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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사람 나이 50쯤이면

[춘추칼럼] 사람 나이 50쯤이면

사람이 나이 50살쯤이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자님은 사람의 나이 50을 일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셨다. 지천명이라? 공자님 당신께서 50 나이에 이르러 하늘의 명령, 하늘이 뜻을 헤아려 알게 됐다는 말씀이다.글쎄. 보통 인간들도 50쯤 나이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까? 어림없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오직 공자님이니까 그렇게 아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대놓고 자기 나이가 50이 됐으니 지천명의 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발 가운데 망발이다.나이 50과 관련 지어 또 생각나는 사람은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50세 이전까지는 아주 자유롭고 호기롭게 산 사람이었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것은 모두 누리며 산 사람이었다. 건강과 돈과 명예와 사랑이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모든 일을 가능한 일로 알고 살았던 톨스토이. 그는 50세에 이르러 자신의 인생을 스톱시켜 놓고 회심(回心)의 기회를 갖고 통렬히 반성하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 살았다 한다. 지금까지 산 인생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인생이었다면 그 이후의 인생은 남을 위한 인생이었다. 비로소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가 얻은 재화를 자기가 아닌 타인,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32년. 참으로 장한 인생이고 보통 사람은 꿈꾸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운 인생이다.인도 사람들은 또 어떻게 인생을 경영했을까? 인도의 힌두교에는 인생 4단계론이 있는데 25세까지를 학습기(學習期),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 50세를 넘어 75세까지를 임서기(林棲期), 75세가 넘으면 유랑기(流浪期)라 한다고 한다. 참 특별한 인생 경영이다. 어쨌든 인생살이에서 50살은 매우 중요한 나이이고 계기로 보인다. 50살이 돼 무언가 이전의 삶과 다르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보살핌이 있고 신의 도움이 큰 사람, 행운의 사람이라 하겠다.나의 생각은 그렇다. 사람이 비록 50살이 돼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 지어 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무언가는 좀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노력, 자기 삶의 족적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누구나 유소년기에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가족이 생기고 이웃이 생긴 뒤로는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살아 늙은 사람이 된다. 필경 그가 늙은 사람이 되어 신의 축복을 받고 선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시간이 허락되리라고 본다. 누군가의 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 독립된 한 개체로 살아가는 기간이 열리리라고 본다. 더욱 좋은 축복이 있고 신의 선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다시금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삶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 안에서 늙은 사람이 된 것이다.늙은 사람이 된 것도 커다란 은혜 입음이다. 그러므로 갚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눔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내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식을 나누고 내가 재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나눠야 한다. 그것만이 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누게 되면 늙은 사람의 한탄과 고독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늙어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젊은이 흉내를 내는 일이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다. 만족이 있어야 한다. 유지하려고 해야지 확장하려고 해서는 낭패다. 진정 그렇게 사는 것이 늙은 사람의 삶이고 또 그것이 늙은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는 좋은 길이다. 요즘 인생은 60부터다, 70부터다 하는 말은 지나친 억지다. 거짓말이다. 속지 말고 속이지 말 일이다. 나는 70살이 넘어서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을 알게 돼서 매우 기쁘다.

2020-09-17 14:30:00

[춘추칼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법

[춘추칼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법

지금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기차를 타고 '코로나'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다. 도착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암울한 나날이다. 잠시 출구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어두운 터널이 계속되고 있다. 모든 세대, 모든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답답한 심정만 토로할 따름이다. 남아 있는 것은 터널을 달리는 규정 속도와 안전 수칙뿐이다. 기차 객실을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고, 최소한의 이동만 가능하다. 객실에서 웃거나 떠들 수도 없고, 음식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은 높아지고, 감정은 날카롭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설프게 제안하거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모두의 견제를 받게 된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언제쯤이면 이 터널의 끝을 만날까?' 정도이다. 아무도 알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질문만 붙잡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더 큰 문제는 달리는 기차 안에도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상황에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누군가는 생존 자체가 위태롭고, 답답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도 있다.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삶의 질적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터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편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우리의 상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우두커니'라는 단어가 아닐까. '우두커니'라는 단어는 사전에 '넋이 나간 듯이 가만히 한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양'으로 정의되어 있다. 처음에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우두커니 있었다면, 지금은 우두커니 있는 모습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언제 나올지 모를 출구를 기다리면서 마냥 '우두커니' 있을 것인가. 혹여 지금 지나고 있는 터널의 끝을 만날 수 있겠지만, 만약 또 다른 터널이 그 앞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두커니'라는 단어를 만난 시를 읽어본다."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문학과지성사/1989)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널의 끝과 출구만 생각하고 기다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한 게 없으면 추억도 없다. 삶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지속가능성'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처음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임업 분야였다. '나무를 베는 만큼 나무를 심는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현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10년 후, 100년 후, 나아가 1천 년 후를 상상하는 일이다. 지금 모든 것이 멈추고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우리의 삶은 끝을 모르는 터널의 연속이다. 코로나라는 터널이 아니라도 원래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게 삶이다. 시인의 말처럼,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하자'. 우두커니 앉아 있지 말자. 일어나 걷자. 홀로, 같이 걷자. 서로 안부를 묻자. 더 많이 보고, 더 자주 듣고, 더 깊이 생각하자. 누군가는 터널을 탈출해야 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속지 말자. 터널 안이든 밖이든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자. 그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만약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10년 후, 100년 후, 1천 년 후 미래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2020-09-10 14:57:19

[춘추칼럼] '이낙연 정치'로 협치하고 혁신하라

[춘추칼럼] '이낙연 정치'로 협치하고 혁신하라

이낙연 국회의원이 8·29 전당대회에서 60.8%의 압도적 득표로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다. 결국 '어대낙'(어차피 당 대표는 이낙연) 이변은 없었다. 이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코로나 전쟁 승리, 국민의 삶 지키기, 코로나 이후 미래 준비, 통합의 정치, 혁신 가속화' 등 "5대 명령을 이행하는 데 역량을 쏟아 넣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시급한 건 "코로나19 극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대표에게는 이에 못지않은 중대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무엇보다 '이낙연 독자 정치'를 펼쳐야 한다. 핵심은 대통령과 당·청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한 '민주당 정부'는 사라지고 오직 청와대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청와대 정부'만 존재했다. 청와대는 민주당을 수직 통치했고, 민주당은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했으며 청와대가 집권당을 통해 국회를 지배하는 정치 적폐가 지속되었다. '엄중 낙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대표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역력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 통상 대통령과의 관계는 크게 일체화, 독자화, 차별화로 구별된다. 이 대표는 현직 대통령과 섣부른 차별화를 했다가 실패한 2002년 새천년민주당 이인제 후보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이 대표가 6개월 남짓한 임기 동안 대통령과 철저하게 일체화하면서 친문에 얹혀 가려고 한다면 이재명 경기지시와의 경쟁 구도에서 밀릴 수도 있다. 국민들은 '문재인 시즌 2'를 선호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범주류였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일체화되기보다는 독자화 노선을 걸으면서 성공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둘째, 인식의 대전환을 통해 '용기 있는 협치'를 실천해야 한다. 이 대표는 "원칙은 지키면서도 야당에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원칙 있는 협치'에 나서겠다"고 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친박 일색으로 망한 게 미래통합당인데, 민주당은 친문 일색으로,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칙 있는 협치"란 친문의 눈치를 보면서 야당이 협조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대표가 진정 통합 정치의 물꼬를 트기 위해선 야당과의 '닥치고 협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신의 지지층으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셋째, 시대정신에 맞는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 호남과 친문을 넘어 확장성을 확보해야 한다. 역대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는 예외 없이 자신이 추구하려는 가치를 통해 '이슈 파워'를 선점했다. 가령, 노무현 후보의 '특권과 차별이 없는 사람 사는 세상', 박근혜 후보의 '원칙과 신뢰' 등이 대표적이다. 김해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임기를 마치면서 "지도부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국민께 진솔하게 말씀드려야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문재인 정부와 여권 인사들에 대해 "남에 대한 비판은 잘하면서 남의 비판은 못 참는다"고 지적했다. 현 집권 여당이 안고 있는 거짓과 위선, 무능과 교만의 한계를 극복하고 향후 유력한 대권 후보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선 이 대표가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로 '정직과 소통'이 바람직할 것 같다. 이를 기반으로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넷째, 정책 성과를 통해 혁신의 가속화를 이뤄내야 한다. 집권당이 중심이 되어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효과가 없으면 혁신 성장으로, 수요 억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이 집값 폭등의 주범이라면 공급 확대 정책으로, 회전문 인사가 잘못되었으면 대탕평 인사로 기조와 방향을 바꾸어 성과를 내야 한다. 이 대표는 국무총리 시절 정책 세부 영역까지 관장한다고 '이테일'(이낙연+디테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의과대학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정책으로 촉발된 의료계 파업은 국회가 문제 해결에 나서고 협의체를 통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향후 정책을 추진하는 데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실용과 디테일로 성과를 내야 한다. 이것이 혁신이다.

