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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강남좌파와 조국 교수

'법학계의 장동건'. 교수들 사이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를 지칭하던 말이다. 농반진반이지만 조 교수의 준수한 외모를 보면 전혀 근거 없는 별명은 아니다. 서울대 교수에, 미남에, 게다가 부자이기까지. 부러우면 진다지만 솔직히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조 교수는 스스로를 '강남좌파'로 규정하는 데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강남좌파라는 비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곤 했다.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조지 클루니 입 닥치라는 것"과 같다는 말로 응수한 바 있다. 서구의 이른바 '캐비어 좌파' '리무진 리버럴'이나 '샴페인 사회주의자'와 강남좌파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왜 하필 조지 클루니인지는 의문이다. 많은 서구 좌파 인사들 중 조 교수와 가장 비슷한 인물은 교수인 노엄 촘스키 같은데 말이다. 미상불 클루니를 닮기는 했다. 늘 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제스처에, 멋지게 들리는 말을 골라 쓰고, 매일 새로운 텀블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서는 등 연예인적(?)인 기질이 비슷하긴 하다. 그렇더라도 조 교수가 이런 용어들의 진짜 뉘앙스를 아는지 모르겠다.스티브 프레이저가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묘사한 '리무진 리버럴'은 일반적으로 고학력에 부유한 상류층이면서 진보적 이념을 추구하는 (주로 민주당) 정치인을 일컫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저자는 리무진 리버럴이 실제로는 위선적인 진보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말로 굳어진 역사를 천착하고 있다.겉으로는 서민과 약자를 위하는 척하지만 본인은 부자 동네에 살면서 고급 리무진을 타고 자식들을 서민들은 감당하기 힘든 비싼 사립학교에 보내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꼬집는 부정적인 용어인 것이다. 단순히 부자이면서 진보적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과는 다른 뉘앙스이다. 강준만 교수가 강남좌파라는 용어를 쓴 이유도 마찬가지다. 특히 범여권 386 등 의식과 물질이 따로 노는 가진 자의 위선이나 허위 의식을 비판할 때 주로 쓰인다. "강남좌파가 많아져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식의 긍정적 의미는 아닌 것이다.그동안 숱하게 목격한 강남좌파들의 행태는 그 용어의 부정적 인상을 굳게 해준다. 말로는 재벌 해체를 외치면서 속으로 그 재벌 기업들에 투자하여 부를 쌓는다. 외고 폐지 등 평등 교육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은 주로 외고나 유학 등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교육을 시킨다. 자신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면서도 겉으로는 그 모순을 지적하며 사회주의를 꿈꾼다. 환경주의자로 원자력을 사갈시하면서 태양광 설치 명목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데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경우도 이 같은 부정적인 강남좌파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시도조차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조국 교수이다. 정부를 비판하면 친일파요 매국노로 단정한 '조국 민정수석'은 다른 사람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조국 법무부장관'은 정부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가짜 뉴스'로 규정하고, 박멸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극도의 편향성과 당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인사가 법무부장관의 생명인 공정성과 중립성을 지킬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법무부의 영문 명칭(Ministry of Justice)은 정의 자체를 표상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폴리페서 논란, 위장 전입과 재산 및 가족 관련 각종 의혹 등은 어떤 해명을 내놓는지 일단 지켜보겠다. 중요한 것은 논점을 흐리지 않는 것이다. 임명직이냐 선출직이냐는 폴리페서 논란의 본질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특정 정치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던 지식인이 그에 따른 정치적 반대급부를 받는 게 옳은 처신이냐 하는 게 핵심이다.위장 전입이 2005년 이후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본인은 위장 전입을 생각도 않았기에 과거 위장 전입을 그토록 비난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사모펀드 투자가 불법인지 이익을 냈는지 여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는지가 관심이다. 역시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인 가족들 문제도 사생활 문제라고 피해 갈 수 없다. 본인과 부인,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이다.본인의 말처럼 진솔하게 사실대로 해명해야 한다. 하루만 맞고 가면 끝날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부자이면서 좌파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위선과 이중성이 문제인 것이다.

2019-08-18 16:26:40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말 안 듣는 청년이 이긴다

'보이콧 재팬'(Boycott Japan)의 로고타이프는 딱 떨어진다. 명확하고 직관적이다. 슬로건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적절한 두께와 정직한 서체, 젊고 간결한 데다 확장성까지 갖췄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시선을 잡고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잇는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만든 사람은 누굴까? 확인해 보니 서울 사는 디자이너 김용길 씨다. 누가 시켰거나 뭘 바라고 한 건 당연히 아니란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자신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다. 강요가 아니라 참여의 메시지를 전하고 시민들의 의사를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상징을 기획했다고 한다. 보이는 그대로다. 그리고 아베 신조 총리에겐 '후쿠시마산 복숭아 많이 드시라'는 말도 남겼다. 창의성에 시의성까지 갖춘 순발력 있는 재능기부인 셈이다.하나 더, 노노재팬 닷컴(nonojapan.com)은 사용자 중심 UI(유저 인터페이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군더더기는 다 빼고 방문자에게 필요한 것만 딱딱 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네티즌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한 기능도 갖췄다. 안드로이드 기반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공개했다. 지난달 중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고 접속자가 폭주해 한때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운영자 김병규 씨는 일제의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에게 위로와 공감을 표시하려 이 사이트를 개설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재능과 창의성에 참여 의지가 더해진 결과다.김용길 씨와 김병규 씨는 모두 대한민국의 청년들이다. 이들과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함께하는 청년들에게선 한 가지 분명한 게 느껴진다. 일본에 진다거나 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에 위축되지도 않고 그들을 별스레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심지어 위 세대만큼 일본에 대해 한 맺힌 것도 없어 반일 감정도 덜하다. 그러니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혹시 모를 열패감도 있을 리 없다. 어찌 보면 아직 젊어서 그런 거라고, 일본이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나라인지 몰라서 그런 거라고, 심지어 철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하지만 이것만으론 이들의 행동이나 태도가 다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을 옆 마을 가듯 하는 청년이 수십만 명이다. 일본을 직접 보고 듣는 기회도 예전에 비해 훨씬 많다. 일본이 우리보다 인구도 많고 땅도 넓으며 기초기술마저 앞서 있다는 사실 또한 이들도 잘 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들은 일본에 고분고분 져줄 의사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역력하다. 수적 열세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승부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이다."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다"는 드라마 대사가 있다. 안동에서 촬영한 '미스터 선샤인'에서 주인공 '유진 초이'가 대한제국의 관리에게 한 말이다. 시세를 따라야 할 일과 마땅히 해야 할 일, 이 둘을 짐작보다 훨씬 더 많은 청년들이 이미 구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원칙을 두고 타협하지 않을 때, 믿음이 올바른 방향을 향할 때, 더구나 그 주인공이 청년일 때, 거기서 나오는 힘은 몇 배로 커진다. 그리고 그것에 남다른 재능과 창의성이 더해지면? 이런 건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다.돌아보면 지난 30년,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일본을 따라잡았다. 소니 워크맨의 추억은 이미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고 차세대 통신의 결정판 5G도 우리가 멀찌감치 앞섰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일본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만든 시스템으로 일본 청년들이 SNS(소셜네크워크서비스)를 하고 한국의 청년들이 만든 MMORPG(다중접속역할게임)로 일본 청년들이 게임을 한다. 일본의 아이돌 AKB48이 '귀엽다는 칭찬'에 안달할 때 한국의 아이돌 '블랙핑크'는 당당하고 씩씩하게 '걸 크러시'를 뿜는다. 연결에 관한 것과 역동성, 창의성이 필요한 건 한국의 청년들이 압도적으로 잘한다는 이야기다.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된 지 한 달여,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청년들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에 정략적으로 숟가락 얹지는 말자. 그렇다고 말리지도 말자. 고래로 이 땅의 청년들은 고분고분했던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언제나 득달같이 달려와 맨 앞에서 싸웠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자. 말 안 듣는 대한민국 청년이 일본을 이긴다.

