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산책] 섣달 그믐날 밤[除夜〕 이종학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해마다 섣달그믐엔 으레 밤을 새웠는데 守歲年年事(수세년년사)

올해는 내 수건이 눈물로 범벅일세 今年淚滿巾(금년루만건)

바야흐로 외로운 성 나그네가 되고 보니 孤城方作客(고성방작객)

밤새도록 곱빼기로 어버이가 그립구나 一夜倍思親(일야배사친)

오순도순 모여 지낸 지난날을 생각하니 團聚憶前日(단란억전일)

뚝 떨어진 이 내 몸이 서글프기 짝이 없네 分離悲此身(분리비차신)

벽 가운데 청사등롱 환히 밝은 오늘 밤에 靑燈明半壁(청등명반벽)

밤을 새며 기다린다, 새봄아 어서 오라! 不寐待新春(불매대신춘)

 

1389년 11월, 이성계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그의 둘째 아들 인재(麟齋) 이종학(李鍾學: 1361-1392)은 각각의 길로 유배를 떠났다.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추대하는데, 관여를 했다는 게 그 죄목이다. 인재는 그해 12월 8일 형제들과 작별을 하고, 머나먼 유배지 전남 순천으로 길을 잡았다. 전북 남원에서 섣달 그믐날과 맞닥뜨린 그는 그 외딴 곳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며 이 시를 썼다.

옛날 섣달 그믐날 밤에는 집안 곳곳마다 등불을 밝혀놓고 밤을 지새우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잠을 자게 되면 부엌을 주관하는 조왕신(竈王神)이 그 틈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가족들이 한 해 동안 지은 죄를 낱낱이 다 고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잠을 자지 않고 딱 버티면서 조왕신의 외출을 막기만 하면, 죄에 대한 벌을 면하게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믿음이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거나, '몸이 굼벵이가 된다'는 등의 새빨간 거짓말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연유다.

기나긴 겨울밤을 지새우기 위해서는 술과 음식, 갖가지 놀이가 필요할 터. 그러므로 섣달 그믐날은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축제의 날로 변하곤 했다. 가족들끼리 모여 맛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축제다. 그런데 바로 그 축제의 날에 작중화자는 유배객이 되어 낯선 타향에서 혼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만 가지 감회가 없을 수가 없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위의 한시는 바로 그 만 가지 감회들을 눈물로 뒤범벅 해 차려놓은 두레밥상 같은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가 벌써 섣달그믐날 이다. 죄에 대한 벌을 피하기 위해 가당치도 않은 밤샘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달 그믐날에는 다들 밤샘을 했으면 한다. 지치고 힘들었던 가족들이 모처럼 오순도순 마주 앉아서 작은 축제를 벌이는 동안, 아아, 새날이여 어서 오라!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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