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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오늘날 우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 땅에서 약 800만 년 전에 시작된 인간의 생존 이래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불과 10년 후 과학문명이 어떻게 발전해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이전에는 과학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고 기뻐하기만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우려도 함께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우려의 강도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이러한 것은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도 해당되는 것으로서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의 양은 대단히 많다. 필자가 속한 대학교는 도서관에 약 100만 권 정도의 각종 책들과 다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 도서관은 약 1천만 권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지구촌에서 출판되는 책의 양은 대단하여 우리나라에서만 해마다 약 5만∼6만 권의 신간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다. 각종 신문, 잡지, 논문, 수필 등으로 기록되는 지식들도 대단히 많다.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되어 인류가 쌓아 올릴 지식의 양이 얼마나 될지 짐작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이러한 일들은 인류가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넓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공간, 시간, 인과율이라는 틀 안에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인식하는 데에는 제약들이 많다. 대표적 예로 인류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가시광선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물질은 존재 세계의 4∼5%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역의 물질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아서 호기심 많은 인류가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알아내는 기쁨을 누릴 것이고 그것을 응용한 과학기술의 편리함도 누릴 것이다.알 수 없는 영역은 알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어서 대단할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을 알아낼 때 사용하는 감각, 감성, 이성을 초월한 영역이기에 지금까지 무엇을 알기 위해 동원했던 것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없다. 그래서 이 영역에 대해서는 차라리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고 쉬울 것이다.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조차 궁금하기 그지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호기심이 강해서 그럴까. 에너지 절약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참으로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이 영역에 대해 이렇게도 지속적인 관심이 가는 것은 내가 알려고 해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인간 인식의 틀을 넘어선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영성의 틀로 가야 하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꾸만 관심을 보이고 당신에 대해 알아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토록 이 영역에 대한 강한 관심을 지니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없는 영역에 대한 헛된 관심만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또한 나의 호기심이나 힘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한 것 같다.이 영역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면 보이는 세계의 적지 않은 것들을 희생하거나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관심과 열망으로 이 세계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보이는 현상세계와 죽음을 넘어선 어떤 것을 열어주는 구원의 세계이기에 이러는 것 같다.
2019-11-27 10:24:00
[종교칼럼]정치와 자살
아버지께서 노년에 접어드시자 하시던 일을 접으셨다. 동네에서 친구분의 부동산 중개소를 돕기로 하셨다. 당시는 복덕방이라 했다. 요즘처럼 에어컨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여름이면 사무실 앞 가로수 그늘 밑 평상 위에서 장기를 두시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런데 자주 마음이 상하여 퇴근하시곤 했다. 정치 의견이 달라 다투셨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연세에 다 고만고만한 의견을 가지셨는데 말이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는 출근을 그만하셨다.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다른 일을 찾으셨다. 거의 50년 전 일이다.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명절에 모인 가족 간에조차 정치 이야기는 금기어 일순위다. 정치 이야기는 부자 관계도 멀어지게 한다. 선진국에서는 대를 이어 같은 정당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는가? 분명 한국 정치가와 정치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정치가들은 국론 분열의 원인이 서로 상대방에게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정치구조적인 문제다.우리나라 자살률이 십수 년간 부동의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사망 원인 통계에 의하면 2018년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천670명으로 1년 전보다 9.7% 늘어났다. 하루 평균 3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사망률(인구 10만 명당)은 26.6명으로 OECD 평균 11.5명의 두 배가 넘고, OECD 국가 가운데 단연 1등이다.특히 노인일수록 자살률이 높았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을 보면 60대 32.9명에서 70대 48.9명, 80대 이상 69.8명으로 70대 이후 자살률이 급격히 늘었다. 노인 자살 이유는 1위가 바로 경제적 어려움이다. 2014년 기준으로 노인들의 상대빈곤율은 우리나라 48.8%, 미국 21%, 독일 8.5%였다. OECD 평균 12.1%의 4배가 되는 수치다. 이 통계는 자살이 결코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이토록 오랜 시간 자살률 세계 1위를 한다면 집단적 원인, 구조적 원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개인의 자살은 그 자체로 사회적 사건이요, 사회적 타살이 되는 것이다. 돈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는 비극이다. 이 비극보다 더 큰 비극은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다.'자살'의 음절 순서를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국민의식도 뒤집어져야 살 만한 세상이 온다. 판을 뒤집어서 최소한 자살은 멈추어야 하지 않겠는가?자살을 막는 방법은 상담사를 양성하는 것만이 아니다. 간암으로 열이 나는데 해열제 아스피린 처방이 될 말인가? 이와 같다. 자살 예방 대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살 만한 세상을 만든다면 누가 스스로 죽겠는가? 정치가 더 민주화되고, 경제가 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도, 능력이 좀 부족해도, 취업이 잘 안 되어도, 사업에 실패를 해도, 나이를 먹어도 극단으로 내몰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총선이 다가온다. 그런데 왜 총선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 한 표를 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 우리는 선거가 정치의 전부인 양 여긴다. 어느 누구든 한 명은 반드시 국회의원에 당선될 것이고 그 사람이 자기면 좋겠다고 출마한다. 완전 로또심리학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 혼자 잘 살자고 국민을 자살로 내몰지는 않을까? 자살이 정신과 의사의 몫이 아니고 정치가의 책임인 것을 아는 정치가, 국민의 자살을 멈출 정치가가 있다면 기꺼이 내 소중한 한 표를 주겠다.