2019-08-11 14:55:07

노동일 경희대교수. 한국경제사회연구회 이사. 사우스웨스턴대 대학원 법학 박사

[이른 아침에] 집권층이 편 가르기를 중지해야 이긴다

우리 국민 모두는 대한민국 편정부 비판한다고 일본 편 아냐해결책 낼 책임있는 사람들이편 가르기에 몰두해서는 안 돼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대한민국 편이라는 사실이다. 아베 편, 일본 편인 사람은 없다. 평소에는 물론이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일본을 편드는 '친일파'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다.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과 대한민국 편이 아니라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내친김에 한 가지 더 분명히 해두자. 사법부, 특히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것과 그 판결을 부인하는 것 또한 다르다는 사실이다.대한민국 편이지만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특히 현안이 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방식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대응 방법은 없었는가, 앞으로 현명한 대처 방법은 무엇인가. 야당과 언론은 물론 국민 누구든지 얼마든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생각과 다른 비판적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런저런 생각들을 모아 최선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현명한 당국자의 의무이다.대법원 판결은 물론 존중해야 한다. 판결 결과에 승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극히 예외적인 재심 사유 외에는 말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징용 배상 판결 역시 대법원의 결론에 대한 불복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판결에 승복하는 것과 논리적 비판은 모순되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이라 해도, 아니 대법원 판결일수록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판례가 시대에 맞게 바뀔 수 있는 원동력이 판례 비평에서 나온다. 징용 배상 판결 자체가 그 같은 비판과 논쟁의 결과물이다.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것을 판결 부인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판례는 불가능하다.우리 정부나 판결을 비판하면 친일파라고 하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과 (경제)전쟁 중이니 안 된다는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던 역사가 있었다. 너는 누구 편인지 밝힐 것을 강요하던 때가 있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 시절은 머지않은 과거이다.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는' 북한의 존재만 들먹이면 만사형통이었다. 당시 그 같은 억압에 대항해 싸우던 사람들이 현재 집권 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친일파 낙인은 빨갱이 딱지의 새로운 형태에 다름 아니다. 누구 편인가를 묻고 함부로 친일파 딱지를 붙이는 데 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대법원 판결 후 우리 정부의 대처 방식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현재의 대응 방식 역시 아쉬움이 있다. 중재위 카드를 택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지난 칼럼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일본 대사를 지낸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도 같은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이런 의견들은 우리 정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 좋은 방안을 찾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판을 자제하고 싶다. 어쨌든 전쟁이 벌어진 이상 우리의 수장인 대통령과 정부에 힘을 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중한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편가르기와 선동적 언어 대신 모든 국민의 힘을 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국민들이야 일제 안 사고, 일본 안 가면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일제 차를 부수고, 안 되면 죽창이라도 들겠다는 각오로 애국심을 시전하면 된다. 고위 공직자들은 다르다. 정부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비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나부터 친정부 여론 형성에 앞장설 용의가 있다. 친일파 색출로 한일 갈등이 해소된다면 5천만 커밍아웃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편가르기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분열의 언어를 그치고 통합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비판마저도 대한민국을 위한 애국심의 발로임을 인정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 반일 감정을 선거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으고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문 대통령의 각오처럼 일본에 다시 지지 않으려면 집권층의 편 가르기 언어부터 달라져야 한다.

2019-08-04 15:44:43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 우리가 자초한 일인가?

'배가 고파요.' 홋카이도의 한 탄광에서 발견된 한글이다. 삐뚤삐뚤하면서도 또박또박한 글씨가 까까머리 소년을 떠올리게 한다. 어두운 벽엔 '고향에 가고 싶다'와 '어머니 보고 싶어'란 글귀도 함께 써져 있다. 그는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까?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일제는 이른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했다. 말 그대로 국가는 무엇이든 동원할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파시즘식의 전시통제법이었다. 이를 토대로 39년엔 '국민징용령'이란 걸 공포했다. 전시노동력 확보를 겨냥한 보다 구체적인 시행령이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한국인이 강제로 동원당하거나 일제의 획책에 속아 각지로 끌려갔다. 서울 사는 어떤 이의 아들은 홋카이도의 탄광에서, 또 대구 사는 어떤 이의 아버지는 오사카의 철공소에서, 그리고 또 경북에 사는 어떤 이의 남편은 사할린의 한 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모두 일제의 군수산업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혹독한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죽어갔고 그 시신마저 불태워지고 버려진 이들은 죽어서조차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운택, 신천수 두 할아버지는 지옥 같은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도록 일했지만 임금조차 받지 못했다.지난 1997년, 두 사람은 일본 오사카의 지방재판소를 찾아 자신들을 감시하고 부렸던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보상금이 아니라, 미지급 임금이 아니라, 회사가 저지른 불법행위로 인해 받아야 했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달라는 거였다. 내용으로 보나 소송 주체로 보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갈음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일 양국이 맺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확정했고 이들은 결국 최종 패소했다.터무니없는 판결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지금의 일본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수긍되지 않았지만 한 나라의 사법부가 내린 민사소송에 관한 판결을 두고 '행정부가 나서라'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식의 내정간섭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반민주적이기까지 한 발언을 한 적도 없다. 물론 다른 식의 보복도 가하지 않았다.2018년, 일본의 사법부가 그들의 판결을 한 것처럼 우리의 사법부는 우리의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한·일 간 청구권협상에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피해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법적 근거도 조목조목 밝혔다. 뭐가 잘못되었는가?1991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 있고 참여정부 시절 민관공동위원회가 발간한 백서에도 '강제징용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더구나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는 별개의 사안임을 분명히 했다.일본인들이 우리 땅에 두고 간 재산을 돌려 달라며 소송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해도 된다. 단, 그 대상은 남의 땅이 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을 기망하고 오도한 그들의 황실과 정부가 되어야 한다. 만일 한국 기업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을 착취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일본인이 있다면 당연히 한국과 한국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게 맞다. 그런 일이 있다면 말이다.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소를 낼 땐 김규수, 이춘식 할아버지까지 원고가 모두 4명이었다. 그러나 3명이 세상을 뜨고 이젠 이춘식 할아버지 혼자만 남았다. 지난 1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이 있은 다음 날 일본은 기습적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했다.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키겠다며 요식행위에 불과한 절차를 일방적으로 밟고 있다. 아베 총리는 급기야 '한국은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와야 할 것'이라며 일성을 날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정도면 거의 윗사람이 아랫사람 꾸짖는 모양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 일각에선 그래도 생존이 먼저이니 일본을 달래야 한다고 말한다. 또 한쪽에선 이번만큼은 물러서선 안 된다며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나라가 온통 난리라도 난 듯 들끓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나 때문에…'라며 미안해 했다고 한다. 열일곱의 나이에 그 고통을 당하고도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나라에 다시 미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순 없다. 95세의 할아버지를 다시 고개를 숙이게 해선 안 된다. 할아버지를 지켜내야 한다. 나라가 왜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

2019-07-28 15:36:07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중재위원회로 한일 갈등 돌파하라

韓=善, 日=惡 규정하면 해결 만무양국 모두 피해 입을 수밖에 없어외교전서 완승·완패는 불가능한 일물밑 교섭 통해 중재위 구성 노력을외교 경로를 통한 협의, 양국이 직접 지명하는 위원 중심의 중재위원회 구성, 제3국을 앞세운 중재위 구성.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경제협력협정, 이른바 청구권협정 제3조에 규정된 분쟁해결 절차이다. 일본 정부가 지난 18일 자정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것은 세 번째 제3국 중재위 안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제안한 외교 협의, 중재위원 지명 중재위에 이어 마지막 절차까지 우리 정부가 모두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시한 설정은 일방적인 것으로써, 수출규제 조치는 외교 협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주장이다.나는 방송에서 여러 차례 중재위 절차에 응하는 게 좋다는 주장을 폈다. '아베 편'이거나 친일파여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일본이 요구하는 중재위는 위에서 본대로 청구권 협정에 정해진 절차이다. 일본의 제안은 일본 스스로 이번 사안이 청구권 관련 문제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른다. 우리 정부와 일본의 합의 하에 중재위가 구성된다면 쟁점은 청구권 해석에 관한 문제로 좁혀지게 된다. 반도체 소재가 북한으로 유출되었다, 우리 정부의 전략물자 관리가 허술하다, 일본의 국가안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계속 말을 바꾸며 자신들의 수출규제를 합리화하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모순된 것임을 단박에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나아가 중재위 구성을 합의한다 해도 실제 중재에 돌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양국이 지명하는 위원으로 구성하거나 제3국을 앞세워 구성하거나 매 한가지다. 중재위 구성부터 중재할 내용, 결정 방식 등 세부사항 조율은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과정에서 양국의 협상은 필수적이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양국의 외교적 협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양국이 접촉하는 동안은 일본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일방적인 조치를 취할 명분이 없다.국제 사회에서 우리가 일본에 밀릴 것이라는 단정도 성급하다. 일본이 막강한 자금력과 인맥을 통해 국제사회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격다짐이 아닌 이상 국제 분쟁일수록 명분과 논리가 중요하다. 후쿠시마 수산물 관련 분쟁에서 우리가 예상을 뒤엎고 승소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중재로 갈 경우 쟁점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다.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국가 간 합의로 소멸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애국적 고려일 수도 있고, 논리적 결론일 수도 있지만 일본의 최고재판소와 우리 대법원이 다른 결론을 낸 것만은 분명하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다투고 있으니 해결을 위해 중재 방식을 선택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보편적 인권문제라는 명분도 우리에게 중요하다."아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자"거나 "아베 당신 실수한 거야"라는 말에서 후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북한식으로 "간악한 쪽바리들" "섬나라 사무라이 족속들"이라는 말을 쏟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살 수 있다면야 걱정할 일이 무엇이랴. 우리는 선, 일본은 악으로 규정한들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애증 관계라는 한마디로 규정하기에 한일 관계는 너무도 복잡하다.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관계를 헝클어 버리면 양국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고'가 사실이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불리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우리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공개적으로 부탁하는 상황이다. 공식적인 중재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외교전에서 완승, 완패는 불가능한 목표이다. 아베가 무릎 꿇을 리도, 우리가 머리를 숙일 수도 없다. 중재위는 양국 모두의 명분을 살리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우리가 중재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간주하고 추가 보복책을 강구 중이다. 이제라도 물밑 교섭을 통해 양국 정부에서 함께 중재위 구성 방안을 발표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부가 더 좋은 전략이 있다면 백면서생의 이런 제안은 무시해도 좋다. 너는 누구 편이냐만을 묻는 것은 국가의 전략이 아니다.

