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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통일신라 말기, 신라의 국력이 쇠퇴해짐에 따라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후삼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격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 가운데 우리 지역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동수)전투는 견훤과 왕건이 목숨을 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견훤에게 크게 패해 쫓기던 왕건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 후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은 한편의 역사 드라마이다.TV 연속사극 '태조 왕건'은 2000년 4월〜2002년 2월 총 200회에 걸쳐 방영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인기 드라마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대구의 공산전투가 소개돼 대구 지역 브랜드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당시 팔공산 곳곳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여러 전투를 비롯해 파군재(동구 지묘동)에서 왕건 군사가 궤멸되어 왕건 홀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들은 치열했던 전투 상황과 왕건의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 필자는 927년 팔공산에서 일어났던 공산전투에 관해 역사적 자료와 구전을 토대로 2차례에 걸쳐 지명 유래를 추적해본다.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탈하기 위해 쳐들어오는 견훤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음에 태조 왕건은 공훤 장군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군사를 데리고 신라를 도우러 가게 한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하여 왕건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직접 거느리고 출정하게 된다. 때는 고려 태조 9년(92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개성에서 출발하여 빠르게 행군한 왕건 군대는 마침내 팔공산 기슭 칠곡 부근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팔공산 자락에서 숙영을 하게 되었고, 그곳이 지금의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위치한 대왕골이다. 이곳 지명은 대왕골, 대왕암, 대왕재(동구 덕곡동과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경계)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왕은 바로 왕건을 의미한다. 당시 기병 5천 명이 대왕골(현재 대구선명학교와 송광매기념관 등이 위치한 곳)에서 숙영하는 동안 왕건은 수행 장군들과 대왕암에 앉아 전략을 숙의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때 왕건이 앉았던 바위가 대왕암이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은 대왕골에서 송광매기념관을 운영하는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나이 드신 지역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즉, 공산전투와 관련한 최초의 장소는 대왕재가 되는 것이다.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후, 왕건 군대는 곧바로 지금의 동화사 방면으로 진군하여 일단의 견훤 측 소규모 병사들과 교전하여 승전하고 주력부대를 치기 위해 다시 진군하게 된다. 이때 견훤의 주력부대는 영천 은해사 옛터 부근(태조지)에 매복하여 왕건 군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러한 계략을 모른 채 이곳까지 오게 된 왕건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견훤 군대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의 군사를 잃어버린다. 퇴각하던 왕건 군대가 먼 길을 온 탓에 체력이 떨어지고 사기도 저하된 상태에서 지묘동 작은 고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사기가 오른 견훤 군사들이 진군나팔을 불었고, 그 나팔 소리를 들었던 지묘동의 작은 고개가 바로 나팔고개다. 동화천변을 따라 퇴각하던 왕건 군대는 동화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화천 건너편에 주둔하던 견훤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여 여기서는 왕건 군대가 승기를 잡게 된다. 동화천을 두고 양 군사들이 쏜 화살은 동화천 바닥을 가득 메우게 되었고, '화살로 가득한 내(川)'라는 의미의 살내 또는 전탄(箭灘)이 유래되었다.

2020-05-01 18:30:00

[광장] 신뢰사회

[광장] 신뢰사회

타인을 믿는 것은 위험하다. 수상한 친절에는 의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꿈을 짓밟는 것을 좋아해'라는 That's Life의 가사처럼 분란으로부터 존재 가치를 찾는 이들도 있다. 믿어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의심부터 하라고 가르쳐야 할 마당이다. OECD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약 27%만이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답했다. 불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직과 신뢰라는 가르침은 이제 교과서적이고 이상적인 표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타인을 믿는 것은 위험하지만 믿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 미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의 차이이며, 저(低)신뢰 국가는 사회적 비용이 급격하게 커져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불신사회에서는 짝퉁이 아닌지 매번 확인해야 하고 누가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그 결과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신뢰가 상실된 조직은 실수의 원인을 찾아내 개선하기보다는 실수한 사람을 색출하는 데 관심이 많다. 책임질까 두렵고 정보를 숨길수록 권력이 커지기 때문에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신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기에 이를 구축하고 파괴하는 주체 또한 사람이다. 그 믿음은 상대방의 능력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믿음일 수도 있다. 믿음은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에 사용한다고 해서 마모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나 호감이 없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협력을 위해 필요한 신뢰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자존감을 키울 필요가 있다. 철학자 오노라 오닐은 "신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신뢰받을 만한 자격을 높이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고 했다. 신뢰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신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신뢰라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영화 '크래쉬'(Crash)에서 흑인 여성 크리스틴은 백인 경찰의 불심검문에서 과한 몸수색을 당하고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그 후 그녀는 자동차 전복사고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하지만 그 경찰에게 구조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에피소드는 인종차별이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신뢰를 얻기도 힘들지만 한 번 잃으면 다시 되찾기는 더 힘들다는 방증일 것이다.공자의 제자 자하는 "관리자가 신뢰를 얻지 못하면 아랫사람을 괴롭힌다고 의심받고, 아랫사람이 신뢰를 얻지 못한 채 바른 소리를 하면 윗사람은 자기를 비판하는 줄 의심한다"고 했다. 사사건건 통제하고 의심하는 행동은 부하 직원으로 하여금 감시를 피하는 요령만 터득하게 한다. 상사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믿음을 저버릴 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윗사람이 믿어주면 인정 욕구와 책임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리더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샘 워커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진실성과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위기의 국면에서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힘이라고 분석했다. 믿을 수 없는 리더의 곁에 머무를 국민은 없다. 당신이 믿을 만한 행동을 하면 신뢰하겠다는 조건부 신뢰가 아니라 먼저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2020-04-24 14:30:00

[광장] 조율(調律)

[광장] 조율(調律)

기타와 같은 현악기나 피아노와 같은 건반악기는 수시로 조율(調律)이 필요하다. 현악기의 현(絃)이나 건반악기의 건반에 연결된 줄이 온도와 습도에 따라 길이가 변할 수 있으므로, 정확한 음을 내기 위해서는 그 길이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악기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과 몸도 조율이 필요하다. '정신 줄을 놓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말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줄에 비유했다. 마음의 줄을 놓으면 무엇을 깜박 잊거나 실수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영남 방언에 '주책없고 사리 분별력이 없다'는 뜻으로 '오줄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오'에 '줄'을 합성한 이 말의 어원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를 '총명할 오'(晤)나, '다섯 오'(五)로 보는 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총명할 晤'로 보면 '총명 줄이 없다'라는 뜻이, '다섯 五'로 보면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가닥의 줄이 다 갖춰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마음의 줄을 모두 챙겨 잘 조율해야 함은 말 속에도 담겨 있다.위에서 조율은 마음의 조율을 나타냈지만 마음은 몸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마음과 몸의 조율'을 뜻하게 된다. 마음은 몸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으므로 그릇이 온전하지 못하면 마음 또한 아프기 마련이고,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몸이라는 그릇이 제 기능을 다할 수도 없다. 결국 심신일체(心身一體)이므로 심신을 잘 조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코로나19로 국민들이 두 달 이상 일상을 잃어버린 와중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겹친 '가장 잔인한' 4월이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 많은 나라들로부터 찬사를 자아낼 만큼 국민들은 침착하고 질서 있게 질병에 대응하였고, 의료진들은 살신성인 정신으로 임하여 긴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총선도 지난 수요일 무사히 치러졌다. 조만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종료하고 '생활 방역 체계'로 전환할 것이다. 그간은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일상생활로 돌아갈 때인 지금은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를 때다.지친 몸과 마음엔 절대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대 휴식은 하루나 이틀이면 족하다. 지나치면 오히려 권태롭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자신에게 맞는 절대 휴식을 취한 후엔, 마음의 평안을 통해 몸의 평안에 이르는 길인 독서, 몸의 평안을 통해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방법인 운동을 할 것을 제안한다. 독서와 운동엔 여러 종류가 있고 난이도(難易度)도 각기 다르지만 본인에게 맞는 쉬운 것을 택할 것을 권한다.심신이 잘 조율됐다는 느낌이 오면 가만히 눈을 감아보라. 몸이 우주에서 사라진 것같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몸은 정상이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어디든 아프면 소식이 오기 마련인데 기별이 없다면 안녕한 것이고, 정상이다. 이제 조용히 눈을 떠보라.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온전함을 목격할 것이다. 마음은 평온하고, 일에는 자신감이 충만하며, 일터로 달려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면 마음도 정상이다.조율이 잘된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조율이 잘된 사람은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심신을 조율하여 본인과 가족과 나라를 구하시길 빈다. 아울러 여야(與野) 간에도 조율이 필요하다. 총선도 끝났으니 여야 간 이견을 서로 잘 조율하여 더 이상 '국민이 정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도록' 지금까지의 정치 후진성을 탈피해 주길 바란다.

