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관련 기사 목록입니다.

[매일춘추] 꽃이 필 때면

어느새 봄이 왔나 보다. 환자분이 이제 막 핀 개나리를 꺾어서는 플라스틱 컵에 꽂아 나에게 주며 봄꽃이 반가워서 꺾어 왔단다. 출퇴근길 예사로이 봐 넘기던 길목에 꽃이 핀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하긴 얼마 전 내린 눈이 말갛게 씻긴 뒤, 나뭇가지들이 유난히 생기가 넘치는 듯했었다. 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더욱 흥미로운 것이 꽃인 것 같다. 앙증맞은 들꽃의 이름을 알아내고, 색감을 느끼고, 거기다 꽃말까지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꽃이다.봄 문턱에 우리 집 거실에 가장 먼저 오르는 꽃은 단연 '프리지어'다. 해마다 설 이튿날 어머니 생신이면 아버지와 '프리지어' 다발을 사 들고 왔던 어릴 적 기억이 내가 꽃을 좋아하게 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꽃에 관심을 가지다가 어머니께 꽃다발을 직접 만들어 드릴 요량으로 '꽃 핸드 타이'(Hand tie)를 배우기도 했다. 느슨한 꽃다발을 돌려가며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는 '스파이럴' 기법을 이용하여 풍성한 꽃다발을 만드는 것이다. 직접 어울릴 법한 꽃을 고르고, 잎 부분을 다듬고 길이를 고르게 맞추어 완성한다. 나의 첫 꽃다발은 예쁜 꽃봉오리가 있는 리시안서스와 라넌큘러스를 주재료로 하고, 안개꽃과 비슷한 마조리카를 이용하여 꾸몄다. 꽃만 있으면 허전하기 때문에 아게라툼과 유칼립투스 가지를 장식 삼아 집어넣어 풍성하고 균형감 있는 꽃다발을 만든다. 미색 종이와 리본으로 포장하니 그럴싸한 작품이 완성됐다.꽃을 배우러 간다는 나에게 남자가 무슨 꽃이냐던 친구들도 완성본을 보여주자, 자신들도 연인에게 해주고 싶다고 난리다. 꽃들을 엮으며 유치원 다니던 봄날 잔디밭에 핀 작은 꽃을 꺾어, 마음에 둔 여자친구 손목에 매어주었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요리를 하러 다니면서는 길가에 핀 꽃이 온통 식재료로 보였다. 장미 같은 붉은 계열의 꽃은 메추리 요리와 어울리고 호박꽃같이 공간이 있는 꽃은 속을 채워 튀김 요리를 하면 그 맛이 일품이다. 이렇게 꽃은 보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추억으로도, 음식으로도 우리에게 행복감을 주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꽃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그렸나 보다.정성껏 만든 꽃다발을 어머니께 드렸을 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들의 이벤트에 꽃다발을 받고 활짝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의미를 두어 꽃을 주는 사람도 의미를 새겨 꽃을 받는 사람도 그리고 꽃이 존재하는 장소에도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게 되니, 그것이 꽃이 가지는 가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기쁜 날 또는 슬픈 날, 처음 시작하는 날 그리고 끝맺는 날에 꽃으로 마음과 공간을 장식한다.오늘 진료가 마무리됐다. 나 스스로에게 꽃을 받을 만한 날이었는지, 꽃을 주고 싶은 사람은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본다.

2018-03-21 00:05:00

[매일춘추] 이제는 나눠야 할 때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서울을 함락할 때까지 18일이면 충분했다. 그 이유는 서애 류성룡이 말한 것처럼 향토 단위 지역방어 전략인 진관체제를 버리고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군사거점지의 군대를 지휘하는 제승방략 체제를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는 격언이 생각날 뿐이다. 영국 식민지배로 제국주의의 위험을 경험한 간디는 외세의 지배가 종식되었다고 독립이 된 건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간디는 평소 '인도에는 70만 개의 마을이 있다'고 말하며, 70만 개의 마을이 고도의 자치를 누리면서 서로 느슨히 연결협력하는 '마을 공화국' 연합체인 인도의 미래를 꿈꾸었다.또 풀뿌리 민중의 자립과 자치적인 삶을 통해서만 참다운 독립과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근대 산업문명의 결과물인 대도시 중심의 압축 성장을 경계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고속성장으로 최빈국에서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는 수출 주도의 성장정책과 규모의 경제에 입각한 중앙집권 시스템으로 경제성장의 모범사례로 인정받아왔다.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현 체제는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1등만 살아남는 가혹한 '레드오션' 시장으로 만들어버렸다.그 결과 서울이 무너지고, 1등이 무너지면 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말았다. 마치 임진왜란 때 제승방략 체제처럼 말이다.가격 경쟁에서는 중국에, 품질에서는 일본과 독일에, 시장 규모에서는 미국에 밀리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더군다나 장기 저성장에 접어든 시대의 국민 정서상 '낙수효과'에 기댄 논리는 허황된 약속으로 치부될 수 있으며 '동반성장'이라는 구호도 정치적 레토릭(Rhetoric)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다.현재 지방자치는 중앙정부의 사무를 위임받는 수준이므로 필연적으로 중앙집권을 통한 승자독식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지역이 정권을 잡느냐, 중앙 핵심 요직에 어느 지역 출신이 몇 명이냐가 지역의 성패로 좌우되고 있는 실정이다.마키아벨리는 위기의 시간에 독재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나라는 일반적으로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멸망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탄탄한 지방정부가 많으면 중앙정부는 결코 무너질 일이 없다는 뜻으로 마키아벨리의 말을 재해석하고 싶다.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의 부족함을 걱정하기에 앞서 모두에게 고루 나눠지지 못함을 먼저 걱정해야 한다"라는 뜻이다. 이제는 나눠야 할 때이다. 분권!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이다.

