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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공존의 정원 랑데부 정원

[광장] 공존의 정원 랑데부 정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인지, 최근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란 인간도 자연계의 일원으로, 다른 생물들과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겸손함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일반 정원은 물론 생태정원을 돌아봐도 이와 같은 공존의 개념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 곳이 그리 흔하지 않다. 우리 대다수는 정원을 생물이 살아가는 장소로서보다는 인간이 최대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공간을 순수히 생물에게 내어준 사례도 있다.파리시 센 강변에 미테랑도서관이 있다. 책을 세워둔 듯한 도서관 건물 외형도 독특하지만, 도서관 건물 내부로 산소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조성된 정원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정원은 석회암 땅을 약 3m 정도 파서 식물이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1만㎡에 달하는 정원의 전체 면적 중 4분의 3 이상이 숲이며 나머지는 초지이다. 침엽수 위주의 큰 나무가 숲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중 100여 그루의 구주소나무는 노르망디 지역 숲에서 옮겨온 것이다.미테랑도서관의 정원 조성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조성 후 13년 동안 정원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정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요즘도 사람들에게 쉽게 개방되지 않고 있다. 매년 6월 랑데부의 날 3일간만 예약 없이 방문할 수 있고, 방문 예약의 경우도 월 2~4회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정원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45분 이내이며 가이드가 동반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수많은 동식물과 곤충이 이 정원에 터전을 잡고 안전하게 살고 있다. 말 그대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정원 조성을 놓고 본다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공존의 참의미에 닿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연못 정원을 조성할 때 물 안과 물 밖을 경계 지어 안은 생물의 공간, 밖은 사람의 공간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런데 세밀하게 둘러보면 작은 동물이나 곤충은 한곳에서만 붙박은 듯 살지 않는다.그들은 물가에서 알의 형태로 있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풀숲에서 생활하는데 풀숲은 이미 사람의 공간으로 정해져 있어 그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다른 생물들에게 양보해 주지 않는다면, 인간만 존재하는 기묘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람과 식물만으로 자연이 지속될 수는 없다. 그곳에는 작은 동물과 곤충도 있어야 한다. 생물다양성이 존재해야 인간의 삶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오래전 가족과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여행하다가 철나비가 서식하는 여관에서 묵은 적이 있다. 마침 나비가 부화하는 시기로 여관 한쪽에는 집 뒷마당 출입을 통제한다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나비에 대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 때문에 조용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참으로 감동적인 경험이었다.21세기, 인간의 최대 화두가 기후변화 대응과 생물다양성의 증진이다. 구호에 그치지 말고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다양하게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도시 정원 어딘가에 작은 생물들의 서식 공간을 조성하여 작은 동물이나 곤충이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서 그 첫걸음을 시작해보자. 아침이 되면 사람은 활동이 시작되지만 자연 속의 생물은 대개가 야행성이므로 수면을 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사람과 생물의 공존은 이처럼 사람이 자연 세계를 이해할 때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20-09-25 15:22:35

[광장] 기후변화, 이변이 아니라 일상이 되다

[광장] 기후변화, 이변이 아니라 일상이 되다

기후변화의 시대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기후는 변화를 넘어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빅 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우리는 엄청난 양질의 데이터시대에 살고 있지만, 기후나 기상에 대한 예측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기후 위기는 변동성이 클 뿐만 아니라 예측도 어렵기 때문에 파급영향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기후변화를 수십 년 혹은 그 이상 오래 지속되는 기후 상태의 평균이나 변동성의 변화로 정의한다. 이는 자연적 변동성을 포함하여 인간 활동과 시간 경과에 따른 모든 기후변화를 포괄한다.기후변화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완화와 적응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완화는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인 온실가스의 배출을 줄이는 활동이다. 그리고 적응은 온실가스를 감축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나타날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적합한 행동과 기후변화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기후변화는 우리 삶뿐만 아니라 특히 농업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후변화에 대한 취약성은 기후 노출, 민감도와 적응 능력으로 이루어지는데, 농업 생산은 기후 노출과 이로 인한 민감도가 가장 높은 산업이다. 농업은 작물의 재배 시기, 작부 체계 변화, 수확량 및 품질, 병해충 발생 등 기후변화의 영향이 다양하다. 축산업은 온도, 습도의 변화로 인한 가축 스트레스 심화와 각종 전염병 발생으로 생산성 저하 문제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기후변화의 취약성에 따른 농식품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실천 가능한 적응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기후변화의 시대, 농업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농가에 농업 생산의 위험과 불확실성은 피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생명보험을 들 듯이 농가도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일정 보험료를 납입하고 기상재해 발생 시 피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최근 재해보험의 보상금 지급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기후변화가 농업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한 산업은 농업이지만 우리 모두는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만 할 상황이 아니다. 일상이 되어가는 기후변화는 우리의 인식을 무디게 만든다. 항아리 속의 개구리는 천천히 뜨거워지는 물 속에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러한 개구리를 미련하다고 비웃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 속의 개구리 같은 존재가 아닐까?기후변화의 거대 담론은 마치 딴 세상의 먼 미래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다 보면 미래세대의 구슬을 빼앗을 수 있다. 구슬 뽑기 게임에서 바구니 속의 구슬을 뽑은 다음에 다시 집어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회는 줄어든다. 뽑은 구슬을 바구니에 복원하는 것이 하나의 지구를 함께 나누는 현명한 방법이다.기후변화는 현재에 멈추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기후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변화한다. 변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해결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기에 현재 시점에서의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후 위험을 바로 인식하고 공통의 가치에 기반한 협력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의 연대, 단기 이익이 아닌 장기의 지속 가능성 가치를 세워야 한다.이상호 영남대학교 식품경제외식학과 교수

2020-09-18 14:02:25

[광장] 의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

[광장] 의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

지금부터 45년 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2학년 진급을 앞두고 문과·이과를 나눌 때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당시 학제로 이과를 선택해서 '수학2'라는 과목을 배워야 했다. 병원도 없는 산골 깡촌 무의촌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의사에 대해 무얼 알고 의대를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제목이 '청녀'(靑女, 1974년)인데 아마 영화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분들도 이 영화는 처음 들어볼 정도로 영화사는 물론이고 일반 팬들에게도 잊힌 영화이다.나는 당시 이 영화를 지금은 없어진 대구 비산동 오스카극장에서 봤다. 내용은 의사가 낙도에 의료봉사를 하러 가서 시각장애(장님)에다가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를 구해서 치료하고 돌봐준다는 휴머니즘이 바탕에 깔린 그런 영화였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큰 감동을 받았고, 주인공 남자 의사에 대해 너무나 강렬한 매력과 선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 나도 의사가 되어 낙도와 같은 무의촌에 가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휴머니즘 의사가 되자!' 하고 15세 소년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사실 이 영화는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프랑스의 A. 지이드라는 작가의 '전원교향악'이라는 소설을 번안한 것이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의사가 아니라 목사인데 주인공 목사 역시 매우 훌륭한 선행을 베풀고 헌신하는 사람으로 나온다.나중에 알게 된 터이지만 이 영화는 '만추'로 유명한 이만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당시 민청학련이라는 시국 사건에 연루돼 수배 중이던 김지하 시인이 조감독이라는 직책으로 당국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은 영화 촬영 현장이던 서해 대흑산도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돼 10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는 후일담도 있다.중국 근대 사상가이자 작가인 루쉰(魯迅)은 '아큐정전' '광인일기' 같은 문학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특히 1980, 90년대에는 경북 봉화 출신의 걸출한 산문가인 전우익 선생이나 신영복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널리 소개되고 많이 읽혔다. 루쉰은 몰락한 지주의 아들인데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센다이 의과대학에 유학을 갔다. 당시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의과대학 실습시간에 환등기로 생체해부학을 공부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일본 군인들이 중국 민중들을 짓밟는 영화를 보고 사람의 육체를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의과대학을 자퇴하고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실제로 루쉰은 20세기 신문명 초기 중국 민중들뿐만 아니라 세계 지식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좋은 글을 많이 썼다.아마 근래 우리 사회의 빅 데이터를 돌려본다면 아마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목사' '의사'가 아닐까 싶다. 종교 유무를 떠나 보통의 장삼이사들이 생각하기로 목사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영성을 높이고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의사는 몸이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내 영혼이 힘들 때 누군가가 곁에서 해주는 진실한 기도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가.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아플 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은 얼마나 큰 위안과 치유가 되었던가?오늘은 문득 중학생 때 읽었던 A. 지이드의 소설 '전원교향악'과 이만희 감독의 영화 '청녀'가 생각나면서 45년 전 잠시 의사가 되고자 했던, 분별없으나 아름다웠던 청춘의 내 모습을 회상해본다.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2020-09-11 14:30:05

