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책

 

[반갑다 새책] 와각을 위하여

군위 출신 김도향 시인이 펴낸 첫 시집이다. '와각'(蝸角)은 달팽이 뿔이라는 뜻으로 본래 의미는 '세상일은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듯 보잘것없는 다툼'이라는 뜻이다. 시들은 대부분 자연과 눈을 맞추고 있는 서정적 자아로 형상화되고, 주관화된 내면의 공조는 모두 불교의 평등적 세계관으로 귀결된다. 서범석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친불성(親佛性)은 모든 텍스트를 끌어안는 벼리(綱)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그의 시세계는 누에에서, '금강경' 바위에서, '보리달마' 수국에서, '만월보살' 파리지옥에서 '무간지옥'을 유추해 내며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있다. 특히 '자서'(自序)에서 '보리수나무 아래 개미 떼 한식경 놀다간다/ 어슬렁어슬렁 곰 한 마리 한나절 앉았다 간다…(중략) 나는 한 백 년쯤 앉아있다 보면 마애불 될까'로 적을 정도로 장(章)마다 불심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 '마지막 주유소'는 이 책의 모든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목적지가 정해졌다면 기름을 넣을지 말지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수도자의 고민은 마지막 주유소에서 극대화된다. 사바의 길을 주행(走行)하는 수도자들의 번뇌는 어디쯤에서 끝날까. 이 책이 던지는 최종 화두다. 139쪽 1만원.

2018-03-10 00:05:00

유럽 혁명의 주역은 '보통 사람들'…『유럽민중사』

유럽민중사/ 윌리엄 A. 펠츠 지음,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펴냄 이 책의 부제가 길다. '중세의 붕괴부터 현대까지, 보통 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 대략 저자가 말하려는 주요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윌리엄 A. 펠츠는 엘긴 커뮤니티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이자 시카고 노동계급연구소 이사다. 주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저서들을 많이 썼다. 이 책을 옮긴 장석준(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유럽의 민중투쟁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1987년 6월 항쟁과 2017 촛불혁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자 했다. 유럽은 종교개혁 급진파, 18세기 정치혁명, 노동계급의 발흥 등 아래로부터의 반란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 더없이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20세기에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붕괴와 러시아의 등장이 있었고, 냉전 시기의 민중 저항, 1968년의 학생'노동자 저항이 있었다. 저자는 역사라는 무대를 활보하는 위인의 행적을 구경꾼처럼 쫓아가지 않고, 오히려 민중이 사회 변화의 주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중세 이후 유럽 민중사의 입문서다. 민중투쟁사와 민중생활사를 소수 지배 엘리트의 시각에서 탈피해,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재서술하고 있다. 민중사란 이런 지배적 역사 서술을 비판하고 전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즉, 이제껏 발언권도 제대로 없었던 집단(민중)을 끊임없이 새로 무대에 올려 역사 전반을 재구성하는 일로 보면 된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평탄한 진보의 길을 밟으며 복지국가라는 정점에 도달했다기보다 끊임없는 민중투쟁의 전진과 후퇴 속에 그나마 좀 더 나은 사회로 변해왔다. 지금도 그 과정은 진행 중이다. '유러피언 드림'이라는 이름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던 유럽이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가장 반동적인 신자유주의 지배층과 민중의 대립, 극우 인종주의 대안의 득세 등으로 시끄럽다. 이 책을 보면, 지금의 투쟁하는 유럽이 실은 기나긴 역사에서 오히려 더 익숙한 광경임을 깨닫게 된다. 유럽 중심주의의 신화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유럽 민중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유럽 민중의 투쟁과 역사를 집대성한 이 책의 밑바탕에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깔고 있다. 새로운 역사기술의 모범을 보인 20세기 중반 영어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릭 홉스봄, 에드워드 파머 톰슨 등)이 있고, 20세기 말의 풍요로운 미시역사 연구들이 있다. 이에 더해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 여성사 연구다. 이 방면의 역사학자들은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관련 주제들에 천착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시각에서 기존 역사상을 철처히 비판하고 재구성한다. 미국, 러시아 양측의 기밀문서 해제 덕분에 1차 사료의 양과 질 자체가 달라지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한 냉전사의 연구 성과도 생생히 소개한다. 저자 펠츠는 종교개혁 급진파의 숨은 역사에도 민중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었고, 러시아 혁명의 주인공도 몇몇 혁명가가 아니라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었음을 적시하고 있다. 대다수의 유럽사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 이후 유럽 문명이 이룬 승리가 찬가로 끝맺는 반면 펠츠는 철저히 민중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보리스 카갈리츠키(지구화 연구 및 사회운동 연구사 이사)는 이 책에 대해 "더 나은 삶을 위해 그리고 사회정치적 권리를 위해 여러 세대에 걸쳐 전개된 민중투쟁의 흥미로운 이야기"라며 "계몽, 진보, 사회 변화라는 관념들이 의문시되는 지금이야말로 이 이야기들을 다시 살펴봐야 할 때"라고 추천했다. 이 책의 목차는 중세의 붕괴부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17세기 영국혁명, 19세기 파리 코뮌, 20세기 러시아 혁명, 냉전 중의 유럽인들, 유럽 21세기에 던져지다의 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488쪽, 2만원.

2018-03-10 00:05:00

도광의 시인.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문화人&스토리] 대구 '원로문인' 도광의 시인

한 국어교사가 있었다. 제자들이 펴낸 책의 판매 부수를 합치면 1천만 부가 넘는다고 한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제자만 20여 명이다. 자신도 1965년 등단해 올해로 54년째 시인이다. 시인은 시를 짓는 사람인데, 어찌 된 탓인지 이 사람은 등단 이후 54년 동안 겨우 세 권의 시집을 내놓았다. 주무르고 깎다 보니 그렇다고 했다. 전 대구 대건고 국어교사였던 도광의 시인에 관한 이야기다. ◆시 쓰기가 가장 어렵네요 우리나라 문단에 시인은 많지만, 도광의 시인만큼 시력이 긴 시인은 드물다. 또 그렇게 오랫동안 시인으로 살아온 사람치고 도광의 시인만큼 과작(寡作)한 시인도 드물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54년 시작(詩作) 인생에 달랑 시집 3권을 냈으니 굳이 시인이라는 호칭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러나 빛바랜 면바지에 콤비 재킷, 남색 베레모를 쓰고 새파란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그는 영락없는 시인이었다. "너무나 많은 시인이 작품을 내놓고 있어요. 난해하거나, 호흡이 처지거나…. 나도 부담을 가지는데 독자는 오죽하겠어요?" 과작 시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시가 아무리 난해해도 어불성설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읽는 사람도, 쓴 사람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난센스가 배출되는 시대다. 그는 "'실패한 은유'를 써놓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오만하게 '설'(說)을 풀어대는 시인을 여럿 봤다"면서 "아무리 어려운 시라도 의미의 언저리에 이미지가 닿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마지막 구절을 암송하고는 비둘기가 지붕 위를 걸어다니는 것을 고기잡이 배에 비유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폴 발레리가 7, 8년에 걸쳐 시를 써내려갔듯이 다듬고 다듬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교단에 서던 시절 교과 진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흥에 겨워 쏟아내곤 했던 시론(詩論) 강의를 인터뷰 자리에서 기자를 앞에 두고 펼쳐내기 시작했다. 소월, 미당(서정주), 김춘수, 박용래, 한성기…. 그는 신문 인터뷰 기사로 적당히 이야기를 풀어내다가도 어느새 좋아하는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들의 작품을 줄줄 읊었다. 선물 보따리를 앞에 둔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 표정으로.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면서 미당을 언급했다. "친일 행적은 작품으로 보상했다고 해도 될 만큼 미당은 훌륭한 시인이오." 그는 마산고 재직 시절 미당의 시에 푹 빠져 "미당의 시를 모르면 속물"이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했다. 도광의 시인은 200편 정도의 시를 암기하며,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암송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암송 리듬이 기막혀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던 옆자리 손님들이 새 술 한 병을 건네기도 한다. 도 시인은 인터뷰 중에 한성기 시인의 '역'(驛)을 꼭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자화상을 담은 시라고 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시를 되뇌었다. 가끔 고개를 저어가면서, 미간을 찌푸려가면서 얼른 떠오르지 않는 시구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도 했다. "자꾸 잊어버리네. 요새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갑골길' 외에 '저녁답' '하양의 강물 2' '하양의 강물 3'에 애착이 간다고 했다. '갑골길'을 쓰도록 한 것은 절박한 상황과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마산고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경남 함안에서 한하균 선생을 만나고 술에 취해 밤새 눈길을 걸어왔어요. 새벽녘 북마산 파출소 다다미방에 도착해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깼는데 성에 낀 유리 너머 황량한 합포만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편찮으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그 순간 떠오른 구절을 벽에 옮겨 적었는데, 그걸 대건고에서 근무할 때 완성했으니 몇 년이 걸린 건지…." 그렇게 완성된 갑골길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러나 도광의 시인은 여전하다. "일관된 흐름으로 시를 쓰기가 참 어렵습디다." ◆교과서 밖 감수성 196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마산고와 마산 창신고를 거쳐 1971년 대구 대건고에 부임했고, 1997년 효성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마쳤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를 국어교사보다는 문예반 지도교사로 기억하는 것 같다.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읊었고, 문예반 학생의 이름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잊지 않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도를 나가면 시원찮게 가르치니 학생들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미당에 빠지고, 술에 빠져 지낼 때였다.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교과 준비도 없이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과음은 예삿일이었고, 숙취를 푸느라 교탁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들이켜 '금붕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동료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가르치라는 건 안 가르치고 딴 것만 가르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교과서에 나오던 신경림의 '농무'보다 '제삿날 밤'이 더 좋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좋아 통째로 외웠다는 그다. 수업 시간에도 교과서는 뒷전이었으니 학교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대학 본고사를 치르고 온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듣고 시험을 잘 봤다고 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교감은 도리어 그를 칭찬했다. 어쩌면 족집게 교사였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들에게 가르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배운 게 더 많아요." 대건고 28회 문예반 제자들의 출판기념회에서 축사했다. '분홍(粉紅) 풀색'이라는 시를 들려줬다. 외상 술값을 받으러 온 식당 주인은 술만 마시고 학생들을 돌보지 않았던 과거를 돌이켜보게 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에서 쓴 시였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제자들은 모일 때마다 도광의 선생님을 이야기한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 녀석들이 '그 시 좋습니다'하면 용기를 내서 더 잘 쓰고 싶어지지요." 그들에게 잊지 않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끼는 제자이자 문예반장이었던 시인 안도현이 고3 때 원고 뭉치를 가져왔을 때도 했던 말이다. "시는 길면 안 된다. 언어는 보석처럼 갈고 다듬어야 한다. 언어를 함부로 부도내지 마라." 등단한 제자만 20명이 넘는다. 시인 서정규'안도현'이정하'권태현, 소설가 겸 시인 박덕규, 소설가 김완준. 한 스승 밑에서 이렇게 많은 문인이 배출된 건 이례적이다. 여기에 번역가, 기자, 교수 등 글로 먹고사는 제자를 합치면 셀 수도 없다. "비결이요? 감수성이 아닐까요?" ◆로맨티시스트를 말하다 "로맨티시스트, 그건 날 놀리려고 하는 말 같아요." 제2대 대구문인협회장 출마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도 철저한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숨길 수 없는 로맨티시스트다. 시인 도광의를 이야기하며 술이 빠질 수가 없다. 그리고 술 하면 외상값이 빠질 수 없다. 월급날, 방학하는 날이면 술값을 받으려고 교문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식당 주인을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 못하지만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찾는다. 아니, 그가 있는 곳에 술과 사람이 모여든다. "술을 마시면 시가 떠올라요. 그러니 시 없는 술, 술 없는 시는 생각하기 어렵겠지." 인터뷰를 끝낸 그와 단골집에 갔다. 자정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겠다던 그였다. 빈 술병이 탑을 쌓았다. 백발이 성성한 시인의 낭만시계는 인터뷰가 시작될 때 이미 멈춰 있었다. 취기가 올라도 시를 잊지는 않는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는 400자 원고지와 볼펜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안 나온다. 그는 등단 후 18년 만에 첫 시집 '갑골길'을 냈고, 그로부터 21년 뒤에 두 번째 시집 '그리운 남풍'을, 다시 9년 뒤인 2012년에 세 번째 시집 '하양의 강물'을 펴냈다. 그리고 침잠이다. "상 좀 못 받으면 어떤가!" 마지막일지도 모를 네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55년 전 처음 썼던 '포플러'의 마지막 구절을 이제 완성했다. 고치고 다듬은 시는 파닥인다. 발랄하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시는 젊어야 한다. 다 처져 빠진, 무미건조한 시를 쓸 바엔 안 쓰는 게 낫다"면서 "대구에서 시를 소중하게 갈고 다듬어 문학을 손상하지 않으려는 시인은 송재학"이라고 거듭 말했다. 시가 아닌 것을 가르치면서 시론 강의를 하는 세상이다.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시를 내놓고 시라고 떠든다. 그에게 시는 고투하고 다듬어서 내놓느라 오래 걸려야 한다. "내가 독자가 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2018-03-08 17:04:49

