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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의 '생명의 이름'은 생물'생태에 대한 꼼꼼한 기록인 동시에 생명체의 이름에 담긴 철학적 고찰을 담고 있다. 사진은 권 교수가 책의 소재로 삼은 다양한 생명체들. 사이언스북스 제공

생명의 이름 속에 새겨진 다양한 이야기들…『생명의 이름』

지구 생명체의 숫자는? 어떤 과학자는 0이 스무 개쯤 붙는다고 하고, 어떤 생물학자는 생물을 동'식물, 미생물에 바이러스, 세포까지 분류하다가 '범위'부터 막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고도 한다. 이렇게 무량대수(無量大數) 생명체들도 이름표를 달지 못하면 그냥 '생물'이나 '유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학명이나 분류 명(名)을 얻어 달면서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며 인류와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물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건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린네였다. 그는 속(genus)과 종(species)을 나타내는 두 라틴어 단어로 된 학명을 생물에 부여하는 '이명법'을 창시해 현대적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 책은 저마다 이름과 사연을 간직한 채 우리의 산천을 형성하고, 인간과 함께 살아온 생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생명체 이름들의 재밌는 사연 소개 '달팽이 박사의 생명 찬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세상에는 '이름 모를 풀'이 없고, 아주 작은 생명에도 다 나름의 이유와 사연이 있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권오길(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의 전작 '생명 교향곡'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따라 펼쳐지는 생물들의 생태 이야기를 그렸다면 이 책은 생명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이름에 주목하고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생명 교향곡'의 선율을 잇는 작업이었다. 제철을 견디지 못하고 설익은 채로 떨어지고만 '도사리', 매미가 탈바꿈한 자리에 남기고 떠난 '선퇴', 겨울에도 푸르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겨우살이'처럼 우리의 말이 새겨 놓은 생명의 이름들은 시어(詩語)처럼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스란히 기록됐다. 선조들이 자연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들은 우리말에 새겨졌고 대대로 전수돼 지식과 문화를 형성하고 우리의 DNA를 구축해왔던 것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 따라 5부로 구성 이 책은 정지용의 시 '향수'를 따라 우리 산과 들, 바다에서 생물들을 만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1부 '넓은 벌 동쪽 끝'은 우리 들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작물과 들짐승, 들꽃들의 얘기를 다룬다. 하늘에는 해바라기 꽃을 달고 땅에는 감자를 달고 있는 것이 엉뚱하다고 해서 '뚱딴지'라 불리는 돼지감자, '신선의 손바닥'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제주도에서 자생해 온 선인장 얘기가 수록돼 있다. 인터넷주소를 구성하는 골뱅이(@)에서는 달팽이의 '느림의 미학'을 칭찬한다. 면도날을 타고 넘지만 베이지 않는 유연함에서 '처세의 미학'을 배운다. 2부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에는 우리 강을 수놓으며 생명력을 뽐내는 개구리밥과 연가시 등에 관한 얘기가 담겼다. 반딧불이를 보고 '개똥불로 별을 대적한다'는 속담의 의미를 알아보고, 잠자리를 뜻하는 다른 말로 '청령'이나 '청낭자'라는 우리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짐승'바다생물 이야기 분석 3부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는 하늘로 높게 뻗어 올라간 나무들과 산짐승들의 얘기를 다룬다. 뻐꾸기의 탁란(托卵) 습성을 관찰하며 악랄한 이기적 유전자를 비판한다. '어미를 죽이면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살모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뱀의 억울한 사연과 '황조가'에 등장해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을 함께한 꾀꼬리의 얘기를 들어 본다. 4부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은 자유롭게 바다를 활보하는 바다 생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언각비'와 '전어지'와 같은 문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물고기들의 이름은, 우리말이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또 구각(舊殼)을 벗어야만 성장, 변화를 맞을 수 있는 꽃게의 숙명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5부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지붕'은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라 여기며 자연과 공생해 온 우리의 정겨운 터전을 들여다본다. '까치밥'으로 남겨 둔 감에서 선조들의 아름다운 미덕을, 우리 몸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배꼽을 보며 우리 역시 다른 생명들과 닮았음을 본다. '돼지감자가 세상을 바꾼다' '그령(한국에 흔한 여러해살이풀)처럼 억세게' '잠자리의 결혼비행' 등 소제목들에서 느껴지듯 이 책은 어려운 과학책보다는 수필에 더 가깝다. 생물을 바라보는 한 노학자의 애정 어린 기록인 동시에, 생명을 관조하는 한 문학가의 서정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302쪽, 1만6천500원. ◆권오길 교수는=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기고, 서울사대부고에서 생물을 가르쳤으며, 강원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25년간 근무했다.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저작과 방송 활동, 강의를 통해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다. 일간지에 '생물 이야기'를 연재 중이고 포항공대, KAIST 등 여러 곳에 특강을 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글쓰기와 방송, 강의를 통해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쉽고 재미있는 과학을 알리는 데 기여한 공로로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2002), 대한민국 과학문화상(2003) 등을 수상했다.

2018-02-10 00:05:00

거북이와 달팽이. 책 속 이미지

[내가 읽은 책]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루이스 세풀베다/열린 책들/2016

내 이름은 '반항아'. 나는 이름이 갖고 싶었고, 왜 느린지에 대해서도 궁금했었어. 애타게 느린 종족이라는 것과 달처럼 둥글다는 뜻의 '달팽이'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행복한 것 아냐'며 다들 시큰둥했지. 외톨이가 되자 세 그루 너도밤나무 근처 가장 아는 것이 많다는 수리부엉이를 찾아갔어. 그는 내가 느린 이유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며,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지. 관습에 얽매여 그날그날 살아가는 달팽이들은 내 존재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야. 터무니없는 질문에 지친 할아버지 달팽이가 쪼아 버리겠다고 윽박질렀을 때 납매나무를 떠나기로 결심했지. 달팽이들이 왜 느린지 이유를 알게 되고, 이름을 갖게 되면 돌아오겠다며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거북이 '기억'이 나의 이름을 지어주었어. 그는 누군가에게 어디로 가는 건지 묻는 것은 잘못이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어. 자신이 인간의 망각으로부터 오는 길이며, 인간들은 자라면서 다 잊어버리는 종족이란 것을 알려 주었지. 거북한 질문이 많은 사람을 '반항아'라고 부른다고 했어. '기억'은 나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주었지. 인간들이 만드는 집들과 금속 심장이 달린 빠른 쇠 동물들을 보았을 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어. 또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며, 맞서 싸워야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 "달팽이 네게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느리다고 한탄만 하고 있어야 되겠니? 내가 '반항아'라는 이름의 달팽이를 알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네가 몇 걸음 가다가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거북이처럼 느린 덕분 아니겠니. 넌 코앞에 닥친 위험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 이들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용감한 달팽이란다. 그러니 반항아야.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봐." '기억'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납매나무로 돌아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인간들의 침입을 설명했지. 인간들이 곧 검은 길을 내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올 것이란 '기억'의 말을 전했어. 처음에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위험을 알려준 나를 존경과 믿음으로 바라봐 주었어. 새로운 민들레의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앞에 있지 뒤에 있지 않다는 믿음이었지. 달팽이들의 여행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이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 지금처럼 계속 길과 집을 만들고, 땅을 깊게 파헤친다면, 우리처럼 '민들레의 나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기억'이 말한 대로, 너희가 '자라면서 모든 것을 잊는 종족'이라고 해도 나 같은 반항아 인간이 한 명쯤은 있을 테지. 제발 그의 말을 들어줘. '반항아' 달팽이가 하는 말을 들어준 것처럼!

2018-02-10 00:05:00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스틸컷.

범죄소설, 팬들은 열광하는 데 문단에선 왜 홀대받을까…『범죄소설의 계보학』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지음/ 소나무 펴냄 더블버튼 트렌치코트에 파이프 담배, 특이한 모자. 추리소설 하면 연상되는 탐정의 모습이다. 그들이 쓴 모자는 오죽하면 탐정 모자라는 이름 외에 뚜렷한 명명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은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든 모르는 게 없고, 조목조목 따져 들어가는 논리는 물샐 틈이 없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떻게 탐정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과도 퍽 어울리는 외모와 교양을 갖춘 인물이다. 날카롭고 지적인 그들, 그리고 그들은 주로 '백인 남자'다. '범죄소설의 계보학'은 오랜 시간 한국을 포함한 세계 문단에서 저평가됐던 범죄소설이 문화적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는 것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계명대 영문학과 계정민 교수에 따르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 범죄소설은 사건의 선정성을 무기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단순한 상업적 장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자는 뉴게이트 소설, 추리소설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이어지는 영미 범죄소설의 흐름을 좇으며, 계급갈등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소설 속 범죄가 어떻게 발생하고 해결되는지 분석했다. ◆범죄소설의 이데올로기적 저항성 시작은 뉴게이트 소설이다. 1830~47년 사이 영국에서 출판된 범죄소설 중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서 처형된 범죄자들의 일대기를 담은 '뉴게이트 캘린더'에 등장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어머니의 말 한 필을 훔친 범인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는 걸 본 불워 리턴은 '피비린내 나는' 영국 형법을 거세게 공격하는 '폴 클리퍼드'를 써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피지배계층이 당대 법률과 제도의 피해자라는 급진적 관점을 담은 추리로 열렬한 지지를 받던 뉴게이트 소설에 대한 인기가 컬트현상(특정 영화를 수십 번 보거나, 대사를 따라하거나, 관객이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등 열광적인 행동)으로 바뀌자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이 선거권을 얻기 위한 차티스트 운동이 전개될 때였다. 하류층 범죄자를 영웅시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전폭적인 메시지를 유포시켰으니 노동계급의 환영, 지배계급의 억압은 당연한 결과였다. 뉴게이트 소설에 대한 탄압이 이뤄질 때 체제 절충적 소설도 나타났다. 저자는 새커리의 '캐서린',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예로 든다.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던 거의 유일한 범죄소설은 경계와 억압을 이기지 못하면서 문단의 이단아로 내몰렸다. 100년 넘게 비평가의 관심 영역에서 사라진 것도 같은 이유다. ◆추리소설 속 비밀 뉴게이트 소설이 물러난 자리에는 추리소설이 등장한다. 탐정과 범인의 대립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추리소설의 기본 틀은 미스터리 범죄-범죄자의 추적과 체포-미스터리 해결이라는 규범에 묶여 있다. 뉴게이트 소설의 저항적, 혁명적 성격은 사라졌다. 여기에 창조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는 분석도 추가됐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연작은 위대한 탐정이 흥미진진한 게임을 벌이는 고전 추리소설의 전형이다. 새로운 영웅 격인 탐정 역시 당시의 계급'인종'민족 등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는 사실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에드거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심지어 땅딸막한 외국인으로 통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적 명탐정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백인 남자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러한 탐정의 재현이 계급'인종'젠더의 원형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합리적 사유와 과학적 분석으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고도의 추리력과 전문성을 갖춘 완벽한 인물이 상류 계급 출신 백인 남자라는 설정은 기존 계급체제를 공고히 한다. 여성 탐정은 어떨까. 여성 탐정 추리소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다. 여성이 범죄를 수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기존의 젠더 규범이 교란되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노처녀 탐정 추리소설은 영문학 영토 내 입지를 다졌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이 대표적이다. 마플은 노화한, 무성적 존재,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어서 비위협적인 존재다. 마플이 젠더 규범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 점은 추리소설의 문화적 시민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삼류소설의 반란 저자는 특히 질 낮고 점잖지 못한 문학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꼽는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1920년대 펄프픽션(값싼 펄프지로 인쇄돼 간행된 대중소설)이라는 잡지를 통해 최초로 등장했다. 권위 있는 문학지가 아니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잡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여기에 폭력적 요소와 성적 자극까지 추가돼 상업성에 치우친 저속한 소설로 평가됐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팜므파탈을 핵심적 주제로 제시한다. 계 교수는 팜므파탈의 아찔한 섹슈얼리티나 젠더적 저항보다 계급과 자본이라는 논점에 집중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지배계급과 자본가계급이 범죄자로,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이 피해자로 설정된다. 그는 팜므파탈의 욕망이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물질적 성취를 향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의 속성이 내재한다고 설명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가려진 팜므파탈의 본질은 노동자 계급의 좌절과 분노라는 뜻이다. 범죄소설은 시대와 함께 호흡해왔다. 여러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고 경합하고 타협하면서 대중적 인기와 무관하게 저평가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소설 문학의 한 장르가 됐다. 문학적 시민권을 인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질문은 유독 장르소설을 천시하는 한국 문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면산장 살인사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지난해 서점가를 흔들었던 것을 본다면 '아케치 코고로'를 만들어 낸 에도가와 란포의 등장을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을까. 376쪽, 1만8천원.