[광장] 치유정원은 “건강에 초점을 둔 특수 정원이다”

[광장] 치유정원은 “건강에 초점을 둔 특수 정원이다”

최근 산림청은 영주에 국립산림치유원을 건립하면서 숲 자원을 활용한 건강관리 전문교육과 치유 시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산림청 산하 녹색사업단은 사회적 약자 계층에 치유정원을 조성해 주면서 정서적 안정감 및 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사업을 하고 있다.필자는 15년 전 모 대학교 원예학과 교수분이 원예치료학 분야를 개척하면서 '치유정원론'이란 주제로 몇 시간 강의를 부탁한 적이 있어서 이를 계기로 치유정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국내에는 두서너 군데 비슷한 성격의 치유정원이 있었으나 교과서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치유정원은 마음과 몸의 병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치료의 개념보다는 대체요법의 성격이 강한 간접 치료의 의미를 가진 정원이다. 요즘 눈에 급격하게 띄고 있는 병원 옥외 정원이 그 한 예이다. 병원 옥외 정원은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원예 활동과 다양한 체험을 통해 병이 나아지도록 돕는 간접적인 치료의 공간이다.치유정원의 역사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궁정 의사는 왕과 귀족들이 정치적 일로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면 "정원을 산책하십시오"라고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다.이후 치유정원은 중세 시대 수도원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수도원 정원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 본 미국 영화 '기적'이 떠오른다. 수녀와 군인 간의 금단의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부상병과 간호사의 관계로 만난 두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면서 거닐던 곳이 바로 수도원의 정원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건강이 빠르게 회복되어 예정보다 일찍 전쟁터로 떠나게 되는데 그들이 거닌 그 정원이 바로 치유정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17~18세기, 서구는 그야말로 치유정원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폐결핵과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 환자처럼 대량 발생했지만 그 당시 의학이라고는 대체의학뿐이어서 신선한 공기와 태양광선이 내리쬐는 곳, 즉 음이온이 많은 해변가나 숲 근처 병원에서 요양하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그래서 환자들은 다양한 기능의 치유정원이 있는 병원 시설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첨단의학의 발달로 대체의학이 쇠퇴 일로를 걸으면서 특수목적 치유정원의 의미도 점점 옅어졌다.오늘날 도시의 환경이 나빠지자 도시민들이 쾌적한 외부 공간으로 관심을 옮겨가면서 치유정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치유정원은 건강에 초점을 둔 특수 정원이다. 일정한 양의 나무와 물이 흐르는 공간, 향기로운 허브와 약용식물 등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치유정원이라고 하면 따뜻한 햇살 아래 데크에 편안히 누워 있거나, 휠체어를 탄 환자가 향기로운 식물에 코를 대고 있거나, 녹음수 아래 환자와 식구, 또는 의료진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면서 담소하는 모습의 정원이 연상된다.여기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정원으로 나갈 수 없는 소녀가 병실 침대 옆 창문을 통해 치유정원에 펼쳐진 자연의 풍경을 보는 모습이다. 굳이 정원에 가지 않더라도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쾌적해져서 치유의 효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치유정원이 필요한 곳이 어디 병원뿐일까? 우리들은 만성 스트레스에 더하여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까지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몸을 앉히고 마음을 내려 둘 치유정원이 더 필요하다. 굳이 거창한 시설이 아니어도 된다. 건강을 생각하는 작은 정원이 도시 곳곳에 만들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장병관 대구대 도시조경학부 교수

2020-08-28 15:18:30

[광장] 바보야! 농업은 환경이야!!

[광장] 바보야! 농업은 환경이야!!

52조5천198억원, 1.8%. 이 수치는 무엇일까? 답은 2018년 우리나라 농업 생산액, 그리고 농업이 경제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한마디로 농업을 통해 생산되는 경제적 가치를 나타내는 수치이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의 생산, 고용, 부가가치의 감소를 이야기하며 한국 농업의 쇠퇴를 당연시한다. 1970년 한국 농업은 고용의 50%, GDP의 26%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 경제의 근본이었다. 하지만 경제 발전 과정을 거치며 농업에서 제조업,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돈이 되는 산업에 인력과 자본이 이동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시작으로 56개 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수입 농산물이 국내 시장에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다. 이로 인한 공급의 수요 초과로 농산물 가격이 저렴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농산물 가격은 생산 작목과 생산량을 결정 짓는 주요 잣대이며, 이를 통해 농업 생산 체계의 변화가 발생한다.특히 WTO, FTA에 따른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는 단일 작물 체계를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상위 10개 작물이 전체 농업 생산액의 58%를 차지할 정도로 특정 품목의 생산 집중도가 높다. 특정 품목의 집중도가 높아질수록 농촌 환경 및 자원 이용은 단순화된다. 또한 농업 생산 작물의 단순화는 경기 변동 및 기후변화 등 외부 환경 영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농업은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업이 가진, 농업을 통해 창출되는 다양한 가치들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선진국은 농업을 경제, 사회, 환경, 그리고 생태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가격이라는 경제적 잣대로만 농업을 평가하는 근시안적 태도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저해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농업 생산은 그 자체가 생태 활동이다. 농산물 시장 개방의 첨병 역할을 하는 WTO조차도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 농업의 생태적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 농산물이 값싼 수입 농산물에 밀려 낮은 시장 가치로 평가받고 있지만 농업은 그런 일차원적 잣대로만 볼 수 없다. 경제 이상의 생태적 가치, 현 세대를 넘어선 미래 세대의 생존 문제를 고려한 다차원적 측면에서 농업을 평가해야 한다.과거 습지는 쓸모 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순천만 습지를 보자. 작년 한 해 순천만국가정원과 습지에 무려 1천3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순천만 습지는 생명의 보고이자 환경의 파수꾼을 넘어 훌륭한 관광 자원이다. 심지어 순천은 몰라도 순천만은 알고 있다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다. 지금 당장 쓸모 없다고 버린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한다. 문제는 후회해도 버려진 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농업은 생태의 보고(寶庫)이자 환경 그 자체이며, 농산물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상품 그 이상의 다원적 가치를 가진다.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만 얻을 수 있는 홍수 조절, 생물 서식지, 탄소 저장 등의 환경 가치가 있는데 한 번 파괴된 생태계는 복원이 불가능하거나 복원을 위해 천문학적 비용이 발생한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선진국들이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농업을 환경과 공동체라는 측면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농업은 환경'이라는 진리를 먼저 깨달은 선진국의 길이 우리 앞에 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2020-08-21 14:27:30

