려진 용혈요독증후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사람에게 전염되는 동물의 감염병, 즉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인수공통전염병은 동물을 숙주로 하고 몸을 숨긴 채 틈만 나면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에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다. 사실 인간과 동물은 오래전부터 질병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인수공통전염병의 심각성도 커졌다. 이 책은 '도도의 노래'로 유명한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데이비드 콰먼이 내놓은 역작이다. 인간에 떠밀려 동물은 서식지를 잃어가고 있고, 인간과 동물의 접촉이 늘어나는 만큼 병원체의 침투 경로가 열렸다. 70억에 달하는 인간은 바이러스에게 둘도 없는 서식지가 될 수 있다. 책은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 중국 남부의 박쥐 동굴, 콩고 강변의 마을들, 중앙아프리카의 정글, 방글라데시의 오지 등 핸드라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 사스, 마르크부르크병 등이 발원하거나 휩쓸고 간 곳을 둘러보며 병원체와 동물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살펴본다. 580쪽, 2만2천원.

2017-10-21 00:05:01

김사량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김사량 '향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

"가련한 여인들의 손이 자기 자식들을 삶았으니 내 백성의 딸이 멸망할 때에 그 자식들이 그들의 음식이 되었도다." 구약성경 애가서 4장 10절의 한 구절이다.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에 이른 남(南)유다의 참혹한 현실이 이 구절의 배경이다. 김사량은 소설 '향수'(鄕愁)(1942)에서 성경의 이 구절을 빌려 1942년 조선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단, "이 쓰레기 같은 자들을 어찌하오리까"라는 한 구절을 여기에 덧붙이고 있다. 소설은 1939년 봄, 동경제국대학 미학연구실에 재직 중인 이현이 평양역에서 북경행 직행열차를 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현의 북경 방문은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연락이 끊긴 누님 내외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실로 20년 만의 해후이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해보니 2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해 있었다. 삼일운동을 주도한 열혈 민족주의자 매형은 제자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뒤에 북경의 빈민가를 전전하고 있었고, 열렬한 투사였던 꽃처럼 고왔던 누님은 북경 뒷골목에서 아편 밀매를 하며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낳은 아들은 부모의 반역 행위를 갚으려고 일본군으로 중일전쟁에 자원입대한 상태였다. 또한, 누나 내외와 함께 혁명을 꿈꾸었던 동지는 이제 일제 경찰의 밀정으로 전락해있었다. 이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이 지녔던 혁명을 향한 빛나는 신념과 이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진 세월을 거치면서 그들이 끊임없이 반문한 것은 '무엇을 위해 그 희생을 했던가' 하는 한탄과 자기 회의였다. 구약 성경 속, 몰락에 이른 남유다의 상황이 그들에게서 재현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김사량은 그 답을 '역사의 어찌할 수 없는 힘'에서 찾고 있다. 소설에 따르면 수십만 고구려 병사들이 광야를 질주하며 만주를 평정하고 만리장성까지 진출했던 그곳에 중국의 청 왕조가 들어섰지만, 지금은 일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제국이 중국 대륙을 점령한 것은 '주어진 궤도를 달리는 역사'의 방향이 그렇게 정해졌을 뿐, 그것을 거스를 방법은 없다. 이것이 만주와 남경, 그리고 북경까지 점령한 일본 제국의 승승장구와 몰락해 가는 조선을 본 식민지 조선인 김사량이 내린 답이었다. 소설이 발표된 1942년은 일본 제국이 중일전쟁에 이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세등등하게 싸움을 벌이던 때였다. 말 그대로 거대한 제국의 성립이 눈앞에 보이던 때였다. 김사량의 무력감이 극에 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이 발표된 지 3년 4개월 후 일제는 패전했고 조선은 독립하였다. 이것이 김사량이 말하던 역사의 방향성이라면, 역사는 느리지만 바른 방향을 향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방향성을 이끌어내는 데 소설 속 누님 내외 같은 수많은 사람의 순수한 열정과 신념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희망 없던 긴 세월 속에서 순수한 정신은 마모되어 갔지만, 조각은 남았던 것이다. 이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2017-10-21 00:05:01