2019-07-21 14:55:54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화내도 된다

사실, 조선은 일본의 상대가 아니었다. 파트너도 경쟁국도 아니었을뿐더러 심지어 위협이 될 만한 적수도 못 되었다. 일본에 조선은 단지 새로운 수익을 가져다줄 미개척지, 즉 경략(經略)의 대상에 불과했다. 그게 20세기 초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눈에 비친 조선이었다.당시 조선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국가 조직, 사회 시스템, 특히 기술문명의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조선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 국가로 보일 리 없었다. 미개한 나라, 미개한 백성이라 여겼고 따라서 전쟁을 치르는 것조차 불필요한 일이라 여겼다.그저 시간을 두고 조선인들을 어르고 달래다 보면, 그리고 편을 갈라 서로 싸우게 하면 조선 땅은 자연스레 굴러 들어올 거라 판단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의 생각이 그랬다. 그렇게 그들은 조선과 조선의 민중을 업신여기고 깔보며 때론 이간질시키고 때론 총칼로 압박하며 해안을 빼앗고 광산을 빼앗고 행정권을 빼앗고 사법권을 빼앗고 군대를 빼앗고 결국 나라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그 군국주의자들 중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도 있었다.만약 그가 자신의 손자가 일으키고 있는 작금의 사태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국에 대한 아베의 인식은 100여 년 전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그것과 무척 닮았다. 한국을 향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엔 한국을 하등 국가 취급하는 그의 의식이 묻어 있다. "넌 별거 아냐, 넌 믿을 수 없어, 그러니 넌 혼나야 돼." 뭐 이런 식이다. 국가 간에 주고받는 메시지의 형식이 아니다.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도 그렇다. 서로가 서로를 외교안보 우호국으로 분류해 놓은 상태에서 심지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기습적으로 발동했다. 이런 건 상대 국가를 업신여길 때나 가능한 상식 밖의 행위다. 그리고 오로지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거기에 갖다 대는 이유 또한 제멋대로에다 가지가지다.먼저, 강제징용에 관한 배상 판결로 한국이 한일청구권협정에 관한 약속을 어겼다고 하지만 이는 엄연히 민간 영역에서 일어난 주권국가의 사법적 판단이다. 게다가 지난 1991년, 순수한 개인의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될 수 없음을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수장으로 있었던 외무성 조약국장이 의회에 나와 밝힌 적도 있다. 더구나 100여 년 전 정미7조약을 체결할 당시,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대한제국을 힐난했던 그들이 아니던가?이것 말고도 아베가 견강부회식으로 갖다 붙이는 다른 이유와 억지 논리도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지만 그래 봤자일 것이다. 어차피 아베의 목적은 한국을 조종 가능한 국가, 일정 수준 이하의 국가로 내려앉히는 데 있으니 100여 년 전 그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핑계 아니면 저 핑계를 대며 우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이상 밀리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지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돌아보면 지금껏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 번도 총력 대응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다. 왕은 왕권 보전을, 양반은 양반의 권리를 챙기느라 급급했고 백성은 이리저리 흩어져 이합과 집산을 거듭했다. 구한말 때도 비슷했다. 그래도 누구의 말처럼 그런 셈치곤 엄청 잘 싸웠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가 힘을 모아 제대로 맞선다면 이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다행히 지금의 우리는 100년 전의 우리가 아니고 일본 또한 100년 전의 일본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결국 미국도 곤란을 겪게 될 테니 국제 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하다. 또한 우리가 대체재를 구하는 것에 비해 그들이 우리만 한 판매처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엔 우리가 이긴다. 극일이니 반일이니 할 것도 없이 이기고 나서 일본은 일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협력도 하고 경쟁도 하면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흥분하면 안 된다는 둥, 감정이 앞서 화부터 내면 안 된다는 둥의 소리 좀 그만하자. 을사오적, 그중에서도 이완용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일어선 민중들에게 맨날 하던 소리가 그 소리다. 우리가 무슨 나라 없는 백성도 아니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화를 낸단 말인가? 화내도 된다. 흥분해도 된다. 그래야 이긴다.

2019-07-14 15:45:58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북핵 문제 서두르면 진다

역사적인, 극적인, 획기적인, 그 어떤 수식어도 과장이 아니다. 6월 30일의 판문점 3자 회동 말이다. 북한이 공개한 기록영상에서도 '력사적인'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사변적인'이란 낯선 단어도 등장한다. '트윗'이란 말 뜻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로 날린 작은 새의 지저귐이 불러온 깜짝 이벤트일 수도 있다. 혹은 오랫동안 기획한 행사일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운동용 리얼리티 쇼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만남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다.미북 정상의 판문점 만남은 싱가포르, 하노이 회담과 차원이 다르다. 서로 총부리를 겨눈 대결의 당사자들이, 전쟁의 흔적인 비무장지대에서 만난 사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우리 측 자유의 집에서 미국 정상과 회담을 가진 사실. 모든 게 말 그대로 '사변적'이다. 6·25전쟁을 한때 '6·25사변'이라 불렀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전쟁과 맞먹는 정도의 역사적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문제는 그다음이다. 미국과 북한의 반응은 의외로 신중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답은 '노 러쉬'(No Rush)다. 서두를 것 없다, 서두르지 않겠다. 북한 관련 이슈마다 반드시 덧붙이는 말이다. 실무협상을 지켜보자며 이번에도 '노 러쉬'를 되풀이한다. 제재를 계속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미국 의회와 언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쇼는 좋지만 비핵화에는 실질적인 진전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북한도 생각 외로 차분하다. 북한의 동영상을 보면 김정은의 '력사적' 결단을 강조하려는 극적인 연출을 느낄 수 있다. 장중한 음악, 과장된 웅변조 해설 등은 북한 특유의 기법이지만 군사분계선을 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걸음을 느린 화면으로 만든 성의(?)까지 보였다. '판문점의 조미 최고 수뇌 상봉'은 "온 지구촌의 눈과 귀가 판문점으로 모이고" "격정과 흥분으로 뜨겁게 달구어졌으며" "세계를 커다란 충격과 격동으로 끓게 한" 행사였음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한다. "70년간의 적대 관계와 불신을 청산하려면" "피치 못할 난관과 곡절과 시련이" 예상되지만 두 수뇌의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헤쳐 나가자고 말한다. 겉으로는 한껏 흥분한 듯 보여도 속내는 신중하다.그에 비하면 우리는 상당히 들떠 있다. '사실상의 종전선언'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이 이를 상징한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경구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과 북한의 구체적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조선 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 개념부터 천양지차다. 북한의 협상 실무자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판문점 회동은 비핵화 협상에서 우리가 당사자가 아님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우리는 빠지라고 노골적으로 언급한 북한 성명은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이 여전함을 보인 것일 뿐이다. 비핵화 협상 자체에 낄 수 없는 우리의 자세는 분명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미국과 북한에서 말하듯 70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문 대통령 역시 비핵화가 오래 걸리는 일임을 언급한 바 있다. 정부 여당은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끈질긴 협상이 필요하며 우리 국민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상의 종전선언' 등 먼저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은 금물이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북한 문제를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정은 답방 등을 무리하게 추진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북풍이라는 비판과 함께, 우리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일에 실패할 수 있다.판문점 회동이 한바탕의 환상적인 쇼라 해도 좋다. 쇼도 그 나름의 효용이 있다.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를 현실과 혼동하면 문제가 크다. 화려한 쇼가 끝나면 지루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주관적 희망으로 객관적 분석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 '국민들보다 반 발만 앞서 나가라'는 말처럼 너무 앞서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신중하고 사려 깊게 접근해야 한다. 70년 적대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리 없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2019-07-07 15:37:31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 네 편 내편 편 가르기