최수남 작 '폴트라인'

[내가 읽은 책] 폴트라인(라구람 G. 라잔)

『폴트라인』, 라구람 G. 라잔, 옮긴이: 김민주'송희령, 에코리브르 지구에서 대륙판들이 접촉하거나 부딪힐 때, 끝쪽이 부서지거나 꺾이면서 엄청난 압력이 발생한다. 그것이 지진이고, 지진이 발생하는 그 판의 접촉면을 폴트라인이라고 부른다. 이를 책의 제목으로 활용하여 현실 경제 상황을 빗대어서 표현한 것이다. 저자 라구람 G. 라잔은 국제통화기금 수석 경제학자를 역임하고 현재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0년 피셔 블랙상을 받았다. 이 책은 논문에 가까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먼저 문제를 찾는다. 그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지 밝힌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일어난 원인을 밝히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조언한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단순히 범인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범인이 문제를 일으킨 배경 원인을 이야기해주고, 더 나아가 그 배경 원인이 일어난 이유를 분석한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인과 관계가 완전히 분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집단적으로 미쳤거나 무슨 병에 걸려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각자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인센티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뿐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보통 그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편하기 때문이다." 인용구에서 보듯이 이 책은 경제를 다루고 있지만, 인간 본질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수치를 이론에 대입하여 답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도 계산에 의해 말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얽힌 너무도 많은 사람이 현상 유지를 선호하고 있어 변화는 쉽지 않다." 경제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고 하니 어려운 책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멋진 머리말을 가지고 있어 그런 걱정을 덜어준다. 모든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머리말이다. 그리고 문제들을 설명함에 있어 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이해를 돕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무서운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경기가 회복기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이 계속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고용 없는 회복'(jobless recovery)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뉴스를 조금만 찾아본다면 저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뉴스가 아니라 한국의 뉴스에서이다. 이 책은 무언가 예언서나 바보 같은 소문을 수집해서 만든 책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경제학자가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책이다. 논리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던 무서운 현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2018-03-03 00:05:04

저출산·고령화 지속되면, 2030년 이후 '요양 지옥' 온다…『미래 연표』

미래 연표/ 가와이 마사시 지음/ 최미숙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고요한 재난이 시작됐다. 정원 미달로 도산하는 대학이 속출하고, 빈집이 빠르게 늘어나 3채 중 1채가 빈집이 된다. 지방에서는 백화점'은행이 사라진다. 급기야 외국인이 영토를 점령한다. 20년 내 일본에서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저출산'고령화가 가져올 잿빛 미래다. 유례없는 인구 감소를 경험한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저출산'고령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만 막을 수도 없다. 예견된 변화에 대응할 방법은 없을까. ◆인구 감소 캘린더 '미래 예측은 어렵지만, 인구는 예측할 수 있다'면서 인구 감소 사회의 충격적 결말을 예고한 '미래 연표'가 나왔다. 일본 산케이신문 논설위원이자, 인구정책'사회보장정책 전문가인 가와이 마사시가 2017년부터 100년간 벌어질 일을 연대표처럼 정리했다. 저자는 수치와 그래프를 더한 체계적인 분석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언제, 왜 생길지 경고한다. 암울한 미래와 단계적 소멸이라는 파국을 예언하면서 일본 사회는 술렁였다. 책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여성 3명 가운데 1명은 65세 이상 고령자로, 일본은 이미 '할머니 대국'이 됐다. 신입생 정원 절반을 못 채우는 사립대의 현실은 국립대의 존립도 위협하고 있다. 2019년이면 IT 인재가 부족해진다. 기반 시설을 개선'보수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이고, 청년인력 부족 사태는 인공지능(AI)을 구현할 인력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끼와 순발력이 뛰어난 젊은이가 필요한, 예컨대 패션, 문화예술, 체육 분야의 성장도 멈춘다. 2020년에는 일본 여성 2명 중 1명이 50세 이상이 된다. 전체 여성 중 출산 가능한 여성이 절반이라는 뜻이다. 2022년에는 '나홀로 가구'가 3분의 1을 넘는다. 홀로 사는 고령 인구가 늘면, 돌봄 문제가 심각해진다. 노인이 노인을 보살피는 노노(老老)케어 문제가 본격화하고, 간병 이직도 이슈가 된다. 부모, 또는 배우자 간호를 위해 휴직하거나 이직하더라도 직장을 되찾을 가능성이 작고, 한창 일해야 할 사람들을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는 기간에 병상 옆에 묶어둠으로써 경제는 활력을 잃는다. 숙련도 높은 고령 노동자는 관리직에 가깝고, 인건비는 비싸다. 경제활동인구가 급감해 일손이 부족하다. 주문이 있어도 생산 가능한 인력이 없으면 기업은 경영난에 직면한다. 구매력 있는 소비주도층인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국가 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 2030년이 되면, 지방은 점차 소멸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방은 세수 부족으로 행정기능이 약화하고, 편의시설, 서비스 시설은 문을 닫는다. 인구가 몰리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고령 인구가 폭발적으로 유입되면서 도시는 '요양 지옥'이 된다. 수혈용 혈액이 부족해 병원에 가도 나을 수 없고, 무연고 묘지와 시신이 늘어나 장례식장도 부족해진다. 미혼'독신 인구가 늘어나 저출산 속도도 가속한다. 고령 인구, 특히 빈곤한 노인이 늘어나면 재정은 무너지고, 인프라 관리가 불가능하다. 빈 땅은 외국인이 차지하고 국가는 소멸 위기에 놓인다. 지나친 상상일까. ◆앞당겨진 인구절벽, 남의 일이 아니다 통계청이 지난달 28일 발표한 2017년 출생'사망통계 잠정 결과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 수)은 1.05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인구 유지를 위한 합계출산율은 2.1명이다. 두 사람이 결혼해 1명을 낳으면 1세대를 거칠 때마다 인구가 절반이 된다. 2016년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1.44명이다. 일본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할 것이란 얘기다. 이미 진행된 인구 감소는 저출산화를 악화시킨다. 과거 진행된 저출산화로 여아 수가 줄었고, 출산 가능한 여성이 줄어들어 합계출산율이 올라가도 출생아 수가 감소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산(多産) 사회가 재도래하기 전까지는 저출산이 다시 저출산을 낳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한편 통계청은 2016년, 2032년에 인구가 정점에 달할 것으로 관측했다가 지난달 말 발표를 통해 2031년에 우리나라 인구가 정점을 찍고서 줄어들 것으로 예측치를 수정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현재의 출산율을 고려하면 2027년으로 4년가량 앞당겨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저출산은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이어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생산 가능 인구는 2016년 3천762만7천 명을 정점으로 지난해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2065년에는 생산 가능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2천62만 명(47.9%)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생산 가능 인구 중 주요 경제활동인구(25~49세)는 2015년 52.8%에서 2065년 49.3%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노동시장 위축은 구인난을 심화시키고 경제규모를 축소한다. 저성장의 고착화다. 일본이 아닌, 우리 이야기다. ◆작지만 빛나는 나라로 책은 위험한 상상을 늘어놓는 것으로 논의를 매듭짓지 않는다. 소리없이 들이닥칠 재난에 맞설 방법을 제시한다. 피할 수 없다면 이를 전제로 사회 구조를 재편하면 된다. 저자는 20세기형 성공스토리에 기대지 말고 전략적으로 다이어트를 하자고 주장한다. 우선 65세 이상인 고령자를 70세, 또는 75세 이상으로 올려 고령자를 줄인다. 65~74세 인구를 사회의 기둥으로 재인식하는 것이다. 불이 꺼지지 않는 24시간 사회의 편의를 포기하면 과잉서비스에 필요한 비용과 인력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파격적인 제안도 있다. 비거주지역을 지정해 인구밀도가 높은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행정서비스 효율성을 높인다. 강제 이주 등이 동반되는 급진적인 방안이다. 정원 유지가 어려워 도산한 지방 대학 캠퍼스를 은퇴자 커뮤니티로 만들자는 것도 비슷한 방식이다. 국가적 지원도 필수적이다. 국비 장학생 제도로 꼭 필요한 인재 육성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고, 셋째 아이 출산 가정에 1천만엔을 지급한다는 대책도 내놨다. 인구 감소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급격하게 감소한 뒤의 상황을 고려한 알찬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불편한 미래를 예견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영국의 옥스퍼드대 인구 문제 연구소는 '한국이 지구 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하는 나라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강 건너 불구경하던 시절은 지났다. 244쪽, 1만5천원.

