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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외눈박이 일자리 정책

어느 나라 대통령이나 취임하면 일자리에 욕심을 내기 마련이다. 경제가 정부 명운을 가르고, 일자리는 그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취임 일성이 일자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취임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그랬다. 대통령의 일자리 욕심은 바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이룰 수 있다.마크롱은 취임하자마자 프랑스 노조의 철밥통을 깨트리는 것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 '저성장-고실업'으로 대변되는 '프랑스 병'은 깊다. 마크롱은 그 원인을 각종 고용 보장 장치가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은 탓이라고 봤다. 누구도 손 못 대던 노동개혁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고용 10인 이하 소기업은 1분기, 49인 이하 기업은 2분기 연속 매출 감소만으로도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했다. 산별 노조의 협상 권한은 대폭 축소했다. 임기 5년간 공무원 일자리 12만 개를 줄이겠다는 폭탄선언도 내놨다. 만성적자에 빚투성이인 국영철도공사부터 메스를 들이댔다. 그의 철학은 '해고를 더 쉽게, 고용도 더 쉽게'로 요약할 수 있다.고용시장이 유연해지자 기업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앞다퉈 프랑스로 몰려들고 있다.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는 3억유로를,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는 9억유로를 투자했다. 이렇게 끌어들인 해외자본이 우리 돈 4조원이 넘는다. 기업이 몰려들자 성장률은 두 배로 뛰고, 양질의 일자리는 25만 개 이상 늘었다. 늘 두 자릿수였던 프랑스의 실업률은 지난해 4분기 8.6%까지 떨어졌다. 반면 고용률은 65.7%로 올라 1980년대 이후 최고다.문 대통령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고용의 유연성 보장이 아닌 소득 주도 성장론을 들고나온 것부터 그렇다. '소득 주도 성장'이란 실험을 한다며 최저임금을 충격적인 수준으로 올렸고, 더 올리겠다고 벼른다. 가뜩이나 강성 소리를 듣는 노동계의 목소리는 커지고 기업은 아예 입을 닫았다.성적은 시원찮다. 기업은 기업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아우성이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인 제조업의 몰락이 심상찮다. 지난 3월 중 생산과 투자가 동시에 큰 폭 하락했다. 공장 가동률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이고, 제조업 재고율은 IMF 외환위기 이후 최고다.지난해 세금 25조원을 일자리정책에 쏟아부었지만 청년들은 반듯한 일자리는커녕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지난 3월 실업률은 17년 만에 최악이다. 올 1분기 하위 20% 계층의 소득은 1년 전보다 8%나 줄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가 줄자 저소득층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동네 식당은 속속 문을 닫고 있다. 물가는 다락처럼 올랐다.그런데도 경제 정책 라인의 해석은 '제 편한대로'다. 반장식 청와대 일자리 수석은 일자리 감소 지적에 "사실 일자리는 계속 늘고 있다"고 했다. 장하성 대통령 정책실장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감소 효과는 없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해 '침체 국면 초기 단계'라고 하자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성급하다'고 반박했다. 경제 전반에 걸쳐 울리는 경고음은 묻히고 '이대로'라는 외침만 강하다.정부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한다. 이대로라면 세계적 호황 속 불황을 겪는 우리 경제를 바로 세울 수 없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일을 잘못 하는 데 있지 않다. 일을 거꾸로 하는 데 있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프랑스 따라잡기는 영 글렀다.