2020-09-03 15:39:00

[춘추칼럼] 마당을 쓸었습니다

[춘추칼럼] 마당을 쓸었습니다

나는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로부터 별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학력이라야 고작 고등학교 졸업. 12년 동안 나를 특별하게 귀여워해 줬다든가 사랑해 준 선생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키가 작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미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그저 그런 아이였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른이 돼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한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름 아닌 김기평 선생님. 그분은 내 고등학교 시절인 공주사범학교 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분이다.1979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공주교육대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부터이다. 그 학교로 내가 갈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추천 덕분이다. 선생님은 당시 공주교육대학 교무과장 직책에 있으면서 내가 그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아주셨다.그로부터 40년 세월이다. 나는 선생님을 지근거리로 만나면서 인생 후반기에 많은 교훈을 얻었다. 먼저 온유한 성품이다. 선생님은 어떤 경우에도 말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든 겸허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분이었다. 몸에 밴 인품이었다.그다음은 호학(好學)과 성실함이었다. 선생님은 65세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뒤 26년 동안 혼자서 공부해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을 완역해 주해서를 출간하셨다. 인생 후반부의 삶과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실례다.그리고 무욕의 삶이다. 선생님은 식사나 일상생활, 대인관계에도 일말의 사심이 없었고 무엇이든지 줄여서 조그만 인생을 사시려고 애썼다. 그리고 부지런하셨다. 90대에 들어서 시력이 극도로 나빠지신 후에도 선생님은 하루하루 무언가를 하시면서 부지런히 사셨다.어쩌다 선생님 댁을 방문해 보면 무슨 일이든 일을 하고 계신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을 읽지 못하니까 정원의 꽃들을 살핀다든지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꾼다든지 그런 일을 하면서 소일하시는 것을 보았다. 틈이 나시면 몽당비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와 도로를 쓸기도 하셨다.나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이기도 한 '시'라는 작품을 쓴 것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감 덕분이다. 대문 밖 도로를 쓰시는 모습이 나에겐 그렇게 잔잔한 감동이었다."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2009년 내가 공주문화원장이 돼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셨을 때 선생님은 흔쾌히 수락하시면서 나의 강력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 해마다 1월 초순이면 어김없이 후원금을 들고 원장실로 오신 선생님은 조용히 돈을 놓고 가시면서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액수도 적지 않았다. 어느 해는 100만원을 주시고 어느 해는 200만원을 주시기도 했다. 일단 돈을 주셨다면 선생님의 기준은 100만원이셨다. 노인이 연금으로 생활하시면서 어쩜 그렇게 배포가 크신지 번번이 놀라는 바가 있었다.2017년 7월 문화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이임식이 있던 날, 나는 비로소 해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선생님'이 바로 그분임을 말했다. 그 자리에도 선생님은 와 계셨다. 이미 90대 중반의 노인인지라 지팡이에 의지하고서도 따님과 사위 되는 분의 부축을 받고 계셨다.왈칵 눈물이 솟았다. 문화원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보살핌과 사랑이 마음에 와닿아 그랬다. 그로부터 3년. 선생님은 건강이 아주 힘들어지셨고 드디어 100세가 됐다. 놀라운 일이다. 내 생전에 100세 되신 분을 가까이서 뵙다니!비록 나는 정식으로 학교 다니던 시절 학생으로서 선생님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지는 못한 사람이었지만 학교를 떠나 어른이 돼 살면서 한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인생의 교훈을 얻은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한다.

2020-08-20 14:49:29

[춘추칼럼] 내가 살고 싶은 동네

[춘추칼럼] 내가 살고 싶은 동네

코로나와 장마, 부동산과 주식.만약 지금 한국 사회를 표현한다면 이 4개 단어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 단어들이 함축하는 바와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이 단어들을 구분하자면, 코로나와 장마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큰 영역이라고 한다면, 부동산과 주식은 개인의 선택과 관심, 조건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이다.예를 들어, 코로나 확산을 개인위생과 방역을 통해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지만 코로나의 발생과 소멸을 인간이 통제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장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520억원짜리 슈퍼컴퓨터를 갖고 있는 기상청을 비난하지만, 사실상 오늘날 기후변화는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가깝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은 더 자주, 더 강하게 닥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부동산과 주식은 상황이 다르다. 지금 온 나라가 부동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다양한 조건들을 제외하고 보면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욕망의 격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다양한 생활문화시설 등 인프라를 갖춘 시설, 출퇴근 등 이동이 편리한 교통 환경 등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추구하는 동시대인의 욕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주식은 또 어떤가. 요즘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식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물론 주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탐욕의 리그가 안타까울 뿐이다. 적절한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 등 온전한 삶이 불가능해지고 있다.결국 인간의 삶은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영역을 놓고 보면 더 나은 돈과 환경 등 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욕망의 결과이다. 문제는 '더 나은'이라는 상대적 비교에 그치지 않고 점차 '모든'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필자 역시 어렸을 때는 삶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거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결코 그렇지 않음을,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부추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연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대단한 지름길이나 확실한 해법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발견하는 일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가 아무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삶을 꾸려가야 한다.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는 지루한 일상을 건너뛰고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면서 우리를 유혹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목소리도 있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와 힘을 갖고 있다. 그 유혹을 이기는 힘은 오히려 가장 작은 일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동네'에서 가능하다. 동네는 군 단위나 작은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 '동네'가 있다.2020년은 문명의 전환을 이야기할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이다. 코로나와 기후 위기만 생각하더라도 삶의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가치'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앞자리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학습과 경험 또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질 필요가 있다.동네는 그러한 학습과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골목에서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어 공동체를 경험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를 향한 욕망이 생겨날 것이다. 서로의 욕망이 모여 지금까지와 다른 욕망의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삶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을 함께할 수 있는 동네를 만들어가자. 17개 광역시·도가 아니라, 226개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1천 개의 동네, 아니 1만 개의 동네를 만들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자.