2020-04-17 19:04:49

[광장] 달구벌국(達句伐國)은 존재했을까?

[광장] 달구벌국(達句伐國)은 존재했을까?

대구의 옛 지명 중 하나인 달구벌은 과거 삼한시대 당시 '달구벌국'으로 불렸다고 아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원삼국시대 즉, 삼한(三韓)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인 기원 전·후∼3세기 간에는 영남 일대의 진한(辰韓) 영역에 12개의 소국이 있었다는 내용이 '삼국지'와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의 '한조'(韓條)에 기록돼 있다. '삼국지'는 3세기 후반 중국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다. '위서 동이전'에 실려 있는 삼한과 관련한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사방 4천 리에 달한다. 한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 세 종족이 있고, 진한은 옛날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반면, 진한과 변한은 2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한시대 진한(변한 일부 포함) 영토의 소국들은 감문(甘文)국, 거칠산(居漆山)국, 골벌(骨伐)국, 다벌(多伐)국, 비지(比只)국, 사벌(沙伐)국, 실직(悉直)국, 압독(押督)국, 우시산(于尸山)국, 음즙벌(音汁伐)국, 이서(伊西)국, 조문(召文)국, 초팔(草八)국 등으로 신라의 모체인 사로(斯盧)국과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소국들의 이름은 '삼국지'에 기록된 진한의 소국들과는 이름이 달라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진한 소국 명칭들이 왜 서로 다른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삼국지'에는 진한과 변한의 소국 규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소국 규모는 작은 경우가 600~700호이며, 규모가 큰 경우는 4천~5천 호에 달해 총가구수는 4만∼5만 호로 추정하고 있다.이제 대구의 모체인 달구벌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두루 살펴봐도 달구벌국에 대한 국명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원로 사학자 한 분이 '삼국사기'에서 "신라 파사 이사금 29년(108년)에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기록을 참고하여 이름이 유사한 다벌(多伐)국을 달구벌(達句伐)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달구벌국의 유래를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과연 다벌국과 달구벌국을 동일 국가로 볼 수 있느냐이다. 필자 생각에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신라시대에는 지금의 두산동, 파동, 대명동, 가창면 일대에 해당하는 위화군(喟火郡, 수창군) 아래 4개의 영현을 두고 있었다. 4개의 영현은 달성을 중심으로 하는 달구화현(達句火縣, 대구현), 팔달동과 칠곡 일대의 팔리현(八里縣), 다사읍·하빈면 일대의 다사지현(多斯只縣, 하빈현), 화원읍 설화동·명곡동 일대의 설화현(舌火縣, 화원현) 등이다. 즉, 위화군보다 규모가 작았던 달구화현이 국가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만약 우리 지역에 소국이 있었다면 위화군과의 관련성에서 찾아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로국이 진한 12소국을 차례로 병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볼 때 이러한 추정은 훨씬 설득력이 있다. 신라가 병합한 소국을 행정조직에 편입시키는 경우, 군(郡) 이상의 행정 규모로 편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사벌국이 사벌주, 압독국이 압독주, 조문국이 문소군, 감문국이 청주(나중에 감문군), 실질국이 실직주, 거칠산국이 거칠산군(나중에 동래군)으로 편제된 사례가 그렇다. 아무튼 삼한시대 진한의 12소국 중 하나가 우리 지역에 존재했다면, 그 명칭이 달구벌국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달구벌국 명칭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2020-04-03 14:30:00

[광장]왜냐하면…

[광장]왜냐하면…

이유를 설명하라. 우리는 무엇(What)에 집중하느라 왜(Why)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부탁 뒤에 숨은 이유를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짐작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로맨틱 코미디 '이별후애'(The Break-Up)에서 집들이를 준비하던 제니퍼 애니스톤은 남자 친구에게 레몬 12개를 사달라고 하지만 그는 레몬 3개만 사온다. 제니퍼는 "식탁을 장식하는 데 레몬 12개가 꼭 필요하다"며 화를 내고 결국 큰 싸움으로 번진다. 레몬이 필요한 이유를 미리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도 알게 된다면 더 많은 이해와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다.상사와 부하가 있다. 이들 사이에는 정보 격차가 있다. 내밀한 정보에 접근 가능한 상사는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 반면 부하 직원은 어떤 맥락에서 일하는지, 어떤 일이 예정돼 있는지 모르는 깜깜이 속에서 일한다. 상사는 시간에 쫓겨 또는 귀찮음을 이유로 '언제까지 무엇을 하라'는 통보에 가까운 지시를 하기 일쑤다. 외부용인지 내부용인지, 신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함인지 단순한 현황 파악인지, 목적과 대상에 따라 상이한 결과물이 요구됨에도 말이다. 상사는 부하 직원이 예상과 다른 보고서를 가져온 것에 화가 난다. 부하는 자신이 가진 정보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의 잘못이 되어 기분이 상한다. 맥락을 모르면 일의 방향성이나 일관성을 갖기 어렵다. 커뮤니케이션은 나의 생각과 정보를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다. 어느 세월에 친절하게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지라도, 불필요하게 일을 번복하는 것보다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인간은 꽤나 합리적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디팍 말호트라(Deepak Malhotra)와 맥스 베이저만(Max Bazerman)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려는 속성이 있다. 같은 대학의 엘렌 랭어(Ellen Langer) 교수는 실험을 통해 이 사실을 증명했다. 복사기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섯 장만 먼저 복사해도 될까요?"라고 부탁하자 60%가 양보해 주었다. 하지만 같은 문장 뒤에 "왜냐하면 제가 지금 굉장히 바쁜 일이 있어서요"라는 이유를 덧붙였더니 무려 94%가 양보했다. 왜냐하면 첫째, 타당하거나 그럴듯한 이유의 제시는 주장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둘째, 일방적인 요청이 아니라 양해를 구하는 배려 있는 행위로 거부감을 줄인다. 상대방이 자발적인 의지로 행동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효과가 있다. 셋째, '왜냐하면'에는 발화자의 가치나 방향성, 일의 의도가 내포돼 있다. 그 이유를 상기시킴으로써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한다.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 상황인 만큼 시민들의 협조와 자발적인 참여가 절실한 때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발생하는 경우, 대체적으로 법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회의 모든 상황을 포괄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이해받고 싶다면 당연한 이유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한 번쯤 생각해 볼 것이고, 아무 이유가 없는 것보다 낫다고 여길 것이다. 따라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기회가 많아진다. '왜냐하면'은 상대방을 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설득 전략이다.

