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자결로 일제 치욕 씻은 임청각의 아들

김교성 경북본사장 김교성 경북본사장

매일신문 경북본사 인근에 안동 임청각이 자리한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몸부림이 태동한 곳이다. 임청각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선생은 99칸 보금자리를 팔아 중국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다.

임청각은 우리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곳이다. 임청각이 마련한 방명록을 보면 전국에서 꾸준히 많은 국민이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버스 대절한 관광객들이 들르는 코스가 됐으며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손을 잡고 애국 교육을 하는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

석주 선생 일가가 중심이 된 임청각 독립운동은 지금의 안동댐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처럼 거침없었다. 독립운동 서훈자 11명을 배출한 임청각의 독립운동은 석주 선생 일대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임청각 여성들이 조명받기도 했다.

조국 광복을 이끈 임청각 사람들에 대한 글과 자료를 보면서 어느 날부터 독립을 앞두고 자결한 석주의 아들 이준형 선생을 주목하게 됐다. 이준형 선생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이준형 선생의 삶을 추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단했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다.

석주 선생이 1911년 54세에 일가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할 때 이준형은 36세였다. 사실상 이준형은 군자금 마련 등 석주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가족 살림을 책임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선부군유사'(이상룡의 일대기)는 생생한 독립운동사로 남아 있다.

이준형은 1932년 석주 선생이 길림성 서란현에서 서거한 뒤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다. 하지만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임청각 종가를 보존하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일제의 감시에다 중앙선철도 건설로 종가 입구 30여 칸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된 이준형은 무너진 자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1942년 9월 이 선생은 지금 안동댐 수몰 지역이 된 월곡면 도곡리 범계정에서 동맥을 끊어 자결했다. 67세 생일날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아들 이병화에게 가족 살림을 당부한 뒤 쓴 이준형 선생의 유서는 피가 묻은 채로 전해진다. 장렬했다는 표현이 맞을까. 일제의 끈질긴 협박과 변절의 요구에 맞선 이준형 선생의 비분강개함이 묻어난다. 이런 아픔 덕분에 우리는 독립의 염원을 이뤘고 임청각은 일부 훼손됐지만 고성 이씨의 후손이 보존하고 있다.

임청각이 원래대로 보존된다고 하니 석주 선생 일가의 독립운동은 더 빛을 발할 것이다. 고성 이씨 21대 종손인 이창수 씨는 "집안 어른들의 희생정신이 나라 사랑 정신으로 이어지면서 임청각이 '교육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재현되고 있는데 현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특성상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우리는 분단과 6·25전쟁을 겪었고, 오랜 북한의 위협에다 최근에는 좌우 이념 갈등으로 내홍에 빠져 있다. 임청각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눈앞 이익에 쫓겨 하루살이를 하는 게 아닌가. 이 시대의 대의가 무엇인가. 나라와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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