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책

 

[반갑다 새책]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 왕즈홍 외 지음/ 곽규한'한철민 외 옮김/ 산지니 펴냄 스린 야시장은 대만 여행을 계획하는 여행자이라면 꼭 방문하는 핫플레이스지만 이곳이 과거 제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 중심지였다는 것을 아는 여행자는 거의 없다. '저항의 도시 타이베이를 걷다'는 도시 거버넌스를 연구하는 타이완대 건축과 왕즈홍 교수가 타이베이 뒷골목의 묵혀진 이야기, 잊힌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이다. 왕즈홍은 아기자기한 맛과 따뜻한 감성으로 사랑받는 여행지, 타이베이의 불편한 사실을 들춰내고 있다. 타이베이 지역을 7곳으로 나누고 이곳에 있었던 52개 이야기를 통해 쉽사리 지나쳤던 이름없는 거리와 건물에서 날것 그대로의 타이베이 모습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책은 타이베이가 청나라와 일본 식민지라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한 폭의 옷감이라면 이 책은 이 옷감에 행동으로 수놓았던 사람들의 저항에 관한 이야기다. 다크 투어리즘에 대한 논란이 가시지 않는 요즘 조금 불편한 여행을 통해 화려한 불빛의 이면에 가려 잊힌 도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303쪽, 2만원.

2017-12-02 00:05:01

주인공 P가 구입한 25전짜리 값비싼 담배 마코(앵무새).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문학의 위기

1934년 조선의 봄은 겨울보다 추웠다. 1929년 세계 전체를 휩싼 뉴욕발(發) 대공황의 광풍이 가난한 식민지 땅 조선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에 흘러넘쳤다. 잡지와 언론에서는 '취직 운동하는 방법'에서부터 '소(小)자본 창업항목' 등 대량 실업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을 다룬 기사를 속속 실었다. 청년 엘리트들도 이 광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 유학생이라는 빛나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귀국했지만, 고학력 엘리트는 흘러넘치고 일자리는 없는 조선 현실 속에서 그들이 몸을 둘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은 바로 이들 '레디메이드, 즉 문화예비군'이라 불리는 고등 실직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P'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이지만 대량 실직난이 휘몰아친 조선에서 취업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고전하는 인물이다. 가진 돈이라고는 이틀 전 전당포에서 겨울 외투를 저당 잡히고 받은 4원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싸구려 담배를 내미는 담배 가게 주인에게 '욱'해서 고급 담배를 사는 바람에 3원 75전밖에 남지 않은 상태이다. 생존을 담보할 금쪽같은 3원 75전까지 친구들과 함께 간 싸구려 술집에서 '욱'하는 기분에 단번에 탕진해버린다. 이처럼 '욱'하는 심리적 불안정성은 P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겨우 아홉 살 된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인쇄공으로 취직시켜버리는 것 역시, 한 끼 밥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무용한 지식에 '욱'해서이다. 소설은 P라는 인물이 왜 이처럼 쉽게 '욱'하면서 자포자기의 삶을 살게 된 것인지 그 원인을 찾아간다. '바가지를 쓰고 벼락을 막으려고 했던'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서부터, 일제의 잘못된 식민정책, 마침내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이 원인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원인은 물론 해결방안까지 안다고 한들, 일제 식민지에 불과한 조선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방안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원인도 알고, 해결 방법도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이보다 인간을 '욱'하도록 만드는 것이 있을까. 뉴욕발 대공황이 없었다고 해도 조선 청년 엘리트들은 고단한 삶을 피할 수 없었다. 식민지의 척박한 현실에서 과연 누가 편안할 수 있었을까. 경제적으로 일제에 종속된 가난한 조선이었던 만큼 문과 출신 고학력자들 경우, 그 삶은 참으로 신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월호 잡지 판매라든가 1개 신문 구독료로 5, 6개의 신문을 서로 돌려 읽는 신문윤독사업이 인기 창업 종목이었을 정도로 책과 신문이 삶의 중심에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최근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문과' 전공 졸업생의 위기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무거운 미래 전망까지 나오는 이 시대에 인문학마저 자취를 감춘다면 인간들은 어디에 마음을 둘 것인가. 1960, 70년대 국가가 나서서 중화학, 철강 같은 기초 산업을 유치산업으로 보호하고 육성했듯이 인문학 분야를 유치학문 분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때이다.

2017-12-02 00:05:01

베이비부머 드레스 코드는 등산복?…『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

일본의 인구구성 중 '단카이(團塊) 세대'가 있다.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태어난 전후 세대들을 일컫는 말이다. 약 800만 명에 이르는 이들 세대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진학, 취업, 결혼, 주택 문제 등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수요(需要) 활성화로 일본 고도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지만 동시에 버블경제를 일으켜 20년 장기 불황을 가져온 '주범'이기도 하다. 비슷한 용어로 한국엔 '베이비부머'(Baby boomer)가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그룹을 말한다. 빠르면 60세를 넘겼거나 그 언저리에 있는 나이다. 직장을 다닌다면 임금피크제 대상이거나 퇴직을 앞둔 세대로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연령이다. 이들은 '참혹한 전쟁'은 겪지 못했지만 대신 '혹독한 경쟁'을 겪어야 했다. 중'고교 때 입학시험에 시달리다 1960, 70년대엔 산업화 시기를 온몸으로 맞았다. 1980년대 민주화와 IMF 외환위기, 대통령 탄핵 등 격동의 한국사 소용돌이 속을 헤쳐 왔다. 이 책은 베이비부머로 태어난 시인 장석주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며 지금까지 잘 버텨온 '동지'들과 나누는 치유의 메시지다. 행간마다 작가 개인의 슬픈 에피소드가 내레이션처럼 흘러간다. 간혹 다른 친구들의 사례를 빌려 전후 세대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1부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에선 저자 개인의 삶을 박정희, 전태일, 배일호 같은 인물과 골목길, 구로공단, 피에로, 떠돌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다. 이들 세대는 유독 '집'에 집착하는데 이는 가난 때문에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가족 수난사가 투영된 것이며, 변두리 골목길에서 가끔씩 회한에 젖어드는 것은 번잡하고 고달픈 이사의 슬픈 기억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박정희 정권의 애국주의 세뇌 교육에 내몰렸지만 민주화의 신념을 굳게 지켰고 IMF 외환위기의 구조조정 속에서 직장은 잃었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잃지 않았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랑 속에서 신념과 기억이 왜곡되고 비대화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정치 참여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한쪽에서는 박근혜 탄핵을 지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태극기집회의 행렬에 서기도 한다. 2부 '베이비부머의 고백'은 저자의 고교 친구 5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온 가족이 '생존'에만 급급했기에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가족의 빚을 대신 갚거나 부친의 '두 집 살림' 같은 복잡한 가계에 속을 끓이기도 했다. 5명의 60년 인생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게 묘한 공감대를 자극하며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베이비부머 중 매년 100만 명이 퇴직자로 나온다고 한다. 나라를 빈곤에서 구했지만 자신들은 명퇴, 해고, 실직을 겪으며 우울한 노년을 맞고 있다. 울분'고독을 혼자 삼켜야 했기에 이들 세대에 등산이 유행했다. 아웃도어 패션을 6조원 시장으로 키운 것도 이들의 공로다. 이 세대의 숱한 모임에 드레스 코드는 여전히 '등산복'이 주종을 이룬다고 한다. 편하다는 장점 외에 시대의 우울이 옷으로 내화(內化)된 흔적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베이베부머의 또 하나의 짙은 그늘을 읽어낸다. 등산복 패션은 이들이 감당하는 생의 나날이 여전히 '산'같이 가파르고 힘들다는 무의식적인 암시라고. 219쪽, 1만4천원.

2017-12-02 00:05:01

[책 CHECK] 11명의 인생 멘토 이야기 『응원』

'응원' 오창섭 지음/ 북촌 펴냄 취업의 최전선에서 자원봉사 현장까지 청년들을 비롯해 수많은 인생 멘토들과 함께 고군분투하며 해법을 모색해 온 지은이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키워드를 '응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2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에 속한 11명의 인생 멘토들이 자기만의 노하우와 강점으로 성공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을 이 책을 통해 생생하게 풀어냈다. 이 책은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몰려 경제적'사회적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11명의 인생 멘토들이 전하는 응원이다. 11명 멘토들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서희태), 스타트업 멘토(권도균), 아이템 인큐베이터(구덕모), 창업 멘토(박희광), 사진가(나종민), 음악가(권순동)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이 무척 다양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멘티들을 향한 '응원'이다. 지은이 오창섭은 서라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봉사센터장으로 학생들의 교육과 상담, 멘토링, 자원봉사활동을 이끌어 왔다. 현재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응원'이 자원봉사와 인생의 마중물임을 전파하며 일상 속에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224쪽, 1만6천 원.

2017-11-30 18:40:41

[책 CHECK] 나의 글쓰기 산책

조규택 지음/ 시간의 물레 펴냄 이 책은 20여 년간 글쓰기에 천착해 온 저자의 흔적이자 산물이다. 글쓰기 이론을 비롯해 문화칼럼, 군사'안보칼럼, 천안함 칼럼, 수필, 기행문 등을 망라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쉽고 평이한 글쓰기를 거쳐 대상에 깃들거나 거리를 축소해 미약한 존재의 본질, 생명의 힘을 발견해낸다. 충무공 이순신과 어린 학도병의 일기, 휘트만의 시와 산문을 예로 들며 좋은 글쓰기를 제시하면서 불신을 이겨내고 구시대적 사고를 청산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필사즉생(必死卽生) 리더십과 호국정신을 이어받아 선진 강국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교육자로서 상처와 치유의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저자는 인간과 인간관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아픈 현실에서 신뢰와 믿음을 보여야 하는 성숙한 인식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저자는 또한 끊임없는 내면 탐구와 현실 사회에 대한 규명이 인간과 사회의 간극을 좁힌다는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계명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석사'박사)을 졸업했다. 해군 장교로 복무한 뒤 현재 계명문화대 군사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교수 독서클럽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272쪽, 1만5천원.

2017-11-25 00:05:01

[책 CHECK] 3×4

조명선 지음/ 고요아침 펴냄 "나는 늘 위태로워서 자꾸 팔을 뻗습니다." 시조시인 조명선 씨가 두 번째 시조집을 펴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공감하고 식사를 함께하고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아이 생일을 챙기는 이 모든 행위는 팔을 뻗는 행위다. 시인은 우리가 팔을 뻗는 까닭, 우리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들을 '위태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구 남산여고 시절 시조 동아리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30여 년 문학 이력(履歷)을 짧은 어휘로 간결하게 녹여냈다. 꿈 많은 여고시절엔 이름을 드날리는 시인이 되겠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뻗친 팔을 당기지 못하고 있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창작은 존재 이유요, 삶의 지향이다. 이번에 펴낸 시조집은 시인의 자전적 기록을 담고 있다. '3×4'는 자신의 대명사 격인 명함을 상징하지만 이 12㎠의 공간이야말로 자신을 세상과 '내통' 시키는 수단으로 은유(隱喩)하고 있다. 저자는 서평에 "펄떡이는 고기를 그렸다고 자부했는데 천장에 매달린 굴비가 되고 정물화가 되어 움직임 없는 시로 내 발목을 잡고 있다"며 "앞으로 나의 시가 푸닥거리처럼 숨결을 넣어주고 스며들어 사람 사이에 그윽하게 놓이기를 희망한다"고 쓰고 있다. 97쪽, 1만원.