2018-03-03 00:05:04

[책 CHECK] 바로크, 바로크적인

바로크, 바로크적인 한명식 지음 / 연암서가 펴냄 바로크(baroque)는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 사조다. 16세기 이전 유럽을 풍미했던 고전주의 르네상스가 질서와 균형, 조화와 논리성을 중시한 것과는 대비된다. 바로크 예술 작품은 화려하고 우아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세를 막 벗어난 근대인들의 극심한 혼란과 우울함이 담겨 있다. 르네상스라는 극단적인 세계관의 변화, 폭포 같은 새로움과 인식의 모순, 그리고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난 짙은 고독은 시대의 불안을 드러내는 바로크의 증상을 불러왔다.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 오묘함, 장대함, 혼란, 모호함은 그러한 고뇌로부터 싹튼 문화적 현상체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뒤틀린 틈 속에서 싹튼 바로크가 오늘날의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워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저자는 세계는 불안정한 형태와 변화, 그 자체라고 말한다. 세계를 변화하는 존재로 보면서도 영원하고 불변적인 대상을 찾다 보니 바로크 예술에 비극적 장엄미, 요란한 조형성, 찬란한 호사스러움 같은 특징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프랑스 리옹시립응용예술학교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대구한의대 건축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396쪽, 1만8천원.

2018-03-03 00:05:04

[책 CHECK] 팔공산, 그 짙은 역사와 경승의 향기

팔공산, 그 짙은 역사와 경승의 향기 글 홍종흠 조명래/ 사진 강위원/ 민속원 펴냄 팔공산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 첫 통일국가인 통일신라를 상징하는 산이다. 이곳에서 김유신 장군이 '삼한일통'의 검을 받는 신화가 탄생했고, 통일 후에는 이 산이 국토의 영역을 상징하는 오악 가운데 가장 중심되는 중악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엔 몽골 병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난극복을 위해 민심을 모아 조성한 초조대장경을 이곳 부인사에 봉안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승병을 지휘한 총본부가 이곳에 있었다. 정신사적으로는 한국불교사의 가장 큰 봉우리를 이룬 원효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득도했고, 일연 스님은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고려시대의 지눌 스님은 이곳에서 정혜 결사를 통해 한국불교를 중흥시켰고 현 조계종단의 원류를 만들었다. 이 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암과 갓바위 부처도 이곳에 있다. 이처럼 팔공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며, 문화와 역사의 발원지이고, 빼어난 경관과 희귀한 생태자원의 보고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참모습을 드러내지 못해 신라 오악 중에서도 유독 팔공산만 국립공원에서 빠져 있다. 이 책은 국내의 다른 산들이 넘보지 못할 역사와 문화, 경승을 지닌 팔공산의 진면목을 두루 알리기 위해 쓰여 졌다. 416쪽, 3만5천원.

2018-03-03 00:05:04

수·당 대군도 넘지 못했던 고구려 산성의 비밀…『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원종선 지음/ 통나무 펴냄 7세기 중국 대륙을 평정한 수양제는 낙양-양주-북경-강남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한다, 총 거리만 1천784㎞. 운하 완공 후 용주(龍舟)에 올라탄 양제는 선단과 인마를 이끌고 운하를 직접 돌아본다. 치세(治世), 물류, 수리 관개 등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수양제 운하 건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병참수송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612년 113만 명이라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드문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동정(東征)에 나섰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33년 후 당태종 역시 친히 정벌에 나서 요택(遼澤)을 건넜지만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패주하고 만다. 저자는 그 비밀을 고구려의 산성(山城)에서 찾고 있다. 평지가 아닌 산지에 축조해 이수난공(易守難攻'수비는 쉽고 공략은 어려움)의 득을 취하고 산지 성곽을 정략적으로 연결해 연합방어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동반도 고구려 산성 73곳 답사기록=이 책은 재중(在中) 사업가 원종선 씨가 요동반도에 포진해 있는 73개의 고구려 산성을 두 발로 뛰어다닌 답사기록이다. 저자를 처음 역사로 이끈 건 '최부 표해록 평주'(2002)였다. 조선 성종대 관리 최부의 표해록을 따라 3, 4년 동안 운하를 따라 답사기행을 계속하던 저자는 여러 역사적 사실과 정황을 종합하면서 중국의 운하는 고구려 정벌용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 수양제'문제, 당태종도 고구려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 그 '비밀'을 고구려 산성에서 찾은 저자는 성곽이 밀집돼 있는 요동반도 대련(大連)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산성 답사에 나섰다. 요동의 성터 하나하나를 답사하며 찍은 수많은 현장사진을 수록해 이해를 돕고, 현지의 지형과 지도는 직접 그려 설명을 덧붙였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참고했고, 주민들과 인터뷰를 통해 현지에서 통용되는 지명, 전해오는 민담까지 채록했다. 도올 김용옥은 추천사에서 "일제가 우리 강토 강점의 야욕을 드러내는 시절부터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성의 존재를 확인해왔으나, 한'중'일을 통틀어 이만큼 철저한 탐사기록을 담은 책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요동반도는 중원 패권의 중요 관문=저자가 답사한 고구려산성은 주로 요동반도에 위치한 산성이다. 현재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동북3성 안에 200여 개, 그 중 요녕성(遼寧省) 안에만 100여 개의 고구려산성이 분포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요하를 기준으로 서쪽을 요서,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데 요동반도는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에서 요하 하구에 이르는 축을 북쪽 한계로 하고 황해와 발해를 끼고 있는 반도를 말한다. 그러면 전략적 개념에서 요동반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원세력이 동쪽으로 확장할 때 반드시 요동이라는 관문을 통과한다. 해양세력이 북진할 때도 요동은 제1의 거점지역으로 작용한다. 요동에 수백 개의 고구려산성이 밀집해 있는 이유는 요동반도야말로 방어의 핵심이요 전략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요동반도의 지정학적 유리와 고구려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 즉, 어떻게 고구려가 당시 세계 최강 수'당제국의 막강한 대군의 침입을 막아내고 대륙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그 비밀에 다가갈 수 있다. ◆고구려 고성(古城) 훼손 갈수록 심각=당시 전쟁 양상이나 작전 방식은 요즘과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 고구려의 국토 방위개념은 정규군을 국경선에 배치하는 현대적 개념이 아니고, 지역마다 적합한 장소에 산성을 쌓아 적군의 침입 시에 인원과 물자를 집결시켜 성을 지켜내는 농성(籠城) 방식이었다. 주지하듯 산성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적을 물리치는 '비대칭 전략'의 핵심 중 하나다. 인근 산성과 연계해 산성을 포위'공격해오는 적군의 배후를 다른 산성에서 공격하는 게릴라전술도 가능하다. 또 적군의 보급로를 다른 산성에서 끊어줄 수 있기에 전체 전략으로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방어 전략에 있어서 요동반도의 특징은 내륙으로 침략해오는 적군을 막아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해양을 통해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한 대비도 동반된다. 즉 강의 중'하류에 다수의 산성들을 쌓음으로써 수륙(水陸)과 산성들을 연계한 수비 전략이 가능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산성의 성벽을 포함한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점점 훼멸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요동엔 고대 성터 등 실증적 사료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며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고구려산성의 실상이야말로 곧바로 우리 현존의 핏줄임을 말해주는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성벽의 훼손은 고구려 정신의 훼손이고, 성터의 붕괴는 민족사학의 위기인 것이다. 저자는 올바른 고구려사를 후세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민족의 흔적이 더 없어지기 전에, 현 상황이라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지금도 요동의 벌판과 산악을 누비고 있다. 519쪽, 2만3천원.

2018-03-03 00:05:04

[반갑다 새책] 신기한 마음여행

세계 마인드교육을 창시한 청소년문제 전문가 박옥수 목사가 출간한 청소년 인성 지침서다. 박 목사가 직접 만화 속 해설자로 등장해 재미있는 스토리와 실질적인 예시를 통해 마음의 세계를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2009년 중국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산하기관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한 박 목사는 청소년 마인드 강연을 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인드북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가 출간됐다. 이 책은 발간되자마자 교보문고 자기계발서 부문 7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판 등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18개국에서 판매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도 호응을 얻었다. 이 책은 기존의 인성교육 책과 뚜렷하게 차별화된다. 우선 청소년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화로 꾸며졌다. 재밌는 캐릭터와 감동적인 스토리로 구성돼 단숨에 읽혀진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마음에 대해 궁금하거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성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전작의 성공에 이어 이 책도 출간 직후 인터넷 교보문고 만화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마음, 욕구, 자제력을 주제로 크게 3분류로 나뉜다. 233쪽, 1만2천400원.

2018-03-03 00:05:04

[반갑다 새책] 조선 특파원 잭 런던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우정 지속의 법칙' 등으로 청소년 소설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작가 설흔의 작품이다. 러일전쟁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로 조선을 찾은 잭 런던과 그의 조수이자 통역사가 된 조선 소년(만영)이 한 팀이 되어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잭 런던이 러일전쟁 취재를 하고 남긴 취재기인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속 실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세계적 작가와 조선 소년의 짧은 만남을 다룬 이 책은 소설이면서도, 당시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와 현실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잭의 시선에 비친 조선과 전쟁은 당시 조선 사람들, 나아가서는 조선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잭은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알래스카 금광노동자, 통조림 공장, 심지어는 해적에 몸을 담으며 생계를 유지한다. 또 부랑자가 되어 전국을 떠돈다. 당시 미국 사회의 암울한 모습 속에서도 작가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그 꿈을 이루었다. '영보이' 만영도 전쟁보다 더한 현실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은 잭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그 꿈은 만영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조선의 꿈이기도 했다. 167쪽, 9천800원.