2019-11-20 10:09:01
[종교칼럼] 생존과 궁극적 관심
수백 년 지속되었던 신(神) 중심적인 삶에서 서구인들은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관심을 인간에게 돌렸다. 그 이후 계몽주의, 낭만주의, 이성주의를 거치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인간의 지성으로 산업화의 물결과 더불어 보다 나은 삶을 구축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에서 약 2천만 명, 2차 세계대전에서 약 6천만 명이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이 참담하게 파괴된 것이었다.이런 엄청난 비극을 겪고는 생철학, 실존철학이란 사조로 불리는 생각과 글을 쓴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여기에 속한 철학자로부터 유래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는 말은 제법 오랫동안 대학의 강단과 여러 책들에 소개되고 한동안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누군가가 '던져진 존재'라는 내용의 말을 '피투된 존재'라고 번역하여 '우리가 무슨 야구공이냐?'라며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하여간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땅에 태어났다. '이 땅에 던져졌다'는 표현이 조금 강하긴 하지만 같은 의미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생존,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요소들을 필사적으로 했다는 것을 부모는 기억하겠지만 나는 모른다. 의식이 없으면서도 강력한 생명력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고, 그 이후에도 그 생명력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있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무조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 것이다. 언제까지 살고 싶으냐? 묻는다면 영원히 살고 싶다는 말로 답하는 것이 내면세계의 욕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유일한 삶의 장(場)인 지구의 크기는 고정되어 있고 여기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모두 삶에 대한 강력한 본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충돌하여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으로 조절되고 있다. 인간도 큰 시각으로 보면 이 법칙의 지배권 안에 있다. 1, 2차 세계대전도 생존투쟁이었고, 종교전쟁으로 분류되는 이슬람권과의 갈등도 깊이 들여다보면 생존투쟁임이 틀림없다.하지만 인간은 생존권 확보에만 머물러서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아는 자의식으로 약자를 보호하고 사랑을 나누고자 하여 인간이 된 것이다. 약육강식 이외의 법칙을 모르는 동물들은 살아있음에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의욕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일반 동물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아는 것을 넘어서서 그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반드시 있을 육체적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영원한 삶을 꿈꾸며 사랑의 삶을 살고자 애쓰기에 인간이다.이 땅에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던져진 존재인 우리는 먼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성심을 다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의무이고 권리이다. 육체적·정신적 건강, 물질적 조건, 가족 관계, 자연과의 관계, 사회 관계, 절대자와의 관계 등이 어느 정도 균형 잡히고 안정되어야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불안정해지고 심하면 생존을 위해 사나워지기까지 한다.인간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 이후의 과정에서 약자 보호와 이웃 사랑을 위해 마음 쓰고 자신의 존재 의미와 삶과 죽음의 현상에 대해 알기 위해 애를 쓸 때 인간이 되고 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존재다.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2019-08-14 10:18:04
[종교칼럼] 침묵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나에게 있어서 휴가란 언어와 생산의 시간에서 벗어나 침묵과 관찰과 수용의 시간이다. 매일 듣던 라디오 뉴스도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전혀 보지 않았다.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하여 틀었던 텔레비전에서 종일 무한 반복되는 같은 내용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공간이 시원해졌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사건 사고 소식은 앵커가 소개해 주는 제목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잔혹한 범죄에 관하여 시청자의 호기심이 충족될 정도로 보도한다면 그것은 이미 과잉 보도다. 전 국민의 범죄 지식이 올라가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걱정이 시작된다. '모방 범죄를 촉발시키는 거 아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경찰이 부실 수사로 종결 짓는 건 아닐까?'사건이 보도되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보험은 들었대? 보상액은 얼마래? 그만하면 많이 받았네' 같은 루머가 퍼지고 성급한 언론 보도까지 나간다. 곧바로 관계자의 신상털기가 시작된다. 불과 며칠 안 되는 애도 기간을 지내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빈소에 영정이 아직 걸려 있는데, 사람들은 애도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다. 유족들은 슬퍼할 시간도 없이 온갖 루머에 고통을 당한다. 사회적 애도의 기간이 너무 짧아져버렸다.우리는 극심한 고통에 처한 이를 어떤 언어로 위로해야 하나? 위로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언어가 관계의 경계선에서 멈추는 것이 침묵이다. 그때는 언어가 아닌 침묵과 동반과 공감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슬픔은 당사자가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극도의 슬픔 가운데서도 스스로 애도할 충분한 시간과 분위기가 주어져야 한다. 침묵의 때에는 존재로서 위로한다. 존재로서 소통하고 느낀다.성경에 욥이라는 의인이 나온다. 그가 하루 만에 전 재산을 자연재해와 강도를 당해 다 잃고, 10자녀가 다 죽고, 몸에는 불치의 병이 찾아왔다. 아내는 그를 저주하며 떠났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러 찾아갔다. 그들은 위로의 말조차 찾지 못해 침묵하며 슬픔을 함께했다. 언어의 소통 대신 존재의 소통이다. 좀 더 원초적이다. 위로의 시선, 따뜻한 포옹, 꽉 잡아주는 악수, 음식과 잠자리를 챙겨주는 행위로 소통하는 것이다. 이때가 참 위로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말을 시작했을 때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훈계와 저주와 심판의 말이 되었다. 욥에게는 더 큰 고난이었다. 욥은 너무나 억울하여 자신의 고난도 잊은 채 친구들과 논쟁에 몰입한다.우리는 사고의 궁금증을 어디까지 물어보아야 하는가? 당사자가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꼭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은 유혹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언어 과잉이 문제다. 바닷속의 쓰레기처럼, 우주를 떠도는 쓰레기처럼, 우리 언어가 존재의 쓰레기가 되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 언행이 SNS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우리가 평생 소리 내어 말한 음성이 우주를 떠돌며 메아리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어리석은 말들, 성급한 말들, 잔혹한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영혼의 빈약함과 사악함을 만방에 알려주고 있다. 빨리 거두어 들이는 방법은 없을까? 중세의 침묵수도회는 1천 년 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새로 생산되는 언어 쓰레기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언어 소비도 줄이자.