2018-05-28 05:00:00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태영호와 문정인

1583년 조선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했다.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다 보니 군대와 식량이 모두 준비되어 있지 않아, 큰 적이 침범해 왔을 때 어떤 지혜로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진언했다. 마침 북쪽에서 여진족과 크고 작은 전투가 있던 터라 율곡의 주장은 제법 진지하게 검토되었지만 미봉에 그쳤다.얼마 뒤 일본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이 통일되면서 머지않아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통신사를 보내 이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두 사신의 의견이 달라 조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으나 학봉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조정은 갑론을박만 한 채 시간만 지체했다. 결국 조선은 1년 뒤 조총을 비롯한 신무기로 무장한 20만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준비 안 된 탁상공론의 이상 정치는 백성들에게 더 큰 수탈을 초래했다.한반도 비핵화 해법을 두고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각을 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탈북 외교관 태영호 전 공사와 문정인 대통령외교안보특별보좌관이 그렇다. 마치 율곡과 학봉을 보는 듯하다. 두 사람이 대변하듯 나라 전체도 보수 우파와 야권, 진보 좌파와 집권 여당으로 나뉘어 서로를 공박한다.태 전 공사는 강연회 등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에서 '진정한 핵 폐기'를 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북은) '비핵국가'라는 종이로 핵보유국인 북한을 포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나아가 "북의 '체제 안전 보장'은 김씨 가문의 세습통치를 영원히 존속시키는 것"이라며 완전한 북핵 폐기는 '환상', '허상'이라고 말한다.반대로 문 특보는 "일반적으로 (한미)동맹은 부자연스럽다. 내게 있어 최선은 동맹을 없애는 것" "현재의 한미동맹이 장기적으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로 전환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중국도, 미국도 편들 필요가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쏟아낸다. 문 특보는 또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임진왜란 직전의 공론처럼 집권 여당은 "태영호가 북한에 적대적 행위를 내질렀다" "그가 김정은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느냐"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힐난했다. 문 특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수 야당은 문 특보의 해임을 촉구하고 차라리 북으로 가라고 말한다.태 전 공사는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어려울 경우 혹시도 모를 어정쩡한 타협을 하는 것에 우려와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가족친지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유를 찾아 남으로 왔다. 정부 여당은 그의 행보를 비난만 하지 말고 오히려 유비무환의 계(計)로 삼아야 한다. 문 특보도 외교 분야엔 일가견이 있고 국제 정세 판단에 능한 분이다. 문 특보의 말대로 한반도에 핵이 없어지고, 미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세상을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임진왜란 당시처럼 '전쟁이 난다, 안 난다'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한반도 비핵화 해법을 두고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담보되느냐, 아니면 더 긴 세월을 대치 상태로 보내느냐가 갈린다. 6월 북미 정상회담이 끝나면 누가 또 어느 쪽이 현실을 직시했는지, 아니면 순진한 환상으로 접근했는지 드러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극한 대결과 전쟁이란 비극 대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8-05-21 00:05:04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단지 TK라는 이유만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1년 전 취임사에서 많은 약속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인사를 등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인재를 발탁하겠다'는 대목이 TK의 기대를 갖게 했다. 이른바 탕평 인사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도 의심하는 국민을 위해 문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못을 박았다. 취임 1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더 멀어져 가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지지 기반 출신을 끌어다 쓰고픈 유혹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대부분 그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결과는 늘 허망하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모두 코드와 인연에 맞춘 인사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문성이 결여된 진보 성향 인사 중심의 '코드 인사'로 제 무덤을 팠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학연'지연 중심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인사'로 국민 신뢰를 잃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첩 인사'와 '회전문 인사'로 시작해 '비선 인사' 끝에 몰락했다. '코드 인사' '고소영 인사' '수첩 인사' 모두 말만 다를 뿐 '내 편만 쓰겠다'는 오만은 똑같다. 문 대통령을 두고서는 '캠코더(캠프 출신'코드 인사'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사'란 말이 따라붙었다. 최근엔 참여연대 출신이 주요 요직을 장악한 것을 두고 "대학을 나오긴 나왔는데 '참여연대'를 나왔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유행한다. 이명박 시대의 '만사형(兄)통'은 '만사참(참여연대)통'으로 바뀌었다. 역시 탕평 인사와는 거리가 멀다. 또 다른 '내 편 골라 쓰기'일 뿐이다. '캠코더 인사' '참여연대 출신' 인사 논란 와중에 TK 출신 공무원들만 중앙 무대에서 길을 잃었다. TK라는 이유만으로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는 지난해 마무리된 문 정부의 초대 장'차관급 인사 114명 가운데 호남이 29명, PK(부산'경남)가 27명인 데 비해 TK 출신은 11명에 불과했던 것에서 예감할 수 있었다. 장'차관에서 밀려난 TK는 12개 정부 주요 부처 1급 인사에서도 주변부로 전락했다. 정치 바람을 탈 수밖에 없는 고위 공직자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앙부처 국'과장급 공무원까지 요직에서 자취를 감췄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현 정부에서 적폐 청산을 주도하고 있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공무원은 사람이 아닌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업무 외적인 의도로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특히 지역 출신 공무원들은 출신 지역 현안과 예산을 챙기는 등 중앙정부가 소홀하기 쉬운 지방과의 가교 역할을 한다. 지역 균형 발전에 그 나름대로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위 공무원의 지역 안배에 실패하면 국토 균형 발전은 헛구호에 그치기 쉽다. 현 정부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서라도 중앙 공무원의 지역 안배가 그만큼 중요하다. 대통령은 의도했건 않았건 탕평 인사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이에 대한 비판은 사상 초유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란 이슈에 묻혔다. 물론 최근 남북 관계의 극적 반전은 다른 모든 이슈를 덮기에 충분하다. 북의 완전 비핵화를 실현한다는 전제 아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아 지나침이 없다. 덕분에 대통령의 지지율은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편향 인사를 지적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서는 안 된다.

