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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국민 자존심은 무너진다

정창룡 논설주간
정창룡 논설주간

'한강의 기적'이란 말에 익숙했던 탓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8·15 기념사에서 '동아시아의 기적'을 말했을 때 뜨악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광복 후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야기했으니, 당연히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기대는 어긋났다. 문 대통령은 끝까지 '한강의 기적'을 언급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말했지만 누가 그 주역이었는지도 침묵했다.

'한강의 기적'은 폐기할 수 없는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다. 폐허가 된 전쟁터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주도형 경제로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기적을 일군 것이 '한강의 기적'이다. 세계가 한국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경험한 일이다. 문 대통령이 말한 세계 6대 제조강국, 6대 수출강국의 원천 역시 '한강의 기적'이다. 그러지 못했다면 한국은 여전히 북한처럼 아직도 '이밥에 고깃국' 타령이나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강의 기적'은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치환 불가한 한국민의 자존심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나라라는 지표는 차고 넘친다. 한국은 지난해 세계에서 7번째로 30-50클럽(소득 3만달러, 인구 5천만 이상 국가)에 들었다. 지난해 IMF가 정한 세계 GDP 순위에선 11위에 올라 있다. 세계은행의 순위론 12위다. 세계 6위 수출대국이다. 국토 면적 순위 세계 109위, 인구 기준 27위 나라로는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요즘 K팝에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드라마, 영화로 시작한 한류는 이제 세계 문화로 확산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통해 국력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을 리 없다. 국력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과거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국민 자긍심은 크고 자존심은 세졌다. 국민들은 어찌하면 더 강한 나라, 더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 대한민국이 마구 흔들린다. '한강의 기적' 이후 키우고 지켜온 국민 자존심이 송두리째 위협받고 있다. 꿈은 멀어지고 네 편, 내 편 갈려 서로 적개심만 불태운다. 한국이 영락없는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대일 경제 전쟁이 벌어지자 문 대통령은 남북 경협으로 일본을 단숨에 넘겠다며 '평화경제' 카드를 내밀었다. 한반도는 세계 1·2·3위의 경제 대국인 미국과 중국, 일본의 각축장이다. 한국은 IMF 기준 11위 경제국이고 북한은 98위까지 매긴 IMF 순위 밖에 있다. 그런 집단과 협력해 극일하겠다는 발상이 국민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현실은 북한이 잘 짚고 있다. 북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仰天大笑·하늘을 보고 크게 웃음)할 노릇"이라 했다.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며 콧방귀를 뀌고 있다. 그들 앞에 문 대통령은 '겁먹은 개'고,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도 못하는 대통령은 비굴하고, 국민들은 비참하다. 국제적으로 이리저리 차이고 조롱당하면서도 말로 이루는 '평화'에 흠이 날까 집착하는 모습에 국민 자존심은 여지없이 또 무너진다.

안보 경제가 모두 위기에 빠진 요즘 한국을 구한말에 견줘 걱정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당시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조선을 '연작처당'(燕雀處堂)에 빗댔다. 사람의 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와 참새가 집이 불타 저 죽을 줄도 모르고 재잘거린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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