2020-03-27 14:30:00

[광장] 기생(寄生)

[광장] 기생(寄生)

'기생'(寄生)이란 어떤 생물이 다른 종류의 생물체, 즉 숙주(宿主)의 속이나 표면에 살면서 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아 그 생물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동식물의 몸에 붙어서 병을 일으키게 하는 세균이나 균류,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 먹는 이나 벼룩, 사람 몸속에 살면서 해를 끼치는 회충 등이 그것들이다.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전염병의 세계사'(김우영 옮김)에서 미시기생(微視寄生)과 거시기생(巨視寄生)으로 기생의 개념을 확장하였다. 미시기생은 미생물을 포함한 기생체와 인간의 관계를, 거시기생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기생체와 숙주와의 관계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인간과 자연으로까지 확대한 맥닐의 통찰력이 놀랍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생산력에, 인간은 자연에 기생하면서 살아온 것이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은 거시기생의 한 단면을 극화하여 대성공을 이룬 쾌거였다. 힘이 센 자와 약한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이다. 2월 9일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라 세계적인 흥행에 돌입할 무렵, 2월 20일 제작 및 출연진이 청와대로 초치되어 짜파구리 파티를 열 무렵, 코로나19라는 또 다른 기생충의 출현으로 잔칫상과 흥행에 재를 뿌린 격이 되고 말았다. 영화 '기생충'과 살아 있는 기생충의 전쟁이라고 불러야 할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우리네 인생사의 본래 모습인가?그즈음부터 지금까지 한 달여 동안 사회는 '영악한' 기생충인 코로나19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가히 전 세계적으로 이것과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그 나름대로 매우 영리해서 늦봄까지 또는 초여름까지 기승을 부릴 태세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어떻게 영악한가?첫째, 이것은 꾀가 많아 숙주를 잘 죽이지 않는다. 숙주가 죽게 되면 자신들도 죽게 되므로 숙주를 적당히 괴롭히면서 넓게 퍼져 자신의 세(勢)를 키우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을 넘어, 이제는 유럽 전역과 북미를 휩쓰는 '세계적 유행'(pandemic)에 이르렀으니 코로나19로서는 성공한 셈이다.둘째, 이것은 감염 속도가 매우 빠르며, 위장술까지 동원한다. 보통의 질병은 환자에게 증상이 발현된 후에 전염이 되지만 이것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부터 감염을 시킨다. 증상이 나타나면 격리 및 예방 조치를 할 수 있지만 잠복기부터 감염시키니 속수무책이다. 스텔스 기능을 갖춘 전투기가 은밀하게 적에게 접근하듯이 이것 또한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은밀하게 다른 숙주에 침투하는 것이다.끝으로, 이것은 재빨리 변신해서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체가 분명해야 빨리 치료할 수 있는데, 유전자 변이를 통해 모습을 자꾸 바꾸므로 의학자들은 고정된 과녁이 아닌 이동하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이것 때문에 대구경북은 국내에서 가장 심한 인적·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 같았던 지난 한 달여 동안 대구경북인은 놀라운 이타심과 침착성, 질서 의식과 준법정신을 보여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다. 위기 속에서 대구경북인의 품위(品位)를 세계만방에 자랑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코로나19를 먼저 경험한 우리가 이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백신과 치료제까지 개발하여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는 꿈을 꿔본다.

2020-03-20 14:30:00

[광장]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것들

[광장]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것들

코로나19는 '전파력은 강하고 치사율은 낮다'는 바이러스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다. 박쥐가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중국 우한이 어딘지 모르고 살다 죽어도 되는 정보들과 사회적 거리, 비말 감염, 자가 격리, 검체 검사, 정례 브리핑, KF94와 KF80, 팬데믹, 코호트 같은 전문 용어까지 두루 알게 되었다. 문제는 혐오와 차별, 개인정보와 사생활 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 여러 가지 인권 문제들도 같이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확진자 동선과 관련해서도 과도한 개인정보 누출이 논란이 되었다. 시간대별로 기재된 특정인의 동선은 좁은 지역사회에서 누구인지 금방 특정될 수 있었다. 가짜 뉴스도 신나게 퍼져나갔다. 특정 확진자의 얼굴이라며 공개된 사진은 모두 다른 인물이었다. 또 어느 확진자의 동선이라며 공개된 내용은 숙박업소, 노래방, 안마방 같은 곳이었으며 특정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남성이라고 했지만 그 번호의 확진자는 초등학교 여학생으로 밝혀졌다. 외신조차 대한민국의 과도한 확진자 정보가 오히려 신상 털기와 가짜 뉴스 생산을 초래하고 있다며 적절한 검토가 필요하다고까지 지적하고 있었다. 사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제도 없이 완치를 기다려야 하는 고통보다 나의 동선과 개인정보 혹여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난이 걱정됐다. 넘쳐나는 가짜 뉴스와 신상 털기의 대상이 되기는 싫었다.신체의 자유나 혐오 차별과 관련해서도 문제는 발생했다. 대구 지역이 여행 제한, 금지 지역으로 지정이 되고 대구발 항공기는 연달아 취소되었다. 즉, 제도적 금지를 넘어 사람들의 시선이 대구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 대구 지역이라는 이유로 혐오적인 시선과 차별까지 받아내어야 했다. 대구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병원 진료를 거부당하고 숙박 투숙을 거절당했다는 사례가 무수히 올라온다. 상세한 개인정보 공개와 엄격한 자가 격리, 통제가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대구 사람들이 받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개인의 권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특히 감염병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만, 최대한 각자 인간의 권리가 최소한으로 침해되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전 세계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던 100년 전 스페인 독감도 2천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는 감염병을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과 물류는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전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확산 역시 문을 걸어 잠그는 것만이 대답은 아닐 것이다. 꾸준한 백신 개발과 감염병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위생보건 정책 수립이 대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나면 역사가 되고, 교훈으로 남는다고 한다. 부족했던 제도를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감염병이 이제 피할 수 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같은 존엄함을 가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대를 먼저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우한 교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천안과 진천 주민들은 "꽃길만 걷기 바랍니다"며 손을 흔들었다. 캄보디아 총리는 "코로나19보다 차별이 더 나쁜 것"이라며 크루즈 선박을 받아들였다. 광주는 가장 먼저 마스크를 지원해 주고 의료지원단을 대구에 파견해 주었으며 병상을 지원했다. 이렇게, 코로나는 바이러스와 함께 여러 인권 문제도 가지고 왔지만 사람들의 연대와 존중의 소중함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2020-03-13 19:09:11

