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비목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가곡 비목(碑木)의 노랫말은 읽는 것만으로도 비감이 엄습한다. 1960년대 중반, 비무장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작사가가 무명 용사의 돌무덤 위에 선 여윈 십자나무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잡초 우거진 적막한 산모퉁이에 호젓이 남은 이름 모를 비목.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젊은 넋의 표상. 그것은 소리없는 통곡이었다. 노랫말에 실은 곡조는 단조 특유의 애조와 우수의 서정이 공감을 일으키며 비목을 국민 가곡으로 부상시켰다. 참혹한 전쟁이 파생한 비목의 처연함은 우리의 일상에도 남아 있다. 소년병의 눈물이 그것이다.

소년병(少年兵)은 6·25전쟁 당시 학도병 중에서도 병역의무가 없었던 14~17세의 지원병이었다. 훈련도 받지 못하고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전선으로 나갔던 홍안(紅顔)의 병사들. 달빛 교교한 초소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눈시울을 붉히고, 얼떨결에 총으로 쏜 인민군의 앳된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 한쪽이 아려오던 사춘기 소년들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소년병들이 숱하게 참전했다. 수천 명이 산화했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소년병들도 이제는 백발이 되었다. 이들의 생전 소망은 오로지 '역사와 국민이 소년병을 기억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순국소년병위령제'에서 소년병 전우회장은 "아직도 국가가 소년병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소년병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떠날 날이 머잖은 백발의 노병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나. 비목 작사가의 넋두리처럼 그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 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경제적·민주적 호사(豪奢)를 누리는 게 아닌가. 소년병의 눈물도 여울져 흐르는 6월 산하의 끝자락, 평화를 구걸하는 남북관계의 얄궂은 운명 속에 비목은 정녕 사위어가는 호곡성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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