2018-03-20 00:05:00

[매일춘추] 호수 위의 수련

수련은 호수에 수평을 그리고, 잔잔한 바람은 호수의 수평을 흔들고 있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수련의 잎들은 물 위를 더 올라오지 못한 채로 편편하게 얼굴을 펴고 있었다. 오로지 긴 목을 물 아래로 낮추면서 제 키를 드러내지 않았다. 호수의 수평을 그리며 물밑으로만 커가는 수련이 너무 안쓰러웠다. 자신의 꿈을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애를 태우는 여인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화려한 꽃으로 아픈 만큼 아름답게 외출을 시도했다.한 여자가 살다 살다가, 참고 참다가 끝내는 암이란 꽃을 피운 것처럼. 수련의 꽃 피움을 마음 아파해 본 날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혹독하리만치 힘든 과정이 있고 난 뒤에야 주어지는 보상인지도 모른다. 수련이라고 제 키를 물 밑으로 감추고만 싶었을까. 키 재기 하듯 높이 올라오고 싶었을 것이지만 호수가 더 돋보이기를, 자신보다 더 이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잎들은 일제히 수평을 그리며 웃었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았고, 벗이 행복하면 자신도 흐뭇하다고 생각했다. 초록으로 물 위를 수놓는 수련에게서 겸손의 미덕을 배운 날이기도 했다. 주위를 아름답게 하는 희생을 보고 욕심만 채우려고 산 날을 후회했다. 수련은 호수만 생각하다 자신에게 쌓인 아픔조차도 호수를 위해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오랫동안 내면의 깊이를 다지느라 심한 통증을 느꼈으며, 결국 살이 붓고 터지더니 이어서 꽃으로 피어났다. 날카로운 꽃잎들이야말로 수련의 내면에 아픔이 겹겹이 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화려한 외출로 수련이 호수를 더욱 멋지게 하자, 구경하러 오는 이가 많아져 호수가 금방 유명해졌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수련의 꽃 잔치를 자랑했다. 얼마나 아픈 고통이 있었는지를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했다. 수련의 짧은 꽃잔치가 끝나고 다시 호수의 수평을 그리는 푸른 잎들이 잔물결에 흔들릴 뿐 그 수위를 오르내리지 않았다.한 여자가 살아낸 흔적이 수련과 같았을 때, 그녀는 암이란 화려한 꽃을 피어낸 것일까. 함께 한 벗이 유방암이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호숫가에 큰 파문이 일었는데도 수련의 잎은 잔잔한 물결로 수평을 잡고 있었다. 수련과도 같은 친구라서 더욱 안타까웠고, 서울을 오가며 암 투병하는 그녀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며 흐느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가면서도 내가 안부를 묻기 전에 먼저 전화를 하는 친구였다. 아직도 수련처럼 가슴 안으로만 키를 자라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속이 덜 영글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속에 담지 않고 조금 모자란 듯 살면 좋으련만. 이제 호수에 수평을 그리지 말고 호수 위를 마음대로 올라와 자신을 위해 사는 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련이 물 위로 높이 커 올라와도 그대로 아름다운 호수라고 말해 줄 테니까.

2018-03-19 00:05:00

[매일춘추] 대구는 한국 연극의 중심

올해 35회를 맞는 대구연극제는 지역 연극계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문화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창작극 발굴과 기성 및 신진배우들과의 조합을 목적으로 양질의 공연을 선사하기 위한 첫 공식 무대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극단들이 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현재 각자의 연습실에서 땀 흘리며 준비하고 있다. 봄의 새싹이 움트기도 전인데 대구 연극인들은 극장을 지키려는 이유가 무엇일까.대구는 연극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지역이다.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란을 왔을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국립극단의 전신인 극단 '신협'이 햄릿을 공연한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의 한국 연극을 있게 한 고(故) 이해랑 선생의 연출로 키네마극장에서 공연됐는데, 햄릿 역의 고(故)김동원 선생께서 명연기를 선보여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대 초 대구는 전국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모여 수많은 작품활동과 동시대 담론을 나누는 만남의 장이었다. 국립극단의 연극으로 물꼬를 터 일본 유학파 출신 연극인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고(故) 홍해성 선생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전업 연출가로 활동, 일본 신극의 보고라 평가하는 '축지소극장'에서의 경험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국을 돌며 우리나라 연극의 토대를 일구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홍해성 선생도 대구에서 나고 자란 이력을 보면, 지역 출신 예술가들의 족적은 크다고 볼 수 있다.그만큼 대구는 근대사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60년의 세월 속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이해랑과 홍해성 선생으로 시작된 근대연극사의 흐름은 고(故) 이필동 선생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고, 연극이 관객 속으로 들어가 함께 울고 웃는 순간을 창조했다.지금도 그들의 명맥을 기억해 현재의 대구는 연극과 무대예술 콘텐츠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당시 정치학적 문화사적 맥락이 맞닿아 지역의 의의가 강하게 표출된 만큼, 연극을 대하는 동시대 예술가들은 굳건히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구 연극인 특유의 건전한 보수성, 즉 좋은 것은 지키고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와 태도는 다양한 행동양식으로 발화되어 지역 연극계에 존재하고 있다. 대구연극제는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티켓을 두고 경쟁하는 장이다. 동시에 극단들이 창작극을 중심으로 제작한 작품을 선보여 긴장감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각 지역의 대상작이 본선에서 만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연극계 동향을 본다는 것과 일치한다. 숭고한 역사를 갖고 있는 '대구 연극이 곧 대한민국의 중심'이라는 신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관객들이 연극제 기간(3월 22일~4월 1일) 동안 극장을 찾아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갈 수 있으면 한다.