2020-08-13 14:23:28

[춘추칼럼] 찰나의 권력으로 오만에 빠지면 실패한다

[춘추칼럼] 찰나의 권력으로 오만에 빠지면 실패한다

민주국가 의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30일 계약갱신청구권제와 전월세상한제 도입을 담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을 일방 표결로 통과시켰다.지난 4일에는 세금 인상을 골자로 하는 부동산 3법(소득세·법인세·종부세법)도 표결로 일방 처리했다. 민주당은 국민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안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회법(제58조)이 규정한 소위원회 법안 심사, 축조 심사, 찬반 토론 같은 절차를 무시했다. 21대 국회는 삼권분립 헌법 정신과 국회법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오로지 청와대 하명에 따라 군사 작전하듯 법안을 밀어붙이는 통법부로 전락했다. 미래통합당은 "입법 독재의 완성"이라고 반발했고, 정의당조차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원의 입법권마저 침해했다"고 비판했다.현재 민주당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유신 독재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하명을 받아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했던 '유정회'가 떠오른다. 이런 와중에 윤석열 검찰총장의 작심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그는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선출된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작금의 '신종 독재' 상황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당장 정부 여당에 역풍이 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도는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보다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발생했고, 서울 지역에서 민주당 지지도가 통합당에 역전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향후 정부 여당이 정책 실패에 무감각해지고 국민 공감 능력을 잃는다면 이런 추세는 더 악화될 것이다.5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 정치에서 경험적으로 입증된 이른바 '집권 4년 차 증후군'이 있다. 절대 권력을 누렸던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4년 차로 접어들면서 예외 없이 국정 운영 리더십에서 큰 위기를 맞이했다. 통상 역대 정부는 집권 초기엔 인사 실패로 휘청거리고 중반에는 정책 실패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며 임기 말엔 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 인사 비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은 '레임 덕'(lame duck)이 아니라 정치적 뇌사 상태에 빠지는 '데드 덕'(dead duck)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현 정부는 작년 조국 장관 임명과 같은 인사 대참사로 도덕적 파탄을 맞이했고, 올해는 총선 압승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 경색,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과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민심이 급격하게 이반되고 있다. 향후 정권 핵심 인사들이 연루된 비리가 터지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현 상황으로 봐서 민주당이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 후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 간의 충돌로 집권 세력은 깊은 혼돈에 빠져들지 모른다. 임기 말에 관료 사회가 등을 돌리면 권력 누수 현상이 심화되고 결국 현 정부도 역대 정권과 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런 실패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정부는 인적 쇄신을 통해 최고 정책 전문가를 등용하고, 새로운 국정 과제의 성과를 도출해야 하며, 야당과의 협치를 강화해야 한다.한국리서치는 매월 정부가 추진하는 12개 정책에 대한 국민 평가를 실시한다. 7월 3주 차 조사 결과, 주거·부동산 정책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긍정 평가는 19%로 가장 낮았다. 정책 중요도 평가에선 일자리∙고용 정책을 최우선으로 꼽은 응답이 58%로 가장 높았다. 그다음으로 사회 안전(47%)과 주거·부동산(45%)이었다. 주거∙부동산 정책은 3월 넷째 주 조사 결과와 비교했을 때 중요도가 10%포인트 증가했다. 주거·부동산을 최우선 과제라고 인식하는 비율이 아주 높은 반면, 긍정 평가가 지극히 낮다는 것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당은 집값 폭등을 이전 보수 정부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야당과 머리를 맞대고 협치를 통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최고의 부동산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단언컨대, 정부가 정책 실패를 무시하고 찰나의 권력에 도취되어 다수결 폭력이라는 오만함에 빠지면 결국 '집권 4년 차 증후군'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2020-08-06 13:32:38

[춘추칼럼] 회복기의 삶

[춘추칼럼] 회복기의 삶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날이 그날 같고 하나도 신나는 일, 즐거운 일이 없다. 그렇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에머슨이라는 미국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헛되게 불평하면서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바로 이것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날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날인가!그래서 나는 오늘은 나의 생애에 남은 날 총량 가운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이고 첫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그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과 첫날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첫 사람이고 또 새 사람이다.이런 생각 하나만 바꿔도 세상은 갑자기 눈을 뜨는 세상이 되고 눈부신 세상, 찬란한 세상이 된다. 부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루한 세상, 짜증 나는 세상, 누더기같이 낡은 세상이라고 꾸중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만 그런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다.이쯤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해 보고 싶다. 보들레르는 시를 이야기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은 회복기에 이른 환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회복기란 마치 어린 시절로의 회귀와도 같다. … 아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본다. 그는 언제나 도취해 있다.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아이가 형태와 색채를 흡수하는 기쁨과 가장 닮아 있다."우리도 주변에서 가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암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라. 그에게 세상은 오직 눈부신 세상이고 새로운 세상이고 아름다운 세상이고 찬란한 세상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무엇 하나 새롭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그는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는 사람이고 감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암이란 질병에 걸렸던 것은 분명히 불행이고 악운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 이후의 날들은 축복의 날들이 될 것이다. 실은 나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2007년의 일이니까 벌써 13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분명히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끝내 살아서 병원을 빠져나왔다.그런 이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날마다 나는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됐고 사소한 일에도 취한 사람이 됐고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됐다. 보는 것마다 새롭고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그것은 취한 삶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취하는 날들이었다.믿지 못하실 것이다. 그냥 그것은 터닝포인트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반전의 인생이었다. 비록 몸은 병들고 왜소해졌으며 많은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지만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고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겨우 이만큼밖에 남지 않았다고 투정하는 사람에서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진정 인생이 지루하신가? 따분하신가? 아무것에도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시나?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만사 살아가는 기대 수준을 조금쯤 낮출 필요가 있다. 조금쯤 부드럽고 다정한 눈길이 준비되어야 한다.지금 우리는 너무나 외부 지향적이고 타인 지향적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그런 경험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일상적인 일, 흔한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립게만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회복기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부디 자기 자신을 해바라기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때로는 채송화라고 여겨 보시라. 세상이 대번에 달라져 보일 것이다. 큰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채송화는 애당초 키가 작은 꽃이기에 해바라기처럼 넘어지거나 줄기가 부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2020-07-23 15:28:50

[춘추칼럼] ‘문화도시’의 길

[춘추칼럼] ‘문화도시’의 길

'문화도시' 사업 공모 마감이 이달 24일로 다가왔다. 현재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문화도시 사업을 준비하면서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2018년 처음 시작된 '문화도시' 사업은 2022년까지 30개 문화도시 선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첫해에는 '예비문화도시'로 지정되고 1년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법정문화도시'로 최종 선정되면 5년에 걸쳐 최대 200억원(국비와 지방비 매칭 각 50%)이 투입된다. 올해에는 작년 말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된 7개 지방자치단체(부천·원주·천안·청주·포항·영도(부산)·서귀포)가 사업을 시작했으며, 10개 지자체가 예비문화도시로 추가 선정되었다.그렇다면 전국의 지자체와 지역문화재단이 이처럼 문화도시 사업에 집중하는 것은 왜일까? 일단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되면 5년이라는 기간 동안 사업 예산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중장기 계획을 가질 수 있다. 열악한 지방 재정을 고려할 때 문화 관련 예산은 항상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 사업은 충분한 매력을 갖는다. 그다음으로 기초생활권 차원에서 문화 영역은 시민들과 직접 대면하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정치인으로서 자치단체장 입장에서 괜찮은 손익 계산이 되기도 한다.마지막으로 지자체의 지역문화재단 설립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현재 전국적으로 약 100개 내외의 지역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있고, 그중 기초문화재단은 설립 과정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히거나 설립 이후에도 재단의 방향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점에서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사회에서 재단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셈이다.결론적으로 전국의 모든 지역이 '문화도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그것은 문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궁극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문화도시 사업에 대해서는 검토와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과열 양상과 대응에 대해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경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체부가 공모 절차나 사업 실행을 더 세밀하고 빡빡하게 만들어가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고, 그 과정이 잘 드러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 공모 과정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향식의 일방적 공모 방식이 아니라 상향식 공모의 모델을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지역사회가 작은 공간과 사례, 사람이 얽히고설킨 곳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업으로만 접근하면 갈등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프로그램 사례는 민관 영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이미 많은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공간과 주체와 사례들을 어떻게 지역문화예술생태계 차원에서 연결하고 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역사와 문화 자원이 이야기가 되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콘텐츠로 생산될 수 있어야 하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위해 잠시 지역에 머무르는 이들이 아니라 지역문화 활동의 실질적인 주체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화도시의 성과라 할 수 있다.이 과정에서 나쁜 사례는 걸러야 한다. 지역사회 네트워크는 무시한 채 공공기관 중심으로 '문화도시'를 주도하거나, 외부 전문가 중심의 문화도시 사업을 상정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애초에 지속 가능한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문화도시 사업의 목표와도 맞지 않는다.'문화도시'는 '예술도시'와 다르다. 문화도시는 도시의 체질이 '문화적으로' 바뀔 때 가능하다. 지역 축제가 늘어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대형 공연장이 들어선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문화도시는 목표선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것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담고, 다양한 역사와 문화로 축적된 시간의 켜들이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유산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2020-07-16 16:06:40