컬럼니스트이자 기생충학자인 서민 교수가 남성들의 여성 혐오를 비판한 책을 펴냈다. 매일신문 DB

여혐이 대한민국을 멸종 위험에?…『여험, 여자가 뭘 어쨌다고』

기생충 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단국대 의대 서민 교수가 우리 사회에 넓게 퍼진 여성 혐오를 파헤친 책을 펴냈다. 김치녀, 김 여사에서 맘충까지 일상이 돼버린 여성 차별을 고발했다. 대한민국 남자로 살던 서 교수가 페미니스트임을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성 혐오를 비판하면 댓글 테러로 응징되는 사회 분위기 탓이다. 메갈리아를 다룬 팟캐스트에 출연하면서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 서 교수는 여성신문에 페미니즘 칼럼을 연재했고 젠더 문제를 다룬 EBS '까칠남녀'에도 출연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내가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향한 첫걸음'이라고 적고 있다. 남성들은 왜 여성을 혐오할까. 저자는 대학을 나와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현실이 남성들을 좌절케 했고 그 분풀이 대상으로 여혐이 생겨났다고 분석한다. 이렇게 남성들의 사회적 의제로 등장한 여혐은 어떻게 확산되었을까. 저자는 포털사이트의 댓글 양태를 주목하고 있다. 즉, 네이버, 다음 댓글의 90%가 남성들이 쓴 것이라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 관련 기사가 뜨면 떼로 몰려가 언어 테러를 가하고 언어 폭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 혐오를 부추겼지만 다수 남성들이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사이 여혐은 어느새 사회 현상으로 부각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가 단순한 언어 폭력에 머물지 않고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저자의 시선은 여성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아직도 불평등한 삶을 살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유리천장이 여전히 존재하고 취업이나 승진은 힘들고 회사 임원이나 고위 공무원은 남성이 대부분이다. 반면, 남녀 사이의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단연 1위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 도대체 우리 여성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것인가? 저자의 반문에 이제 사회가 답을 할 차례다. 남녀평등과 암수의 평화와 공존, 기생충 학자인 저자는 해결책을 주혈흡충(住血吸蟲)이라는 기생충 생태에서 찾고 있다. 주혈흡충은 인간의 혈관 속에서 기생하는 기생충으로 연간 10만 명 이상이 이 벌레에 희생될 정도로 인류에게 치명적이다. 약으로도 잘 안 잡히고 중간 숙주를 없애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곤 하는데 그 생존 비결은 암수의 금슬 때문이라고 한다. 즉 수컷이 암컷을 위해 무한 서비스를 베푸는 데, 그 정도가 봉사를 넘어 헌신에 가까울 정도다. 의식주를 완벽하게 해결해주니 암컷은 밤낮으로 알을 까고 그 덕에 종족이 유지되는 것이다. 저자의 우려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나라도 여혐 현상이 계속 되다가는 멸종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 실제로 현재 결혼 기피나 고질적인 만혼도 그런 조짐 중 하나로 해석된다. 대한민국의 '멸망'을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던 저자, 그게 바로 이 책을 쓴 이유다. 많은 사례들을 통해 남성들의 여성 혐오 행태를 비판했는데, 이는 저자가 남성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남성들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까닭이라는 것. 물론 이 책이 출고된 후에도 여혐은 계속되고 있고 "당신 책을 산 게 후회된다, 책을 불사르고 싶다"는 일부 남성들의 반응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남녀가 합심해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면 마음이 불편해도 책을 덮지 말길 바란다고 적고 있다. 그 불편함이 당신을 좋은 남자로 만들어줄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295쪽, 1만5천원.

2017-10-21 00:05:01

이용한 작가의 '고양이와 함께 시속 3킬로미터'.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의 한 숲 속에서 촬영했다.

'펫심전심' 느껴보실래요?…『PetZ』

PetZ/다원 P&B 편집부 지음/다원 P&B 펴냄. 반려동물 애호가 1천만 명이 넘는 시대, 국내 최초의 반려동물 전문 문예지 'PetZ'가 10월 창간됐다. 대구 출신 소설가이자 동물을 사랑하는 박섭 씨가 창간한 격월간지로 반려동물과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예지다. 지금까지 반려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문과 잡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매체는 대부분 소비재 광고나 건강과 의료 등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였다. PetZ은 반려동물을 중심으로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느낀 기쁨과 슬픔 등 감정과 추억, 사연 등을 담는 본격 문예지다. PetZ 창간호는 시인 문인수를 비롯해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의 반려동물과 관련한 작품을 싣고 있다. 문인들뿐만 아니라 '소녀와 개' 시리즈로 유명한 정우재 화가의 그림과 고경원, 이용한 등 반려동물 이야기 전문작가들의 글도 실었다.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 이야기,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월드 펫'(World pet), 반려동물 호텔이나 병원, 미용실 정보와 반려동물 관련 이슈를 소개하는 '펫 포커스'(PetZ Focus) 등 다양한 코너를 갖추고 있다. 또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일반 독자들의 글과 사진도 실어 생생함을 더한다. PetZ 창간호는 1만 부를 찍었다.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문예잡지들이 보통 한 번에 3천 부 정도 찍는다는 점과 비교해볼 때 시작부터 적극적으로 치고 나오는 발행부수라고 할 수 있다. 박섭 발행인은 "반려동물과 감정을 공유하고 인생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으로도 1만 부 발행을 계속할 예정이며 머지않아 부수를 더 늘리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섭 발행인을 비롯해 편집장 1명, 객원기자 5명, 디자이너 1명, 편집자문 1명이 PetZ 함께 제작하고 있다. ◆시속 3킬로미터의 느린 산책 작가 이용한은 '고양이와 함께 시속 3킬로미터'라는 글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주말 행사처럼 반복되는 이런 산책의 시간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고양이와 함께 시속 3킬로미터의 느린 산책. 봄이면 산벚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길.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 운치 있고, 가을이면 온갖 빛깔의 단풍으로 곱게 물드는 길. 애석하게도 겨울에는 눈길로 변해 산책 대신 구경만 하고 마는 길…'이라며, 고양이와 함께해 온 '산책길'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문학 속의 Animal' 코너에서는 J.R.R 톨킨의 소설 '실마릴리온'에 등장하는 전설의 개 후안(Huan)에 대해 이야기한다. '딱 한마디로 후안은 위대한 개다. 더 이상의 표현은 사족이 될 뿐이다. 아마 역사상 그보다 거대하고 빠르며 불굴의 힘과 지혜를 가진 개는 찾지 못할 것이다. (중략) 늑대 왕인 드라우글루인조차 후안을 이길 순 없었다.' -54쪽- ◆나를 지켜준 봉구, 내가 지켜줄게 '우리 집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작은 시골마을이라 위험한 줄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 열린 대문으로 어떤 아저씨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을 때,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봉구만 이리저리 날뛰며 짖어댈 뿐이었다. 아저씨는 봉구를 발로 차 내던지고 나를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중략) 폭행을 끝낸 아저씨가 마당에 나서자 봉구가 아저씨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봉구는 무자비하게 봉구를 때렸다. 녀석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왼쪽 눈의 시력도 상실했다. 엄마는 내가 그런 사고를 당하자, 집을 팔아서라도 나를 수술시키려고 했다. 사지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으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봉구를 생각하느라 아무 의욕이 없었다. 나 혼자 잘 살자고 그런 수술을 받을 수 없다고 하자, 가족들은 나를 꾸짖었다. 그런 호된 꾸중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중략) 마침내 나는 혼자 걷게 되었다. 비록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모양새긴 했지만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동안 봉구는 내 곁에서 여전히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힘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면 내 등 뒤에 콧잔(콧잔등)을 대고 낑낑거리던 녀석을 생각하며 힘겹게 버텼다. (중략) 내 삶을 통째로 구해준 봉구, 지금은 나이가 들어 힘이 많이 빠지고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고생하는 녀석이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녀석의 등에 내 코를 묻고 사무치도록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글은 창간기념 공모전 수기 부문 대상을 차지한 작품 '봉구'의 일부다. 화자는 자신이 어려울 때 곁에서 지켜준 봉구를, 이제는 상처입고 늙어서 힘이 빠진 봉구를, 자신이 끝까지 지켜주겠노라고 말한다. 잡지 PetZ의 발간 정신과 성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시간 여행자, 사랑이 전부다 발행인 박섭 씨는 "우리는 모두 시간 여행자들이다. 언젠가는 우주 속으로 떠나갈 한시적 존재다. 사랑했던 기억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을까? 사랑하던 기억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있던가? 사랑을 주었든지 받았든지 말이다. PetZ는 생명을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을 모은 작지만 아름다운 샘터다.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생명과 사랑의 공간이다"고 잡지 PetZ의 제작 방향을 밝혔다. 126쪽, 3천원.

