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여름의 끝을 잡고, 문경으로 떠난 계곡여행

대야산의 선유동계곡... 괴산과 문경이 사이좋게 나눠
추억저장소 용추계곡은 대야산자연휴양림과 가까워
희양산 봉암사의 봉암용곡은 볼 기회가 없어 더욱 비경
쌍룡계곡과 운달계곡에는 막바지 피서객 바글바글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소를 이룬 '용추'다. 용추에서 흐른 물은 선유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막바지 피서를 즐기는 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소를 이룬 '용추'다. 용추에서 흐른 물은 선유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막바지 피서를 즐기는 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거스르지 않았다. 물의 길에 '굳이'는 없었다. 암벽엔 갈라졌고 흙엔 스몄다. 원래 하나였던 양 합할 때도 요란하지 않았다. 흐르는 대로 흘러 강이 됐고 바다에 다다랐다. 폭염을 피해 찾던 곳에 선비들은 수양의 의미를 부여했다. 물의 자연성에서 삶의 갈피를 붙잡았다. 성리학의 도를 깨치기 위해 자연에서 성찰하던 풍류라는 정의다. 계곡에 이름을 붙였다. '구곡'이라 부르고 선진지 견문록 남기듯 '산수찬미가'를 남겼다.

문경의 구곡에서 맞은 여름의 끝자락은 사나울 수 없었다. 절경 앞에 눈호강을 시켜본다. 필부필녀들이 쏟아져 제멋대로 자리 잡는다. 물을 그저 바라보고 있질 않는다. 뛰어든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구분이 없다. 숲의 대접도 곡진하다. 깨끗한 바람에 오장육부를 슬쩍 꺼냈다 차곡차곡 쟁여 넣는다. 구곡의 정의가 귓등으로 넘어간다. 한여름이 호시절이다.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소를 이룬 '용추'다. 용추에서 흐른 물은 선유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막바지 피서를 즐기는 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소를 이룬 '용추'다. 용추에서 흐른 물은 선유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막바지 피서를 즐기는 이들이 안전한 곳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대야산자연휴양림과 용추계곡

소백산맥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용추계곡에서 머문다. 한기가 피톤치드와 합세한다. 여긴 여름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춥기까지 한 요즘이다. 용추계곡이 지척인 대야산자연휴양림이 휴가철 상종가를 치는 이유다. 전국구 인기다. 올해 산림청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가 여름 성수기 휴양시설 이용객을 추첨했더니 11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최고 경쟁률이었다.

입소문은 문경시민의 추억에서 시작됐다. 어린 시절 여름 물놀이 추억의 공통분모다. 계곡 암벽 낙차는 천연 놀이기구다. 워터파크 슬라이드처럼 내려오고 올라가길 반복한다. '용추계곡 물놀이 따라잡기'라는 비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마을 관계자들이 안전요원 역할을 하며 지키고 섰다. 위험한 행동을 즉각 제지한다. 경험에서 나온 통제다.

"여는 알라고 어른이고 구분없어여. (사람이) 많을 적에는 콩나물시루 같아여. 체면 같은 건 없어"라는 말이 쑥 튀어나온다.

정면에서 보면 하트모양(♡)인 용추폭포는 계곡의 랜드마크다. 암수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21명(기록으로 남은 것만)이 익사했다는 악명에 몸이 떨린다.

천연욕조처럼, 선녀탕처럼 보이는 곳이다. 신선이나 선녀가 아닌 이들이 자리를 탐하다 사고를 당했다. 죄다 술을 마시고 들어간 남성이었다고 한다. 술 마셨으니 선처해달라, 술 마신 게 무슨 죄냐 따위의 읍소는 천상계에 통하지 않았다.

선유동계곡을 찾은 이들이 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선유동계곡을 찾은 이들이 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선유동계곡

선유동계곡은 문경 가은과 괴산 청천 사이에 있다. 사이에 있으니 나눠 갖는다. 오래된 공유의 지혜다. 문경새재의 주흘산, 조령산을 거쳐 희양산, 대야산까지 이어지는 두 지역의 접선이 기어이 계곡도 나눈 것이다. 문경과 괴산 사이로 소백산맥이 꿀렁꿀렁 흐르기에 산도 출입구가 여럿인 판이다. 흐르는 대로 흐르는 물이야 오죽할까.