2019-06-26 10:43:43
[종교칼럼] 복덩이가 되소서
남의 실패가 내 기쁨이 되는 고약한 심리는 소인배의 전유물이 아닌가 보다.이 비틀린 마음은 독일어에도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손해를 뜻하는 '샤덴'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가 결합된 이 말은 각국 언어로 번역되거나 그대로 옮겨져서 '고소함'의 심리가 가히 전 지구적인 것임을 드러낸다.불어로 joie maligne(사악한 기쁨), 덴마크어로 Skadefryd, 저 멀리 파푸아 뉴기니어로는 Banbanam라 하는데, 고대 그리스어에도 ΕΠιχαιρεκακια(누군가의 치욕에서 얻는 기쁨)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심리가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본원적 감정의 하나라고 봐도 될 듯하다.하기야 미인의 성형 전 사진을 굳이 찾아내거나 근엄한 정치인의 뒤를 캐는 재미, 아니면 존경받는 누군가의 이면을 폭로하는 재미가 어찌 우리 사회에만 국한되겠는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그런 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샤덴프로이데는 과학계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2009년 교토대 다카하시 히데히코 교수팀은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뇌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통해 들여다보았는데, 희한하게도 '잘나가던' 타인의 추락을 볼 때 보상이나 기쁨 등과 관련 있는 뇌의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가 활성화되더란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연구팀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살핀 결과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자기 팀이 골 넣을 때보다 상대 팀이 헛발질을 할 때 더 쉽게, 그리고 더 시원하게 웃었던 것이다.어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우월해 보이는 경쟁자의 몰락을 통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달리 말하자면, 삶을 바라보는 기본 틀이 경쟁 구도에 있는 한, 인간은 샤덴프로이데의 씁쓸한 현실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 쓰러져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복을 비는 일을 표리부동 혹은 위선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을 터이다. 같은 맥락에서 설 명절에 모인 사람들이 덕담과 아울러 누군가의 실패담을 입에 올리는 모습도 영 마뜩하지 않다.성경에서 복을 한껏 누린 사람이라면 성모 마리아를 들 수 있다. 오죽하면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의 인사말이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루가 1, 28)였겠는가. 그런데 은총을 가득 받은 이의 삶은 오늘의 기준으로 차라리 저주받은 삶에 가까웠다.혼전 임신에 사별에 외아들의 처형까지,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어찌하여 성경은 은총이 가득한 삶, 복된 삶이라 부를까? 그것은 그의 삶이 모든 이의 구원이라는 대역사를 이루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정녕 복된 삶이란 누군가를 거꾸러뜨린 자리에 홀로 우뚝 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복이 퍼져나가는데 있다는 것이 성경의 통찰이다. 하여 설을 보내며 다시 덕담을 드린다. 여러분이 머무는 곳마다 복을 나눠 주는 복덩이가 되소서.