2018-05-14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

1980년대 중반 미국과 소련의 핵 경쟁은 극에 달했다. 두 나라는 아프간 사태를 두고 반목했다. 미국은 최신형 중거리 퍼싱-2 핵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며 소련을 압박했다. 핵과학자협회가 만든 지구 종말의 날 시계(Doomsday Clock)는 지구 멸망 3분 전을 뜻하는 밤 11시 57분까지 다가섰다. 당시 미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소련을 '범죄와 거짓과 속임수를 일삼는 집단'이라 몰아붙였다. 그에게 소련은 '악의 제국'에 다름 아니었다. 극한 대결은 극한 타협을 부른다. 두 나라는 핵전쟁의 위기 앞에 극적으로 타협했다. 1987년 12월 8일 핵무기 개발 이후 처음으로 두 정상은 사거리 300~3천400마일의 중거리 핵미사일 2천611기를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서명식은 미 백악관에서 열렸다. 레이건의 파트너는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고르바초프를 만날 때마다 레이건은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는 소련 속담을 앞세웠다. 소련 작가 수잔 매시가 "소련인들은 속담을 인용하며 대화하면 좋다"고 귀띔한 결과였다. 소련에 대한 불신이 깊던 레이건은 이 속담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서명식에서도 레이건은 어김없이 이 속담을 끄집어냈다. 서류만 남기고 속일 생각은 말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고르바초프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또 그 소리입니까." 궁즉통인가. 믿기는 하되 검증은 한다는 소련 격언은 레이건의 집념 아래 잘 지켜졌다. 어느 때보다 확실한 핵폐기 검증 시스템이 마련됐다. 쌍방의 기술자가 상대방의 민감한 기관에 머물며 철저히 핵폐기 진행사항을 감시했다. 언제라도 의심스러운 곳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비밀주의에 머물던 소련으로서는 힘든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3년여가 흐른 1991년 6월까지 2천692기의 미사일이 폐기됐다. 당초 약속보다 더 많은 미사일이 사라졌다. 같은 해 미국과 소련은 이에서 나아가 첫 전략핵무기 감축 협상에도 서명했다. 그해 지구 종말 시계는 밤 11시 43분까지 늦춰졌다. 아직까지 시계가 그때만큼 늦춰진 적은 없다. 2018년 현재 이 시계는 오히려 인류 파멸의 시간인 자정에 가장 가까운 밤 11시 58분까지 당겨져 있다. 북핵을 둘러싼 국제 긴장 고조가 기후변화와 맞물린 탓이다. 이럴 때 남북 정상이 만났다. 두 정상이 만나 악수하고 포옹하고, 덕담을 나누는 것은 감성적으로는 국민들 마음을 휘젓기에 충분하다. 북한과 미국 정상이 각자 가진 핵 버튼의 유용성을 두고 '자랑질'하던 때에 비춰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 두 정상이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자' '종전을 하자'고 했으니 낙관론이 싹트고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관계 진전의 낙관론 토대를 깔아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앞으로 이뤄져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이 낙관론에 묻혀서는 안 될 일이다. 마냥 감동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검증이란 절차가 남아 있어서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고, 비핵화 합의도 마찬가지다. 남북은 주요 고비마다 만나 주요 합의를 했지만 3년을 넘긴 경우는 드물다. 이번 선언 역시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핵 폐기가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김정은은 여전히 우리 국민을 핵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독재자일 뿐이다. 게다가 이번 판문점 방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다"고 했지만 김정은은 이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않았다. 적어도 비핵화에 대한 육성 메시지 정도는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런 때 레이건이 '또 그 소리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강조했다는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제대로 된 검증이 가능해야 북핵 사태로 인해 당겨진 지구 종말 시계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 싶어서다.