2018-03-16 00:05:00

[매일춘추] 엔터테인먼트

나는 2년제 대학 엔터테인먼트과에서 강의를 한다. 매니지먼트와 공연기획 등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신입생은 많은 부분 수시모집으로 뽑는다. 해당 과에서 수시면접을 볼 때, 꼭 나를 부른다. 여러 면접관 중에서 압박면접을 가장 잘 보기 때문이다. 면접에서 제가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엔터테인먼트의 뜻'을 말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답하지 못한다. 엔터테인먼트과에 지원했는데도 말이다. 그 와중에 가장 쉽게 하는 대답이 '연예기획사 아니냐'고 한다.엔터테인먼트의 사전적인 뜻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활동' 쉽게 말해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뜻을 설명하고 학생들에게 다시 질문한다. 이 과에 지원한 이유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 아니냐고. 그럼 학생들은 조금 감동한다.내가 대표로 있는 '비아트리오'는 클래테인먼트라는 새로운 장르적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클래테인먼트는 '클래식+엔터테인먼트'를 합쳐놓은 신조어이다. 클래식은 보수적이고, 재미없다. 흔한 오해들이다.사실 클래식은 전통을 지켜 계승하는 측면이 많지만 처음 생겨났을 때는 가장 핫한 엔터테인먼트였다. 지금 재미없게 느껴지는 건, 너무 유행이 지나서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 클래식은 즐기기 위해 소비되기보단 교양과 입시를 위해 대다수 사용되게 된다.클래테인먼트는 '클래식을 지금 시대에 맞게 즐기게 하자'라는 모토로 만들어졌다. 클래식의 위대한 유산인 악기와 테크닉들을 사용해, 지금의 음악들에 풍성한 질감을 입히는 것이다. 이 실험은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선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정기공연이 수년 동안 매진되고 있다. 매진이 된다는 것은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공연이 재밌다는 증거일 것이다. 재밌다는 건, 어렵지 않고 이해와 공감이 된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모든 공연 콘텐츠 최고의 리뷰는 "정말 재밌다 또는 티켓값이 아깝지 않다"라는 평일 것이다. 이젠 클래식과 국악까지도 관객들에게 이 평을 받기 위한 노력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런 변화들은 긍정적이다. 관객이 공연을 즐기기 위해 미리 공부를 해야 한다. 관객석에 앉아서도 교양 부족을 들킬까 공연이 끝날 때까지, 박수 한 번 시원히 쳐보지 못한다면 관람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 된다.사실 관객이 공연을 즐겁게 보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관객이 공연을 재밌게 보도록 공부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클래식과 국악이 부흥하려면 엔터테인먼트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018-03-15 00:05:00

[매일춘추] 암스테르담의 추억

내가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은 것은 헝가리의 한 대학병원에 클럽십(Clubship) 참여를 위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일이다. 가는 도중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경유하게 되면서 목적지인 헝가리가 아닌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첫인상으로 남게 됐다.유치원 다닐 적에 쌓고 놀았던 장난감 모형같이 생긴 집들, 따닥따닥 붙어있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운하를 따라 놓인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동화 속 주인공이 살 것같이 예뻤다. 해 질 녘 노을에 반사되는 집들 사이로 걸어 다니는 큰 키의 사람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내 키가 작은 편에 속할 수 없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위로 올려다 봐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즈 생산 및 섭취량이 어느 나라보다 월등한 네덜란드인들을 보며, 치즈를 많이 먹어 키가 큰 것이라는 나만의 가설에 확신을 가져보기도 했다. 잠깐 봤던 암스테르담을 뒤로하고 헝가리로 향하였지만, 좀처럼 그 풍경을 잊지 못해 유럽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도시를 들르곤 한다.지난해 가을에는 출판할 나의 책에 수록할 사진 촬영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한 달여간 머물렀다. 어느새 다섯 번째가 된 암스테르담 방문. 이제 이곳은 나의 첫사랑과 같이 여겨지는 도시가 되었으니, 이쯤이면 누군가에게 '나의 암스테르담'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향기로운 가을의 암스테르담. 도시를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운하 주변으로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고, 집집마다 작은 화단에는 해바라기들이 집을 지키고 서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운하를 따라 부서지는 햇빛을 보니 10시간이 넘는 비행의 피로도, 항공사의 실수로 내 짐이 분실되는 사고에 격해진 나의 감정도 모두 누그러졌다.암스테르담은 고향에 온 듯한 아늑한 기분이 들게 한다. 전통시장에서 식료품을 구입하고, 매일 아침 '렘브란트'의 이름을 딴 숙소 주변 공원에서 조깅을 하며, 그곳 주민들과 간단한 네덜란드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전의 방문에서는 그저 먹고 보고 즐기면 되었던 여행이었지만 이번 방문에는 사진 촬영이라는 과제가 있어서 그런지 항상 시간에 쫓기듯 부산을 떨었다. 그래도 매일 촬영이 끝나면 고흐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러가기도 하고, 그 사이 친해진 이웃의 건축가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지금도 암스테르담에서의 추억들을 회상하면 아련하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추억은 나와 대상 간의 공유하는 기억이 아닐까. 그 대상이 공간이든 사람이든, 유형이든 무형이든, '시간'이라는 양념과 함께 서로 섞여 교감하고 이야기를 만들면 멋진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어느 여행가는 여행이란 두 번 되풀이 될 수 없는 체험이기 때문에 일회성으로 그 고장을 방문하였을 때 참 맛이 있다고 하던데, 나는 첫사랑을 마음 한 켠에 두고 회고하듯 추억의 암스테르담을 홀린 듯이 다시 찾을 것 같다.

2018-03-14 00:05:00

[매일춘추] 알아야 면장도 한다

'알아야 면장도 한다.' 이 말은 공자가 아들에게 공부하고 익혀야 담벼락을 마주 보는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 '높은 자리에 서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뜻으로 통용되기도 한다.직위나 계급이 능력과 늘 비례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론들이 있다. 먼저, 피터의 법칙은 위계조직 내에서 모든 구성원은 무능이 드러날 때까지 승진하려는 경향이 있어, 고위직은 무능한 인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즉, 유능한 직원이 늘 유능한 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사실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거나 인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무능이 입증되는 지위까지 승진한 자들은 무능을 감추려고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며 결재서류에 오타라도 발견 못하면 불안해한다.딜버트 법칙은 창의적인 도전과 혁신을 두려워하는 조직은 똑똑한 직원보다 회사에 타격을 가장 적게 입히는 무능한 직원을 가장 먼저 승진시킨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 법칙이 조직의 일반원리로 적용되면 권력자는 권력 유지를 위해 무능한 직원들을 고위직으로 승진시키고,조직원들은 감사나 징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험적이거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업부서는 피하고 안정적인 지원부서를 선호하게 된다. 결국 조직은 '어떻게 하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일까'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고위직에 무능력하고 보신주의(保身主義)로 무장한 자들로 채워지고, 중요 의사결정이 단순히 계급이나 서열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조직은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고 만다. 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문화와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시스템의 결합으로 조직과 개인의 동반성장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에 대한 답을 백범 김구에게 찾아봤다.백범은 독립운동 세력들의 분열을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사욕에 있다고 보고 '머리가 되기 위해 싸우지 말고 발이 되기 위해 다투자'는 쟁족운동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실력도 없이 높은 자리를 다투지 말고, 먼저 자기 실력에 맞게 낮은 일부터 충실히 하면 결국 밀려서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백범이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며 발 노릇을 열심히 한 결과, 임시정부의 머리인 '주석'이 된 것을 보면 백범의 '쟁족'은 성공한 셈이다.반드시 유능한 자만이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리더는 최소한 목표를 이해하고 명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리더의 모호한 지시는 부하들이 통나무를 깎아서 이쑤시개를 만드는 우(愚)를 범하게 만든다.성철 스님은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고 말했다.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우리를 아는, 그런 공부를 해보자. '알아야 면장도 한다.'