2019-02-06 14:37:09
[종교 칼럼] 숨겨진 기도
전쟁 시기였다. 거리는 온통 애국의 물결로 일렁였고, 분연히 일어난 젊은이들은 열의로 충만했다. 전선으로 나가는 군홧발은 북소리처럼 우렁찼다. 그런 가운데 내일이면 전선에 투입될 장병들과 가족들, 막 전장에서 돌아온 영웅들이 이 교회에 모여서 환송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그런데 목사님의 길고 감동적인 기도가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할 즈음, 긴 머리를 늘어뜨린 한 사내가 교회 복도를 조용히 걸어와 설교대에 섰다. 몰입한 목사님은 눈을 감은 채 기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리 조국과 국기의 수호자이신 오 주 하느님 아버지, 저희 무기를 축복하시고 저희에게 승리를 주소서!"그 때였다. 형형한 눈으로 교회 안을 흩어 보던 사내는 목사님을 옆으로 물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옥좌로부터 파견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여러분의 목사님이 바친 기도를 들으셨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그 기도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가 설명할 테니, 들어보고 그대로 이루어지길 원한다면 하느님께서 여러분 뜻대로 해주실 것이다. 방금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다.""늘 자애로우시고 관대하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여! 우리 귀한 병사들을 지켜주시고, 이들이 조국을 위해 싸울 때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이들에게 은총을 내리시고 전투의 날 위급한 순간에 방패로 막아주시고 전능하신 손으로 감싸주시고, 힘과 자신감을 북돋아주시고 잔학한 습격에도 끄떡없게 하시며, 이들이 적을 쳐서 무찌르도록 도우시어 이들과 이들의 깃발과 조국에 불멸의 명예와 영광을 주시옵소서."사내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 뒤에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말해지지 않은 기도도 함께 들으셨다. 여러분이 말로 바쳐 올린 기도 안에 숨겨진 그 기도를 여러분에 알려주라고 주님께서 명하셨으니 들어 보아라.""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떠돌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저희를 위하여 저들의 희망을 말라붙게 하시고, 힘겨운 인생길에 눈물을 흩뿌리고 다친 발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적시게 하여 그 발걸음을 무겁게 하소서.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도우심을 청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사랑의 원천 하느님께 사랑의 정신으로 이 기도를 바치옵니다, 아멘!"사내가 물었다. "여러분이 바친 기도의 실상은 이러하다. 그래도 여러분이 바친 기도가 이루어지길 원하는가? 말해 보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사자(使者)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대개 동화작가로 알려진, 미국 문학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의 'The war prayer'를 줄여서 옮겨 보았다. 우리가 기도를 말로 표현할 때, 거기에는 표현되지 않은 숨겨진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그 기도에 숨겨진 부분은 무엇인가. 주어진 일상을 전쟁터로 착각하면서 전사(戰士)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박용욱 신부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2018-10-26 11:07:52
[종교칼럼]머무르지 않고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모든 나무와 풀들도 사색과 사려가 시작 되었다.먼 산이 가까이 다가오고 따뜻한 가을 햇볕은 황금이 만냥이다.슈만의 연가곡 소품 '트로이메라이'를 정명훈 피아노 연주로 자주 듣는다.어린 슈만의 문학적 감수성은 13살 때 '음악미학에 관하여'를 써서 잡지에 발표했었다.10월, 빛바랜 여름의 거미줄을 걷어 내고 읽었던 책들도 뒷방으로 옮겼다.창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니 한결 환해지고 넓어진 차실에 장욱진 화가의 목판화'응무소주'(應無所住)를 걸었다.단색판화는 먹색을 위주로 한 작업으로 적은 색을 사용한다. 여러 색을 사용해야 할 작품들도 대부분 먹과 잘 조화되도록 목판화의 간결한 멋으로 이어지도록 한다.한 폭의 그림을 두고, 사심 없는 맑은 시를 읽고, 그리고 도자기 가마에서 찻잔 하나 소유하는 일은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다. 그것들은 그냥 봄에 피는 꽃처럼 사랑하고, 고민없이 소유 할 뿐이다.한 점의 그림과 한편의 짧은 시는 창조의 행위이며 작은 우주이기도 하다.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좋은 그림 앞에 서면 즐거워지고 더 격이 높은 그림을 만나면 말을 잃고 벙어리가 되기도 한다.추사의 '세한도'와 '부작란'은 예술정신의 정수이며 문득 그려내는 작가정신의 극점을 보여주었다.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 선종 6대조 대감 혜능스님이 세속생활을 버리고 출가 하게 된 '금강경'구절이다."어디에나 하늘의 구름처럼 흐르고 물처럼 머물지 않아 머무름 없는 마음을 닦아라. 말이나 글을 쫒지 말고 오히려 그 뜻을 파들어 가라. 진리는 말에 있지 않다."화가는 우리문화의 정신을 전통 민화에서 착안하여 아름다움을 창안해 낸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민화의 매력은 "쉽고 간단하다, 솔직하다, 익살스럽다, 꿈이 있다, 믿음이 있다, 따뜻하다, 조용하다, 자랑하지 않았다, 멋이 있다, 깨달음이 있다, 신바람이 있다"로 압축했었다.이와 같이 우리문화의 정신에 민화가 감당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는"살을 깎아내고 피로 그린다."는 내공이 마침내 고독한 자유인의 길을 만들어 내었다.화엄경에도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한다.동양의 지혜 그 가운데에서도 선불교는 특별하다.자기 집중과 인내를 통해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 사물을 직관으로 있는 그대로의 보는 사유가 선이다.석존이 영축산 집회에서 꽃 한송이 높이 들어 청중을 둘러 보았다. 긴 침묵이 흐르고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 "가섭아 나는 너에게 진실의 깊이를 통찰하고 자유로운 마음, 상이 없는 참된 모습, 아름다운 실상을 밝혀 주노라"이렇게 선(禪)의 전통은 시작되었다.예술의 목표는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자유인이 되는 길이다.철학자 헤겔은"예술이란 종교 및 철학과 함께 사람들의 가장 깊은 문제와 정신의 가장 높은 진리를 의식하게 하고, 또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했다.아름다운 것에는 친구가 있다.양산 통도사 경봉스님이 장욱진에게 무엇하는 사람이냐 물었다. 선생이 까악까악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 대답했다."너와 나와 대립이 없으면 자유인이다. 공과 색의 분별이 없다면 여래를 본다" 비공(非空) 거사의 선시를 주었다.참선이 무엇인가 물으면 "우리 자신, 우주, 그리고 마음을 묻는 그 마음"이라고 말한다.루오의 '미세레레' 판화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장욱진의 목판화집 판선(板禪)이 있다.청련암 암주