[춘추칼럼]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춘추칼럼]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국정 운영 지지도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한국갤럽의 7월 1주 차( 6월 30일~7월 2일) 조사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한다'는 긍정 평가는 50%였다. 5월 1주 차(71%)와 비교해 두 달 만에 지지율이 무려 21%포인트 하락했다. 지난 총선의 총유권자 수가 4천400만 명인데, 숫자로만 보면 무려 1천100만 명 이상이 이탈한 셈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화 논란,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한 대북 관계 악화, 6·17 부동산 대책 실패,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격돌 등 악재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러나 근원적인 요인은 총선 압승 이후 드러난 정부 여당의 '견제받지 않는 권력' 때문이다.최근 대통령 한마디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행정 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대통령의 하명에 역대 최대 규모의 35조원 추경 예산이 국회에서 5일 심사 만에 처리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무부 장관과 여당이 정권 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총장을 압박해 사퇴시키려고 하는 것도 실상 절제되지 않는 권력이 몰고 온 기현상이다. 이렇다 보니 "모든 권력이 국민이 아닌 문재인으로부터 나온다"는 '문주주의'(文主主義)라는 신조어마저 등장하고 있다. 통상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도취된 정부는 정책 실패에 무감각해지고, 자신들의 무능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의 탓만 한다.가령, 부동산 대책 실패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토부 장관은 "지금까지 정책은 다 종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회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규범과 관행이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제16대 국회(2004년)부터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주었던 법사위원장을 여당이 차지했다. 제13대(1988년) 국회부터 의석 비율대로 여야가 상임위원장을 나눠 가지던 협치의 전통마저 깨지고 여당이 17개 국회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 여하튼 민주화 세력을 자부하는 정부 여당이 '제도적 자제와 상호 존중'의 규범을 무시하면서 '일당 독재'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효율적이고 건강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권력은 스스로 견제받아야 한다. 야당, 언론, 시민단체, 지식인,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권력이 무차별적으로 견제받아야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성숙한다.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은 어떠한가? 보수가 몰락하면서 야당은 무기력해졌고, 일부 언론은 '진실 보도'를 외면한 채 정치적·정파적·이념적으로 이용되는 소재에만 치중하고 있다. 권력을 감시해야 할 시민단체(NGO)가 정치권력 비판의 칼을 내팽개치고 정치권 진입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오히려 권력화되고 있다. 양식 있는 지식인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 가운데 '어용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몰염치한 인간이 활개를 치고 있다. 촛불 혁명 이후 시민들의 능동적, 자발적 참여는 늘어나고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 코로나19 재난 극복의 견인차 역할도 했다. 그러나, 최근엔 팬덤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명 문빠로 불리는 열성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진영 내 어떠한 이견과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며 정부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면 적폐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다.이런 기형적인 상황에서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는 없다. 한국리서치는 '국정 방향 공감도'를 격주로 발표하고 있다. 지난 5월 1주 차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응답은 54%로 '올바르게 가고 있지 않다'(32%)보다 12%포인트 많았다. 그러나 7월 1주 차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43% 대 44%로 역전되었다. 더구나, 16개 정책별 긍정 평가가 대통령 국정 운영 평가보다 훨씬 낮았다. 주거·부동산 긍정 평가는 25%에 불과했다. 이것은 현 정부의 정책 능력이 아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 실패로 인한 성난 민심을 잡으려면 정부 여당엔 지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다. 더욱 겸손한 자세로 권력을 제도적으로 자제하고 최고의 전문가를 등용해서 정책 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분명 겸손과 유능이 최상의 정책이다.

2020-07-09 15:44:15

[춘추칼럼] 코로나 이후

[춘추칼럼] 코로나 이후

세상살이가 많이 달라졌다. 몇십 년은 뒤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적막하다. 길거리 자동차들이 많이 줄었다. 당연히 행인들도 줄었다. 어쩐지 그것이 딴 세상에 온 듯 낯설고 서툴다. 공주와 서울을 오가는 버스의 횟수가 줄었다. 배차 간격이 떠서 많이 기다려야 한다.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의 표지판을 보았더니 인천공항행 버스 시간표 위에 까만 표시가 모두 붙어 있다. 공항버스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는 증거다. 그것은 또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얘기다.가치관이 바뀌었다. 이전에 가치 있는 것들이 가치가 없어지고 예전에 가치 없던 것들이 다시금 가치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대단위로 무슨 일인가를 하는 일부터 불가능하다. 무조건 사람 많은 데는 피하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제는 혼자서 하는 일들이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비대면, 비접촉,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는 길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는 혼자서 무슨 일인가를 하면서 사는 연습을 해야만 하겠다. 코로나 사태를 건너오면서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도 절실히 학습해야만 했다. 인생이 외롭고 쓸쓸한데 더욱 인생이 외롭고 쓸쓸하게 되었다.이렇게 오프라인의 삶이 위축된 데 비하여 여전히 작동하는 것은 온라인의 삶이다. 절대적인 단절과 고독과 속박의 시대에 온라인마저 막혔다면 어쨌을까?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안도한다. 그런대로 답답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의 역할이 컸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온라인의 영향이 더욱 증대되겠지 싶다.내가 주로 만나거나 소통하는 사람들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 한 분과 이야기하다가 조용히 놀란 일이 있다. 그분은 출판사 대표인데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기네 출판사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코로나 이전보다 책의 매출이 더 늘었다는 것이다.무슨 일로? 문제는 책의 종류다. 그분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생활실용서인데 그 가운데서도 꽃 기르기, 실내 화단 꾸미기, 반려동물 돌보기와 같은 책들이 그렇게 잘 나가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실내에 갇혀서 사는 동안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종이접기나 종이 오리기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그러니까 디지털과 어울린 아날로그의 삶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 방식은 디지털이되 그 내용은 아날로그로 가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코로나 이후의 우리네 삶의 새로운 국면이요 피하기 어려운 한 방향이 아닌가 싶다.이런 시기를 맞이하여 시 쓰는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 본다. 비대면 비접촉이 강화되다 보면 인간은 더욱 고립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고독감, 소외감, 우울감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주는 그 무엇일 것이다. 울퉁불퉁해지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고 쓰다듬는 그 어떤 심리적 작용일 것이다.그것이 그러할 때,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 시라는 문학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문장 형식이다. 산문이 작정하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쓰는 글이라면 시는 작정 없이 언뜻 떠오르는 감정을 급하게 쓰는 글이다.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문장이라 하겠다.그러므로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격한 마음을 다스려 준다. 말하자면 마음의 묘약인 셈이다. 만약에 시가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만 한다면 시를 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나의 책은 변함없이 팔렸다. 물론 오프라인 서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라인 주문을 통해서였다.코로나 시대. 코로나 이후 시대. 활기차게 자유롭게 살았던 어제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 정작 그것이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평안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행복의 기초다. 그렇게 소중한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시인들은 더욱 정성껏 시를 써야 하겠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다.