문경에서 들어서는 선유동계곡은 항일 의병의 성지 '운강 이강년선생기념관'에서 시작한다. '선유동천나들길'이란 별칭이 있다. 가은이 고향인 이강년(1858∼1908) 선생은 동학농민운동 지휘관이었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때가 때인 만큼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공간이다.

'선유동천나들길'의 정수는 '선유구곡'이다. 귀한 아이 이름 짓듯 구곡 곳곳에 이름을 따로 붙였다. 이름과 풍경을 비교해본다. 적절한 묘사력에 기가 막힌다. 돌과 물로 다듬어놓은 조경이다. 쉬어가기 좋은 자리에는 어김없다. 피서객들이 앉아 신선놀음중이다. 유구한 세월, 더위를 피하려는 이들이 반복해온 행동 패턴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소리가 난다는 선유구곡 난생뢰 주변으로 피서객들이 자리잡고 앉아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만물이 소생하는 소리가 난다는 선유구곡 난생뢰 주변으로 피서객들이 자리잡고 앉아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또 다른 패턴으로 '각명(刻銘)'이 있다. 기세등등하던 이들은 암벽에 길이길이 이름을 새겼다. 요즘의 기념식수와 닮았다. 구한말까지는 음각으로 이름을 새겨놓는 게 통상적인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이름을 남기려 했다.

벼슬을 마다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는 선비,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벼슬아치, 주변 동네를 덕으로 다스렸다는 사또나리의 이름이 슬몃슬몃 또는 큼직큼직 쓰였다. 안타깝게도 후세는 그저 '이거 누고?'에서 그친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는 의미보다 보기 흉하다는 간접 표현이다. 의도와 풀이가 많이도 동떨어졌다.

선유구곡의 끝에 도암 이재(1680~1746)를 기리는 학천정이 있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도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06년 세워진 이곳 앞에 이완용이 새긴 '학천(鶴天)'이라는 글씨가 있다. 선조인 이재의 사당 앞에 글을 새긴 것이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도암 이재(1680~1746)를 기리는 학천정 앞으로 선유동계곡이 흐르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조선 영조 때 학자인 도암 이재(1680~1746)를 기리는 학천정 앞으로 선유동계곡이 흐르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굳이 이름을 새기지 않아도 온 국민이 다 알고, '국사'라는 과목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억될 이름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우려 했는지 '완'과 '용'이 거의 사라져 잘 보이지 않는다.

학천정 앞에 이완용이 새긴 '학천(鶴天)'이라는 글씨가 있다. '완'이 겨우 보이고 '용'은 거의 사라져 잘 보이지 않는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학천정 앞에 이완용이 새긴 '학천(鶴天)'이라는 글씨가 있다. '완'이 겨우 보이고 '용'은 거의 사라져 잘 보이지 않는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선비문화라는 구곡이 긍정적 이야기만 간직한 게 아니다. 역사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지만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문구도 간혹 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2014년 구곡 중에서 처음으로 명승(제110호)으로 지정된 충북 괴산의 화양계곡 얘기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암각한 '大明天地 崇禎日月'란 문구가 있다. '하늘과 땅은 명나라의 것이고 해와 달도 숭정황제의 것'이라고 풀이한다. '사대주의' 외에 무엇이라 해석하는지 후세는 알지 못한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옥석대의 모습.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옥석대는 봉암용곡의 일부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옥석대의 모습.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옥석대는 봉암용곡의 일부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희양산과 봉암용곡

희양산 봉암사에 계곡이 있다.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는 계곡이다. 봉황 같은 바위산에 용 같은 계곡이 흐른다는 말이다.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옥석대와 최치원이 친필을 새겼다는 백운대(白雲臺) 등 비경이 일품이다.

그런데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이 희양산이다. 독특하다. 동쪽, 서쪽, 남쪽 3면이 화강암 암벽 돌산이다. 화강암 성질을 못 이겨 빛을 반사한다. 노을이 지면 산은 붉어진다. 천년고찰 봉암사가 안겨 있어 신비감은 배가된다. 하물며 봉암사는 1년에 한 차례, '부처님오신날'에만 열리니 말이다. 1982년 6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면서다.