2018-03-13 00:05:00

[매일춘추] 봄비

날씨가 흐려지더니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 목적도 없이 집을 나와 빗길을 걸었다. 근교로 나가서 연록의 어린잎들이 비를 머금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 그저 귀여워 웃음으로 다가갔다. 마치 엄마의 모유를 빨아들이는 아가의 입처럼 쭉 내민 잎들이 앙증맞기만 하였다. 어미의 젖같은 봄비를 들이키고 하늘을 향해 바라보는 그 순간이 키가 되는 가 보다. 봄비를 맞게 되면 더욱 쑤욱 커 올라오는 연록의 잎들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세상을 투명화 시켜준다. 겨울의 찬 기억들을 떨쳐버리고 올라오는 잎들의 기운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봄비가 내리면 우산을 받쳐 들고 자주 강가를 거닐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는 데 누구를 마중 나가는 사람처럼 마음만 들뜨던 날, 우산을 받쳐 들어도 옷은 젖어왔다. 차려입은 나팔바지 가랑이가 점점 젖어 올라와도 그냥 비를 맞고 걸어가는 시간이 좋았던 시절이 물씬 떠오른다. 비 젖은 길을 걸으면 생각도 젖어 들어 자유로운 자신임을 즐겼다. 일상의 잔상들이 내 마음 안에 조용히 내려와서 제자리로 찾아가면 미지근한 일상마저도 내게는 소중한 하루였음을 알았을 때, 몰래 흘린 눈물은 봄비 속에 감추어져 젖은 길을 더욱 젖게 해 주었다.자란다는 것은 기쁨이었지만 자란 만큼의 시간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고는 멍해 버린 가슴앓이도 봄비 오는 날에 했었다. 누군가를 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가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일 게다. 봄비 오는 길목에 서서 낙엽 되어 가버린 생각들을 모아봤다. 아직 어린잎 밑동 주위에는 지난해 자란 풀들이 말라 엉켜져 있었다. 어린 싹들은 그것들의 보호 아래 자랐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지. 겨울 동안 자신을 따뜻이 감싸준 마른 잎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될 즈음은 아마도 제 자신이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일 것이다. 그 품안에서 한 해의 꿈을 꾸었을 어린 잎들은 봄비를 머금고부터 새로운 한 해를 향해 커 올라오는 것이리라.내 생각을 키워 준 봄비는 나와 어린잎들에게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선물로 뿌려줬다. 어린 날, 보리밭을 오르고 내리던 종달새처럼 목청껏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던 일도 나의 잃어버린 시간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내 삶의 귀중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고운 보자기로 묶어 놓고, 봄비를 맞으러 가는 해마다의 봄날에 보자기를 다시 풀어 새 이야기를 담아 볼 작정이다. 봄비 따라 거닐면 생각이 빗줄기를 타고 먼 데까지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남은 봄날도 봄비 속으로 젖어 드는 시간을 찾아 거닐고 싶은 마음 뿐이다.

2018-03-12 00:05:00

[매일춘추] 권력자들 민낯이 드러나는 요즘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여성 인권을 향한 시선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요즘, 현재의 흐름을 비판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간혹 피해자의 고백을 두고 주목받기 위해서, 어떤 이익을 바라고 저러는 것이라는 낭설이 퍼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칼날을 목에 대는 행위와 진배 없다. 피해자들의 말은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지녀야 하고, 그것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여성인권운동은 비단 문화예술계에서만 퍼지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계로 번져 유력 대권주자로 꼽혔던 한 정치인의 민낯도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모든 사안은 수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행위를 최초로 고백한 피해자에게 관심을 가지려 한다.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이들은 자신의 수치심을 안은 채 세상과 대면한다. 굳이 들추어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들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당한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승승장구하는 소수 기득권자들의 행보를 보며 치를 떨고, 불안에 휩싸이고, 삶에 희망을 잃어가게 된다는 점에 있다. 마침 시의에 맞닿아 시작된 미투라는 인권운동은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현재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다시 찾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문화예술계 내에서 오가는 말은 이러하다. "그래도 예술가들이기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 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예술은 평등과 사랑을 지향하는 세계이며 소수의 그늘을 들추어 그들을 양지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행위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소수의 예술가들이 폭력적이며 추잡한 행위를 권력으로 일삼았냐 반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예술가라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연극인이기 이전에 이 사회를 더불어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소수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시민사회 구성원다운 행동일 것이다.권력자들은 자신이 사지에 내몰릴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자기-존재다. 특히 정치라는 수단으로 사회지도층의 반열에 오르는 이들은 부보다는 명예를 위해서 그 자리를 좇는다. 플라톤이 주장한, 투표를 하는 이유는 가장 깨끗한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덜 더러운 사람을 뽑기 위해서라는 말. 우리는 이 말을 상기시켜야 한다. 사회 부조리를 명예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개인이 온당한 자기권리를 실현하길 원한다면 건설적이며 이상적인 무언가를 제시하기 이전에 개인의 도덕성과 신념, 청렴도와 같은 기본적 태도와 기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면 좋겠다. 이번 미투 운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의의는 어쩌면 많음,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2018-03-09 00:05:00

[매일춘추] 잘못인 줄 모른다

요즘 미투 운동으로 뜨겁다.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갑질로 뜨거웠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사회에 너무 만연해 가해자가 잘못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논쟁화되고 문제화되었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음악 하는 후배에게 전화가 와서 A와 친하냐고 물었다. 몇 번 같이 일을 한 사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실은…이라며 고민을 털어놨다. 함께 음악을 하는 친구들 모임에 갔는데 그 A가 후배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면서 A가 책임지고 있는 무대엔 절대 후배를 세워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후배의 친구가 그 친구가 A에게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버릇없어 보이지 않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해줬던 후배의 친구가 마실 거라도 사서 A를 찾아가 인사라도 하라고 조언을 했고 후배는 며칠 고민하다 A와 친한 것 같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근데 후배가 정작 나에게 알고 싶은 건 그 A가 어떤 걸 좋아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걸 사서 인사 가겠다고.사실 후배는 A에게 화를 내고 어디 신고라도 해야 한다. 근데 한국 사회에서 이제껏 이런 일을 당했을 때의 모범답안은 전화한 후배가 하려는 행동이었다.위의 일이 이전에는 잘못인 줄 몰랐던 전형적인 갑질 사례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으로 상대방의 권리를 제약한 것이기 때문이다.미투 운동의 핵심은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고 이야기하고 가해자를 분명하게 지목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해서 가해자가 자신이 잘못한 일을 피해자에게 사과하게 하는 것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언론에 여당의 대선급 인사의 미투 증언이 나왔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갑질 사례와 미투 증언들. 이 일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이제서야 가해를 받은 사람들이 아프다고, 아팠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고 가해자들이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겨우 말이다.