[광장]죽음에 대한 상념

[광장]죽음에 대한 상념

죽음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다양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에 대한 가장 절대적이고 예각화된 이데올로기는 종교가 아닐까. 내 생각으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죽음을 전제로 하고 죽음에 대한 탐구를 가장 본질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다음으로 문학이라든가, 철학과 같은 인간의 정신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 뒤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게 인간의 지혜이다.나는 올여름 너무나 인상적인 세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했다. 세 사람 다 예순을 넘긴 나이어서 젊어 요절한 죽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애석함이 덜한 죽음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그렇듯 죽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죽음과 혈육이거나 정신적으로 깊은 연대감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비록 나이 든 죽음이라 해도 그 슬픔은 크게 줄지 않을 것이다.김종철(1947~2020) 선생이 지난 6월 하순에 작고하자 그의 죽음을 알리는 한 유력 중앙 일간지의 헤드라인이 '한국 생태주의 운동의 대부'라고 붙였다. 이런 사회적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는 이 분야에 몰두했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을 남겼다. '시와 역사적 상상력' '대지의 상상력'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등은 그가 남긴 저서의 제목이다. 이런 책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대지(大地)의 흙을 사랑했고, 근대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많은 노력을 바쳤다. 그는 대구 영남대에서 20년 넘게 교수로 근무했고, 격월간 '녹색평론'이라는 기념비적인 잡지를 대구에서 창간했다. 그가 남긴 많은 육성과 저서를 통해 한 발언의 최종적인 의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겸손'과 욕망의 자기 '절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기던 그는 어이없게도 새벽 산책길에서 실족사한 걸로 알려졌다.박원순(1956~2020) 선생은 사회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그 와중에 지난 7월 초 극단적인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현재 그는 정치적 지지자나 반대자들에게 많은 논란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의 삶의 실존적인 측면만 보면 그는 농경문화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었다. 양파 농사를 하는 지방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한국 최고의 명문고와 명문대에 들어갔고, 학생운동으로 제적되고 옥살이하고 사법고시를 패스해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가뿐하게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권좌의 핵심인 검사를 곧바로 치우고 시민운동가로 '참여연대', '아름다운 가게' 등 그때까지 한국 사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이슈와 희망의 상상력을 우리 사회에 불어넣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그가 언젠가 외국에 나갔다가 귀국하면서 수천 권의 책을 구입해 비행기 화물로 부치고 몸만 들어왔다는 기사를 읽고 너무 부러웠던 적이 있다.서오년(1927~2020)은 나의 어머니다. 안동 낙동강 변의 조그만 산골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지의 보국대 송출을 피해 열다섯 살에 결혼해 우리 6남매를 두셨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 가난하고 힘겨운 일생을 보냈다. 흰 수건을 쓰고 긴 밭이랑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호미로 하염없이 밭을 매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유난히 삶과 자식들에게 집착하셨지만 마지막 2년을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보냈고, 코로나19로 6개월은 자식들 얼굴을 화상으로만 보다가 가셨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불쑥 예고 없이 오기도 하고 예견된 방식으로 오기도 한다. 이 죽음에 대해 명복을 빌면서 현재의 내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2020-08-14 13:24:01

[광장] 잡초

[광장] 잡초

마당이 있으면 잡초와의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정말이었다.봄에는 전쟁이 아니라 놀이다. 쉬엄쉬엄 놀이 삼아 뽑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장마에 접어들면 모기에 물리고 땀 범벅이 되면서 잡초를 뽑지만 돌아서면 또 무성하게 자란다. 오기가 생기고 잡초에 대해 적개심도 생긴다. 바둑 둘 때는 누워서 천장을 보면 벽지 무늬가 전부 바둑판으로 보이더니, 잡초와 싸움을 벌일 때는 어디를 가나 잡초만 보인다. 그리고 적개심으로 뽑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걷다가 도로의 잡초를 보면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그것을 뽑고 있다. 거리의 잡초는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데 왜 뽑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냥 잡초이니까?3년 전부터 잡초는 정리만 하고 완전 제거하기를 포기했다. 처음에는 내가 키우는 채소, 꽃을 방해하는 잡초를 그냥 둔다는 것이 속이 상했다. 그런데 잡초 뽑기를 포기하자 또 다른 재미있는 현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잡초의 사전적인 의미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면서, 농작물 성장에 방해를 주는 풀이다. 그렇다면 잡초를 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이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잡초에 대해 적개심을 버리고 관찰을 하고 공부를 하자 잡초의 다양한 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선 꽃이 예쁘다. 민들레의 노란 꽃이 화려하게, 개망초의 흰꽃이 우아하게, 토끼풀의 작은 분홍꽃이 귀엽게 보였다. 정리되지 않고 어지러운 면은 있었지만 따로 돈 들이고 공들일 필요 없이 꽃밭이 되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잡초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개망초 잎을 전으로 구워도 좋고, 민들레 잎을 샐러드에 섞어도 약간 쓴맛이 입맛을 돋우었다.과거 요리하는 사람이 텃밭에서 금방 따온 허브로 음식을 내면 우선 기가 죽었다. 뭔가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런데 알아보니 지금 허브란 것이 애초에는 들에 피는 잡초였다. 허브라고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 텃밭에도 처음 씨를 뿌려 둔 것이 몇 년이 지나자 알아서 자라고 있다. 관리하지도 않는데 매년 넘쳐날 정도로 자란다. 땅을 뒤집고 흙을 갈아도 집요하게 자란다. 손님이 오면 그냥 허브 가지를 꺾어서 유리병에 꽂고, 잎으로 요리만 해도 손님들은 기가 죽는다. 우리가 이용하기에 따라 잡초가 되기도, 음식 재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낀다.대표적인 잡초는 토끼풀이다. 번식력이 놀랍다. 그런데 토끼풀을 뽑으면서 뿌리를 보니 주위에 작은 혹이 보였다. 자료를 찾으니 질소균을 고정하는 뿌리혹이었다. 질소는 식물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하다. 스스로 질소 고정을 못 하는 다른 식물 입장에서는 질소를 공급하는 토끼풀이 꼭 필요한 친구인 셈이다. 농부에게 그런 사연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몰랐지만 척박한 땅에는 먼저 토끼풀을 심으라고 어른들이 얘기한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땅에 토끼풀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되니 토끼풀이 귀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모든 잡초는 자기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자연에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닐까?무엇보다 잡초를 이해하니까 잡초에 대한 적개심이 없어졌다. 이제는 길에 보이는 잡초를 뽑지도 않는다. 어떤 꽃이 피었는지 살피기도 하고, 시멘트로 꼭꼭 눌러도 틈으로 풀이 자라 나오는 우리나라가 축복받은 땅이라는 생각도 든다.잡초 때문에 느낀 것들이 있다. 고정관념이나 여론에 사로잡혀 사물이나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 대상을 천천히 관찰하고 최종 판단은 나중에 하자.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자. 모든 사람이 해롭다고 생각해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보자.

