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시와 함께] 현미 /김만수(1955~ ) 作

 

 

현미 /김만수(1955~ )작

 

눈을 따지 않은 알갱이로

그대 좁은 뒤주에 들어

천년을 눈 뜨고 엎드렸다가

몇 홉 씨앗들과 함께

아직 푸른 눈의 설렘으로

너의 몸에 싹틔우고 싶다

먼 기다림

그 어두운 계단 다 내려갔다가

볕 밝은 날

그대 아픈 영혼에 스며

한 촉 파란 불꽃

피워 올리고 싶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인가. 구절초 핀 산길도 좋고 코스모스 핀 둑길도 좋지만 황금 물결 벼 이삭 일렁이는 들길을 걷노라면 이 풍요로움, 이 넉넉함이 더없이 좋다. 수확하는 기쁨을 돈으로 따지는 건 나쁜 것이다. 자루 가득 나락이 쏟아지는 기쁨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겠는가.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한 나락을 만지는 기분도 그러하지만 도정한 쌀의 매끌매끌하고 간질간질한 몸을 만지는 느낌은 또 어떠한가. 농부들이 느끼는 그 감촉과 소회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치 감동적일 터.

쌀은 제 몸의 5분의 1이 눈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상식선에선 그 어떤 생명체의 눈보다도 크다. 그렇다. 상징으로서 쌀의 눈의 크기! 이 나라 사람들의 주식인 쌀의 눈의 크기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본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우리는 분명 밝고 크고 환한 눈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갓 도정한 햅쌀의 눈을 보면 파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푸른 눈의 설렘으로/ 너의 몸에 싹 틔우고 싶다' '한 촉 파란 불꽃/ 피워 올리고 싶다'는 시인의 기원은 백번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문제는 과연 '그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인데…. 나라여도 좋고, 겨레여도 좋고, 아픔 많은 이 나라 역사여도 좋고, 아니다, 그냥 평범한 우리네 연인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토록 건강한 기원이 깃들어 있다는 것.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다. 이번 주말엔 어디 호젓한 들길을 걸으며 황금 물결의 풍요로움을 느껴보자. 돌아오는 길엔 시골 정미소에 들러 햅쌀 한 포대를 사서 하얀 이밥을 해 먹어보자. 제 몸의 5분의 1이 눈이라는 쌀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보자. 나도 '볕 밝은 날/ 그대 아픈 영혼에 스며' 따뜻한 이승의 밥 한 그릇 나누고 싶다.

시인 유홍준: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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