2018-03-03 00:05:04

나카지마 아쓰시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호랑이 사냥'

우리 마음속 호랑이에 대하여- 나카지마 아쓰시의 '호랑이 사냥'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라는 작가가 있다. 일본 작가 중 드물게 소년기 6년을 조선에서 보낸 인물로 서른셋 나이로 요절한다. 조선 체류 기억이 강렬했던 것일까. 몇 편 안 되는 그의 유작 중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이 네 편이나 된다. '호랑이 사냥'(1934)은 그 네 편 중 한 편이다. 자동차가 다니고 기차가 달리던 1920년대, 그것도 경성에서 호랑이 사냥이라니 이 무슨 야만적 풍경이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카지마 아쓰시가 겪은 조선은 그랬다. 소설은 아버지의 전근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6년을 체류한 경험이 있는 일본인 '나'가 조대환이라는 조선인 친구에 대한 기억을 서술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호랑이 사냥 역시 그런 기억 중 하나이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기회에 조대환과 그 아버지의 호랑이 사냥에 동행하게 된다. 그 호랑이 사냥에서 나는 조대환과 그 아버지 같은 조선 지배계급의 냉혹하면서도 야만적인 이기심을 목격한다. 그들이야말로 마음속에 호랑이의 강인함이 아닌 야수적 냉혹함과 야만적 이기심을 키우고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나의 단편적 기억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다가 보면 조대환의 마음속 호랑이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인지 드러난다. 그 퍼즐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것이 조대환의 아버지이다. 소설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조대환의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 즉 황제의 신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되자 그는 일본여자와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일본인 학교에 넣어 일본인 교육을 받게 한다. 식민지 조선인에서 벗어나 일본제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 철저한 신분세탁을 한 것이다. 이처럼 조대환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힘'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삶의 최우선적 가치이다. 소설에서 조대환이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보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본인이 되어야 하는데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은 '강함'보다 '비열함'과 '이기심' 같은 잔혹한 야망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힘이라는 것이 겸손한 태도로 타인과 소통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선한 의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 누구도 그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내 삶의 뿌리가 아무리 보잘것없고, 헛되더라도 그 뿌리를 부인하는 순간 내 삶이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편협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시선에서 보자면 나카지마 아쓰시의 소설 역시 제국주의적 우월감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도 문학도 그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강한 호랑이가 아니라 비열하고 잔혹한 호랑이가 있지 않은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8-03-03 00:05:04

권력, 인간을 몰락시키는 달콤한 함정…『권력, 인간을 말하다』

권력, 인간을 말하다/리정 지음, 강란·유주안 옮김/ 제3의 공간 펴냄 경북 고령 출신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권력은 손잡이 없는 양날의 칼이다. 무겁고 날카로운 양날의 칼"이라고 표현했다. 김 전 위원장은 "권력은 쥐는 순간 손을 베이고, 힘주어 드는 순간 손목과 팔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더 힘주어 휘두르는 사이 어느새 그 칼은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 그 칼을 내려놓고 나니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경북 성주 출신으로 '6공화국 황태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은 "강하고 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참으로 약하고 짧은 것이 권력"이라고 말했다. 과거 정권의 핵심부에 있던 지역 출신 두 정치인들은 권력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충고했다. 대한민국 권력은 '권불오년(權不五年), 배지사년(Badge4년)'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은 5년마다 바뀌고,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올해는 마침 지방선거가 있는 해로 지방 권력을 향해 또다시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누구나 권력을 추구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권력, 인간을 말하다'는 제목의 이 책 역시 권력에 지배당한 권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권력의 교묘한 술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권력의 속성을 간파해 목숨을 지키고 부귀를 누린 자도 함께 보여주며 권력 사용의 적나라한 면모를 드러낸다.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는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못하다"고 충고한다. 수많은 처세서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비열한 음모와 냉혹한 배신, 가차없는 투쟁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온갖 권모술수를 총동원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승자들이다. 하지만 저자가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황금 권좌에 올라선 순간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숭배와 부귀영화가 아니다. 권력은 어느새 주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다모클레스의 검이 되어, 권좌를 향해 칼끝을 겨눈다. 이 책은 중국 당나라의 절대권력을 거머쥔 이들의 몰락 과정을 쫓아간다. 비천한 출신을 극복하고 대성한 인물부터 목적을 위해서라면 형제와 자식까지 재물로 바치는 냉혈한과 뛰어난 지략과 총명함으로 모두를 사로잡은 천재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권력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권력은 어떤 인물이든 개의치 않는다. 자기 주인의 약점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이를 연료삼아 그를 몰락으로 이끄는 음모를 소리 소문 없이 진행한다. 저자는 권력이 파놓은 함정 중에 치명적인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비공식 정보 통로는 권력이 자신의 주인을 몰락시키는 은밀한 수법으로 역사에 자주 등장했다. 둘째, 핏줄의 유혹은 권력이 1인자를 무너뜨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셋째, 관료집단의 이해관계를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권력이 제기하는 최대의 난제다. 넷째,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 적들을 제거하려 시도한다. 이 책은 1장 여론(이밀), 2장 후계자 선정(이세민), 3장 두려움(장손무기), 4장 무질서(무측천), 5장 타락(이융기), 6장 정보통제(이임보), 7장 기득권(안녹산), 8장 보상(곽자의'이광필'복고회은), 9장 그림자 권력(환관 집단), 10장 파벌(이덕유'우승유), 11장 합법성(황소'주온)의 순서로 권력이 파놓은 11가지 함정에 걸려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편 저자 리정은 1980년대 이후 출생 세대를 지칭하는 '바링허우'(80後)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현재 인민일보 평론부에서 일하고 있다. 352쪽, 1만6천원.

2018-03-03 00:05:04

추필숙 작 '다랑논'

[내가 읽은 책]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류시화/ 연금술사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류시화/ 연금술사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만큼 도는 빛, 그 빛이 진공 속에서 1년 동안 나아가는 거리가 1광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처럼 백만 광년의 고독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속에서 읽는 한 줄의 시는 틀림없이 우리의 삶을 비추는 섬광으로 다가오리라는 기대를 품고 표지를 넘겼다. 책날개에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로 일컫는 하이쿠를, 류시화 시인의 해설로 읽는다'는 요지의 글이 적혀 있다. 하이쿠는 450여 년 전 일본에서 시작된 정형시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5'7'5의 열일곱 자 음수율을 지키고, 시가 짧은 만큼 한 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막고 여운을 주기 위해 중간에 '끊는 말'을 넣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을 우선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문학성이다. "단순히 촌철살인의 재치나 언어유희로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은유와 상징을 통해 삶에서 얻은 깨달음, 인간 존재의 허무와 고독, 자연과 계절에 대한 느낌, 그리고 해학을 표현한다. 이 한 줄 시를 공통적으로 '하이쿠'라 부른다"(589쪽)라는 대목을 보면 정형시에서 출발한 하이쿠가 한 줄 시라는 포괄적인 형식으로 유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심는 여자/자식 우는 쪽으로/모가 굽는다 (잇사), 꽃잎이 떨어지네/어, 다시 올라가네/나비였네 (모리타케), 새는 아직/입도 풀리지 않았는데/첫 벚꽃 (오니쓰라), 잡으러 오는 이에게/불빛을 비춰주는/반딧불이(오에마루), 시원함이여/종에서 떠나가는/종소리 (부손)…." 밑줄은 점점 늘어난다. 어느 순간, 밑줄을 아껴야지, 다짐하고 만다. 펜 잡은 손을 가슴에 얹고 잠시 호흡에만 몰두하면서, 읽기에 공을 들였다. 공감이 주는 감동을 실컷 맛보았다고 할까? 책이 책답다. 시의 진정성이 충분히 와 닿았다. 백 마디 말보다 이름 한번 불러주거나 손 한번 잡아주거나 눈 한번 맞추는 것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우리 삶을 통틀어 통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의 단면을 낱낱이 본 느낌이 든다. 본질적인 고독과 서툰 삶, 그 삶의 부조리 속에서 결국 사라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진정성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압축을 풀어내고 생략을 읽어 내는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명쾌한 해석의 영역을 넘어 가슴을 울리는 작품들이 수두룩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시 해석은 백인백색이다. 읽는 이의 깊이에 의해 재탄생되는 것이 시다. 문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의 읽기와 남(류시화)의 읽기를 서로 견주어 볼 수 있다. 마음은 뒤에 감추고 모습을 보여 주라던 바쇼의 말과는 반대로, 하이쿠를 읽는 우리는 모습 뒤에 감추어 둔 시인의 마음을 내 마음속으로 옮겨오면 되는 것이다. 한 줄도 길고, 백 줄도 짧을 수 있다. 그러나 딱 한 줄로 백만 광년의 고독을 말할 수 있는 책은 이 책뿐이다. 유언처럼, 한 줄 시의 힘이 참 세다.