'113수사본부'는 꽤 인기 있는 TV 드라마였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안방극장에 모여 앉은 이들에겐 우리의 안위와 평화가 마치 이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매주 한 번씩 우리 편인 '수사본부'는 우리의 적인 '북한 간첩'을 잡았다.그땐 그랬다. TV도 그렇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그렇고 대체로 둘로 나눠 놓고 보면 쉽고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내 편인지 네 편인지, 그래서 둘 중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보며 거기서 교훈을 얻으면 되는 거였다. 이때, 언제나 우린 정의, 상대편은 곧 반대편이며 적이자 악이었다. 그리고 그 악의 정점엔 북한 공산집단이 있었다. 그러니 싸워서 이겨야 했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그러고 보면 나라도 두 부류, 즉 우리처럼 정상적인 나라와 북한처럼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쁜 나라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좋은 나라, 아랍 국가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라는 도식이 부록처럼 따라다니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세계평화를 위해, 정의구현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공산당을 무찌르는 거였다. 모두 함께해야 했고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열심히 반공 표어를 만들었고 미술시간엔 공산군이 국군의 총칼에 찔려 죽는 장면을 그렸다. 물론 피가 흐르는 것도 붉은색 크레파스로 정성들여 그렸다. 그때가 열 살 안팎이었다.드라마를 보면 북한은 매주 간첩을 내려보냈다. 여기저기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러니 봄이 온다고 해서, 꽃이 핀다고 해서 마냥 그런 것만 쳐다보고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보단 혹시라도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동네 어귀에 북한이 날려 보낸 삐라가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착한 아이라면 그래야 했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이가 들면서 정의와 불의, 단순했던 양자대결구도의 세상에 갑자기 새로운 전선들이 생겨났다. 세상만사를 '건전한 우리'와 '공산 세력' 간의 대결로 보는 이들은 여전했다. 그런데 일각에선 깨어 있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이 있다고 했다. 또 한편에선 우리나라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볼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세력을 다투었다. 다자 대결 구도가 된 것이다.그래도 따지고 보면 이들 또한 이쪽 아니면 저쪽, 둘로 나뉘어 싸우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누가 무엇을 주장했는가보다 세간의 관심은 오랜 습관처럼 둘 중 누가 이겼는가에 더 쏠렸다. 그랬다. 누구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세상을 계획대로 바꾸지 못했다. 그게 1980년대였다.그리고 1990년대, 작가 주인석이 "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에 태어나서, 제3세계적 개발독재사회에서 교육받고,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이제 포스트모던 사회로 이민가고 있다. 나는 혼란스럽다"라고 한 그 90년대도 이미 지난 지 오래다.2019년 지금, 새로운 연결,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류가 등장했다. 거리엔 휴대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가 넘쳐난다. 이들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하고 전에 없던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토록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에도 둘로 나뉘어 싸우는 건 여전하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극단적이다. 그리고 싸우는 방식이 전에 없이 야비하고 전에 없이 졸렬하며 전에 없이 비겁하다.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움을 선동하고 권력을 좇는 자들이 이를 추동한다. 그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국민이야 죽든 말든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때론 교묘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싸움을 부추긴다.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를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대결이라 하지만 그럴 리 없다.수도권의 한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방송 내내 모든 것의 앞에 보수 아니면 진보를 갖다 붙이기 전까지 언론은 보수정당, 진보정당이라는 말조차 잘 쓰지 않았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저 보는 이가 낯 뜨거울 뿐이다.

2019-06-30 16:01:01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 대표

[이른 아침에] 짝퉁 '컬러풀 대구'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짝퉁 '컬러풀 대구'라니?" "그것도 대구시가 주최하는 행사에!" 그게 지난 5월 1일이었다. '2019 대구컬러풀페스티벌'을 광고하는 신문 지면 한가운데에 색상이 제멋대로 바뀐 '컬러풀 대구' 엉터리 로고 마크가 버젓이 찍혀 있었다. 무심코 신문을 넘기다 뭔가 엉성하고 조악한 느낌이 들어 다시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순간, 멍해졌다. 그건 분명 유사 상표와 다를 게 없었다. 의법 처리되어야 할 사안이었고 신고를 할까 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보나 마나 단순 실수였을 텐데 너무 요란을 떠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았고 어차피 또 일어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 짝퉁을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난 11일, 그 엉터리 로고 마크가 이번엔 광고가 아니라 뉴스로 등장했다. 「'컬러풀 대구' 디자인 색상 2개만 바꾸기로」라는 헤드라인 아래, 무려 '도시 브랜드 개선안'이라는 신분으로 기존안과 나란히 실렸다. 충격이 지난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지난 5월 함부로 등장했던 그 짝퉁 '컬러풀 대구'는 실수도 착오도 아니었다. 대구시가 작정하고 내놓은 도시 브랜드 '컬러풀 대구'의 리뉴얼 버전이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저히 리뉴얼이라 할 수 없는, 단순한 브랜드 사용 규정 위반 행위로 보일 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바뀐 도시 브랜드를, 즉 바뀐 대구의 상징을 개정에 관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공표도 없이 세상에 먼저 내놓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건 일종의 불법행위였다. 얼얼한 뒤통수를 만져가며 찾아본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하나, 대구시는 지난 2015년부터 새로운 도시 브랜드를 개발하겠다며 3억5천200만원을 썼다. 둘, 그 과정에 5차례의 시민토론회 등을 열었고 170여 개의 안을 도출했으며 '핫플레이스 대구'(Hotplace DAEGU) 등으로 후보군을 압축했다. 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새롭게 제시된 브랜드보다 기존의 '컬러풀 대구'가 훨씬 더 좋다는 결과가 나왔다. 넷, 결국 대구시는 기존의 브랜드 디자인에 일부 색상만 변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섯, 변경 내용은 5개의 동그라미 중 검정과 분홍을 빨강과 보라로 바꾸는 것이고 그 이유는 빨강과 보라가 열정과 창의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시민과 함께한 개발 과정 그 자체도 의미가 있다는 대구시의 설명과 3억5천만원을 들여 동그라미 색깔 2개를 바꾼 건 예산 낭비라는 일각의 지적을 덧붙였다.다시 이걸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가운데 있는 까만 동그라미는 그림이 아니라 문자다. 즉 대구시는 동그라미 2개를 바꾼 게 아니라 'Colorful'에서 첫 번째 알파벳 'o'를 없애 버린 것이다. 브랜드는 유기체다. 작은 점 하나, 0.1㎜의 간격에도 존재의 이유와 고유한 기능이 있다. 개선안이라고 내놓은 짝퉁 '컬러풀 대구'는 기존 브랜드를 무지막지하게 부러뜨렸다. 그래서 'Colorful' 대구가 'C'와 'lorful' 대구가 되었다.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둘, 빨간색 원으로 열정을 표현했다니? 그런 식이면 아마 세상의 모든 브랜드는 거의 다 똑같아질 것이다. 셋, 시민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 시민의 기호와 동떨어지게 나온 건 모순이다. 그건 그걸 만든 시민모임이 시민을 대의(代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실, 브랜드를 비전문가가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들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든 적도 없다. 새로운 슬로건을 만드는 시도를 했을 뿐이다. 넷, 성과가 있든 없든 브랜드위원회가 무려 4년 가까이 활동했으니 3억5천만원은 쓸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 브랜드 개발 취지의 순수함도 믿는다. 문제는 이게 통과된 다음이다. 돈을 들여 '컬러풀 대구'를 하나씩 파괴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진행될 것이다. 양쪽으로 뚝 부러진 짝퉁 'Colorful DAEGU'가 대구의 상징이 될 판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당장 멈춰야 한다.

2019-06-16 14:51:12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문 대통령, 김원봉에 헌사 적절치 않았다

'에밀'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소설이다. 형식은 소설이지만 자연주의 교육론을 펼친 교육철학서로서 교육학 분야의 필독서로 꼽힌다. 루소는 에밀을 통해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와 성년기까지 각 단계의 이상적인 교육이 무엇인지 설파한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억압적인 교육체계를 비판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책에는 현대적 관점으로 보아도 주옥같은 말들이 가득하다. "자기만을 위해 교육받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젊은 시절 주마간산 격으로 읽었던 에밀에서 솔직히 큰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순히 고전이라는 이유로 책을 접한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결혼도 안 한 터에 자녀 교육론이 피부에 와 닿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루소의 진면목(?) 때문이다. 루소는 단순히 키우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이 5명을 모두 고아원에 맡겨 버렸다. 일부러 아이와 연관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도 이상적인 자녀 교육론을 펼친 위대한 사상가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신도 실천하기 어려운 공허한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자 좋은 말도 감동이 있을 리 만무했다.나이가 드니 생각이 또 달라진다. 인간은 너무 다면적인 존재여서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철학자뿐이랴. 정치, 종교를 막론한 사회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살면 성공하지만 그들이 사는 대로 살면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이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인간 존재를 단순한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 전 생애에 걸쳐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도 느끼게 된다.다소 엉뚱하지만 요즘 논란이 되는 상황을 보며 에밀과 루소의 관계가 생각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간적이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집권 후 행보를 보면 그 같은 평가로 일관하기는 어렵다. 진면목이 무엇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인간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보다는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특히 북한과 관련된 사안에서 그렇다. 말로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어야 한다거나 통합을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편 가르기 하는 언행이 더 크게 들린다.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해방 후 북한에서의 행적보다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을 기리자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함께 국민의 뜻을 모아 가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에게 굳이 헌사를 바칠 필요는 없었다. 전체 맥락은 물론 시기와 장소 역시 적절하지 않다.문 대통령의 언급을 기다렸다는 듯 김원봉 영웅 만들기가 봇물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조명이 아니고 문 대통령이 감명을 받았다는 영화식의 역사적 허구들이 넘친다. 노덕술에게 뺨을 맞은 김원봉이 화가 나서 월북했다는 투의 단순화는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비판을 잠재우는 단순화 방식과 너무 닮았다.권력자가 역사 해석에 앞장서면 어떤 폐해가 있는지 바로 직전 정권 혹은 그 이전 정권에서 신물 나게 목격한 바 있다. 인간이나 역사나 마찬가지다. 이들은 너무도 다면적이고 복잡한 존재여서 한 가지 잣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본다면 사물의 진면목을 보기는 불가능하다.