2018-04-30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관행이라는 이름의 적폐

뭔가 잘못이다 싶었다. 사면초가인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문재인 대통령이 감싸는 이유 말이다. 국민 눈높이에서 보면 김 원장은 그저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에 나가 잘 먹고 잘 놀았던 인물일 따름이다. 그것도 여성 인턴을 대동하고서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에 과감한 외부 발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김기식 금감원장 관련 문재인 대통령 입장문) 그런 인물이 애초 아니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국민 생각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문 대통령이 입장문을 낸 것부터가 이례적이다. "(피감기관 지원 해외 출장이) 당시 국회의 관행이었다면 야당의 비판과 해임 요구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했다. 관행이라면 봐주고 싶다는 뜻을 에둘러 내비쳤다. "어느 하나라도 위법이라는 객관적인 판정이 있으면 사임토록 하겠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대한 기대가 물씬 풍긴다. 위법 사실이 드러난다면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사법 처리는 당연한 귀결이다. 위법행위를 저지른 자는 애초 공무원에 임용될 수 없다. 이런 경우라면 대통령이 할 역할은 없다. 김 원장을 둘러싸고 나오는 비리 의혹은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같다. 청와대는 이 중 달랑 4건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법 여부를 질의했다. 국회의원 재임 말기 남은 후원금으로 다른 의원을 후원하고 보좌직원 퇴직금을 준 사실과 피감기관의 돈을 받아 나선 세 차례 외유의 적절성 여부다. 선관위가 답해야 할 것도 있고 답하기 적절치 않은 것도 있다. 그저 선관위가 범법행위가 아니라고 하거나, 답변을 하지 않는다고 그냥 덮을 빌미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김 원장의 일탈이 위법이든 아니든, 관행이든 아니든 국민들은 이미 그를 떠나보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에서 드러났듯 국민들이 공직자에 대해 치는 그물망이 촘촘해졌다. 김 원장은 이미 '공직자의 도덕성'이란 그물망에 걸렸다. 오죽하면 늘 여권 입장에 섰던 정의당이 자진사퇴 촉구를 당론으로 정했을까. 그런데 대통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국민 눈높이와 대통령의 눈높이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 지난해 5월 10일 대통령의 취임사를 되짚어보자. 그날 대통령은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다"고 다짐했다. 관행이란 그 사회의 공공성과 통한다. 사회적 제재가 따르게 마련이다. 해묵은 관행과의 단절이 필요한 이유다. 취임사에서 대통령이 관행과의 결별을 이야기한 것은 다분히 이를 의식해서 일 것이다. 실제로 '국정원 특활비의 청와대 상납은 관행이었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과거 권력자들을 재판대에 세운 것이 현 정부다. 이제 대통령이 그 관행의 그림자에 숨으려 드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일이 다급해지자 청와대는 19대 20대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해외 출장에 나선 사례를 캐보니 한국당이 더 많더라고 했다. 한국당 의원이 금감원장에 오른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더 철저히 검증하고 걸렀어야 할 터다. 대통령은 나아가 인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과감한 선택일수록 비판과 저항이 두렵다'고 했다. 이 호소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과감한 선택이 국민 눈높이에 맞거나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 취임사에서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서 이를 맡기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 대통령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서도 두고 보자고 한다. 대통령이 훌륭한 인재를 찾아 삼고초려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대통령은 지우지 못하고, 김 원장은 버티고 있다. 버틸 만큼 버티다 물러나는 것이 공직계의 관행이다. 그 관행은 문 대통령이 없애겠다는 적폐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2018-04-16 00:05:00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TK 우상(偶像)의 파괴