2020-08-07 09:48:41

[광장] 퇴계 선생은 매화와 친구였다

[광장] 퇴계 선생은 매화와 친구였다

최근 산림청에서는 정원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정원부서를 발족시키고 '수목원·정원법'을 제정하였다. 제정된 정원법에서는 국가정원, 지방정원 그리고 민간정원 등 여러 유형으로 정원을 구분하고 있는데 국가정원 제1호로 순천만 정원이 지정되었다. '정원은 자연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정원이 산림청에 소속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원의 필요성을 실감하는 큰 이유는 정원이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깨닫고 존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퇴계 이황은 대유학자이자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정원설계가였다. 그는 이론의 틀을 벗어나 항상 자유롭고 독창적인 생각으로 집과 정원을 조성했다. 퇴계 선생은 공직에서 물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집 한서암을 지을 때 개울에 인접해서 초가집을 지었다. 홍수의 피해를 모를 리 없었지만 물소리가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집 주위에 소나무·대나무·매화나무, 즉 삼우(三友)를 심어 작은 정원을 만들었으며, 이에 더하여 국화와 과(오이 또는 모과로 해석), 즉 이우(二友)를 더하여 오절(五節)이라 하였다.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한서암은 어찌 보면 정원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나 조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의 물소리와 절개를 뜻하는 다섯 종류의 나무와 식물로 이루어진 초기 정원은 청빈과 절개를 자연의 순리로서 마음에 익히고 실천해 간 퇴계의 사상을 실현한 장소였다.한서암 시절 몇 년 후 퇴계는 계상서당을 짓고 이곳에서 10여 년을 보냈는데 그 정원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못을 조성하고는 과를 대체해서 연(蓮)을 심었다. 연과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국화, 여기에 퇴계 자신을 더하여 이 정원을 육우원(六友園)이라 했다. 이처럼 퇴계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생각했음은 물론 다섯 가지의 식물을 인격화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몸소 보여 주었다.자연 속 개울을 낀 정원은 도산서당에도 조성되었다. 도산서당에 퇴계는 정사각형 연지(蓮池)인 정우당과 작은 개울 건너 화단을 만들었다. 거기에 평생의 친구였던 매화, 대나무, 소나무 그리고 국화를 심고 이곳을 절우사라 했다. 그는 식물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두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렇게 삶을 보냈다. 한서암의 조촐한 정원도,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의 정원도 모두 퇴계 선생이 평생 추구해 온 자연 합일의 삶을 보여주는 곳, 말하자면 이상과 삶이 하나로 어우러져 만들어진 곳이었다.소박하면서 상징적인 퇴계형 정원 양식 즉 연지와 인격화된 식물이 하나의 세트로 조성된 정원은 그를 따르는 많은 후학들의 정원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전통정원의 식물 선택과 배치에는 유학자들의 사상이 깃들어 있었다. 전통정원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정원의 주체자인 유학자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퇴계 선생은 "저 매화에게 물을 주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다고 한다. 긴 세월이 흐른 현재, 절우사도 육우원도 퇴계 선생의 손길이 닿았던 그 시대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리되지 않은 채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원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자연이다. 우리는 4계절 정원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찾고 생명의 소중함을 배운다. 이번 여름 모두 한번쯤은 정원에 서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희망한다.

2020-07-31 20:25:31

[광장] 풍요의 시대, 식량 부족을 생각하다

[광장] 풍요의 시대, 식량 부족을 생각하다

단연코 먹방의 시대다. 유튜브나 케이블 채널뿐만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서도 먹방은 대세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8천원대의 한식 뷔페식당, 1만원대 초중반의 무한 리필 고깃집과 패밀리 레스토랑이 주위에 널려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저렴한 식자재 가격 때문이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걱정했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발생하는 식량 부족 문제는 해결된 듯 보인다. 세계 인구 78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전 세계 유통망을 통해 공급되고, 우리는 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남녀노소를 막론한 다이어트 열풍과 넘쳐 나는 음식물 쓰레기 시대를 살면서 식량 부족을 고민하면 이상한 사람일까? 아프리카 등 빈곤국 8억 명의 기아 문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도 미래 식량 부족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왜 먹방과 다이어트 시대에 식량 부족을 걱정해야 하나? 세계 인구 증가와 중국, 인도 등 인구 대국의 경제성장으로 식품 소비가 '곡물'에서 '육류'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인구의 양적 증가는 식량 수요 확대의 직접 요인이며, 육류 소비 급증은 사료용 곡물 수요를 촉발시켜 더 많은 식량 생산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식량 수요를 충당했던 공급 방식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인가? 비농업용 토지 수요 증가에 따른 농지 부족, 기후변화의 불확실성, 농업용수 고갈 등이 식량 생산의 장애 요인이다. 우리가 식량 부족을 걱정하는 이유는 수요 증가와 공급 불안정성 때문이다. 맬서스의 악령은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세계적 투자가인 짐 로저스는 "모든 사람이 농업을 등한시하고 도시로 몰려나올 때 역으로 농부가 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농업이 미래 산업이자 유망 산업이라 강조한다. 또한 식량은 필수재이기 때문에 농업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 하지만 식량이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으면 돈으로도 살 수가 없다. 이윤 추구 생산자가 팔지 않는다는 상상은 지나친 일일까? 만약 판매할 농산물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연재해나 기후변화로 농산물 생산이 감소한다면 농산물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코로나19로 우리는 이미 선진국의 텅 빈 식품 매장을 눈으로 목격했다.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은 전 세계의 자유로운 식량 이동을 촉진한다.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국가 간 이동이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는 논리로 식량 생산이 국가 단위에서 글로벌 단위로 확대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수입국의 수입하지 않을 권리는 허용하지 않지만, 수출국의 수출 금지는 허용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와 같은 식량 수입국은 아무리 달러가 많아도 수입 의존도가 높은 밀, 콩 등을 수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되자 인도, 태국, 베트남이 쌀 수출을 금지하였으며, 2010년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 금지로 세계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식량이 풍족한 먹방의 시대, 우리는 식량안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돈으로 얼마든지 식량을 수입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이 미래 세대에게 식량 재난을 물려줄 수 있다. 식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안정적 국내 생산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농식품은 생명을 지탱하는 원천일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지키는 파수꾼임을 기억해야 한다.

2020-07-24 14:30:00

[광장] 한류(韓流)와 문화예술도시 대구

[광장] 한류(韓流)와 문화예술도시 대구

한류(韓流)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활발히 공연되고 수용되는 현상을 말한다. 영어로는 K-Waves(물결)로 표기되는 이 문화의 물결 현상은 1997년 한국의 TV 드라마가 중국에 방영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생긴 현상을 말한다. 한류는 점차 케이팝(K-Pop)이나 케이드라마(K-Drama) 외에 영화(K-Movie), 화장품류(K-Beauty), 한식류(K-Food)에서 게임(Game)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의 문화 전반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한류라는 이 용어는 1998년 중국의 '북경청년보'라는 신문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라고 한다.한류는 문화현상이다.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비교적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해보면, 한 사회는 경제적 토대와 그 경제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적 현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학연구자들은 이것을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라는 식으로 개념 지어 말하는데, 말하자면 하부구조는 생산양식이 밑바탕이 된 경제적(물질적) 토대를 이르는 것이고, 상부구조는 그 경제적 토대에 상응하는 정신 영역 가령 문화예술, 정치, 법률, 종교 같은 범주를 말한다.한류라는 문화현상도 급성장한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세계적 수준을 선도하는 IT 기술의 발전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류하면 방탄소년단(BTS)이 곧바로 떠오를 정도로 이들이 한류현상을 주도해 왔다. 미국의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이들과 몇몇 아이돌 가수 그룹이 지난 수년간 이룬 업적은 독보적이다. 여기다가 올 초 할리우드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을 비롯한 한국 영화의 성과 역시 눈부시다.이런 한류의 대대적인 성공 주역들 중 대구 출신이 많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7인으로 구성된 방탄소년단 중 뷔와 슈가, 두 사람이 대구에서 고교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다. 레드벨벳의 인기 높은 보컬 아이린 역시 대구에서 고교를 마쳤다.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도 대구 출신이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대구에서 출생해 성장하고 초등학교 때 부친의 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고, 세계적인 예술영화 감독 이창동 역시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마쳤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한때 대구는 문화예술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서울 못지않은 수준 높은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에서 배출한 많은 인재들이 대구 문화예술의 기반을 이루어 왔다. 여기다가 근대문학의 별들인 이육사, 이상화 등 숱한 문인들이 한국문학을 이끌어 왔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눈여겨보면 이들이 대구에서 출생해 성장하고, 예술의 원초적 감수성을 싹 틔웠지만 예술의 꽃을 피운 건 다 서울에 가서이다. 이런 배경에는 유난히 중앙집권적인 한국의 문화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이런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을 대구에서 성장시키고 배출하면 어떨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구에는 이미 어리고, 젊은 많은 예술 인프라가 있다. 이 미완의 재목을 발굴하고, 훈련시키고, 기획하고, 마케팅해서 국내 무대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면 어떨까? 영국의 전설 비틀스(The Beatles) 때문에 전 세계 팬들이 리버풀과 함부르크로 몰려들었듯이 전 세계 팬들이 글로벌 문화예술 도시 대구로 쇄도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탄생시킬 창의적인 고민을 제대로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20-07-17 15:24:09