2017-11-25 00:05:01

이탈리아 피렌체 전경

19세기 폐허의 로마, 21세기 여행자에 말 걸다

누구나 일탈을 꿈꾸지만 모두가 모두에게서 벗어날 순 없다. 우리는 이럴 때 여행을 계획한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서게 될 때의 설렘,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발견을 위해. 하지만 여행지는 쉬어가는 이방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새롭고 화려하고 매력적이기에 여행은 즐겁다. 그러나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시가지의 뒷골목에도, 노동의 현장에도, 가정의 일상에도 눈을 돌리는 여유가 생긴다.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 찰스 디킨스에게는 이탈리아가 그런 곳이었다. '이탈리아, 물에 비친 그림자의 기억'은 1844년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한 1년 동안의 기록이다. 소박한 평민이나 교양있는 사람들, 빈민이나 여왕을 막론하고 호소력을 가져 폭넓은 인기를 누린 디킨스가 남긴 소설 같은 작품으로, 여행에세이의 전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찬란한 문명의 뒤안길에는 디킨스의 이탈리아 여정은 영국에서 출발해 프랑스 리옹-아비뇽-마르세유를 거쳐 제노바에서 시작한다. 이어 볼로냐-베네치아-베로나-밀라노-피사-시에나-로마-나폴리-폼페이를 거쳐 피렌체에서 끝난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이탈리아의 역사나 정치'행정'예술'종교 등에 대한 언급을 피하겠다고 했다. 그림과 조각, 건축물에 대해 쓰인 파묻힐 만큼 많은 연구보고서를 대신해 이탈리아 주변 풍경이 만들어낸 아름다움과 과거의 영광을 잃고 쓰러져가는 건축물을 보며 참된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옛 영광이 지나간 자리에는 허무만 남았다. 그중에서도 가난과 무질서는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질서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어떤 집의 지붕 위에 또 다른 집을 지은 지저분한 주택들.(중략) 가도가도 끝없이 올라가는 길들, 하수구 주변에서 얼음물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열이 날 듯 어지럽다." 저자가 전한 제노바의 첫인상은 금방 바뀐다. 여행을 끝낼 때쯤 그는 이곳의 돌멩이마저도 애착이 가고, 행복과 평온의 시간이었노라고 고백한다. "반쯤은 벗은 아이들과 지저분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악취가 뿜어져 나오는 지독하게 불결한 미로로 이어지는, 정말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과 위풍당당한 건물들이 밀집한 대로에서 벗어난 가파른 샛길. 생기가 넘치면서도 죽어 있고, 떠들썩하면서도 조용하고, 요란하면서도 수줍게 움츠러들고, 잠에서 깨어난 듯하면서도 깊은 잠에 빠진 이곳은 이방인에게 계속 걸으며 보고 싶게 만드는 일종의 도취 같은 것이다." 그의 문명(文名)을 떨치게 한 '골동품 상점'이나 '크리스마스 캐럴' 등에서 보여줬듯 체험으로 알게 된 밑바닥 생활상과 애환에는 위트를 섞었다. 골목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가장 자주 띈 것은 부랑자와 거지였는데, 아무 데서나 방문객을 불러 세우고 에워싸면서 낡고 쇠퇴한 도시의 이미지를 심화시키는 거지를 표현하는 데도 재치와 유머가 살아있다. "피사가 탑으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 불가사의가 됐다면, 거지로는 적어도 두 번째나 세 번째 불가사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중략)거지들은 피사의 모든 무역과 산업을 몸소 보여주는 듯하다." 디킨스는 곳곳에서 종교 다툼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고, 어린 아이들의 묘지를 보며 쓸쓸히 고개 돌린다. 여행지의 겉모습보다 이면에 깃든 고통을 어루만지는 모습에서 대문호의 면모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생생한 묘사 웅장하고 눈부신 곳과 쇠락해 황량한 곳이 뒤섞인 곳에서 이 여행자는 기쁨과 슬픔, 안정과 혼란을 동시에 느낀다. 새로운 것을 마주한 현장에서 그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편지를 집에 부쳤고 책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공상적이고 나른한 느낌은 낯선 곳에 흠뻑 빠진 소설가의 맛깔스런 묘사와 통찰로 독자를 자극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안 되는 베네치아 여행기가 그렇다. 디킨스는 스스로 이탈리아에서의 기억을 물에 비친 그림자에 비유한다. 직접 보고 듣고 겪고 쓴 에세이임에도 그림자일 수밖에 없는 건 그가 이방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탓인지 여행을 소개하면서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디에서도 물을 거칠게 휘저어 그림자를 망치지 않았기를 바란다고 한 그의 말이 대번에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섬세한 표현과 극적인 서술 탓에 아비뇽에서 만난 도깨비 노파. 살인을 한 어느 청년이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장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여관과 저택, 뒷골목의 스산한 분위기, 길거리 사람들의 표정은 함께 도시를 누비는 듯 생생하게 전달된다. 예컨대 콜로세움에 대한 그의 묘사는 피와 흙먼지가 자욱한 경기장에 그와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이끼로 뒤덮인 벽과 아치들, 햇살이 드는 복도, 현관에서 자라는 잡초'와 더불어 조금씩 무너져가는 콜로세움은 그의 마음을 크게 흔든다. 위풍당당한 모습 대신 폐허의 들판이 된 고대 로마를 접한 뒤, 그가 느낀 씁쓸함은 '영원의 도시' 로마의 기억을 새롭게 쓰게 한다. 170년도 더 된 리뷰이기에 책에 등장하는 도시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 책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여행 리뷰지만 '시내로 이동하는 법' '미술관에서 봐야 할 작품' 또는 '패키지 여행사 고르는 법' 등과 같은 팁은 없다. 요즘 블로그에서 보이는 여행 리뷰보다 자세하거나, 전문적이지도 않은 이 책이 여행 에세이의 바이블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건 소설 같은 묘사와 더불어 대문호의 날카로운 통찰과 철학적 고찰이 담겼기 때문이다. 292쪽, 1만3천원.

2017-11-25 00:05:01

손인선 작 '산굼부리의 갈대'

[내가 읽은 책] 독립운동·한국전쟁 이토록 따뜻한 시선

이 소설은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경술국치로부터 인천상륙작전까지를 살았던 한국인 가족 4대의 이야기다. 한국을 소재로 한 이 책을 쓴 작가 펄벅은 1930년에 소설 『동풍 서풍』으로 데뷔하였으며, 1938년 『대지』 3부작으로 미국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가 한국에 왔을 때, 경주를 여행하는 차 안에서 가을 녘 시골집 마당의 감나무 끝에 달린 감 여남은 개를 보고는 "따기 힘들어 그냥 두는 거냐?"고 물었다. 동행한 기자가 "까치밥이라고 해서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라고 하자 "바로 그거예요, 내가 한국에서 보고자 한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라며 탄성을 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 일어난 일들까지 모두 사실이며, 미국과 한국을 포함하여 모든 외교상의 인물은 실제의 인물들을 구상하였다고 밝혔다. 조선시대와 전쟁기의 세대 갈등, 농민의 성장 등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하였다. 주인공 일한은 '그는 민족의 역사를 새로 공부하면서, 날마다 그 전날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간추려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작가는 시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남녀 불평등을 꾸짖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며, 소작료를 올려주고자 하는 일한의 결심에서 다가올 농지개혁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일한은 양반이나 당시의 당쟁에 지쳐가고 오직 바른 정치를 갈구하는 실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전반부를 이끄는 일한이 현재의 스스로를 되돌아보고자 떠올린 아버지의 말씀은 작가의 충고이다. 그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지적이다. "현재를 이해하고 흔들림 없이 미래를 맞으려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충분히 알아두어야 하느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한도 성장한다.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당대의 지식인을 대변한다. 산수와 역사, 문학, 유교경전 등을 가르치기 위해 배우고 익힌 것을 가르치는 반복 속에서 일한이 영어를 익히는 장면에서는 급박함도 느껴진다. 아들 연춘은 '살아있는 갈대'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중국과 만주를 종횡무진 누비며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살아가는 인물로 성장한다. 연춘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일본 경찰의 손에 죽고, 끝내 북으로 떠나는 연춘의 아들 사샤와 미국인 병원에서 의사가 되어 서울에 남는 연환의 아들 양이 남긴 여운은 21세기의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을 되새겨보게 한다. 우리 역사서 중 이 시기를 이만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 책이 또 있을까? 흔하지 않을 것이다. 옛 기억 속, 보석 같은 나라의 소중한 사람들은 등장인물로 남아 그 나라 사랑의 정신을 듬뿍 보내준다. 받아 안고 보니 새삼 이 나라에 태어나 행복하다.

2017-11-25 00:05:01

힘든 일상 늑대, 놀고 먹는 생귀…당신은 어느 쪽 선택?

