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대선을 보는 또 다른 시각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니 오래전에 맛보았던 낭패감이 다시 떠오른다. 누가 당선될지도 모르면서, 기자랍시고 함부로 떠들던 그 치기와 미숙함을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진다.

2002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퇴직한 선배 언론인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분이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 대선에 누가 당선될 것 같은가?" 필자는 '왜 이렇게 뻔한 질문을 하시나'는 생각에 말장난이나 유머를 날리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멈칫했다. 그러면서 "해보나 마나 같은데요. 이회창 씨가 되겠지요"라며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

대선이 서너 달 남은 때였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경쟁은 거인과 코흘리개 아이의 싸움처럼 보였다. 이회창 씨는 이미 대통령이 된 듯 선거일만 손꼽아 기다렸고, 노무현 씨는 김대중 대통령 아들의 비리사건, 지방선거의 참패에다 당내 내분까지 겹쳐 전전긍긍했다. 여론조사 예측도 이회창의 승리 일색이었다. 이런 배경을 아는 필자의 대답은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선배 언론인의 예측은 달랐다. "내 판단으로는 노무현 씨가 이길 거야."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분의 말씀은 이랬다. "월드컵 때 붉은악마를 떠올려봐. 그 젊음의 에너지와 열정이 이제 어디로 표출될지 상상해보게."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해 투표소에는 젊은 유권자들이 줄을 서 기다릴 정도였으니 그분의 예측은 너무나 정확했다. 노무현의 당선은 기적이 아니었고,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언론에선 노무현의 매력이나 이회창의 실책이 승부를 가른 요인이었다고 떠들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본질은 아니었다. 그해 월드컵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젊음의 열정과 에너지는 기록에도, 통계에도, 수치에도 잡히지 않지만, 한국 정치의 향방은 물론이고 국가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다. '젊은이의 열정은 거칠고 미숙한 듯하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다.

흥미로운 사실은 '젊은 세대의 반란'이 15년을 주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2002년 월드컵, 2017년 촛불집회는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씨를 당선시켰고, 2002년 16대 대선은 노무현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났다.

이번 대선에서 젊은 세대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촛불집회에 모인 젊은 층의 열정을 떠올리면 그 해답은 분명하다. 젊은 세대는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련하는 기회를 잡았다.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이 현실 정치에 눈뜨면서 적극적인 투표 행사층으로 바뀔 것이다. 이번 대선은 젊은 세대의 성향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나이 드신 유권자에게는 기분 나쁜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대선의 주연은 젊은 층이다. 젊은 표심이 움직이면 진보 색채의 후보 당선으로 이어질 테지만, 좋든 싫든 대한민국의 운명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

'15년 주기론'은 뜬금없는 논리지만, 대통령 선거 세 번 하고 나면 사회적인 격변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 모순과 병폐가 집적돼 있다가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후진적 구조를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결혼과 경제적 불평등에 고민하면서 극심한 좌절과 분노를 맛보고 있는 세대다. 촛불집회는 평화롭게 끝났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사정과 기득권층의 이기주의를 볼 때, 다음에는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차기 대통령은 젊은이의 분노와 좌절을 보듬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젊은 세대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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