2019-06-09 15:51:37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그건 '멋진 한마디 찾기'가 아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CI(Corporate Identity, 기업 이미지 통일화), BI(Brand Identity, 브랜드 이미지 통일화)도 그렇다. 먼저 바라보고, 마음을 다해 바라보고, 생각을 다해 바라보고, 그리고 질문하고, 다시 죽을힘을 다해 처음 보듯 바라보고, 바로 그때 보이는 다름에 천착하고, 마침내 본질에 집중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기업이나 단체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브랜드를 시각화하는 작업은 꽤 까다롭고 엄격한 과정과 절차를 요구한다. 동시에 감성의 몰입과 집중도 필요하다. 이에 더해 CI와 BI 둘 사이의 관계에도 일정한 순서와 규칙이 있다.그리고 어느 정도 '올바른 흐름'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법으로 치면 CI는 하나뿐인 헌법, BI는 최상위법인 헌법의 철학과 가치 체계 안에 존재하는 하위법이다. 다시, CI를 성씨나 가문이라 치면 BI는 그 가문을 구성하는 개인 또는 가족 구성원에 해당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CI가 BI의 상위 개념이고 선후로 따져도 먼저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CI가 튼튼하면 BI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CI가 힘이 세면 BI도 그 덕을 보기 쉽다. 물론 집 나와 독립을 하듯 가끔 모기업 CI와는 별개로 전개되는 브랜드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브랜드 이미지 보호나 리스크의 분산 등 기업의 특별한 의도와 상황에 따른 예외적 사례일 뿐이다.대개의 BI는 CI를 떠나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다. 행여 CI로부터 분리되거나 버림받기라도 한다면 그 브랜드는 살아남기 힘들고 때론 그것만으로 존재의 이유가 없어지기도 한다. 특히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처럼 비영리 기관의 브랜드는 그럴 개연성이 더 높다. 도시와 분리되는 순간 그 브랜드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 브랜드가 아무리 돈을 번다 한들 그 돈을 들고 나가 다른 도시를 세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도시 브랜드가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와 궁극적인 목적은 도시의 정체성 확립과 지속 가능한 공동체 구현에 있다. 따라서 개별 브랜드는 철저하게 도시의 아이덴티티(CI) 전략과 체계 안에서 도시 브랜드로서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지난 글에서 브랜드는 만드는 것이 '1'이라면 그다음에 있을 일이 '99'라 했다. 그 '99'는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규칙이 없으면 디자인이 아니다. 규칙이 없으면 브랜드가 아니다. 즉 브랜드의 힘은 규칙을 지키는 데서 온다. 그것도 긴 세월에 걸쳐 아주 조금씩 온다. 작은 명함에서 큰 옥외광고물까지 CI와 BI의 순서를 지키고 CI·BI의 운용 규칙을 끈질기게 지켜가야 한다. 그게 도시의 정체성을 지키고 확산하는 일의 모든 것이다. 특히, 도시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명함은 CI 프로그램을 헌법처럼 따라야 한다. 그들의 명함은 그 도시를 보여주는 움직이는 간판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1만 개의 명함이 사람들의 생각을, 그것도 정확하게 같은 자리를 1만 번 반복해 두드릴 때 한 뼘씩 도시의 정체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명함에서부터 CI나 BI의 순서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1' 다음에 올 '99'는 영영 없다고 봐야 한다. 월드컵에 출전한 우리 축구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가로로, 세로로 저마다 다르게 붙이고 있거나 아예 떼고 경기를 한다고 상상해 보시라. 말이 되는가? CI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은 명함은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설령 좋은 의도였다 한들 결국 그 명함에 대한 포폄은 시와 시민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잠재의식의 발로, 또는 무지의 소산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잘되는 기업, 잘되는 도시는 그러지 않고 그런 걸 용납하지도 않는다.대구의 CI처럼 기본이 튼튼한 경우라면, 그리고 필요하다면, CI를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리뉴얼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태극기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되듯 도시의 상징도 함부로 다뤄선 안 되고 그 체계를 임의로 깨뜨려서도 안 된다. 태극기 없는 붉은 악마가 있을 수 없듯이 CI 없는 도시 브랜드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도시 브랜드는 규칙이다. 도시 브랜드 개발은 CI의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스템 구축이다. 즉, 도시 브랜드 개발은 '멋진 한마디 찾기'가 아니다.

2019-06-02 14:55:02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기업이 할 일, 정부가 할 일

이른바 공유경제와 관련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택시와 카풀 업체의 대결에 이어 또 다른 공유서비스인 '타다'를 둘러싼 논란이다. 타다의 이재웅 대표가 택시기사들의 분신에 관해 언급한 게 발단이다. "죽음을 이익에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었다.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 대표를 "무례하고 이기적"이라는 말로 나무라고 나섰다. 얼마 전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혁신의지 부족'이라고 비판한 이 대표의 태도까지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이 대표 또한 질세라 "출마하시려나"라며 맞섰다. 두 사람이 한 번 씩 더 설전을 벌인 후 말싸움은 일단 소강상태에 있다.기업과 정부, 정치권의 대화가 공유경제의 사회적 해결책 모색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다. 이 대표의 발언이 비판받을 점은 있다. 어떤 경우든 죽음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은 옳다. 문제는 시점이다. 기사들의 분신으로 택시업계 종사자들이 격앙되어 있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출마' 운운도 거슬린다. 하지만 태도 논란을 넘어 논쟁 과정에서 드러난 인식의 혼란은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마디로 정부와 기업의 역할에 대한 혼선이다.최 위원장은 혁신의 과정에서 소외되는 계층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분들의 연착륙을 돕고 혁신의 빛 반대편에 생긴 그늘을 함께 살피는 것이 혁신에 대한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당한 지적이다. 문제는 그러한 과업이야말로 기업이 아닌 정부가 할 일이라는 사실이다.근본적인 혁신이든 아니든 기업은 생존과 성장이 우선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늘을 살피기는 쉽지 않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새로운 기업들에 사회적 책임부터 요구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메고 경주에 나서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업은 가볍게 질주하도록 뒷받침하고, 소외되고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임무는 정부의 몫이다. 세금은 그런데 쓰라고 걷는 것이다.현 정부의 말대로 하자면 혁신성장과 포용성장이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정부가 할 일이다. 혁신의 승자들이 패자와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게 정부의 소임이다. 기업의 선의를 촉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혁신의 과실을 나누는 것은 선의에 맡겨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소외되고 그늘에 있는 사람들이 '약자'라는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기술 발전은 특정 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문제되고 있는 카풀, 타다와 같은 서비스는 엄청난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요금이 택시보다 비싼데도 일정 부분 소비자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택시에 대한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택시업계도 신기술을 적용한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택시업계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제도를 바꾸어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도록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역시 정부가 할 일이다.새로운 서비스를 가로막거나 돈을 쓰는 복지정책으로 소외계층의 불만을 무마하는 것만 정부의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플랫폼 택시 등 혁신적 서비스는 각종 규제에 묶여 어렵다는 말도 있다. 전통산업에도 혁신이 일어나도록 얽힌 규제를 풀어야 한다. 역시 정부가 앞장서야 할 일이다. 허울 좋은 사회적 합의라는 틀에 맡겨 놓고 눈치만 보는 정부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양쪽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대의민주주의하에서 제대로 된 정부의 역할이다.주제가 무엇이든 우리의 논쟁이 흘러가는 방향은 대체로 비슷하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몇 살이냐, 건방지다 등 본질 대신 태도에 대한 다툼으로 이어진다. 이번 논란 역시 예외가 아닌 듯하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대화를 그런 식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 한두 차례 언론의 화젯거리로 오르내리고 끝나서도 안 될 일이다. 기업이 할 일과 정부가 할 일을 명확히 하고 서로 공감대를 넓히는 생산적인 논쟁이 있어야 한다.

2019-05-26 15:29:41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브랜드, 그게 뭐라고?