2017-10-21 00:05:01

그림: 노재화 작

[내가 읽은 책] 방지언 장편소설 '큐피드 아홉 개의 성물', 학이사

어디서 왔을까? 벌초를 하는 아버지 산소에 배추흰나비가 날아왔다. 이십 대에 죽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나비 날개에 어른거린다. 우화(羽化)의 고된 여정으로 얻은 20여 일의 생(生)인데도 나비의 몸짓은 참 고요히 여유롭다. 수많은 갈등 속에서 이제는 거의 100년의 세월을 어지러이 사는 인간도 신의 눈에는 저 나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 물음 끝에 신이 있다. 절박한 순간마다 신을 찾는 인간의 본성엔 신이 있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을 세계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 같은 상상에 신화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신과 인간의 사랑은 흥미롭다. 대구 출신인 방지언 작가의 장편소설 '큐피드 아홉 개의 성물'을 단숨에 읽게 되는 이유다. 방지언은 휴먼판타지 장르에 뛰어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예대 극작과 재학 중에 대중가요 작사가로 데뷔했고, 현재 드라마 작가로 활동 중이다. 2017년 초에 발행된 이 책을 봄에 읽고, 이 가을에 다시 읽는 데도 재미있다. 고미술품을 둘러싼 판타지 미스터리로 인간 세상으로 쫓겨난 큐피드가 신들이 준 아홉 가지 미션을 완수해 가는 이야기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울에서 태어난 스물아홉 살의 현이경으로 여덟 번째로 환생한 사랑의 신 큐피드다. 그는 성물을 찾는 미션 수행 과정에 피할 수 없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위기의 찰나에 괴한의 정체를 스캔하며 오로라에 감싸져 안전한 곳으로 이동된다. 이렇듯 신의 보호를 받으며 이경이 다섯 번째 성물을 찾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현이경은 여섯 번째 성물을 찾기 위해 떠난 파리에서 가이드 윤승지를 만난다. 이후 이경은 인간에 대한 심적 변화를 경험한다. 신(神)이지만 인간관계의 인간적인 고뇌를 어쩌지 못한다. 또, 승지라는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천상으로의 귀환을 앞둔 이경의 꿈을 흔든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소멸이냐, 영원이냐. 다른 경우의 수는 없었다.'-403쪽-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인간으로 살고 있기에 '이경은 슬펐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슬펐다.'-252쪽- '완전한 소멸은 그만큼의 추억을 필요로 한다.'-253쪽- 마지막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인간 삶의 마지막 밤, 이경은 신의 위엄과 인간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랑을 상기시키는 이경의 선택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은 너로부터 발아되었고 너로부터 날개를 달았어."296쪽-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인생은 나의 의식(意識)이 엮어 간다. 소설의 끝, 하늘로 아득히 솟구쳐가는 나비를 바라보던 모자(母子)를 떠올리며 산소에서 사라진 나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나비야, 나비야. 이 책은 잠자는 상상력을 깨운다. 아득히 높은 가을 하늘을 보게 한다.

