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6>-엄창석

계승은 길가에 쌓인 볏단 옆에 바싹 붙었다. 곱사등이가 몸을 감춘 골목을 주시했다. 초가 앞, 싸리나무 울타리 틈으로 그림자가 얼씬거리는 것 같았다. 낮은 싸리 울타리는 겨우 가슴께에 미치는 높이지만 곱사등이라면 몸을 다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왜 뒤쫓고 있지?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었다. 대구에 와서 하루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다. 밤새도록 성돌을 파고 나서 일행과 헤어졌을 뿐이었다. 계승은 발소리를 죽이고 울타리로 다가섰다. 곡식을 널었을 수수돗자리가 담장에 죽 세워져 있고 땅에 떨어진 홍시를 핥아먹는 개 한 마리만 보였다. 곱사등이가 개로 변했나.

계승은 의아해하면서 큰시장으로 내쳐걸었다. 애란의 집은 큰시장이 끝나는 벌판 초입에 있었다. 큰시장으로 가려면 개울이 가로막고 있어서 서문(西門) 앞에 있는 달서교로 에둘러야 했다. 왠지 뒤가 신경 쓰였지만 완연한 풍경이 그의 마음을 녹록하게 했다.

이쪽 성벽 바깥은 7년 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일인 상점이 어쩌다 보였으나 낮은 초가들이 연해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성벽 아래에 붙어 햇살을 쬐었고, 크고 작은 솥단지를 펼치고 그 사이에 앉아 상인들이 장죽을 빠는 것도 흔히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개울 둑으로 머리에 물동이를 인 여자들이 마주 걸어왔다. 깡동한 저고리가 겨우 명치에 닿아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물동이를 잡으면 젖가슴이 활짝 드러났다. 꽤 젊은 여자들은 몸의 탄력으로 통통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물동이에 균형을 재는 게, 느닷없이 낯설어 보일 지경이었다. 초량에서는 여자들이 그러고 다니지 않는다. 그 모습이 뜨악하고도 친근해서 여자들 속에 애란이 있지 않을까 싶어, 언뜻언뜻 돌아보았다.

읍성의 서문 밖은 옹기장수들이 북적였다. 성 안에서 보면 큰시장으로 가는 길목이라 언제나 상인들로 붐볐다. 높은 성곽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그 둘레를 따라 맑은 개울이 흘렀다. 개울 양쪽으로 초가와 기와집이 마구 뒤섞이고 높은 서양식 건물도 하나씩 박힌 이곳엔 부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다. 계승은 서문 밖 다리인 달서교를 건너 큰시장으로 가지 않고 계속 개울가를 걸었다. 물고기가 그려진 돌이 있나 봐야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난 듯 프랑스 성모당으로 향했다.

빽빽이 들어차 있는 초가 위로 거대하게 솟은 붉은 벽돌 건물이 보였다. 계승은 깜짝 놀랐다. 좀 전 곱사등이가 뒤를 쫓고 있다고 여겼던 자리에서도 하늘 높이 솟은 건물이 보였었다. 우람한 건물은 성당이었다. 예전에 루르드 성당이라고 부르던 십자형태의 기와 성모당이 사라지고, 거기에 두 개의 까마득히 높은 첨탑이 마치 구름을 꿰뚫을 듯이 하늘로 뻗어 있었다. 초량에서도 보지 못했던 우람한 건물이었다.

나중에 기와 성모당에 불이 나 새로 지은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정작 계승이 찾는 것은 기와 성모당의 우측에 있던 해성재였다. 기와 성모당과 함께 지은, 7년 전에도 있었던 2층으로 된 특이한 기와집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계승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반갑게 서 있었다. 애란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때 애란은 열한 살 소녀였다. 반반한 집 자제들은 향교나 서당으로 갔고 시장통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해성재에 보냈다. 대개가 성모당에 미사를 보러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계집아이도 더러 끼어 있었다.

해성재에서는 사각형이나 원 같은 도형의 넓이, 다섯 선에 그려놓은 음표, 영어나 불어를 조금씩 공부했다. 애란은 옷을 자랑하러 오는 건지 뽀얀 무명옷을 입고 맨 앞줄에 앉아 있곤 했다. 여느 계집애와 다르게 웃옷이 허리를 가릴 만큼 길었다. 어떤 옷은 봉선화물이나 흙물을 들여서 멋을 냈고, 심지어 베틀로 10새까지 승(升)을 돌려 옥양목처럼 산뜻하게 지어 입었다. 베 짜는 솜씨가 귀신같지만 옛날 같으면 궁둥이를 벗겨 곤장 맞을 짓이었다. 신분에 따라 승을 차이 나게 입어야 하는 것이다.

계승은 해성재 마루 밑, 댓돌 위에 흩어진 아이들의 짚신 수십 켤레를 보자 문득 애란의 얼굴이 가까이 떠올랐다. 그토록 기억나지 않았던 애란의 얼굴이.

방실방실 웃으면 눈이 휘고 뺨이 오목해졌지. 밤새 뭘 하는지 삼각형의 넓이를 계산하다가 앞에 있는 신부님에게 꾸벅꾸벅 절을 하고. 어떤 땐 잠에서 깨질 않아 집까지 업어다주었어. 계승은 손바닥을 펴고 그때 애란의 엉덩이를 받쳤던 감촉을 잠시 기억했다.

해성재 이층 방에서 함께 부르던 서양 노래가 뭐였더라. 둘이서 텅 빈 성모당에 몰래 들어가기도 했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을 네 개의 무릎 위에 놓고 "애란아 우리 혼인할까?" 입을 뗐지. 혼인을 못할 나이도 아니었다. 애란이 뭐라고 대꾸더라.

"엄마가 나보고 기생 하래요."

"뭐, 기생?"

"내가 자꾸 재수없게 헤실헤실 웃는다면서요."

빈궁한 집에서 딸에게 밥 굶기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보내는 게 기생이었다. 잘 웃는다고 기생으로 보낸다는 건, 그러니까 흰소리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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