2018-10-12 10:45:51
[종교칼럼] 가을의 미학, 아름다운 환대
리듬은 음악의 시작이자 존재의 근원이다. 음악의 선율이 리듬에서 나오듯이 우리 인생의 여유와 충일함도 리듬에서 나온다. 그러면 삶의 리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삶의 리듬은 축제와 휴식에 있다. 우리 삶의 축제 가운데 최고의 축제는 바로 명절이라 하겠다. 그런데 웃음과 기쁨이 되어야 할 명절이 온통 슬픈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명절이 끝난 뒤 90%의 직장인들이 명절증후군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축제와 환대의 시간이 눈물과 아픔의 역사로 바뀌고 있다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서양에서 축제(festival)는 라틴어 '페스티발리스'(festivalis)에서 유래된 말로 종교적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축제는 공동체 성원들이 만남을 통해 자신의 억압된 본능을 해소하고,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며,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축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의 만남에는 서로를 향한 환대가 있었다. 축제는 타인에 대한 환대를 통해 그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환대(歡待)는 낯선 사람이나 손님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즐겁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환대는 주인과 손님이 만남을 통해 서로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과정이다. 그레그 모텐슨이 파키스탄 코르페 마을에서 경험한 이야기는 이러한 환대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텐슨은 그의 책 『세 잔의 차』에서 환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발티 사람과 한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이방인이다. 두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손님이다. 그리고 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당신은 가족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네, 죽음도 마다하지 않네."환대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화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환대는 사랑과 섬김과 더불어 신약성경의 핵심적 주제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손님과 주인 사이에 주고받는 평범한 일상, 즉 식탁의 대화(table talk)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과 가장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0:40)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환대는 나를 변화시키는 배움의 터전이다. 환대는 나를 열어 낯선 사람을 나의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공간은 나의 집이나 방과 같은 물리적 장소일 수도 있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나의 내면의 세계일 수도 있다. 물질적 공간이든 정신적 공간이든 타인을 향해 나의 공간을 열어줄 때 우리는 변화를 경험한다. 내면 깊이 감추어진 자신의 감정을 열어보이는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지적인 솔직함을 드러내는 자리에서 지식의 향연을 경험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열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환대(hospitality)의 라틴어 어원 '호스페스'(hospes)는 주인(host)과 손님(guest)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진정한 환대의 아름다움은 주인과 손님의 뒤바뀜에 있다. 환대는 주인과 손님이 서로 간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로 머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주인이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환대는 상대를 받아들이고,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에서 시작하여 손님을 극진하게 섬기는 세계로 향한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는 극적이다. 레위라는 세관원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고, 많은 손님들이 잔치에 찾아왔다. 예수님도 그 자리에 함께한 손님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잔치가 진행되면서 예수님의 역할이 손님에서 주인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누가복음 5:27-39). 여기에 축제의 절정이 있고 환대의 아름다움이 있다. 성경은 이러한 환대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낯선 사람을 받아들여 주인으로 섬기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다. 가을에도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매일 낯선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 타인을 만나는 우리의 마음은 평안하고 환영하는 마음인가 아니면 거부감과 적개심으로 가득 찬 마음인가?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즐거운 축제의 자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름다운 환대의 자리에서 가을의 미학이 꽃피기를 소망한다.유재경 교수(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영성)
2018-10-05 10:20:59
[종교칼럼]적선
