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명에 숨어야 했던 성폭력 생존자가 다시 이름을 되찾기까지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기록
디어 마이 네임/ 샤넬 밀러 지음/ 성원 옮김/ 동녘 펴냄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피해자 샤넬 밀러.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피해자 샤넬 밀러.
책 '디어 마이 네임' 책 '디어 마이 네임'

홀린 듯 집어들었지만 어쩐지 책장이 무겁게 넘어가는 책이 있다. '에밀리 도'라는 가명의 얄팍한 보호막을 쓴 채 성폭행과 그것이 야기한 부수적 유무형의 아픔과 맞서야 했던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기록, '디어 마이 네임'이 그렇다. 오랜 고통의 시간을 홀로 통과하며 어렵사리 자신의 이름(정체성)을 되찾은 성폭력 생존자, 그의 이름은 샤넬 밀러다.

이 책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행복한 결말이 없다. 게다가 우리는 책을 통해 그의 삶은 읽을 수 있을지언정 그에게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다. 그렇다면 독자는 무엇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책을 손에 쥔 순간부터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독자가 느끼는 모든 감정, 그것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한 권의 책에 담긴 고통의 시간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 전 세계 모든 이들이 한 문단으로 요약된 기사로 접했을 이 끔찍한 사건은 성폭력 생존자 당사자에게는 한 권의 책으로 표현하기에도 모자랄 일이었다.

2015년 1월 17일, 스탠퍼드대 파티에서 만취해 필름이 끊긴 밀러를 쓰레기통 뒤편에서 성폭행한 이는 '브록 터너'였다. 목격자들이 있었고, 터너는 도주하다 붙잡혔으며, 현장에는 증거가 널려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 채 깨어난 밀러는 장시간 성폭력 증거 확보를 위한 일련의 절차를 거치며 서서히 다가오는 '진실'의 공포를 애써 외면해야 했다.

강간 키트 검사를 마친 후 건네받은 책자에는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지옥 같은 시간이 적혀 있었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책자의 예언은 적중했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집 안에서도 엄습하는 공포, 딸의 피해 사실을 전해 듣는 부모님의 표정, 슬퍼하는 동생과 애인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심정, 불규칙한 재판 일정으로 무너져가는 일상과 경제 상황. 가장 끔찍한 고통은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갖게 된다는 점이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충분했던 성범죄였음에도 밀러는 재판에서 끝없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했다. "남자친구와 독점적 관계인지", "바람을 피워본 적 있는지", "파티광인지" 같은 온갖 모욕적인 질문들에 대답하면서도 밀러는 무너질 수 없었다. 자신의 신체부위를 찍은 사진이 증거품으로 공개되는 동안 화장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기 위해 옷 매무새를 다듬어야 했다. 그러고도 브록 터너는 고작 6개월 형을 선고받고도 3개월이 감형됐다.

지난한 전쟁 끝에 얻어낸 승리 앞에서 그는 허무함을 느꼈다. 그는 "정의는 이런 모습인지 모른다고, 녹아서 뚝뚝 떨어지는 요거트를 들고 진이 빠져 앉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가해자 보호 관행과 2차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사법 시스템은 무너진 피해자의 삶을 재건하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문제는 피해자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 피해자가 안전과 정의와 회복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에 있다'는 밀러의 신랄한 고발에 어느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피해자라는 역할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녀를 향한 악성 댓글, 억측, 불순한 시선. 성폭력 피해 후 그녀는 사회로부터 내몰려 들어서게 된 가시밭길을 걸으며 피를 흘려야 했고, 상처가 낫기도 전에 다시 상처입었지만 묵묵히 뚜벅뚜벅 걸었다.

이처럼 밀러는 사건 이후 피해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치유가 실제로는 어떻게 가능한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로만 정의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백한다.

이 책에는 미국 사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에밀리 도의 피해자 의견 진술서'가 수록되어 있다. 가해자 터너의 진술들을 인용한 뒤 하나씩 논리정연하게 반박해나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진술서는 피해자에게는 가혹하면서 가해자에겐 너그러운 사회를 향한 그의 최후 비명이었다.

"유죄라고 선고한 뒤에도 그가 인정한 것은 알코올 섭취뿐이다. 자신의 행동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은 감형받을 자격이 없다. '문란함'이라는 말로 강간을 물타기 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모욕적이다. 강간의 정의는 문란함의 부재가 아니라, 동의의 부재다."(피해자 의견 진술서 중에서)

피해자의 치유에 대해 말할 때 이 책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우리는 치유가 흔히 미래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믿지만 밀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이 위로 성장한다면 피해자는 상처의 장소를 돌면서 성장한다. 상처를 돌면서 강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옹골차질 수는 있어도, 취약한 핵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밀러는 피해자라는 신분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피해자라는 역할에서 벗어날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그런 밀러는 현재의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에게 상처를 준 이들은 다 사라지고 온전히 자신만이 서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5페이지에 걸쳐 나열된 고마운 이들도 그의 곁에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밀러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544쪽, 1만9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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