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물러남의 리더십

이춘수 편집부국장 이춘수 편집부국장

지난 2월 초 영국에서 한 고위 관료의 사임이 화제가 됐다. 특별히 잘못된 정책을 입안한 것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내세운 사임 이유는 상원 출석에 몇 분가량 지각했다는 것.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마이클 베이츠 영국 국제개발부 부장관은 상원 질의에 참석하기로 예정됐었다. 베이츠 부장관은 질의에 몇 분가량 지각했다. 통상적으로 사과 정도로 끝날 일이었지만 베이츠 부장관의 자세는 달랐다. 그는 "아주 중요한 질의의 첫 부분에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결례를 범하게 된 데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즉각 사임안을 총리에게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베이츠 부장관의 사임은 실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공직자로서의 처신에 관한 한 결벽증에 다름없다.

20세기 최고의 리더로 불리는 잭 웰치는 1981년 제너럴일렉트릭(GE)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해 과감한 구조조정과 혁신을 통해 회사에 만연한 관료주의를 청산했다. 또한 사업 다각화를 꾀하면서 20년 동안 회사의 가치를 무려 4천% 이상 성장시킨 후 2001년 은퇴했다. 웰치는 은퇴를 5년이나 앞두고 GE를 이끌 후계자를 기르는 '승계계획'(succession plan)을 가동했다. GE는 그의 은퇴에 맞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은퇴 패키지(총 4억1천700만달러)로 회사를 발전시킨 공로에 보답했다.

장수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을 보면 그 회사의 CEO들은 가장 잘나갈 때, 가장 권위 있을 때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경우가 많았다.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혁신을 이루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직을 던졌다. 나아가 그들은 시대변화에 맞춰 자신의 리더십을 허물게 하면서 변화와 혁신을 주문했다.

하지만 정점에 있을 때 리더가 물러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룬 결과와 자리를 뒤로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이 억울하고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았던 곳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일터로 남기를 바란다면 아쉬울 때 물러나야 한다.

김범일 전 대구시장과 우동기 현 대구시교육감은 3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두 분이 3선 욕심을 냈으면 아마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김 전 시장은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명예직 자리도 사양하며 여유롭게 자연인의 삶을 즐기고 있다. 우 교육감은 3선 불출마 선언 후 온갖 루머에 시달리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모두 웃으며 얘기할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며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우 교육감은 3선을 권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급변하는 교육상황에 대구 교육이 정체하지 않으려면 새 인물이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구은행이 요즘 꽤 시끄럽다. 수장의 퇴진을 두고서다. 박인규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이 지난 23일 주주총회에서 은행장 사퇴를 선언했다.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직원 채용비리, 비자금 조성 등과 관련된 의혹이 단초가 됐다. 이 의혹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제기된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 박 회장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대구은행은 대구경북 시도민의 무한애정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시도민의 은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도민이 키워준 대구은행의 미래를 위해 이제 박 회장이 결단할 때가 왔다. 박 회장은 상반기 중으로 금융지주 회장도 내놓겠다고 했다. 시도민들은 박 회장 개인의 인연보다는 대구은행을 진정 도약시킬 수 있는 능력과 비전, 인품을 가진 후임자에게 물려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 사람이 어느 때 나아가고, 어느 때 물러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물러나야 할 때 결단 못 하는 리더는 그 기업과 조직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신뢰 토양을 무너뜨린다. 리더십의 완성은 잘 물러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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