적선 적선(積善)은 원래 도교의 수행 방법 한 가지를 일컫는 말이다. 불로장생을 지향하는 도교에서는 '적선'을 모든 수행의 전제조건으로 봐서, 선행만 쌓으면 별다른 수행을 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때 이른 죽음은 피할 수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적선이라면 아무래도 걸인에게 돈이며 물건 따위를 거저 주는 일일 텐데, 굳이 도교 수행자가 아니라도 동냥하는 이에게 적선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전통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는 속담은 오랜 기간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 기본적인 규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동냥은 못 주겠고, 쪽박도 깨지기를 바라는 목소리를 한가위 연휴 끝에 들었다. 지역의 아무개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보도된 어느 르포 기사의 제목은 "김정은한테 다 퍼준다는데… 제발 경제 좀 살려 달라"였고 "초선 의원이 전하는 추석 민심"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활동들에 침을 뱉을 수는 없으니, 살림살이 어렵다는 푸념에다 슬쩍 '다 퍼준다'는 식의 선동을 얹어서 여론의 이름으로 내민 형국이다.그 여론을 전하는 국회의원께서 불과 두 해 전 쯤 재경부에 근무하실 때는 "북핵 포기시 매년 630억 달러 인프라투자 지원할 것" 같은 통 큰 퍼주기 약속이 정부의 공식 발표로 나왔다. 대략 70조 쯤 되는 거액을, 그것도 해마다 북으로 보내겠다고 할 때는 조용하던 목소리가 왜 지금에는 민심의 이름을 등에 업고 신문 지상을 채우고 있는지 궁금한 대목이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이라면 근거 없는 퍼주기 주장 정도는 옳고 그름을 딱딱 짚어주실 만한데 그러지 않으시는 것은 그만큼 흉흉한 민심이 지역에 존재한다는 뜻이겠다.그런데 그 '민심'을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국제적인 대북 제재 중이라 인도적 지원조차 쉽지 않은 지금 상황에 도대체 무엇을 퍼주었는지 물어보면, '하여간에 다 퍼줬다'는 대답 밖에 없다. 북에서 선물로 보낸 송이버섯 2톤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우리 정부가 '피 같은 세금으로' 북에 무엇을 보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백보를 양보해서 설사 퍼준 게 있다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2018년을 기준으로 3만2,775달러, 이탈리아와 스페인 가운데 위치한 세계 27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북한은 2016년 기준 648달러로 세계 176위에 머무르고 있다. 참혹한 기아와 내전으로 유명한 르완다에 비교해도 한참 모자란다. 한 마디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방송에는 매일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한 달 얼마라도 보내자는 광고가 나오고 동남아 빈국에는 한국인 자원 봉사자가 넘쳐 나는데 북에는 어찌나 인색하고 각박한지 모른다. 다 퍼줬다는 주장의 속내는 어떻게든 저들에게 흠집을 내고 불만을 투영하겠다는 메마른 마음이 깔려 있는 게 아닌지 물어보고 싶다. 그 흠집 내고 싶은 상대가 누구건 간에 말이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충분히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또 생각이 다른 만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본이다. 하지만 비판에도 격이 있어야 하는 법, 비판을 하면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비난이라 한다. 자고로 비난의 목소리에서 점잖은 품격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적선도 아깝다며 비난에 힘을 쓰는 것은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 교실 주임교수
2018-09-28 11:40:13
[종교칼럼] 가을– 시간의 숨결
가을 장마가 길었다. 오랜만에 키 큰 나무들 아래 길을 쓸었다. 산중의 시간은 해와 달, 자연의 시간이다. 계곡 물소리와 나무들, 숲에서 새들이 먼저 새벽을 알린다. 도시에서는 빌딩과 자동차 그리고 속도의 시간이다. 여기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거기서는 빠르고 숨 가쁘게 진행되어진다. 괴테가 가을 숲을 걷다가 '보아라, 이 지상의 것이 아닌 위대함이 저기 있지 않느냐?'가 떠오른다. 우리가 외우는 '주여, 때가 왔습니다'로 시작하는 릴케의 가을은 시간의 그림자가 들판의 열매들을 살찌게 하며 포도송이에 단맛이 들게 한다고 기도한다. 자연의 신호와 소리들은 어떤 경전과도 비교 되지 않는다. 금년 여름 초유의 혹서와 가뭄은 아마도 벌레들도 발버둥 쳤을 것이다. 가을비가 흡족하게 내리고 공기까지 맑으니 이 무슨 청복이요 선물인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듯 손상 된 삶에 불이 켜지며 점화 된 기분이다. 자연의 신호와 소리는 사람의 생각과 언어를 압도하는 질서가 있다. 지구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난은 앞으로 일어날 더 큰 지구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힌두교 경전인 '우파니샤드'에 옛날 구루(Guru)가 제자에게 법을 전할 때 그 제자의 귀에 대고 마치 숨을 불어 넣듯이 속삭였다. 아마도 그 스승은 제자의 귀에 속삭였다고 하지만, 무슨 말을 속삭인게 아니라 그냥 숨을 불어 넣었을 뿐이었다. 진리란 아마 큰소리로 말하면 사라지거나 깨졌을 것이다. 이미 말씀이란 그 이전에 그 참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숨결이 없는 말은 공허하고 쓸쓸하다. 자연의 소리와 신호는 언제나 둥근 소리이다. 누구나 알아듣고 접속 할 수 있어야 한다. 화엄경에서 '해인삼매'를 말 할 때, 물결이 잔잔해진 바다에 삼라만상이 비추듯 너와 나도 비추면 서로가 비추게 된다. 서로가 서로 속에 감싸고, 세계가 세계 속에 포함된다. 누구나 똑같이 꾀꼬리 소리가 얼마나 반가운지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고, 너와 내가 또 쳐다보며, 눈을 마주치면 미소 짓는 것이다.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근접 할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아지면 시간은 정지한다.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의 '무시간성'(akalika)이라고 한다. 그럴 때 몸은 빛 속으로 해체되어서 스스로 빛나게 되며 참다운 빛이 되는 것이다. 모든 외로움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한때라도 시간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별 수 없이 시간을 끌어안고 고민 속에서 뒹굴며 '무시간성'은 수행자들의 몫이라고 핑계 삼는 것이다. 시간은 느낀대로 존재하고 생각한대로 정해진다. 각자의 목숨도 그렇게 인과가 만들어진다. 이미 빛이 된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간의 '무시간성'을 이루고 별이 되었다. 20세기 시인 중 라이너마리아 릴케도 우리에게 많은 행운과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 붓다를 기리는 세편의 시를 남겼다. '빛 속의 붓다'를 읊어본다. 모든 중심들의 중심, 속 중의 속, 알몬드, 스스로에 둘러싸여 향미(香味) 깊어지는― 이 만물, 더 먼 별들 그리고 그 너머까지 모두가 당신의 살, 당신의 과일입니다. 이제 당신은 느끼십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한테 매여 있지 않음을 당신의 광활한 외피(外皮)는 끝없는 공간에 닿아 있고 거기 진한 즙이 솟아나와 흐릅니다. 당신의 무한 평화로 빛을 얻어, 수없는 별들 밤새 회전하며 당신 머리 위 높이 타는 듯 빛납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앞으로 있을 것이 이미 있습니다, 모든 별들이 죽을 때에도. 각정 스님(청련암 암주)
