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스토리] 정대호 '사람의 문학' 발행인

대구 첫 종합문예지 25년간 86호 펴내

정대호 '사람의 문학' 발행인.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정대호 '사람의 문학' 발행인.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 1990년대는 사회주의 이념이 붕괴하고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불었다. 거대 담론은 소소한 이야기로 대체됐고, 잘 팔릴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상업주의는 출판자본을 거대화하고 문단의 패거리주의를 악화시켰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혹독한 현실에서도 '사람의 문학'은 '시와 반시'와 함께 지역 문단의 한 축을 형성하며 종합문예지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말에는 통권 86호를 펴내기도 했다. 25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사람의 문학' 발행인 정대호 씨를 만났다.

◆'탁 치니 억' 하던 때…문학이 움트다

1980년 독재정권이 물러난 자리에 서슬 퍼런 신군부가 들어섰다. 집권에 눈이 먼 군부의 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사건은 총포에 가려지는 듯했지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전국으로 확산했다. 경북대 국문학과 졸업을 앞둔 정 발행인에게도 광주민주화운동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해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그는 '계엄포고령위반죄'로 기소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대구교도소에서 가을을 보내고 찬 서리를 맞으며 출소한 그의 그림자는 '안기부 계장'이었다. 어딜 가든 사찰이 따라붙었다. 마음을 추스르는 데엔 글만 한 게 없었다. 제적 상태로 대학 주변을 맴돌며 '분단시대' 동인으로 시를 발표했다. 신군부는 복학을 명분으로 제적생들을 옥죄어왔다. 과외금지조치(1980년)로 주머니마저 가벼워진 학생들에게 취업은 넘어서야 할 현실의 벽이었다. 경북대 복학생협의회를 이끌었던 그가 그런 친구들의 속사정마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1984년 간신히, 그러나 굴욕적으로 복학했다. 그리고 첫 시집 '다시 봄을 위하여'를 펴냈다. 이듬해 교육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빨간줄'이 그인 운동권 출신 강사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일신학원에 있던 한 선배가 그를 받아줬다.

1990년대는 1980년대적인 것들과 결별해야 했던 때였다. 다양성'자율성'대중성을 중시하던 문화 환경의 변화는 지역에서도 문예지 창간의 불씨를 지폈다. '창비'(창작과 비평)와 '문지'(문학과 지성)로 대별되던 문예지 시장에 대구에서는 최초로 '시와 반시'가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시 전문지만으로 지역 문단의 갈증을 달래기엔 아쉬움이 있었다. 밥벌이를 하게 된 정 발행인에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글이었다. 그중에서도 시대 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실주의 문학 작품을 알리고 싶었다. '분단시대' 동인이 하나 둘 모였다. 소설가 정만진, 시인 김윤현, 시인 배창환, 시인 김용락과 시인 정대호까지 5명이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판을 만들어보자."

1994년 1월 '사람의 문학'을 창간했다. 단일 장르 전문지가 아닌, 시'소설'비평 등을 두루 싣는 종합문예지로서는 대구 최초였다. 창간호인 1994년 봄호의 발행인은 정대호의 아내였다. 4월은 여전히 '잔인한 달'(T.S.엘리엇의 '황무지' 중)이었기 때문이다. 정 발행인은 "(운동권 출신으로) 제적당한 내 이름을 썼다간 외부에서 '사람의 문학'에 대해 편견을 가질 것 같았다"고 했다.

◆자금난'좋은 원고…산 넘어 산

'사람의 문학'도 IMF가 몰고 온 자금난 앞에서는 흔들렸다. 아내로 돼 있던 발행인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문예미학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펴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접어야 했다. 지역 내 출판 수요는 정해져 있는데 물량을 나눠 가질 출판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점점 쪼그라들었다. 사무직원도, 편집자도 없는 1인 출판사가 낼 수 있는 책은 서점에 내놓고 팔 걱정이 없는 책 몇 권과 돈 안 되는 민주항쟁 이야기가 전부였다.