2017-10-21 00:05:01

연암 박지원

[이종문의 한시 산책] 산업화로 다시는 볼 수 없는 농촌 풍경

전가(田家) 박지원 늙은이는 남쪽 둑에 참새 쫓고 앉았는데 翁老守雀坐南陂(옹로수작좌남피) 개꼬리 조 이삭엔 노란 참새 조롱조롱 粟拖狗尾黃雀垂(율타구미황작수) 맏이도 그다음도 모두 다 밭에 가고 長男中男皆出田(장남중남개출전) 초가집은 하루 종일 사립이 닫혀 있네 田家盡日晝掩扉(전가진일주엄비) 솔개가 병아리를 채러 왔다 허탕치고 鳶蹴鷄兒攫不得(연축계아확부득) 박꽃 핀 울타리에 놀란 닭들 꼬꼬댁 꼭 群鷄亂啼匏花籬(군계난제포화리) 밥함지 인 젊은 아낙 시내 건널 걱정인데 小婦戴棬疑渡溪(소부대권의도계) 벌거숭이, 누렁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赤子黃犬相追隨(적자황견상추수)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그림처럼 그려낸 조선 후기의 농촌 풍경이다. 환갑을 지난 기성세대가 코흘리개 시절에 최후로 목격했던 고향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근년에 와서 기겁할 속도로 전개된 산업화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우선 요즈음 시골에는 장대를 들고 참새 쫓는 늙은이가 아예 없다. 누렇게 드리워진 조 이삭에 참새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렵다. 조 이삭마다 비닐봉지를 아주 완벽하게 덮어씌워서 참새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옛날 가을철 들판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수확기를 맞아 온 동네 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 들판에서는 농부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트랙터 두어 대가 온 들판을 도맡아서 수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립문이 종일토록 닫혀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전혀 딴판이다. 옛날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들판에 나갔지만, 요즈음은 문 열기도 힘에 부치는 홀몸노인들만 살고 있으니까. 아니, 뭐라고? 노는 병아리를 채어가려고 솔개가 마당으로 내려온다고? 물론 옛날에는 그런 일이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노는 병아리가 없어서 솔개가 내려올 일도 없고, 제2급 멸종위기 동물이 되어 내려올 솔개도 없어졌으니까. 박꽃이 하얗게 핀 울타리 밑에서 꼬꼬댁거릴 닭들도 없다. 그들은 이제 진드기가 득실대는 양계장 닭장 속의 계란 낳는 기계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니까. 음식물이 담긴 함지박을 이고 들판으로 나가던 아낙네들도 다 사라졌다. 중국집 오토바이가 철가방에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담고 들판을 가로질러 우당탕 배달을 하고 있으니까. 킬 힐에다 새빨간 핫팬츠를 입은 아가씨가 스쿠터를 타고 다방 커피를 나르기도 하고. 몇 년째 출생신고가 전혀 없는 마을이 수두룩한데, 누렁이와 뛰어놀 벌거숭이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 높푸르구나(정지용, '고향'의 일부).