[광장] 뭔가 이상하다

[광장] 뭔가 이상하다

나는 아파트에 살면서 식물과는 인연이 없었다. 식물이 우리 집에만 오면 살지 못했다.아파트는 층수가 높고 실내 공기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핑계를 댔지만, 내가 식물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8년 전 한옥으로 병원을 짓고, 마당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 처음 2년간은 나무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소문으로 좋다는 것에 욕심을 내고 심었다가 관리가 되지 않아서 수시로 파고 뒤집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자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아파트 생활에서는 몰랐던 계절의 변화를 나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꽃은 각자가 원하는 시간 간격을 두고 피었다. 아직 추위가 남아 있는 이른 봄에 매화가 피면 뒤이어 수선화, 벚꽃, 라일락, 수국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몇 달간 꽃을 즐기면 더운 여름이 왔다. 이런 간단한 즐거움만을 가지고 꽃에 관심을 가지니 나무가 죽는 일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언제, 어떤 꽃이 피는지 알게 되고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런 순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봄이 되면 꽃은 한꺼번에 폈다가 같이 사라졌다. 뭔가 자연의 질서가 무너진 느낌이다.올해 의사 된 지 40년이다. 의사로서 경험이 쌓이면 환자 보기가 쉬워야 하는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서 금연하고, 운동하고, 붉은 고기 적게 먹고, 채소 많이 먹으라고 하지만, 폐암의 30%가 비흡연자이고, 수유를 하고 채소만 먹어도 유방암, 대장암에 걸리는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 과거 젊은이들이 암을 걱정하면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노인이 암 검진을 계속 받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암이 생길 수도 있지만 성장이 느리니까 이상을 느끼면 방문하고, 그 돈으로 고기나 사 드시라고 돌려보냈었다. 그런데 요즘 20대 젊은이들 암이 늘어나고, 80대 암도 예측 불가능하게 자라는 속도가 달라졌다.뭔가 이상하다. 식물들은 지구상에서 긴 시간 동안 각자 자라기에 맞는 장소를 찾고, 언제 꽃을 피워야 자기 종에 유리한지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런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은 주위 환경이 식물에 혼동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아주 뛰어난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로 병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 인간이 암에 걸리는 것은 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이다. 그런데 암이 증가한다는 것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외부 환경이 우리 몸의 해결 능력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변화의 원인은 단순히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다. 원인을 쉽게 찾아서 명쾌하게 해결을 못 하는 이유다.몇 년 전부터 나는 이런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찾다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호르몬이라고 부르는 화학물질과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불건강한 먹거리로 인해 인류에 무언가 큰 위협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재앙이었다. 그런데 몇 달간 찬찬히 점검해 보니 그게 전혀 다른 현상이 아니었다. 모습만 달리한 재앙이었다.연결 고리는 흙을 만지면서 알았다. 나무를 키우면서 흙을 만지니 뿌리와 그 주위의 벌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로 도우면서 각자 살아가는 이치가 재미있다. 흙과 벌레들의 변화를 관찰하며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 복잡하게 얽힌 이상한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직감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다.

2020-07-10 14:00:30

[광장] 뜻하지 않게 의뢰받은 정원 이름 '모네 연못정원'

[광장] 뜻하지 않게 의뢰받은 정원 이름 '모네 연못정원'

10여 년 전 학교 기숙사의 조그마한 연못정원 설계를 맡은 적이 있다. 참으로 난감하게도 그 일을 의뢰한 총장은 모네정원을 만들어주기를 요청했다. 의뢰인은 가보지도 않은 채, 모네의 유명한 그림만 보고는 막연히 그런 정원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매사 열심히 사시는 분의 말씀이라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일을 맡은 나로서는 고민이었다. 몇 달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모네정원이 아닌 바이올린정원이라면서 의뢰인에게 설계안을 보였다. 그랬더니 의뢰인은 못내 아쉬워하면서 이름이라도 모네연못이라고 명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연못의 정식 명칭은 모네연못이다. 모네의 정원을 보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엉뚱한 정원이 나와서 당황하신 분도 있을 것이다.나의 의뢰인은 모네의, 연못 중심의 아름다운 정원을 상상한 것 같다. 모네는 왜 그런 연못정원을 만들었을까? 모네의 연못정원은 프랑스 지베르니의 집에 실제로 있는 곳으로 그곳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산책을 한 그의 삶의 터전이었다. 30여 년 전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내 기억도 상당히 퇴색해 있다. 당시 나는 '모네의 정원'을 비롯한 멋진 그림을 기대하며 지베르니의 모네 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 집의 반은 요리 기구로 채워져 있었고, 반은 일본 채색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모네의 그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꽃으로 장식된 정원과 정원 깊숙이 감춰져 있는 연못을 보면서 그림과는 다른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모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녹색의 아치형 일본식 나무다리와 다리 아래로 늘어진 수많은 바빌론 능수버들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수련과 한쪽에 멈춰진 녹색 나무배가 내 눈앞에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모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이 현장을 화폭에 담으려고 수없이 찾았을 것이다. 모네의 연못정원은 화가로서뿐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모네의 삶이 녹아있는 곳, 순전히 그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단지 우리는 그 연못정원을 보면서 모네라는 한 화가의 삶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그렇다. 정원은 주체자의 삶의 일부이다. 헤르만 헤세는 정원 가꾸는 일이 귀찮다면서도 매일 나가서 정원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한다면 대학 기숙사의 연못정원 역시 학생들의 삶의 공간이다. 나는 오랜 고심 끝에 모네의 정원 모방을 포기하고, 학생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연못정원을 설계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연못정원의 주제를 음악으로 정했다. 연못의 형태는 바이올린을 연상하게 그렸다. 또 무대도 필요했다. 무대에 앉으니 초화류(草花類)의 청중도 장식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무대의 장막으로 능수버들을 심었다.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모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베르니의 모네정원을 방문한다. 학교 기숙사의 모네의 연못정원은 학생들이 이용하고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두 정원은 이름은 같으나 주체자가 다른 공간이다. 주체자가 다르니 장소도 만든 사람도 당연히 다르다. 지금도 나는 모네의 정원이 학생들에게 힐링의 공간으로 느껴지기를 바란다. 내가 만든 모네의 정원을 오가면서 그들이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위로받고, 힘을 얻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어느 날, 그들 중 누군가가 프랑스 지베르니의 모네정원에 서서 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던 기숙사 옆 바이올린정원을 떠올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행복한 감상이 그들 삶을 더욱더 풍요롭고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020-07-03 15:50:04