박근혜 전 대통령이 6일 정치적 파산을 선고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참 굴곡 많고 파란만장했다. 부모님을 흉탄에 잃고 청와대를 나온 그는 18년 동안 칩거하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마감하려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대구경북(TK)에서 아성을 쌓았고, 열혈 지지층을 만들며 정치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아버지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명'을 기대한 TK민들은 아낌없는 애정을 주었다. 어느 순간 박 전 대통령은 TK의 우상이 됐다. 지역민들은 그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인지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좌파나 진보 진영이 싫어, 또 대안 인물이 없어 그를 지지하고 우상을 만들었다. 이런 배경에는 TK민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환생을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딸에게서 박정희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좌우 진영을 떠나 역대 대통령 중 경제 치적만큼은 단연 최고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30년에 가면 일본을 제치고 남녀 공히 세계 최장수국이 된다고 한다. 특히 여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균수명이 90세를 넘는다고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7년 시행한 의료보험 덕분이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도 신속한 시스템으로 평가받는 의료보험제도가 없었으면 우리는 최장수국의 꿈을 꿀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양성한 100만 명이 넘는 기능공은 1980년대에 중화학공업을 꽃피우고 오늘날 세계 7대 공업국의 기관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됐다. 이뿐이랴. 박정희 정부는 구미에 내륙공단을 세워 현재의 300억달러 수출도시를 만드는 기초를 세웠다. 이것은 북한 수출의 10배에 가깝다. 포항에는 중국이 부러워한 포스코를 세워 포항을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만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과학기술 인재를 키웠으며 자주국방의 토대를 세워 오늘의 한국을 있게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앞길을 열어준 선각자이기도 했다. TK민들은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느라 가슴 졸이며, 국익을 위해 온몸을 불사를 줄 알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의 철학과 통치력을 계승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실패 요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을 꼽자면 '진실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데 있다. 직언 잘하는 진실한 참모는 내치고, 아첨 잘하는 배신의 부하만 곁에 두었다. 박 전 대통령 주변엔 그를 어디로 내몰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헌신하는 눈먼 충성파들만 득실거렸다. 권력기관도, 각 부처도 대통령의 눈치 보기에 바빴다. 박 전 대통령은 또 시대 변화를 읽지 못했다. 아버지 박정희와 35년여의 터울을 두고 맞이한 박근혜 시대는 정치사회적 환경이 급변했다. 국민들의 권리 의식이 높아졌고 눈과 귀가 열려 있었다. 국가적 고비마다 보여준 국민의 힘은 지도자들에게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정치적 형틀이 됐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다수 국민들이 TK의 우상을 허물었다. 이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불쌍하다고 눈물만 흘리는 TK의 모습, 특정인'특정 세력에 대한 맹목적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라면 TK발 보수혁명의 마중물을 더욱 세차게 퍼 올려야 한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좌우 양 날개가 있어야 새가 잘 날 수 있듯 정통 보수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를 키워야 한다. 민생과 국민 여론을 외면하고, 패권적 정치 세력을 만들고, 부패와 부정을 일삼는 정치인들을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한다. 보수를 표방하든, 진보를 표방하든 불의·불공정·부도덕한 정치인은 시도민의 혜안으로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새로운 대구경북을 열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놓아줄 때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

2018-04-09 00:05:03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적은 인구로 살아가기