2020-06-25 15:30:00

[춘추칼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른 세 가지

[춘추칼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다른 세 가지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를 맞이했다. 현 집권 세력은 입만 열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한다. 이 정신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 곁에 함께 있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꾼 것은 '사람 사는 세상'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었다.그런데 최근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펼치는 언행을 보면 '껍데기 노무현 정신'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족 비리와 '감찰 무마' 의혹 등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다. 조 전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최강욱 국회의원에게는 축하 전화를 걸어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역할"을 당부했다.평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각별했던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국회의원이 정의기억연대 운영에 참여하면서 불거진 각종 논란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이라도 만들라"고 엄포를 놓자 정부는 4시간 만에 "법을 만들겠다"고 기민하게 대응했다.보수가 몰락하고 총선 압승으로 여권이 권력에 도취되어 상식 밖의 '친문 사는 세상' '특권과 차별이 있는 세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씁쓸하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회법에도 없는 '4+1 연대'를 통해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누더기 선거법인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관철시켰다. 그 후에 각종 꼼수와 편법으로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만들고 총선 후에 통합했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전례 없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노 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싫어했던 '원칙 없는 승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여 세력은 종종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 2기'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노·문 정부의 뿌리는 같지만 정치 열매는 전혀 다르다.첫째, 노무현 정부는 '실용적 진보'를 표방한 반면, 문재인 정부는 '교조적 진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 세력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관철시켰다. 이라크 파병과 제주 해군 기지 건설도 밀어붙였다. 이 모든 것이 이념을 넘어 국익을 위한 실용적 행보였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친문과 운동권 세력을 중심으로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주류 세력 교체와 체제 변혁을 핵심 목표로 삼으면서 '토착 왜구' 등 이념으로 가득 찬 구호만 난무했다.둘째, 노무현 정부에서는 '협치 실천'이 돋보인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협치 절벽'이 지배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4월 사학법 개정으로 정국이 경색되자 청와대로 초대한 여당 원내대표에게 "야당 원내대표 하기 힘든데 양보 좀 하시죠"라면서 통 큰 정치를 주문했다. 2005년 8월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고도 했다. 177석의 슈퍼 여당인 민주당은 53년 만에 21대 국회를 사실상 단독 개원했고, 그동안 야당 몫으로 지정된 국회 법사위원장마저 차지하겠다면서 원 구성을 지연시켰다. 힘없는 야당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여당이 양보하는 것이 상식이다. 야당을 적폐 세력으로 몰아가고 진영 논리에 갇혀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면 협치와 공존의 정치는 불가능해진다.셋째, 노 전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핵심 원리로 당·정 분리를 강조했다. 따라서 청와대와 집권당 간에 수평적인 관계가 구축되면서 겸손한 권력이 만들어졌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당·정 일치가 강조되면서 청와대가 집권당을 수직·통치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심지어 여당 지도부는 강제 당론을 통해 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고 있다. 정당 민주화는 퇴보하고 오만한 권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부 여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코로나 국난 극복의 생산적 정치를 위해 '실용 강화 원칙과 상식' '행동하는 협치' '당정 분리'라는 '노무현 국정 운영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언컨대, 국정 안정은 국회 의석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집권 세력의 제도적 자제와 관용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2020-06-11 15:21:58

[춘추칼럼] 하얀 제비꽃

[춘추칼럼] 하얀 제비꽃

모처럼 데레사 수녀님이 공주에 왔다는 전갈에 서둘러 외부 일정을 마치고 루치아의 뜰로 갔다. 루치아의 뜰은 공주의 옛 거리에 있는 찻집으로 오래된 한옥 하나를 고쳐서 만든 찻집이다. 공주 바닥 사람들에게보다는 외부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잘 알려진 찻집이다.왜 루치아의 집인가 하면 찻집 주인의 세례명이 루치아이기 때문이다. 짐작하시겠지만 루치아는 천주교 신자. 그래서 찻집 이름도 '루치아의 뜰'인데 이 집에는 그런 연고로 바깥에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자주 찾아오신다.내가 찻집에 들어섰을 때 수녀님 세 분과 운전을 맡은 남자 한 분이 루치아 내외와 함께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의 수녀님이다. 마치 동화 나라에서 등불 하나를 들고 이 세상으로 나왔다가 다시 이 세상의 등불로 바꿔 들고 동화 나라로 돌아가는 아이와 같다.그렇구나. 데레사 수녀님에게는 우리 공주가 동화 나라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세상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기에 그렇게 수녀님은 수녀원에서 짬만 생기면 공주를 찾는 것이고 또 루치아의 뜰과 우리 풀꽃문학관을 방문하는 것이겠구나.들어 보니 수녀님 일행은 이미 풀꽃문학관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나 마침 월요일이라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으므로 문학관 안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집 둘레와 꽃밭만 보았노라 한다. 그런데 일행 가운데 나이가 좀 드신 수녀님이 문학관의 꽃밭에서 제비꽃 사진을 여러 장 찍었노란다.알고 보니 그 수녀님이 데레사 수녀님이 머물고 있는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 "수녀님, 왜 제비꽃 사진을 찍으셨어요? 다른 꽃들도 많은데." "네, 보통 제비꽃은 보랏빛인데 문학관의 제비꽃은 하얀 색깔이더라구요. 그래서 찍었어요."그러하다. 우리 문학관에는 하얀 제비꽃이 있다. 있더라도 아주 많이 있다. 본래 문학관에는 하얀 제비꽃이 없었는데 문학관 관장 일을 보는 조동수 선생이 다른 데서 캐다가 심어서 하얀 제비꽃이 살고 있다. 심더라도 아주 많이 심었다. 문학관 둘레 마당과 담장 아래에 촘촘히 가득 심었다.그걸 또 야생화 연구가인 백승숙 여사가 와서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원장님, 이 제비꽃 이렇게 많이 심으면 안 돼요. 이 녀석들 번식력이 강해서 나중에는 아예 제비꽃 밭이 됩니다." 그래서 꽃을 심어 준 조동수 선생의 눈치를 살피며 제비꽃들을 대충 뽑아냈다.결국은 지금 문학관 뜨락에 피어 있는 모든 하얀 제비꽃들은 그때 조동수 선생이 심었는데 뽑지 않은 몇 그루 제비꽃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조동수 선생의 제비꽃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더러는 그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그러면 왜 조동수 선생은 그렇게도 많은 제비꽃을 캐다가 문학관 뜰에 심었을까?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조동수 선생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한 분밖에 남아 있지 않던 육친마저 돌아가신 것이다.젊은 나이이고 집안 대소가도 많지 않아 두서없이 간소하게 어머님 상을 치렀다 한다. 적적하게 어머니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둘러보니 자기의 슬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더란다.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꽃이 길가에 피어 있는 하얀 제비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내 슬픔을 알아주는 것은 너뿐이구나.' 그런 뒤로 조동수 선생에게 하얀 제비꽃은 어머님의 꽃이 되었고 어머님을 생각하는 꽃이 되었단다. 그러니 어찌 내가 문학관 뜰에 심은 하얀 제비꽃을 깡그리 뽑아낼 수 있었겠나. 몇 그루라도 하얀 제비꽃을 그냥 놔두기를 잘했다 싶다.이런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 해마다 하얀 제비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하얀 제비꽃이 조동수 선생의 어머니이고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다. 이것을 원장 수녀님이 느끼시고 영혼의 손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래서 수녀님은 다른 예쁜 꽃들, 화려하고 큰 꽃들을 제치고 초라하고도 작은 하얀 제비꽃을 사진기에 담으신 것이리라.그러고 보면 또 수녀님 마음이 하얀 제비꽃의 마음이고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고 또 조동수 선생 모친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세상의 일들은 참으로 깊고도 멀고도 아득하다. 유정하다. 서럽도록 아름답다. 노을 속으로 꽃잎을 싣고 가는 저녁 강물 하나를 본다.

