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규제 샌드박스

서종철 논설위원 서종철 논설위원

한국인은 빠르다. 정확히 말해 성미가 급(急)한 편이다. 조급함으로 해석될 만큼 '빠름'을 미덕으로 친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는 한국인과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한국처럼 일처리가 빠른 나라는 드물다'며 이구동성이다. 급하면 정확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인은 재바르고 정확하며 서비스 정신까지 갖췄으니 단점을 충분히 덮을만하다.

독일에서 40년 넘게 산 동포로부터 "참고 기다리는데 익숙해지면 독일에서 절반은 적응한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길어야 이틀이면 개통될 인터넷이 2~3주가 걸리고, 주문한 가구가 배달되기까지 2달이 소요되면 '문화 충격'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거기서는 기다리는 게 당연하고 정상이다. 느리지만 규정대로 바르게 처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쾌속' 시스템을 자랑하는 한국에서도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 행정관청의 인허가 관련 사항이다. 업무 처리에 걸리는 최대 소요 시간이 규정돼 있으나 시간표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 손끝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엿장수 마음이다. 정권마다 행정 업무 쇄신에 매달렸지만 소위 '철밥통' 위세를 꺾지 못했다.

이는 우리 공직 사회에 마치 DNA처럼 대물림하는 기질 때문은 아닐까 싶다. 공무원 시험에 붙는 즉시 '괴상한' 습성이 발동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말썽 나거나 책임질 일은 피한다' '규정에 벗어나면 손사래 치고, 규정이 없으면 끌어대고' '모든 길을 로마로, 맡은 일은 내 손으로'라는 특유의 심리가 각종 인허가에 개입된다.

기업인들이 규제 완화를 거듭 요구하자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신청을 받았는데 도심 수소충전소 등 4건이 1호 사업에 뽑혔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일정기간 아무런 규제없이 허가하는 제도로 이번에 실증특례나 임시허가가 주어졌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언제 규제의 작두가 설컹 떨어질지 몰라서다. 만약 특유의 '쾌속' 시스템이 각종 인허가 규제에도 적용됐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더는 작은 이해가 혁신을 죽이고 창의를 질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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