[광장] 달성(達城)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광장] 달성(達城)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에 관한 우리 지역 얘기를 끝으로 필자의 칼럼도 마치고자 한다. 1808년 프랑스 정치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로 해석된다. 로마 공화정이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2년)을 치르는 동안 최고위직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1440년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세계적 사학 명문 영국 '이튼 칼리지'(Eton College)가 있다. 교내 운동장 건물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전장에서 죽어간 1천900여 명에 달하는 이튼 칼리지 출신의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두고 있다. 미국도 1950년 한국전쟁에 142명의 장군 아들이 참전하여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은 어떤가? 물론 훌륭한 지도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논문 표절, 신분적 갑질, 탈세, 횡령, 성추행,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불법 증여, 이중 국적 등 종류도 많고 다양하여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쉽지 않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스럽다. 오히려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병들고 부패한 귀족이라는 의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반대말이다. 그렇지만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미담(美談)이 들려온다. 오늘은 우리 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대구읍지』와 『달성 서씨 학유공파보 권상(卷上)』의 기록 중,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종께서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이 살고 있는 달성의 지형이 말(斗)처럼 우묵하고 천혜의 환경을 갖춘 성(城)이므로 국가에 바치고 대신 남산 옛 역터에 더하여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또는 蓮信新池)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침 선생은 나라 땅이 모두 국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는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다른 청을 하라고 했다. 이때 서침 선생은 개인의 사사로운 보상보다는 대구 지역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한다면서 대구 지역민들에게 상환곡 이자를 한 섬당 5되 감해주기를 청했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서침의 인간됨을 높이 사고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이로부터 대구 지역민들은 상환곡 이자를 탕감받게 돼 그 보답으로 서침 선생의 공덕을 찬양하여 1665년(현종 6년),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連龜山·현 제일중학교 교정) 북편에 숭현사(崇賢祠)를 짓고, 1675년(숙종 1년) 서침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서침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대구의 진산 연귀산에 있었던 숭현사는 1718년(숙종 44년) 중구 동산동 지금의 신명고등학교 옆으로 이건하여 '구암(龜巖)서원'이 된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웠다. 1995년 지금의 자리인 북구 산격동 연암산 연암공원 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지역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경주 최씨 가문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한 일, 1778년(정조 2년) 대구 판관 이서가 그의 사재(私財)와 지역민 후원으로 신천에 제방(상동교-수성교)을 쌓아 신천 범람으로부터 대구 사람들의 인명과 재산을 지켜준 일은 참으로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체를 통해 코로나19로 피폐해진 지역민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0-06-26 16:12:26

[광장] 분홍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광장] 분홍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국민들이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실을 부정할수록 듣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BBC 앵커 출신인 빌 맥파런은 부정적인 언어를 분홍 코끼리로 비유했다. 덩치 큰 코끼리가 만약 분홍색이기까지 하다면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있겠는가. 부정적인 표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격성과 차별을 내포한 히틀러의 언어가 전쟁을 초래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언어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갈등의 악순환을 유발한다.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새로운 것을 표현할 때 기존 언어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한계'라고 했고, 사피어와 워프(Sapir&Whorf)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물 위에 놓인 다리를 보고 아름답다, 우아하다는 형용사를 떠올리지만, 스페인어 사용자들은 강하다, 길다와 같은 남성적인 단어로 수식한다. 다리가 독일어에서는 여성명사지만 스페인어에서는 남성명사이기 때문이다. 언어마다 주목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언어의 사용자들도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달라진다.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고 있지만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인들은 다섯 가지 색으로 나타낸다. 색깔을 구분하는 단어의 유무에 따라서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르게 인지하는 것이다.생각은 말을 만들고 말은 사람을 만든다. 언어는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동안 man으로 끝나는 남성형 단어들이 여성까지 포괄해 왔지만, 타임지는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이 남성 중심적 표현이라는 이유로 Person of the Year로 바꿔 부르고 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적 사고의 차이가 언어로 드러나기도 한다. 영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에게 자신과 가족 중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 영어로 질문했을 때는 '자신'을, 일본어로 질문했을 때는 '가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말에서는 동사가 문장의 맨 끝에 오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들어야 한다. 이러한 돌려 말하기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큰 의미를 두는 동양권 문화의 반영이기도 하다.서유럽의 정치적·종교적 통일을 이뤄낸 카롤루스 대제는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두 개의 영혼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언어는 내적인 사고와 불가분의 관계다. 일본 제국주의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를 금지했고, 조지 오웰의 1984에서 그린 감시 사회에서도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하기 위해 어휘의 개수를 축소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어의 제한은 디스토피아의 클리셰다. 앞서 빌 맥파런이 제안했듯이 언어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언어들이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와 언어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넓게 보는 안목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잘될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을 하다 보면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처럼.

2020-06-19 14:20:19

[광장] 전쟁과 평화

[광장] 전쟁과 평화

전쟁의 상흔은 생각보다 치유되기 힘들다. 부서진 건물과 도로가 복구된다고 전쟁의 상흔이 끝난 것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7년간의 전쟁이었지만, 상흔은 7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세계대전 당시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국경이 나누어진 아프리카 대륙은 아직도 종족 갈등과 내전이 진행 중이다. 영국에 할양되었던 홍콩은 반환 이후 현재까지 민주화 투쟁이 진행 중이다.미얀마도 그러하다. 미얀마 접경 지역 로힝야족 난민촌은 말 그대로 인종 청소가 진행 중이다. 아웅산 수치는 이 비극을 외면하고 있다. 그녀의 노벨평화상을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 정도로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로힝야족을 용병으로 활용한다. 로힝야와 일부 소수민족은 버마 독립군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탄압한다. 수치의 아버지이자 버마 독립군의 대장이 아웅산 장군이다. 아웅산 수치는 평화의 상징이었지만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은 묵인하고 있다. 민족과 역사적 트라우마 앞에 인권이 멈춰 섰다.한국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일제의 식민지 처지에서 의도치 않게 태평양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독립을 맞이했지만 사회는 세계사적 흐름에 따라 사상이 나뉘어지고, 사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제대로 꾸려지기도 전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에 처했다. 남북 분단이라는 결과 아래 안보는 제1의 가치가 된다. 혼란한 사회를 규합하고,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되고 군사 문화는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된다.대한민국 스포츠는 폭력과 얼차려의 문화가 전 세계 어느 곳보다 강하다. 전체주의 독일이나 이탈리아보다 더 엄격한 학교 문화가 한국의 학교 문화이다. 군대 제복 같은 교복과 짧은 단발, 학교에서 실시된 전쟁 대비 수업이 있었다. 회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1970, 80년대 제조업 현장은 군대식 기숙사와 아침 조회, 단체 체조 같은 것이 존재했다. 이제는 추억의 한 페이지처럼 남아 있는 기록이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군사문화가 스며 있었다.안보라는 가치를 바탕에 두고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전쟁을 대비해 오고 있었다. 아직 종전도 아니고 휴전 상태인 분단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만, 군사문화라는 것이 제한하는 인간의 권리 상황은 생각보다 넓었다. 아이들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추고, 운동선수의 인권은 합숙소 앞에서 멈춘다고 했다. 이 전쟁의 상흔이 아직 우리 사회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아직도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면, 누군가는 "전쟁을 안 겪어봐서 철없는 소리를 해댄다"며, 당장 전쟁을 일으켜야 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증오와 낙인찍기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서북청년단을 단체 이름으로 내세워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의 상흔은 이렇게도 진행 중이다. 치유하지는 못할망정 다시 분열과 대립으로 상처를 파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인간의 존엄이 철저하게 말살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것은 인류의 과제였다. 전쟁의 종료가 곧 평화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이후 인권의 최대한 보장을 위한 '세계인권선언'이 유엔에 의해 채택되고 각국 헌법에 반영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6월이다. 아픈 전쟁의 기억을 되새겨야만 하는 이유는 대립과 복수가 아니라 평화와 공존을 위함이 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는 전쟁의 종료가 아니라 전쟁의 상흔이 모두 치유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