[광장] 달구벌에서 대구로

[광장] 달구벌에서 대구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예로부터 대구는 달벌(達伐),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달불성(達弗城), 대구(大丘)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불'과 '벌'은 평야나 취락을 뜻하며, '달'은 넓은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을 큰 언덕, 넓은 평야, 넓은 촌락으로 해석할 수 있어 현재의 대구 지명과 같은 의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달구'가 '닭'이 연음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대구를 닭과 연관 지워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경주의 계림(鷄林·닭 수풀), 월성(月城)을 달구벌(대구)의 닭(달구)과 달성(達城)에 연계하여 경주와 대구의 연관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신라의 모든 행정 지명이 당나라 지명체계 방식을 본받아 바뀌게 돼, 달구벌도 현재의 지명인 대구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지금의 한자어인 대구(大邱)와는 다른 한자어인 대구(大丘)였다.결국 달구벌에서 '벌'을 버리고 대구로 개칭했지만, 지명 속에 녹아 있는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큰 언덕(산)과 들판, 즉, 팔공산과 비슬산으로 둘러싸인 대구 분지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대구의 지형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구(大丘)의 한자어가 지금의 한자어인 대구(大邱)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대구(大邱)라는 한자어가 등장한 시기는 정조 3년(1779년) 5월부터이다. 현재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구(大邱) 지명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알면 다소 기분이 씁쓰레하다. 대구 한자 지명의 변경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어 '조선왕조실록'(영조: 26년 12월 02일: 신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대구(大丘)의 유학(幼學) 이양채(李亮采)가 글을 올렸다. "저희들은 영남의 대구부(大丘府)에 살고 있습니다. 국초부터 대구부 향교에서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춘추의 석전제(釋奠祭)에는 지방관이 초헌(初獻)을 올리며, 축문식(祝文式)에 별 생각 없이 '대구 판관'(大丘判官)이라 씁니다. 그런데 '대구'(大丘)의 '구'(丘)는 공자의 이름자인데, 신령 앞에서 축문을 읽을 때, 공자의 이름자를 범해 민심이 불안합니다." 그때, 상소문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영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상소문 내용을 들으니 대구 유생이 고을 이름과 관련하여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근래 유생(儒生)들은 왜 이렇게 생각이 깊지 못한가? 300여 년 동안 대구부에 많은 선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이양채 한 사람만 못해 말 없이 살아왔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조선에는 상구(商丘)와 봉구(封丘)란 지명들이 아직도 있지 않느냐? 어찌 옛 선현(先賢)들이 이를 깨닫지 못해 그러한 지명들을 그대로 두었겠는가?" 하면서 그 상소문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당시 영조 임금의 자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유생들의 다소 사대주의적인 사고로 인해 정조 임금 당시에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가 혼용되다가 철종 이후부터는 대구(大邱)로 고착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필자가 생각하기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구(大邱) 지명을 신라 경덕왕 때 달구벌에서 개칭된 한자 지명인 대구(大丘)로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대구 지명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대구 지명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서도 필요하다. 또한, 한글이 같아 큰 혼란이나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옛 한자 지명으로 복원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2020-03-06 20:06:48

[광장]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

[광장]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

2·28민주운동(이하 2·28)은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8개 고교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서 궐기했던 운동이다. 28일, 갑일(甲日)을 맞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2·28의 세계화를 위해 영문판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을 출간한다.책의 1장은 2·28의 배경, 2장은 2·28의 전개, 3장은 4·19혁명으로의 계승, 4장은 2·28의 의의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의 뜻을 통해 2·28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해 보고 번역 과정과 의의를 설명하고자 한다.2·28은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 '민주'운동이다. 그리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쓴 이후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일어난 '최초'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2·28을 왜 봉기나 의거가 아닌 '운동'(Movement)으로 보는가?단체 행동을 운동으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집회 참여자들이 집회의 동기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집회 주도 세력들이 결속되어 있어야 하며,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계속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2·28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운동'이다.첫째, 2·28의 직접적 계기는 야당인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의 참여를 막으려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등교 지시의 이면에 숨어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직시했고 민주라는 가치와 학원의 자유 및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했다.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에 미치는 정치권력을 배제하라"와 "학생의 인권을 옹호하자"라는 구호를 보면 그들이 운동의 동기를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둘째, 2·28의 주도 세력은 학생·시민·언론의 연대였다. 도시인구의 급증에 따른 생활 여건의 악화와 높은 실업률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근대교육의 확대는 시민의식을 고취했고 언론 보급의 확대는 정치·경제적 모순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선 것은 피 끓는 고등학생들이었으며, 그들의 운동을 시민은 지지했고, 언론은 보도했다.끝으로 2·28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주, 대전, 수원·충주, 부산·청주에서의 시위로 이어졌으며 3·15마산의거로 귀결되었다. 4월 19일엔 서울·인천·광주에서 시위가 이어졌으며 4월 26일엔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4·19혁명'이란 4월 19일 당일의 항거뿐만 아니라 2월 28일에서 4월 26일까지 일어난 일련의 투쟁을 뜻한다. 그러므로 2·28은 세상이 어둠에 떨고 있을 때, 선봉에서 길을 연 횃불이었다.결론적으로 2·28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인데 이 사실을 국내외에 더 알리기 위해 영문판이 마련되었다. 필자와 경북대 박사 과정의 로버트 존스(Robert Jones)가 책임을 맡아 작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작업하였다. 그 후 2·28기념사업회 우동기 회장의 주선으로 원어민 교수 세 분이 정밀하게 교정을 보았으며, 또다시 필자와 존스가 원문과 수정본을 대조·분석·취합하여 완성하였다.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전달과 가독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영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눈 덮인 들판을 처음 걷는' 심정으로 세상에 내놓는 이 책이 2·28의 국제화에 초석이 되길 빈다.

2020-02-21 14:30:00

[광장]'앞산'이라는 지명

[광장]'앞산'이라는 지명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에 의해 훼손된 우리 고유 지명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우리 지역에도 그러한 지명들이 더러 있어 기회가 되면 바로잡는 것이 주권국으로서, 문명국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원래 우리 고유 지명인데 일본식 지명으로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다. 바로 '앞산'이 그러한 지명이다.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 '산천'(山川) 편에는 앞산의 원래 지명은 성불산(成佛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불산은 부의 남쪽 10리에 위치하며, 관기안산(官基案山)이다. 비슬산에서 뻗어 내려온다." 관기안산은 풍수적 용어로 관청 터 앞(남쪽)에 위치하는 산을 말한다. 문헌 기록상으로 성불산이 가장 일찍 나오는 고문헌은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그 후로 『여지도서』 『대구읍지』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교남지』 등에도 나타난다.불교적 용어인 성불산은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영향으로 대덕산(大德山)이라는 새로운 유교적 지명이 생겨나면서 공존하게 된다. 성불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지만, 대덕산은 『대구읍지』에 처음 등장한다. 그것도 자연경관을 주제로 하는 '산천' 편이 아닌 일반 문장에서 나오고 있어 그때까지도 대덕산보다는 성불산이 앞산을 대표했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山水) 편 '산형'(山形) 조에는 "대구비파산내유용천지석"(大丘琵琶山內有湧泉之石), 즉 "대구 비파산에는 물이 솟아나는 바위가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파산(琵琶山)은 비슬산(琵瑟山)의 오기다. 비파(琵琶)산과 비슬(琵瑟)산은 혼돈하기 쉽다. 실제로 앞산 달비골 북사면에는 『택리지』에서 언급된 석정(石井)이 존재한다. 앞산이 비슬산에서 뻗어 내려오므로 옛 사람들은 앞산을 비슬산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정리하면, 앞산의 옛 지명인 성불산은 시대적 이념 또는 오기로 인해 대덕산, 비파산 등으로 불리거나 기록되어 전해왔다. 그러던 중 대구의 진산(鎭山)인 연귀산(連龜山, 제일중학교 교정) 남쪽에 있는 성불산이 자연스레 '앞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주산(진산)의 남쪽을 앞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지형도에서는 앞산을 전산(前山·アプサン)으로 표기하고 있다. 전산은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앞산'을 단순히 한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산(前山) 지명 옆에 일본인들이 '가타가나'로 'アプサン'(앞산)을 병기하고 있다. 즉 가타가나는 외국어(외래어 포함) 표기에 사용되기 때문에 당시 우리 선조들이 앞산으로 부르던 지명을 일본인들이 한자 지명인 전산(前山)을 차용하면서 한자 옆에 한글 지명인 '앞산'을 가타가나로 병기한 것이다.앞서 얘기했듯이 성불산은 시대적 이념, 오기, 지역민들의 편의 등으로 인해 대덕산, 비파산, 앞산 등으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의 산에 여러 가지 지명이 공존하다 보니 최정상부인 앞산 외에 대덕산, 비파산 지명 등을 다른 봉우리에 갖다 붙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지명이라는 것은 현재 어떻게 불리는가도 중요하므로 지금의 대덕산, 비파산의 지명도 앞산과 더불어 각기 다른 봉우리에 공존해도 무방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앞산은 우리 고유의 지명으로서 현 시점에서 가장 합리적 근거를 가지는 지명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앞으로도 '앞산'이라는 지명을 자랑스럽게 사용하면 된다.