2018-02-10 00:05:00

[반갑다 새책] 한국이 소멸한다

한국 경제 사상 초유의 인구 붕괴가 시작된다. 1천700만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 한국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왜 서울의 인구가 줄어드는가. 이 책은 한국사회 담론과 경제 화두에 하나씩 답하며 해결책을 모색한다. '30년 내 산촌의 80퍼센트 이상 지방소멸.'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소식들이다. 언론 보도와 같이 이제 한국 경제 사상 초유의 인구 변화가 시작됐다. 작년을 기점으로 꾸준히 증가하던 생산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들었고, 한국은 고령화사회(Aging Society)를 지나 고령사회(Aged Society)로 완전히 진입했다. 이는 소비, 세수, 투자 등 경제성장을 이끄는 각종 요소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로써 한국 경제는 생산인구의 감소로 경제성장이 지체되는 '인구 오너스'(Demographic onus) 시대에 직면하게 됐다. 인구 통계와 세대 분석으로 사회 변화를 읽어내고 경기 흐름을 전망하는 경제학자 전영수 교수는 인구 변화로 인해 한국 경제가 겪게 될 미래를 보여준다. 단순히 인구 변화로 인한 거시경제 측면의 전망에서 나아가 청년, 중년, 노년이 겪게 될 생애의 변화까지 알려준다. 또 이들이 장차 겪게 될 사회, 경제적 변화를 언급하면서 개인과 가계, 정부의 역할까지 짚어본다. 324쪽 1만6천원.

2018-02-10 00:05:00

[반갑다 새책] 우리안의 식민사관

한반도 한사군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임나일본부설'''. 한국 사학계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분야들이다. 재야 사학자 이덕일 씨가 정리한 이 책은 영토적으로는 해방을 이루었지만 사관에서 '해방'되지 못한 한국사를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다. 우리 세금으로 극우 일본 식민사관을 전파하고 있는 사학계의 실태를 고발한다. 2012년 경기도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을 둘러싼 경기도교육청 자료집 사건, 동북아역사재단이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와 함께 펴낸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식민사관 공방, 그리고 풍납토성 초축 연대의 수정 시도 고발 등을 통해 식민사관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증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장에서는 식민사학자들의 비상식적인 역사의식,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자세도 무시해온 사학계의 실상을 고발한다. 자신들과 다른 관점, 즉 식민사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들을 식민사학 카르텔이 어떻게 매장하고 '왕따' 시켜왔는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들여다본다. 저자는 '우리 민족혼 말살을 위한 일제의 한국사 축소, 왜곡 전략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며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롯한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식민사관이 독버섯처럼 번창하고 있는 현실을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 설명한다'고 밝혔다. 491쪽, 2만원.

2018-02-10 00:05:00

이탈리아 내 바티칸공국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역작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이 대작을 그리다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탈진했다.

생생한 이탈리아 문화여행기…『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반비 펴냄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이제 다시는 갈 일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이 들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되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나라." 이 책 서문 중 일부다. 지은이가 이 책을 펴낸 동기는 미켈란젤로에서 마리노 마리니, 단테에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까지 이탈리아 인문주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그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로마, 페라라, 볼로냐, 밀라노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방문해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고, 그에 대한 생각을 기록해 여행 에세이로 이 책을 펴냈다. 이미 이탈리아 한 작가의 삶을 조명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카라바조, 단테, 미켈란젤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를 소개하는 글을 여러 차례 써왔다. 이번 저서는 '근대 인문학의 황혼'이라고 할 법한 시대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독서애호가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이다. 지금은 '미술 기행'이라는 말이 흔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인문학적인 에세이면서 여행기이며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가 섞인 이런 형태의 책은 매우 파격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25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 이어 이제 60대가 된 저자가 다시 이탈리아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난 소회를 기록하고 있다. 25년 사이에 달라진 세계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지만, 저자가 '늙음'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고통의 순간이 계속될 것 같았던 비관적인 청년의 관점이 인간의 역사 전체가 그와 비슷한 고통의 반복으로 이뤄진다는 관점으로 확장된다. 더불어 예술작품을 인간이 유한한 시간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 속에 기어코 남기는 흔적으로서 읽어내는 것도 이채롭다.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다뤘던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프리모 레미,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외에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잔 에뷔테른, 조르조 모란디,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주세페 스칼라리니, 오기와라 로쿠잔, 사에키 유조, 마리오 시로니 등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지만 각자 그 시대와 장소에서 치열하게 악전고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라바조는 반종교개혁의 시대에 종교적으로는 정통파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혁명가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본성을 가차없이 그려냈으며, 모란디는 파시즘의 시대에 고전성, 고요함, 조화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반파시즘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마리니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인간의 승리가 아닌 패배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미켈란젤로는 예술적인 대작(바티칸공국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인 '최후의 심판')의 완성을 추구했으나 말년에는 탈진해버렸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이탈리아 근대 작가들과 작품들이 저자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에피소드들과 합쳐져 생생한 이탈리아 문화여행기로 읽힌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봤던 인간을 향한 마음의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말한다. "'나'의 주관적인 프리즘을 통해 본 이미지며, 이탈리아를 얘기함과 동시에 '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 저자 서경식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케이자이 대학 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348쪽, 1만8천원.

2018-02-10 00:05:00

현진건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는 소박한 일상을 꿈으로 삼던 시대가 있었다. 꿈 실현의 필수조건인 농사지을 땅과 일 마치고 돌아올 마을, 그 어느 것도 없는 팍팍한 시대였기에 그런 일상이 한 시대를 아우르는 꿈으로서 등장했던 것이리라. 일제강점기 조선, 특히 1920년대 조선에서 그 꿈은 참으로 강렬했다. '바라 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라는 시 구절이 나올 정도로 1920년대 조선에서 그 꿈은 강렬했다. 조선 땅이 일본제국의 땅이 되고 그 땅에 일본인들이 밀려들어 오면서 쫓겨나야 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삶이 바로 그즈음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진건의 '고향'(1926)은 이처럼 고향에서 쫓겨난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경성행 기차 속에서 '나'가 남루한 복장의 한 조선인과 동석하면서 시작된다. '나'를 통해 전달되는 조선인 '그'의 고달픈 삶의 이야기가 소설의 주 내용이다. 조선인 '그'는 열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이주하여 십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유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한 가지, 일제의 경제 침탈로 농사짓던 땅을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나와 기차에서 동석한 그때 그는 서간도에서 안동현과 신의주로 거기에서 다시 일본 규슈 탄광촌과 오사카 철광촌이라는 멀고도 긴 유랑의 세월을 끝내고 고향을 방문하고는 경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유랑 생활 십여 년 만에 고향이라고 찾아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고향 마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100여 호나 되던 농가는 이미 폐농이 되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젊은 날 마음을 두었던 동네 처녀는 유곽을 떠돌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부모도, 친구도, 마음을 둔 처녀도, 집터도, 과거를 기억할 모든 것이 사라진 그곳이 더 이상 고향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망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을 잃은 사람이 '그' 한 사람뿐이었을까. 고향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조차 마음은 떠돌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소설 속 그의 삶은 망국의 삶을 살아가는 조선인 일반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이 나온 지 90년이 지났다. 현진건이 갈망한 고향은 일반적 의미의 고향을 넘어, 하나로 뭉친 독립된 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고향을 찾았을까. 지금 우리에게는 고향이 있을까. 평창올림픽이 곧 시작한다. 올림픽 개최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현진건의 고향 독립 조선이 남북으로 갈린 것도 모자라서 좌우로 갈려 있는 형국이다. 90년 전 조선인들이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면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만들더니 이제는 남북과 좌우로 갈라지면서 고향을 나누는 형국이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디아스포라'를 통합의 잔치로 만들기를 희망한다.