2018-03-08 00:05:01

[매일춘추] 인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인연을 위해 곡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썼다. 슈만의 클라라, 고흐의 티오, 피천득의 그녀 아사코까지…. 아직 인연을 논하기엔 젊은 나이지만 내게도 인연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7년 전 어느 여름, 한라산을 등정한 일이 있었다. 빠르게 등정을 마치고 얼른 하산하여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할 생각으로 숙소에서 달랑 물 한 병만 챙겨서 출발했다. 내가 선택한 '성판악-관음사' 코스는 첫 시작이 넓고, 평지로 느껴지게 하는 계단식 길이어서 나같은 초보자가 백록담까지 등정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파란하늘과 평탄한 등산로에 힘을 얻어 뛰다시피 속도를 내며 등정을 하였더니 어느덧 마지막 쉼터가 나왔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그곳에는 긴 꽁지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청년만이 쉬고 있었다.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목례로 격려를 하고는 각자의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드디어 백록담. 입산 때부터 작동되었던 타이머는 3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통 9시간 걸린다는 등정 시간을 6시간 안으로 단축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산 길에는 영 다리가 더디게 움직인다. 시간을 단축한답시고 시작부터 뛰어오른 탓인지 조금 가쁘던 숨은 거의 쉬기 힘들 정도로 헐떡거리게 되었다. 더운 날씨와 무관하게 한기가 들며 팔다리가 떨리고 어지럽기 시작했다. 당뇨 환자들이 가끔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 저혈당 증상인 것 같았다. 무얼 먹어야 할 텐데 하면서 힘들게 한 걸음씩 옮겼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가? 깨어나 보니 등산로 중간에 있는 나무의자에 곱게 누워 있었고 휴게소에서의 그 꽁지머리 청년이 마치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선뜻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과자 꾸러미를 내어주고 나를 하산 지점까지 부축하여 택시까지 손수 잡아 숙소 앞에 떨어뜨리고는 홀연히 떠났다.하산 길에 우리는 통성명과 서로의 신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당시 정신없던 나의 상태 때문인지 어렴풋한 그의 얼굴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후 산행을 할 때면 '일용할 양식'을 넉넉히 챙기며 한라산에서 만났던 그 생명의 은인(?)을 떠올리곤 한다. 이따금씩 산에서 만나는 꽁지머리의 등산객을 보면 혹시나 그인가 돌아보기도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연에 대한 첫 성찰을 하는 계기가 혼인이라고 하는데 나의 경우 한라산 등정에서 만난 구세주 덕분에 인연의 의미를 곰곰이 새겨보게 된다. 산에서의 인연, 내가 받았던 그 도움처럼 언젠가 누군가를 도울 날이 생긴다면 그것이 나와 그 꽁지머리 청년과의 소중한 인연의 결실이리라.

2018-03-07 00:05:00

[매일춘추] 위대한 도시 '대구'

연어나 송어는 후각과 기억에 의해 태어난 곳뿐만 아니라 부화지까지도 찾을 수가 있고, 철새들도 머나먼 거리를 정확하게 오가며 매년 새끼를 길러낸다. 특히, '큰뒷부리도요'라고 불리는 새는 번식을 마친 후 알래스카에서 호주까지 1만여㎞를 날아가는 동안 먹이는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이처럼 귀소본능은 생존과 번식에 적합한 장소에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본성으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몸과 영혼 깊은 곳에 저장된 절대 가치이다."하늘과 별 그리고 신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은 귀소성에 비롯된 욕망을 보여준다. 누구나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한 근원에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라고 에릭 호퍼가 말했다.최근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는 '분리주의와 자치 확대' 움직임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지역의 공통적인 특징은 통합의 역사가 짧고, 자치의 전통이 강하여 자기 지방에 대해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사실 유럽은 수많은 소국으로 나뉘어 1천 년 이상을 유지해 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분리와 자치'의 귀소성을 가진 유럽은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이나 스페인 카탈루냐 또는 바스크 지방처럼 분리 독립의 요구와 이탈리아 북부지방처럼 자치권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다.그렇다면 대구의 귀소성은 무엇일까. 국권을 지키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2·28민주운동으로 독재에 저항한 대구의 정신은 마치 귀소본능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1999년)과 2·28기념공원(2003년)을 조성하게 만들었고, 결국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2월 2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게 하였다. 대구는 달구벌 천도를 꿈꾼 신문왕에게는 기회의 땅이었고, 명나라 두사충에게는 천하 최고의 명당이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민주'를 지키기 위해 독재정권에게는 2·28 항거로, '국부'를 지키기 위해 일제에는 국채보상운동으로 저항한 '자유'와 '민주' 그리고 '국부'라는 귀소본능을 가진 도시이다.또한, 손기정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말소한 '현진건의 용기'와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희생'과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의 시로 노래한 '김광석의 감성'은 모든 '대구인'들의 영원한 '귀소성'이다.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늘 시대가 개혁을 원하면 앞에서, 안정을 원하면 뒤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도시인 대구의 위대한 역사와 귀소본능을 잊지 말자. 대구는 보수나 진보의 이념도시가 아니다. 그저 위대한 정신을 가진 도시이다.