2020-06-05 16:30:00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 <하>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마지막 부분에서 살내 유래를 설명했다. 즉,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양 진영에서 쏜 화살로 하천이 화살로 가득했다 하여 유래된 살내(전탄)에서 왕건 군대는 승기를 잡고 견훤 군대를 추격하게 된다. 전황(戰況)이 반전된 것이다. 추격을 하면서 왕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주변 지역 경계에 태만함이 없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무태'(無怠)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 의병장이었던 태암 이주(李輈)의 충절을 기릴 목적으로 인천 이씨 후손들이 세운 환성정의 '환성정기'(喚惺亭記)에 무태 지명 유래와 관련한 문구가 있어 흥미롭다. '동즉려조지토견훤시경군왈무태자야'(洞卽麗祖之討甄萱時警軍曰無怠者也)가 바로 그것이다.무태를 지나 연경동을 통과할 때, 경전을 읽는 선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 이곳 지명이 '연경'(硏經)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경동은 대구 최초의 사립학교인 연경서원이 1563년 건립된 곳으로 교육도시 대구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후 왕건 군사와 견훤 군사는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파군(破軍)재로 유인한 견훤 군사에 의해 왕건과 그의 군사는 괴멸된다. 그래서 파군재 지명이 유래하게 된다. 파군재 전투에서 위기감을 느낀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은 왕건을 살려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여기서 생겨난 지명들이 왕산(王山)과 지묘(智妙)동이다.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의 기묘한 지략으로 왕건을 살린 곳이라는 의미다.이제 왕건으로서는 사지를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왕건은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하기 시작한다. 홀로 앉아 퇴로를 궁리했던 바위로 동화사 부속 암자 염불암 뒤편에 위치한 일인석(一人席), 홀로 앉아 쉬어 갔다는 봉무동의 독좌암(獨坐岩), 전쟁 통에 노인과 부녀자는 숨어 버려 노인을 볼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유래된 불로(不老)동을 거쳐, 평광동에 이른다. 여기서 나무꾼으로부터 얻어먹은 주먹밥의 힘으로 간신히 초례봉(醮禮峯)을 넘는다. 나중에 나무꾼이 그때 자신이 준 주먹밥을 얻어먹은 사람이 왕건임을 알고 이곳에서 왕을 잃어 버렸다고 하여 실왕리(失王里)가 되었고, 지금의 평광동 시랑이다. 물론 견훤 군사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왕건을 놓쳤으니 그 또한 실왕리가 된다고 하겠다. 초례봉은 왕건이 천지신명님께 기도를 드린 곳이라는 기록이 고문헌에 남아 있다. '초례'는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초례봉을 넘어 견훤 군사의 추격으로부터 멀어지자 마음이 안정되어 길을 걸었던 곳이 지금의 안심(安心)이다. 마음이 진정된 상태에서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떠 있어 반야월(半夜月) 지명이 유래된다. 율하천을 따라 내려오던 왕건은 금호강 팔현습지에서 강을 건너 앞산으로 숨어들었다. 앞산 큰골의 은적굴(은적사)은 왕건이 앞산에서 처음으로 몸을 숨긴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그 후 안지랑골로 이동하여 안일암에서 잠시 쉬게 된다. 그때 견훤은 왕건을 찾아 이곳 안지랑골까지 오게 되니, 왕건은 다시 안일암 위쪽으로 피신하여 왕굴에 숨는다. 그때 거미들이 떼를 지어 와 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 견훤 군사가 굴 내부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굴 역시 왕건이 잠시 피했던 곳에서 유래된다. 잠시 후 산을 넘어 앞산 달비골에 위치한 사찰에서 며칠을 피신하여 편안히 지내니 그 절 이름이 임휴사다. 이처럼 지역에는 공산전투와 관련한 많은 흥미로운 지명들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그때의 처절했던 얘기를 전해준다.

2020-05-29 17:30:00

[광장] 나는 인정받을 때 더 잘한다

[광장] 나는 인정받을 때 더 잘한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칭찬이 없으면 불안하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포장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내게 의미 있는 사람일수록 인정 욕구는 간절해진다. 조직관리 전문가인 피터 브레그먼(Peter Bregman)은 미국 IT회사의 유능한 직원인 래리의 사례를 소개한다. 래리는 1억원이라는 통 큰 보너스를 받고도 돌연 사표를 냈다. 그의 팀장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책상 위에 수표를 놓고 갔다는 것이 이유였다. 래리의 지갑은 채워졌지만 심리적 보상은 충족되지 못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보상은 당신이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물론 물질적 보상은 인정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두 달에 한 번씩 보너스를 주는 회사가 왜 존재하겠는가. 물질적 보상이 지나치게 적으면 근로 의욕의 저하나 높은 이직률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물질적 보상이 2배 늘어났다고 해서 근로 의욕이 2배 또는 그 이상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연봉 인상이나 승진 등 외적 보상은 휘발성 높은 알코올이나 복용량이 늘어나는 진통제와 같다. 직원이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방법일 뿐, 오로지 돈 때문에 하는 일로 변질되거나 금세 그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변화가 빠른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외부의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인정이라는 중독에 취약하다. 회사에만 가면 답답하고 무기력하다는 직장인들의 호소가 그 방증이다. 인정 욕구의 결여는 절망과 분노를 야기하고, 오히려 다른 물질적 보상을 통해 그 허기를 채우려 하게 된다.우리 사회는 여전히 칭찬에 인색하기만 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한다고 해서 모든 이가 항상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가급적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바쁘다거나 질투, 경쟁심과 같이 칭찬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의해 정신적인 인정은 결여되고 물질적인 보상에만 그치게 된다. 리더라면 직원들의 노력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감사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칭찬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금전적 보상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와 일치한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보너스를 준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칭찬은 가성비 최고의 방법이지 않은가.물질적 보상과 정신적 보상은 인정 욕구를 구성하는 2개의 축이다. 전자는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후자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 개인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어느 쪽에 더 방점을 찍느냐는 문제는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인간은 삶의 전 차원에 걸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인정할 때다. 인정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며 열정 엔진이 돌아가게 하는 연료다. 인정 욕구는 사람마다 요구 사항이 다르기 때문에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칭찬해 줄 필요가 있다. 타인을 인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2020-05-22 17:30:00

[광장] 신돌석, 못다 이룬 꿈

[광장] 신돌석, 못다 이룬 꿈

작년 5월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있는 신돌석 장군의 생가와 사당 및 기념관을 찾았다. 영덕군청의 김신규님으로부터 '호국의 씨앗, 영덕에서 발아하다'와 '소설 신돌석, 평민 출신 의병장'(백상태)을 얻게 되었다. 이 책들과 '신돌석, 백년 만의 귀향'(김희곤)을 자료로 오는 6월 1일 '의병의 날'을 앞두고 그의 삶을 조명해 본다.장군의 본명은 태호이고 아명이 돌석이었지만 후일 영릉의진(寧陵義陳)을 일으킬 때 돌석을 장군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지만 부친의 노력으로 이중립 선생의 육이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천자문', '명심보감'을 거쳐 '소학'을 끝내기 전에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이때 장군은 15세였다. 훗날 '손자'와 '오자' 같은 병서를 스스로 읽을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19세인 1896년에는 김하락의진을 따라 영덕 남천변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후 추적을 피해 남으론 청도, 경주, 울산까지, 북으론 강릉을 거쳐 함흥까지 나아가 일본의 만행을 목격했고, 만나는 사람들과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다.1904년 평해 월송정에 올라 "누각 오른 나그네 갈 길 잊고서/ 무너진 단군 옛터 안타까워하네!/ 남아 27세에 무슨 일 이루었나?/ 잠시 갈바람에 기대니 감개만 돋아나네!"라는 칠언절구 한시를 읊었다. 김희곤 교수는 장군께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했다.1906년 4월 6일, 장군은 200~300명 규모의 영릉의진을 일으켰다. 대부분은 농민, 어부, 도부꾼이었지만 대의에 동참하는 소수의 양반들도 있었다. 풍전등화 같았던 대한제국의 운명 앞에 용력, 지력 및 경험까지 갖췄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장군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진대장에 추대되었다. 이는 인력동원뿐만 아니라 무기와 장비, 의복 및 식량을 동원할 능력을 갖췄음을 뜻한다.이후 2년 8개월간 영릉의진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태백준령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한 무용을 펼쳤다. 1907년 후반까지는 300명으로 추산되는 큰 규모로 움직였으나 일본군 토벌대의 집중 공격이 시작된 1908년부터는 소규모로 나뉘어 일월산과 백암산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장호동의 일본인 기지 공격, 울진의 일본인 공격, 일본군 토벌대와의 수차례 전투 등 무수히 많은 전투를 벌여 일본군과 진위대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민중에겐 든든한 '태백산 호랑이'였다.통감부는 의병의 활동을 막기 위해 1907년 말부터 귀순자에게 면죄부를 주며 귀순을 종용하였다. 이런 조치와 토벌대의 집요한 추격으로 1908년 가을엔 귀순자가 많이 생겼고 그해 말엔 의병의 수가 20명 선으로 줄었다. 이때 장군은 의진을 해산하고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할 계획을 세웠다.이런 와중에 장군은 영덕군 북면 눌곡에 있는 김도윤(상근으로 개명)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김도윤은 한때 장군의 부하였고 외외가 쪽 친척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군에게 붙은 현상금을 탐낸 김도윤과 그의 형 김도룡(상열)에 의해 집 근처 계곡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1908년 12월 12일 새벽,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나라'를 만드는 미완의 꿈을 안은 채 서른한 살의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했다.세월은 흘러 112년이 지났지만 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장군의 못다 이룬 꿈은 이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꿈이 되었다.