2018-02-10 00:05:00

하승미 작 '코스모스'

[내가 읽은 책] 딥스/ 버지니아 M. 액슬린/ 주정일 외 옮김/ 샘터/2011

딥스/ 버지니아 M. 액슬린/ 주정일 외 옮김/ 샘터/2011 문을 닫는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 필사적으로. 더 큰 내가, 나를 구해줄 때까지! 버지니아 M. 액슬린은 아동심리학자로 심리적, 정서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놀이치료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과도한 반복이나 강요가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가 원하는 방식대로 치료를 진행한다. 그는 정신적 아픔이 있는 아이를 먼저 치료하면 그 부모들의 정신건강도 치료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상반되는 기조다. 이 책은 버지니아의 놀이치료 아동 중 한 명인 딥스가 치료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잠근 문을 싫어하는 딥스는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다섯 살배기다. 아빠는 유능한 과학자이고 엄마는 의사다. 출산 계획이 없던 부모는 딥스를 정서적으로 거부하고 딥스에게 지적 우수성만을 요구한다. 사랑보다 억압에서 자라는 딥스는 자신만의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가 침묵, 관계의 단절, 공격성, 퇴행 등 다양한 이상 행동을 보인다. 또래 친구들과 많이 다른 딥스는 유치원 선생님의 소개로 버지니아와 놀이치료를 하게 된다. 버지니아는 딥스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얘기해달라고 재촉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여러 장난감과 도구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져보고 무언가를 시도해봄으로써 스스로 많은 경험을 하도록 한다. 특히 칭찬을 하거나, 제안 또는 질문을 해서 내면의 소리가 아닌 외부의 자극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한다. 또 부모와 경험한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관계가 아닌 대인관계에서 스스로를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도록 치료를 진행한다. 딥스는 서서히 버지니아를 신뢰하게 된다. 버지니아와의 일대일 놀이치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면서 딥스는 버지니아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다. 딥스가 웃고, 인사를 하고, 마음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알기 시작하면서 회색빛 엄마도 미소를 짓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아빠도 유연해진다. 아이의 정신적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넘치는 물질만 제공했던 모순된 부모는 딥스의 문제가 능력 부족이 아님을 어쩌면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 버지니아는 딥스가 자기 자신보다 더 자신의 내적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며 책임감 있는 자유 의식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자라고 발달한다는 것(87쪽)을 알아가도록 그저 믿고 기다려준 것이다. 세상 어떤 것도 안정될 수 없고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없기에, 외부 상황은 통제할 수 없지만 내면의 힘을 이용한다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91쪽)을 다섯 살의 딥스는 스스로 알아냈다. 두려운 세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며 고립시켰던 작은 딥스가 아닌 큰 딥스가 된 것이다. 우린 때로 딥스였고, 지금도 딥스일 수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변하기만 하는 세상을 헤쳐나갈 능력을 상실한 채 홀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특히 누군가의 교사라면, 누군가의 부모라면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이다. "세상 모든 딥스를 위해! 내가 원한 대로, 당신이 원한 대로, 우리가 원한 대로…." (299쪽)

2018-02-03 00:05:00

1967년 영화 '꿈'. 신상옥 감독은 '꿈'을 1995년과 1967년 두 차례 만들었다. 1967년 작 '꿈'에는 거대 영화제작사가 동남아 시장 수출을 위해 제작한 대중영화라는 특성이 더해졌다. 테오리아 제공

'충무로 황제' 신상옥은 왜 사라졌나…『극장, 정치를 꿈꾸다』

극장, 정치를 꿈꾸다/ 이상우 지음/ 테오리아 펴냄 '극장정치'라는 말이 있다. 극장에서 하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극적인 이벤트 효과를 활용한 정치를 말한다. 예컨대 대통령이 선택한 하나의 이슈를 중심으로 대결구도를 만들고 여론몰이를 하려고 기획한, 대통령 주연'기획'연출의 드라마가 극장정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정치형태에 붙이기도, 북한의 통치행위를 일컫기도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극장처럼 극적인 정치가 극장정치로, 극장보다는 정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주어를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이상우 연극평론가 겸 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정치가 아니라, 극장이 정치적 욕망을 어떻게 표출했는지에 주목한다. 책 '극장, 정치를 꿈꾸다'는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전쟁, 분단시대를 겪으며 관객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극장은 어떤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드러내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저자는 극장의 문화정치를 연극과 영화 두 장르로 나누고, 역사, 젠더, 민족주의, 영화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역사극에서 기억의 정치학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 여배우의 성립과 인식은 젠더 관점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를 극장에서 어떻게 확인할지, 분단 시대 영화와 정치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될지 네 가지로 나눠 정리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본격화했다. 우리말을 쓸 수 없었고, 연극'영화에 대한 검열도 강해졌다. '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극화할 수 있는 소재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고대사 이야기가 과거 민족에 대한 향수가 되고, '이조'(李朝) 이야기는 원망과 회한의 대상이 되어 역사극의 두 갈래를 형성했다. 한쪽에서는 민족통합의 담론을, 한쪽에서는 조선 쇠퇴 담론을 이야기하는 기억 담론의 투쟁이 극으로 표현됐다. 서술 주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기억은 김옥균에 대한 극단의 시선에서 두드러진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김옥균은 독립과 개혁을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이끈 근대개혁운동가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을 꾀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 이전 그에 대한 시선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일제강점기 작품 속 김옥균은 나운규가 만든 영화 '개화당이문'(1932)에서 보듯 개혁운동가로 그려지기도 하고, 박영호의 희곡 '김옥균의사'(1944)에서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저자는 김옥균을 다룬 문화텍스트가 각기 다른 기억으로 역사적 인물을 서술하고 재현하면서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경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근대국민국가의 왜곡된 성 인식은 여성에게 새로운 잣대로 작용한다. 여배우의 탄생은 윤심덕이나 토월회 여배우의 사례처럼 수많은 난관이 필요했다. 하루아침에 추문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화가 겸 문인 나혜석도,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천재로 불린 박인덕도 '조선의 노라'가 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은 일본 유학 시절 육군사관생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극단 토월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기진이나 염상섭, 김동인, 전영택 등 남성 문인들로부터 돌아가며 인신공격을 받고 '탕녀'(蕩女)로 낙인찍힌다. 금욕주의적 연애 이상을 추구하는 글을 써가며 자신을 스스로 방어해야 했던 김명순의 상황은 당시의 젠더 인식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배뱅이굿'(1942), '맹진사댁 경사'(1943), '한네의 승천'(1972) 등 이른바 '민속의례 3부작'으로 유명한 민족주의 작가 오영진은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저자는 식민모국의 언어로 민족주의를 말하는 아이러니는 단순히 민족을 배신한 활동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일본어가 국어로 강제되는 상황 외에 일제강점하 동아시아 문화블록 내에서의 신질서 편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충무로 황제' 신상옥 감독을 분단 체제를 대표하는 극장정치의 주인공으로 꼽았다. 1950, 60년대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 등 흥행작을 쏟아냈다. 박정희'김종필의 후원으로 안양영화촬영소를 연수하고, 박정희 정권과 밀월관계를 형성하며 영화사 '신필름'을 차리며 할리우드식 영화감독을 건설한 것도 신 감독이다. 그러나 영화계를 대표해 정부의 영화검열정책에 반대하다가 영화 미디어를 권력의 손에 쥐려던 정권과의 갈등과 불화로 몰락했다. 최은희와 비슷한 시기에 실종됐다가 탈북하기까지 북한에서 활동한 그는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20편의 영화를 제작'연출했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유일사상국가의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됐다. 그는 탈남과 탈북을 모두 경험한, 그래서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영화를 연출한 유일한 감독이지만 어디에서도 창작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지는 못했다. 한국 영화사에서의 입지가 약화하고, 북한 영화사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그의 영화는 예술이 정치에 지배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을 통해 분단체제가 예술에 가한 억압을 일깨운다. 근대의 극장은 불온한 감각, 음탕한 욕망, 허황한 꿈이 재현되는, 금기와 불온의 공간으로 취급됐다. 숱한 예술가들이 정치적 욕망을 투신한 공간이기에 극장에는 시대 공기가 담겼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던 관객은 작품과 작가, 그리고 극장의 표상에 사로잡힌다. 시대는 다른 방식으로 극장을 공격했고, 극장은 그만의 다른 방식으로 답했다. 그래서 '블랙리스트' 사태는 새삼스럽지 않다. 늘 그래 왔듯 정치적 욕망과 시대적 억압이 뒤얽힌 덤불에서 극장은 새로운 정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392쪽, 1만9천원. ▷지은이 이상우는… 연극평론가 겸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컬럼비아대 객원연구원, 메이지대 문학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극작가 겸 연출가 유치진을 통해 한국 근대극을 재조명한 '유치진 연구'로 유명하며 '근대극의 풍경' '우리 연극 100년' '영화, 대동아를 상상하다' 등을 공동집필 또는 공동번역했다.

2018-02-03 00:05:00

[책 CHECK]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김서형 지음/ 학교도서관 저널 펴냄 이 책은 그림을 통해 다양한 층위의 역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반 고흐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에서 초승달, 화성, 금성이 같은 하늘에 나타나는 '천체 결집현상'이 묘사된 것에서 출발해 별의 탄생 역사, 별과 관련된 신화, 인류의 우주관 변화 과정 등을 살펴보는가 하면, 모네의 그림에서 태양의 탄생과 태양이 인류의 예술에 미친 영향, 오늘날 지구와 태양의 관계를 살펴보는 식이다. 이 책은 빅뱅부터 혁명과 전쟁 이후의 현대사회까지 살펴보고 있다. 원숭이가 그려진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다윈의 진화론과 논쟁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으며,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에서 신과 인간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나무와 관련된 북유럽 신화를 이해하고, 생명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언급한다. "인류의 기원과 현재, 미래가 한 화폭에 담겨 있는 이 그림처럼 세상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기원을 연구하고 고찰하는 것은 다양한 생명체와 인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220쪽, 1만4천원.