브랜드는 이름이다. 정확히는 세상 유일한 것에 붙는 단 하나의 이름이다. 사람의 이름도 그렇다. 하나의 이름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다. 내 아이의 이름처럼 말이다. 그래서 둘은 닮았다. 내친김에 나란히 놓고 정리해 보자.아이가 태어나 이름을 지었다. 즉, 브랜드의 탄생이다. 아이의 부모가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했다. 이건 브랜드 슬로건, 혹은 도시로 치면 정책 슬로건이다. 아이의 할머니가 "어이구! 우리 강아지"라고 했다. 강아지는 어쩌면 이 브랜드의 캐릭터가 될지도 모른다. 아이가 자라 조금씩 '자기만의 것'을 찾기 시작했다. 옷 하나를 고를 때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한다. 이른바 브랜드의 정체성 확립이다. 갈수록 아이를 알아보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건 브랜드의 확산이다. 훌륭히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그 이름 하나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세상이 바뀐다. 다름 아닌 '브랜드 파워'다. 이게 전부다.다시 풀어 보면 이렇게 된다. 맨 처음 브랜드는 단지 하나의 이름일 뿐이었다. 브랜드의 전개, 즉 브랜딩은 부모가, 할머니가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브랜드의 비전은 한 가족의 문화와 그 구성원들의 생각과 바람으로 설정된다. 브랜드의 정체성은 부모의 영향과 아이의 노력이 모여 만들어지고 '자기다움'을 지켜 가는 것으로 유지된다. 브랜드 파워는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면 솟아나고 정체성을 지켜낼수록 세지며 아이가 세상과 소통하는 만큼 커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성공한 브랜드의 모든 전개 과정에는 손자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처럼 지극한 사랑이 녹아 있다. 그건 아이디어를 곧 창의성으로 여기는 사이비 전문가들의 얄팍한 기술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그렇다면 이쯤에서 브랜드와 그 정체성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대구로 가져와 보자.지난 2015년 11월 2일, '대구 도시 브랜드를 만드는 시민모임'의 출범식이 있었다. 그때, 대구시는 '도시의 핵심 가치와 비전을 반영하고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내며 시민의 집단 지성과 공감을 이끌어내 긍정과 희망의 공동체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도시의 100년 가는 브랜드'를 만들겠노라 천명했다.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건 없다. 설사 있다 해도 이런 정도의 것이 무슨 시민모임에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 치자. 그게 뭐라고? '로고 타이프'와 '심벌마크', 기껏해야 글자 몇 개에 약간의 이미지가 다가 아닌가! 그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브랜드는 만드는 게 '1'이라면 그다음에 있을 과정이 '99'이다. 다만 그 '1'이 중요한 건 그것이 '99'를 방해하거나 제한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그래서 필요한 거다. 전문가는 그 이름이 진짜 '사람의 이름'으로 적합한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전문가는 그 뒤에 올 '99', 즉 브랜드의 운용 및 전개 과정에서 제약이 될 요소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미리 찾아내 고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가는 상징이 아니라 합리적 운용이 가능한 '상징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다.'99'에 선행하는 '1'을 만드는 작업, 이건 우주선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시민모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아마추어 프로축구선수'가 없듯이 '시민전문가'라는 말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컬러풀대구'를 대신할 브랜드가 필요하면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진짜 전문가라면 한동안 미친 듯이 대구를 사랑할 테고 가짜 전문가는 뉴욕은 어떻고 코펜하겐은 어떠니 하며 낡은 이야기를 하려 들 것이다. 진짜 전문가라면 하염없이 시민을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할 테고 가짜 전문가는 시민에게 대구의 정체성을 가르치고 일깨우려 들 것이다. 그러니 대구 도시 브랜드, 할 거면 전문가 그룹에 맡겨 제대로 하고 아니면 말아야 한다. 그다음에 진행될 '99'는 시와 시민의 몫이다.

2019-05-19 14:58:31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헬렌 토머스. 언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전설적 이름이다. 1961년 여성 최초로 백악관 출입 기자가 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10명의 대통령을 취재하며 50여 년간 백악관 기자실 맨 앞줄을 지켰다. 백악관 기자회견의 첫 질문과 마지막 인사는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토머스 기자는 특히 직설적인 질문으로 유명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들이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물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는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는 이란 인질 사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는 그라나다 공격과 이란-이라크 전쟁,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는 성추문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질문했다. 이라크 침공에 대한 비판적 질문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출입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귀 후에도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을 추궁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토머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캐기 위한 질문과 무례한 질문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물음에 "무례한 질문이란 건 없다"고 답했다. "기자는 질문하는 것이 특권이고, 대통령은 기자의 질문에 답할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대통령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게 아니냐는 비판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대통령이 '왕'이 되기를 원하는가?"2013년 토머스 기자가 별세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했다. "헬렌은 민주주의를 향한 집요한 신념으로 미국 대통령들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었다." 토머스의 일화나 오바마 대통령의 성명이 말하는 바는 같다. 기자는 무례해도 좋은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게 아니다.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권력에 대한 기자의 질문은 기자 개인이 아니라 국민을 대신해 묻는 것이라는 확고한 의식이다.지난 9일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혹은 대담)에 대한 후폭풍이 일고 있다. 정상적이라면 문 대통령의 답변 내용이 화제가 되어야 한다. 취임 2주년의 소회와 향후 국정 운영의 비전이 조명을 받아야 한다. 엉뚱하게도 대담을 진행한 송현정 한국방송(KBS) 기자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인상을 쓰며' '답변에 끼어들고' '독재자'라는 표현을 쓰는 등 무례했다는 인신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 본인뿐 아니라 사촌 동생인 가수에게까지 이른바 신상털이가 진행 중이다. 한마디로 어이 없는 반응이다. 대담 진행을 잘 했는지, 질문 내용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딜 감히"라거나 "박근혜 시절에는 찍소리 못하더니"라는 식의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그런 '비정상의 정상화'가 문재인 정부의 목표 아닌가 말이다.관점에 따라 지지자들에게 불편해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 물론 있었다. 하지만 송 기자의 다소 공격적인 자세가 오히려 대담을 살렸다고 생각한다. 처음 접하는 방식 때문이었을까. 회견 중반까지 문 대통령은 긴장감을 벗어나지 못해 보였다. 말이 꼬이고 답변은 겉돌기 일쑤였다. 만약 송 기자가 웃음 띤 얼굴로 답변을 그냥 듣고 있었다면 오히려 비난이 빗발쳤을 것이다. 역시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문 대통령이 불쾌해 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전언이다. 좀 더 공세적인 대화가 오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반응도 전해진다.해법은 간단하다. 이런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다. 대통령도 언론도 국민도 처음 접하는 생소한 광경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이다. 문 대통령만이 아니라 그동안 대통령 기자회견은 연례행사였다. 행사 기획이 필요한 거창한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 민감한 현안을 놓고 대통령이 기자들과 설전을 벌이는 모습은 '먼 나라'의 일일 뿐이었다.대통령이 청와대 기자실에도 자주 들르고, 현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언론을 만나야 한다. 자연스레 민주주의 훈련이 되면 '무례' 운운하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 마음속 '제왕적 대통령'을 없애는 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헬렌 토머스의 말을 상기해야 한다.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2019-05-12 15:33:34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축제의 계절, 통제의 거리  

5월이 왔다. 거리에 서면 사방팔방 보이는 글자가 다 '교통통제'다. 빨강 바탕, 노랑 고딕의 현수막, 이젠 스쳐봐도 뭐라 쓰인 건지 짐작이 간다.사실 5월 거리에 '교통통제'라 적힌 깃발이 나부끼면 그건 십중팔구 '대구컬러풀페스티벌'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그 옆 또는 아래에 '대구컬러풀페스티벌'이라는 이름과 날짜도 적혀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자세히 봐야 보인다. 휙 지나쳐도 뇌리에 남을 정도인 '교통통제'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이건 단순히 글자의 크기나 색깔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컬러풀페스티벌'의 시그니처(Signature)가 해마다 바뀌는 데다 실제로도 눈에 잘 띄지 않게 써 놓아서 그렇다. 그에 비하면 몇 년째 일관된 서체와 색상을 유지해온 '교통통제' 글귀는 예쁘진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쉽게 읽힌다. 말하자면 정체성이 생겨난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교통통제'라는 보통명사의 조합이 브랜드가 될 수야 없다. 그리고 어떤 도시도 '교통통제'를 브랜드화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건 즉, 우리가 정체성을 불어넣어야 할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교통통제'가 아니라 '대구컬러풀페스티벌'이라는 이야기다.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같은 현수막 안에서도 영역을 다퉈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시선을 붙잡아야 하는 게 광고의 텍스트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교통통제'와 '컬러풀페스티벌'의 거리전(戰)은 '교통통제'의 압도적 승리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대구컬러풀페스티벌'에서는 별다른 이미지 전략조차 찾을 수가 없다. 도리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흩어놓은 과정들이 보일 뿐이다.2016년 '컬러풀페스티벌'을 상징하는 기본 색상은 빨강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인 2017년에는 빨강과 파랑 계열, 두 종류의 색을 동시에 기본색으로 사용하는 황당한 일이 있었고, 다시 2018년엔 명도가 높아진 또 다른 빨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올해 2019년에는 대구시의 브랜드 슬로건 '컬러풀대구'를 차용한, 즉 브랜드 아이덴티티(B·I) 사용 규정을 침범해 만든 함량 미달의 시그니처가 등장했다.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축제의 시각적 정체성을 깨뜨리지 않은 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2016년부터 2018년까지는 축제의 이름이 '대구컬러풀페스티벌'이 아니라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이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국제뮤지컬대구페스티벌'이 된 셈이고 '함평나비축제'가 '나비함평축제'가 된 격이니 축제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스스로 뭉개버린 것이다.'시민의 축제'임을 내세우면서 이처럼 심벌과 로고타이프를 해마다 바꾸고 이름마저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매년 형편없이 디자인되어 배포되는 전단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올해는 첫머리에 '대중교통 이용을 당부드립니다'라고 쓰여 있다. '당부한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250만 대구시민을 상대로 감히 그렇게 말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당부드립니다'는 '교통이 통제됩니다'처럼 어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이니 더욱 쓰면 안 된다.도심에 즐비한 현수막도 그렇다. 보이는 건 온통 '통제'뿐이다. 어디에도 '오시라'는 말은 없다. '함께하자'는 말도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통제'는 단속, 금지, 차단으로 읽힌다. 그러니 길 이쪽에 '통제'가 있으면 그 옆이나 저쪽 어딘가에 하나쯤은 '환영' 또는 '개방'을 뜻하는 메시지도 같이 걸려 있어야 한다.덧붙여 '비가 와도 축제는 열립니다'라든가 자동차가 아니면 올 수 없는 장애인이나 노약자의 경우 어떻게 하면 참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현수막도 간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면 특정업체가 아니라 대구시민이 행복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대구다운 축제, 즉 대구사람이어서 더 멋과 흥이 나는 축제, 대구에서 열려야만 제대로 신명나는 그런 '대구컬러풀페스티벌'을 만들어가야 한다. 거리는 '통제'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5월은 의심할 바 없는 '축제의 계절'이다.