2018-03-06 00:05:04

[매일춘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에 의해 그나마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새 소식을 듣노라면 좋은 소식보다 안 좋은 소식들로 채워질 때가 많았다. 선행도 소개되긴 하나 그것보다 나쁜 고리의 끈들이 즐비했다. 서로 밀고 당기고 옳다며 지는 법이 없었다. 나도 한때는 일 앞에서 따지고 나서기도 하였고, 가만히 있는 것이 지는 것 같아 반발도 했지만 이제는 한 발짝 물러나 상황을 보고 생각을 다듬는다.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눈여겨 지켜보곤 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재력이나 명예를 가진 것도 아닌데 행복을 느낄 줄도, 만들어 갈 줄도 알았다. 돈이란 것도 많이 벌면 좋지만 좀 부족해도 알뜰살뜰 꾸려가고 그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살아가는 빛이 강렬하기보다 은근했고, 섣부른 욕심도 없었으며, 작은 일이라도 남이 보든 안 보든 주위에 손을 내밀었다.어린 시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 오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빠는 "그 어려운 말을 하필 내게 묻느냐. 나도 모른다. 네가 살다가 어느 날 가슴을 치며 '아! 이 말이구나'라고 느낄 때 알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이 말이 생각나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우리가 살다 보면 사람이 사람을 도운 것인데, 지나고 보면 사람의 손길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어떤 도움을 받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었으며, 우리 곁에서 매일 조금씩 일어나는 미풍이라 잘 느끼지 못하다 나중에 '아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잘 살아내는 사람들의 품위 속에는 복 받을 일을 공든탑을 쌓듯이 쌓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보고 복이 많다고 하지만 그는 복 받을 일이라고 하기보다 자신의 진정한 삶을 꾸려왔던 것이다.나 자신도 하늘이 나를 도울 만큼 공든탑은 쌓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을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위선적인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고 노력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를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잘 살아낸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살아내야겠다고 내 일상을 다독거리곤 한다. 그래도 세상에는 참으로 선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렇게나마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한 사람의 작은 삶도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돕는 삶을 살 때에 하늘은 그런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스스로 돕는 자가 많아지면 새 소식들이 좋은 일로 가득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잘 엮어내야겠다.

2018-03-05 00:05:00

[매일춘추] 문제적 모순적 인간 이윤택

올 초부터 연극인들의 성추문 사태가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연극단체 연희단거리패의 예술감독 이윤택 연출가부터 시작해 목화의 오태석, 배우 조민기와 오달수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이들의 만행이 폭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연극계 내부에서는 공공연한 사실로 여겨 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부분을 문제라 인식하면서도 해결의 태도를 보여주진 않았다. 여러 언론을 통해 언급되었지만 피의자로 지목된 이들은 한국 문화계를 주도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문화계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쉽게 그들의 행위를 문제 삼거나 제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지난해 겨울 미국에서 시작된 성추문 폭로 운동, '미투(Me-too) 운동'은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 영화계의 로비스트로 불리며 자신이 업계에 끼치는 힘을 이용해 꿈을 갖고 입성한 배우 지망생과 스태프들을 성적 도구로 쓰거나 이용했다. 이런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거쳐야 하는 관문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레 스며든 관행은 악습이 되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여성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공통점을 보면 모두 기득권자로 군림한 자들이다. 한 개인이 소수의 인권을 침범해 자신의 쾌락을 쟁취한 것은 힘이 있는 자들만이 가능한 행위였다. 우리 사회는 시대적문화적으로 그들의 행태에 반기를 들 수 없게 만드는 암묵적 용인을 허용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이윤택 연출가가 기자회견에서 표명한 입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8년간 진행되어 온 관습적인 일이다."이도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관습일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의한 폭력이다. 힘이 없는 개인이 강자 앞에서 어떠한 소리도 낼 수 없게 만들고, 작은 소리라도 포착된다면 존재를 압살하고 사장시키는 강력한 힘. 그들은 동료를 동료라 칭하지 않고 위선을 치장했다. 그들의 치명적인 착오는 보수적 관행이 악습이 된 채 여성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침해했다는 점에 있다.나 또한 이윤택 연출에게 빚이 있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서 기회를 얻었고, 내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과 철학, 특히 연극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울 순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상은 '연극하는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였다. 이제 그 말은 모순이 되었다. 그가 말한 인간은 타인이 아닌 타자였다. 이후의 세대에게 이런 악습적 관행이 더이상 되물림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꿈을 가지며 살아가는 무명 배우들은 극장을 지키고 있다.

2018-03-02 00:05:00

[매일춘추] 예산이 상상력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났다.문화기획을 하는 사람으로 개폐회식은 필수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집중해서 시청했다. 현 시대에 이벤트로 할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벤트는 사실 예산이 모든 것이다. 공연 하나를 기획하기 위해 공연자를 섭외할 때부터 유명세 단계로 출연료가 책정되어 있다. 또한 공연에는 음향, 조명, 영상, 특수효과가 기본적으로 쓰인다. 이 장비들도 브랜드와 수량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가격이 높을수록 브랜드와 수량이 좋고 많다. 장비가 좋으면 당연히 운용하는 기술진들도 좋아야 한다. 이들의 사례도 당연히 경력이 많고 인지도가 좋을수록 높아진다.이 모든 것은 결국엔 하나로 이어진다. 관객을 모으기 위해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스타를 섭외하고, 그의 퍼포먼스에 맞는 음향, 조명, 영상, 특수효과가 있어야 한다. 더불어 스타의 뜻에 맞는 연출을 해줄 수 있는 기술진들이 필요하다. 예산이 '관객의 수'이기도 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은 예산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보여줬다.이전 열렸던 하계동계올림픽을 비교 조사한 실제적 수치로도 증명되고 있다.예산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보여준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의 비밀은 뭘까. 창의적이면서 헌신적인 사람들이다. 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발품을 많이 파는 것이다.이들은 세계적인 이벤트를 위해 한국적이면서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킬 만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연구하고 찾았다. 세계적 IT 강국의 면모와 첨단기술을 빨리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미래산업 강국의 모습을 세련되고 재밌게 보여줬다.그렇게 규모보다 의미를 먼저 생각했고, 그 의미에 맞춰 적정 이벤트 규모를 설정했다. 그리고 리허설을 하고 또 했다. 실수를 줄이는 것이 예산을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독 추웠던 이번 겨울 더 추운 평창 야외경기장에서 개폐회식 리허설을 계속 반복해 완벽하게 연출한 모습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준 것이다.평창동계올림픽은 끝났지만 아직 패럴림픽이 남았다. 평창에 아직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가장 먼저 사례해야 할 부분이 예산을 뛰어 넘는 상상력을 실현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다.사실 평창동계올림픽도 예산이 상상력을 넘지 못했다. 빚으로 남았을 뿐이다. 예산이 상상력과 비등한 수준까지 오를 때, 대한민국은 한층 더 경제대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2018-03-01 00:05:00