2020-02-07 14:30:00

[광장] 통합된 조직 정체성이 없다

[광장] 통합된 조직 정체성이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나무와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나무의 몸통이 먼저냐, 가지가 먼저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몸통을 정점으로 가지치기를 해야지, 가지에서 자라난 나무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의 다양화로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MC, Integrated Marketing Communication)은 일종의 유행이 됐다. 하지만 매체별 통합을 강조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지의 통합임을 주지해야 한다.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을 통합해야 하는가. 이를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시민 또는 고객들은 슬로건을 통해 행정기관이나 기업을 인식한다. 조직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A지방자치단체는 '아늑하고 편리한 서비스', B지방자치단체는 '맞춤형 친절 행정 서비스', C지방자치단체는 '친절은 내부 직원의 행복에서 비롯된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모두 친절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지만, 친절에 대해 미세하게 다른 관점이 스며들어 있고 실천 방향까지 담겨 있다. 또 해당 기관의 존재 목적과 타깃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화자와 청자 간의 약속이다. 슬로건에서 말하는 목표에 따른 실천이 병행되어야 조직의 신뢰성이 담보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는다. 또한 장기간 누적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 효과가 한순간에 나타나지도 않지만 한순간에 사라지지도 않는다.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성공하려면 일관성 있는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로 승부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제품의 장점이 많으면 그에 대한 평가도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용가능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연구에 따르면 10개의 장점을 떠올리게 하는 것보다 1개의 장점을 답하도록 한 집단의 평가가 더 긍정적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각만 하려는 '인지적 구두쇠'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봐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기관의 입장에서는 여러 개의 핵심 가치를 내세우고 싶겠지만, 장점을 나열하는 방식으로는 고객을 설득하기 어렵다.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브랜드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해 왔음을 알 수 있다.대외 커뮤니케이션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대내 커뮤니케이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무자들이 핵심 가치를 내재화하고 공유할수록 조직은 한 방향을 향해 추진력 있게 나아갈 수 있다. 개코원숭이의 부하 원숭이들은 20~30초마다 두목 원숭이를 쳐다본다고 한다. 그만큼 리더는 직원들의 관심 대상이다. 리더가 보여주는 핵심 가치에 대한 말과 행동, 그에 따른 일관성은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자신의 지위만큼 보는 눈이 생긴다. 직원들은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지만 리더는 전체를 봐야 한다. 고급스러운 명품과 저렴한 가격처럼 개별 부서의 목표는 때때로 상충된다. 담당자들이 자기 부서만을 고려한 결과물을 가져왔을 때, 조직의 핵심 가치에 맞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도 리더의 몫이다.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은 리더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 한 그루를 보기보다 전체 숲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에도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이유다.

2020-01-31 19:11:10

[광장] 케렌시아, 마음의 고향

[광장] 케렌시아, 마음의 고향

작가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수록된 첫 작품이 '퀘렌시아'(Querencia)인데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국어사전엔 '퀘' 대신 '케'로 등록되어 있으므로 '케렌시아'로 부르기로 한다. 이 말은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하며 투우장에서 투우가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잠시 쉬는 곳을 가리킨다.'케렌시아'를 '자아 회복의 장소'로 번역하면 너무 길고, '피난처'나 '안식처'로 해석하면 다소 건조하게 들린다. 김형석 교수는 '고향'이라는 수필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를 케렌시아처럼 썼는데, 고향은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므로 그것을 케렌시아로 보는 데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심향'(心鄕), 즉 '마음의 고향'으로 옮기기로 했다.심향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곳에선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마음은 편해지고, 몸엔 힘이 솟으며, 없던 자신감도 생겨나고, 선택의 기로에서는 가야 할 길이 보인다. 심향이라 해서 특별한 곳이 아니라 집 안의 작은 방일 수도 있고, 거실 내의 소파일 수도 있다. 주택에 거주하는 지인이 그 집의 반지하 공간을 소개한 적이 있다. 독서·음악·영화 등을 즐길 수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분이 방의 이름을 고심하고 있어서 '심향'을 추천해 주었다.필자에겐 심향이 많다. 셋만 꼽으면, 첫째는 경북대 꽃시계 옆의 숲, 둘째는 문경새재, 셋째는 영천호(湖)다. 학교에서 시간이 나면 백양로를 따라 걷다 꽃시계 옆의 숲속 벤치에 앉는다.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주변엔 소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에워싸고 있으며, 바닥에선 부엽토의 온기가 전해온다. 복잡한 일도 이곳에 앉으면 단순하고 수월하게 느껴진다.종일 시간이 나면 새재로 간다. 1관문인 주흘관에서 2관문인 조곡관을 거쳐 3관문인 조령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명품이다. 소나무, 잣나무, 박달나무가 조화롭게 숲을 이루고 곳곳엔 역사와 전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좌측의 조령산과 우측의 주흘산으로 난 등산로도 일품인데 특히 주흘산의 주봉, 관봉, 영봉과 6개의 부(釜)봉은 비경이다. 그간 수도 없이 방문했지만 갈 때마다 몸과 마음이 새 기운을 얻는다.세 번째는 영천호다. 공식 명칭은 영천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천호'라고 부른다. 순환로가 산기슭을 따라 나 있으므로 자동차로 굽이굽이 도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된다. 전망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호수 안으로 내달리다 멈춰선 듯한 키 낮은 산 능선, 이어 놓은 표주박처럼 물 위로 봉긋봉긋 솟은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호수의 동쪽은 운주산, 북쪽은 꼬깔산과 기룡산이 있는데 서너 시간의 산행 코스로 아주 멋지다. 4월 초순엔 순환로를 따라 벚꽃이 끝없이 만발한다. 벚꽃이 질 때 눈송이가 되어 흩날리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위의 심향들과는 달리 우리 모두가 갖는 마음의 고향이 있다. 명절이면 찾아가는 곳이다. 부모님이 계신 집일 수도, 큰집이거나 작은집일 수도 또는 시가나 처가일 수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좋은 시간만을 보내면 좋겠지만,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예기치 못한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한 채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번 설에는 형편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동근생'(同根生)끼리, 즉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자매들'끼리 따뜻한 정을 나누는 명절이 되길 바란다. 자신을 찾고 소중한 추억 하나 만들 수 있길 기원한다.