2020-05-28 16:30:00

[춘추칼럼] 한 사람의 힘

[춘추칼럼] 한 사람의 힘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2020)라는 책에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전염병은 어쩌면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일지도 모른다. 유예된 활동, 격리된 시간들은 그 초대에 응할 기회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단지 인간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우리야말로 가장 침략적인 종이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되돌아가고 싶은지 등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서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고 말한다.정확한 지적이다. 이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생각을 한다. 그저 매일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보면서 불안과 안도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불안을 야기하는 바이러스 확산 주범을 찾아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런가 하면 알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빠져 있기도 한다. 사람들은, 언제쯤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인지,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묻는다. 하지만 묻는 이들도 알고 있다. 여기에 정확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그저 서로에게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잠시나마 불안을 떨쳐보려고 애쓸 뿐이다. 수많은 예측은 빗나가고, 막연한 희망은 무너진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지연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다시 제자리에 서 있다. 이 지연과 반복을 견디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다.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의 한복판에서 그나마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건너가고 있는 이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르게 된 인류의 삶을 생각하고, 언젠가 종식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상황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으면서 국가의 역할과 정체성, 기본소득의 필요성, 수많은 방역과 검사와 역학조사, 진료 등을 통해 지방정부와 공공의료에 대해 생각한다. 일상의 변화에 따라 삶과 인생, 가족, 공동체, 생태환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그중에서도 '감염'과 '전염'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본다. 언론에 보도된 '학원강사발 코로나19 감염 확산'이라는 감염 경로는 '한 사람'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일터와 삶터를 통해 만나는 타인에게 일종의 '감염'이 진행되고, 감염된 주체는 또 다른 타인을 감염시킨다. 이렇게 반복되는 감염이 결국 전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모든 전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염병 대란이 고작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한 사람은 대구 신천지 신도나 인천 학원강사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사례인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생각해보면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으로서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회적 가치들을 감염시키고 확산시키는 '한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하자는 말이다. 이때 '힘'은 일방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효과'에 가까울 것이다. 한 사람이 무제한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와 관계, 우연성, 상호성 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의도하거나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시작점을 찍는 행위에 가깝다. '한 사람'은 악하고 부정적인 것의 숙주가 될 수도 있지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누는 최소이자 최선의 단위이다.그 '한 사람의 힘'을 주목해보자. 내가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 동물, 풍경에 보내는 눈빛과 몸짓, 말이 모여 그 사람이 감염되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고 상상해보자.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라 공존과 협력, 연대와 희망, 우정과 환대, 공감과 위로, 감동과 찬사를 전파하고 전염시키자.

2020-05-21 17:30:00

[춘추칼럼]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의 길

[춘추칼럼]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의 길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3년(5월 10일)을 맞이했다. 집권 후반기로 들어섰지만 국정 운영 지지도는 71%(한국갤럽 5월 1주 조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갤럽이 과거 조사한 역대 대통령의 취임 3주년 무렵 지지도는 박근혜 대통령 42%, 이명박 대통령 43%, 노무현 대통령 27%, 김대중 대통령 27%, 김영삼 대통령 41%, 노태우 대통령 12%였다.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70%를 넘은 건 지난 2018년 7월 이후 1년 10개월 만이다.전례 없는 압도적 지지 속에서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통해 남은 임기 2년 동안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겠다는 비전을 밝혔다.최근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는 지난 3년간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 평가 때문이라기보다는 코로나 사태에 따른 반사이익 성격이 강하다. 갤럽 조사에서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자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가 53%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 정책 항목인 '복지 확대'는 4%에 불과했다. 대구경북에서 긍정 대 부정이 53% 대 30%였다. 60대 이상에서도 그 비율이 64% 대 26%였다.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 성과가 없고 전통적인 보수 진영에서조차 문 대통령 지지에 대한 긍정 평가가 상당히 높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제임스 데이비스(James C Davis)가 제시한 J-커브 이론을 적용하면, 코로나 사태 해결에 대한 기대와 국민들이 체감하는 성취 간에 인내할 수 없는 격차가 커지면 민심이 폭발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3년을 아주 냉정하게 평가하면 코로나 방역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국민이 기대했던 성과는 아직 요원하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구상과 약속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지 못했고,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지 못했으며, 대통령부터 새로워지지 못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지 못했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끝내지 못했으며, 대통령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도 체감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통합과 공존'이 아니라 '분열과 독존'이 판을 쳤다.문 대통령이 그토록 갈망하는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도덕성, 예리한 역사의식, 저항하기 어려운 설득력, 누구나 희구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상징성을 토대로 '변혁적 리더십'을 펼쳐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민과 대통령과의 관계는 승화되어 정치 과정을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 국가가 지향하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국민의 에너지를 최대한도로 끌어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와 협치, 그리고 겸손이 필요하다. 티머시 스나이더 미국 예일대 교수는 '코로나 이후 인류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 '전체주의 확산, 포퓰리스트 득세, 이념적 편 가르기, 사실을 무시한 선전·선동, 정부의 공포 마케팅' 등을 제시했다. 그는 "위기 상황인 지금이야말로 공포가 아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냉철한 판단이 중요하다"면서 "코로나라는 위기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 정부가 무엇이든 해도 되는 기회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따라서, 선도형 경제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개척, 전 국민 고용보험 실시, 한국판 뉴딜 구축, 연대와 협력의 국제질서 선도 등과 같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 못지않게 지금까지 추진했던 핵심 정책들이 왜 성과를 내지 못했는지 깊이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정책 오류가 발견되면 정책 기조를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강성 친문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지지와 성원을 받는 통합 대통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단언컨대, 겸손한 권력만이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도전은 기만이고, 성과 없는 비전은 허구다.

2020-05-14 15:51:13

[춘추칼럼] 좋아요 어법

[춘추칼럼] 좋아요 어법

최근 몇 년, 청소년들을 만나고 젊은이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아니, 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날마다의 생활이기도 했다. 거의 날마다 전국의 중학교나 공공기관을 찾아다니면서 문학 강연을 했기 때문이다.젊은이들, 특히 10대나 20대 젊은이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동안 새롭게 느끼고 배운 것이 있다. 그들의 어법이 매우 분명하고 깔끔하다는 것이다. 주저함이 없고 굴절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라는 말은 아니다. 말하자면 자신감 같은 것이다.이것은 매우 반갑고 좋은 현상이고 하나의 바람직한 변화이다. 그만큼 그들의 내면세계가 클린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여유로움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좋다'는 말도 그렇다. 예전 사람들은 직접 대고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약간은 미온적이고 보류하는 쪽의 표현이라 할까. '좋은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정도로 에둘러 얼버무렸다. 그러나 요즘 친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냥 곧바로 '좋아요'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도 번번이 그렇게 말하고 주저하지 않는다.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바로 이거야.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어법이야. 그만큼 우리의 삶의 형편이 좋아지고 젊은 사람들의 세상이 밝아진 것이다. 이러한 어법 하나에도 우리의 소망이 들어 있고 내일에의 가능성이 숨 쉬고 있음을 본다.나의 시 가운데 이런 짧은 시 하나가 있다. '좋다'란 이름의 작품이다. 언뜻 보면 뭐 이런 글이 무슨 시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시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시를 한 번 들여다보자. 시의 제목까지 합쳐서 총 15개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좋다'는 뜻의 단어가 역시 제목까지 합쳐서 네 번이나 나온다. '좋다'란 말이 아닌 말은 '하니까'와 '나도' 두 개의 단어뿐이다. 시 전체가 '좋다'란 단어가 변형되어 반복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런데도 독자들은 이 시에 그 나름대로 감동이 있다고 반응한다. 지금 우리는 서로서로 좋다는 느낌을 많이 가져야 하고 또 그렇게 말하면서 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렇다. 아니다, 싫다가 아니고 그렇다, 좋다이다. 그래야 한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처음 내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우리 집 손자 아이 때문이다. 세 살쯤 되었을까. 마침 아이가 말을 배울 때였는데 우리 집에 오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만화영화를 자주 보았다. 아이가 좋아라 보는 프로그램 가운데 붉은색 커다란 부리를 가진 앵무새가 나오는 영화가 있었다.그 앵무새는 툴툴거리기를 잘하고 화를 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영화를 자주 보아서 그랬을까. 아이에게 말을 걸면 제일 자주 하는 말이 '싫어요'였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부르는데도 '싫어요'라고 말하는 저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을 할까.그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쓴 시가 바로 '좋다'란 시이다. 그렇다면 이 시를 한번 '싫다'는 말을 넣어서 바꾸어 읽어보자. '싫어요/ 싫다고 하니 나도 싫다.' 대번에 분위기가 달라지고 세상 모습까지 뒤집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말 한마디가 중요하고 무섭다.이제 우리는 부디 좋다는 말을 자주,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겠다. 나아가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겠다. 좋다는 말이나 긍정적인 말을 자주, 많이 하면서 살다 보면 우리들의 삶이나 세상이 조금씩 좋아지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지 않을까.정말로 그건 그렇다. 상황이나 삶이 긍정적이고 좋아서 좋고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좋다는 말, 긍정적인 말을 자주 하고 자주 들어서 상황이나 삶이 좋은 것이 되고 긍정적으로 바뀌는 세상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세상이 아닐까.그것이 진정 그러할 때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좋아요 어법'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꿈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부디 우리 좋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2020-04-30 18:30:00

