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조선이 약해진 건 인플루엔자 때문?

판데믹 히스토리

판데믹 히스토리/ 장항석 지음/ 시대의창 펴냄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한 이래 인류는 '바이러스'의 공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1347년 유럽으로 전파된 아시아 내륙 페스트균은 유럽 인구 절반을 앗아갔다. 유럽을 초토화한 이 역병은 767년이 지나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사라졌을까? 아무리 강한 페스트균이라도 감염이 계속되려면 병을 옮길 숙주가 있어야 한다. 학계는 감수성 있는 숙주가 사라지면서 페스트도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이후에도 역병은 계속됐다. 스페인독감(1918~1920), 아시아독감(1957~1958), 홍콩독감(1968~1969)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사스(SARS), 메르스(MERS), 에볼라. 지카, AI 등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콜레라나 뇌수막염 등 세균성 질병은 어느 정도 잡혔지만, 바이러스성 질병은 아직 속수무책이다. 에이즈는 여전히 공포 그 자체다.

이 책 '판데믹 히스토리'는 인류의 역사를 끊임없이 조정했던 질병에 대한 문명사적 기록이다. 현직 의사인 저자는 방대한 역사 자료 연구와 임상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문명사를 해부했다. 그리고 그만의 독창적인 관점과 다방면에 걸친 지식으로 질병 연대기를 깔끔하게 봉합했다.

◆침입의 역사

침입이 반드시 질병을 일으키진 않는다. 인류도 침입에서 비롯됐다. 핵도, 세포질 구분도 없지만, 독자적인 DNA를 가진 한 생물체가 우리 몸에 우연히 들어왔다. 미토콘드리아의 침입으로 시작된 기적은 생명을 탄생시켰다. 침입과 공생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면역력이 없는 집단은 감염에 취약했다. 문명사는 그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람세스 2세가 즉위하고서 강제노역에 시달린 유대인은 역병의 도움으로 이집트를 탈출했다. 천재지변으로 나일강이 범람하고 하늘이 어두워졌으며 해충이 들끓고 가축과 사람에 전염병이 번졌다. 히타이트와의 전쟁은 천연두로 추정되는 질병이 창궐하던 이집트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패퇴하지는 않았지만,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하면서 유대인은 탈출에 성공했다.

아즈텍 문명은 스페인 군대와 함께 침입한 천연두로 파괴됐다. 트로이 전쟁 때도 아폴론 신은 제사장인 크리세스의 딸 크리세이스를 붙잡아 간 그리스군에 저주를 내려 질병의 화살을 쏴대면서 그리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동로마 제국을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만든 것도 페스트로 설명한다. 2014년 의학 학술지 '란셋'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541년 콘스탄티노플을 덮치고 750년까지 유행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동로마와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플은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논문은 이 역병이 잠복하고 있다가 흑사병으로 나타났고, 19세기 남중국과 홍콩을 중심으로 판데믹(Pandemic)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의 배후에도 유럽발 인플루엔자가 있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16세기 전국을 강타한 역병에 조선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우리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전염병 때문이라는 것.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창궐한 스페인독감은 전사자 수의 3배에 달하는 5천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렇듯 생명 탄생의 순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감염시키고 파괴하면서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들었다. 수천 년간 세계사는 질병에 걸렸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하다

저자는 인류 역사를 감염과 내성의 변증법적 역사로 본다. 생태계 교란종인 우리나라 '황소개구리'처럼,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간 '영국토끼'가 생태계를 위협하자 토끼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감염시킨 사례를 든다. 1년 만에 토끼는 거의 절멸했지만 7년이 지나자 내성을 가진 토끼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멸종되지 않은 집단은 질병과 균형을 이루며 번성, 번영한다. 저자는 천연두가 몰락시킨 아즈텍 문명의 후예나, 흑사병이 훑고 간 뒤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감염과 면역, 침투와 내성의 역학관계에서 승리한 생명체로부터 문명은 시작한다고 말한다.

세계보건기구는 동물-인간, 인간-인간의 전파 여부와 속도에 따라 전염병을 6단계로 구분한다. 4단계는 세계적 전염의 초기 단계, 5단계는 동일 권역 2개국 이상에 퍼져 대유행에 접어든 상태로 에피데믹(Epidemic), 마지막 6단계는 여러 대륙의 국가에 퍼져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판데믹(Pandemic)이라고 한다. 최근 발생한 에볼라와 신종인플루엔자는 5단계까지는 갔으나 판데믹을 형성하진 않았다. 현대적 사회구조와 시스템 덕분이었다.

몇 해 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생소한 병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다.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전염이 된다는 공포가 대한민국에 퍼졌다. 증상이 있으면 가족으로부터, 회사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됐다. 병원이 감염 진원지로 지목되면서 병원 근처에 얼씬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부는 근거 없는 지침을 내놨다. 낙타와의 접촉을 피하고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나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 낙타는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결국, 격리된 서울대공원의 낙타는 중동이 어딘지도 모르는 '한국 태생'이었다. 심지어 이 낙타는 중동이 어딘지도 모르는 몽골지역 쌍봉낙타였다. 질병을 모르는 데서 벌어진 촌극이다. 질병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408쪽, 1만8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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