2019-05-05 15:42:37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이건 명백히 불법이다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 이후 국회에서 험한 꼴은 다시 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선진화' 이름이 붙었다고 곧바로 선진 국회를 기대한 건 물론 아니다. 그냥 법 취지대로 몸싸움 대신 말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할 것이라 믿었다.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상정을 엄격히 제한한다. 천재지변, 비상사태 혹은 여야 합의 외에는 불가하다.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는 여당과 이를 막으려는 야당 사이에 늘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신속처리안건 지정 제도, 이른바 패스트트랙은 그에 대응하는 법안 처리 방식이다. 여야 합의가 안 될 경우 의장의 강행 처리 대신 상임위 재적 위원 5분의 3 이상 동의로 법안을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게 된다.멱살잡이와 주먹다짐은 기본이요 해머와 전기톱, 소화기, 최루탄 등이 난무하던 국회 풍경을 바꾸기 위해서다. 국회법에 처벌 조항까지 신설되었다. 선진화법은 2012년 당시 새누리당 주도로 만들어졌다. 효과도 있었다.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폭력 사태가 마지막 '동물국회'였다. 2016년 테러방지법 직권상정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통한 민주당의 의사 진행 방해가 있었을 뿐 몸싸움 없이 처리되었다. 그와 함께 '동물국회'라는 조롱도 사라졌다. 한마디로 패스트트랙은 국회법에 정해진 법안 처리 절차의 하나이다. 자유한국당이 패스트트랙을 물리적으로 저지한 행위는 자신들이 만든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국회법 위반은 이뿐이 아니다. 바른미래당과 문희상 국회의장은 의원 사·보임에 관한 국회법을 어겼다. 국회법 48조 6항이 문제의 조항이다. "(생략) 위원을 개선할 때 임시회의 경우에는 회기 중 개선될 수 없고, 정기회의 경우에는 선임 또는 개선 후 30일 이내에는 개선될 수 없다. 다만, 위원이 질병 등 부득이한 사유로 의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로 되어 있다.임시회 회기 중인 현재 (상임위) 위원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규정상 명백하다. 단서에 해당하려면 '위원' 자신이 질병 등을 이유로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다. 2003년 만들어진 해당 조문의 입법 취지는 분명하다. 의원의 개인적 의사에 반해 강제로 상임위원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2001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 김홍신 의원은 보건복지위 소속으로 건강보험 재정 통합이 소신이었다. 한나라당은 재정 분리 당론에 반대하는 김 의원을 환경노동위원회로 강제 사·보임했다. 김 의원이 청구한 권한쟁의 심판에서 헌재는 '의원 개인의 소신'보다 당론을 강제할 수 있는 '정당의 권한'이 우선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후 만들어진 게 국회법 48조 6항이다.앞서 본 대로 임시회 기간 등에는 의원 개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사·보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다.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오신환, 권은희 의원을 강제로 사·보임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의 행위는 국회법을 위반한 것이다. 이를 허가한 문 의장 역시 마찬가지다. 2017년 정세균 의장은 자유한국당이 요청한 김현아 의원의 사·보임을 거부한 바 있다. 당사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이유였다. 당론도 아니고, 사·보임 요청서를 팩스로 제출하고, 의장은 병상에서 구두로 결재하고, 직전 의장의 선례와도 맞지 않고…. 갖은 꼼수까지 곁들인 것은 몸싸움 못지않게 '선진'과는 거리가 멀다.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손쉬운 양비론, 양시론이 아니다. 국회가 보이는 온갖 추태는 모두가 규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지 싶다. 선거제 개혁, 검찰 개혁, 독재 타도, 헌법 수호. 명분이야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 모두 스스로 정한 법과 원칙을 위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이제라도 제 논에 물 대기식 해석을 멈추고 모두 이성을 회복해야 한다. 언론은 다시 동물국회라고 비웃지만 국민은 웃고 싶지 않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는가. 자신이 규칙을 정하고 그것이 불리하더라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선진화는 멀어도 좋다. 어떤 이유라도 동물국회는 안 된다.

2019-04-28 14:46:10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 당부하지 마시라

누구도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는대한민국 국민의 대표 될 수 없어국민에 '당부하겠다' 말하지 말고'부탁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해야 제국주의가 몰려오던 서세동점의 시대, 고종은 대신(大臣) 수십 명만으로 조선을 지켜내려 했다. 당연히 힘에 부쳤지만 그래도 궁궐 밖의 다른 선비, 다른 백성과는 의논하거나 소통하려 들지 않았다. 대개의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어도 백성의 힘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그들에게 백성은 훈육의 대상이지 자신들처럼 조선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서구 열강과 바로 옆 일본이 제각기 수천만 시민계급의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무기와 남아도는 힘을 분출하며 짓쳐들어오던 때였다. 그 어마어마한 힘과 맞서야 함에도 고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매국노 이완용,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우국지사 이범진 등의 근왕주의자들에만 의지해 국체를 보존하려 했다. 양반이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람은 빼고 여자는 말할 것도 없이 빼고 대다수 상민(常民)도 빼야 했으니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밖에 안 된 건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유림, 즉 선비들에게도 함께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충절의 선비, 매천 황현(黃玹)도 그랬다. 그는 경술년의 국치가 있자 "나라가 500년이나 사대부를 길렀음에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하나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할 노릇이 아니겠는가?"라며 음독 자결했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긴 그가 동학교도들을 동비(東匪) 또는 비적(匪賊)이라 칭하며 비하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신분의 벽은 그만큼 두껍고도 높았다.모든 백성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도 세계사적 격랑 속에 버티고 서 있기조차 힘든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래서 저들과는 함께 못 하고 저래서 이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하니 그렇게 해서 나라를 지켜낸다는 건 기실 가당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 나름 애쓰며 버티던 왕과 그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안녕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에 나라를 넘겼다. 주먹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않았던 그들에게 백성의 존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머릿속에 없었다.하지만 그렇게 버려진 백성들은 스스로 일어나 자신들이 주인인 나라, 즉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웠다. 과정은 길고 힘들었지만 그 간난의 세월은 전과 달리 평민과 양반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했다.경북의 혁신 유림들은 솔선해 노비를 해방시키고 가진 재산 모두를 송두리째 독립운동에 바쳤다. 평생 한학을 갈고닦은 유학자였음에도 먼저 나서 수학과 과학 등의 서양 학문을 배웠고 나이 어린 제자에게도 진심으로 존대하며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동지로 대했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양반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되었다.1917년, 예관 신규식(申圭植) 등은 '대동단결선언'에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바로 민권이 발생한 때임을 밝힘으로써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그 나라의 주인들은 선언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이었음을 3·1만세운동으로 증명했다. 이어 4월 11일, 이국땅 상하이에서 민주와 공화를 기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임시헌장 제1조로 채택했다.그로부터 지금까지 100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제 누구도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는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없고 시민과 함께하지 않고는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을 수 없다. 정치를 하겠다면 그 마음이 참이든 거짓이든 형식과 절차만큼은 따라야 하고 그렇게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국민이 분명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어느덧 내년이면 총선이다. 미리 말하건대 '소통하겠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나라의 주인과 소통하고 싶다면 부탁처럼 말해야지 시혜처럼 말하면 안 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의 주인인 왕과 소통하려 신문고를 두드리고 격쟁을 해가며 고생고생 애를 태웠다. 그리고 만약 선출되거든 국민에게, 시민에게 '당부한다'는 말하지 마시라. 유권자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나라를 위해, 지역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당부'가 아니라 '부탁의 말씀'을 드리는 게 맞다. 100년 전에 이미 결정된 일이다.