우리나라에서 저출산 문제가 불거진 것은 10년을 훌쩍 넘긴다. 2006년 영국 옥스퍼드대 데이빗 콜맨 교수가 한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지목한 것이 충격의 서막이었다. 그 전해인 2005년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이미 1.08명까지 떨어졌다. 인구 학자들은 한 국가가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산율을 2.1명으로 본다. 그 시절 이미 그 수준을 한참 밑돌았던 것이다. 따져보면 우리나라가 합계출산율 1.3명 이하의 초저출산 국가에 든 것은 이보다 한참 전인 2002년이었다. 그해 출산율은 1.17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절, 아무도 그 심각성을 몰랐다. 정부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시킨 것도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5년의 일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지목된 후 정부가 저출산 고령화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200조원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 재정이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만큼 저출산 대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저출산 대책들은 실패했다"고 고백했을까. 정부의 대책이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된 사이 인구 관련 비관적 기록은 다달이, 해마다 경신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사망자는 2만6천900명, 출생아 수는 2만5천 명이었다. 1970년 출생아 수 집계 이후 처음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넘어선 것이다. 올 1월에는 사망자가 3만1천600명으로 늘어 1월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반면 출생아 수는 3만2천100명으로 1월 역대 최소 기록을 갈아치웠다. 인구 증가보다 감소 요인이 더 커진 셈이다. 이 사이 우리나라 출산율은 1.05명까지 떨어졌다. 다시 역대 최저다. 경제활동가능인구(14~65세)는 가파르게 줄고 있다.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인구(707만 명)가 처음으로 14세 이하 유소년 인구(675만 명)보다 많아졌다. 젊은이들은 결혼하지 못한다. 지난해 인구 1천 명당 혼인 건수는 5.2건까지 줄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대부분 경제적 이유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결혼하지 못한다. 어쩌다 일자리를 구해도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살 집을 구하기 힘들다. 맞벌이 부부라면 육아는 또 다른 부담이다. 남자의 초혼 연령은 32.9세, 여자는 30.2세로 자꾸 늦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는 2~3년 후 출생아 수 급감의 예고편이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35만7천 명으로 줄었다. 이대로라면 2023년이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런 전망은 현실이 될 것이다. 오히려 당겨질지도 모른다. 2016년 혼인 건수가 7% 줄어들자 이듬해 신생아 수는 12% 줄었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출산율에 집착하고 있다. 지난 16년 동안 200조원을 쏟아붓고도 성공하지 못한 집착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출산율을 0.1~0.2 높인다고 인구절벽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정부가 '출산율' 이상을 바라봐야 할 시기가 왔다. 이제 정부가 할 일은 '적은 인구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더 이상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적은 인구로 살아가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인구 정책 패러다임을 거기에 맞춰 나가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노력은 가속화해야 한다. 일부 젊은이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다수 젊은이들에게만 부담을 안기는 공공 일자리는 해결책이 아니다. 국가 채무를 늘리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노인층은 후손들을 위해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 올해 나오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부양해야 할 노인 인구는 지금보다 4배 이상 커진다. 지금 노인 복지를 위해 국채를 늘리는 일을 삼가야 하는 이유다. 적은 인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을 펑펑 쓰기보다는 꼭 필요한 곳에 돈을 쓰는 짠돌이 정부가 필요해 보인다.

2018-04-02 00:05:00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물러남의 리더십

지난 2월 초 영국에서 한 고위 관료의 사임이 화제가 됐다. 특별히 잘못된 정책을 입안한 것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내세운 사임 이유는 상원 출석에 몇 분가량 지각했다는 것.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마이클 베이츠 영국 국제개발부 부장관은 상원 질의에 참석하기로 예정됐었다. 베이츠 부장관은 질의에 몇 분가량 지각했다. 통상적으로 사과 정도로 끝날 일이었지만 베이츠 부장관의 자세는 달랐다. 그는 "아주 중요한 질의의 첫 부분에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결례를 범하게 된 데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즉각 사임안을 총리에게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베이츠 부장관의 사임은 실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공직자로서의 처신에 관한 한 결벽증에 다름없다. 20세기 최고의 리더로 불리는 잭 웰치는 1981년 제너럴일렉트릭(GE)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해 과감한 구조조정과 혁신을 통해 회사에 만연한 관료주의를 청산했다. 또한 사업 다각화를 꾀하면서 20년 동안 회사의 가치를 무려 4천% 이상 성장시킨 후 2001년 은퇴했다. 웰치는 은퇴를 5년이나 앞두고 GE를 이끌 후계자를 기르는 '승계계획'(succession plan)을 가동했다. GE는 그의 은퇴에 맞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은퇴 패키지(총 4억1천700만달러)로 회사를 발전시킨 공로에 보답했다. 장수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을 보면 그 회사의 CEO들은 가장 잘나갈 때, 가장 권위 있을 때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경우가 많았다.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혁신을 이루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직을 던졌다. 나아가 그들은 시대변화에 맞춰 자신의 리더십을 허물게 하면서 변화와 혁신을 주문했다. 하지만 정점에 있을 때 리더가 물러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룬 결과와 자리를 뒤로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이 억울하고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았던 곳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일터로 남기를 바란다면 아쉬울 때 물러나야 한다. 김범일 전 대구시장과 우동기 현 대구시교육감은 3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두 분이 3선 욕심을 냈으면 아마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김 전 시장은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명예직 자리도 사양하며 여유롭게 자연인의 삶을 즐기고 있다. 우 교육감은 3선 불출마 선언 후 온갖 루머에 시달리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모두 웃으며 얘기할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며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우 교육감은 3선을 권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급변하는 교육상황에 대구 교육이 정체하지 않으려면 새 인물이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구은행이 요즘 꽤 시끄럽다. 수장의 퇴진을 두고서다. 박인규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이 지난 23일 주주총회에서 은행장 사퇴를 선언했다.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직원 채용비리, 비자금 조성 등과 관련된 의혹이 단초가 됐다. 이 의혹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제기된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 박 회장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대구은행은 대구경북 시도민의 무한애정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시도민의 은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도민이 키워준 대구은행의 미래를 위해 이제 박 회장이 결단할 때가 왔다. 박 회장은 상반기 중으로 금융지주 회장도 내놓겠다고 했다. 시도민들은 박 회장 개인의 인연보다는 대구은행을 진정 도약시킬 수 있는 능력과 비전, 인품을 가진 후임자에게 물려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 사람이 어느 때 나아가고, 어느 때 물러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물러나야 할 때 결단 못 하는 리더는 그 기업과 조직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신뢰 토양을 무너뜨린다. 리더십의 완성은 잘 물러나는 데 있다.