2017-10-14 00:05:01

詩에 녹아든 별별 이야기…「시(詩)로 만난 별들」

시(詩)로 만난 별들/장재선 지음/작가 펴냄 우리나라 대중문화계의 슈퍼스타 33명의 삶과 예술을 40편의 시(詩)와 33편의 프로필 에세이(profile essay)로 풀어낸 책이다. 1925년생인 배우 황정순부터 최불암, 조용필에 이어 1990년대에 태어난 '소녀시대'까지 시간순서로 묶었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 오래 일한 지은이는 "이 책에 나오는 스타들을 접하고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신문사에서 일한 덕분이다"고 말한다. 소설과 시로 등단한 사람답게 33명 스타들의 삶과 예술을 시적 은유로, 그러나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낸다. ◇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엔군 낙하산들이 꽃잎처럼 내렸어요/ 어머나, 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이 소리쳤어요/ 빨리 피하라고/ 그 길로 청천강을 건너며 생각했지요/ 이 장면을 전쟁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그 후로 60년/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정말로 500년을 산 것처럼 길고 모질었지요/ (중략) / 눈 위에 연애의 발자국을 찍으면서도/ 영화를 이야기했던 사람/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에게/지금이 소중하다고 말해 준 사람/ 내 머리에서 옥수수 냄새가 난다며/ 소년처럼 눈웃음 짓던 사람/ 남과 북의 사선을 같이 넘었던/ 오직 유일한 남자였던 내 사랑.(하략)' - 내 사랑 신상옥- 중에서. 영화배우 최은희(1930~ ) 선생의 삶을 노래한 시(詩)다. 이 시를 통해 독자는 최은희 선생이 어릴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음을, 신상옥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음을, 그를 사랑했음을, 납북된 적이 있음을, 신상옥을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가 있었음을, 생이 고달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 작품 뒤에 이어지는 '프로필 에세이'에서 그녀의 삶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배우 최은희 선생은 1961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한국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8년 1월 홍콩에서 납북됐으며, 그녀의 남편 신상옥 역시 그녀를 찾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가 그 해 7월 납북됐다.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탈북에 성공했다. 지은이는 시 '내 사랑 신상옥'에서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에게' 라고, 말하는데, 최은희 선생은 신상옥 감독을 만나기 전, 스무 살 무렵에 촬영감독 김학성 씨와 동거한 적이 있다. ◇ 사십대에 양촌리 회장을 지내느라 '(상략)그가 한번 중간에 일어났다/ 팔부 소맥을 일곱 잔쯤 먹었을 때였을 것이다/ 허물없는 술자리라고 해도 어른은 어른인지라/ 그 틈에 나도(이 책의 지은이) 나가 콧구멍에 바람을 넣고 왔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그가/ 방문 앞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게 보였다/ 댓돌 위에 어지럽게 놓인 수많은 신발들을/ 짝이 맞게 정리하고 있었다/ 알싸한 취기를 숨기지 못한 얼굴이었으나/ 평생 그 일을 해온 사람처럼/ 익숙한 손길이었다/ 삼십대 초반에 수사반장을 하느라/ 몸짓이 일찍 늙은 그가/ 사십대에 양촌리 회장을 지내느라/노틀로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가/ 실제 노년에 들어서는/ 한국인의 밥상을 찾느라/ 젊은 걸음인양 고샅고샅 누벼 온 그가/ 평생 해온 일의 모든 공력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에/ 쓰고 있었다.' - 신발을 정리하는 손- 배우 최불암(1940~ ) 선생의 본명은 영한(英漢)이다. 그가 6세 때 아버지가 3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불암 선생의 큰아버지는 동생의 요절을 슬퍼하며 조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암'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주셨다. 최불암 선생은 연극 무대에 데뷔한 이래 이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부처님 바위라는 뜻의 예명 덕분일까, 그는 배우로서 누구보다 긴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 그의 노래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우리 친구 열 명 중 일곱은/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드러운(고달픈) 길을 걸어왔다/ 그의 노래 열 중 일곱은/ 외워 부르며/ 쓸쓸한 시간들을 견뎌 왔다/ 그의 노래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그를 아는 사람도 없다/ 이 나라의 가왕으로 살아온/ 세월의 뒤편에서 노을을 벗한/ 적막을 누가 알겠는가. (하략) -바람의 노래를 멈추지 않는- 중에서 가수 조용필(1950~ )은 한국 대중음악의 신화다. 그 신화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는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은이는 조용필 프로필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나는 기억한다. 작가 최인호가 1980년대 어느 날 신문에 "20세기가 저물 무렵 조용필도 늙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던 것을. 그 조용필이 21세기에도 늙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당대인들과 교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조용필은 특유의 소박한 말투로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어떤 말을 하다가는 민망한 듯, 수줍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스타의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에게 어찌 저리도 절박한 모습이 남아 있을까. 나는 경이를 느꼈다.' 그 절박함이 조용필을 '영원한 청년'으로 남게 했을 것이다. ◇ 비바람에 시달려도 둥글게 살아가리 '조약돌'의 가수 박상규(1942~2013)는 '쌩큐 아저씨'였다. 타고난 입담으로 객석을 들었다 놨다 다. 스탠딩 개그의 원조였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의 명사회자였다. 타고난 예능인이지만 그의 어릴 때 꿈은 국어교사였다. 그 꿈을 이룰 요량으로 연세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교내 축제에서 노래와 연극으로 숨어 던 재능을 발견하고 말았다. 모범생 우리 아들이 '딴따라'가 되겠다니! 부모님의 반대가 격했고, 그는 인천의 집에서 뛰쳐나와 하숙을 하며 노래공부를 했다. 재능과 실력이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10년 동안 무명 월을 보냈고, 1974년 '조약돌'로 스타덤에 올랐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살아가던 한국인에게 박상규의 '조약돌'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당시에 앨범이 100만여 팔렸다. 2000년 생각지도 못했던 고혈압으로 쓰러져 언어장애를 겪었다. 병과 싸우면서도 무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2006년 호주 시드니에서 교포 위문공연을 열었다. 불굴의 의지가 낳은 무대였다. 2008년에 또 쓰러졌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 "실례하겠습니다, 한 번에 끝내겠습니다" "젊은 배우들과 키스신을 할 때도 긴장했던 기억이 있는데, 안성기 선배님과 키스는 제가 나쁜 짓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한번에 끝내겠습니다'라는 분위기였지요. 그때 선배님은 진지하셨고,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영화배우 안성기(1952~ )에 대해, 배우 이하나가 털어놓은 이야기다. 짧은 글에 소탈하고 반듯하고 성실한 안성기 씨의 품성을 고스란히, 그리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배우 안성기 프로필 에세이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대중문화계 스타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배우 황정순, 최은희, 신구, 영화감독 임권택, 가수 패티김, 배우 김지미, 최불암, 가수 겸 방송 진행자 박상규, 화수(畵手:화가 겸 가수) 조영남, 영화감독 이장호, 가수 조용필, 최백호, 배우 안성기, 강석우, 가수 현숙, 최성수, 배우 송강호, 배우 겸 작가 차인표, 가수 겸 배우 엄정화, 배우 김윤진, 김정은, 하지원, 수애, 전지현, 화가 겸 배우 강예원, 가수 겸 배우 성유리, 배우 손예진, 하석진, 문채원, 박하선, 김옥빈, 그룹 하이라이트 리더 윤두준, 걸그룹 소녀시대. 240쪽, 1만4천원.

