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강하게 사는 비결

박산근 지국장은 지난 50년 간 직접 신문을 배달했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박산근 지국장은 지난 50년 간 직접 신문을 배달했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경북 청도군의 작은 마을, 이서면에 사는 박산근(90) 씨에게는 봉사왕, 2개국어 능통자, 대한민국 최고령 이발사 등 따라다니는 타이틀이 많다. 박 씨는 1930년생으로 올해 아흔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20년은 젊게 볼 정도로 혈색이 좋다. 젊음을 유지하는 노인에게는 나름의 비결이 있겠지만 박 씨가 전하는 건강유지법은 아주 간단했다. 젊음에 집착하기보다는 건강한 오늘에 집중하는 것이다.

 

▶쉬지 않는 노인

박산근 씨가 운영하는 '학산이용소' 한 편에는 오늘 배달된 신문 한 부가 놓여 있었다. "매일 새벽 제가 배달하던 신문이 50부씩 놓여있던 자리인데 지난주부터는 한 부씩 받아봅니다. 아침에 한 시간 잠을 더 자니까 몸이 뻐근하네요." 박 씨는 지난 50년 동안 매일신문사 청도군 이서지국장을 지내면서 이서 전역으로 직접 신문을 배달했다. 그는 4월 1일 자로 이서 지국장직을 지인에게 물려주고, 운영하던 이발소도 잠시 쉬기로 결심했다. 2주 전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던 중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면서 거동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 박 씨가 이제야 휴식기를 가진다고 안도했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 씨는 예전부터 노인대학부터 봉사 활동까지 몸이 불편해지더라도 지속할 수 있는 야외 활동을 머릿속에 구상해 놓고 있었다. "노인이 가만히 있으면 늙습니다. 이 나이에 회춘을 바라겠습니까? 끝까지 건강하게 살려고 일하고 움직이는 거지요."

격동기를 보낸 이 시대의 기성세대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박 씨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제시대와 6.25전쟁,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노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일본에서의 유년 시절

박 씨는 일본 도쿠야마시에서 태어났다.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16년 간 현지에 살면서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녔다. 그의 유년시절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할 정도로 소중하다. 여전히 학창시절 친구 이름을 줄줄 꿴다. 공부를 잘하고 적극적인 성격 덕분에 줄 곳 급장을 도맡았다. 학생부에는 '조선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은 박 씨를 차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력은 배신하는 법이 없다며 근면 성실한 제자를 아껴주었다. 일본을 떠날 때도 선생님은 박 씨에게 어떤 환경에서든 열심히 살 것을 당부했다. 해방 후 한국으로 들어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한국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생계를 떠맡으면서도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박 씨는 70년 간 이발사로, 50년간 신문 지국장으로 일하면서 동생들을 각각 고려대, 숙명여대에 입학시키고, 자식 6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박 씨는 일흔이 훌쩍 넘어 은사와 조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청도로 돌아온 후 주변 사람들은 동창회라느니 동문 모임을 갖는데 혼자 '적'이 없어 외로웠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한국으로 온 직후 생계를 책임지느라 학교 갈 기회도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큰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 모교를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친구들은 일찍 죽거나 도쿠야마를 떠났지만 아흔이 넘은 담임선생님은 만날 수 있었다. 박 씨는 재작년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16년 간 안부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박산근 지국장이 사용하는 이용기구에는 역사가 담겨져 있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박산근 지국장이 사용하는 이용기구에는 역사가 담겨져 있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이발사 그리고 신문배달

박 씨는 우연한 기회로 이발사가 되었다. 스무 살쯤 되면 집안 생계를 책임지던 시절,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에 청도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 막연하던 찰나 이발소에서 일본어가 유창한 종업원을 만났다. "조선말을 못 해도 이발사는 할 수 있어." 먹고살기 위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3년 견습생을 거쳐 자격증 시험을 치러 갔는데 조선말을 몰라 답안을 적어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실기시험 성적이 좋았고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심사관이 있어 일본어로 답안을 적어내 자격증을 땄다.

이후 박 씨는 손님과 대화하면서 우리말은 늘었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접한 것이 신문이다. 당시만 해도 신문에 한자어가 반절 이상 되어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골에서 세상 소식을 접하며 정세도 알 수 있고 한글 공부도 되는 신문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69년, 그는 매일신문 청도군 이서 지국장을 맡았다.

 

▶그때 그 시절

열심히 사는 사람만 살아남는 시절이었다. '학산이용소'가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수도가 없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손님 머리를 감겼고, 전기가 없어 불에 달군 불고데기를 썼다. 6~70년대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수확 철에는 쌀로 이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미용실이 없던 시절, 바가지 머리로 자르던 여학생도 시골에선 이발소를 찾았다. 점차 손님이 늘어나면서 직원도 3명으로 늘어나고 현재 위치로 건물을 지어 이발소를 이전했다.

새로 지은 이발소에 공간이 남아 세를 줬는데 신문보급소가 들어왔다. 오 년 정도 지났을 때 지국장이 이사를 간다고 했다. "항상 신문이 수북히 쌓여 있던 곳인데 없어진다고 하니 아쉬워 제가 신문보급소를 맡겠다고 했습니다. 청도로 와서 일만 하느라 바깥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적었는데 신문 배달을 하면 사람도 두루두루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발소 일로 바쁜 와중에도 신문 지국장이 되어 직접 배달을 했다. 매일신문이 석간일 때는 직원들에게 이발소를 맡겨놓고 신문 배달을 돌며 동네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소식을 전하며 친해졌다.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는 우리말에 서툴렀고, 형제와 자식을 뒷바라지하느라 사람과 교류할 기회가 적었는데 새삼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봉사 활동도 시작했다. 머리 깎을 돈이 없어 지저분하게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이발소로 불러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박 씨의 손을 거쳐 간 학생이 수만 명이 된다. "제가 부모님과 형제 다섯 명의 가장이 되다 보니 그 시절 머리 깎는 데까지 돈 쓸 여력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지요. 적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발하는 건데 그때는 봉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박 씨의 선행은 청도 밖으로 알려져 경상북도와 청도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표창장도 수여되었다. 이의근 도지사가 현직에 있을 때는 수차례 학산이용소를 찾아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건강한 100세를 위해

박씨는 오늘이 곧 어제이고 내일이라고 말한다. 70년 넘게 이발사, 봉사자, 이서 지국장으로 살아온 과거도 건강한 오늘을 만들어 낸 하루하루이다. 그는 다친 다리 때문에 비록 거동은 불편해도 활동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오래 전부터 몸이 불편해 지더라도 실천할 계획들을 모두 준비해 두었다. 아침운동과 목욕, 노인대학을 다니고 이발 봉사까지 그의 일상에는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입원해 편하게 치료를 받으라고 하지만 박 씨는 일상생활을 하며 통원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노인은 계속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야 건강이 유지됩니다. 가만히 앉아서 연금 날짜만 기다리고 자식 보호를 받다 보면 진짜 노인이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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