2018-09-14 11:58:07
[종교칼럼]사회적 뮌하우젠 증후군
사회적 뮌하우젠 증후군 올 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명석한 두뇌만큼이나 강렬한 삶의 의지를 불태운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그를 따라다닌 루게릭병을 처음 진단받고 한두 해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호킹의 나이는 스물 하나였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박사 학위를 받고 여러 업적을 남기며 쉰다섯 해를 더 살았으니 강철 같은 정신력이라 부를 만하다.그런 호킹 박사도 감당하기 어려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재혼한 아내 일레인 호킹이 그랬다. 일레인은 호킹 박사의 간호사였다가 부부의 연을 맺었고, 혼자 힘으로는 고개도 채 가누지 못하는 호킹 박사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의 관심과 동정을 받았다. 그러나 호킹의 아들과 이웃의 고발로 드러난 일레인의 숨겨진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남들이 보지 않는 데서 호킹을 학대하고 폭행한 다음,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돌보는 헌신적인 모습만을 대중 앞에 노출하는 가증스런 이중생활은 결국 폭로되고 말았고, 일레인은 '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Münchausen Syndrome By Proxy·MSBP)으로 진단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뮌하우젠 증후군은 신체적인 징후나 증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타인의 관심과 동정을 이끌어 내는 정신적 질환을 말한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꾀병을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과는 달리,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는 구체적인 목적 없이 타인의 관심을 끌고자 아픈 척하거나 허언을 내뱉는다. 일레인 호킹이 진단받은 '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은 예컨대 자신의 아이나 애완동물이 아프다며 타인의 관심과 주목을 끌려는 것을 말한다. 정도가 심하면 자신이 돌보는 대상을 실제로 아프게 만든 후에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했다가 훗날 사실이 밝혀진 후에 머쓱해지곤 한다.조지아 주립대학의 네이트 베넷 교수는 뮌하우젠 증후군이 조직과 단체를 파괴하는 사회적 형태로 출현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조직과 단체 내에서 이간질과 모략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고 난 다음에 자신이 해결사로 나서면서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경우가 그러하다. 베넷 교수가 'Münchausen at Work'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 따르면 조직 내에서 뮌하우젠 증후군은 다음과 같이 발현한다. 먼저 누군가가 다른 조직원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한 후, 자신이 해결사로 나서는 척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상사나 동료는 그 사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실은 이런 갈등을 거치면서 조직의 사기는 떨어지고 결속력이 약화되며 효율성은 침식당한다는 것이다.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뮌하우젠 증후군을 통해서 일종의 방어기제를 발동시키듯, 타인의 인정을 정도 이상으로 갈망하는 이들이 갈등과 분열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다.뮌하우젠 증후군이든, 사회적 뮌하우젠 증후군이든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인 셈인데, 끝 간 데 없이 욕망을 채우라고 부추기면서 정작 그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한 오늘의 우리 사회가 이런 증후군을 배태하고 있는 듯하다. 욕망은 스스로 다스리지 않으면 결국 자기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무서운 힘이다. 종교적 영성이 강조하는 겸양과 절제가 요청되는 까닭은 여기에도 있다.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 교실 주임교수
2018-09-06 14:14:46
[종교칼럼]비닐 라떼 한 잔 드실래요?
비닐 라테 한 잔 드실래요?'손님 여러분, 우리 카페에서 새롭게 선보일 메뉴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퍼 올린 35년산 비닐 폐기물을 주성분으로 하는 비닐 라테랍니다.' 하면서 신메뉴를 소개하는 카페가 있다면….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이름은 올리브나무카페다. 우리 동네에서는 주민들로부터 꽤나 사랑받는 카페다. 메뉴를 보면 커피와 케이크를 포함하여 63가지나 된다. 라테만 해도 카페 라테, 바닐라 라테, 녹차 라테, 고구마 라테, 홍차 라테, 오곡 라테, 팥 라테, 민트초코 라테 등 8가지다.대표목사인 내가 사장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운영은 매니저에게 일임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내가 명실상부한 사장이 되어 이 많은 메뉴를 직접 주문받고 만들어 서빙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나만의 새로운 메뉴도 개발하겠다는 소망도 있다. 그 꿈의 하나가 '비닐 라테' 개발이다. 아니 당장 메뉴에 첨가할 수 있는 라테도 하나 있다. '낙동강 표 녹조 라테'가 그것이다.바닷가에서 죽은 채 발견된 갈매기의 위에서 플라스틱 조각들이 나왔다. 