문학평론가인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잡지 발행인을 시키라"고 했던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열악한 문학 환경에서 '사람의 문학'이 86호까지 발행될 수 있었던 건 정 씨와 편집인의 열정, 청탁에 흔쾌히 응했던 필진과 정기 구독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부 보조금이 끊기고, IMF를 거치면서 원고료 지급은 사실상 중단됐다. 매 차례 600부를 발행하는 데 드는 돈은 300만원 남짓이다. 모자란 돈은 정 발행인이 채운다. 매년 1천만원 가까운 사재를 털어 넣으면서도 '사람의 문학'을 만들어내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등단과 작품 발표를 미끼로 문단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그의 소신은 '사람의 문학'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것도 안 하면 문화가 왜곡될 것 같아서요."

'사람의 문학'에는 '창비' '문지' '문학동네' 등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온기가 있다. 지역에서 태어났든, 지역에서 활동하든 대구경북을 뿌리로 둔 작가들이 만들어가는 문예지이기 때문이다. 정 발행인은 "지역 문인들로 끌고 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문예지 가운데서도 지역지로 시작했다"고 했다. 기대는 바람에 불과했다. 충분할 줄 알았던 필진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문예지 발표 작품이 대학교수 실적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양질의 원고가 끊기다시피 했다"면서 "어쩔 수 없이 점차 필진을 확대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지면의 3분의 1 정도를 서울'수도권 등 타지에서 나고 활동하는 작가에 할애한다.

출신보다는 작품이 중요하다. 시인 도종환이 '분단시대' 동인지로 첫 작품을 발표한 것처럼. 그러려면 지역 출신 작가가 다른 잡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사람의 문학'이 발판 역할을 해야 한다.

나머지 지면인 3분의 2 정도가 지역 문인의 작품으로 꾸며지는 건 딜레마다. 간혹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이 실리기도 한다. 대체로 지역 문예지가 아니고서는 빛을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지역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그래서 '질이 떨어진다' '필진을 지역 외로 확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역 문단에서 문예지의 역할이 사라지면 우리의 존재 이유가 없겠죠."

◆더 건강해질 리얼리즘을 향해

'사람의 문학'은 촌스럽다. 디자인도, 판형도, 콘텐츠도 조금 더 세련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편집자도 조금 바꿔보자는 제안을 했지만 정 발행인은 거절했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책도, 정 발행인도.

"시간이 지나면 색깔은 날아가지만 좋은 글은 남는다. 외관보다는 내용에 집중하고 싶어요."

어렵게 살림을 꾸려왔지만, 그는 장사치는 아니라고 자부했다. 문학을 상품화하는 작품을 싣지 않았고, 계산되고 위장된 순수인 척 포장하지도 않았다. 작가도, 작품도, 자본도, 모든 것이 서울로 옮겨가는 동안에도 그의 믿음은 변치 않았다. 정 발행인은 "예전엔 우리(사람의 문학)의 수준이 중앙 문예지에 못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중앙 문예지가 상업화하는 동안 꾸준히 양질의 작품을 내놨고 이제는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람의 문학'이 종합문예지로 2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현실주의' 라는 큰 줄기를 놓치지 않았던 덕분이다. 문학은 현실의 기록적 측면에 저항정신이 가미돼 형성된 현실주의(리얼리즘)라는 문학 사조는 발행인 정대호와 '사람의 문학'을 동시에 설명하는 키워드다.

"살다 보면 '이게 아닌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내가 무엇을 써야 할지 깨닫죠."

지역 문단에 대한 그의 진단도 같은 뉘앙스로 들린다. 김춘수'신동집 시인을 필두로 한 대구경북의 문학이 순수주의에 경도돼 있다는 것. 겨우 일궈온 꿈에 덧붙이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지역 문단의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기록하지 못하는 동안 사라져 갈 것들에 대한 기록을 하는 것이다. 쪽방촌, 자갈마당, 이천동 골동품 길, 남산동 까치마을처럼 대구와 넓게는 경상도 지역의 삶을 글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세담론이든, 개인사든 역사로 기록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람의 문학'에 담기길 바란다"면서 "그렇게 좋은 책을 계속 펴냄으로써 지역 인재를 발굴해 돕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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