2020-01-17 19:47:53

[광장] 인권의 시대

[광장] 인권의 시대

2020년 새해가 희망차게 밝았지만 새해를 전후한 우리의 뉴스는 여전히 어둡다. 한 가족은 빈곤과 빚 독촉에 몰려 삶을 마감하고, 살해의 위협을 피해 한국으로 온 한 인도 가족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또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지구 한쪽에서는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하고 있다.지난해만 해도 세상을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아이는 친부모 손에 고통을 당하다 목숨마저 잃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건물 옥상에는 여전히 사람이 노동하게 해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주거의 안정을 잃어버린 이들은 철거를 앞둔 건물 앞에 주저앉아 있다.학생들의 성적과 두발의 상관관계에 대한 과학적 증명은 여전히 힘들어 보이는 데도 각 학교에서는 성적 향상을 위한 두발 단속이 실시되고 있다. 조사한 사건 중에는 흡연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소변검사를 강제하는 학교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본권인 학생 인권을 논의하면 교권이 갑자기 같이 등장하기도 한다.수많은 청년들은 '수저'라는 신종 계급론에 의해 각자의 고귀한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었다. 가정을 꾸리려던 이들도 벌이로 감당할 수 없는 집값의 무게에 행복을 미루어야 했다.여성들의 삶 역시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수많은 미디어에서 여성은 아름다움이 미덕인 듯 칭송하고 있다. 남녀평등한 세상이고, 여성상위시대가 도래했다는 뉴스 아래에 여성은 아직 밤길이 두렵다. 한국의 취업률과 평등지수 역시 OECD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노동하는 이들도 노동에 의해 자유로운 삶이 아닌, 노동에 예속된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 내가 가진 휴식의 권리를 행사함에도 사측의 눈치가 보이고, 쉬는 동안에도 울려대는 핸드폰 메시지를 무시할 수가 없다.올 한 해 조금씩 인권에 대해 이야기해 볼 것이다. "저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마주한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 편하지만은 않다. 인권은 낯설고 힘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배어 있다. 인권은 아직도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인권을 이야기하면, 먹고살기도 힘든데 배부른 소리라는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기도 했다. 앞서 세상 살기 고단한 이야기를 나열한 것들은 바로 이 인권이라는 영역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례들이다. 즉,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면 오히려 먹고살기 편해지는 세상이 된다.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하는 사소한 불편함부터, 끔찍한 인간 존엄의 훼손까지 인권의 가치는 두루 작동한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고 대중교통으로 출근해 일을 한 후 장을 보고 퇴근해서 가족과 저녁을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에도 인권의 원리는 작동한다. 저 멀리 멕시코의 국경과 중동의 전쟁 난민 혹은 과거의 대량학살과 인종차별에도 인권의 가치가 논의된다. 인권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기본 원리이자 가치 기준이다. 어렵고 낯선,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잘살기 위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로 인식해야 한다.덧붙여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인간의 존엄이 말살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1948년 만든 약속이 세계인권선언문이다. 선언문 중에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고(14조),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22조). 7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우리 사회는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야기해야 하는 인권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2020-01-10 15:11:43

[광장] 대구만 분지(盆地)일까?

[광장] 대구만 분지(盆地)일까?

위성사진에서 대구 지역을 살펴보면 남쪽과 북쪽에 비교적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대구분지'가 뚜렷이 나타난다. 북쪽은 팔공산지(1,193m)가 동-서로 가로놓여 있고, 남쪽은 비슬산지(1,084m)가 역시 동-서로 가로놓여 있다. 분지 가운데를 금호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 화원읍 사문진교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자세히 보면 팔공산 자락과 비슬산 자락 사이의 평평한 공간을 볼 수 있다. 그 평평한 공간이 바로 대구분지다. 분지 동쪽과 서쪽의 잘록한 부분은 금호강에 의해 침식된 부분이다. 분지 내부 평지도 금호강과 그 지류에 의해 침식과 퇴적이 반복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사전적 의미의 분지는 산지나 대지(臺地)로 둘러싸인 평평한 지역으로 설명된다. 분지(盆地)의 한자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부가 움푹하게 파인 그릇 모양의 땅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분지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평평한 땅이 산지로 완전히 에워싸여 있는 분지를 비롯해 대구분지처럼 좌·우가 열려 있는 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그릇처럼 생긴 분지로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가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화채 그릇을 닮았다 하여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학창 시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분지 도시가 대구라는 얘기를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분지 하면 대구를 사례로 드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왜 대구가 분지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온 것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팔공산에 대한 인식이 일반인들에게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공산당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영토를 끝까지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의 보루가 팔공산이었다. 또한 세계적 명소 갓바위가 위치한 곳이 팔공산이란 사실과 대구의 무더운 여름 날씨의 원인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지라는 점이 대구를 분지 도시로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라 본다. 어쨌든 대구가 분지인 것은 분명하다.그런데 대구분지와 관련하여 떠도는 허황된 루머 중 하나가 대구를 '고담도시' '수구 보수의 도시'라고 비꼬는 경우다. 하기야 전직 모 대통령조차 대구에 들러 지역민들에게 "대구 사람은 분지적 사고를 떨칠 필요가 있다"고 한 적이 있었다. '분지적 사고'란 용어 자체도 없을뿐더러 분지를 폐쇄적, 수구 보수적 개념과 연계시키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학창 시절에 배운 기억을 떠올려 보자. 우리나라는 육지 면적의 70%가 산지다. 부산, 인천, 울산, 포항 등 해안가에 인접한 삶터를 제외한 내륙의 삶터는 대부분 분지다. 서울이 대표적인 분지 도시다. 서울 외에도 남양주, 여주-이천, 대전, 충주, 광주, 남원, 춘천, 밀양, 거창, 안동, 영주 등지가 분지임에도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과 연관시켜 비꼬는 경우는 없다.그런데 유독 대구분지만큼은 예외였다. 아마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1960, 70년대 후진국 상황에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치는 동안 그나마 잘나가던 도시가 대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 역시 지역 출신이다 보니 온갖 시샘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분지라는 이유만으로 대구가 공격을 당할 필요는 없다. 또다시 그런 루머가 떠돌면 우리 지역민들은 이렇게 얘기해주면 어떨까?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해안가를 제외하면 모두가 분지라는데, 귀하는 어디에 살고 계시는지요?

2020-01-03 19:24:01

[광장] 정치인 이미지 전쟁

[광장] 정치인 이미지 전쟁

정치인의 이미지, 선거 연설, TV 토론 등에 대해 전문가적인 처방을 내리는 일이 업(業)이다 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나왔다.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당선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결과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그렇기에 정치인에게는 내부의 시각이 아닌 유권자의 시각에서 이미지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마케팅의 혁신가인 루이스 체스킨(Louis Cheskin)은 사람들이 제품의 포장에서 받은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제품 자체로 전이시킨다고 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교육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하지만 직접 학교를 찾거나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미디어에 자주 노출했고, 그 결과 교육 문제를 고심하는 정치인으로 인식됐다.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랴. 진정성이 없는 이미지 전략은 위선이고 기만이다.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주디 버군(Judee Burgoon)에 따르면 사람들은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일정한 기대치를 갖고 있다. 또 우리 스스로도 대중이 나를 이런 사람으로 봐줬으면 하고 소망하는 모습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다고 스티브 잡스와 같은 혁신가가 되겠는가. 몸에 맞지 않는 이미지 변신은 오히려 패러디의 소재가 되고 희화화될 뿐이다. 성공적인 이미지 전략은 후보자의 비전·장점과 유권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 간에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필자가 정치인들을 직접 컨설팅하면서 지켜본 결과, 이미지에 대한 후보자들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이를 기준으로 5가지 유형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먼저, 정치 영역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이미지 전략을 거부하는 '순진형'이다. 이들에게 이미지란 겉치장, 즉 나쁜 것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진실된 태도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작용한다. 하지만 이미지 전략은 실체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표현하기 위함이므로 후보자 본인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이미지 전략을 구사하기는 하나, 후보자의 장점을 부각하거나 단점을 보완하지 못하는 '미완성형'이다. 본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선행되지 않은 채 이미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만 앞선 경우로, 목표와 방향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셋째,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망우보뢰(亡牛補牢)형'은 이미지 전환의 시기를 놓쳐서 그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다. 포지셔닝은 적합했으나 실행 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마음속에는 기존 이미지가 이미 각인 효과로 작용하고 있다. 넷째, 후보자의 시각적 이미지와 언어적 메시지가 불일치하는 '언밸런스형'이다. 가는 안경테 안경을 쓰고 옅은 미소를 띤 사진으로 전문적이라는 인상을 주고자 한 반면에 논조는 친근함을 강조한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유권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센스형'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리더의 덕목과 시대상을 반영한 이미지를 정립한 가장 바람직한 유형이다.선거는 우리 사회의 의식과 문화 수준이 표현되는 장이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의 집합적 의식이 표면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선거 규모에 따라 정치인의 이미지가 가지는 중요도는 다르지만 눈앞에 있는 참모, 열혈 지지자, 지역 유지만 바라보느라 자칫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에는 소홀해지기 십상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공약을 내놓는 것만큼이나 그 공약을 제대로 실천할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2019-12-27 18:54:46