2018-02-24 00:05:00

대구시 북구 학정동 들녘에서 가을걷이에 나선 콤바인이 노란 들판을 가로지르며 벼를 베고 있다. 매일신문 DB

먹고살려는 인류의 몸부림, 새로운 문명으로…『문명과 식량』

문명과 식량/ 루스 디프리스 지음/ 정서진 옮김/ 눌와 펴냄 16세기 유럽에 처음 들어온 감자는 높은 열량과 편리한 저장성으로 매력적인 작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인들의 키가 커지고, 출산율이 높아진 것도 당시 주식이었던 감자 덕분이었다. 심기만 하면 싹이 나고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는 종자를 살 필요가 없었다. 가난한 아일랜드 소작농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작물이 감자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감자도 완벽하진 못했다. 유전적 동일성, 좁은 경작 간격 탓에 감자에 역병이 돌았고 농민은 희생양이 됐다. 썩어 들어가는 밭을 갈아엎었다. 새로 심을 감자조차 남아나지 않자 사람이 하나둘 죽어나갔다. 1845년 아일랜드는 인구의 8분의 1인 100만 명이 감자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100만 명이 영국과 신대륙으로 떠났다. 더 이상 대기근은 없었다. 곧 역병에 강한 품종이 들어오고, 농가를 떠난 이들이 늘어나 경작지가 넓어지면서였다. 적응이다. ◆톱니바퀴, 도끼, 그리고 중심축의 회전 인류의 여정도 이와 같다.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성장-위기-전환점이라는 주기를 돌고 도는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다. 환경지리학자 루스 디프리스는 채집인에서 농부로, 다시 도시인으로 진화하는 인류 문명의 원천을 식량에서 찾는다. 그의 책 '문명과 식량'은 먹고살려고 환경에 저항하고 적응해 온 인류가 어떻게 번성했는지를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문명은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의 과정이며, 식량은 문명의 원동력이다. 그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먹고살려는 인류의 몸부림이 '문화를 번영케 하고 기술을 발달시켰다' '식량의 증산이 인구를 늘렸다' '식량 확보를 위한 경쟁과 혁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시'공간적 거리를 좁혔다' 등의 주장은 인류 문명과 세계사를 다루는 교양서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러나 그는 '톱니바퀴-도끼-중심축'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식상한 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낸다. 기본적으로는 이렇다. 배고픈 사람이 끼니를 구한다. 식용작물을 재배하거나, 양분을 퍼트린다. 자연을 변형해 식량을 늘린다. 식량이 늘어나면 인구(개체 수)가 늘어난다. 성장의 톱니바퀴가 회전한다. 하지만 급증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난관에 봉착한다. 기아라는 도끼(위기)다. 얼마 후 자연 산물을 활용하는 새 해결책을 내놓는다. 톱니바퀴는 다시 돌아간다. 다시 식량이 늘고 인구가 는다. 한쪽으로만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성장을 막는 도끼, 그리고 새로운 회전을 추진하는 중심축(전환점)에 의해 톱니바퀴는 다시 돌아간다. 이렇게 반복된 주기는 인류 역사의 궤적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특성을 더한다. 유전자에 의존해 진화하는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밈'(meme'개체의 기억저장소에 유전자처럼 저장돼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문화의 구성 요소)이 있어서 음식물을 선택하고, 시설을 만들고, 비료를 추출하는 혁신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자연과의 사투에서 식량을 얻는 방식은 종 다양성, 지구의 순환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변형해왔다. 20세기 전까지. ◆성장과 위기, 그리고 전환의 반복 저자는 식량을 확보하려는 인류의 노력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한다.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발견한 인간은 자연을 변형해 인구를 부양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발견한 밀 두 포기는 농경의 시발점이 됐다. 씨앗과 곡물을 저장했고, 재배종을 개량하고 가축을 사육하기에 이르렀다. 길들인 가축이 노동을 충당하면서 같은 면적에서 힘을 덜 들이고도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가축의 힘을 빌리는 방식은 고대 강 문명에서 수 세기가 흘러서야 유럽 대륙에 전해졌다. 곡물 생산량 증가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이끌었다. 식량공급량을 초과한 인구는 '도끼'가 됐다. 힘들고 고된 소작농의 사망이 급증하고 유례없는 추위와 대홍수, 기아와 전염병이 유럽을 강타했다. 끔찍한 시기 성장의 중심축이 되었던 것은 다시 가축을 이용한 노동과 거름, 질소를 고정한 토끼풀이었다. 배설물이 쉬는 땅의 지력을 높여 더 많은 농작물을 만들어 낸 것, 이른바 '농업혁명'이었다. 잉여식량은 도시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화석연료가 동력자원이 되면서 경제의 축은 농업에서 산업으로 이동했다. 도시가 커진 것도 이때다. 그러나 분뇨 수거인이 인분과 정육점 오물을 모아 농촌으로 되가져간 덕분에 질소와 인이 이동했고, 비옥한 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은 화석연료와 질소비료의 몫이었다. 그러니 수질오염,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 상승은 필연적인 결과다. 기계와 비료, 연료의 공급 증가는 대규모 단일재배로 수확량을 극대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단일재배는 또 도끼가 됐다. 병해에 취약한 단일재배의 위험에서 인류를 구한 것은 기적의 살충제 DDT였다. 새로운 '허수아비'의 등장으로 수확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기근의 걱정을 덜어낸 인류는 끈질긴 잡종교배와 품종개량을 통해 녹색혁명의 기적을 낳았다. ◆도시인의 위기 2007년 세계의 도시 인구는 농촌 인구를 넘어섰다.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식량이 어디에서 나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잊어버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같았던 식량자원의 속도는 더뎌졌다. 인구의 급증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지구의 순환 시스템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가축분뇨와 비료'거름이 만들어낸 온실가스는 전체 온실가스의 4분의 1 이상이다. 칼로리당 7~15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들여 한 끼를 해결하는 상황이다. 인류가 원하는 기름진 식단에 희생된 건 소'돼지'닭뿐만이 아니다. 가축을 키우고자 열대림을 훼손하고 개간하며 수만 년에 걸쳐 완성된 생태계는 교란됐다. 어느 때보다도 식량이 풍부하고, 인류는 번성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냉장고에서 고기가 썩어 버려지고, 개발도상국에서는 냉장시설이 없어서 고기가 썩는다. 또 다른 도끼가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 책은 뒷부분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언급한다. 장밋빛 전망이다. 도끼가 내려쳐지기 전에 도시인이 된 농부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무엇일까. 364쪽, 1만6천원.

2018-02-24 00:05:00

[책 CHECK]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지음/ 사과나무 펴냄 '조선시대에도 과학자가 있었을까?' 국립과천과학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는 2018년 현재 33명의 과학자가 선정돼 있다. 그중에는 장영실, 허준, 홍대용, 정약전, 김정호 등 조선시대 인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과학적 성취를 다루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유배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당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들은 유배형에 처해졌을 때 신세를 한탄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지식을 닦고 제고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자산어보'의 정약전, '북학의'를 쓴 박제가, 그리고 다산 정약용, 김정희 등을 비롯한 선각자들의 탁월한 업적은 유배가 아니었다면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유배 받은 이유야 어떻든 그들의 업적이 과학에 관련되는 한 모두 '과학의 순교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만일 그들의 삶에서 유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좀 더 근대화를 빨리 이루고, 과학기술이 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366쪽, 1만5천원.

2018-02-24 00:05:00

[책 CHECK] 붉은 혀

붉은 혀 김환식 지음 / 지혜 펴냄 김환식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인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돼 있으며, 100편 가까운 시가 실려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고삐 풀린 말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순례를 한다는 것/참회하며 걷는다는 것이다', '선혈이 서산을 붉혔다' 등의 시구에서 보듯 저자는 아포리즘(aphorism'신조나 원리, 진리 등을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나타낸 짧은 글)의 대가이다. 시인은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 경험으로 옮겨놓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해 시로 빚어낸다. 시집에는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아포리즘으로 응축한 시를 비롯해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노래한 연애시,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나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친 사건을 소재로 한 시 등 다양한 주제의 시가 실려 있다. 저자는 다년간 공직생활을 하다 창업해 기술혁신 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등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다. 2005년 '시와반시'를 통해 데뷔했다. '산다는 것', '낙인', '천년의 감옥', '버팀목' 등 7권의 시집을 냈다. 현재 한국시협, 대구문협, 열림시, 서세루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66쪽, 1만원,

2018-02-24 00:05:00

이 책의 지은이는 다양한 사례와 실험을 통해 음악이 어떻게 우리 감정 변화를 이끄는지 입증하고 있다. 사진은 오케스트라 연주 장면.

음악에 따라, 같은 와인도 왜 맛이 다를까…『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와인 시음회에서 1번부터 5번까지 번호가 붙은 와인들을 차례로 제공했다. 시음회 동안 음악은 드뷔시의 '달빛'부터 바그너의 (역동적인) '발퀴레의 비행'으로 바뀌었다. 시음자들은 1번과 5번의 와인을 각각 다른 맛으로 평가했다. 사실은 같은 와인이었음에도. 배경 음악에 따라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실험이다. 저자 존 파웰은 '음악이 어떻게 우리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칠까'라는 질문에서 이 책의 논거를 출발하고 있다. 또 음악의 다양한 효용과 쓰임새를 과학적 실험의 증거들로 설명하며 인류에게 '음악은 숙명'임을 명쾌한 논리로 설파하고 있다. ◆음악 장르 따라 쇼핑센터 매출 영향=쇼핑센터에서 프랑스 음악이 나올 때는 프랑스 와인이 더 많이 팔리고,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소비가 30%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음악은 어떻게 우리의 감정을 좌우할까'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심리학적 연구와 사회학적 연구에 몰두했다. 음악 심리학의 모든 면을 들여다보고, 음악이 어떻게 아기가 엄마와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돕고, 백화점에서 음악에 따라 어떻게 소비 패턴이 달라지는지를 밝힌다.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의 감정에 주목하며 음악이 우리 일상적인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14장에서 저자는 연주가의 연주 패턴에 따라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몇 가지 실험결과들로 설명한다. 보통 연주자는 악보대로든 즉흥적으로든 음악 효과를 최대로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 주법(奏法)들을 활용한다. 그들은 다양한 독보법(讀譜法), 타이밍, 주법, 강약, 음색으로, 때로는 실수조차 활용해서 우리의 감정을 요리한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고전음악들은 수백 년 전 음악가들의 영감에 의해 그려진 악보였을 뿐인데 그것들이 연주자들의 표현방식에 의해 인간의 감정이 좌우되는 것이다. ◆뇌 건강, 정서 안정에도 음악이 관여="음악은 우울증을 가라앉히고 통증을 줄여준다. 다양한 질병을 이겨내고, 과제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감을 쌓도록 돕는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기분을 좋게 하고, 그리움에서 기쁨에 이르는 감정들로 삶을 채워준다." 본문에 나오는 음악의 효용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음악과 함께 생활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뇌를 적절히 자극하고 즐거움도 함께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에는 뇌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능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강력한 감정 자극제로 작용한다. 유쾌한 음악을 들으면 세로토닌과 도파민 수치가 올라가 긍정적으로 기분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음악을 감정으로 바꿀까. 우리 뇌는 과도한 자극도, 부족한 자극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황이 복잡할 때는 조용한 음악을 선호하게 되고, 삶이 지루할 때면 거친 록(Rock) 음악으로 뇌를 자극한다. 우리는 종종 신체 활동에서 에너지를 얻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려고 음악을 사용하고, 기분 전환용으로 음악을 듣기도 한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 인위적으로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축하나 애도 선율로 그 분위기를 이끄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음악의 또 다른 용도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듣는 음악이 있다. 이렇듯 저자는 실험심리학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음악의 다양한 쓰임새를 과학적 실험의 증거들로 설명한다.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음악의 심리학적 비밀을 들여다보는 이 책은 음악 분야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에 이은 후속작이다. 전작(前作) 역시 기발한 콘셉트로 음악 분야의 전문적인 독자를 포함해 일반 독자의 폭넓은 관심을 받았다. 이번 책은 음악의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음악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는 다양한 사례들과 연구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그 사람이 듣는 음악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쇼핑할 때 배경음악에 따라 매출액이 차이가 나거나, 음식 맛을 평가할 때도 음악 장르에 따라 그 맛을 다르게 느낀다는 실험 결과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선보인다. 또 이야기와 영상이미지를 다루는 영역인 영화에서도 음악이 어떻게 감정 변화를 이끌어가는지도 세밀하게 밝히고 있다. 책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이 자주 듣는 음악들을 나열해보고, 그 리스트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들여다본다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89쪽, 1만7천원.