2018-02-03 00:05:00

[책 CHECK] 대구지오그라피

대구지오그라피 박진관 지음/ 도서출판 보물섬 펴냄 이 책은 저자가 4년 동안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다듬어 엮은 것으로 대구의 역사와 지리, 문화, 자연 등을 살펴보고 생생하게 되살려낸 저서다.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그 역사와 문화, 그 안에 살아있는 우리 삶의 스토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1982년 대구시가 펴낸 '대구의 향기'에서 대구를 서울, 부산에 이은 한국 3대 도시에 포함시키고 분지성 내륙도시, 정치도시, 군사도시, 상업도시, 섬유도시, 사과도시, 교육과 문화도시로 규정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대구가 3대 도시로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라면서 "글을 연재하는 과정에서 대구 새로운 정체성 찾기에 골몰했고 그 결과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특색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도시 정체성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생물처럼 변한다고 본 저자는 대구의 자연지리에 주목하고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보물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외에도 일제 강점기 일본의 자취, 2'28민주운동, 대구 사람 전태일'조영래 이야기 등을 사진과 함께 다루고 있다. 저자는 "다른 지역은 없는 것도 만들어내고 과장하는 데 비해 대구는 자연과 역사'문화유산을 알리고 선양하는 데 인색했다"면서 "이 책이 대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08쪽, 2만5천원.

2018-02-03 00:05:00

한국의 경제 번영을 상징하는 서울 도심 빌딩. 매일신문 DB

한국 경제 재도약 위해 반드시 짚고 가야할 것들…『한국 경제 진단과 처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2015년 홍상수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1부에서 속물, 찌질남으로 묘사되던 주인공(정재영 분)이 장면을 바꾸어 2부에서는 지적이고 상식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시선을 살짝 비틀어 정반대의 해석을 도출해 내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이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듯한 이 책은 시점을 바꾸어(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한국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경제 흐름이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개발, 성장시대 때 통용되던 '성공 방정식'이 현실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재정부 전'현직 관료 6명이 대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저자들은 해외의 경제 대가 7인을 지상(紙上)으로 초대해 그들의 혜안을 빌려 우리 경제가 고민해야할 일곱 가지 주제를 살피고 있다. 1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재벌 문제를 살펴본다. 기업 이론의 대가 로널드 코스(Ronald Coase)의 견해를 통해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재벌은 대중들이 '욕망하면서 혐오하는 존재'다. 근대화의 주역이라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한편에서는 정경유착과 비리의 온상이라는 비난도 함께 받고 있다. 코스는 '비용 이론'의 관점에서 기업의 순기능을 강조한 학자다. 기업가의 자원 배분 역할을 평가한 그의 이론은 정부 개입을 비판하고 재벌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활용되었지만 그렇다고 '정부 무용론자'도 아니었다. 코스는 '현재 우리 재벌들이 자원을 배분하는 기업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2장에서는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로부터 저성장의 원인과 대책을 듣는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발전의 동인을 설파한 혁신 전도사로 유명하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저성장의 장기화 추세다. 저성장을 운명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시 한 번 재도약을 꾀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저자는 '삶의 질'이라는 화두 앞에서 GDP 성장률 중심의 정책을 유지해 나갈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혁신 방향을 찾아 나설지 고민해야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를 호출하는 3장에서는 저소비가 문제인지, 과소비가 문제인지를 살펴본다. 거시경제 측면에서는 소비 부족을 재앙으로 보고, 반대로 개인의 입장에서는 분수에 넘치게 소비하는 게 문제라고 한다. 소비 경제 주체들이 모인 국가 경제가 오히려 저소비로 홍역을 앓고 있는 것도 난센스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의 소비를 증가시키는 것이 효과가 있는지, 효과는 지속 가능한지 궁금해진다. 갤브레이스는 부자들의 무분별한 과소비가 문제라고 지적하며 개인의 과소비를 부추기지 않고 경제 전체의 수요 부족을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에게 디플레이션과 맞설 용기'지혜가 있는지 살펴보는 4장에서는 윌리엄 필립스(William Daniel Phillips)가 등장한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기억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는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경제 성장률을 올리려면 물가 상승을 감수해야 한다는 '필립스 곡선'은 이제 재해석되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서라도 성장률을 올려서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일본과 유로존 국가들은 마이너스 금리라는 초강도 대책을 써가며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는 과연 디플레이션을 감당할 체력을 갖추었느냐'고 묻는다. 로버트 배로(Robert Barro)의 '조세 평탄화 이론'이 적용되는 5장에서는 정부의 재원 조달이 대해 살핀다. 재정수단으로 '조세'를 선택할지 '부채'를 선택할지 고민이 크다. 과거에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세수가 저절로 늘어났기 때문에 국가 부채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로존 재정 위기에서 보듯 국가 부채 문제는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 우리도 부채가 누적되는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증세를 할 것인지, 국채를 발행할 것인지는 중요한 선택이다. 배로의 '조세 평탄화 이론'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살펴본다. 6장에서는 리처드 칸(Richard Kahn)의 혜안을 빌린다. '재정 승수'(Fiscal multiplier)를 통해서 경기 침체와 불황의 시기마다 구원 투수를 자임한 정부 재정의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언제나 정부와 시장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하는 케인스주의를 부활시켰고, 각국은 빚을 내서 경기를 뒷받침하는 재정 확대 정책에 매진했다. 현재의 장기 침체 국면에서 또다시 재정을 구원 투수로 내세워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마지막 7장에서는 행동경제학 대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나서 어떤 경제 정책이 좋은 정책인지 살펴본다. 오늘날 정책 입안자들은 요리책에서 레시피를 고르듯 정책들을 선택하지만 그 결과는 초라하다. 현실의 경제 주체들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경제 정책은 태생부터 허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소화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은 경제 이론들이 존재한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그동안 익숙했던 경제 정책의 틀을 깨고 새로운 경제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자고 말한다. 한국의 최고 엘리트 관료들이 세계 경제 석학들의 지혜와 이론을 빌려 우리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해법 도출의 유무를 떠나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2018-02-03 00:05:00

[반갑다 새책] 오빠 이상, 누이옥희

요절한 천재 시인, 소설가 이상을 문우나 예술가 친구가 아닌 가족의 시선으로 접근한 책이다. 기자이자 작가인 저자는 이상이 '나의 유일한 이해자'라고 지칭한 여동생 옥희 씨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으로 스토리를 풀어 간다. 작가는 2015년 우연한 계기로 이상의 여동생 옥희 씨의 둘째 아들이자 이상의 조카인 문유성 씨 부부를 만나면서 이상의 인간적인 체취를 좇는다. 특히 이상이 여동생 옥희에게 편지글 형식으로 쓴 산문 '동생 옥희 보아라-세상 오빠들도 보시오'와 옥희 씨가 1962년, 1964년 각각 '현대문학'과 '신동아'에 쓴 회고기 '오빠 이상'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다. 옥희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할머니(이상의 어머니)의 아들 사랑, 어머니의 애틋한 오빠생각을 풀어내는 것이다. 저자가 발굴해낸 손창섭 소설가의 흔적을 이상의 가족과 연결 짓기도 한다. 천재라는 베일을 걷어낸 인간 이상의 모습이 단락과 행간에 그대로 녹아있다. 한편으로 이상에겐 여성 편력이 심한 탕아, 제멋대로 산 광기 예술가, 천하 난봉꾼 등 비운의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옥희 씨는 오빠를 삐딱하게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을 향해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오빠는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던 사람이었다.' 348쪽, 1만8천500원.

2018-02-03 00:05:00

[반갑다 새책] 규슈 역사문화여행

유일상 건국대 명예교수가 일본 규슈의 구석구석 명소와 사연을 소개하는 규슈 역사문화여행 가이드북을 펴냈다. 이 책은 규슈를 깊게 이해하며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8개 장으로 나눠 규슈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여러 명소를 소개하며 규슈를 깊이 있게 즐기는 방법을 제시한다. 규슈의 7개 현을 모두 다루면서 그 현에서 가볼 만한 곳과 그곳에 깃든 역사적 사연, 그곳과 관련된 인물, 최신 여행 루트까지 소개한다. 이 책의 특징은 그렇게 여러 지역을 소개하면서 그곳에 담긴 사연과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관련된 인물들, 역사적 사건들을 많이 다루는 데 관련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규슈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백제의 유민들이 정착한 곳이나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한 장수들과 관련이 있는 곳,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흔적이 남은 곳은 규슈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431쪽, 2만원.

2018-02-03 00:05:00

[이종문의 한시 산책] 나이 들어도 쉽지 않은 게 혀 간수하는 것이라

혀[舌] 풍도 입은 재앙이 나오는 문이고 口是禍之門 (구시화지문) 혀는 제 몸을 베는 칼이라 舌是斬身刀 (설시참신도)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수한다면 閉口深藏舌 (폐구심장설) 어딜 가도 몸이 편안하리라 安身處處牢 (안신처처뢰) 옛날 중국에 하약돈(賀若敦)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장군으로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는데, 공에 비하여 상이 작다고 여기저기서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혀를 함부로 놀려댄 죄로, 황제로부터 자살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목숨을 끊기 전에 그는 아들 하약필(賀若弼: 544~607)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꼭 강남(江南)을 평정하고 싶었다. 그 꿈도 이제 다 글렀구나. 부디 네가 내 꿈을 대신 이루어다오. 그리고 아들아, 나는 혀를 함부로 놀리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게 되었다. 나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부디 혀를 잘 간수하여라." 말을 마친 그는 뾰족한 송곳으로 난데없이 아들의 혀를 콱 찔렀다.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 후로 하약필은 혀를 놀리고 싶을 때마다 송곳에 찔릴 때의 그 아찔한 아픔을 떠올렸다. 대장군으로서 강남을 평정하여 아버지의 꿈도 이루어드렸다. 그러나 지위가 높아지자 점점 더 기고만장해져서 함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혀를 마구 놀려대다가 황제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의 경고도 자유롭고 싶은 그의 혀를 끝내 말리지 못하여, 결국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토록 모질게 훈계했는데도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말았으니, 입안의 혀를 통제하는 것이 정말 어렵기는 어려운가 보다. 위의 시를 지은 馮道(882~954)는 바로 그 혀를 아주 잘 통제했던 사람이다. 그는 당나라 말기로부터 자고 일어나면 왕조가 뒤바뀌던 5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조에 걸쳐 무려 11명의 황제들을 모셨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왕조의 현실적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벼슬살이를 계속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위의 시에는 바로 그 오묘한 처세술의 비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입을 열어서 말을 해야 할 때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몸을 고이 보존하면서 높은 벼슬을 끝까지 유지한 비결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문학적 능력과 원만한 성품 같은 미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줄타기와 줄서기의 명수로 더욱더 널리 알려졌으며, 급기야 처세술에 능한 지조 없는 벼슬아치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군자는 말을 잘 한다고 해서 사람을 천거하지 않으며, 사람이 시원치 않다고 해서 그가 한 좋은 말까지 버리지는 않는다"(君子 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인생을 풍도같이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의 시에 담긴 메시지만큼은 송곳 같은 아픔으로 기억하고 싶다. 과거에 무심코 했던 말들이 낱낱이 다 부메랑이 되어 유턴을 하고, 어젯밤 술김에 한 말들이 아차, 하고 떠오를 때마다, 풍도의 시를 되새김질하게 되는 이유다. 벌써 환갑이 지났는데도 그 게 아직도 안 되느냐, 이 세상 천하 미련한 것아!

