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입법이라는 이름의 독재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야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과 미래통합당 김도읍 의원이 최재형 감사원장의 이석을 두고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야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과 미래통합당 김도읍 의원이 최재형 감사원장의 이석을 두고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해용 논설실장 김해용 논설실장

'이물지'라는 중국 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동북 지방의 황량한 땅에 '해치'라는 뿔 하나 달린 짐승이 산다. 해치는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

해치는 우리나라에 '해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해치는 '법'(法)이라는 한자와 관련이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법의 원래 글자는 '灋'(법)인데 여기에 들어 있는 '치'(廌)가 바로 해치를 의미한다. 법(灋)을 파자(破字)해 보면 '해치가 물처럼 고요하게 판단해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자를 뿔로 들이받아 밀어낸다'(水+廌+去)는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법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법은 '만인 대 만인' 투쟁의 장이 될 수 있는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시켜 준다. 하지만 법이 많다고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강제력 있는 사회적 규범으로서 법은 개인과 집단에 대한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법이 많은 사회는 규제도 많다. 하지만 사람들은 '법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사회적 공분을 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관련 법이 없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라는 말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법 만능주의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입법 발의 건수가 국회의원 평가 잣대가 되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늘도 국회의원들은 새로운 법을 만드는 데 열심이다. 특히 21대 국회 들어서는 무엇에 홀린 듯 법안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21대 국회는 임기 시작 석 달 만에 3천여 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원(300명) 1인당 10건꼴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현행 법률 총건수 1천480개의 2배나 되는 수치를 석 달 만에 발의했으니 의욕은 가상하다 하겠다.

문제는 졸속 발의 및 심의다. 집권 여당은 176석 거대 의석을 무기로 쟁점 법안들을 대거 통과시키고 있다.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있다는 자신감 아래 법안 심사 소위조차 열지 않았다. 부동산 관련 법 등 사회적 이해가 첨예하게 맞선 법안들과 이념 편향적 법안들마저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소급 입법 같은 위헌적 내용이 들어 있는 법안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사회적 논란과 이해 충돌을 부르며 부작용이 예상되는 법안들이 무더기로 통과되는데도 야당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31일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이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2명의 여당 의원이 유사시 의료인들을 북한에 차출할 수 있도록 하는 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터져 나왔다. 사실상 의료인을 강제 징용하는 내용이라는 논란이 거세자 해당 의원은 "우려의 시각이 있다면 당연히 수정 또는 삭제 가능성이 있다"는 해명을 내놨다. 이런 섣부름과 무책임함도 없다.

잘못 만든 법은 생사람을 잡는다. 법률을 제정할 때 숙고에 숙고를 거쳐야 하는 이유다. 법 취지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 부작용은 없는지 각계 의견을 들어보고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무더기로 통과되는 법안 가운데 특정 집단만의 이익을 강화하고 이념에 부응하는 이른바 '청부 입법'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입법 독재마저 우려해야 할 판이다. 자신의 신념과 선택이 무결(無缺)하다는 오만함으로 법을 마구 만들다가는 결국 '승자의 저주'에 걸려들 수 있다. 차라리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의원님들, 예전에 그랬듯이 일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시고 세비나 타시는 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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