2017-10-14 00:05:01

최유정 그림: '코스모스가 품은 별'

[내가 읽은 책] 예술과 중력가속도(배명훈/ 북하우스/ 2016)

예술과 중력가속도(배명훈/ 북하우스/ 2016) 가을이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풍경을 바라보며 너나없이 '예쁘다'라는 감탄사를 자아낸다. 코스모스! 그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우주를 의미하는 코스모스(cosmos)와 같은 이름을 가진 꽃이라니! 이름 때문에 그 가늘어 보이는 꽃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꽃의 한가운데에 별모양(★)의 꽃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을 보면 그 이름이 더욱 신비롭다. 신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이 꽃에 우주를 담았던 것일까. 코스모스를 보며 우주를 떠올리게 된 것은 순전히 '배명훈'이라는 작가 때문이다. 과학소설(SF) 작가인 배명훈은 2005년 '스마트 D'로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분'에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하여 연작소설, 중'장편 소설 등 다채롭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평단의 관심을 끌고 있다. 데뷔작 '스마트 D'가 실린 그의 세 번째 소설집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집필했던 단편들 중 10편을 묶어낸 책이다. '스마트 D'는 자살을 하려 했던 한 남자가 스마트 D 때문에 죽지 못해 일어나는 사건들, '티켓팅&타겟팅'은 핵잠수함에 탄 사람들이 콘서트 표를 티켓팅하기 위해 벌어지는 사건들, 표제작인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달에서 온 무용수가 지구에 돌아와 무중력 공연을 벌이며 생기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다뤘다. 각각의 단편 속 가상세계는 하나같이 낯설고 참신하며 작가 특유의 유머가 담겼다. 하지만 무엇이든 낯선 것은 거부반응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그는 자연스럽게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한다. 심지어 '진짜 이런 게 있나?'하고 생각될 정도로 섬세한 작업이다. "조개들은 말이야. 딱 한마디 말만 해. 태어나서 평생 죽을 때까지 딱 한마디만 하는 거야. 여기 봐. 조개껍데기를 보면 이 안쪽에서부터 점점 몸집이 커지면서 자라온 흔적이 보이지? 나이테같이 생긴 이거. (중략) 어렸을 때 한 번 '파랗다'고 말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죽는 순간까지 다른 말은 못 해."(82쪽) 흔히 SF 하면 큰 스케일의 우주전쟁이나 외계인의 지구 침공쯤을 떠올린다. 그러나 배명훈은 대체로 평범한 개인과 일상을 가져와 우리가 사는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소속된 세계만 다를 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 그래서일까. 단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현실감을 가져다준다. 이야기의 생생함은 작가가 가진 세계를 해석하는 다양한 도구도 한몫했다. '유물위성'에는 고고학, '스마트 D'에는 언어학, '예언자의 겨울'과 '조개를 읽어요'에는 해양생물학, '티켓팅&타겟팅'과 '예술과 중력가속도'에는 대중음악과 무용에 대한 지식이 녹아 있어 가짜를 더 진짜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현실과 가상이 헷갈릴 수도 있으니 유의하자. 이런 그를 만나고 나면 현실의 작은 꽃에서 심오한 우주를 탐색하는 것쯤은 아주 흔한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그가 익살스럽게 한 이야기들 속에서 던진 날카로운 사회비판과 질문들 또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2017-10-14 00:05:01

[책 CHECK] 메모의 재발견

메모의 재발견 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윤경 옮김/ 비즈니스북스 펴냄 이 책은 별것 아닌 듯 보이는 메모라는 사소하고 평범한 습관이 어떻게 일과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손으로 쓰는 메모의 의미와 그 실용 가치를 되짚어보며 효과적으로 메모를 활용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그 방법까지 알려준다. 저자는 세상이 디지털화될수록 직접 손을 움직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바로 머리와 손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강의를 들으며 손으로 직접 메모한 사람과 노트북으로 내용을 타이핑한 사람을 테스트 해본 결과, 손으로 필기한 쪽이 강의의 핵심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손이 멈추면 뇌도 멈추고, 그만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지만 '베껴 쓰기'만 할 뿐 그것을 일과 삶을 변화시키는 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저자는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성공 뒤에 매일매일 써온 메모가 있었음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248쪽, 1만3천원.

2017-10-14 00:05:01

[책 CHECK] 지성만이 무기다

지성만이 무기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비즈니스 북스 펴냄 저자는 학창시절 교과서의 문장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공부 실력이 바닥이었던 문제아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일본 최고 지성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저자는 그 모든 순간을 도와준 은인으로 바로 '책'을 꼽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실천해온 독서 방법과 인생을 바꿔놓은 공부법을 공개한다. 또 18세기 대표적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발상법부터 19세기 니체의 메모법까지 세기의 철학자들이 남긴 메시지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어른의 공부에 대해 알려준다. 1장에서는 읽기에서 시작하는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며 생각의 기초가 되는 읽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읽고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지침에 대해 알려주고, 니체가 활용한 메모법은 물론 노트 사용법까지 알려준다. 2장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3장에서는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노하우를 알려준다. 4장은 인생을 가슴 떨리게 하는 성인의 공부, 즉 하고 싶은 일과 재능을 찾아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5장에서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공부인 종교와 철학에 대한 조언을 담았다. 264쪽, 1만4천원.