2018-02-03 00:05:00

북극의 마스코트 '북극곰'. 매일신문DB

한국 과학자들이 직접 본 북극 모습…『'아틱 노트'(알래스카에서 그린란드까지)』

'아틱 노트'(알래스카에서 그린란드까지)/ 이유경 외 24인 지음/ 지오북 펴냄 '아틱'(Arctic)은 남극을 제외한 북극만을 지칭하는 단어다. '북극' 하면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북극곰 또는 하얗게 펼쳐진 빙원 위를 어슬렁거리는 북극곰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때로는 아름다운 빛의 커튼 오로라, 이글루와 *이누이트 등 북극 원주민과 밤하늘의 우주쇼를 연상케 한다. 일반인들은 막연하게 아름다운 북극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북극 연구자들에게는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끊임없이 불어대는 폭풍(블리자드)으로 현장탐사는커녕 텐트 속에 갇혀 있거나, 슬러시처럼 변한 눈밭에 푹푹 빠지며 한없이 헤매야 하는 생존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이다. 이 춥고 위험한 북극해와 북극권의 그린란드, 스발바르제도, 시베리아의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에 이르는 연구현장을 이유경을 비롯한 25명의 과학자가 함께 이 책을 펴냈다. 25명의 공동저자는 한국인 과학자 최초로 북극점을 탐사하고, 북위 80도에 기후관측 타워를 설치하고, 빙하시추를 통해 토양 및 화석연구까지 했다. 북극 카라-바렌츠해(해빙의 변화가 가장 크게 나타난 지역)의 해빙에 대한 연구는 김성중'김백민 박사가 이 책 228쪽부터 풀어놓았다. 두 박사는 우리나라의 한파 뒤에는 카라-바렌츠해의 얼음 면적이 감소함에 따른 대기순환의 변화라고 보고 있다. 따뜻한 북극해와 북극의 대기가 시베리아 찬 공기의 유입을 더 쉽게 한다는 설명이다. 북극해의 한복판에 위치한 북극점에 간 남승일 박사는 북극해에 있는 영구 결빙지역의 해저 퇴적물 연구를 썼다. 북극해의 해저에 쌓여 있는 퇴적물은 북극해의 진화를 알려주는 단서가 들어 있다. 북극점 주변의 로모노소프 해령에서 시추한 퇴적물을 분석한 결과, 북극해는 에오세 때에 북극해 표층 수온이 약 20~25℃ 이상이었던 사실과 담수가 담긴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호수 중 하나였던 사실도 밝혀졌다. 미래 기후변화를 예측하는 빙하코어의 시추현장에는 국내 유일의 빙하시추 전문가 정지웅 기술원이 투입됐다. '드래곤 코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정지웅 기술원은 북극과 그린란드에서 빙하를 시추하며 생긴 에피소드, 그리고 흥미진진한 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다. 알래스카에는 툰드라 동토코어 전문가 남성진 기술원이 있다. 그는 6차례나 현장에 가서 40~50㎝의 표층을 지나 시멘트만큼 단단하게 굳은 동토층을 뚫는 기술을 연마했다. 북그린란드의 유명한 화석산지인 시리우스 파셋에서 동물생태 연구를 한 이원영 박사는 사향소와 북극 토끼, 여우, 꼬까도요, 흰갈매기의 행동을 연구했다. 이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50여 개체밖에 남지 않은 희귀한 그린란드 늑대를 3번이나 만난 행운도 소개했다. 2013년 우리나라는 북극 이사회의 정식 옵서버로 승격했다. 북극 이사회는 북극 개발과 보호를 위해 1996년 설립된 기구로 북극에 인접한 8개국(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아이슬란드'캐나다'미국'러시아)이 회원국이며, 이들은 북극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 이 책은 북극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시대에 해양'대기'기후'지질'토양'지구물리'해양생물'동물행동'탄소순환'원격탐사'위성해양'우주 등 북극으로 간 과학자들과 기술원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북극에 대한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지식을 더해줄 것이다. 304쪽, 2만원. ※용어설명 이누이트(Innuit)=그린란드'알래스카'시베리아 등 북극해 연안에 주로 사는 어로'수렵 인종. 캐나다에서 부르는 에스키모족의 공식 호칭이다. '에스키모'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캐나다 인디언이 '날고기를 먹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부르는 '이누이트'(인간)가 정확한 표현이다.

2018-02-03 00:05:00

하우메 우게트가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품식'. 두산백과

[내가 읽은 책]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박승찬/가톨릭출판사/2017)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박승찬/가톨릭출판사/2017) "왜 지금 '아우구스티누스'인가?"로 이 책은 시작한다. 저자는 다시 묻는다. "지금 행복하냐?"고. 중세 철학자인 저자는 철학과 교수인데 생각하는 힘을 키워 주는 강의로 유명한 분이다. 그의 '중세 철학사' 강의는 2012년 11월에 SBS와 대학교육협의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대학 100대 명강의'로 선정되었다. 이 책은 방송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각 강의가 끝날 때마다 질의응답을 넣고 인물, 사건에 대한 용어 설명을 따로 해놓아 이해하기가 쉽다.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이며 위대한 사상가인, 1600년 전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책을 남겼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고백론』인데 우리나라에서만 무려 40번이나 번역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학적인 이론만 연구했거나 특별하게만 살았다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많은 방황을 한 인간적이었던 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예욕, 출세욕, 성욕 등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회심하여 삶을 아주 깊게 성찰하고 신과 영혼에 대해 평생을 바친, 교부 철학자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다. 이 책은 스토리텔링 화법으로 되어 있어 편하게 읽힌다.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다양한 고민들, 나는 누구인지,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행복, 악, 절망, 불행, 죽음, 정의와 평화 등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함께 답을 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주위에서 흔히 접하는, 쉬운 비유를 들며 아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친절하고 감사한 책이다. 현대 신학자 헨리 채드윅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최초의 현대인'이라고 표현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인간의 감정, 교육, 행복의 추구 등을 1600년 전에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내면에서 진리와 지혜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고,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혜를 가지지 못해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좋아했던 로마 철학자 중 한 명인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사는 방법은 일생을 통해서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겠지만, 아마도 사는 것 이상으로 평생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죽는 일이다. 우리가 타고난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짧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인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도 알맞게 잘 쓰는 사람에게 그 폭이 두드러지게 넓어지는 법이다."(262쪽) 평생을 통해 고민하고 통찰하여 얻은 답변에서 1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얻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행복의 열차를 타는 티켓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2018-01-27 00:05:00

리투아니아 네무나스 강에서.

"내 사랑 내 곁에 있어줘" 치매 걸린 아내와 마지막 여행

2008년 늦여름 리투아니아 네무나스 강가. 백발의 노부부가 마주 보고 있다. 남편이 깍지 낀 손으로 아내를 안고 있고, 두 손을 모은 아내는 환한 미소로 남편을 바라본다. 웃는 아내를 내려다보는 남편의 눈길은 그윽하면서도 뜨겁다. 금방이라도 입맞춤을 할 것 같이 촉촉하다. 강물도, 잎사귀도 그들의 포옹을 기다리고 있다. ◆나들이를 준비하다 평화로운 모습을 렌즈에 담은 이는 독일 사진작가 지뷜레 펜트다. '게르트너 부부의 여행'은 독일 남부 뮐바흐에 살던 게르트너 부부의 평소 모습과 발트해 연안국을 여행한 1년 남짓한 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한 앨범이다. 독일에서 2012년 출간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평소 캐러밴을 타고 여행 다니기를 좋아한 게르트너 부부는 2008년 발트해 주변 나라를 여행하기로 했다. 부부는 이전에도 수차례 유럽 여러 곳을 다녔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두 가지. 사진작가와 함께 떠난다는 것과 부인 엘케 게르트너의 치매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지뷜레 펜트는 그해 초 게르트너 부부를 알게 됐다. 2년 전에 첫 증상을 보였던 엘케의 병은 빨리 진행되고 있었고, 그가 부부를 만났을 때 이미 엘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메모로 간단한 의사를 표시할 때였다. 대부분 '해줘' '하고 싶어'로 끝나는 메모였다. 작가는 그해 3월부터 부부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들 삶의 일부가 됐다. 남편 로타어 게르트너는 많은 시간을 아내에게 할애했다. 매주 연극 모임에도 나가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전문 재택 요양보호 서비스는 받지 않았다. 여가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아내를 돌보는 무거운 짐을 지더라도. 아내 엘케는 점점 어린아이가 됐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사소한 것에 즐거워하며, 무엇을 하려다가도 잊어버리곤 했다. 색칠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서툴러졌다.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그의 손에는 화상 자국이 있고, 파리가 앉아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정강이에 난 상처도 이전, 그리고 앞으로 닥칠 위험을 암시하고 있다. 다가오는 불행을 뿌리치려는 로타어의 노력에도 그림자는 계속 드리운다.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 여행은 늦여름에 시작됐다.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러시아-에스토니아를 도는 여정이었다. 용감했지만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부부와 작가는 그해 겨울까지 늘 함께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아내 엘케의 표정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듯한 남편 로타어의 눈빛은 가감 없이 지뷜레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정처 없이 거니는 엘케의 뒤에는 항상 로타어가, 지뷜레가 있었다. 이동식 주택과 야간열차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의 안식처가 됐다. 로타어는 야영장 한쪽에 차를 주차하고 햇살이 비치는 곳에 엘케를 앉혀놓고선 토마토를 갖다준다. 집에서와 같이 빨래를 널고, 캐러밴을 끌고 가 짐을 정리한다. 엘케의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수시로 피곤한 엘케의 옷을 갈아입히고 잠자리에 누이는 것도 당연히 로타어의 몫이다. 남자는 아내가 없는 곳에서 얼굴을 감싼다.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다. 엘케는 자작나무 숲을 걷기도 하고, 강가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종종 초점을 잃는다. 내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지만 친절한 이 남자가 때로는 낯설다. 이들의 조금은 무력하고, 희미한 미소는 수천 마디 글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은 종종 충격적인 장면을 묘사해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책은 환자의 고통과 눈물겨운 보살핌에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은 남녀가 병마에 맞서 싸우는 동안 피어나는 사랑에 주목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뜨겁고, 평화로워 보이는 하루하루가 투쟁이었을 그들을 보는 내내 마음속에 물결이 인다. 잔잔한 일상과 생애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담은 이 사진집은 그들의 마지막 여행 기록이 됐다. 여행이 끝나고 두 달 뒤 엘케는 세상을 떠났다. 뒤로 넘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발트해의 풍경은 다시는 함께 볼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더이상 말을 할 줄 모르게 된 엘케는 수첩에 짤막한 문장을 남겼다. 아마도 로타어에게 하는 말이었을 메모.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아프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신체의 어떤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아프다고 말한다. 책은 노부부의 사랑으로 두려움을 보여주고 다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억이 사라지고 장소와 거리가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물건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동안 의식은 공포로 채워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게 마련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대부분 듣지 못한 채 헤어진다. 모든 것이 어렴풋해지는 순간,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준다면 행복할 것 같다. 120쪽, 1만7천800원.