[춘추칼럼] 뉴노멀사회와 수축사회

[춘추칼럼] 뉴노멀사회와 수축사회

우리는 과거의 일상(Normal)을 잃어버렸고, '뉴노멀'(New Normal)이라고 하는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뉴노멀이 일종의 트렌드라기보다는 인류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중요한 개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상황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분야,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문제라는 점에서 총체적 대변동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그렇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삶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것은 그것이 사라져서 지금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의 삶터를 바꾼 '신도시'와 '아파트'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살던 동네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몇 년 후 그 자리에는 뉴타운이나 신도시가 들어서곤 했다.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우리의 삶과 사회는 바뀌어왔다. 그럼에도 지금의 대변동은 전혀 다른 충격을 던지는 것이 분명하다.최근 김호기 교수는 이중적 뉴노멀의 미래를 전망했는데, 경제 영역의 불확실성과 국가의 귀환, '제3의 자리'로 이동하는 사회였다. (국민)국가와 경제의 변화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지만, 사회에서 '제3의 자리'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개인적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이러한 흐름이 함의하는 바는, 코로나 광풍이 그치면 우리가 돌아갈 자리는 옛날의 자리가 아닌 제3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제3의 자리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연결이 강화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더욱 중첩되는 공간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혹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결되거나 중첩되는 공간으로서 제3의 자리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 세계 사이에서 어떤 대안이 나올 것인지 궁금하다. 이 문제는 국가와 경제(시장)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이번 사태로 분명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지만, 여전히 세계화와 지역화는 치열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단기적으로 국가의 귀환은 당연해 보이지만 국가의 역할과 기능, 시민의 역할과 정체성의 문제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한다.그런 점에서 2018년 말 출간된 '수축사회'(홍성국 지음·메디치)는 중요한 문제 의식을 준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 '낯선 세계의 문턱에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가 '팽창사회'였다면, 2008년 금융위기 전후로 '수축사회'로 진입하면서 제로섬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축사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기주의, 모든 분야에서의 투쟁, 현재에만 집중하는 태도, 팽창사회를 지향하는 집중화, 심리적 문제 등.수축사회는 어쩌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더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수축사회를 돌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인류 모두가 이타적으로 바뀌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타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어떤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회는 달라진다. 따라서 경제적자본 이전에 사회적자본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팽창사회에서 붙잡고 있던 효율성과 합리성이 아닌 도덕과 윤리를 통한 사회적자본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낯선 세계의 문턱'에 서 있다. 결국 각자의 삶을 살펴야 한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삶이라는 일상을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것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해야 하는 물음이다. 개인의 질문이 우리의 질문으로 바뀔 때 출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순서를 잊지 말자. 시장과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다음은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만하다."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그림자를 스스럼없이 당신 머리 위로 던져 주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두운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그 안에서 당신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끄집어내십시오."(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

2020-04-23 15:36:00

[춘추칼럼] 승자의 저주에서 벗어나라

[춘추칼럼] 승자의 저주에서 벗어나라

문재인 정부 집권 중반 들어서 치러진 '중간평가' 성격의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례 없는 압승을 했다. 국민들은 코로나19 국난 앞에 '견제'보다 '안정'을 택했다. 민주당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전국 단위 선거에서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를 포함해 네 차례 연속 승리한 최초의 정당이 됐다. 180석의 '슈퍼 여당'이 된 민주당은 중앙정부, 지방정부, 국회까지 독차지하면서 개헌 빼고는 다 할 수 있게 됐다. 모든 법안·예산·정책을 정부·여당 마음대로 추진할 수 있고, 단독으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가 가능해 국회선진화법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이번 총선 결과가 주는 함의는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주류 세력인 보수 산업화 세력이 진보 민주화 세력으로 교체되어 기존의 '보수·진보 양당 체제'가 무너지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진보 좌파 1.5 정당 체제'가 구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국회에서 민주당이 차지하는 의석은 1이고, 그 외 정당들은 모두 합쳐도 0.5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일본 자민당이 1955년 창당부터 50년간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이런 정당 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2018년 8월 5일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국 순회 연설회에서 "2020년 압도적 총선 승리와 2022년 재집권을 통해 앞으로 20~30년은 집권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힌 적이 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서 벗어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미국의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세일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업의 M&A 경쟁에서 매물로 나온 기업을 인수에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에 많이 사용된다. 특정 정당이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 패배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을 빗대어 사용될 수 있다.지난 2008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공천 파동에도 불구하고 153석을 획득했다. 여기에 '친박 연대' 14석과 '친박 무소속 연대' 13명을 더하면 범여 의석은 180석을 차지하게 됐다. 그런데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현재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과 미래 권력인 박근혜 전 대표와 내전이 시작됐다. 필자가 2010년 10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소속 박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권교체라는 응답이 무려 33.6%나 됐다. 박 전 대표는 전략적으로 국민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시종일관 '여당 속의 야당'이라는 이미지 마케팅을 구사했다. 현직 대통령과의 이런 차별화 전략이 2012년 대선에서 인기 없는 여당인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 51.6%의 득표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한국 정치에선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충돌하는 것은 철칙이다. 조국, 임종석 등과 같은 현재 권력인 대통령 세력(친문)과 현재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며 미니 대선인 서울 종로에서 낙승한 이낙연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미래 권력(친이) 간 대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화될 수 있다. 이런 갈등은 문재인 정부 3년 6개월이 끝나는 시점인 올 연말부터 본격화될 개연성이 있다. 여기에 민주당과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만들려다가 민주당으로부터 팽당한 원로 진보 인사들이 중심 된 정치개혁연합 세력과 친문·친조국 세력 간의 갈등도 심화될 수 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진보의 분열이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다.분명, 절대 권력은 절대 분열될 수 있다. 총선 압승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속화될 수도 있다. 분명, 민주당이 이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 사상 초유의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압승은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당은 문재인 정부의 지난 3년간 성과에 대해 심판받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위험하다. 민주당이 승리에 도취해 '협치와 포용'보다 극단과 배제의 정치에 몰입해 갈등과 분열을 가져오면 그것이 바로 승자의 저주가 될 수 있다. 이제부터 통합과 공존의 정치에 앞장서야 미래가 있다.

2020-04-16 15:18:47

[춘추칼럼] 어둠 속의 희망

[춘추칼럼] 어둠 속의 희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득한 하루 코로나는 근본적 삶의 성찰 요구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다"미래는 어두운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대체로 미래가 띨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다."1915년 1월 18일, 버지니아 울프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이다. 지금처럼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왠지 위로가 된다. 재난과 위기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미래는 항상 어두운 것이다.'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자본과 경제에 대한, 노동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주변의 일상은 그야말로 대혼란과 격변의 시대이다. 유치원'초'중'고는 개학을 연기하고, 대학은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고 있다. 영화관을 찾는 사람도 급감해서 단축 운영 및 휴관이나 폐관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공공시설은 대부분 휴관 상태이다.문제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측은 있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지금 사태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다.우리의 삶 역시 언제 끝날지 모른다.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으로 90, 100세를 예측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질병으로, 누군가는 사고로 일찍 죽는다. 이 불확실성은 우리를 어둠으로 이끈다. 그 결과 불안과 두려움을 낳는다. 그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아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어쩌면 삶의 여정에서 어둠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 속에서 '희망'을 떠올린다.'어둠 속의 희망'이라는 책에서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다. 희망이란, 약속되거나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솔닛이 생각하는 '희망'은 '세계의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성취와 성공 가능성이 아니라 '선한 일을 바라보고 그 일을 해나가는 능력'을 의미한다.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지키는 일이다.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좀 더 삶의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개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노동을, 시간을, 돈을, 기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다음은 리베카 솔닛의 책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어느 날 아침 비를 맞으며 케네디의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노라니 참으로 바보 같고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여성파업' 소속의 그 여성은 말했다. 몇 년 후 그는, 가장 주목받는 반핵행동 중 한 사람이 된 벤저민 스팍 박사가 자기 삶의 전환점은 한 작은 무리의 여성들이 비를 맞으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어둠 속에서 희망을 만드는 일은 대단한 성공도 아니고 거대한 악을 제거하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는 일이다.누군가는 하찮은 것이라고 비웃을지라도, 비록 큰 목소리는 아닐지라도 작은 위로와 격려의 문자를 보내는 것처럼. 그 일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향해,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하나씩 쌓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만약 그것을 일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면 비록 연약할지라도 작은 승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치와 사회 각 영역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 기준으로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배려하는 일, 서로의 필요를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2020-03-26 14:54:07

[춘추칼럼] 국민은 무엇을 기준으로 투표하나?