2018-02-24 00:05:00

[반갑다 새책] 신명난 탈출

15년간 대구카네기연구소를 운영해 온 이규석 씨의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금융기관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이후 자기계발연구소를 세워 오랫동안 리더십 개발과 인간관계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5부에 걸친 단원엔 모두 50편의 글이 수록됐다. 저자는 이리저리 엎치락뒤치락 난장판 인생을 가벼운 책 한 권으로 정리하면서 오래 망설였다고 말한다. '수필가들도 읽지 않는 수필을 뭐 하러 쓰느냐'는 질책도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나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 펜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가 실험적으로 시도한 '문장의 시각화'도 주목할 만하다. '돌탑'에서는 텍스트를 탑 모양으로 시각화해 독자들에게 이미지를 강조했고 '아버지를 찾습니다'에서는 치매노인의 반복된 물음에 대한 대답을 볼드체로 크게 써 짜증의 강도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필가 장호병은 발문에서 "이규석 표 수필의 미덕은 진실한 내용을 솔직하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창의적 구성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또 "현업에서의 삶과 앎, 문학에의 열정과 노력으로 이규석 만의 수필 기틀이 마련되었다"며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내기 바란다"고 적고 있다. 208쪽, 1만원.

2018-02-24 00:05:00

[반갑다 새책] 낙타는 뛰지 않는다

경북 성주 출신 권순진 시인이 펴낸 세 번째 시집이다. 삶의 노정(路程)에서 길어 올린 65편의 시들을 함께 묶었다. 어딘지 낯익고 익숙한 시어(詩語)들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마치 가공을 거치지 않은 꼬막처럼 날것의 싱싱함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묘한 매력을 숨기고 있어 일단 손에 잡히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흡인력도 강하다. 저자는 서문에서 "10년 넘게 '시 운동'에 매진하며 다른 사람의 시만 소개해오다 이제야 정작 내 글을 펼쳐냈다"고 말한다. 시인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은행과 대한항공에서 근무했다. 행간에는 당시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이 녹아있어 당시 사회상이나 추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권순진의 시는 다채롭다. 기존의 시 문법을 따른 고분고분한 시보다 형식 파괴 시가 더 많다. 틀에 얽매임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펼쳐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고도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믿는 권순진의 시 운동은 그러한 세상을 갈망하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낙타걸음의 족적에 비유된다. 10년째 지역 일간지에 시 칼럼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를 연재하고 있으며 시집 '낙법'과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1'을 냈다.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 작가회의, 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128쪽, 1만원.

2018-02-24 00:05:00

누가 'SKY'를 움직이나…『대학과 권력』

대학과 권력/김정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서울대 OO명 합격!" 해마다 대학 합격자가 발표될 즈음이면 일선 고교나 학원에서는 서울대 합격자 수로 학교의 명성을 드높이려 한다. 10여 년 전쯤부터는 대학보다 의대, 건축, 글로벌 경영, 미술, 특수교육, 경찰행정 등 전공을 중시하는 풍토가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기성세대에게 서울대-고려대-연세대는 대한민국 1류 스카이(SKY) 대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울대학교가 굳건한 대학권력의 상징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로부터 출발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최초로 대학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식민지 시기부터 1990년대까지. 대학권력-국가권력-시장권력이라는 키워드로 한국 대학을 보여준다. 더불어 현재 대학의 현실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대학사 100년을 돌아보며, 문제점과 해결책까지 짚어본다. 저자에게 대학은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대학교수로 강단에 서 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삶의 현장이자 학문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녹을 먹으며, 끊임없이 대학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로 이 책을 썼다. 고민 끝에 찾아난 하나의 명제. 한국 대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권력 집단의 힘'을 찾아냈다. 이를 포착하기 위해 '대학권력-국가권력-시장권력'이라는 권력의 3주체를 중심으로 한국 대학의 역사를 톺아본다. 한국 대학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권력'이라는 키워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4시기로 나누어, 식민권력과 타자적권력-사학권력-국가권력-시장권력이 작동했던 시기를 연대기 순으로 돌아본다. 한국의 대학사는 그야말로 '권력 집단의 힘'에 의한 수난의 역사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식민 권력이라는 주체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라는 타자적권력이, 1950년대에는 사학권력이, 1970, 80년대에는 국가권력이 대학을 장악하며 고등교육이나 지성, 학술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닌 권력집단의 이익수단으로서 대학이 권력에 좌우됐다. 19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아래 자본권력에 의해 또다시 대학의 자율성은 무시된 채 시장화되었다. 저자는 대학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해방 이후 미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한국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며 "아쉽게도 식민권력이라는 타율적 권력이 경성제국 대학을 세운 이래 100년 동안 대학은 대학 본연의 가치인 자치와 자율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의 대학은 시장권력, 즉 자본이 현실 권력 그 자체로 등장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학을 움직이는 힘이 대학의 구성원인 교수와 학생의 자치로부터 나오지 않고, 재단과 정부, 시장이라는 권력에서 나온다는 점이 절망스럽지만 엄연한 현실임을 지적한다. 대학 구조조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대학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 확산과 함께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들겠다는 목표는 한'중'일 3국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는 학령인구 감소라는 사회적 현상이 대학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대학 수는 크게 늘어났다.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춘천교육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저자 김정인은 "사립대학을 늘려놓고는 국가가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시장논리에 따른 구조조정을 압박하는 모습이 우리나라 대학의 자화상"이라고 강조했다. 380쪽, 1만9천원.

2018-02-24 00:05:00

이종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모두 기뻐하건마는

모두 기뻐하건마는 이휘(李彙) 아들을 낳으면 모두 기뻐하건마는 生子人皆喜(생자인개희) 유독 내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네 吾心獨不然(오심독불연) 이 세상 한량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世間無限苦(세간무한고) 아들께 또다시 전해주는 것이어니 於汝又將傳(어여우장전) 조선시대의 진사(進士) 이휘(李彙)가 아들을 낳고 지었다는 시다. 아들을 낳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유독 그의 마음이 기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을 한다면 그가 서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는 조상이 한번 서자가 되면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서자 계열로 분류되어 말 못 할 차별과 수모를 겪었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이 겪어온 밑도 끝도 없는 괴로움들을 아들에게 대물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무겁고도 괴롭다. 자라서 상황을 다 알게 된 아들이 '왜 나를 낳았느냐'고 따지고 들면 도무지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여 상하(上下) 노복(奴僕)이 다 천(賤)히 보고, 친척과 고구(故舊'오랜 친구)도 손가락질하며 아무의 천생(賤生)이라 이르오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사오리까?" 적서(嫡庶) 차별의 가당치도 않은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한 소설 '홍길동전'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홍길동은 정이품 판서인 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홍길동은 명문대가의 아들임이 분명하지만, 막상 그의 사회적 위상은 양반은커녕 서민보다도 훨씬 못한 것이었다. 첩을 두는 것을 인정했던 조선시대에는 홍길동과 같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들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녀도 사회적 진출에 한계가 있었고,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제사 때도 당당하게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문 근처에서 얼씬거리거나, 대문 근처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을 수가 없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제도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신분적 질곡 앞에 망연자실케 했던 것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갑오경장을 계기로 하여 적서 간의 제도적 차별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자식의 출생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지는 의문스럽다. 상하 계층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적서의 차이에 못지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재벌 2세가 되기도 하고, 찢어지게 어려운 가난뱅이 아들이 되기도 하는 그 출발부터가 적서의 차별과 닮은꼴이다. 게다가 계층 이동의 사닥다리마저도 별로 없어서 개천에서 용이 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한번 하층은 영원한 하층으로 고착화되기 쉬운 상황에서, 가난뱅이 아버지가 마음 놓고 아들을 낳기는 정말 어렵다. 자신이 겪어온 하층민의 서러움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이 커서 '왜 나를 낳았느냐'고 따지고 들면 도무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아아 말도 안 되는, 울컥 도분이 나는 세상!

2018-02-24 00:05:00

[책 CHECK] 설리화야 설리화야

설리화야 설리화야 이룸 지음/ 카프카 펴냄 저자의 직간접 체험이 녹아 있는 소설이다. 작품의 배경 및 스토리를 보면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지만 대구에서 자란 저자의 성장 및 성숙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주 무대인 대구의 수성교 주변과 고대국가 조문국의 서울에서 발단이 이뤄지며 결말 또한 그곳에서 마무리된다.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일주일간 벌어지는 전국체전 기간이란 얼개 속에서 진행되는 서사로 인해 많은 사연들이 자연스럽게 압축된다. 파격적인 구성, 내용과 달리 서정적인 문체가 눈에 띈다. 시를 보는 듯한 서정적인 지문이 그렇다. 그리고 추리적 구성으로 흥미를 유발시키는가 하면 대사의 말맛을 제대로 살린 사투리 구사도 돋보인다. 영상미를 의식한 배경묘사와 극문학에서나 볼 수 있는 대사에 자꾸만 책장을 넘기게 하는 가독성까지 겸비했다. 전북 김제 출신인 저자는 주로 대구에서 자랐다. 계명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소설집 '핑크하우스', 장편소설 '갓바위' 가 있다. 현재 청소년(대구시 문학영재반)을 대상으로 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345쪽, 1만2천800원.

2018-02-10 00:05:00

[책 CHECK] 풍크툼

풍크툼/박미영 지음/ 화니콤 펴냄 "2월의 오늘 같은 날, 몽유(夢遊), 몽상적 기질 아닌가 혼자 씁쓸해하면서 나는 또 옛집이 있는 거리에서 발을 멈춘다. 영화 촬영지로 추천하고 싶을 만큼 삼십여 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옛집이 있는 옛길, 나는 걷고 또 걷는다. 스스로 고백하건대 이 길은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이란 뜻을 가진 나의 풍크툼(punctum)이며, 어쭙잖은 내 글쓰기의 근간이다."-옛집이 있는 거리에서 이 책은 저자가 일간 신문 등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산문집이다. 제목 '풍크툼'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내세운 개념으로,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비롯됐다. 풍크툼은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해석할 수 있는 의미나 작가가 의도한 바를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여러 직업 가운데 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이란 자리가 가장 오래됐다는 저자는 현재 달구벌 아트센터 '달'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시집 '비열한 거리'가 있다. 180쪽, 1만2천원.