2018-01-27 00:05:00

[책 CHECK] 별, 빛의 과학

별, 빛의 과학 지웅배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과학 지식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교양이 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올바른 과학 지식이 공유되어야만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과학이 고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인문학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천문학의 핵심 키워드들―관측, 망원경, 빛, 우주 탐사 등―을 통해 천문학에 대한 대중의 지식과 이해를 넓히는 과학 교양서이다. 특히 천문학에서 '관측'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관측 기기의 발달과 함께 새롭게 발견된 우주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우주에 대한 인류의 지식이 성장해온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빛의 성질에 대한 논쟁―빛 입자설과 파동설의 대립―과 빅뱅 우주론의 등장, 중력파의 발견, 우주 탐사를 통한 외계 행성 찾기까지 천문학 역사를 짧지만 굵게 훑어볼 수 있는 주제들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또한 젊은 천문학도로서 인공지능의 발달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천문학자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312쪽, 1만6천원.

2018-01-27 00:05:00

[책 CHECK] 청소년을 위한 의학 에세이

청소년을 위한 의학 에세이 서민 지음/ 해냄출판사 펴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의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과학자 24인의 삶과 업적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350번이나 같은 실험을 반복한 끝에 효과적인 살충제를 만드는 데 성공한 파울 뮐러, 새로 발견한 기생충의 증상을 알기 위해 기생충을 직접 먹어 본 엄기선 등 과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위대한 발견 뒤에 숨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1장 질병의 정체를 밝히다'에서는 말라리아, 스페인독감, 광우병 등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질병의 원인을 밝혀낸 과학자들의 성취를 소개한다. '2장 치료법을 찾아내다'에서는 결핵, 소아마비, 신부전 등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린 발견을, '3장 병의 전파 경로를 파악하다'에서는 질병의 전염 과정을 추적해 감염 차단에 공을 세운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4장 의료'연구 기술을 발견하다'에서는 시험관 아기, MRI 등의 의료 기술과 고분자 질량 분석, 자가포식 등의 연구 기술 개발을, 마지막으로 '5장 새로운 의학 영역을 개척하다'에서는 혈액형, 신생아학 등 틀을 깬 생각으로 의학의 영역을 넓힌 성취를 소개한다. 결핵 치료의 열쇠를 찾아낸 셀먼 왁스먼, 말라리아 벡터를 밝혀낸 로널드 로스 등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각 장 끝에 실었다. 264쪽, 1만3천800원.

2018-01-27 00:05:00

수원 화성에서 재연 중인 '장용영 수위의식' 모습. 매일신문 DB

'강한 조선' 개혁군주 정조가 추구한 국방개혁…『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조선의 국왕 중 상당수가 군신(君臣) 갈등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 원인을 '정치적 타살'로 보고 있다. 왕(王) 하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존재인 것 같지만 사실 조선의 27대 왕 중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군주는 태종, 세종, 세조, 영'정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후기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 정조, 사실 그가 숱한 쿠데타, 정변, 시해 음모 속에서 살아온 고독한 군주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조가 즉위 후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은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한 일이었다. 이 책은 정조가 왜 즉위 직후 자신의 경호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고 실전 훈련서인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다. 작게는 자신의 등극을 도왔던 홍국영의 외풍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것이었고, 크게는 병권 장악을 통한 왕권 강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배타적 통치체제 구축을 통한 진정한 군주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정조의 '화성행차'에 숨은 정치적 의도=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서 정조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런 현상은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정조의 위민사상과 개혁정치, 그리고 그가 추진했던 자주적 국방개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7년 10월 '무예도보통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록 북한 단독 신청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무예와 군사기록물에 대한 책 내용이 세계적으로 독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왜 '장용영'이라는 친위 군대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을까? 저자는 이 일련의 과정을 군사적 시위, 정치적 과시를 통한 자신의 권력 강화를 도모한 선전(propaganda) 행위로 보고 있다. 저자는 정조가 1795년 행한 '8일간의 화성행차'를 주목한다. 이 행차는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선양하기 위한 의례행위였지만 사실은 의전 속에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연출해 자신이 구상해온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장용영 외영(外營) 군사들의 일사불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무기를 공개함으로써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가 강력한 군사도시임을 입증했다. 화성 내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함께 민관 합동훈련을 통해 민보(民堡), 즉 백성이 국방의 보루가 되는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문무 겸비한 개혁군주로서 평가=많은 역사학자들이 정조를 '학자군주'(學子君主)라고 부른다. 조선의 왕들 중 세종과 함께 '교수나 박사급' 학식과 정견을 갖춘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정조의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인'(武人)으로서의 정조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통해 국가의 국정 이념을 정립하였고, 각종 연구와 출판사업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며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무(武)에 대한 문(文)의 차별을 경계하며 외세 침입 시 조정 총화를 위해 문무(文武) 조화를 강조했다. 이런 구상에 대한 실천적 대안이 바로 규장각과 장용영이었던 것이다. 즉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무를 병행 발전시켜 나갔고 명분과 실리를 아우르며 조선 후기의 집권 안정화를 도모해 나갔던 것이다. ◆좌절된 개혁 정책, 조선 미래도 굴절=정조는 통치기간 중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매일 치열하게 살았다. 당파를 경계하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침략당해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죽음 원인에 대해서는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조가 쓰러지면서 조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권력이 바뀌면서 권력의 주체들이 정조의 개혁을 지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대비가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 장용영의 혁파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장용영에 쏟아부어지는 군비 재원을 핑계로 들었지만 정순대비를 비롯한 벽파에서는 정조와 연관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없애야 했던 것이다. 장용영 혁파는 철저한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제되었고, 친위부대 창설을 통해 정조가 이루고자 했던 조선후기 군제혁파와 민생안정 등 개혁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정조의 개혁사상, 오늘날 화두로=많은 역사가들이 정조가 그렇게 급서(急逝)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1786년 박제가가 올린 상소 내용대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開化)로 나갔다면 동북아의 맹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만든 장용영을 바탕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피했을 것이다. 비록 민주주의 시대가 아닌 왕조사회였지만 정조의 개혁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승해야 할 정신이고, 그의 인간존중과 소통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선대왕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조실록'에 사관이 썼다는 글이다. 국민들에게 이런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이제는 군주 시대가 아니니 거꾸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고 기뻐할 '민주 지도자'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368쪽, 1만8천원.

2018-01-27 00:05:00

[반갑다 새책] 침대에서 읽는 과학

벼락이 칠 때 전기를 저장해 사용할 수는 없을까? 백두산은 정말 폭발할까? 왜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까? 등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나 혹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과학 원리를 이용해 설명한다. 이 책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일상의 이면에 숨어 있는 과학 관련 이야기 중에서 중요하고 흥미로우며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것을 각종 연구 결과를 근거로 설명한 책이다. 지구의 비밀을 벗겨주는 과학, 사람에 관한 과학, 일상을 움직이는 과학, 과학으로 엿보는 미래 등 총 4개 주제에 26개 에피소드를 담아 과학적 상식과 호기심을 채워준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논란 중인 문제에 객관적인 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이 일상에 얽힌 모든 과학적 지식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지면에는 한계가 있고 설명하기 어렵거나 명쾌하지 않은 것도 있어 주제 선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은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부터 국제사회 갈등까지 과학과 관련 없는 것은 없다"면서 "과학은 우리 시대의 필수 교양"이라고 강조했다. 296쪽, 1만4천원.

2018-01-27 00:05:00

[반갑다 새책] 브론테 자매 유품으로 문학 재조명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애그니스 그레이'를 쓴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들의 복합적이고 매혹적인 삶과 문학을 분석한 책이다. 빅토리아 시대 문학 연구가 데버러 러츠가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브론테가 관련 자료와 유품들을 연구하여 쓴 이 책은 아홉 개의 유품을 통해 자매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고 있다. 세 자매가 목사 아버지를 따라 영국 요크셔의 한 저택에서 오랫동안 함께 자란 자매라는 점도 눈길을 끌지만, 동시에 한결같이 여성의 독립적 삶을 다루며 19세기 유럽의 가부장적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움을 주고 있다. 브론테가의 딸들이 살았던 시기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절정으로 치닫던 '빅토리아 시대'(1837∼1901)였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당과 보수당의 의회정치가 대립했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이 맹아를 틔웠던 시대였다. 저자는 히스(heath)가 무성한 황야의 세찬 바람 속을 고독하게 산책하며 작품의 영감을 키워낸 브론테가 세 여성의 물질적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사물의 세계에 시대를 초월하는 문화적 가치가 깃들어 있음을 탁월하게 증명하고 있다. 408쪽, 2만4천원.

