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②]박영귀 작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가난이라는 절대음감

그러나 "고맙습니다"라는 말보다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자존심의 발로였고 자신에 대한 최초의 반항이었으며 현실에 대한 부정이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참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러나 끝마무리를 잘하는 자신에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친구들 고마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리중에 가장 예민한 소리는 아버지 발소리다. 빈곤은 먹이에 집중하다 보니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의 움직임이 새끼의 전부다. 엄마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역시 우리 남매들이 가장 잘 이해되는 음역이다.

동생 중에 절대음감을 가진 동생이 있다. 내 바로 밑에 여동생, 정말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동생이다.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동생은 "아버지가 오신다" 하면 정말 아버지께서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 손에 들고 있는 봉지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알고 있어 우리 가족 사이에는 개 코, 또는 도사, 울보라는 별명을 가진 동생이다.

 

배고픔에 지친 가족들은 여동생처럼 절대음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아버지다!"하고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 손이 빈손이면 울보는 울대를 몇 옥타브 올려 사정없이 울었다. 보고만 있던 우리들도 따라 울었다. 엄마도 울보를 부여안고 우셨다.

아버지도 눈물을 보이셨다.

기절초풍을 할 일이 생겼다. 죽은 사람이 시장 바닥을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다. 방물장수 할머니 말씀이 김 씨 아저씨를 시장에서 보았다고 하신다. 부모님은 믿지 않으셨다. 잘못 보셨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귀신 이야기는 부모님 가슴에 더 큰 상처만 만들고 흐지부지 사라졌다.

경찰서에서 김 씨는 외상으로 들어온 자재와 금고를 빼돌린 후 페인트와 휘발유를 가게 안에다 뿌리고 불을 질렸다는 이야기와 지금은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고 부모님에게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는, 믿었던 김 씨 아저씨의 정직한 고백 앞에 부모님은 할 말을 잃었다고 하신다.

▶병역기피와 동기생의 전사

"믿었던 주먹이 다운되는 순간" 1960년대 길거리 좌판에서 보던 시다. 부모님 가슴을 가히 짐작한다.나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김광오, 고교 동창이며 회사 입사 동기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직장과 학교를 다니던 나는 친구와 같이 입영 통지서를 받고 친구는 입대했지만 나는 기피를 했다. 핑계는 건강이 좋지 않고, 그보다는 집도 절도 없는 집안의 8남매 장남으로 무기력한 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동생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병역 기피자라는 죄목의 붉은 줄이 생겼다. 친구와 나는 짝꿍처럼 잘 어울렸다. 입대 후에도 곧잘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친구한테 온 소포에 전사통지서와 유품이 와서 친구 집으로 달려가 보니 친구 사진 앞에 향이 타고 있었다. 무장공비 토벌 작전 중 전사한 것이다. 동작동 국립묘지, 친구 앞에서 나는 대한민국 남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낀 날이다. 얼마 후 병역 기피자 자수 홍보 포스터가 서울 곳곳에 붙어졌다.

나는 모든 것을 치우고 자수를 한 후,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강원도 모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건강이 좋아졌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주고 운동까지 시키니 이처럼 신나는 곳은 없었다. 운동을 열심히 했다. 이제는 해골도 아니고 왕 눈깔도 아니다.

▶군 생활은 인내심의 수련

어느 날 전우신문에 각 군 사관후보생 모집 광고 중 해병대 사관후보생 모집 광고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육군 졸병 일등병이 지원하기엔 산 넘어 산이었다. 육군에서 육군 장교가 아닌 타군 장교로 가기 위해서는 육군 참모 총장의 추천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소대장 추천에 중대장 추천서, 그걸 가지고 대대장 추천서를 받고, 연대장, 사단장, 또는 군사령관, 서울에 있는 육본까지 올라가 추천서를 받고 중앙 대학교에서 필기시험, 체력시험, 신체검사까지 통과해야만 해병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육군 일등병이 어떻게 이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가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는, 강인한 정신과 육체만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일을 시작했다. 드디어 2박 3일 휴가증을 받아 육군본부 위병소까지 왔다. 어느 곳이나 비슷한 절차였다. 위병소 근무자나 헌병은 나를 보면 "새까만 졸개가 겁대가리 없다"며 "쪼그려 뛰기 3만 번" 또는 어느 곳은 "쪼그려 뛰기 백만 번"하며 얼차려(벌)를 주었고 장교들은 육군에도 장교가 될 기회가 많은데 왜? 해병대로 갈려하느냐고 물었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에게는 체력시험이 문제였다. 죽기 살기로 뛰었다. 애초부터 선두에 설 생각은 없었다. 포기하여 낙오자가 되지는 말자는 것이 나의 각오였다. 이것이 나의 생활 철학이 되었다.

드디어 해병학교에 입교했다.

나의 육군 이등병, 일등병 생활은 만족했다. 풍족한 식사, 넘치는 운동량, 적당한 스트레스가 있어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었다.

▶해병대 소위가 되다.

군 생활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어떤 군인은 음식이 맛이 없다고 조미료를 몰래 사 먹고, 부모한테 총을 잊어버려 돈이 없으면 영창에 가야 한다고 거짓 편지를 보내 그 돈으로 상급자에게 뇌물, 또는 외출을 나가 돈을 흥청망청 쓰는 자들도 있었다.

내가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실에 들어서니 거기에 있는 군인은 전부 동생뻘 되는 상급자들이 30여 명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가끔 어린아이들은 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어떤 어린아이는 생트집을 잡아 나를 구타했고 어떤 바로 밑 동생 같은 놈은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하며 몽둥이로 나를 후려쳤다. 어린아이들은 수없이 나를 얼차려를 주었다.

어떤 때는 눈깔 동작이 건방지고 불량하다고 집단폭행도 당했다. (지금은 비인간적인 언행, 체벌이 없다고 한다.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나는 인내심 수련이라고, 체력단련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하여간, 육군 졸병은 내무반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하며 해병학교에 입학했음을 신고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원, 섭섭했다.

해병학교는 진해 바닷가에 있었다. 해병대 장교는 대부분 여기서 배출한다고 한다. 해군 사관학교도 이웃하고 있는 이곳은 조용하고 공기도 맑고 상쾌한 바닷바람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전반에 걸친 전술학을 배울 것이며 임관하기 전까지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하고, 공수낙하 훈련, 그리고 특수전 훈련을 수료해야 한다. 여름에는 해군 사관학교에서 전투 수영을 배웠다.

왜소한 몸을 가진 나는 무거운 철모와 M1 소총이 나를 힘들게 했다. 더욱이 무거운 철모로 머리가 파묻히고 착검한 총의 높이와 키가 총을 내가 메고 있는지, 총이 나를 메고 있는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동기생과 한참 웃었다. 그런 모양새로 완전군장을 해서 진해에서 창원, 또는 천자봉 정상까지 뜨거운 땡볕에 뛸 때면 죽을 것 같지만 낙오만은 하지 않았다. 정신무장이다. '선두에 설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더불어 낙오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

동기생 몇이 픽 쓰러진다. 의무병이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싣는다. 스파르타식 교육과 훈련 방식이다. 낙오나 미달은 퇴교다. 수시로 동기생 몇 명씩 퇴교를 당했다. 어떤 동기생은 며칠 있으면 임관을 하는데 아깝게 퇴교를 당했다. 임관을 앞두고 부모님을 임관식에 초청한다는 편지를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병역 기피자로 끌려가 혹독한 벌을 받는 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임관식에서 나에게 소위 계급장을 달아 주셨다.

(6월11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 3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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