2018-02-10 00:05:00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의 '생명의 이름'은 생물'생태에 대한 꼼꼼한 기록인 동시에 생명체의 이름에 담긴 철학적 고찰을 담고 있다. 사진은 권 교수가 책의 소재로 삼은 다양한 생명체들. 사이언스북스 제공

생명의 이름 속에 새겨진 다양한 이야기들…『생명의 이름』

지구 생명체의 숫자는? 어떤 과학자는 0이 스무 개쯤 붙는다고 하고, 어떤 생물학자는 생물을 동'식물, 미생물에 바이러스, 세포까지 분류하다가 '범위'부터 막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고도 한다. 이렇게 무량대수(無量大數) 생명체들도 이름표를 달지 못하면 그냥 '생물'이나 '유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학명이나 분류 명(名)을 얻어 달면서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며 인류와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물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건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린네였다. 그는 속(genus)과 종(species)을 나타내는 두 라틴어 단어로 된 학명을 생물에 부여하는 '이명법'을 창시해 현대적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 책은 저마다 이름과 사연을 간직한 채 우리의 산천을 형성하고, 인간과 함께 살아온 생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생명체 이름들의 재밌는 사연 소개 '달팽이 박사의 생명 찬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세상에는 '이름 모를 풀'이 없고, 아주 작은 생명에도 다 나름의 이유와 사연이 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권오길(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의 전작 '생명 교향곡'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라 펼쳐지는 생물들의 생태 이야기를 그렸다면 이 책은 생명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이름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생명 교향곡'의 선율을 잇는 작업이었다. 제철을 견디지 못하고 설익은 채로 떨어지고만 '도사리', 매미가 탈바꿈한 자리에 남기고 떠난 '선퇴', 겨울에도 푸르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겨우살이'처럼 우리의 말이 새겨 놓은 생명의 이름들은 시어(詩語)처럼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스란히 기록됐다. 선조들이 자연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들은 우리말에 새겨졌고 대대로 전수돼 지식과 문화를 형성하고 우리의 DNA를 구축해왔던 것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 따라 5부로 구성 이 책은 정지용의 시 '향수'를 따라 우리 산과 들, 바다에서 생물들을 만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1부 '넓은 벌 동쪽 끝'은 우리 들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작물과 들짐승, 들꽃들의 얘기를 다룬다. 하늘에는 해바라기 꽃을 달고 땅에는 감자를 달고 있는 것이 엉뚱하다고 해서 '뚱딴지'라 불리는 돼지감자, '신선의 손바닥'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제주도에서 자생해 온 선인장 얘기가 수록돼 있다. 인터넷주소를 구성하는 골뱅이(@)에서는 달팽이의 '느림의 미학'을 칭찬한다. 면도날을 타고 넘지만 베이지 않는 유연함에서 '처세의 미학'을 배운다. 2부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에는 우리 강을 수놓으며 생명력을 뽐내는 개구리밥과 연가시 등에 관한 얘기가 담겼다. 반딧불이를 보고 '개똥불로 별을 대적한다'는 속담의 의미를 알아보고, 잠자리를 뜻하는 다른 말로 '청령'이나 '청낭자'라는 우리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짐승'바다생물 이야기 분석 3부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는 하늘로 높게 뻗어 올라간 나무들과 산짐승들의 얘기를 다룬다. 뻐꾸기의 탁란(托卵) 습성을 관찰하며 악랄한 이기적 유전자를 비판한다. '어미를 죽이면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살모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뱀의 억울한 사연과 '황조가'에 등장해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을 함께한 꾀꼬리의 얘기를 들어 본다. 4부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은 자유롭게 바다를 활보하는 바다 생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언각비'와 '전어지'와 같은 문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물고기들의 이름은, 우리말이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또 구각(舊殼)을 벗어야만 성장, 변화를 맞을 수 있는 꽃게의 숙명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5부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지붕'은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라 여기며 자연과 공생해 온 우리의 정겨운 터전을 들여다본다. '까치밥'으로 남겨 둔 감에서 선조들의 아름다운 미덕을, 우리 몸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배꼽을 보며 우리 역시 다른 생명들과 닮았음을 본다. '돼지감자가 세상을 바꾼다' '그령(한국에 흔한 여러해살이풀)처럼 억세게' '잠자리의 결혼비행' 등 소제목들에서 느껴지듯 이 책은 어려운 과학책보다는 수필에 더 가깝다. 생물을 바라보는 한 노학자의 애정 어린 기록인 동시에, 생명을 관조하는 한 문학가의 서정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302쪽, 1만6천500원. ◆권오길 교수는=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기고, 서울사대부고에서 생물을 가르쳤으며, 강원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25년간 근무했다.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저작과 방송 활동, 강의를 통해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다. 일간지에 '생물 이야기'를 연재 중이고 포항공대, KAIST 등 여러 곳에 특강을 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글쓰기와 방송, 강의를 통해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쉽고 재미있는 과학을 알리는 데 기여한 공로로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2002), 대한민국 과학문화상(2003) 등을 수상했다.

2018-02-10 00:05:00

거북이와 달팽이. 책 속 이미지

[내가 읽은 책]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루이스 세풀베다/열린 책들/2016

내 이름은 '반항아'. 나는 이름이 갖고 싶었고, 왜 느린지에 대해서도 궁금했었어. 애타게 느린 종족이라는 것과 달처럼 둥글다는 뜻의 '달팽이'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행복한 것 아냐'며 다들 시큰둥했지. 외톨이가 되자 세 그루 너도밤나무 근처 가장 아는 것이 많다는 수리부엉이를 찾아갔어. 그는 내가 느린 이유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며,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지. 관습에 얽매여 그날그날 살아가는 달팽이들은 내 존재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야. 터무니없는 질문에 지친 할아버지 달팽이가 쪼아 버리겠다고 윽박질렀을 때 납매나무를 떠나기로 결심했지. 달팽이들이 왜 느린지 이유를 알게 되고, 이름을 갖게 되면 돌아오겠다며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거북이 '기억'이 나의 이름을 지어주었어. 그는 누군가에게 어디로 가는 건지 묻는 것은 잘못이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어. 자신이 인간의 망각으로부터 오는 길이며, 인간들은 자라면서 다 잊어버리는 종족이란 것을 알려 주었지. 거북한 질문이 많은 사람을 '반항아'라고 부른다고 했어. '기억'은 나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주었지. 인간들이 만드는 집들과 금속 심장이 달린 빠른 쇠 동물들을 보았을 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어. 또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며, 맞서 싸워야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 "달팽이 네게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느리다고 한탄만 하고 있어야 되겠니? 내가 '반항아'라는 이름의 달팽이를 알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네가 몇 걸음 가다가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거북이처럼 느린 덕분 아니겠니. 넌 코앞에 닥친 위험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 이들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용감한 달팽이란다. 그러니 반항아야.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봐." '기억'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납매나무로 돌아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인간들의 침입을 설명했지. 인간들이 곧 검은 길을 내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올 것이란 '기억'의 말을 전했어. 처음에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위험을 알려준 나를 존경과 믿음으로 바라봐 주었어. 새로운 민들레의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앞에 있지 뒤에 있지 않다는 믿음이었지. 달팽이들의 여행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이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처럼 계속 길과 집을 만들고, 땅을 깊게 파헤친다면, 우리처럼 '민들레의 나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기억'이 말한 대로, 너희가 '자라면서 모든 것을 잊는 종족'이라고 해도 나 같은 반항아 인간이 한 명쯤은 있을 테지. 제발 그의 말을 들어줘. '반항아' 달팽이가 하는 말을 들어준 것처럼!

2018-02-10 00:05:00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스틸컷.