[광장]나이 듦, 그리고 삶의 보람

[광장]나이 듦, 그리고 삶의 보람

어릴 때는 친구들끼리 누가 나이가 많은가를 뽐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나이 먹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듦에 따라오는 질병(病), 외로움(孤), 가난(貧)과 같은 부정적 요소 때문일까? 하지만 나이 듦과 병, 외로움, 가난이 꼭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병약한 노인도 있지만 병약한 젊은이도 있다. 외로운 노인도 있지만 외로운 젊은이도 있다. 가난한 노인도 있지만 가난한 젊은이는 더 많다. 따라서 노인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병약함, 외로움, 가난은 노인의 진짜 특징이 아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좀 더 높을 뿐인데 사람들은 노인들이 그러한 특징을 지닌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노인에 대한 편견은 위의 세 가지 외에도 많다. 노인들은 지저분한가? 아니다. 지저분한 젊은이도 많다. 노인들은 추한가? 아니다. 멋있는 노인들도 많다. 노인들은 말이 많은가? 아니다. 젊은이들이 훨씬 말이 많다. 노인들에겐 꿈이 없는가? 있다. 단지 젊었을 때의 꿈과는 종류가 다를 뿐이다. 이처럼 노인은 병약하지도, 외롭지도, 가난하지도 않을뿐더러 지저분하거나, 추하거나, 말이 많지도 않으며 삶의 보람을 찾아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바쁘신 분들이다.그렇다면 나이 듦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 죽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갔기 때문이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종착역이 까마득한 미래였을 때는 죽음에 대한 자각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종점이 어른거리기 시작하면 걸음을 멈추고 싶고 심지어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막연히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리는, 그리고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혹은 종교나 미신, 사회적 관습이 만들어 낸 허상이거나 생명체가 지닌 삶에 대한 본능이 만들어내는 공포일 수도 있다. 어쨌든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을 앞당겨 너무 두려워하거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자연에서 왔다가 그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시에 닥치겠지만, 바로 이 순간이라 해도, 담담하게 맞이할 일이며, 나 없이도 세상은 본래의 계획대로 돌아감을 믿으면 된다.은퇴하기 전엔 직장에 충실하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었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자기 계발을 위해 약간의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은퇴 후, 자녀들이 성장해서 떠난 후에는 무엇이 삶의 보람일까? 그것은 개인의 건강, 재력, 인생관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삶의 보람을 본능적으로 좇을 수밖에 없다.결국 삶의 보람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문제다. 완성해야 할 목표를 향한 사명감으로 살 수도 있다. 또는 사회봉사를 통해 이웃에 헌신할 수도 있다. 또는 독서, 취미, 운동, 사교 등 하고 싶은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도 있다. 자신이나 사회에 유익한 어떤 활동이든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된다. 소일거리가 없는 권태로운 시간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노거수(老巨樹)의 휘어진 가지와 옹이진 둥치에서 겪은 풍상과 살아온 세월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에서도 살아온 연륜과 삶의 지혜를 읽어낸다면 좋지 않겠는가?

2019-12-20 18:55:08

[광장]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다

[광장]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다

매주 한 편씩 방송하는 KBS '인간극장'과 일요일 점심 때마다 전국에 울려 퍼지는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고 값지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극장'은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까지 5부작으로 잔잔하게 우리의 이웃들이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전국노래자랑'은 일요일 낮마다 전 국민이 즐겨 들을 수 있는 이웃의 노래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매주 휴먼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한결같은 공통점은 묵묵히 자기 직분에 화려하지 않지만 성실하고 진솔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더욱더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긴 인생을 비록 5편으로 보여주기에는 한계도 있지만 그래도 TV란 창을 통해 그분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과 그 과정에서 겪은 갖가지 고통과 갈등 등이 엮여 한 편의 인간드라마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공감을 가진다.'인간극장'을 통해 보여주는 매주 1편씩의 이야기는 다소 극적인 감동은 없을지 몰라도 정말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을 보여주기에 오래 장수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배움과 남녀와 세대를 떠나 공통적으로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와 헌신과 봉사의 가족애는 이웃과 자연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가슴이 따뜻하고 착한 사람들의 스토리이기 때문이다.짧은 인생에 있어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습들을 어찌 다 보고 경험해 볼 수 있으리오? 이런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분야나 곳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진실은 통하는 법이기에 이들이 엮어내는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보면서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느끼게 한다.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 또 하나는 '전국노래자랑'이다. 우리의 이웃들이 지방 축제의 장에 모여 같이 쉽게 어울리며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세대 간, 남녀 간, 지역 차이의 갈등이 심한 요즘이지만 이 모든 것을 허물고 한자리에 온 세대가 어울려 무슨 노래를 부르던 간에 같이 들어주며 웃고 호흡할 수 있는 화합의 장(場)이기 때문이다.지역사회에서 저마다 숨은 끼와 장기를 가지고 나와 가족은 물론 이웃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수십 년을 이어오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도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 압축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소 작위적인 설정은 있을지언정 전체적으로 보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진실성의 위대함이 이런 장수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는 이유라고 본다. MC 송해 사회자 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이 장점이자 약점이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국민의 사랑을 받아 온 프로그램이 세계사적으로도 없을 정도이다.위대하고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들의 강연이나 토론도 물론 유익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 이웃의 평범한 이야기에 더 공감하고 애환을 함께할 수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인간극장'과 '전국노래자랑'이라고 본다. 이 두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이웃의 웃음과 애환과 삶의 진솔된 모습에 진정한 격려와 박수를 보내며,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가야 할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열광하는 삶보다는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고 값지다고 본다.