[매일춘추] 편견

1년 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앓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이 질병관리본부 협조 문서를 들고 나의 진료실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미 항바이러스제를 투약 중이었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몇 가지 주의할 점과 추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할 것을 당부하고 진료를 마쳤다. 그랬던 그녀에게서 새 근무지로 이동한 나의 진료실로 전화가 왔다.그녀는 피부병이 생겼다며, 전화를 통해 괴로움을 호소했다. 반짝이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그녀였는데 피부질환이라니. 그녀의 기저질환을 고려해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받을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내게 진료를 받겠다며 반복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새로 옮긴 진료실 위치를 가르쳐 주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출근하니 그녀는 주차장에서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다. 1년 만에 본 그녀의 건장한 체격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치렁치렁 늘어뜨려 한껏 힘을 자랑하던 레게머리는 삭발이 되어 있었다. 치료 예후가 안 좋은 것일까 하는 걱정을 하며 대화를 시작해보니,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체중 감소는 성공적인 다이어트의 결과였고, 머리는 곱슬을 펴기 위해 약품을 쓴 뒤, 알러지성 피부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삭발한 것이었다.그제야 안도한 나는 그녀에게 현재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알러지 반응을 낮출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해 주었다. 그녀 역시 안심이 되었는지 활짝 웃으며 진료실을 나섰다. 다음 날 그녀는 전화로 하루 만에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갓 블레스 유"(God bless you)를 연신 외쳤다. 그런데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 표현이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녀가 떠난 직후 내가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료 중 그녀가 머리를 긁어 떨어진 각질들을 보며, 의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트리진 않을지 신경이 쓰였다. 두피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많아 항균 연고를 발라주었는데 상처 부위가 나에게 닿진 않았는지 괜히 걱정도 됐다. 갑자기 눈이 따가운 느낌이 드는 것이 그녀 때문은 아닌지 순간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곧바로 진료실을 환기하고 입고 있던 진료복을 모두 벗어 세탁기에 넣고는 샤워까지 했다. 떨칠 수 없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하다가 불현듯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편견'이라는 것은 무섭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의식을 잠식하고 행동을 조정한다. 편견이 옳지 못한 것임을 알면서도 고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의료인인 나조차도 편견에 사로잡혀 의학적 근거가 없는 걱정을 했을 정도니, 그녀가 자신의 질병을 주위에 알렸을 때 받았을 따가운 시선들은 오죽 많았을까.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 세상살이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편견이야말로 무서운 질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2018-02-28 00:05:00

[매일춘추] 근검과 소비

다산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 두 아들에게 글을 남겼다."너희들에게 논밭을 남겨줄 만한 벼슬을 못 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다산은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뜻하는 '근검'의 두 글자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했다.지난해 모 회사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약 60%가 '집'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척박하다. 월급쟁이들은 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10년 이상 모아야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다. 안정된 직장과 내 집 마련으로 중산층 편입을 꿈꾸는 20, 30대에게 다산의 '근검' 전략이 유효할지 의문이 든다.부분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경우를 '구성의 오류'라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절약의 역설'을 들 수 있다.'절약의 역설'은 개인의 입장에서 절약해 저축을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저축하게 되면 소비가 줄고 총생산량이 감소하여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하지 못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누가 소비를 해야 된다는 말인가. 저성장 기조와 고용시장의 불안정 등으로 소비심리는 더욱 위축되고 있다.만약, 1조원 자산의 부자가 총 100가구인 시가 5억원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면 그 아파트는 순식간에 평균 자산가치가 100억원대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가 된다. 그러나 100억대의 자산가는 아무도 없다. 1명의 1조 자산가와 그에 못 미치는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래서 경제지표가 우수하더라도 양극화가 심하면 통계는 왜곡된 것이 되고, 그 통계는 경제정책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흐르게 한다.아무리 부자라도 하루에 열 끼를 먹지는 못한다. 결국 고용 안정을 통해 실질적인 소비 주도층인 중산층이 늘어나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투자심리가 살아나야 한다. 결국 세금의 원천도,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기업이기 때문이다.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를 부르짖던 미국, 영국 등의 경제 강국들이 통상정책을 강화하는 보호무역주의로 방향을 틀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내수경제마저 죽는다면 정말 힘들어질 수 있다.현대인을 '호모 콘수무스'(소비하는 인간)라 부를 만큼 우리는 매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소비는 욕망과 쾌락, 사치와 방탕이라는 도덕적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컨슈머(Consumer)의 시대'를 지나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기 이전부터 참여해 자금을 지원하고 제품 생산에 관여하는 '프리슈머(Presumer)의 시대'를 살고 있다.다산 정약용이 남긴 '근검'만으로는 살 수 없다.