2019-04-21 15:46:10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인사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소선(小船)은 난감중재(難堪重載)요, 심경(深逕)은 불의독행(不宜獨行)이라."(명심보감) "작은 배는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 어렵고, 으슥한 길은 혼자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앞부분은 "자신의 능력을 감안해서 행동하라", 뒷부분은 "어려움이 예상되면 미리 그것을 피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른바 '인사 참사'로 시끄러운 정국을 보며 떠오른 말이다. '소선은 난감중재', 자신이 어느 정도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공직 후보자들이 우선 문제다. 말 그대로 작은 배에 무거운 짐을 싣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배가 침몰하거나 파선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제 분수에 넘치는 과욕을 부리면 망하기 십상이다.아무리 좋은 옷도 자기 몸에 맞아야 입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지위도 자기에게 버거우면 실패하거나 견디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공직에 적합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버젓이 심판대에 오르는 일이 많다. 용감한지 무모한지 모를 일이다. 침몰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살아온 인생 전체가 난파한 줄도 모른 채 고위직에 오른 것만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보인다. 검증자들이 새겨야 할 경구가 '심경은 불의독행'이다. 으슥한 길을 홀로 가면 험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런 길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가야 한다면 봉변당하지 않도록 미리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어두운 길을 혼자 가다가 문제에 봉착하면 지혜롭지 못하다. 함량 미달인 후보를 국민 앞에 내놓는 것은 으슥한 길을 홀로 가려는 것과 비슷하다. 길을 막고 시비 거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음을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한다.7명 후보자 모두에게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던 장관 인사 추천이 그랬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식투자 자체야 문제될 것 없다. 액수가 많은 것도 비난의 대상일 수 없다. 문제는 당사자가 판사, 남편도 판사 출신 변호사라는 사실이다. 거래 과정 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것을 예상하고 더욱 면밀하게 점검했어야 한다. 뒤늦게 당사자에게 사실관계를 해명하도록 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무를 소홀히 했다는 방증이다. 무능했거나 알고도 강행했다면 오만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책망 받아 마땅하다. 청와대 인사 검증이 허술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죽했으면 정홍원 전 총리가 인사 검증 과정에서 "젖 먹을 때부터 지은 죄가 다 생각나더라"는 말까지 했겠는가.'우리 편'은 적당히 넘기려는 동무 의식이 문제다. 유독 문재인 정부만도 아니다. 과거 정권도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정치에서 인사 문제야말로 여야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특히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갈등과 파열음은 증폭된다. 고위공직자의 철저한 검증을 위해 도입된 인사청문회가 정쟁의 주 무대가 된 느낌이다. 신상털기식 인사청문회 무용론이 종종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이쯤에서 필요한 것은 인사 검증과 청문회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도입한 미국식 공직자 검증과 인사청문회는 애초부터 '좋은 사람'을 뽑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좋지 않은 사람'이 고위 공직에 임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잘된 임용'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임용'을 방지하는 게 더욱 긴요하다는 인식이다. 문제 인사에 의한 국가적 손실이 유능한 사람에 의한 이익보다 더 크다는 게 인사 검증과 인사 청문 제도의 본질적 존재 이유이다. 미국에서 인사 대상자에게 보내는 수많은 질문 마지막에 꼭 포함되는 게 있다. '(그 외에) 당신의 지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를 진술하라'는 것이다. 무거운 직책을 맡길 만한 사람인지, 으슥한 길에서 봉변을 당할 일은 없는지 묻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좋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는 게 인사 검증이다.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본인이나 검증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2019-04-14 09:53:25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 창조경제와 혁신성장

'아무도 모르는 3가지'가 있었다. 2013년 3월경부터 시중에 돌던 우스갯소리로 안철수의 새 정치, 김정은의 생각, 박근혜의 창조경제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창조경제는 시대의 화두였다.그때 막 출범했던 정부는 이것으로 경제를 살리고 나라도 발전시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막상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가 잘 보이지 않아 그걸 빗댄 유머까지 등장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잘될 거라 믿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는 데 반대할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창조경제는 이미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대세로 떠올라 있었다.정부의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 창조경제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언론도 덩달아 창조경제만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며 그 끝에는 선진국 반열에 우뚝 선 대한민국과 행복한 우리가 있을 거라 전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신을 부정하면 안 되는 것처럼 창조경제가 뭔지 잘 안 보인다고 해서 그 권능까지 의심해선 안 될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지난 정부가 처음 창조경제를 들고나왔을 때부터 의문은 들었다. 이미 알려진 '문화산업', 같은 의미로 쓰이는 영국의 '창조산업'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전전(前前) 정부의 '창의한국', 즉 '창의산업'과는 또 무엇이 다른지 의아했다. 다만 취임 직후 있은 3·1절 기념사에서 당시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통해 새로운 시장과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국민 개개인의 행복이 국력의 토대가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저 좋은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다.하지만 갈수록 배가 산으로 갔다.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만들어지는 광역단체의 장들은 '대통령 먼저 모시기'와 '대통령 눈에 들기'에 온 힘을 다했다. 모든 빛은 대통령을 향했고 거기서 창조경제를 짊어지고 갈 청년과 기업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창조적이지 않기로 제일가는 대기업들을 순서대로 불러 하나씩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맡겼다. 삼성이 끌어주니, SK그룹이 밀어주니 여기 있는 청년과 기업들이 얼마나 잘되겠냐며 박수 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수시로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될 것을 강조했고 정치권을 향해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창조경제도 성공하고 나라의 미래도 있을 것이라 했다. 창조경제를 가장 반(反)창조적인 말로 독려한 셈이다. 압권은 2016년 어린이날, 청와대에서 있은 질문과 대답이었다. "발명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어린이에게 대통령은 전국 17곳에 있는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거기에 가면 아이디어를 제품화하고 수출까지 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결국 창조경제는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게 뭔지 모른 채 껍데기만 남기고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지난달 6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 벤처 붐 확산 전략'을 발표했다. '이제 와서 벤처 붐이라니?' 할 거면 진즉 했어야 했다. 내용도 규제완화, 금융지원의 또 다른 버전인 데다 6개에서 20개까지 늘리겠다는 '유니콘 기업'은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그야말로 미국식 기준일 뿐이다.출범 당시 현 정부는 새로운 경제 전략으로 혁신성장과 4차 산업혁명을 내세웠다. 하지만 처음 1년은 비트코인 논쟁에 끌려 다녔고 그 후로는 기억나는 게 없다. 내놓겠다던 한국형 4차 산업혁명의 모델은 소식이 없고 대통령 직속의 4차 산업혁명위원회는 존재감이 없다.지금까지 '클라우스 슈밥'의 명성을 드높이고 기업들의 제안서 내용을 '창조경제 구현'에서 '4차 산업혁명 선도'로 바꿔 놓은 것 말고 또 무슨 성과를 냈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사실, 4차 산업혁명을 목 놓아 부르짖는 나라도 우리밖에 없다. 구글의 검색 횟수 기준으로 보면 2위인 미국의 100배에 달한다.혁신성장을 하려거든 말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소리도 이제 그만해야 한다. 이대로면 문재인의 혁신성장 또한 아무도 모르는 한 가지가 될 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부담은 다시 국민이 지게 된다.

2019-04-08 02:30:00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문 대통령, 직접 분명한 메시지 보내야

'죄송' '반성' 넘쳐난 장관 청문회이런 사람만 일부러 고른 것인가자진사퇴·지명철회로 2명 낙마文대통령이 명확한 사유 밝혀야대통령의 모든 행위는 이유가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국민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언론과 국민은 대통령이 어느 곳을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를 보며 대통령과 정권의 의도를 짐작하려 촉각을 곤두세운다. 때로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메시지가 더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서해수호의 날에 "마음 한쪽은 서해로"라는 말을 남기고 대구로 향했다.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지 발걸음에 주목했을지는 물으나 마나다. 정치인들의 말보다 실제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대통령의 정치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중 하나로 국무위원, 즉 장관 선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제하의 장관은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최고 참모이다. 대통령과 정권의 이념과 철학을 국정 일선에서 구현할 최전방 지휘관이기도 하다. 당연히 대통령이 가장 신임할 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 일을 맡겨야 한다. 도덕성도 중요하다.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 도덕성을 까다롭게 따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처럼 굴곡진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안 될 말이다. 한 사람의 과거를 따지는 것은 이른바 신상털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미래는 예측 못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장차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이 청문회를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개각 명단에 오른 7명 장관 후보들의 청문회가 끝났다. 어쩌면 하나같이 '죄송'하고 '송구'하고 '반성'한다는 사람들만 있을까. 이념보다 전문성 위주로 찾다 보니 이런 지경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고른 것은 아닌지 의아할 정도이다. 대한민국을 책임질 장관들이 정말 이 정도 인물들밖에 없나 화가 치밀어 오른다. 투기, 탈세, 위장전입, 저질 막말. 청문회의 원조 격인 미국 같으면 모두가 아예 청문회 석상에 오르지도 못할 사람들이다. 자녀 특혜 채용, 특혜 분양 의혹 등은 수사 대상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 등 과거를 깡그리 부인하고, 자리를 구걸하는 면면은 자세히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어이없는 것은 애당초 청와대의 반응이다. 검증 과정에서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춘풍추상'이라는 말의 뜻이 '우리 편에게는 봄바람처럼, 다른 편에게는 서릿발처럼'이란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가장 궁금한 점은 문 대통령의 생각이다. 이들을 내세워 국민들에게 전하려 한 메시지가 무엇일까. 이들처럼 살아야 장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아니었어도 앞으로 이들처럼 살라는 것인지. '정의' '공정' '촛불 정신'은 이제 폐기했다는 말인가. 여권에서는 최정호, 조동호 두 사람의 낙마로 곤경을 모면하려는 모양이다. 내심 '정치 공세' '국정 발목잡기'라고 규정하고 싶지만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은 그렇게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지금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은 대통령의 분명한 메시지다. "검증 과정에서는 몰랐어도 청문회를 보니 안 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문제 후보들의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다. 자진사퇴 사유, 지명철회 이유를 직접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처럼 명확한 태도 표명은 정치적으로 밀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여론과 국회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박수를 받을 것이다.문 대통령은 과거 "청문회 때 많이 시달린 분들이 일을 더 잘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번에도 청문보고서 채택 여부와 관계없이 여러 장관 임명을 강행할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이유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식의 발언은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 청문회 제도와 국회, 국민 여론을 무시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청문회 과정에서 나온 문제들을 장관들은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우려들을 잘 새겨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국정 운영에 전념하여 국민의 박수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주기 바랍니다." 이런 대통령의 메시지를 듣고 싶다는 국민의 바람은 누군가의 말처럼 '연목구어'일까.

2019-03-31 1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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