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세월의 흔적] <42> 전화

전화기 전화기

 

 

"여보세요, ㅇㅇㅇ씨 댁입니까? 나는 ㅇㅇㅇ입니다. 간장 한 통 보내주세요."

"장난하지마. 네 집에서는 간장만 퍼 마시느냐? 어제 한 통 가져갔잖아."

"아니, 전화 시험 한번 해 봤지 뭐. 미안해."

전화를 처음 설치한 뒤 기분이 좋아서,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에게 전화기 사용을 금하라'는 주의를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느 집에서나 '전화기 사용을 사양함'이라는 표지판을 가게 앞에 장식처럼 달아놓기도 하였다. 전신의 전화 탁송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대구에 전화가 개통된 것은 1906년 7월 1일이었다. 당시의 가입자 수는 관공서를 포함해 100대였다. 1907년 봄, 일본인이 대구에 처음 와서 초가집에 전화가 설치된 것을 보고 놀라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고향집에는 아직 전화가 없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전화를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3년 11월이었다. 그러나 실제 통화는 1898년 궁중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전화기는 붉은색 판에 붙인 벽걸이형으로 송수화기는 분리되고, 수회기 판에 신호를 돌리는 손잡이며 딸딸이가 딸려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옥음(玉音)이 전화기에 의해 변질되는 것은, 황제의 권위는 물론 국가의 체면까지 깎는 일이라며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그 뒤 1905년 4월에 민간 전화기는 50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인의 가입자 수는 1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추세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으며, 전화를 설치한 집에서도 실제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시절 전화는 자석식이었는데, 전화기를 벽에 걸어둔 채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신호를 보내면 안내양이 상대방과 연결해 주었다. 감도 또한 좋지 않아서 마치 싸움하듯 큰소리로 통화하였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었다. 교환방식이 공전식을 거쳐 자동식으로 바뀌었다. 1962년에는 ST식 교환기가, 1965년에는 EMD식 교환기가 국산화되었다. 1975년 무렵까지도 전화시설은 수요에 크게 못 미쳤으며, 전화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백색전화와 청색전화 제도가 생겼다. 백색전화는 개인소유였고, 매매와 이전이 가능하였으나 청색전화는 전화국 소유였고, 보증금을 내고 가입하였다가 해약할 경우 보증금을 반환해 주었다. 그 시절 백색전화는 웬만한 집 한 채 값과 맞먹었으며 사회적 지위와 재력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청색전화도 가입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신청해 놓고 몇 달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1984년부터는 모든 교환기가 전자교환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국제전화도 자동화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무선전화기가 등장하였고, 뒤이어 휴대폰이 개발되었다. 전화기의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수단과 기능도 다원화 되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들고 다니며 웃고 떠든다. 이처럼 기계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아직도 구닥다리 폴더폰을 사용한다며, 아이들은 나더러 원시인이라 한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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