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⑦노병의 증언/ 김길영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인민위원회에 인계되다

우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어떻게 하면 탈출할 것인지 궁리에 궁리를 더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던 어느 날, 군당위원회 직원이라는 자가 찾아와 쌀 두어 되를 주면서 밥을 해먹으라고 했다. 이것이 웬 떡이냐 하고 밥을 짓고 있었다. 다른 방공호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정보를 주었다. 그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춘천에서 1.4후퇴 때 피난 와서 더 가지 못하고 홍천에서 머물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정보 내용인즉, '오늘 저녁밥을 먹고 군당위원회 살림살이와 모든 서류를 우리들에게 짊어지게 해서 춘천까지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짊어질 물건들을 살폈더니, 모두 서류뭉치들이었다. 점령지에서 인민행동강령과 토지개혁요령 등의 유인물이었다. 우리들은 깜짝 놀라 긴급회의를 했다. 도망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밥을 짓는 척 하면서 서로 눈짓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우리들은 2개조로 나뉘어 남쪽 들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초병들이 달아나는 우리를 향해 총격을 가했지만, 어둠이 짙어서 더 이상 추격당하지 않았다.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약 2킬로미터를 죽기 살기로 뛰어 당도한 곳이 중공군 중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부대와 맞닥뜨렸다. 황급히 다리 밑으로 몸을 숨겼다. 꼼짝 못하고 저녁 내내 물구덩이에서 발발 떨었다. 다리 위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급해 보였다. 중공군이 이동 중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숨어 있다가 다리 건너 홍천시내 남쪽 산 밑으로 숨었다. 그곳에는 드문드문 몇 채의 집이 있었고, 큰 길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을 택해 피신처로 삼았다. 보아하니, 9중대 CP로 활용했던 집이었다. 그 집은 우리가 1차 탈출 때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당분간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오래 잠복하는 길이 사는 길이라 생각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이 집을 은신처로 결정했다.

▶ 2차 탈출 성공

운 좋게도 그 집에는 감자 구덩이도 있었고, 김치독도 묻혀있었다. 산골 살림치곤 괜찮은 살림 살이었다. 부엌 밥솥에는 밥이 꽁꽁 언 채로 있었다. 밥을 해놓고 미처 먹지 못하고 떠난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른다. 밥솥에 물을 붓고 김치 독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언 밥이 풀린 탓인지 전혀 배고픔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래도 마른 풀잎을 씹을 때보다, 소나무 껍질을 씹을 때보다도 먹을 만했다. 얼음덩이 밥 한 그릇일망정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끝장을 보기로 했다. 죽든 살든 더 이상 이동하지 말고 그 집을 지키기로 했다. 옆방을 화장실로 사용하기로 하고 숨소리 죽여 가며 숨어 있었다. 비무장 상태인 우리들은 중공군이나 인민군을 만나도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군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적군을 만나면 꼼짝 못하고 끌려갈 판이었다. 일단 하룻밤을 실컷 잤다. 몽롱한 머리가 맑아졌다. 북진하고 있을 때는 일주일 굶으면서 행군해도 배고픔을 몰랐다. 긴장이 풀린 탓도 있겠지만, 밥 몇 끼 굶었다고 맥이 풀려 버렸다.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린 우리들은 사람의 탈을 썼을 뿐 짐승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곱 명은 상처 하나 없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입었던 군복은 온데간데없이 인민군 복장도 아니고, 중공군 복장도 아닌 어중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1차 포로로 잡혀갔을 때 중공군 방한복을 걸친 후, 인민군에 인계되었을 때 또 몇 가지 피복을 얻어 입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군대라고 밝히지 않으면 소속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튿날, 낮에는 아군 비행기가 홍천시내 외곽을 폭격했다. 폭탄이 투하될 때마다 우리가 거처하고 있는 집 천정과 벽이 흔들리며 흙이 떨어졌다. 방문이 저절로 여닫히기를 반복했다. 우리들은 납작 엎드려 폭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성난 폭격기가 화풀이 하듯 폭탄을 쏟아 붓더니 정찰기가 북쪽으로 날아가자 폭격기도 따라가면서 폭탄을 투하했다. 다음 날도 아군 비행기가 홍천시내를 정찰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홍천시내 남쪽에서 아군의 탱크가 들어와 몇 발의 사격을 퍼붓고는 물러났다. 최전선이 우리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된 것 같았다. 그때서야 우리가 적군과 아군의 완충지대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저녁 무렵에는 언덕에 올라 정찰하는 여유도 생겼다. 홍천 서쪽으로 약 2킬로미터 지점 하천가에는 유엔군 트럭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들은 말없이 부둥켜안고 안도의 눈물이었다.

 

▶유엔군을 만나다

51년 3월 22일. 11시 경, 유엔군 수색대가 30미터 앞에 보인 곳에서 백기를 들고 다가갔다. 우리 일행을 발견한 유엔군 병사들은 적으로 오인하고 총을 겨누어 금방 쏠 자세였다. 우리는 다시 손을 번쩍 쳐들고 항복 시늉을 한 다음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서 숨어 사는 며칠 동안 얼굴 한 번 씻지 못해 머리는 장발이 되었고 수염은 산적 같았다. 입고 있는 옷마저 각각 달라 몸에 걸치긴 했어도 옷이라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40여 일을 굶고 지쳐서 눈은 칠팔십 리 들어가 있어서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포로로 시달린 40여 일, 총알이 빗발치고 파편들이 공중에서 날아 다녔는데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전우들이었다.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미군 헌병대에서 강도 높은 심문과 심사를 받았다. 다시 우리는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원대복귀 명령을 받았다. 원주에서 기차 화물칸에 몸을 싣고 제천역에서 잠시 정차했다. 역무원들이 우릴 보고 '포로 많이 잡았다'고 지껄였다.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역무원의 멱살을 낚아채고 땅바닥에 패대기쳐버렸다. 우리가 왜 포로인가.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1월8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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