2018-02-27 00:05:00

[매일춘추] 그해 겨울

그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저녁 어둠이 땅에 깔리고 있을 즈음 한 노파가 현관 앞에서 서성거렸다. 통유리 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그렇게 남루한 옷차림은 아니었고, 보통의 노파처럼 단정한 모습이었다. 솜을 넣어 누빈 바지에 자주색 외투 속으로 보랏빛 스웨터를 곱게 입고 목도리도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닫힌 유리문을 열고 노파 앞에 멈춰 섰다. 노파와 마주 섰고, 눈도 맞추었다.노파는 "참 부끄러운 부탁이지만 한 끼의 식사를 도와주었으면 해요"라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1천원을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내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노파는 이야기를 더욱 길게 늘어놓았다. "새댁, 나도 새댁 같은 때가 있었어.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였어. 나처럼 되지 말아야 해. 이 노인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길 바라고 싶어."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1천원짜리 두 장을 손에 얹어 주었더니 정말 고맙다며 인사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닮지 말라'며 눈시울을 적셨다."자식만 믿고 살았는데 이렇게 되었어…." 울먹이며 돌아가는 노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의 첫눈이 노파의 흰 머리에도 하얗게 내려앉던 그 겨울의 시작이었는데, 겨울의 터널을 어떻게 빠져 나올 것인지 가슴이 멍해졌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겨울만 되면 가끔 그 노파가 떠올랐고, 내가 노파의 나이일 때는 어떤 모습일지 아득한 미래가 보일 듯 말 듯했다.지금은 노인복지의 일환으로 기초노령연금이 나온다. 그 돈만으로 한 달을 버텨내기에는 형편없이 적은 돈이긴 하지만 안 받을 때보다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어떤 노인은 기초노령연금을 받으려고 재산을 다 자식에게 맡기고, 자신이 필요할 때 받아쓰는 걸로 약속했다고 하니 앞으로 피눈물 날까 걱정된다. 자식이 부모가 준 돈을 함부로 쓰겠냐마는 제 형편이 절박하면 쓰기 마련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서 제 자식 챙겨주기는 쉬워도, 부모 챙기기는 쉽지 않다. 부모 돈을 내 돈처럼 쓰다가 난리 난 집을 적잖이 봤다. 부모가 재산이 있다면 살았을 때 좀 주되, 자신이 있을 집과 생활비 그리고 인정을 나눌 지참금은 놔두어야 할 것이다. 기초노령연금을 안 받아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삶인가. 행여 그 연금에 혹해서 제 재산을 함부로 처리하여 백세시대에 노후를 걱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그해 겨울, 한 노파를 만난 것이 나의 노후를 설계하는 이정표가 됐다. 인생! 그것은 수수께끼, 오늘을 진실로 살아내고, 내일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2018-02-26 00:05:00

[매일춘추] 세계 최고 축제가 주는 의미

대한민국이 올림픽으로 물들어 있다. 약 200개국이 참가한 이번 올림픽은 전 세계 국가대표가 한국땅을 밟아 경쟁을 진행 중이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기 위해 메이저 언론사들도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평창을 돌아다닌다. 이건 실로 위대한 일이다. 올림픽을 주최한 사실만으로도 뜻깊지만, 역대 개최국 가운데 동하계올림픽을 이뤄낸 국가는 단 6개국뿐이라 한다.하지만 이런 위업도 처음부터 달성한 건 아니다. 2010년과 2014년 올림픽 개최에 실패하고 삼수 만에 최다 득표로 승리한 대한민국은 지금의 평창을 위해서 약 10여 년을 준비했다. 60억 명의 전 세계인이 지켜본다는 것과 몇 조원에 달하는 경제수익보다는 우리에겐 대한민국 네 글자를 전 세계에 알린다는 것에 더욱 흥분하고 있다.냉정히 따지면 우리나라는 동계스포츠 강국은 아니다. 쇼트트랙과 소수 종목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비인기 종목이다. 그래서 경쟁시스템도 열악하고 그만큼 발전도 더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지금은 중요하다. 올림픽 정신을 알기 때문이다. 경기가 열릴 때 만큼은 이념과 충돌을 중단하고 스포츠라는 수단으로 평등과 사랑, 자유와 하나됨을 이루자는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의지가 현재 대한민국 땅에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처음엔 우려가 적지 않았겠지만(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서) 그 점 때문에 올림픽의 의의를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단일팀이 그 성과라 할 수 있다. '코리아' 라는 이름으로 한반도기를 함께 흔들며 입장하는 선수들은 휴전선을 잊게 만들어주었다. 더군다나 북한에서 온 특사의 눈물은 올림픽이 단순한 스포츠 대회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멀어진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만나게 하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한 단일팀이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물론 올림픽을 가장 오래 기다린 이는 선수들이다. 단 17일간 열리는 대회를 위해 수년 동안 땀을 흘렸으니 말이다. 세계최고의 랭커들이 모인 경쟁의 장에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루어낸다면,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분명 관중들은 박수로 화답할 것이다. 선수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을 선물하고 관객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경기로 즐거움을 선사하는 평창이 되면 좋겠다.

2018-02-23 00:05:00

[매일춘추] 매진복

만병통치약 같은 홍보 방법은 없다. 공연을 할 때 필수적인 세 가지 과정은 기획, 연출, 홍보로 나눌 수 있다. 현재 거의 예술가 대다수는 이 과정을 혼자서 담당하고 있다. 각 과정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으면 좋겠지만, 여건상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이 중 한 가지 일을 대신 해주길 바란다면 99%가 홍보를 이야기할 것이다.홍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거칠게 표현하면 표를 팔아내는 것이다. 표 팔기에 좋은 공연은 모두가 다 아는 스타가 공연하는 것이다. 작년 대구에서 가장 빨리 표를 판 공연은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진행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공연이었다. 예매 5분도 안 돼서 1천 석 모두 매진되었다.다음은 스타와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공연이다. 내가 매니지먼트하는 월드뮤직 앙상블 비아트리오 연주팀이 이제껏 가장 비싸면서도 표를 많이 판 공연이 2013년 아양아트센터에서 10센치와 컬래버레이션을 했던 공연이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스타 마케팅을 활용한 것이다.스타 없이 공연을 홍보하는 방법은 기능성 공연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비아트리오 연주팀의 사례를 들자면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비아트리오 단독콘서트'를 한다고 홍보를 하면 그 홍보의 대상은 비아트리오를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뿐이다.하지만 '비아트리오의 가족콘서트'라고 하면 비아트리오를 아는 사람들과 가족콘서트에 관심 있는 사람 모두 홍보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비아트리오는 '비아트리오의 가족콘서트' 외에도 '비아트리오의 데이트콘서트' '비아트리오의 동화 음악이 되다' 등의 제목으로 특정 대상에게 필요한 공연을 지속적으로 기획, 제작했다.그 결과는 놀라웠다.'동화 음악이 되다' 라는 공연은 내용의 특성상 대구경북의 국공립 학교 선생님들의 연수 때마다 모두 공연하게 됐고 그 덕에 대구경북의 국공립 학교 선생님들 모두가 비아트리오를 알게 되는 홍보 효과를 보았다. 실제로 대구경북의 학교에서 비아트리오의 섭외가 끊이지 않고 있다."관객을 웃고 울게 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 관객을 공연장에 오게 할 자신이 없다."공연을 만드는 예술가 대다수의 마음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관객을 오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위의 기능성 공연도 해결책을 찾으려다가 발견한 것이다. 모든 공연에 맞는 만병통치약 같은 홍보 방법은 없다. 각자의 홍보 방식과 티켓 판매 방식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만드는 수밖에는.

2018-02-22 00:05:01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