2020-05-15 18:19:38

[광장] 젊음이 그만 라면 같아라

[광장] 젊음이 그만 라면 같아라

1986년. 외사촌 언니들이 직장을, 학업을 이유로 대구로 나와 우리 집 근처에 셋방을 얻었다. 언니들이 근처에 있어 가장 좋은 이유는 그 셋방에 놀러 가면 늘 곤로에 끓여낸 라면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라면을 앞에 놓고 길쭉한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채널을 맞춘 9시 뉴스는 온통 아시안게임 이야기였다. 그중에 단연 화제는 임춘애였다. 육상에서 우리에게 금메달을 안겨준 그녀는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어 라면만 먹고 뛰었다고 했다. 내 앞에 차려진 이 맛있는 라면과 임춘애의 고단함이나, 퇴근한 언니들의 피곤함을 연결해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30년이 지난 2016년. 서울 구의역에서 홀로 지하철 전동문을 수리하던 김 군이라는 청년이 죽었다. 김 군의 가방에서는 엄마가 밥이라도 같이 먹으라며 챙겨준 숟가락과 컵라면이 나왔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노동하다 사망한 김용균 씨의 마지막 유품도 컵라면이었다. 제시간에 따뜻한 김이 나는 밥 한 그릇 먹을 시간도 없이 고단한 그들의, 노동의 마지막 음식이 컵라면이었다. 그들의 라면은 삼십 년 전 가난하고 힘들어 뛰었다는 임춘애의 라면과 분명히 노동으로 고단했을 외사촌 언니들이 끓여낸 라면과 겹쳐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천에서, 구미에서 아니 대한민국 곳곳에서 청년들은 노동 현장에서 떨어지고 깔리고 불에 타서 혹은 스스로 죽어갔다. 죽음의 순간에도 비정규직, 일용직, 임시직, 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청년들의 목숨이 오 분이면 혹은 삼 분이면 뚝딱 완성되어 젓가락질 몇 번이면 끼니가 해결되는 라면 같았다.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지만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젊음이 살아남기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수저'라는 신종 계급론에 따르면 금수저를 가지지 못했기에 죽음을 목전에 둔 노동 현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노동은 의무이기 이전에 권리다. 인간이 누려야 하는 존엄한 가치로서의 권리가 된다. 세계인권선언 23조와 24조는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유리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며 실업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정기적인 유급휴가와 휴식과 여가를 누릴 권리도 가질 수 있다고 되어 있다.공동체 유지를 위해 건강한 노동을 지속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노동은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젊은 노동이 안전하도록, 차별받지 않도록 건강한 노동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는 국가가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노동이 계급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와 경제 구조를 개선해야 할 의무도 젊은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에 있을 것이다.그 시절 외사촌 언니들의 젊음도 쌀밥에 반찬을 차려내 먹고 다니기에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라면이 주식이 되었을 것이다. 임춘애 역시 라면 발언은 오해로 밝혀지긴 했지만 30년 전 청년들의 가난함과 고단함을 상징하는 것이 라면이었기에 그런 오해도 당연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아름답고 고귀한 젊음의 노동의 대가가 오백원에서 천원 하는 라면으로 메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젊음들의 허기진 노동 역시 라면 한 그릇으로 충족되는 가치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노동에 예속되는 삶을 사는 젊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 삶을 위해 존재하는 노동이었으면 좋겠다.

2020-05-08 17:30:00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통일신라 말기, 신라의 국력이 쇠퇴해짐에 따라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후삼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격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 가운데 우리 지역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동수)전투는 견훤과 왕건이 목숨을 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견훤에게 크게 패해 쫓기던 왕건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 후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은 한편의 역사 드라마이다.TV 연속사극 '태조 왕건'은 2000년 4월〜2002년 2월 총 200회에 걸쳐 방영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인기 드라마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대구의 공산전투가 소개돼 대구 지역 브랜드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당시 팔공산 곳곳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여러 전투를 비롯해 파군재(동구 지묘동)에서 왕건 군사가 궤멸되어 왕건 홀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들은 치열했던 전투 상황과 왕건의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 필자는 927년 팔공산에서 일어났던 공산전투에 관해 역사적 자료와 구전을 토대로 2차례에 걸쳐 지명 유래를 추적해본다.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탈하기 위해 쳐들어오는 견훤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음에 태조 왕건은 공훤 장군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군사를 데리고 신라를 도우러 가게 한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하여 왕건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직접 거느리고 출정하게 된다. 때는 고려 태조 9년(92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개성에서 출발하여 빠르게 행군한 왕건 군대는 마침내 팔공산 기슭 칠곡 부근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팔공산 자락에서 숙영을 하게 되었고, 그곳이 지금의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위치한 대왕골이다. 이곳 지명은 대왕골, 대왕암, 대왕재(동구 덕곡동과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경계)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왕은 바로 왕건을 의미한다. 당시 기병 5천 명이 대왕골(현재 대구선명학교와 송광매기념관 등이 위치한 곳)에서 숙영하는 동안 왕건은 수행 장군들과 대왕암에 앉아 전략을 숙의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때 왕건이 앉았던 바위가 대왕암이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은 대왕골에서 송광매기념관을 운영하는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나이 드신 지역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즉, 공산전투와 관련한 최초의 장소는 대왕재가 되는 것이다.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후, 왕건 군대는 곧바로 지금의 동화사 방면으로 진군하여 일단의 견훤 측 소규모 병사들과 교전하여 승전하고 주력부대를 치기 위해 다시 진군하게 된다. 이때 견훤의 주력부대는 영천 은해사 옛터 부근(태조지)에 매복하여 왕건 군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러한 계략을 모른 채 이곳까지 오게 된 왕건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견훤 군대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의 군사를 잃어버린다. 퇴각하던 왕건 군대가 먼 길을 온 탓에 체력이 떨어지고 사기도 저하된 상태에서 지묘동 작은 고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사기가 오른 견훤 군사들이 진군나팔을 불었고, 그 나팔 소리를 들었던 지묘동의 작은 고개가 바로 나팔고개다. 동화천변을 따라 퇴각하던 왕건 군대는 동화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화천 건너편에 주둔하던 견훤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여 여기서는 왕건 군대가 승기를 잡게 된다. 동화천을 두고 양 군사들이 쏜 화살은 동화천 바닥을 가득 메우게 되었고, '화살로 가득한 내(川)'라는 의미의 살내 또는 전탄(箭灘)이 유래되었다.

2020-05-01 1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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