훌륭한 그림과 은유가 가득 담긴 이야기책이다. 책은 '사용연령'을 '4세 이상'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4세 이상'이라면 모름지기 30세도 40세도 50세도 포함된다. 4세는 그 나이에 맞게, 50대는 50대의 감성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독자들이 저마다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무궁무진한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셈이다. 책에 실린 '그림'에 주목하면 상상의 세계는 더욱 넓고 생생해질 듯하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순하기에 독자의 상상 세계는 오히려 넓어진다. ◆오리와 생쥐를 삼킨 늑대의 고된 일상 어느 날 아침, 생쥐 한 마리가 늑대 한 마리를 만났다.(참고로 책의 그림에서, 늑대와 마주친 생쥐는 전혀 두려운 표정이 아니다. 이는 앞으로 생쥐의 팔자가 늘어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늑대는 생쥐를 단숨에 꿀꺽 삼켜 버렸다.(꼭꼭 씹어 먹었어야 했는데….) "아우우! 이럴 수가! 늑대 배 속에 갇히고 말았어. 이대로 꼼짝없이 죽고 말 거야." 생쥐가 중얼거렸다. "좀 조용히 해! 막 자려던 참인데 잘 수가 없잖아." 늑대 배 속에는 생쥐보다 먼저 들어온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 누가 있나요?" 생쥐가 화들짝 놀라 찍찍거렸다. 그때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안쪽에 침대가 있고, 그 위에 오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렇게 오리와 생쥐는 늑대의 배 속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둘은 함께 식사를 한다. 요리는 훌륭했다. 생쥐가 물었다. "잼은 어디서 났어요? 식탁보는요?" 오리는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한다. "늑대 배 속에서 뭘 찾을 수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집에 있는 거랑 다를 게 없다니까." "여기서 사는 거예요?" "그럼, 아주 잘 살고 있지." "밖이 그립지 않으세요?" "전혀! 밖에 있을 때는 늑대한테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매일매일을 보냈어. 하지만 이 안에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는 걸." 생쥐와 오리는 신나게 춤을 추었다. 배 속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자 늑대는 몹시 배가 아팠다. "아우우! 내가 뭘 잘못 먹었나 봐." 늑대가 중얼거리자, 배 속에서 오리가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아픈 배 고치는 법을 알아요." "그래?" "그럼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비법인데 틀림없이 배가 싹 나을 거예요. 좋은 치즈 한 덩어리를 삼켜요. 포도주 한 병도요! 아, 양초 몇 개도 잊지 말아요." 그날 밤, 오리와 생쥐는 파티를 열었다. 둘은 건배를 외쳤다. "늑대의 건강을 위하여!"(당신, 요즘 너무 피로해 보여서 보약 한 첩 지었어요,라고 읽어도 된다.) 이어지는 내용은 사냥꾼이 나타나고, 늑대가 위기에 처하자 배 속에 있던 오리와 생쥐가 합세하여 사냥꾼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다. 사냥꾼이 나타나자마자 오리와 생쥐가 늑대를 돕는 것은 아니다. 사냥꾼이 나타났을 때, 오리는 "달려요! 어서요! 우리 목숨이 위험해요!"라고 꽥꽥 소리친다. 그러다가 늑대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배에서 뛰어나와 사냥꾼을 물리친다. 오리와 생쥐가 사냥꾼을 물리치자 늑대는 "고맙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 기꺼이 할게"라며 고개를 숙인다. 그 뒤로도 생쥐와 오리는 늑대 배 속에 살며 늑대가 공급하는 음식과 물품으로 잔치를 이어간다. 늑대는 밤마다 달을 보며 '아우우! 아우우!' 하고 운다. ◆우스개처럼 표현한 세상살이의 지난함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약육강식 세계에서 유연하고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남기' '용기와 팀워크가 선사한 상상 못할 대역전'이라는, 그야말로 일곱 살짜리에게 어울리는 평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문학적 상상과 회화적 묘사로 표현된 늑대의 기막힌 여생'이라는 소개와 함께 '밤마다 아우우! 하고 우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슬픔이 담긴 울음소리일 수도 있고, 자신의 처지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호소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해설이 독자의 마음에 더 와 닿을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이 동화이면서 동화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 어쩌면 '동화'라는 형식을 통해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늑대를 평범한 이 땅의 '남편 혹은 아버지'로, 생쥐를 '자식'으로, 오리를 '아내 혹은 어머니'로 대치해 읽을 수도 있겠다. 늑대가 꼭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 학으로 태어났으나 늑대처럼 살아야 하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많으니까. 독자의 상상에 따라 늑대와 오리, 생쥐는 여러 가지 모습, 다른 삶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은 늑대를 늑대답게 하는 상징인 동시에 영원히 사냥해야 하는 자의 숙명을 은유한다. 이빨과 발톱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오리와 생쥐를 삼키지 않았을 텐데…. 이 책은 오늘도 사냥감을 좇아 달려야 하는 '늑대들'을 위로하는 동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힘센 늑대'보다 '게으른 오리'가 되는 쪽이 낫다,는 교훈을 주는 동화인지도 모르겠다. 48쪽, 1만2천원. ▷그린이 존 클라센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나 셰리든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내 모자 어디 갔을까?'(2011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 선정),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2013 칼데콧상'2014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수상)에 이어 2016년 '모자를 보았어'를 출간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하고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유아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글쓴이 맥 바넷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퍼모나대학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존 클라센과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2012 보스턴 글로브혼북 상'2013 칼데콧 아너상 수상),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2015 칼데콧 아너상 수상)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레오, 나의 유령 친구' '규칙이 있는 집' 등이 있다. ▷옮긴이 홍연미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편집과 기획 일을 하다가 지금은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작은 집 이야기' '도서관에 간 사자'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등이 있다.

2017-11-25 00:05:01

주간 베스트셀러

1.언어의 온도(이기주·말글터) 2.트렌드코리아 2018(김난도 외·미래의 창) 3.엄마의 자존감 공부(김미경·21세기북스) 4.신경 끄기의 기술(마크 맨슨·갤리온) 5.82년생 김지영(조남주·민음사) 6.말의 품격(이기주·황소북스) 7.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조유미·허밍버드) 8.남아 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민음사) 9.유병재 농담집 블랙코미디(유병재·비채) 10.넛지(리처드 탈러·리더스북)  

2017-11-25 00:05:01

[반갑다 새 책] 해동속소학

'해동속소학'은 주자의 '소학'에 대응되는 '조선소학'이다. 19세기 말 박재형이 청소년의 몸과 마음을 닦고 학문연구의 기틀을 잡아주려고 선비와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들의 미담, 교훈을 가려 모아 펴냈다. 박재형은 "우리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비교될 만큼 발전하고 어진 사람이 많이 나왔지만, 주자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아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소학'에 실리지 못했다"면서 "유구한 역사와 훌륭한 문화에도 우리의 '소학'이 없음을 개탄해 이 책을 펴낸다"고 했다. 책은 이황, 주세붕, 이언적, 송시열, 이이, 조광조, 최영, 신숭겸, 조식, 이순신, 황희 등 선인들이 남긴 말, 글, 일화를 소개하며 충효나 우애와 같은 성리학 덕목과 근검절약, 손님 접대, 청렴결백 등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습관이나 예절을 강조하고 있다. 책을 옮긴 박문현 동의대 명예교수는 "사회 윤리와 도덕이 길을 잃은 오늘날 고전을 되새기며 통찰해보길 권한다"고 밝혔다. 303쪽, 1만8천원.

2017-11-25 00:05:01

[반갑다 새책] 눈 속에 어린 눈

경북 군위 출신 이필호 시인이 시집 '눈 속에 어린 눈'을 펴냈다.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생을 만들고자 하는 시인의 치열한 고투와 반성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떠나듯 돌아서면 다시 매혹하는 손짓이며 그 때문에 떨치지 못하고 다시 붙잡는 것"이라고 시를 정의한 이필호는 잠깐의 이별이 주는 간절함을 확인하고 일상생활과 여행을 통해 가족과 이웃, 자연을 살뜰히 챙긴다. 총 65편의 시에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존재 확인과 세상에 대한 공부, 가족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 등을 담았다. 문학평론가 김용락은 "이번 시집은 시적 상상력의 뿌리를 가족에 두고 있다. 예컨대 아들을 매개로 표현한 표제시를 통해 파괴되고 훼손된 현실 이전의 파괴되지 않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원형을 갈망하고 있다"면서 "가족을 넘어, 공동체를 섬세하게 배려하고 존중하는 시인의 시심이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146쪽, 9천원.

2017-11-25 00:05:01

북방 기마민족 문화 특징을 보여주는 신라 토기. 매일신문 DB

인류 이주 관점에서 풀어낸 한반도 고대사…문화로 읽어낸 우리고대사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론은 '아프리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루시 화석은 320만 년 전 인류로 확인되고 있다. 동부아프리카를 출발한 인류가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거기서 또 다른 줄기가 세계로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고(古) 아시아 족이 살고 있었고 신석기 후기 무렵 새로운 세력이 한반도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반도에서 한 자루에 담기면서 일단의 세력을 형성했고, 삼국이 통일되면서 드디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반도의 고대사를 인류 이주사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 동북지역을 거쳐 온 '북방루트'와 중국 서북지역 천산(天山) 주변 초원로를 거쳐 오는 '만주루트'를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이 대륙 이주의 흐름을 3부의 문화코드와 36가지 테마로 나누어 정리한다. 1부 '초원에서 불어온 바람 편'에서는 신라문화 중 초원 유목문화 요소들을 찾아내 설명한다. 신라 김씨 왕족들의 근친혼 풍습은 유목문화 특히 천산 주변 사카족 풍습과 맥이 닿아 있고, 신라 고총의 토우 항아리 중에 성애 장면이 많은 것도 천산 주변 부족의 암각화와 밀접하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김유신의 동생 보희의 오줌이 서라벌을 잠기게 했다'는 꿈 일화를 주목하고 있다. 이 '오줌 설화'는 페르시아를 창업한 키루스의 탄생 신화와 너무 흡사하다. 두 지역에서 같은 신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두 민족의 뿌리가 같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 1부를 맺으며 저자는 신라의 김씨 왕족의 그 뿌리가 북방 초원문화계에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신구 당서(唐書)에서 신라를 변한이라 칭했던 것도 그들이 북방 초원 지대에서 고깔모자를 쓰던 사카족과 연결되었다는 것. 2부 '동남쪽 그림자에 서북의 자취가'에서는 신라 문화 중 중국 중원과 만주문화 흔적들을 찾아내고 있다. 한반도 고래인 기원에 대해서 아직까지 북방민족설이 유력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한 민족기원 연구에서는 중국 중북부 지역 농경문화권들이 더 많다고 한다. 역사서 부도지(符都誌)에서도 조상들의 역사 궤적을 기술하면서 중원기원설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혁거세 신화 해석에서 저자는 중원의 농경문화적 요소를 들여다보고 있다. 즉 혁거세가 북방계라는 정설이 굳어져 있긴 하지만 선도성모(仙桃聖母)가 된 사소부인이 알영과 혁거세를 낳았다는 설화는 산신 혹은 지모신 계열 신화로 명백히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요소로 분류된다는 것. 3부 '대륙에서 열도로 간 바람과 태양의 후손'은 한반도의 문명이 일본 열도로 전파되는 과정을 다룬다. 저자는 한반도에 정착한 유이민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열도의 주류로 성장했다고 판단한다. 진인(辰人)이 제일 먼저 왜로 진출했고 변진인, 부여계가 그 뒤를 이었다. 천황가는 진인과 변진인이 결합해 탄생했고 부여인은 그들을 돕는 위치였다는 분석이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저자의 예리한 통찰은 이어진다. 고대 사료를 이용해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외교나 교역을 위한 거점이었다는 것. 지금 중일(中日)이 패권화에 몰입하면서 역사 논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한국 내부에서도 보수와 진보 사이 사관의 간극은 메우기 힘들 정도 넓고 깊다. 이런 역사 혼란의 시대 역사를 '민족사, 국가사, 지배'피지배의 영토사관이 아닌 교류와 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참신하다. 지금 반목을 거듭하고 있는 동북아의 국가들도 본래 하나의 뿌리였고 한줄기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성난 외교적 수사들이나 험한 눈초리들을 거두게 되지 않을까. 336쪽, 1만6천원.