2018-03-26 00:05:04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우리 사회의 '지킬과 하이드'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악한(하이드) 성격을 숨기고 착한(지킬 박사) 성격만 나타내려고 노력했다네. 나의 악한 쪽은 선한 쪽보다 훨씬 몸집이 작고 약하다네." 분열증을 겪는 의학자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가운데 나오는 명대사다. 우리 지도층이 도덕과 욕망의 분열 상태에 빠졌다. 한때 존경받고 주목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이중인격자 지킬 박사처럼 하이드로 마구 복제되는 듯하다. 각 분야의 힘센 자 내면에 엄연히 존재했던 악과 위선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우리 사회는 손 쓸 수 없는 의식의 통제 불능 사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양심과 욕망의 권력, 그 둘의 항시적 분열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쪽이 진정한 자아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골자다. 지킬 박사는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자신이 지난 몇 개월간 행했던 선행들로 또 다른 자신인 살인자 하이드를 영구히 제압했으리라고 흐뭇해하지만, 고개를 숙이자 그의 손에 힘줄이 솟고 털이 자라면서 자신이 어느새 '괴물' 하이드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발견한다. 더 이상 지킬로 돌아갈 수 없었던 하이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때 존경받았던 원로 시인이, 열정과 천재성으로 무수한 상을 탄 영화감독과 연출가가, 차기 정치 주역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은 정치인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급기야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 배우는 지킬 박사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은 평소에 겉으로는 정직하고 시대정신을 실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작은 권력의 위치에서 그 권력을 누렸던 많은 소인배들도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하이드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모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와 진정한 사과는 없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성추행을 당해도 침묵을 강요받아야만 했고, 당사자도 결국 침묵했다. 가해자 대부분은 특정 분야의 '권위자' 또는 '권력자'였다. 그것이 지위든, 능력이든 간에 자신이 소유한 권력을 부정한 방법으로 행사해, 꿈을 향해 가는 힘없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직접적인 '성' 문제가 아니라 약자를 파고드는 권력의 남용, 개인에 대한 폭력적 권력 행사에 있다. 쏟아지는 '미투 폭로'에 음모론도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투 운동이 여야 대결도, 남녀 성 대결도 아니라는 점이다. 또 성폭력에 좌우(左右)가 있어서도 안 된다. 미투 고백 당사자들이 용기를 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 결단이 필요했다. 그 상처와 충격, 모멸감과 환멸의 몫은 피해 당사자의 것만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한 우리 사회, 국민 전체의 것이 되었다. 그동안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이들의 추락으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할 말이 없게 됐다. 지도층과 권력자들을 넘어 기성세대의 권위 추락과 불신으로 이어질까 두렵다. 이제 근본적 차원에서 사회적 가치관과 조직 문화, 전문가 의식을 재점검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하이드를 양산하게 된 것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힘센 자들이 권력(권위)의 남용을 자각하지 못한 자만심에 있다.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등산인들이 1950,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2,0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어느 순간부터 4,000, 5,0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더니 큰 변화가 나타났다. 2,000m에 베이스캠프를 차렸을 때는 1년에 정상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 10명 미만이었는데, 4,000m 이상의 고지에 차리면서부터 매년 정상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 20명을 넘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도덕률 베이스캠프를 높여 위에 있는 자로부터의 성폭력, 성추행을 사라지게 하자. 지도층부터 도덕성 기준을 높여야 한다. 이런 도덕의 울타리가 남성 전체로까지 확산한다면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는 여성들이 줄어들 것이다. 미투 운동이 분명 사회 발전과 성숙의 계기가 돼야 한다.