2018-01-27 00:05:00

인간관계는 유토피아적 윤리의 실천 가능성을 지향하지만 현실은 싸움과 갈등의 연속이다. 지난해 말 스페인 알리칸테의 이비 마을에서 열린 밀가루 싸움 축제 '엘센파리나츠'(Els Enfarinats)의 모습.

유토피아적 윤리 실현 가능성 찾기…『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윤리학 연구)/ 테리 이글턴 지음'김준환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이 책의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이뤄나가는 데, 적합한 윤리는 존재하는가'라는 화두로 출발한다.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라는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인생 살면서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사람과 돈'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일단 돈 문제는 각자의 복으로 미루고, 사람과의 문제에 천착해보자. 이 책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때, 타인으로 인한 갈등을 풀어나가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것이다. 저자는 영국 마르크스주의 문학, 문화비평가로 잘 알려진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타자'(他者)의 문제를 서구의 18세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메타-이론적 차원에서 규명했다. 특유의 냉정과 위트를 구사하면서 글쓰기를 해온 그는 이 책을 통해서도 윤리학을 중심으로 신학, 미학, 정치학, 정신분석학, 문학, 사회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적합한 윤리를 제시하는 실천적 차원을 제공한다. 이글턴은 '자기'와 '타자'란 어떤 존재이며,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가에 관한 세 단계 유형을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낯선 사람들을 배제한 채 가까이 있는 이웃들 사이의 자연발생적인 공감과 정감을 중심으로 도덕감각에 기초한 18세기 영국의 '상상계적 윤리', 둘째, 제한적인 공감과 정감을 벗어나 의무와 책무를 중심으로 가까이 있는 이웃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 도덕법에 기초한 유럽(특히 독일)의 '상징계적 윤리', 셋째,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 두 유형의 윤리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실재계의 윤리'. 저자는 자크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유형을 자신의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으로 재해석해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 따라 변화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은 사실상 저변에 넌지시 배경만 보여줄 뿐,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실재계의 윤리는 이마누엘 칸트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식 윤리의 공과를 비판적으로 가늠하고 있다. 이 책은 사회주의 및 유대 기독교 전통의 윤리를 시금석으로 삼아 기존 윤리담론의 향방을 가늠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는 현 단계의 사회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프랜시스 허치슨, 데이비드 흄, 에드먼트 버크, 애덤 스미스,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이마누엘 칸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에마뉘엘 레비나스,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등 수많은 사상가들의 철학이나 주장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더불어 신약'구약성서를 비롯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와 '베니스의 상인' 등 서구의 문학작품도 분석 대상에 등장한다. 이클턴은 윤리학에 관한 다층적인 분석과 설명을 통해 18세기 이래 자본주의의 진행 과정에서 생산된, 구체성과 공감에 기초한 상상계적 윤리, 추상성과 보편법에 기초한 상징계적 윤리,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실재계의 윤리를 변증법적으로 끌어안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구체성과 추상성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육체(희생양으로서의 육체)를 반석으로 삼는 윤리, 범속한 일상 속에서 참된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제도에 기초한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적인 윤리의 실현 가능성'을 모색 내지 탐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50쪽, 3만5천원.

2018-01-27 00:05:00

이광수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번역과 오역의 차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즉 'Uncle Tom's Cabin'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13년이다. 흑인 인권문제를 다룬 원작 의도가 무색하도록 조선어 번역판 제목은 '검둥의 설움'이었다. 번역자는 이광수이고 저본(底本)으로 삼은 것은 'Uncle Tom's Cabin'의 일본어판이다. 영어 해독 능력이 부족해서 이광수가 일본어판을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영어 수업 중심의 일본 메이지학원에 유학해서 영어를 공부했고, 여기서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영시까지 창작한 이광수였다. 원작을 두고 일본어판을 번역한 것은 이광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소개된 대부분의 서양문학은 일본어판을 조선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번역자 상당수는 이광수처럼 일본 유학을 통해 영어나 러시아어 혹은 불어 원서 해독 능력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원서 대신 일본어판을 조선어로 번역한 것일까. 외국어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순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그 나라의 문화가 함께 묻어오기 때문이었다. 쉽게 설명해보자. 1800년대 말, 우연히 영어를 익힌 조선의 누군가가 근대 영미소설을 원어로 읽다가 'ego'나 'individual' 같은 단어를 발견했다고 하자. 과연 그가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었을까?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그 사람의 삶에서 '나'는 언제나 '아버지'나 '임금'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 사람이 독립개체인 '나'를 의미하는 'ego'나 'individual'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번역이란 이처럼 외국어와 자국어 간의 거리를 이해하고, 낯선 개념의 외국어를 자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작업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힘을 쏟아부은 것이 바로 이 작업이었다. 'ego'나 'individual' 같은 단어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 속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일본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이 단어에 대응하는 일본어로 '自我'(자아)와 '個人'(개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었다. 일본은 그런 고민 속에서 서구의 근대적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해갔다. 이광수가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가지고도 영어판 'Uncle Tom's Cabin' 대신 일본어판을 번역한 것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서구문화 번역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한강의 2016년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오역(誤譯) 논쟁이 재개되고 있다.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는 원문을 훼손할 정도로 심각한 오역 문제에 대해 '직역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번역은 창조적이다'고 맞서고 있다. 물론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은 언어의 변환을 넘어 문화의 변환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보라 스미스는 근대초기 일본이 서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번역에 퍼부었던 노력이라든가, 원작 대신 일본어판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이광수와 같은 식민지 조선 엘리트들의 비애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데보라 스미스가 이 점에 대한 이해력을 지니고 있다면 식지 않는 오역 논란에 대해서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다.

2018-01-27 00:05:00

신호철 작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내가 읽은 책] 높고 푸른 사다리(공지영/한겨례출판)

작가는 10여 년 전, 송봉모 신부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책에서 100자도 안 되는 문장이 작가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 책에 나오는 마리너스 수사와 성 베네딕도회 왜관 남자수도원의 신비로운 만남에 대한 글이었다. 한국전쟁 중 1950년 12월 20일 흥남철수 때, 1만4천 명의 한국인을 구조한 빅토리아러디스호의 선장 마리너스의 소설보다 더한 실제 이야기를, 허구의 한 청년 수도자와 엮어서 능숙한 솜씨로 서사를 창조한다. 장편소설인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부 서품을 앞둔 베네딕도회 수사의 사랑과 이별, 죽음과 상실의 순례이자 성장 소설이다. 소설은 정요한 신부가 한때, 신보다 사랑했던 소희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아빠로부터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대체, 왜?'라는 짧고 높은 외침으로 독자의 심장을 파고든다. '대체, 왜?'라는 질문은 삶과 죽음, 운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과 불의, 정의와 제도에 대해서라는 것, 인간의 영역에서 신과 씨름해야 한다는 걸 세상에 외친다. 신의 멱살을 붙들고 "지금 여기서! 잘 살도록 축복을 내려달라"고 한 야곱처럼 반항했고 싸웠다. 야곱은 세속의 일에 매달렸으므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훌쩍 올랐다. 어처구니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갓난아이 앞에서만이 아니라, 불의한 권력자 앞에서(pp308-309), 정의로운 사람들이 함부로 짓밟히는 현장 앞에서, '대체, 왜?'라고 신에게 끈질기게 질문하기를 독려하고 있다. 진정한 세속이야말로 진정한 천상일지도 모르니까. 작가는 섬세한 통찰력과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독자의 감정이입을 사냥한다. 공지영의 소설은 사랑이라는 달콤한 성분으로 당의정을 입힌다. 독자가 단맛을 느낄 즈음, 이내 몸 전체에 퍼지는 약리 작용, 바로 한 사발의 보약 세례이다. 작가는 사회문제라는 단단한 공감대 위에 사유의 구조물을 세운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당당히 맞서는 문자의 시위이다.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민감하고 부드러운 촉수로 독자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낸 작품들을 발표해 온 작가이다.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한 번 읽고 덮어두는 소설이 아니다. 크리스천만을 위한 책은 더욱 아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ㅡCRAS TIBI). 인간이 어떤 시련과 맞닥뜨렸을 때 '여기에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시련을 품위 있게 넘길 수 있다. 품위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려움을 잘 견디는 사람이다. 마리너스 수사의 말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 미리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을요.(p355) 서로 돕는 배는 난관을 이겨냅니다. 우리 모두는 약하고 모자라니까요."(pp345-346)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또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2018-01-20 00:05:00

[책 CHECK] 브래지어를 풀다

브래지어를 풀다 김아인 지음 / 학이사 펴냄 김아인 수필가의 첫 번째 수필집이다. 이 책은 1부 '꼿꼿하고 검푸른', 2부 '침묵의 시간을', 3부 '복원하듯 그렇게', 4부 '소리 없이 일어서는' 등 4부로 구성돼 있으며 총 52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의 수필가적 장점은 사연이 많다는 것과 그것과 정면 승부를 걸듯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자신의 치부를 숨기려하거나 수박 겉핥기 방식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고부갈등이란 뻔한 스토리와 노름꾼 아버지에 대한 회상은 식상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성적인 문체의 특색 덕분에 진부할 수 있는 글감까지도 이야기성의 흥미로움으로 이끌고 간다. 때로는 묵직하고 또 때로는 발랄한 감각적 사유가 오래된 기억마저 날 것의 언어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재생시킨다. 경남 사천 출신인 저자는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와 계명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수료했다. 2011 평사리문학 대상, 2015 해가림여성문예 큰상을 받았으며, 2017 대구문화재단 개인예술가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됐다. 232쪽, 1만4천원.