2017-10-14 00:05:01

그림이 아닌, 글로 읽는 인간 고흐…「반 고흐를 읽다」

반 고흐를 읽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엮음'옮김/ 레드박스 펴냄 귀를 자른 남자가 있다. 광기의 천재, 태양의 화가, 불멸의 화가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빈센트 반 고흐다. 목사가 되고자 신학공부를 했던 그는 스물일곱 살이 돼서야 화가가 되기로 한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끝없는 사랑을 꿈꾸는 남자였다. 하숙집 딸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뒤 사촌 동생, 매춘녀, 열 살 연상의 여인 등 사랑하는 사람마다 가족의 반대에 부닥치며 좌절한 그에게 남은 것은 동생 테오와 그림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생의 지원으로 겨우 캔버스를 채워가면서도 그림을 돈과 바꾸는 데 주저했고,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고갱과는 두 달 만에 극심한 불화로 헤어지고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지독한 가난과 고독이 만든 그의 처절한 삶은 그의 나이 서른일곱에 권총 한 발로 마무리됐다. 영혼의 동반자이자 절대적 후원자인 동생 테오는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6개월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생애는 그가 남긴 삶의 기록이 가장 잘 설명한다. 미학자이자 번역가인 신성림이 반 고흐 편지 선집 '반 고흐를 읽다'를 펴냈다. 이 책은 고흐가 1875년 10월부터 1890년 7월까지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다. 고흐는 1872년부터 일기를 쓰듯 편지를 썼다. 동생 테오와 어머니, 여동생, 반 라파르트, 베르나르, 고갱 등에게 남긴 편지는 800통이 넘고, 이 가운데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68통에 이른다. 실패한 사랑, 가족과의 갈등, 소소한 일상, 그림 작업에 대한 기록, 작품에 대한 해설, 당시 미술계와 동료 화가에 대한 평가, 생애 의지와 좌절 등 그의 모든 것을 담은 편지들은 '광인 아니면 천재'로 알려진 그의 예술적 사고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까지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자서전이라 할 만한 편지로 그의 그림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이 책이 반갑다. ◆책, 돈. 숨겨진 이야기 외롭고 고독했던 그에게 책은 숨겨진 벗이었다. 제본업자의 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평생 책을 가까이했던 그는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등을 읽고 다양한 영감을 얻었고, 때론 테오에게 책을 읽기를 권한다. '에밀 졸라의 책을 가능한 한 많이 읽어라. 그의 책은 훌륭하고 매사를 명료하게 알려준다'-1882년 7월 헤이그에서 '빅토르 위고는 신이 빛을 깜빡이는 등대라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빛이 가려진 일식의 시기를 거치고 있나 보다'-1888년 9월 아를에서 '인간을 초월한 무한의 일별을 셰익스피어의 책에서 많이 마주치게 된다'-1889년 6~7월 생레미에서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큰 적은 돈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그림 작업에 쓰이는 돈과 생활비를 테오에게 의지했다. 자신이 테오에게 너무 큰 짐이 되는 것 같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서 받은 돈을 갚을 수 있도록 그림을 더 많이 그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테오가 돈을 내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당분간 형이 스스로 생활을 꾸리길 바란다고 하자, 고흐는 "내가 너의 채권자들보다 못한 존재냐"라며 "물감 값 청구서는 내 목을 밧줄처럼 조여오는데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야 한단 말이다"고 역정을 내기도 한다. 화가 인생 10년 남짓 동안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아를의 침실' '별이 빛나는 밤' 등 800점 이상의 그림을 남긴 고흐였지만, 물감 한 통, 캔버스 한 장을 살 돈이 없었고, 생전 팔린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한 점이었다.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그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달라졌다.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가 작품의 후광이 되었고,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그림의 현재 가치는 수백, 수천억원이다. ◆성장과 창작에 얽힌 진솔한 고백 그의 편지 중 미술사에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작품에 대한 설명과 스케치, 당대 미술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다. "밀레의 드로잉을 본뜬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한 모사라기보다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더 비슷하다"며 밀레의 그림으로부터 활기를 되찾았다고 말한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가 영혼을 가졌듯이 렘브란트는 자신을 닮은 이 늙은 남자 안에 다빈치의 미소를 가진 초자연적인 천사를 그려놓았네"라며 찬사를 보낸다. 밀레,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등 그가 사랑했던 화가들에 대한 흠모도 엿볼 수 있다. 화가로서 고흐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아를에서 그는 고갱을 기다린다. 비슷한 처지의 화가들과 여러 작업을 시도하려고 했고, 예술공동체를 만들어 공동 화실에서 작품을 만들어 가겠다는 그의 계획은 고갱을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고갱과의 생활이 시작되지만, 각자의 예술관은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었고, 고갱과 다툰 뒤(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귀를 잘랐다.(잘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고갱은 고흐를 떠났다. 이후 고흐의 정신 착란, 환각, 신경쇠약 증세는 더 심해진다. 고갱이 떠난 것이 큰 재앙이라고 하거나, 고갱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대목에서 동시대 화가에 대한 그의 고백을 알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고독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반복된 기행(奇行)과 발작, 정신이상 증세로 고흐는 결국 정신병동에 입원한다. '노란 집' '밤의 카페' 등 200여 점의 걸작을 탄생시킨 아를을 떠나 생레미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문다. 끔찍한 우울증에도 작품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고 최후의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밀밭에서 권총 한 발로 생을 마감한다. 총알이 빗겨간 심장이 잠시 뛰는 동안 그의 옆에는 일생의 친구, 테오가 있었다. 한 권의 책으로 고흐를 전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생을 이해할 만한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 492쪽, 1만8천원.