[춘추칼럼] 국민은 무엇을 기준으로 투표하나?

지난 3년 대국민 약속 잘 지켜졌는지총선은 정권과 집권당 향한 심판대상식·원칙 통하는 정당이 어디인지미래 이끌 역량 판단 신중한 선택을4·15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로 대면접촉 선거운동이 금지되면서 '깜깜이 선거'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더구나, '비례 위성정당' 출현에다 첫 시행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유권자들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여야 모두 제대로 된 공약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혼돈과 혼란이 지배하는 미증유의 선거가 되고 있다. 이번 총선 판을 흔들 최대 변수는 무엇일까? 경제 침체, 여야 공천 평가, 코로나 사태,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논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 중도·무당층 표심 등이 될 것이다.그러나 총선은 본질적으로 정권과 집권당에 대한 회고적 심판이 핵심이다. 이런 정권 심판론은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이뤄질 것이다. 첫째, 문재인 정부가 지난 3년 동안 핵심적으로 추진했던 정책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는지 여부다. 현 정부의 양대 핵심 정책은 소득주도성장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 수단인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 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재인 케어 등이 제대로 작동되어 저성장과 소득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했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대북 정책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중요한 평가 대상이다. 그런데, 현 정부 핵심 정책에 대해 민심의 빨간불이 켜졌다.한국갤럽이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6개월 시점에 실시한 여론조사(2019년 11월 12~14일) 결과, 경제 정책에 대해 긍정 27%, 부정 57%였다. 집권 초기에는 반대로 긍정 54%, 부정 17%였다. 대북 정책도 긍정(38%)보다 부정(49%)이 많았다. 제1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5월에 긍정(83%)이 부정(7%)을 압도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둘째, 문재인 대통령이 그동안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이다. 통상 대통령의 취임사는 국정 철학이 반영되어 향후 국정 운영의 방향이 제시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 "국민 모두의 대통령"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대통령" "공정한 대통령"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이런 철학적 기조 속에서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진영의 논리에 갇히고 극단과 배제의 정치가 판을 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셋째, 정부의 도덕성과 정체성이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통해 특권과 차별이 없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지난해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현 정부의 도덕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검찰 개혁은 사라지고 검찰 장악이 부각되면서 청와대와 검찰 간의 갈등,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갈등이 도를 넘었다. 누가 원칙을 지키고 누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행보를 했는지 평가받을 것이다.작년 12월 27일 여권은 '4+1협의체'(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당권파, 정의당, 민주평화당+대안신당)를 만들어 제1야당을 배제한 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법을 개정했다. 미래통합당이 선거법 개정안의 허점을 파고들어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하자 민주당은 "정치를 장난으로 만드는 것" "쓰레기 가짜 정당"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민을 얕잡아 보고 눈속임으로 만드는 위성정당 앞길에 오직 유권자의 거대한 심판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17일 친문 성향 비례연합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에 참여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거대 양당이 유례없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국회 구성원의 다양성과 대표성을 높인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이제 가장 큰 관심은 누가 제1당이 될 것인가 여부다. 국민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과연 어느 정당이 꼼수와 반칙을 일삼고 있는지, 어느 정당이 상식과 원칙을 지키는지, 누가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지, 누가 미래로 나아가는지를 기준으로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다.

2020-03-19 15:19:14

[춘추칼럼] 슬럼프에 대하여

[춘추칼럼] 슬럼프에 대하여

일단은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물러서 그 나름 궤도 수정도 필요하다눈앞에 보이는 유익이나 편리보다먼 날의 성공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가끔 문학 강연을 하면서 젊은 친구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글쓰기에 대해서, 독서에 대해서, 더러는 인생에 대해서. 한결같이 쉽게 대답해줄 수 없는 무거운 문제들이다.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그다음은 슬럼프에 관한 것이다.나이가 많은 사람이니 경험도 있고 그런 경험 가운데 사랑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알고 있겠고 슬럼프 극복에 대해서도 무언가 묘안을 갖고 있지 않겠나 싶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자고 얼버무리지만 슬럼프에 대해서는 나 나름대로 답을 내놓기도 한다.슬럼프.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일종의 고난이고 고통이겠다. 슬럼프가 뭐 별것일까. 내내 잘 굴러가다가 주춤주춤하는 것이 슬럼프다. 그러다가 심해지면 가속도가 떨어져 아예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막막한 일이고 답답한 일이다. 이러한 절망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각자 나름대로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냥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인데 우리가 살아있는 한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제대로 된 답이 아니다. 어찌해야 좋은가? 이쯤에서 나는 나의 지난날 경험을 불러내야만 한다. 그러한 때 나는 어찌했던가?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젊은이들도 나에게 묻는 것이리라.그러하다. 나에게도 몇 차례 슬럼프가 있었다. 인생의 슬럼프가 있었고 시인으로서 시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 슬럼프가 있었다. 처음엔 무척 당황해하고 답답해하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우선은 기다려야 하고 생각을 좀 더 느슨하게 가져야 했다. 단기전으로 생각하지 말고 장기전으로 접근해야 했다. 거기에 첫 번째 항목이 기다림이고 느긋함이다. 시간의 은택을 입어야 한다. 시간이란 참으로 은혜로운 존재이다. 많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새로운 능력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사막에 사는 전갈의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전갈은 사막의 맹독성 절지동물이다. 생김새도 흉측하지만 꼬리 부분에 치명적인 독침이 있어 이 독침으로 먹잇감을 공격하고 나서 그 대상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식량으로 삼는다고 한다. 때로는 그 먹잇감 가운데 제법 큰 동물도 걸려든다고 한다.그런데 이 천하무적 같은 전갈도 잡아먹히는 때가 있다고 한다. 바로 독침으로 먹잇감을 쏘았을 때이다. 그 순간을 노려 사막여우 같은 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전갈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갈은 일단 상대방을 쏘고 난 다음에는 재빨리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긴다고 한다. 한참 동안 있다 몸에서 빠져나간 독이 새로 생겼을 때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바로 이것이다. 기다림이고 물러섬이고 인내이고 시간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 안에서 새롭게 생기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비록 작은 동물이지만 우리 인간도 이러한 전갈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하겠다. 이것이 하나의 지혜요 현명이다.나에게 문제가 있는가? 슬럼프에 빠졌는가? 그렇다면 일단은 참을 줄 알아야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나름 궤도 수정도 필요하다. 터닝 포인트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힘을 비축할 때 새로운 출구가 열린다.나 자신만 해도 여러 차례 슬럼프가 있었고 위기도 있었다. 인생의 위기, 시인의 슬럼프. 그 슬럼프와 위기가 그 이후의 나의 인생과 시를 새롭게 좋은 쪽으로 바꾸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고마운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성급하다. 기다릴 줄 모르고 참을 줄 모르고 물러날 줄 모른다. 그러니 나날이 고달프고 지치고 답답한 것이다. 목전의 유익이나 편리보다는 보다 먼 날의 성공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 인생은 의외로 길고 지루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기도 하다.

2020-03-05 14: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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