2017-11-25 00:05:01

신중현 작 '숲 속으로 난 길'

[내가 읽은 책] 뇌를 알면 감정이 보인다

『감정조절』/ 권혜경/ 을유문화사/ 2016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크게 화를 내고 분노하여 후회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화를 내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분노가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서로 영혼에 상처를 남기게 되며, 갈등을 초래, 불안을 느끼게 된다. 『감정조절』은 일상에서 화내고, 긴장하고, 싸우고, 움츠러드는 감정 상태를 이해하도록 돕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 작가는 현재 뉴욕대학교 임상 외래교수 및 임상감독가로 활동하며, 맨해튼과 뉴저지에서 심리 치료 클리닉을 운영하며 특히 트라우마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싸움을 하거나 또는 회피해버리는 경우에도 우리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 해결방법을 적용하여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1장에서는 감정조절의 개념을 설명하며 감정조절의 필수 조건으로 안전감을 들고 있다. 안전감은 누군가에 의해 감정조절이 된 초기경험에서 시작하여 관계 안에 믿음으로 발전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한 상태에서 엄마의 도움으로 편안한 상태로 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서서히 엄마의 기능이 아이에게 내재화되고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46쪽) 2장에서는 우리가 안전하지 않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뇌 과학 연구를 통해 안내한다. 뇌 속에 있는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이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알려주고, 3장에서는 편도체의 오작동을 일으키게 되는 성격 발전을 유아기 부모의 양육환경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4장에서는 한국의 역사적 사건들이 한국인들의 감정조절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개인이 담아 낼 수 없는 경험은 국가나 사회기관이 경험, 감정, 고통의 역사를 담아내는 수용기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5장은 일상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감정조절의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갓난아이들도 자신이 어딘가 불편하면 편안한 상태를 위해 울듯이, 인간은 스스로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화내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궁극적으로는 안전감을 갖기 위한 그들만의 최선의 선택방식이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으로 마음의 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쁜 사람'이 내 앞에 있으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방어기제가 발동해 그 사람과 싸우거나 도망가겠지만, '아픈 사람'이 내 앞에 있으면 연민이 생겨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열리고 이해하고 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72쪽) 이 책을 통하여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뇌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면, 나와 타인에 대하여 좀 더 넓은 수용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감정조절 방법을 습득하여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남을 보살피는 입장에 있는 부모와 교사 및 치료사들이 읽으면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2017-11-18 00:05:04

세상을 본 은둔 선비, 北伐 아닌 北學을 외치다…『열하일기1,2,3권』

열하일기1,2,3권/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돌베개 펴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흔히 '조선 시대 최고의 여행기' '조선 최고의 명문장'이라는 찬사가 따른다. 하지만 18세기 조선시대 점잖은 사람들의 평가는 달랐다. 일부 지식인들은 열광했지만 다수의 조선 선비들에게 '열하일기'는 내놓고 보기 민망한 '빨간책'이었다. 박지원은 1780년 열하 여행을 다녀온 뒤 3년에 걸쳐 '열하일기'를 완성했다. 박지원이 자신의 초고를 검열하는 동안, 필사본들이 먼저 나왔고 여기에는 필사자들의 시각이 가미되기 일쑤였다. 이 책 '열하일기 1,2,3'은 '박지원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정벌해야 할 나라, 배워야 할 나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했다. 후금, 즉 청나라 황제에게 국왕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했고, 세자와 왕자들을 비롯해 많은 신하들이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수만 명의 민간인들 역시 청나라의 노예나 성노리개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삶을 마쳤다. 조선 사람들에게 청나라는 원수의 나라였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화적 우월감 속에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했다. 북벌은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박지원(1737~1805)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1780년(정조 4)이었다. 그해 5월 삼종형 박명원이 고희를 맞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진하(새해나 중국 임금의 생일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일) 겸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했다. 1780년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 말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보았다. 열하는 청나라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한 곳으로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했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는 몇 년의 작업 끝에 지금까지 오랑캐로만 치부했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했다. '열하일기'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에 있어서도 당시로는 파격적이고 직접적이며 해학적이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체, 당시로는 '빨간색' 알려진 대로 박지원의 '열하일기' 문체는 살아 펄떡인다. '일행이 고려보에 이르렀다. 집들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었는데, 아주 빈한하고 검소하여 묻지 않아도 고려보인지 알겠다. 병자호란 다음 해인 정축년(1637)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끼리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산해관 동쪽 천여 리에 걸쳐 논이라곤 없더니, 홀로 이 땅에만 벼를 심고 있으며, 떡과 엿 따위가 본국 조선의 풍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사신이 오면, 하인배들이 사 먹는 술과 음식의 값을 혹 받지 않기도 하고, 부녀자들도 내외를 하지 않았으며, 어쩌다 고국의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말몰이꾼들이 이를 악용하여 마구잡이로 술과 음식을 공짜로 먹는 자가 많이 생기고, 혹 따로 그릇과 의복까지도 억지를 부리며 달라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같은 나라의 옛 정리를 생각해서 주인이 지키는 것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으면, 그 틈을 노려 물건을 훔치기까지 했으니,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매번 사행이 도착하면 술과 음식을 감추고 기꺼이 팔지 않으려 하고, 간절하게 요구해야 마지못해 팔긴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고 혹 값을 먼저 치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말몰이꾼들도 반드시 온갖 꾀를 동원하여 사기를 쳐서 분풀이를 하니, 서로 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1권 409~410쪽- ◆방대한 내용…옮긴이, 5가지 주제에 주목 '열하일기'는 방대하다. 내용이 너더분하고 지엽적이며, 지루한 부분도 많다. 전고(典故)나 음악, 시화, 우주론 등을 전문적으로 다룬 부분도 있다. 때때로 잡다하게 보이는 부분까지 연암의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지만, 독자들 입장에서는 독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옮긴이 김혈조 교수는 이 책 번역에서 크게 5가지에 주목하고 있다. 첫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다. 조선 선비들에게 '열하일기'에 수록된 방대한 내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정보였다. 조선을 벗어나 청나라에 입국한 뒤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견문과 열하 지방에서의 체험은 조선 선비들에게 훌륭한 정보이자 읽을거리였다. 둘째는 선진 문화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이다. 연암은 당시 평범한 선비들처럼 청나라를 북벌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중국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에게 청나라는 조선의 낙후한 문화와 만성적 빈곤을 타개할 수 있는 배움의 대상이었다. 셋째는 '천하대세에 대한 전망'이다. 당시 세계의 중심부였던 중국 천하의 변화는 곧 주변부였던 조선의 정세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연암은 중국의 통치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통찰하는 한편, 천하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예의주시했다. 넷째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묘사와 인물형상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전망하려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책 '열하일기'에는 최고 통치자 황제에서부터 종교 지도자, 고위관료, 정치적 실세, 지식인, 하급관료, 서민대중, 하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들의 행동양태가 그려져 있다. 다섯째는 선비, 즉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에 관한 문제다. 선비란 독서하는 사람인데, 선비의 사회적 역할은 독서내용을 실천하는 데 있다. 연암은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고 말한다. 연암은 선비들이 독서로 습득한 지식을 이용후생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북학은 이용후생의 길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했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이 책은 위의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권 559쪽, 2권 544쪽, 3권 581쪽, 각권 3만원. ▷지은이 박지원은….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문학가이고 실학파 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재야의 지식인으로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선비 곧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일생 동안 깊이 고민하고 성찰했다. 그의 산문은 중세적 사유의식을 떨쳐버리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44세(1780년)에 중국을 여행하고 지은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세계 고전사에 남을 기념비적 저술이 되었다. ▷옮긴이 김혈조 김혈조는 성균관대 한문학과에서 '연암 박지원의 사유양식과 산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영남대 한문교육과에 재직하며 한국한문학의 산문 문학, 특히 연암의 산문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2017-11-18 00:05:04

[책 CHECK] 이해하기

이해하기 박규리 지음 / W미디어 펴냄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한다. 꿈과 희망에 상상력을 더해주는 밝고 화려한 그림들로 인해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새로움에 새로움을 더해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그런 변화와 창의력은 영원한 콘텐츠 왕국을 꿈꾼 월트 디즈니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책은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인 저자가 평소 그린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122편의 작품들은 저자가 미국 유학 시절이었던 2013년부터 졸업 후 한국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한 2017년까지 4년여 동안 생각하고 떠올렸던 것들을 그린 일종의 기록이다. 개성 넘치는 작품은 신비로우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준다. 저자는 "내 생각 이면에 담긴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 틈나는 대로 스케치북에 그려왔다"며 "순간순간 포착한 의식의 심연을 모아놓으면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책으로 펴냈다. 독자 여러분도 자아 찾기의 흥미로운 여정에 동참해 영감을 찾기 바란다"고 말했다. 저자는 월트 디즈니가 세운 대학 칼아츠(CalArts) 캐릭터 애니메이션학과를 졸업하고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46쪽, 3만원.

2017-11-18 00:05:04

[책 CHECK] 도시 민들레

도시 민들레 윤경희 지음/ 고요아침 펴냄 '그것도 사람의 발길 바삐 오가는 한길 가/ 겁 없이 흔들리며 온몸을 지탱합니다/ 어둡고 찬 보도블록, 몇 날 밤 그리 앓은/ 휘어진 관절마다 바람이 스쳐 갑니다/ 땅바닥 틈새에 화사한 문패를 내건/ 한참을 꿋꿋이 피워올린 한 생의 눈부심이여' -'도시 민들레' 중에서 일상의 풍경들을 시인의 눈으로 다시 보고 노래한 시들이다. 시를 읽다 보면 주위 풍경을 다시 보고, 삶을 반추하게 한다. 시집은 1부 '직선 혹은 곡선', 2부 '그, 저물녘', 3부 '오동나무 안부', 4부 '백일홍 저녁' 등 총 4부로 구성돼 있으며, 50여 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윤경희 시인은 자전적 시론에서 "불빛을 등진 노란 민들레가 허리를 구부린 채 피고 있다. 척박한 이 도심의 길 위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용케도 피해가며 몸을 흔든다. 선명한 노란빛에 눈이 부시다. 문득 스피노자의 눈부신 사유처럼 생각의 끈을 풀었다가 팽팽히 감아 본다"고 쓰고 있다. 시인은 2006년 등단했으며 대구예술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비의 시간' '붉은 편지' '태양의 혀' 등이 있으며, 현재 유심시조 동인, 영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94쪽, 1만원.

2017-11-18 00:05:04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그림 정중앙에서 걸어나오는 두 사람은 플라톤(왼쪽, 붉은 옷)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푸른 옷)이다. 바티칸 미술관 소장.