2017-10-14 00:05:01

[반갑다 새책] 나쁜 그림

나쁜 그림/ 유경희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여성을 주제로 한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원초적 욕망을 품은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주제가 삶이든 죽음이든, 사랑이든 증오든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을 매개로 표현한 그림에서 여성은 하나같이 예술가를 자극한 팜므파탈이다. 가장 성스러운 여성으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는 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귀스타브 쿠르베는 '잠'에서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을 표현했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공포를, 루카스 크라나흐의 '루크레티아의 죽음'은 죽음을 상징한다. 마녀는 죄다 여성이고, 욕망과 광기, 유혹과 배신 프레임에는 항상 '나쁜 여자'가 있었다. '나쁜 그림'은 여성이 주인공인 그림을 소개하고 이에 얽힌 사실, 화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술잡지 기자, 큐레이터를 거쳐 아트테라피스트로 활동 중인 유경희 미술평론가가 '나쁜 여자'가 그려진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을 전한다. 터부시되고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대담하면서도 흥미롭게 펼쳐보이며 그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2017-10-14 00:05:01

[반갑다 새책] 침팬지와의 대화

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스티븐 투켈 밀스 지음/ 허진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8.4%가 일치한다. 침팬지는 유전적으로 고릴라나 오랑우탄보다 인간에 더 가깝다는 얘기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꾸며내고, 집단 내에서 정치적 모략을 꾸미는 행동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그래서 인간과 침팬지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종'(Next of Kin)이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이자 동물권익운동가인 로저 파우츠 박사의 과학 에세이가 번역 출간됐다. 1997년 미국에서 처음 나온 이래 지금까지 침팬지 언어연구의 고전으로 기록될 정도로 사랑받는 책이다. 책이 말하는 침팬지들의 언어능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들의 언어 사용은 파블로프의 개나 수학문제를 푸는 말 한스처럼 단순하거나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담요 위 칫솔'과 '칫솔 위 담요'를 구분해내는 침팬지들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만들고, 연결된 단어의 순서를 바꿔 문장의 의미를 구분할 줄 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침팬지는 인간과 동물의 간극이 생각에 따라 좁혀질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교차 양육 프로그램에 사용됐다가 피실험체로서 운명이 다한 동물을 향한 사랑을 통해 파우츠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동등한 위치에 공존한다고 깨닫는다. 그래서 로저 파우츠와 침팬지 워쇼의 영화 같은 이야기는 출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528쪽, 2만5천원.

2017-10-14 00:05:01

우병걸 씨 부부는 21년을 근무한 직장(학교)을 정리하고 자녀들과 세계일주를 다녀온 후 이 책을 펴냈다. 사진은 인도 타지마할을 답사 중인 우 씨 가족.

46억년 지구 역사 자취 따라 가족들 시간여행…『세계여행 떠난 지구과학 이야기』

세계여행 떠난 지구과학 이야기/ 우병걸 지음/ 집사재 펴냄 여행에는 적지 않은 재화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비용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투입 대비 효용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철 바캉스를 위해 휴가를 모두 써버리고, 오지 트레킹을 위해 적금을 깨기도 한다. 이렇듯 삶의 중요한 부분이 돼버린 여행. 우린 여행을 위해 우리 일상을, 재화를 얼마만큼 희생할 각오가 돼 있을까. 이 책을 쓴 우병걸 박사(경북대 지질학과)는 2013년 근무하던 학교(왜관 순심고)에 사직서를 냈다. 같은 시간 순심여고에도 한 장의 사표가 날아들었다. 부인이었다. 부부가 별러왔던 세계일주를 떠나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고교에 다니던 자녀들도 여행에 동참하기 위해 자퇴서를 냈다. 명분은 '46억년 지구별 탐험, 5대양 6대주 지질탐사'였지만 세계일주라는 약간의 유흥 목적도 숨기지 않았다. 이 책은 장르상으로는 기행 에세이지만 여행서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동, 감흥 외 풍부한 지질학, 과학적 상식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산맥, 사하라 사막, 홍해와 사해, 폼페이, 그리니치 천문대, 극점 등을 답사하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지질학적 원리와 지구과학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을 답사하며 기록한 1장에서는 지구가 탄생한 후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고 그 주인인 인류는 어떻게 진화해갔는지를 살핀다. 히말라야 산맥은 어떤 지각(地殼), 지질운동을 거쳐 탄생했고 사막의 생성이 왜 적도의 바로 위, 아래에서 발달하는지를 살핀다. 2장은 근대과학이 태동한 유럽 각지를 돌아보는 기록이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나뉘는 위도'경도, 남북회귀선과 이에 따른 일식'월식, 자전과 공전에 얽힌 여러 원리를 알기 쉽게 풀어낸다. 도버해협의 백악(白堊)절벽에서는 지구의 역사를 가늠하고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서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지질학적 이유를 설명한다. 3장과 4장에서는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캐나다의 로키산맥 등 북미대륙을 답사한다. 지질시대 이후 지구가 변해가는 모습, 엘니뇨와 라니냐로 대변되는 기상 이변, 지구온난화와 빙하시대, 제6차 대멸종 현상을 진단하며 인류의 생존문제를 다룬다. 지질학적, 지구역사학적 사실들이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임에도 저자의 재미있는 경험담과 특유의 유머적 필체를 통해 독자들은 마치 잘 편집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감동에 빠져든다. 여기에 저자의 생태, 환경전문지식과 지구과학 원리가 한 흐름으로 정리돼 독자들의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준다. 신화학자 고혜경 씨는 추천사에서 "기존의 여행기들이 우리의 지평을 지구촌이라는 공간적 영역으로 넓혀주었다면 이 책은 우리의 의식을 지구의 나이만큼 확장시켜 준다"며 "46억 년 지구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별에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고 말했다. 312쪽, 1만5천원.

2017-10-14 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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