플라스틱 장난감, 일회용 라이터, 음식물 포장지가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자연은 경고가 아닌 재앙을 통해 사람에게 반격과 보복을 시작했다. 그동안 자연의 신음을 무시하고 흘려버렸던 사람에게 이제는 도저히 흘려버릴 수 없는 고통으로 갚아주고 있다.인류는 연간 3억톤의 플라스틱을 생산한다. 그중 8백만톤 이상이 바다로 유입된다. 현재까지 인류가 생산한 플라스틱의 누적량은 8조kg 이상이고, 현재 거의 전량이 쓰레기의 형태로 지구상에 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연 216억개의 플라스틱 제품을 소비한다. 국민 일인당 연 460개의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고 버린다.이 중에서 1억 5천만톤 이상의 플라스틱이 바닷속에 이미 유입되었다. 하와이 인근에 남한 면적 14배 되는 쓰레기 섬이 형성되었다. 전 세계 해안에 30m 높이의 쓰레기 벽을 쌓을 수 있는 양이다. 진작 알았다면 이 폐기물들을 집적하여 웬만한 쓰나미도 막을 수 있는 해안 방어벽이라도 만들 것을 그랬다.바다는 정직하다. 바다는 침전물의 마지막 저장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한다. 바닷속으로 오랜 시간 흘러 들어간 많은 양의 비닐이 분해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다의 생명체가 바다 공해 물질의 정화기가 될 것이다. 바다의 생물이 공해의 피해자로서 죽임당하듯, 사람 또한 자신이 버린 공해 물질을 자신의 세포 속에 가득 담으며 죽게 될 것이다.사람은 생명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 자연을 착취하고 학대했다. 사람과 자연이 피조물로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되었다. 우리가 자연에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자연도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오늘날 인류는 공감 능력을 잃어버렸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동물, 식물, 땅과 바다, 우주 공간을 마구잡이로 사용, 이용, 과용, 오용, 악용, 학대한다.우리가 생명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렸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관심사가 경제적인 이용 가치에만 머물러 있다. 이제 그동안 무시되었던 생명의 관점에 무게를 두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긴급한 상황이다.지금이라도 카페 메뉴에 태평양 비닐 라테, 낙동강 녹조 라테를 넣으면 어떨까? 우리 후손들이 비닐 라테에 고문당하듯 매일 마시게 될 날이 곧 올 것 같다. 후손들이 마시게 될 음료를 조상인 우리가 미리 맛이라도 보아야 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대구중앙교회 대표목사
2018-08-31 13:35:56
[종교칼럼] 프로페셔널
박용욱 신부 종교칼럼 '프로페셔널'오늘날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별하라면 대부분은 급여와 보수의 차이를 떠올릴 것이다. 풋내 나는 아마추어와 달리 프로페셔널이라면 그 일을 통해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고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던 무렵에는 그 뜻이 전혀 달랐다. 프로페셔널리즘, 곧 전문직업성 또는 전문가윤리의 등장은 중세 대학의 설립과 궤를 같이 한다. 12세기 경, 세계 최초의 서구식 대학교인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등이 설립되는데, 이들 대학교는 당시 서구 정신문화의 정점이요 강력한 후원자였던 가톨릭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대학이 파리 대학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볼로냐와 파도바, 몽펠리에 같은 남유럽 도시에서는 인간의 신체의 건강을 돌보는 의학대학과 세속 권력을 뒷받침하고 제어하는 법학대학이 명성을 쌓아갔다.이렇게 대학들을 통해 배출된 성직자와 의사, 법률가들은 당시 사회에서 면허 제도나 허가 제도를 통한 여러 가지 특전을 얻어 각각의 분야를 전문직화하게 된다. 권리가 있으면 자연히 의무도 따르는 법이니, 이들 집단은 자신들의 일을 통해서 사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공익에 봉사하고 직업상 요구되는 특별한 윤리 규정을 지킬 것을 요구받게 되었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서약(profession)을 통해 표현하게 된 것이 전문직업성 또는 전문직 윤리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과 의학과 법학, 이 세 분야에 요구된 특별한 윤리규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의료윤리학자 에드문드 펠레그리노에 따르면, 최초의 전문가집단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된 특징적인 규범은 비밀 준수의 의무였다. 과연 이들 세 집단은 무엇보다 인간의 비밀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성직자는 인간의 내적 비밀을 다루는 사람들이라 하겠고, 법률가들은 인간의 외적, 사회적 관계의 비밀을, 의료인은 인간의 내, 외적 비밀 모두를 취급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도 사제들이 고해성사를 통해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적 비밀을 듣게 되고, 법률가들이 숨겨진 인간관계와 이해관계를 보게 되며, 의료인들이 인간의 내밀한 치부까지 다루게 되는 것을 보면 이들 세 집단에게 전문직윤리를 요구한 중세인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엄중한 윤리규범을 준수하는 전문가 집단을 일컫던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윤리보다는 돈과 더 가까워져 버린 듯하다. 세태를 보건대, 오늘날 전문직과 결부되는 관형어는 '윤리'나 '숙련'이 아니라 '고소득'이 아닐까 싶다.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면서 고용의 안정성을 누리는 고소득 직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뿐, 특별히 엄중한 윤리적 요구나 헌신성과는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전문직으로 대접받기 원하는 많은 직종에서 책임과 노고는 비정규직이나 하급자들에게 떠넘기고, 자신들의 직업적 자부심은 오직 급여나 보수에만 달려 있는 것처럼 여기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일반인의 범접을 허용하지 않는 높은 진입 장벽과 전문용어의 가림막 뒷켠에서 과연 헌신의 마음과 윤리의식이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다. 헌신하지 않는 프로를 프로라 할 수 있을까.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2018-08-17 1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