범죄소설, 팬들은 열광하는 데 문단에선 왜 홀대받을까…『범죄소설의 계보학』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지음/ 소나무 펴냄 더블버튼 트렌치코트에 파이프 담배, 특이한 모자. 추리소설 하면 연상되는 탐정의 모습이다. 그들이 쓴 모자는 오죽하면 탐정 모자라는 이름 외에 뚜렷한 명명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은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든 모르는 게 없고, 조목조목 따져 들어가는 논리는 물샐 틈이 없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떻게 탐정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과도 퍽 어울리는 외모와 교양을 갖춘 인물이다. 날카롭고 지적인 그들, 그리고 그들은 주로 '백인 남자'다. '범죄소설의 계보학'은 오랜 시간 한국을 포함한 세계 문단에서 저평가됐던 범죄소설이 문화적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는 것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계명대 영문학과 계정민 교수에 따르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 범죄소설은 사건의 선정성을 무기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단순한 상업적 장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자는 뉴게이트 소설, 추리소설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이어지는 영미 범죄소설의 흐름을 좇으며, 계급갈등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소설 속 범죄가 어떻게 발생하고 해결되는지 분석했다. ◆범죄소설의 이데올로기적 저항성 시작은 뉴게이트 소설이다. 1830~47년 사이 영국에서 출판된 범죄소설 중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서 처형된 범죄자들의 일대기를 담은 '뉴게이트 캘린더'에 등장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어머니의 말 한 필을 훔친 범인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걸 본 불워 리턴은 '피비린내 나는' 영국 형법을 거세게 공격하는 '폴 클리퍼드'를 써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피지배계층이 당대 법률과 제도의 피해자라는 급진적 관점을 담은 추리로 열렬한 지지를 받던 뉴게이트 소설에 대한 인기가 컬트현상(특정 영화를 수십 번 보거나, 대사를 따라하거나, 관객이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등 열광적인 행동)으로 바뀌자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이 선거권을 얻기 위한 차티스트 운동이 전개될 때였다. 하류층 범죄자를 영웅시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전폭적인 메시지를 유포시켰으니 노동계급의 환영, 지배계급의 억압은 당연한 결과였다. 뉴게이트 소설에 대한 탄압이 이뤄질 때 체제 절충적 소설도 나타났다. 저자는 새커리의 '캐서린',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예로 든다.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던 거의 유일한 범죄소설은 경계와 억압을 이기지 못하면서 문단의 이단아로 내몰렸다. 100년 넘게 비평가의 관심 영역에서 사라진 것도 같은 이유다. ◆추리소설 속 비밀 뉴게이트 소설이 물러난 자리에는 추리소설이 등장한다. 탐정과 범인의 대립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추리소설의 기본 틀은 미스터리 범죄-범죄자의 추적과 체포-미스터리 해결이라는 규범에 묶여 있다. 뉴게이트 소설의 저항적, 혁명적 성격은 사라졌다. 여기에 창조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는 분석도 추가됐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연작은 위대한 탐정이 흥미진진한 게임을 벌이는 고전 추리소설의 전형이다. 새로운 영웅 격인 탐정 역시 당시의 계급'인종'민족 등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는 사실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에드거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심지어 땅딸막한 외국인으로 통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적 명탐정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백인 남자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러한 탐정의 재현이 계급'인종'젠더의 원형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합리적 사유와 과학적 분석으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고도의 추리력과 전문성을 갖춘 완벽한 인물이 상류 계급 출신 백인 남자라는 설정은 기존 계급체제를 공고히 한다. 여성 탐정은 어떨까. 여성 탐정 추리소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다. 여성이 범죄를 수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기존의 젠더 규범이 교란되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노처녀 탐정 추리소설은 영문학 영토 내 입지를 다졌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이 대표적이다. 마플은 노화한, 무성적 존재,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어서 비위협적인 존재다. 마플이 젠더 규범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 점은 추리소설의 문화적 시민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삼류소설의 반란 저자는 특히 질 낮고 점잖지 못한 문학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꼽는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1920년대 펄프픽션(값싼 펄프지로 인쇄돼 간행된 대중소설)이라는 잡지를 통해 최초로 등장했다. 권위 있는 문학지가 아니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잡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여기에 폭력적 요소와 성적 자극까지 추가돼 상업성에 치우친 저속한 소설로 평가됐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팜므파탈을 핵심적 주제로 제시한다. 계 교수는 팜므파탈의 아찔한 섹슈얼리티나 젠더적 저항보다 계급과 자본이라는 논점에 집중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지배계급과 자본가계급이 범죄자로,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이 피해자로 설정된다. 그는 팜므파탈의 욕망이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물질적 성취를 향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의 속성이 내재한다고 설명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가려진 팜므파탈의 본질은 노동자 계급의 좌절과 분노라는 뜻이다. 범죄소설은 시대와 함께 호흡해왔다. 여러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고 경합하고 타협하면서 대중적 인기와 무관하게 저평가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소설 문학의 한 장르가 됐다. 문학적 시민권을 인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질문은 유독 장르소설을 천시하는 한국 문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면산장 살인사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지난해 서점가를 흔들었던 것을 본다면 '아케치 코고로'를 만들어 낸 에도가와 란포의 등장을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을까. 376쪽, 1만8천원.

2018-02-10 00:05:00

[반갑다 새책] 한국이 소멸한다

한국 경제 사상 초유의 인구 붕괴가 시작된다. 1천700만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 한국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왜 서울의 인구가 줄어드는가. 이 책은 한국사회 담론과 경제 화두에 하나씩 답하며 해결책을 모색한다. '30년 내 산촌의 80퍼센트 이상 지방소멸.'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소식들이다. 언론 보도와 같이 이제 한국 경제 사상 초유의 인구 변화가 시작됐다. 작년을 기점으로 꾸준히 증가하던 생산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들었고, 한국은 고령화사회(Aging Society)를 지나 고령사회(Aged Society)로 완전히 진입했다. 이는 소비, 세수, 투자 등 경제성장을 이끄는 각종 요소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로써 한국 경제는 생산인구의 감소로 경제성장이 지체되는 '인구 오너스'(Demographic onus) 시대에 직면하게 됐다. 인구 통계와 세대 분석으로 사회 변화를 읽어내고 경기 흐름을 전망하는 경제학자 전영수 교수는 인구 변화로 인해 한국 경제가 겪게 될 미래를 보여준다. 단순히 인구 변화로 인한 거시경제 측면의 전망에서 나아가 청년, 중년, 노년이 겪게 될 생애의 변화까지 알려준다. 또 이들이 장차 겪게 될 사회, 경제적 변화를 언급하면서 개인과 가계, 정부의 역할까지 짚어본다. 324쪽 1만6천원.

2018-02-10 00:05:00

[반갑다 새책] 우리안의 식민사관

한반도 한사군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임나일본부설'''. 한국 사학계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분야들이다. 재야 사학자 이덕일 씨가 정리한 이 책은 영토적으로는 해방을 이루었지만 사관에서 '해방'되지 못한 한국사를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다. 우리 세금으로 극우 일본 식민사관을 전파하고 있는 사학계의 실태를 고발한다. 2012년 경기도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을 둘러싼 경기도교육청 자료집 사건, 동북아역사재단이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와 함께 펴낸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식민사관 공방, 그리고 풍납토성 초축 연대의 수정 시도 고발 등을 통해 식민사관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증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장에서는 식민사학자들의 비상식적인 역사의식,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자세도 무시해온 사학계의 실상을 고발한다. 자신들과 다른 관점, 즉 식민사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들을 식민사학 카르텔이 어떻게 매장하고 '왕따' 시켜왔는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들여다본다. 저자는 '우리 민족혼 말살을 위한 일제의 한국사 축소, 왜곡 전략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며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롯한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식민사관이 독버섯처럼 번창하고 있는 현실을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 설명한다'고 밝혔다. 491쪽, 2만원.

2018-02-10 00:05:00

이탈리아 내 바티칸공국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역작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이 대작을 그리다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탈진했다.

생생한 이탈리아 문화여행기…『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반비 펴냄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이제 다시는 갈 일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이 들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되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나라." 이 책 서문 중 일부다. 지은이가 이 책을 펴낸 동기는 미켈란젤로에서 마리노 마리니, 단테에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까지 이탈리아 인문주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그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로마, 페라라, 볼로냐, 밀라노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방문해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고, 그에 대한 생각을 기록해 여행 에세이로 이 책을 펴냈다. 이미 이탈리아 한 작가의 삶을 조명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카라바조, 단테, 미켈란젤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를 소개하는 글을 여러 차례 써왔다. 이번 저서는 '근대 인문학의 황혼'이라고 할 법한 시대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독서애호가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이다. 지금은 '미술 기행'이라는 말이 흔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인문학적인 에세이면서 여행기이며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가 섞인 이런 형태의 책은 매우 파격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25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 이어 이제 60대가 된 저자가 다시 이탈리아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난 소회를 기록하고 있다. 25년 사이에 달라진 세계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지만, 저자가 '늙음'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고통의 순간이 계속될 것 같았던 비관적인 청년의 관점이 인간의 역사 전체가 그와 비슷한 고통의 반복으로 이뤄진다는 관점으로 확장된다. 더불어 예술작품을 인간이 유한한 시간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 속에 기어코 남기는 흔적으로서 읽어내는 것도 이채롭다.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다뤘던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프리모 레미,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외에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잔 에뷔테른, 조르조 모란디,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주세페 스칼라리니, 오기와라 로쿠잔, 사에키 유조, 마리오 시로니 등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지만 각자 그 시대와 장소에서 치열하게 악전고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라바조는 반종교개혁의 시대에 종교적으로는 정통파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혁명가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본성을 가차없이 그려냈으며, 모란디는 파시즘의 시대에 고전성, 고요함, 조화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반파시즘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마리니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인간의 승리가 아닌 패배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미켈란젤로는 예술적인 대작(바티칸공국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인 '최후의 심판')의 완성을 추구했으나 말년에는 탈진해버렸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이탈리아 근대 작가들과 작품들이 저자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에피소드들과 합쳐져 생생한 이탈리아 문화여행기로 읽힌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봤던 인간을 향한 마음의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말한다. "'나'의 주관적인 프리즘을 통해 본 이미지며, 이탈리아를 얘기함과 동시에 '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 저자 서경식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케이자이 대학 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348쪽, 1만8천원.

2018-02-10 00:05:00

현진건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는 소박한 일상을 꿈으로 삼던 시대가 있었다. 꿈 실현의 필수조건인 농사지을 땅과 일 마치고 돌아올 마을, 그 어느 것도 없는 팍팍한 시대였기에 그런 일상이 한 시대를 아우르는 꿈으로서 등장했던 것이리라. 일제강점기 조선, 특히 1920년대 조선에서 그 꿈은 참으로 강렬했다. '바라 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라는 시 구절이 나올 정도로 1920년대 조선에서 그 꿈은 강렬했다. 조선 땅이 일본제국의 땅이 되고 그 땅에 일본인들이 밀려들어 오면서 쫓겨나야 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삶이 바로 그즈음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진건의 '고향'(1926)은 이처럼 고향에서 쫓겨난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경성행 기차 속에서 '나'가 남루한 복장의 한 조선인과 동석하면서 시작된다. '나'를 통해 전달되는 조선인 '그'의 고달픈 삶의 이야기가 소설의 주 내용이다. 조선인 '그'는 열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이주하여 십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유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한 가지, 일제의 경제 침탈로 농사짓던 땅을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나와 기차에서 동석한 그때 그는 서간도에서 안동현과 신의주로 거기에서 다시 일본 규슈 탄광촌과 오사카 철광촌이라는 멀고도 긴 유랑의 세월을 끝내고 고향을 방문하고는 경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유랑 생활 십여 년 만에 고향이라고 찾아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고향 마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100여 호나 되던 농가는 이미 폐농이 되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젊은 날 마음을 두었던 동네 처녀는 유곽을 떠돌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부모도, 친구도, 마음을 둔 처녀도, 집터도, 과거를 기억할 모든 것이 사라진 그곳이 더 이상 고향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망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을 잃은 사람이 '그' 한 사람뿐이었을까. 고향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조차 마음은 떠돌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소설 속 그의 삶은 망국의 삶을 살아가는 조선인 일반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이 나온 지 90년이 지났다. 현진건이 갈망한 고향은 일반적 의미의 고향을 넘어, 하나로 뭉친 독립된 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고향을 찾았을까. 지금 우리에게는 고향이 있을까. 평창올림픽이 곧 시작한다. 올림픽 개최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현진건의 고향 독립 조선이 남북으로 갈린 것도 모자라서 좌우로 갈려 있는 형국이다. 90년 전 조선인들이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면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만들더니 이제는 남북과 좌우로 갈라지면서 고향을 나누는 형국이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디아스포라'를 통합의 잔치로 만들기를 희망한다.

2018-02-10 0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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