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 '늦깎이 인생'](6회)

일러스터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터 전숙경(아트그룬)

 

놀란 직원들의 도움으로 이웃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이틀간 입원하면서 뇌 MRI는 물론 각종 검사를 다했었다. 진단 결과는 과로로 인한 뇌허혈성 장애였다. 퇴원 직전에는 위내시경 검사와 조직검사도 하고 왔다. 4월 말일 유난히도 비바람이 거세던 날 그야말로 잔인한 소식이 나에게 전해졌다. 위암이라 당장 수술을 해야 하니 지금 바로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진료실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은 더 거세졌고 빗줄기도 더 강해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이라 재차 전화로 대학병원에 확인하였으나 당장 입원하라는 말 뿐이었다. 전이여부는 수술을 해봐야 알겠다는 전언도 함께. 한참을 생각하다 내일 입원하겠다는 연락을 하고는 직원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내한테 전화를 하였다.

출타 중이던 아내는 황망한 표정을 하고 내 진료실에 들어섰다. 이틀 뒤 내 14번째 수술은 위암 수술이 되었고 위의 사분의 삼을 절제했다고 들었다. 다행히 특별한 전이는 없었고 2주 만에 퇴원을 했다. 단 한 달만 이라도 쉬지를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되지만 퇴원 후 이틀 만에 다시 진료를 개시했다.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종일 상담실을 지키는 동안 체중은 자꾸만 자꾸만 줄어들었다. 하체의 힘은 빠지고 기운도 없었지만 나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버티다보니 차차 호전되고 환자도 무리 없이 보게 되었다.

◆열다섯번째 수술

이제는 병마와 영원한 이별을 했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진료실을 지키던 2010년 어느 날 밤 갑자기 배가 풍선처럼 불어나면서 복통은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이러다가 배가 풍선 터지듯이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을 거쳐 입원을 하였다.이틀을 꼬박 통증과 싸우면서 수술하지 않고 완화시켜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내 생애 열다섯 번째로 또 수술실을 구경하게 되었다. 소장협착증으로 인해 이번에는 소장을 잘라냈다. 퇴원 후 역시 불편해하는 환우들을 외면할 수 없어 이틀 만에 다시 진료실에 나갈수 밖에 없었다. 울산 동구의 유일한 정신과의원이라 내가 자리를 비우면 환우들은 시내까지 가야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체중 감소는 오히려 위암 수술 때 보다 더 심하게 왔다.키 158센티미터에 체중이 16키로가 빠졌으니 기운이 더 없어지고 하체의 힘은 더 빠져 한동안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다.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은 함부로 제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다.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기에.

◆늦깎이 시인 등단

17년간 연속해서 울산에서 서울로 수시로 오르내리며 정열을 쏟았던 의사회 임원 일을 그만두고 진료에 전념하게 되면서 건강도 어느 정도 찾아가고 진료실도 안정되어 가고 있어 마음의 여유도 생겨 그동안 접어 두었던 글쓰기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틈틈이 의사회 회지에 시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내 시를 밖에 드러내기는 너무 미흡하다고 생각할 즈음 아내의 권유로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신인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했다.

2015년 겨울호에 시 ''가는 봄 오는 봄'' 외 2편이 당선되어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서 본의 아니게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하게 되었고 수시로 시상이 떠올라 잠을 설치기가 다반사였다.

올해 오월에는 '문학시선작가회'와 서울신문이 공동주최한 윤동주시인 탄생 백주년 특별문학상 공모전에서 '' 내 몸에 담은 동주형의 꿈''(김정곤의 자화상)이 대상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2년 후 봄이 오면 내 뒤를 이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되는 아들에게 내 진료실을물려주고 은퇴를 할 생각이다. 은퇴 후 일 년간은 의대 졸업식 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신과 약속한 의료봉사를 하면서 좀 더 문학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은 소망을 가져본다.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좋은 글 은은한 향기가 나는 글을 쓰고 싶다.

한 명에게만 읽히는 백편의 시 보다도 만 명에게 읽히는 시 한편이라도 남기고 싶다.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회

아버지가 총각시절 첫 애인이었던 어머니와의 결혼은 할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에 반발한 아버지는 세 번씩이나 가출을 하여 북간도로 도망을 다녔다. 결국 아버지는 내 생모와 결혼을 하였고 어머니는 충격을 완화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양재학원을 다니다 결혼하였는데 딸이 태어나고 그 이듬해 갑작스러운 사별을 하고 청상과부로 살다가 내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아버지와 재혼을 하셨다. 콩쥐팥쥐 이야기만 듣고 자란 사춘기 소년은 계모라는 선입견으로 얼마간은 경계를 했었는데 친척 어른들께서 아버지의 첫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라고 불렀다. 끼니도 걱정해야 할 궁핍한 가정에 그것도 5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돌보겠다고 딸 한명을 데리고 자진해서 우리 집으로 오신 것에 대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새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청춘을 다 바쳐 삯바느질로 6남매의 뒷바라지를 하셨고 아버지께는 절대순종을 하셨다.호강 한번 못하시고 97세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존경심은 영원할 것이다.

◆어머니 전 상서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한 명 부족하셨나보다. 97세가 되신 어머님을 부르셨다. 내가 열네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지 일 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아버님께서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자고 하셨다. 어떤 예쁜 여인과의 첫 만남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분이 우리 집으로 오셨고 내 어머니가 되셨다. 어린 나이에도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집안에 그것도 자식이 5남매나 되는 지지리도 궁상맞은 집에 청상으로 왜 오셨을까 궁금했었다. 어머님이 고생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늘나라 천사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바로 저 분이 천사이시구나 생각했었다.

한참이 지난 후 큰어머님을 통해 아버지와는 첫 연인이셨고 어찌어찌한 사정으로 두 분은 헤어지게 되었고 아버지는 두 번이나 만주까지 가출을 하셨지만 결국 할아버지의 뜻대로 장가를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결혼하시자 일본으로 가셨고 양재학원에서 공부하시던 중 결혼하셨고 딸 한 명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상이 되셨다고 한다.

사춘기 예민한 시기의 올망졸망 6남매를 잘 건사하셨고 작은누나와 우리 5남매와의 갈등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 주셨다. 어떤 계모 이야기나 콩쥐팥쥐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동화나 소설에 불과했을 뿐이다.

(5월21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늦깎이 인생' 7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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