따라서 봉암용곡도 쉽게 못 보긴 마찬가지다. 실수를 가장해 한 번쯤 또 들러보고 싶지만 등산로 검색이 무소용이다. 희양산 등반코스 어딘가에 이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을 법하지만 단호하게도 '없다'.

희양산에 안긴 봉암사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자연미를 물씬 풍긴다. 봉암사 금색전 앞에 보물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희양산에 안긴 봉암사는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자연미를 물씬 풍긴다. 봉암사 금색전 앞에 보물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민들에게 캐물었다. 괴산 연풍에서 넘어오는 등산로가 3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풀이 많이 자라 길을 찾지 못할 거라고 했다. 입산 통제 기간도 있어 아예 넘어올 엄두를 못 낸다며 포기를 권하는 뉘앙스다.

실제로 이곳은 유명 포털사이트의 로드뷰에도 나오질 않는다. 오로지 방목된 흑염소들의 놀이터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깨끗이 보존되고 숲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야 제 모습을 유지한다.

그만큼 잘 보존돼온 곳이다. 스님들의 수양을 위한 최적의 공간에서 정신을 판다. 봉암사 옆으로 바투 흐르는 계곡과 숲으로 귀와 눈이 쏠린다. 물은 더없이 맑다. 물속으로 눈을 파묻듯 눈길이 빠져들어도 물고기는 보이질 않는다.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지 않는단 말은 속담용이 아니었다.

이곳저곳 돌렸던 눈과 귀를 수습하고서야, 스마트폰 카메라 기능을 실행하고서야 전화가 안 된다는 걸 안다. 와이파이는 고사하고 기지국이 없다. 서비스제한구역이다.

여름철 인기 피서지로 손꼽히는 문경 농암 쌍룡계곡에서는 휴가 막바지를 즐기려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여름철 인기 피서지로 손꼽히는 문경 농암 쌍룡계곡에서는 휴가 막바지를 즐기려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쌍룡계곡과 운달계곡

문경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계곡으로 쌍룡계곡과 운달계곡이 있다. 속리산에서 내린 물이 낙동강에 닿기 전 농암천 상류에 구불구불 흐르는 쌍룡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한 손에 꼽히는 명당이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계곡을 둘러싸 품었다. 늦여름까지 물놀이를 즐기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김용사 인근 운달계곡은 원시림이 볼 만하다. 한여름에도 손을 담그면 얼음처럼 차가워 '냉골'이라고 불리지만 진국은 대낮에도 하늘을 가리듯 빽빽이 들어선 숲이다. 얼음 같은 물속에 발을 담그고 하늘을 뒤덮은 숲의 바람을 맞고 있으면 뼛속까지 서늘해진다. 수령 300년이 넘는 전나무 숲속에는 군데군데 천수를 다한 고목들이 조각품처럼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김용사는 산지 지형을 따라 석축을 쌓아 건립한 사찰이다. 특히 고승의 진영이 담긴 영정, 동물 그림의 병풍, 300년 된 해우소, 후불탱화 등은 운달계곡을 찾는 관광객이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문경 선유구곡 아홉구비 별빛기행

조선시대 서원과 함께 유교문화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구곡문화를 활용한 유료 문화관광 프로그램이 진행중이다. 유학자들이 수양 공간을 마련한 구곡원림이 전국 160여 곳에 산재해 있는데 이 중 43곳이 경북에 있고 문경에는 석문구곡, 선유구곡, 화지구곡, 쌍룡구곡, 청대구곡, 산양구곡, 병천구곡, 선유칠곡 등 8곳이 있다.

선유구곡은 '문경 선유구곡 아홉구비 별빛기행'의 무대다. 운강이강년기념관 앞에서부터 학천정 앞까지 3km정도 구곡을 탐방한다. 1만원의 참가비로 여럿이 함께 구곡을 트래킹한다. 보물 찾기, 휘호 쓰기, 3행시 짓기, 소원지 쓰기, 사랑하는 사람 발 씻겨 주기, 별 따기 명랑운동회 등이 준비돼 있다. 별빛기행은 이달 31일, 다음 달 28일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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