'만물의 영장' 인간, 걸으며 '생각 근육' 키웠다…『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우리는 서서 이동한다. '걷는다'고 부르는 행위다. 한쪽 발을 내밀어 바닥을 딛고, 다른 발을 던져 내려놓고, 다시 이전 발로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이다. 걷기는 추락에서 시작한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려놓으면서 추락이 시작되고, 넘어질 뻔하다가도 새로운 추락으로 균형을 회복한다.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다른 발을 떼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게 있다가는 넘어질 수도 있다. 걷기는 인간을 특징짓는 행동유형이다. 말과 생각만큼이나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분 짓게 하는 유일한 특성이다. 그렇다면 걷기와 말하기, 그리고 생각하기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로제 폴 드루아는 철학자의 걸음에서 사유와 이성을 발견한다. 걸음을 '나아가기' 또는 '벗어나기'로 보고 걷기와 철학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저는 걷기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점에 근거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 책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생각의 단초를 걸음걸이에 두고, 동서고금의 사상가 27명의 철학을 살핀다. 철학자의 걸음이 숨긴 그들의 내면세계를 파고들어가 걷기와 사유 메커니즘의 유사성, 연관성을 확인한다. 결국, 걷기는 그 자체가 인간의 '생각 근육'을 키우는 행위다. 철학은 걷기처럼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사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명백한 사실, 신념을 자극한 사람들이 철학자였다. 생각의 거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걸었다. 이들의 걷기는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배회가 아니다. '국가론'을 읽지 않아도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선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대비했다. 꼼짝없이 묶여 벽을 보는 죄수는 자신의 그림자를 실재로 여긴다. 지각하는 그대로가 실재가 아님을 알려면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진짜 사물과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태양빛을 보는 순간 감각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허상에서 벗어나려면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해야 하고, 어둠에 갇혀 있는 다른 죄수를 무지에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지에서 앎, 다시 앎에서 무지로 가는 과정은 불완전의 세계를 바꾸는 과정이다. 즉 플라톤의 걷기는 실재를 알고 이데아로 나아가는 걸음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공자의 사상은 인(仁)으로 대표된다. 사회질서가 안정되려면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그는 하늘을 절대적 존재, 본보기로 인식하면서도 인간과의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된다고 봤다. 저자에 따르면 공자에게 있어 인(仁)은 적당한 거리를 지키기 위해 조정되는 유연한 움직임이다. 노자는 걷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걷게 한다. 그의 '무위'(無爲)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데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노자에게서는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전진하는 걸음이라는 역설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을 의심하던 방법론적 회의론자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사실, 즉 '의심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가 된다. 저자는 방법(method)이 '길'과 관계가 있다며 데카르트 사유 원리를 파헤친다. 그리스어로 'odos'는 '길, 여정'이다. 그래서 방법론은 '도정'(道程)이며 '길 위로 이동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정확하게 연결되는 한걸음, 한걸음이 추론의 고리를 형성한다고 한다. 칸트는 시간을 잘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오전 4시 45분에 일어나 5시에 차 두 잔을 마시고, 파이프 담배 두 모금을 피웠다. 7시부터 9시까지 강의하고, 9시부터 식사 전까지는 책을 썼다. 오후 7시 정각에는 부르주아가 사는 구시가지, 서민의 고함이 울리는 부둣가, 도시를 벗어난 자연을 매일 산책했다. 매일 두 발로 모든 사회를 지나친 그의 일상은 고장 나지 않는 시계와 같았다. 그런 그가 단 한 번 지각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신문을 사러 갔던 날이다. 저자는 그의 걷기 시계에 일어난 작동이상이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 윤리적 원칙을 법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인간이 도덕적 관점에서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밖에 저자는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변증법을 이야기했던 헤겔조차도 걸음을 고민했다고 말한다. 헤겔이 서재에서 도출한 변증법이 자율적 걸음이자 인간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내적 균열이라는, 다소 억지 같은 저자의 주장은 '머리로 걸었다'고 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물론과 다시 연결된다. 머리가 아닌, '다리로 걷는' 것이 물질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며,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해 필요한 강제의 노동에서 벗어나는 걷기가 '진짜 걷기'라고 말한다. 이동, 산책, 여행, 등산…. 걸음을 내포한 행위는 수없이 많다. 수많은 걸음걸이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생각이다. 어쩌면 증명을 요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다. 걷기가 그렇듯 사유도 철학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색의 여정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었다. 걷고, 뛰고, 타고 오르고, 춤추는 모든 발자국이 세계와 호흡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걷다 보면 또 다른 사유 원리, 새로운 명제가 생길 것 같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220쪽, 1만4천800원.

2017-11-18 00:05:04

저자는 한반도 5천 년 역사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광해군 등 24명의 왕을 현대로 불러내 그들의 업적과 과오를 민주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사진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또는 고종황제)

민주주의 관점서 본 24명의 군주…『왕을 말하다』

군주제 사회의 정점엔 '왕'(王)이 있었다. 전통시대 왕은 국정의 최고 통수권자였고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전제군주였다. 이 책은 권력의 저울 위에서 때로는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때로는 평온하게 역사를 써내려간 우리 역사의 왕들을 소개한다. 작가의 시점에 의해 이 책에는 모두 24명의 왕이 등장한다. 현대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왕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저자는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왕을 둘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민족의 관점'에서 본 왕이고, 둘째는 '민주적 관점'에서 본 왕이다. 전자(前者)에서 왕은 과거 신민(민족)을 이끌던 지도자로 나타난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통치자로서 왕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외세에 맞서 영토를 지켜냈거나 민족의 자존심을 높인 왕은 찬양의 대상이 되고 반대의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된다. 민주적 관점에서 왕은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의 대표자로 나타난다. 왕 한 사람이 유일한 주권자였던 전제군주제는 모든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와 완전히 대립되는 체제였다. 지난 수 천 년 동안 전제군주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반드시 타도되어야 하는 체제였고 부활해서는 안 되는 낡은 유산이었다. 이 책은 앞서 제시한 두 개의 분석 틀 중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왕들을 평가하고 있다. 이 시각에서 보면 아무리 위대했던 왕이라 하더라도 그의 리더십은 세습군주제 산물이므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저자는 '단군왕검'에서 군주의 탄생과 의미를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개토대왕'에서는 한국사에서는 드물게 신민과 군주 사이에서 주체적 왕권을 견지했던 대왕의 사례를 통해 자주적 리더십에 대해 살피고 있다. 백제의 중흥군주 '무령왕' 편에서는 반란을 일삼던 귀족들을 제압하면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리더십에 초점을 맞춘다. 몽골의 지배하에 놓였던 고려의 후기 왕들을 통해서는 일국의 왕이면서 동시에 다른 제국의 신하였던 '충(忠)자 돌림 왕'들의 비극을 다뤘다. 서출(庶出) 콤플렉스에 찌들어 있었던 조선 14대 왕 '선조' 편에서는 정통성의 콤플렉스가 어떻게 왕실에서 후계를 둘러싼 살육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묘사했다. 나아가 권력 사유화의 아이콘 연산군, 북벌의 정치를 주창했던 효종, 예송의 군주 현종, 탕평의 군주 영조 이야기도 특유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병자호란 비운의 왕 '인조' 스토리도 흥미롭다. 저자는 인조의 처세를 백성을 버리고 달아난 무능한 군주, 조선왕조 정신을 지키려다 무릎을 꿇은(삼전도 굴욕) 지도자로 분류하며 독자들에게 그 평가를 맡기고 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휘청거리다 백성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고종에 대해서는 주체성을 상실한 실패한 군주인지, 황제 자리에 올라 독립국가로서의 존엄을 지킨 군주인지 묻고 있다. 저자는 단군에서부터 조선의 고종에 이르기까지 24장에 걸쳐 우리 역사 속 왕들을 '소환'하고 있다. 개성이 뚜렷한 왕들이 주로 등장해 일독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독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교양서로서의 목적 외 왕의 일대기, 영웅담이 아닌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역사 속 왕들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군주'에서 '민주'로 나아갔던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을 흐릿하게나마 '포착'해 낼 수 있다. 318쪽, 1만4천원.

2017-11-18 00:05:04

[반갑다 새책] 근원을 탐색하는 서정시집 '꽃댕강나무'

서정시집 '꽃댕강나무' 이구락 지음/ 신상조 해설/ 문학세계사 펴냄 이구락 시인의 시는 순화시키는 힘이 있다. 시인은 현실에서 만나는 풍경을 담담한 언어로 써 내려가는데, 오직 풍경 전달자의 모습으로 써내려간다. 그의 표현대로, 누가 불러주기라도 하듯, 풍경이 그에게로 왔고, 그는 그 풍경을 받아 적는다. 시인이 자신에게 온 풍경을 받아 적는 동안 하나의 길이 생긴다. 그 길은 그의 내면으로 이어진다. 객관적인 묘사만으로도 이구락 시인의 시는 새로운 공간과 심상을 구축해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낡았던 공간이 새로워지고, 살아난다. 그의 내면은 마치 낮은 곳을 향해 걷는 구도자처럼 겸허하다. 이구락 시인은 시집 '꽃댕강나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근원을 탐색한다. 또한 바람직한 어떤 것, 관조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심연에 도달하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 볼 수 있게 만든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서쪽 마을의 불빛'(1986), 자연과 소통함으로써 삶을 정화하고 자기화하려는 '그 해 가을'(2002)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그의 시는 삶을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자연에서 깨달음으로 얻으려 노력한다. 대신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함으로써 현실의 삶을 정화하려한다. '시'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그의 생각을 잠시 엿본다. "한밤중에 깨어 앉아 책을 읽으면/ 글자 사이에서 물소리 들린다/ 호수에서 듣던 바로 그 물소리다/ 이런 날 밤 시를 쓰면/ 물소리가 행간에 차올라/ 시는 한 줄도 써지지 않고/ 시마(詩魔)에 씌어 잠들지도 못한다." 136쪽, 1만 원.

2017-11-18 00:05:04

팔짱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걸, 모던보이를 묘사한 삽화.('별건곤', 1927. 2.)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대중잡지 '별건곤'의 별난 세상 이야기

대학교 2학년 때였다. 1920, 30년대 잡지 관련 스터디를 하던 중, 독특한 이름의 잡지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있던 선배에게 이 잡지는 도대체 어떤 잡지냐고 물었다. 선배의 답은 간단했다. "'선데이 서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잡지의 성향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그 시절 '선데이 서울'은 특정 잡지를 일컫는 고유명사이자, 통속 대중잡지 전반을 대변하는 일반명사였기 때문이다. 선배가 1920, 30년대의 '선데이 서울'이라고 말한 그 잡지 이름은 '별건곤'(別乾坤)이다. '별건곤'은 1926년 11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취미와 실익(實益)'을 내걸고 발행된 대중잡지이다. '별건곤' 즉, '별난 세상'이라는 제명처럼 이 잡지가 보여주는 세상은 상당히 통속적이며 흥미진진하다. 당대 사회의 히로인이었던 단발머리 모던걸이나 이름 모를 양장미인을 미행하고, 신식 결혼식장에 잠입하여 그 이면을 포착하여 기록한다. 또 다른 장에서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은밀한 비밀고백을 모은 글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별건곤'이 타인의 은밀한 내적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대중의 통속적 '취미' 맞추기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니다. 소매치기당하지 않는 법에서부터, 경성을 골고루 구경하는 법, 조선 팔도 맛있는 음식 소개 등 생활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실익' 기사도 양념처럼 섞여 있었다. 미용실에서 여자들 간에 오가는 시시콜콜하고도 잡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여성잡지의 일면이 '별건곤'에서 그대로 수용된 것이다. 죽은 여자를 면도시킨 이야기와 같은 '별건곤'에 단골로 실린 섬뜩한 서구 괴담 역시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미용실 잡담 수준의 일반 대중으로서 정통 추리물의 지적 추론과정을 따라가기란 다소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별건곤'의 괴기물은 추리물의 공포와 스릴은 스릴대로 느끼면서, 머리 아픈 추론 과정은 비켜갈 수 있는 최적의 이야기 형태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고단한 현실 탓일까. '별건곤'은 대중잡지의 가벼움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룬 기사 사이로 독립협회나, 항일운동단체 공명당, 조선의 농업 경제와 같은 난해하고 지겨운 주제의 기사가 함께 게재되었다. 대중의 '니즈'(needs)에 들어맞는 가벼운 읽을거리와 식민지 현실을 일깨우는 무거운 이야기가 함께 공존한 이 구성이야말로 '별난 세상'이었다. 가벼운 대중잡지에서조차 민족 현실을 위한 '계몽'을 도모해야 할 정도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무거웠던 것이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도, 군부 독재시대도, 민주화 투쟁의 열정적 시대도 모두 지나갔다.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가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지나간 어두운 과거의 어디쯤엔가 있는 듯하다. 대중을 계몽과 교화, 혹은 권력 추구의 대상으로서 삼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류가 세계적 문화현상이 되고 있는 지금, 대중예술은 대중의 선택에 맡겨야 할 것이다.