2018-01-20 00:05:00

[책 CHECK] 우리 속에 울이 있다

우리 속에 울이 있다 박방희 지음/ 김미화 그림/ 푸른책들 펴냄 이 책은 정해진 구조에 맞춰 단어를 음악적으로 변주하는 시조만의 매력과, 이를 적절히 해체하고 다듬어 동심까지 곁들여진 동시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동시조집이다. 시조의 율격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거기에 매이는 법 없이 바람이 당기는 얼레의 연실처럼 술술 풀려나간다. 시상이 자연스레 전개되고 이미지가 선명하게 펼쳐지며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이야기가 한 장의 인상적인 그림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자연의 서정을 노래할 때는 먼 곳의 동떨어진 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그 서정이 출렁이게 한다. 또 일상을 노래할 때도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 한창 누리고 있거나 이제 곧 맞닥뜨릴 삶의 실제적인 현장을 생생하게 제시한다. 저자는 1985년 무크지 '일꾼의 땅'과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제5회 푸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새벗문학상'불교아동문학작가상'방정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동시집 '참새의 한자 공부', '머릿속에 사는 생쥐', '바다를 끌고 온 정어리', 시집 '불빛 하나', '세상은 잘도 간다' 등이 있다. 96쪽, 1만1천500원.

2018-01-20 00:05:00

조선 후기의 상차림. 당시는 소반에 혼자 앉아서 식사하는 것을 예법으로 여겼다.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외국인에겐 낯선 한국인의 식사법

연간 외국인 입국자 1천700만 명 시대를 맞아 한국의 문화생활 전반은 물론 음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최근 K-팝 열풍이 K-푸드로 이어지며 외국인 중에는 한국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는 사람이 늘고 있다. 구글 같은 검색 엔진에 'Korean food & recipes'를 넣어 검색하면 한국 요리법이 넘쳐난다. 또 외국 인터넷에는 '한식당에서 현지인처럼 식사하는 방법'이라는 웹사이트도 등장했다. 이 책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인의 식사, 문화 방식을 살피고 있다. 한국의 낯선 음식 문화에 대한 기원과 궁금증을 '인류 식사 방식'이라는 배경하에 하나씩 풀어냈다. ◆한국인 식사 과정 13가지 주제로 분류=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 놓고, 불편한 책상다리 자세로 앉아서 다 같이 찌개를 떠먹으며 '술잔은 돌려야 제 맛'이라는 한국인.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낯설고 이상하게만 보이는 한국인의 식사 방식이다. 저자는 한국인의 몸에 밴 식사 방식과 습관에 대한 의문들을 사례를 들어 정리했다. 음식인문학자이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다양한 사료를 섭렵하고 재구성해 식당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앉는 순간부터 식사를 하고 디저트 커피를 들고 나오기까지 전 과정을 13가지 단계로 나눠 풀어냈다. 식사 방식에 대한 역사는 물론 식습관과 상차림, 글로벌화된 한국인의 맛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음식문화를 쉽고도 재미있게 소개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주변의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유럽인들의 식사 문화를 우리의 식사 방식과 비교하며 비교문화사적 연구 방법을 통해 오늘날 한국인의 식사 방식이 어떤 역사, 문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살핀다. ◆한국의 식사 기원'변화 과정 추적=우리의 고문헌들이 대부분 왕실이나 관변 사료에 집중돼 있어 한국 식사 문화의 기원을 다룬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실기, 문집 등에서 작은 단서들을 찾아내고, 중국과 일본, 유럽 여러 나라의 사료를 비교했으며, 근현대 신문과 잡지에 실린 사회경제적 변화와 일상의 면면을 체크했다. 여기에 상차림이나 좌석 배치, 식기와 식탁 등을 보여주는 그림, 사진까지 활용해 한국인의 식사 방식에 대한 퍼즐을 맞춰 나갔다. 이젠 정식 코스가 돼버린 '식사 후 커피 한잔'에는 우리의 애잔한 한국사가 녹아 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커피는 6'25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당시 커피의 확산을 주도한 것은 다방에서 팔던 '믹스 커피'였다. 이 인스턴트 커피에는 깊은맛이나 향, 멋이 없었지만 맛있고 간편하다는 점에서 빠르게 우리의 입맛을 리드해 나갔다. 한국인의 전통 '좌식(坐式)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은 이어진다. 저자는 유럽, 중국과 달리 조선에 식사 공간인 다이닝룸이 없었던 이유를 '꺾음집' 형태와 온돌에서 찾고 있다. 각 방과 마루가 연결되어 있고, 신발을 벗고 실내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정된 식탁과 의자 없이도 방 안에서 밥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식사 방식'습관에 녹아든 문화 코드=우리만의 독특한 식사 문화도 저자의 주된 관심 분야였다. 우리 술자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술잔 돌리기, 여기엔 어떤 문화 코드가 숨어 있을까. 본래 술잔 돌리기는 고대 중국 주법(酒法)에서 시작된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제사와 풍속 교화를 통해 지속되었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정착된 술잔 돌리기는 '공동체의 연대감'과 '집단주의' 의식이 깊이 깔려 있지만, 본래 의미는 왕과 신하, 웃어른과 아랫사람이, 주인과 손님 간에 공경과 답례의 의미를 담은 주도(酒道)였다. 저자는 한국인의 식사 방식을 크게 변화시킨 원인으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를 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식기를 든다. 조선 후기까지 민간에서는 주로 막사기가 유통됐지만 식민지를 거치면서 한반도 도자기 산업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고, 막사기는 저렴한 질그릇과 오지그릇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 우리 전통자기도 자취를 감추고 만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잠시 양은그릇이 퍼졌고, 1960년대 이후엔 멜라민 수지 그릇과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이 유행했다. ◆현대적 의미에서 본 한국인의 식사 방식=21세기 초입 한국에서 '혼밥' '혼술'이 유행하면서 '함께 식사' 규칙들이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대도시 중심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가족과의 식사는 물론이고 손님 초대까지도 외식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식사의 개별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횟수를 늘리자'는 '국민공통식생활지침'이 정부 차원에서 마련되기도 했다. 이제는 인사말이 되어버린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라는 말은 한국인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함께 식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말의 '식구'(食口)도 '한솥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저자는 책 후반부에 독자들에게 부탁한다.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친구가 있다면 그들을 자신 있게 식사에 초대해 보라고. '언제 한번'이라고 하지 말고 '다음 주말'같이 진정성을 가지고 말이다. 집밥, 외식을 떠나 한식(韓食)을 나누며 한국의 식사 방식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훨씬 더 식탁이 풍성해질 것이다. 426쪽, 2만2천원.

2018-01-20 00:05:00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유엔군 위문차 대구 동촌비행장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의 모습.

한국전쟁의 이면, 그리고 화해법…『마릴린 먼로와 두 남자』

'마릴린과 두 남자'/ 전경일 지음/ 다빈치북스 펴냄 미국 배우 마릴린 먼로가 1954년 2월 대구 동촌비행장을 방문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이하 먼로)는 미국 프로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식을 올리고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첫날밤도 보내지 못하고 한국으로 가야 했다.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 위문 공연 때문이었다. 대구를 방문했을 때는 배우 백성희와 최은희가 마중을 나갔으며, 동촌비행장은 환영 인파로 난리가 났다. 먼로는 4일 동안 대구에 머물면서 총 10차례의 대대적인 공연을 펼쳤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고 춤추는 먼로의 모습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됐다. 먼로 역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먼로는 생전 인터뷰에서 "내 생애에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는 한국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강원도 인제군이 소양강 가에 마릴린 먼로 동상을 세운 것도 당시 군부대를 방문한 먼로를 기리기 위함이다. 먼로와 대구의 흥미로운 인연은 여기까지만 소개한다. 먼로의 이름만으로도 섹시한 제목의 이 책은 전경일 작가가 5년 동안 쓴 원고지 7천 매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 당시 신인배우 마릴린 먼로를 세계적 대스타로 만들기 위해 종군기자 칼 마이어스가 기획한 기상천외한 발상에서 시작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 세계 젊은이들 머리 위로 그녀의 누드사진을 살포한다. 당시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한 마케팅이었지만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칼은 처음의 치기 어린 생각과 달리 한국의 전쟁터에 가서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로 인해 그는 '라이프' 지의 종군기자 하워드와 전쟁을 보는 인식 차이로 극심한 갈등을 빚게 되고, 1급 군사 작전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군 정보 당국에 끌려가는 위기에 빠진다. 이 위기를 피하고자 칼은 진눈깨비가 퍼붓는 야밤에 도주함으로써 결국 군당국 기록에는 공식적으론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다. 그로부터 50년 후, 미국 뉴저지 옥수수 농장에서 생활하는 90세 노인 하워드에게 칼의 유해사진이 날아온다. 칼과 대립관계를 유지하던 주인공 하워드는 한국전쟁을 회고하게 되고, 급기야 유골 인수식에 참석하고자 한국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그때, 은밀히 접근한 AP 기자가 믿기 힘든 정보를 흘렸다. 칼이 중국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식. 결국 하워드는 북경으로 날아가게 되고, 마침내 칼과 50년 만에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칼 마이어스와 하워드의 전쟁을 회고하는 스펙터클한 대화가 이 책의 주된 메시지다. 마릴린 먼로를 등장시킨 것은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 전쟁 속 인간, 이념적 갈등하의 인간, 인간 본연의 욕구인 사랑과 애증, 원망과 희구를 드러내는 인간 보편적 이야기를 역사의 포연 속에 담기 위함이다. 두 종군기자의 눈으로 진실을 파헤치다 보니, 그간 반공 이데올로기 하에서만 본 한국전쟁의 진실도 낱낱이 드러난다. 결국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진실,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남북관계에도 훈풍을 바라는 마음과 닿아있다. 그는 정전 65주년 기념 벽두에 이 책을 내놓으며, "어쩌다 동족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된 우리는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요"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 책은 종군기자들이 느낀 진실을 향한 고뇌를 잘 엿보여주며, 그로 인해 극대화되는 갈등 국면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종군기자 간의 대화 중에 흥미로운 대사가 있다. "내게는 두 개 눈이 있소. 현상을 보는 눈과 진실을 보는 눈 말이오. 카메라의 눈과 육안 중 어느 것으로 볼 때, 진실을 더 잘 볼 수 있을까요? 카메라는 무엇을 담아내야 하죠?" 전경일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우리 한반도에 다시는 전화(戰火)가 있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피로 물든 대지는 누구에게도 복되지 않다는 강력한 평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1권 491쪽, 2권 498쪽, 3권 494쪽. 각권 1만5천원.

2018-01-20 0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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