2019-12-13 19:29:56

[광장] 천연기념물 제435호 달성 비슬산 암괴류

[광장] 천연기념물 제435호 달성 비슬산 암괴류

2019년 기해년도 이제 12월 달력 1장을 남겨 두고 있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지난 10월과 11월에는 빙하기와 관련하여 대구 선사시대 인류를 얘기했다. 내친김에 빙하기 얘기 하나 더 해보자.빙하기와 관련한 대구의 소중한 이야기는 비슬산 암괴류다. 대구에는 천연기념물이 2곳에 있다. 하나는 천연기념물 제1호인 대구 도동 측백나무숲이고, 다른 하나는 천연기념물 제435호인 달성 비슬산 암괴류다. 제1호가 대구에서 탄생했고 세월이 한참 흘러 달성 비슬산 암괴류가 제435호로 지정되었다.대구에는 천연기념물은 물론 국보·보물급, 더 나아가 세계유산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문화재가 있음에도 지역민의 성향 탓인지 별 관심이 없다. 비슬산 암괴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계기는 2000년대 초반 본인의 연구와 언론의 노력 결과다. 암괴류는 일본식 지형 용어라서 별로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학술용어로 굳어져 있어 달리 방법이 없다. 필자는 여기에서 암괴류라는 용어 대신 '돌강'(바위강)으로 부르고자 한다. 돌강은 영어로 'block stream' 'boulder stream'으로 표시한다. 말 그대로 돌이나 바위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에서 붙여진 명칭이다.비슬산 돌강은 원래 길이가 약 2㎞에 달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1㎞를 조금 넘어가는 정도다. 실제로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에도 현재의 상태만 보고 세계 최장(最長)이라 하지 않았다면 천연기념물 지정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돌강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채 개발에만 목맨 결과다.돌강 곳곳에 개발로 인한 상처가 생겨 안타깝다. 소재사 입구 다리 아래 있었던 돌강의 바위를 모두 걷어내 조경석으로 장식한 일이나, 인공폭포를 만든 것이 그렇다. 돌강 중간에는 작은 사방댐을 조성했고, 연못까지 만들어 놓아 참으로 가관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잘된 일이라 생각된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난개발이 있어 여러 차례 얘기를 했음에도 신통치 않다. 최근에는 케이블카도 설치하려 한다니 가슴이 답답하다. 돌강 최고 전문가가 지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 허가만 바라보고 있는 지자체가 안쓰럽다. 비슬산 돌강은 최종 빙하기(10만 년 전〜1만 년 전) 때 거대한 기반암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진 돌들이 산지 상부에서 아래로 조금씩 이동하여 형성된 지형이다. 2017년 세계적 학술지에 필자와 공동연구진은 비슬산 돌강을 연구논문으로 게재하였다. 지역의 지형과 관련하여 세계적 학술지에 게재된 경우로는 첫 사례다.비슬산 대견사 주변 스님바위, 코끼리바위 등으로 이루어진 기반암은 7만9천 년 전에 노출되어 풍화를 받았고 이때 기반암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들이 아래쪽으로 느리게 이동하였다. 즉, 산 정상부인 대견사에서 아래쪽인 비슬산관리사무소로 갈수록 나이가 많은 돌이 위치한다. 예를 들면, 대견사 주변 돌강의 바위들은 빙하기가 끝나가던 시기인 약 9천700년 전에 형성된 가장 젊은 돌인 반면 비슬산관리사무소 부근에 위치하는 돌강의 바위들은 대견사 부근 기반암에서 약 6만5천 년 전에 떨어져 나온 바위들이 이동한 것이다. 돌강의 바위들이 1천 년에 26m의 아주 느린 속도로 이동한 것임을 알 수 있다.비슬산 돌강의 바위들이 주빙하적 기후환경(알래스카와 비슷한 기후)에서 한창 이동하고 있을 무렵, 2만 년 전 백두산 일대에서 대구로 이주해 온 대구 최초의 인류인 구석기 인류도 이 광경을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2만 년이라는 긴 시간조차 짧게 여겨진다.

2019-12-06 19:37:54

[광장] 너만 모르고 다 알아

[광장] 너만 모르고 다 알아

누구나 알 법한 유명 정치인이 뉴스에 나왔다. 축하하는 장면,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나온 표정이었을 테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우리는 종종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보여지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노출되는 모든 순간, 모든 모습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우리가 본래의 모습을 장식품으로 꾸미고 뒤덮는다 한들 내면의 속성은 우연한 기회에 수면 위로 노출되기 마련이다.우리는 겉모습이 진정한 자아인 줄 착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마음의 창은 다르다. 요하리의 창(Johari's window)은 한 개인의 자아가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4가지 영역으로 구분했다.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아는 '열린 자아', 상대방은 알고 있으나 정작 나는 모르는 '눈먼 자아', 나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자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자아'가 그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눈먼 자아다. 국민이나 타 조직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잘 보이는 문제점을 정작 그 내부에서는 집단사고에 빠져 깨닫지 못하거나 외면하려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국민 정서와 괴리'됐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서두에 나왔던 유명 정치인은 왜 눈먼 자아에 빠져 있었을까. 언론 노출이 잦은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신체언어가 반복되는 것은 주변에서 아무도 그의 눈먼 자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직급이 올라가고 조직 내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질수록 리더십의 사각지대도 커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승진과 연봉을 결정하는 사람에게 돌직구를 날릴 만큼 용기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정치는 소망의 총체라고 했다. 때로는 지나친 자기합리화로, 때로는 감언이설에 둘러싸여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놓치곤 한다. 본인에 대한 눈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대개 리더들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고 하지만 막상 결점을 지적하면 속상해 하거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나를 무한히 사랑해주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객관적인 현실 인식으로 조언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 또한 복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자기 이해는 정확해진다. 눈먼 자아는 피드백 즉, 상대방의 조언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갈 수 있게 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타인과 소통하는 영역이 넓어질 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보다 수용적인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아프지만 필요한 것이다. 그 가능성을 위해서는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열린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적인 조언을 사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보복하는 것은 입을 닫게 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외골수형 리더들이 어떠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는지 확인해 왔다. 자신을 향한 조언은 달콤하지는 않지만 성장에는 무한한 자양분이 된다. 조직의 발전으로도 연결된다.나에 대한 진실은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지 그들이 내게 하는 말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리더의 자리, 갑의 자리에 있어서 들려오는 좋은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애정 어린 조언을 포용할 줄 아는 권력자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2019-11-29 19:53:54

[광장]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광장]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크로노스는 일정하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다. 가령 1년, 하루, 한 시간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 즉 '객관적'인 시간이다.크로노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막을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 크로노스 앞에서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역동 우탁 선생은 고려 말에 지은 '탄로가'에서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탄식했는데, 역동 선생이 한탄한 시간이 바로 크로노스이다. 가수 서유석이 '가는 세월'에서 잡을 수 없다고 한 '세월'도 크로노스이다.반면에 카이로스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시간이 길다거나 짧다는 것은 물리적, 객관적 길이에 따른 판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한 시간처럼, 또는 한 시간을 1년처럼 느낄 수도 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은 시간이 빠르게,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말은 더디게 감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때의 시간이 카이로스이다.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인 카이로스에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 마음과 의지가 담긴 특별한 시간이며 우리가 능동적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때'나 '기회'이다.크로노스는 흘러가고 만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잠든 순간에도 크로노스는 흐른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마음속에 기억과 경험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들뢰즈(Deleuze)는 '들뢰즈, 유동의 철학'(2008)에서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는 점(點)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재란 언제나 현재와 과거의 복합체이고 결정체(結晶體)"라고 했다. 그가 여기서 '현재' 또는 '과거'라고 한 말은 카이로스적 현재 또는 과거를 말한 것이다.그렇다면 흘러가버리는 크로노스는 무의미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 누구도 하루 24시간을 카이로스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적당한 휴식과 수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 멍 때림조차도 삶을 더 활력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지혜롭게 조합시킬 필요가 있다.작가 김선영은 '시간을 파는 상점'(2012)에서 "삶은 시간의 내용"이라 했다. 다시 말해 삶은 자신이 사는 동안에, 카이로스적으로 살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이다. 마지막 순간, 보람과 추억으로 가득 찬 생을 회고하고 싶다면 적어도 깨어서 활동하는 동안은 카이로스로 채우려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때와 기회를 기다린다면 더더욱 그러하다.카이로스를 위해서는 시간을 '자기 주도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 시간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어 매사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독서, 취미, 운동, 사교, 종교, 봉사 등 그 무엇이든지 간에 진실로 하고 싶은 활동을 찾아 자발적,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직업상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차피 해야 하고, 보내야 할 시간이라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즐기면서 참여하자. 시간의 주인으로서, 때로는 왔다가 사라지고, 때로는 마음과 몸에 기억과 경험으로 쌓이는 시간을 정중하게 맞이한다면,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2019-11-22 21: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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