2017-11-18 00:05:04

김승각 작 '책방'

[내가 읽은 책] 서점 없는 동네는 동네도 아니다

「섬에 있는 서점」 , 개브리얼 제빈, 엄일녀 옮김, (주)문학동네(임프린트 루페), 2017 전 세계에 점포를 둔 맥도날드의 빅맥 가격을 통하여 각 국가의 물가 수준을 비교하는 '빅맥지수'가 있듯이 한국에는 '버거지수'가 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업체인 버거킹, 맥도날드, KFC 매장을 합친 수를 롯데리아 매장 수로 나누어 높은 수치가 나오는 만큼 발전된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버거지수'처럼 동네의 발전된 문화를 보여주는 '서점지수' 혹은 '책방지수'를 만들면 어떨까. 한 캐나다 언론이 '소설의 힘에 관한 강력한 소설'이라 칭한 「섬에 있는 서점」은 아직 국내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개브리얼 제빈의 여덟 번째 소설이다. 1977년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 시나리오 작가이다. 어린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이 미국도서관협회의 주목할 만한 아동도서에 선정되기도 하고,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재능을 뽐내고 있다. 앨리스 섬의 유일무이한 순문학 공급처 '아일랜드 서점'. 17평 크기의 이 작은 서점은 주인공 에이제이의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21개월 전 인생의 동반자이자 서점 공동운영자인 아내를 잃은 후 서점은 뒷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 휴가철마다 섬 안에 있는 단 하나의 서점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자연스럽게 매출을 올리고 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 홀로된 외로움으로 외딴 섬처럼 살고 있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보물을 도난당하고, 또 새로운 보물을 얻게 되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p.296) 「섬에 있는 서점」은 책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서점을 배경으로 쓴 소설답게 책이 나오고 그것이 모두를 연결한다. 또한, 소설의 목차이자 에이제이가 마야에게 전하는 단편소설 목록은 독자인 내가 다시 한 번 찾아봄으로써 소설을 넘어 현실에서 개브리얼 제빈과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 섬과 육지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인 '책'은 그 기능을 다른 것들에 넘겨주고 있다. 지식을 저장하고 습득하는 중요한 자리에서도 이제 더 이상 첫 번째가 아니다. 서점주인 에이제이(교양서가 아닌 소설만 취급하긴 하지만)조차 책이 아닌 인터넷 '구글'로 정보를 얻을 정도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 그래서일까? 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다시 에이제이를 통해 책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301) '아일랜드 서점'처럼 오래도록 이어져오며 책의 발견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책방이 많아지고 이와 함께 출판사도 다양하고 유용한 책을 발간하면 좋겠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독자들이 서로 공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2017-11-11 00:05:01

▷수학여행: 경성으로 수학여행 온 시골 학생이 백화점을 견학하던 중 식당 앞에서 말로만 듣던 돈가스, 야채샐러드, 카레라이스 등 음식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별건곡) 1932년 11월. ▷배달: 1934년 4월 5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안석영의 세태 만평 '음식 배달부와 귀부인'. 배달부가 음식 그릇이 가득한 큰 쟁반을 들고 한 손으로 곡예 하듯 자전거를 몰고 있다. ▷국수: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그림 '국수 누르는 사람'. 압출기 위에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면발을 뽑고 있다. 메밀 반죽이 단단해 메밀국수 만드는 작업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소머리: 음식점 입구에 놓인 소머리와 큰 칼을 들고 있는 주인 남자의 모습. 조선만화(朝鮮漫畵) 속 한 장면.

"냉면은 언제 들어왔을까" 1900년대 문인들의 미식회…『100년 전 우리가 먹은 음식』

100년 전 우리가 먹은 음식/백석'이효석'채만식 외 지음/가갸날 펴냄. 텔레비전엔 온통 요리 프로그램이다. 그만큼 요리에 관심이 많다는 말일 것이다. 거리로 나서면 각양각색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냉면을 맛볼 기회가 없었다. 냉면은 관북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고, 1920년 이전에 경성(서울)에는 냉면집이 없었다. 외식이 현대인에게는 일상이지만, 100년 전만 해도 '외식'은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197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식사는 으레 집에서 하는 것이었다. 여행자도 외식문화도 없으니 음식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책은 근대적 의미의 음식문화가 태동하던 20세기 초의 요리와 식당, 음식문화를 문학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당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에 요리나 요릿집을 등장시켰다. '100년 전으로 떠나는 음식 문학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성에 냉면집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최초의 요릿집이 문을 연 것은 1910년 무렵이었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큰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가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우후죽순 음식점과 선술집이 생겨났다. 때를 같이하여 냉면, 설렁탕, 추어탕, 군고기, 떡국, 만두 등 민초들이 사랑하는 대중요리가 등장했다. 1910년대에 이르자 관북지방 사람들이 즐겨먹던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고, 1920년 무렵엔 경성에도 냉면집이 생겼다. 1920년대 중반 서울 전동의 대구탕 집을 시작으로 고기를 음식점에서 구워 먹는 문화가 번지기 시작해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 무렵 음식 배달부도 등장했다. 1920년대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음식문화 혁명의 격랑에 휘둘렸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보수와 개혁이 충돌하고 일합을 겨루었다. 마침 당시는 근대문학이 여명기에서 중흥기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숱한 문인, 문사들이 그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던 장면을 소설로, 수필 형식으로, 르포르타주로, 기사로 담아냈다. 백석, 이효석, 채만식, 방정환, 김랑운, 현진건, 김유정 등이 문학작품으로 그 현장을 묘사했고, 구본웅, 안석영, 나혜석 등은 그림으로 그렸다. ◆내장을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김상용은 봄날에 명월관에서 교자 먹는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두어 고팽이 '복도'를 지나 으슥한 뒷방으로 들어서거든, 썩 들어서자 첫눈에 뜨인 것이 신선로. 신선로에선 김이 무엿무엿(무럭무럭) 나는데, 신선로를 둘러 접시, 쟁반, 탕기 등 크고 작은 그릇들이 각기 진미를 받들고 옹위해 선 것이 아니라, 앉았단 말일세. 이것은 소위 교자라. 에헴, '안석'을 등지고 '베개'을 괴고, 무엇을 먹을고 우선 총검열을 하겄다. 다 그럴 듯한데, 급할수록 모름지기 여유가 필요하니 서서히 차려보자. '달걀저냐'를 하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고, 다음으로 어회(魚膾), 또 다음으로 김치, 이러다 보니, '게장'과 '어리굴젓'이 빠졌구나. 이런 몰상식한 놈들을 봤나.』 -49쪽 그런가 하면 소설가 채만식은 1943년 1월 '신시대'에 '명태'를 발표했다. 『명천(明川) 태가(太哥)가 비로소 잡아 팔았대서 왈 명태(明太)요, 본명은 북어(北魚)요, 혹 입이 험한 사람은 원산(元山)말뚝이라고도 칭한다. 빼빼 마르고 기다란 몸 수구장신(瘦軀長身), 피골이 상접, 한 3년 벽곡(辟穀)이라도 하고 온 친구의 형용이다. 배를 따고 내장을 싹싹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쇳소리가 나도록 바싹 말랐다. 눈을 모조리 빼었다. 천하에 이에서 더한 악형(惡刑)도 있을까. 모름지기 명태 신세는 되지 말 일이다. 조선 13도 방방곡곡 명태 없는 곳이 없다. 아무리 궁벽한 산골이라도 구멍가게를 들여다보면 팔다 남은 한두 쾌는 하다못해 몇 마리라도 퀴퀴한 먼지와 더불어 한구석에 놓여 있다. 그러니 조선땅 백성들이 얼마나 명태를 흔케 먹는지를 미루어 알리라.』 -21, 22쪽 ◆소머리를 푹 고아 우려낸 국물은 최고 자양제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음식문화를 접하고 느낀 글도 싣고 있다.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밥집은 일본의 선술집과 분위기가 비슷했던 모양이다. 일본인 우스다 잔운은 1909년 '조선만화'(朝鮮漫畵)에 실은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쇠칼을 쳐든 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재미있다.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국물 냄새가 코를 찔러, 눈을 돌리면 주변 가게에는 커다란 진열대 위에 생소머리가 놓여 있다. 국물을 우려내는 소머리가 장식품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피가 줄줄 흐르고 파리가 날아다니는데, 밥집의 간판으로는 기발하고 통쾌하다. (중략)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이 소머리 국물은 정말 좋은 것으로, 닭고기 국물이나 우유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커다란 솥을 연중 불 위에 걸어놓고 바닥을 비워 씻는 일 없이 매일 새 뼈로 바꾸어가며 물을 부어 끓여낸다. 이 국물, 즉 스프는 아주 푹 끓인 것으로, 매일 끓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부패하지 않는다. 이것을 정제하면 아마 세계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양제가 되고, 향후 병에 담아 한국 특유의 수출품으로 상용할 수 있을 것이다.』 -59~61쪽 ◆배달부와 음식 주문한 사람의 실랑이도 매일신보 기자가 냉면 배달부로 나서서 냉면, 설렁탕, 만두 등을 배달한 체험기도 싣고 있다. 배달 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주인이 '땅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라'고 당부하는 모습, 좁은 골목을 자전거 속력을 내 달리다가 부딪혀 넘어지는 이야기, 주문한 집에 도착해서 음식을 다른 그릇에 부어주고 그릇을 되가져오는 장면 등을 묘사한다. 음식을 주문한 사람과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 사이에 실랑이는 예전에도 드문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주인이 배달부가 가져온 장국을 따르다 말고, "아니, 국물이 요고뿐이야. 이걸 가지고 어떻게 먹으란 말이야" 하고 탁 쏜다. "겨울에는 손님들이 국물을 많이 안 치니 깝쇼." "그건 무슨 소리야? 별놈의 냉면집도 다 봤네. 우리 집에서 냉면을 처음 먹어보는 줄 아나 봐, 참!" 그리고 여자는 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린다. 배달부는 추운 날씨에 밖에서 30분이나 기다린다. 그제야 주인은 미닫이문을 열고는 "돈은 내일 받아 가라"고 한다. 책은 음식에 관한 직접적인 글을 비롯해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 이야기, 식당 점원이나 배달부 체험기, 팔도명물 음식예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러 사람이 여러 시각에서 여러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224쪽, 1만2천800원.

2017-11-11 00:05:01

[책 CHECK] SUM RECIPE

SUM RECIPE 김섬 지음 / 바른북스 펴냄 이 책은 의사이자 요리사인 저자의 진료실과 일상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요리 에세이다. 경북 경산시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는 저자는 자신의 진로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요리하는 과정을 화보와 함께 실었다. 의사의 요리책답게 화려한 요리책이기보다 환자와의 스토리와 그에 어울리는 요리를 소개하고 있어 환자를 대하는 저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저자가 직접 요리하고 장보는 소탈한 모습이 담긴 사진은 눈으로 읽고 먹거리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이 책의 글 가운데 10번째 글인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서는 최근 많이 회자되고 있는 저탄수화물 고지방식이요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진료 방향, 그리고 저자가 추천하는 고지방식이요법 메뉴들이 소개돼 있다. 특히 낙농업이 발달해 고지방식이요법이 활성화돼 있는 네덜란드 전통 메뉴가 소개돼 눈길을 끈다. 다만 전문적인 요리책이 아니어서 그런지 요리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읽는 이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요리 사진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촬영되었으며, 네덜란드 젊은이들이 즐겨먹는 음식들도 메뉴에 포함돼 있어 이채롭다. 200쪽, 1만6천원.

2017-11-11 00:05:01

[책 CHECK] 나 여기 가고 있다

나 여기 가고 있다 임지나 지음 / 문학의 숲 펴냄 이 책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쉼 없이 걸어온 저자의 삶에 대한 고백과 성찰의 기록이며, 어려움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축복의 메시지이다. 작가의 삶은 압력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빛을 머금은 보석과 닮았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매순간 빛나고 있었음을 40여 편의 글을 통해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갈 만하다고 따뜻하고 감성적인 글을 통해 잔잔하게 속삭이고 있다. 살아온 시대는 달라도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작가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토닥토닥 위로를 건네고 있다. 걸어온 길보다 가야 할 길이 짧아진 지금,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짊어졌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음을 고백한다. 남보다 항상 늦었지만 쉼 없이 걸어왔기에 이제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딸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자는 1975년 하와이로 이민. 1978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으며 C.A 오렌지카운티에서 29년간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다. 미주 한국일보 논픽션 입상,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을 받았다. 현재 오렌지 글 사랑 회장으로 있다. 304쪽, 1만5천원.

2017-11-11 00:05:01

대구도시철도 3호선이 지나는 금호강 횡단교에 야간 경관조명이 점등되어 아름다운 볼거리를 선보이고 있다. 매일신문 DB

저 다리는 왜 저렇게 지었을까…『다리 구조 교과서』

다리 구조 교과서/ 시오이 유키타케 지음/ 김정환 옮김, 문지영 감수/ 보누스 펴냄 크고 긴 다리는 만들어질 때마다 종전의 기록을 경신한다. 모양도 갖가지다. 쓰러진 통나무로 다리를 놓던 인류가 수심 100m 바다에까지 다리를 놓게 됐다. 다리가 생기면서 생활권은 넓어지고, 교류와 무역도 늘었다. 하지만 다리는 언제나 전문가 '토목쟁이'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제각기 다른 모습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다리. 다리 교과서가 나왔다. '다리 구조 교과서'는 20년 넘게 현장에서 활동한 일본 출신 교량공학자 시오이 유키타케가 펴냈다. 제목이 알려주듯 다리를 설계하고 시공할 때 고려할 사항부터 발전사, 가설 공법, 지지 원리 등 다리에 관한 기초지식을 총망라했다. 정말 교과서다. 저자가 일본인이다 보니 일본에 가설된 다리가 많이 보이지만 유럽, 미국뿐만 아니라 한'중'일의 유명한 다리를 비교하고 공법도 꼼꼼히 살펴봤다. 또 전문용어나 토목기술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페이지 절반은 그림이나 사진이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딱딱하고 복잡한 기술서가 아니다. 다리를 건설한 인력이 승려였던 까닭, 궁궐 앞 명당수 위에 놓은 다리의 의미, 뼈아픈 근대사를 지닌, 남북이 함께 만든 '승일교'에 대한 이야기도 다룬다. 저자는 다리의 상부구조를 눈에 보이는 모습(재료)에 따라 나눴다. 구조 형식에 따라 아치교, 형교, 트러스교, 라멘교로, 주탑에 연결해 보를 지탱하는 케이블 형식에 따라 현수교, 사장교로 구분했다. 아치교의 원리는 모래밭에서 만든 두꺼비집과 같다. 두꺼비집에서 손을 빼도 흙이 무너져내리지 않는 건 굴 주위에 압축력이 생겨 무너지지 않는 아치 작용 때문이다. 석조 아치교는 철재, 시멘트 등 강재가 보급되기 전까지 아치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유럽 명소로 꼽히는 세고비아 수도교, 피렌체 베키오 다리, 프라하 카렐교, 퐁뇌프의 다리는 모두 석조 아치교라는 공통점이 있다. 국내에 대표적인 석조 아치교는 불국사 백운교와 청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를 들고 있다. 선암사 승선교나 벌교 홍교도 여기에 속한다. 강아치교는 호주 시드니 하버 브리지를 떠올리면 된다. 형교는 통나무 다리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 단순보를 양쪽에서 떠받치는 형태로 하중에 의한 압축 응력(누르는 힘), 인장응력(늘어나는 힘)으로 발생하는 휨이 특징이다. 한강에서는 형교를 자주 볼 수 있다. 양화대교는 우리나라 기술의 힘으로 처음 세운 한강 다리다. 서강대교'천호대교'원효대교'노량대교는 모두 형교의 보 구조를 변형한 것들이다. 엑스트라도즈드교는 긴 형교를 만들고자 사장교처럼 만든 것으로 야경이 환상적인 대구도시철도 3호선 금호강 횡단대교가 여기에 속한다. 트러스교는 봉 부재를 삼각형으로 짜서 작용하는 힘을 다르게 만든 구조다. 사실 철교가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한국 최초의 트러스교는 한강철교다. 최초로 신기술을 도입한 교량이지만, 침탈 목적의 일본에 의해 놓인 아픈 역사를 가진 다리다. 부산 광안대교와 서울 동호대교는 트러스교의 지간을 넓게 한 연속 트러스교이고, 지간 549m에 이르는 캐나다 퀘벡교가 세계에서 가장 긴 트러스교다. 1994년 등굣길'출근길 시민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는 게르버트러스교였다. 교각 사이 다리 중간 부분이 무 썰듯 댕강 떨어져 나간 건 이음매가 용접이 허술해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연결부도 부식됐기 때문이었다. 라멘교는 부재 사이의 결합부를 일체화한 구조로, 지진에도 낙교하지 않는 이점을 가진 다리다. 청담대교와 같은 π 형 라멘교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라멘교다. 라멘교는 일반적으로 딱딱한 느낌을 주는데 평범하고 경제성이 뛰어나 고속도로'철도 고가교로 많이 쓰인다. 케이블에 부재를 매달아 하중을 지탱하는 다리에는 현수교와 사장교가 있다. 현수교는 높은 주탑을 주 케이블로 연결하고 주 케이블에 매달린 로프로 노면을 지탱한다. 지간이 길수록 하중이 커지기 때문에 가벼운 보와 강한 케이블로 만들어내는 긴 경간은 토목기술 전쟁의 승자를 가른다. 영종대교, 남해대교가 이에 속하며 광안대교는 현수교 양측에 트러스교가 복합된 형태다. 2013년 개통된 이순신대교는 주경간(두 주탑 사이의 거리)이 1천545m에 이르는 장대 현수교로, 현재까지 완공된 다리 가운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지간을 자랑한다. 일본의 아카시해협대교는 지간 1천991m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다. 잘 알려진 현수교 가운데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가 있다. 사장교는 주탑에 연결된 경사 케이블이 노면을 직접 연결해 보 하중과 통행 하중을 감당한다. 인천대교는 아치교, 형교(엑스트라도즈드교)와 합쳐진 형태로 국내 최장 경간(800m)을 기록하고 있다. 대구 명물이 된 도시철도 3호선 대봉교 구간도 사장교에 속한다. 올해 3월, 2023년 개통하면 세계 최장의 현수교가 될 '차나칼레대교'의 수주를 한국 기업들이 따냈다. 우리 기술 수준을 다시 한 번 세계에 알린 쾌거다. 1950년대 열악한 장비, 홍수나 수심 등 악조건 속에서도 신용을 무기로 고령교 보수공사에 성공했던 현대건설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지 60여 년 만이다. 다리를 건너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야경을 장식하는 다리가 예쁘다고 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잘 모른다. 다리를 잘 안다고 해도 사고가 일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관심이 커진다면 부실이 줄어들 수도 있다. 아니면 사진 찍는 재미가 늘어날 수도 있다. 248쪽, 1만3천800원.

2017-11-11 00:05:01

[반갑다 새책] 영남지역 출신 시인들의 시집 해설·평론 간추려 정리한 단행본

성찰과 동경/ 이태수 지음/ 그루 펴냄 이태수 시인의 시론집 '성찰과 동경'이 출간됐다. 지난해 펴낸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 '여성시의 표정'에 이은 세 번째 시론집이다. 대구경북 지역 현역 시인 외에도 부산'울산'경남 지역 시인과 경남 출신 시인의 시집 해설 위주로 글을 실었다. 책에는 전 천주교대구대교구장 대주교 이문희 시인의 시집 '아득한 여로'에 대한 해설 '그지없는 사랑의 시학'을 비롯해 '형이상학적 역설과 지극한 사랑'(이정우 신부의 '울지 않는 마돈나'), '촉기와 불잉걸의 시학'(강희근의 '기침이 난다'), '향수와 자연회귀의 미학'(도광의의 '그리운 남풍'), '무상의 깊이와 높이 성찰'(정민호의 '무하향의 하늘'), '시적 여정과 사유의 지형도'(김원길의 '시를 위하여'), '서사적 서정과 연민의 정서'(박영호의 '바람에게 길을 묻다') 등이 실렸다. 이와 함께 이근식'김종섭'김윤현'하재영'이승주'김욱진'장효식'박태환'박동덕'김강석'홍준표'구양숙'이선영'김금아'김교희'조영힌'심수자'은종 시인 등의 시집 해설 25편, '유미주의와 초월에의 꿈'(이수익의 시세계), '구원, 우울한 삶, 사랑, 우주감정'(이구락의 시세계) 등 작품론 2편과 박종해 시집 '이 강산 녹음방초'에 대한 서평 '복고주의의 신선한 울림' 등 28편을 묶어 펴냈다. '그는 말을 꼬부리거나 비틀지도 않고, 눈에 띄는 기교는 거의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면서, 대범한 말들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유장한 어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솔하면서도 품격을 유지하고, 무덤덤한 듯하면서도 범속으로 떨어지지 않으며, 억지스러운 제스처나 신기성을 좇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은밀하게 맛보고 있다.'-서평 '복고주의의 신선한 울림' 중 저자는 서문에서 "모두 청탁에 의해 쓰인 글이기 때문에 비평적인 시각보다는 그 나름의 시 깊이 읽기로서의 풀이에 무게가 실렸으며 작품의 특성과 개성을 긍정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 "같은 성격의 시론집과 대구경북 출신 작고 시인에 대한 시론집'문예지를 비롯해 매체를 통해 발표된 평론을 간추려 정리한 단행본을 내고 싶다"고 밝혔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이태수 시인은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따뜻한 적막' '침묵의 푸른 이랑' '회화나무 그늘'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내 마음의 풍란' 등 시집 13권과 육필시집 '유등 연지', 시론지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 '여성시의 표정' 등을 냈으며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7-11-11 00:05:01

[이종문의 한시 산책] 가족들과 헤어진 채 '혼밥·혼술' 처지를 노래함

외기러기 두보 외기러기, 마시지도 먹지도 아니하고 孤雁不飮啄(고안불음탁) 울고불고 날아가며 가족들을 찾고 있네 聲聲飛念群(성성비념군) 누가 가련하다 할까, 저 외로운 기러기가 誰憐一片影(수련일편영) 만 겹 구름 속에서 서로 잃어버린 것을! 相失萬重雲(상실만중운) 시야에서 사라져도 눈에 자꾸 밟혀오고 望盡似猶見(망진사유견) 어찌나 슬프던지 또 그 울음 들리는 듯 哀多如更聞(애다여갱문) 떼로 모인 들 까마귀 정말 무심하기만 해 野鴉無意緖(야아무의서) 까윽까윽 울어대며 저들끼리 야단법석 鳴噪自紛紛(명조자분분) *원제: 고안(孤雁) 위의 작품은 시인이 어느 날 대열에서 이탈된 외기러기 한 마리를 발견하는 데서 시상이 시작된다. 가족들과 함께 만 겹 구름 속을 일렬종대로 날아가다가, 잠시 멍 때리는 사이에 그만 낙오가 된 외기러기다. 그 외기러기는 마시고 먹는 것을 전폐한 채로, 가족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 저 광활한 천지를 울고불고 나는 저 외기러기를 가련하게 여기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외기러기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고, 저들끼리 모여 떠들어대는 들 까마귀 같은 것이 세상인심이다.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이에, 그 외기러기는 시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가 눈에 밟히고,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자꾸만 다시 들려온다.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환시(幻視)와 환청(幻聽) 상황은 대상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도대체 시인은 무엇 때문에 이 외기러기에게 그토록 애틋한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시를 지은 두보(杜甫, 712~770) 자신이 혼밥을 먹고, 혼술을 마시고, 혼잠을 자는 날이 많았던 당나라 시대의 혼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과 가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들과 뿔뿔이 헤어진 채로 천지 간을 떠돌아다녔던 시인 자신이 바로 외기러기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는 시종일관 외기러기를 노래했지만, 실상 시종일관 자기 자신을 노래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식음을 전폐하고 엉엉 울어댄 것도 물론 두보 자신이다. "나비다!/ 뜻밖인 듯 아이가 소리친다/ 전동차 한곳으로 옮겨 붙는 시선들/ 가녀린 나비 한 마리 가는 길 묻고 있다// 깜박 졸다 지나친 역 여긴 어디쯤일까/ 무심코 따라나선 꽃향기 사라지고/ 이제야 보이는 수렁 너무 깊이 들어왔나// 축 처진 어깨처럼 한풀 꺾인 날갯짓/ 전동차 손잡이에 애처로이 매달릴 때/ 인생길 잠시 접은 채/ 나비가 된 승객들" 이광 시인의 시조 '지하철 탄 나비'다. 세상에, 나비가 지하철을 타다니? 잠시 멍 때리는 사이에 어디로 가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지하철을 타게 된 나비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런데 바로 그 나비 위에 외기러기 두보가 겹쳐지고, 그 위에 다시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시대의 혼족들이 겹쳐진다. 입동이 지나면서 바람도 점점 차가워지는데, 다들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7-11-11 00:05:01

권오을 전 국회의원의 부인 배영숙 씨가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온 삶의 이력을 담은 수필집을 내놨다.

자신보다 남편, 정치인 아내는 감정노동자?…『그대의 명함』

감정노동의 강도가 가장 큰 직업은? 각자 기준과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정치인의 아내도 유력한 후보군에 든다. 철저히 자아를 누르고 살아야 하는 데다 이름을 감춘 채 '○○○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숙명 때문이다. 이 책은 전 새누리당 권오을 의원의 부인 배영숙 씨가 쓴 수필집이다. 모처럼 '정치인의 아내'라는 이름표를 떼고 자신의 이름을 책표지에 박았다. 책 제목도 '그대의 명함'으로 정했다. 자신의 이름보다 배우자의 명함을 위해 살아야 했던 슬픈 추억이 배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소년 권오을과 짝으로 만나 사랑을 키우고 5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한 배 씨는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정치인의 동반자로서 살아온 삶의 이력을 한 권의 책으로 녹여냈다. 이 책엔 모두 39편의 작품이 실렸다. 배 씨가 수필창작센터를 노크한 지 20년 만이고 문단에 이름을 올린 지 17년 만이다. 권 전 의원은 권두언에서 "내 아내는 자기 이름으로 살았으면 뭔가 당당하게 이름을 빛냈을 사람이지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며 "눈가 주름과 머리에 내린 서리를 보니 안쓰럽고 미안하다"고 적고 있다. 저자가 수필집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남편 권오을의 20대 총선 출마가 좌절되면서다. 34세부터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왔고 환갑이 넘도록 정치판에 머물렀지만 이제 더는 '남편의 일'에 끌려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저자는 안동집을 대충 정리하고 서울집에 칩거하며 지난날의 삶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중'고교시절 일기장, 아이들의 육아일기, 거기에 수필교실에서의 습작들이 모이면서 부(部)가 되고 편(編)이 되어 단락과 행을 메워갔다. '60에는 60을 넘어서는 글을 쓰겠다'는 각오를 다진 저자지만 막상 펜을 잡았을 때 '60 생애를 아우르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글을 쓰면서 이상하게 유년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온 25년 세월만이 내 기억 속을 채우고 있었던 거죠." 저자는 고심 끝에 유년기의 추억은 접어두고 1996년(제15대 총선)부터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에는 작가의 60년 삶의 이력이 소상히 적혀 있다. 1부 '꿈꾸는 집'에서는 북한산 밑 아파트에서 누리는 소소한 일상의 삶들과, 교사'민속학자'큐레이터'요가 지도자를 꿈꾸며 쉴 새 없이 도발을 일삼던 저자의 극성스러운 도전기가 담겨 있다. 2부 '이젠 잘 안 들리네'에선 서서히 찾아온 난청에 놀라 걱정하는 이야기 '100근이 다 돼가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운동에 매진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본격 정치인의 아내로 살던 시기 기록인 3부 '그대의 명함'은 부부의 고단한 정치 역정이 담겨 있다.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후 성당 고해소에서 손수건 한 장을 흠뻑 적신 이야기, 선거철을 맞아 남편의 명함을 돌리는 부인들을 보며 몇 년 전 자신이 걸었던 길을 회상하기도 한다. 4부 '두 아들'에서는 이제 장성한 아이들과 추억을 더듬고, 5부 '소년과 소녀'는 1967년 안동초등학교에서 짝으로 만났던 두 꼬마가 중'고교를 거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60여 쪽에 빼곡히 글을 써내려 갔음에도 저자는 기억력의 한계로 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삶의 '매듭' 탓에 많은 구간이 여백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그를 가두고 있는 '정치인의 아내'라는 기억에서 탈출하고, 푸릇한 유년의 기록이 다시 돋아난다면 저자는 다시 펜을 들 것이다. 그땐 아마도 '나의 이름, 자신의 명함'으로.

2017-11-11 00:05:01

눈 깜박임만으로 써내려간 삶의 기록…『당신은 모를 것이다』

당신은 모를 것이다/정태규 지음/김덕기 그림/마음서재 펴냄 눈 깜박임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정태규 작가가 '안구 마우스' 장치를 이용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생의 기록이다.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였던 지은이는 2011년 어느 가을 아침,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왼팔을 꿰고 오른팔을 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이 없었다. 오십견이 심해졌나? '이제는 나도 늙나 보다.'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와이셔츠를 입었다. 그런데 단추를 채울 수 없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보, 단추가 안 끼워져." 그날부터 점점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가벼운 물건조차 들지 못하고, 길을 걷다가도 맥없이 푹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대체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1년여 만에 루게릭병임을 알았다. 첫 증상이 나타난 뒤로 7년이 흘렀다. 루게릭병은 몸에서 근육이 점점 사라지고, 전신이 마비되며, 결국 호흡마비로 사망하는 병이다. '신이시여, 왜 저란 말입니까.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씀입니까!' 갑자기 닥친 가혹한 불행 앞에 지은이는 신을 저주하며 혼돈과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낯선 삶의 질서를 받아들였다.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구술을 했고, 구술조차 힘든 상황에 이른 뒤로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해 글을 썼다. 죽음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괜찮았다. 오히려 건강한 육신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생의 기쁨과 희망을 발견했다. 길게 늘어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는 생의 싱그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늘 속에서 바라보니 저 너머 밝은 곳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했다. 지은이는 '그늘'에 누워,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사소한 일상이 커다란 축복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간지러운 것도, 욱신욱신 쑤시는 것도 다 그대로인데 근육 세포만 쏙쏙 사라져 움직일 수 없는 병. 딱딱한 육체의 감옥에 갇힌 채 나를 나로부터 철저히 타자화 할 수밖에 없는 병.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 루게릭병이라고 말한다. 부산대병원의 검사 결과가 정확하다면, 나는 그 루게릭병일 가능성이 높았다.' -30쪽- 날마다 조금씩 나빠지는 병. 절대 좋아지지 않는 병. 병세를 늦추는 것이 가장 최선인 병. 그것이 루게릭병의 정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병, 오직 죽음의 날을 기다리게 하는 병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단지 이전과는 다른 질서 속에서 살게 될 뿐이다. 이전처럼 아침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일은 없겠지만, 내 손으로 옷을 입고 밥을 떠먹는 삶은 아니지만, 새로운 질서 속에서 내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 삶은 근육을 움직여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루귀, 괭이눈, 복수초…. 근육 없는 꽃들의 삶을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아직은 죽은 게 아니다.' 지은이는 병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해보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말문이 막히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가족과 추억을 더 많이 만들자고 말이다. 세 번째 소설집도 내고, 지금까지 쓴 작가론과 평론을 모아 평론집도 내고…. 그는 죽음에 저항하는 동시에 죽음을 긍정하고, 닥쳐오는 죽음과 보조를 맞추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갔다. 죽음이 지척에 도착했지만, 가족과 벗들은 떠나지 않았다. 위루관(환자의 위장에 관을 넣어 음식물을 주입할 수 있도록 만든 관)과 호흡기 사이에 아내가 있고, 매트리스와 굳은 몸 사이에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는 두 아들이 있다. 안구 마우스와 아직 깜빡일 수 있는 눈 사이에 후배들과 동료 문인들이 있다. 지은이는 '호흡기에서 들려오는 서걱서걱 거친 숨소리와 안방 창으로 가득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조화를 이루어 묘하게도 평화롭다. 이 방에 정적이 흐른다면 아마도 내 호흡기가 작동을 멈추었을 때일 것이다. 언제고 저 호흡기만 떼면 난 생을 달리할 수 있다. 이토록 가까운 죽음 곁에서, 나는 매일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한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분노 지은이는 두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 깜박일 수 있는 두 눈으로 생의 기쁨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두려운 것은 죽음에 대해, 육체의 감옥에 갇혀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는 이 불행에 대해 분노나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이해인 수녀(시인)는 "고통 중에도 타인을 배려하는 노력과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시적인 문장들은 너무 아름답고 따뜻해서 오히려 슬프다. 살아 있는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며, 당연히 누리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자주 잊고 사는 우리에게 그의 글들은 다시 일어설 용기와 감사 그리고 희망을 심어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 삶에 대한 외경과 겸손을 체험적 고백으로 깨우쳐준다. 그의 간절한 눈빛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고 말한다. ▷지은이 정태규는 지은이 정태규는 1958년생으로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과 제28회 향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소설집으로 '청학에서 세석까지' '길 위에서' '편지'가 있으며, 산문집 '꿈을 굽다', 평론집 '시간의 향기' 등을 냈다. ▷그린이 김덕기는 그린이 김덕기는 1969년생으로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독특한 화풍으로 한국 화단에서 '색의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 3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밝고 경쾌한 색채로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그려 '행복을 전하는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276쪽, 1만4천원.

2017-11-04 00:05:00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