2018-03-12 00:05:00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잔혹한 봄을 맞지 않으려면

인간승리와 감동의 드라마를 보여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평창올림픽 폐회와 함께 어느덧 봄기운도 우리 곁에서 살랑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해 봄은 마냥 따사로운 날만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이 읊조린 것처럼 어쩌면 가장 잔인한 4월이 될지도 모르겠다. 평창의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북핵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 당국은 3월 중순까지 열리는 평창패럴림픽 이후 4월에 합동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대응한 평양의 선택에 따라 4월은 한반도에 드리운 전운이 걷히느냐, 아니면 잔혹한 사태를 맞느냐가 판가름나는 시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사상 최대의 대북 제재안을 발표했다. 장녀이자 백악관 보좌관인 이방카 트럼프가 방한해 문재인 대통령과 만찬을 한 날 최대의 대북 제재를 발표함으로써 남북 해빙, 북미 탐색 대화 기류와 상관없이 최고의 압박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재 효과가 없으면 제2단계로 가야 할 것이고 2단계는 매우 거칠며 전 세계에 매우, 매우 불행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선택은 세 갈래로 짚어볼 수 있다.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선택은 최대한의 압박을 통해 북이 비핵화를 전제로 대화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한미 입장에선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다. 김정은으로서는 사실상 백기 투항인 셈이다. 두 번째는 김정은이 미국과 국제사회의 결의에 반해 핵실험 재개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으로 반발하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은 북 핵시설과 지휘부 선제타격을 위한 코피작전(Bloody Nose Strike)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인 세 번째 선택은 북의 태도 변화가 없고, 선제타격도 한국의 반대로 실행할 수 없을 경우 대북 제재와는 별도로 주한미군 철수를 비롯한 대(對)한국 경제 제재를 결행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한국은 안보'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미국은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반도를 관리하려 들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한미 동맹의 파기이자 한국 포기와 다름없다.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가장 고통받는 쪽은 한국이다. 한국이 잔인한 4월을 보내지 않으려면 문재인 정부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현재 문 정부는 북한 정권의 계산된 행동에 맞춰주기에 급급하고, 미중의 경쟁구도에 갈팡질팡하고 있다. 문 정부는 북에 무조건적인 대화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 대화를 요구하더라도 핵 포기만이 김정은 체제가 살길이라는 인식을 갖게끔 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시간벌기를 통해 핵 무력을 완성하고 남한을 지렛대로 미국의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김정은의 잔꾀를 차단해야 한다. 김정은의 속내는 다 드러났다. 돈줄과 생명줄이 말라가자 동생 김여정을 보내 남한에 도움을 읍소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냉전시대인 1962년 10월,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핵미사일 위기 때 결단을 내려야 했다. 대통령은 안보전문가들로 사태 해결을 위한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 일부는 미국의 압도적인 전략적 우세가 쿠바 핵미사일 설치 후에도 유지되므로 별다른 대응조치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다수는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비롯한 군사적 목표에 500대의 폭격기로 기습공습을 하고 또 미사일 관련 장비를 실은 소련 상선이 쿠바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상을 봉쇄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심각한 논쟁 끝에 대통령은 안보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상 봉쇄와 소련에 대한 압박으로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소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케네디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신념만을 절대가치에 두지 말아야 한다. 자기 진영 인사들만이 아닌 진정으로 한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안보'외교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북핵 해법을 제시받아 실행하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잔인한 4월을 맞지 않기 위한 문 대통령의 결단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2018-02-26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과거를 딛고 미래를 봐야

영국의 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란 말로 유명해졌다.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남긴 말이다. 그에 따르면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그 이전엔 역사란 그저 사실의 기록일 뿐이었다. 그로 인해 과거사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 행동을 위한 타당하고 유용한 일반적 지침을 마련하는 근거로 삼는 것이 가능해졌다. 역사는 마음에 안 든다고 덮어놓고 부정할 수 없다. 분석하고 계승해야 보다 나은 미래를 열 수 있다. 카의 말을 떠올린 것은 문재인 정부 아래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과거가 빠르게 희석되고 있어서다. 한국은 20세기 후반 가장 빠르게 근대화를 이뤄 세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된 나라다. 해방 후 국민 1인당 국민총생산(GNP) 16달러의 세계 최빈국에서 3만달러를 넘긴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유일한 나라다. 개도국 중에서 한국을 본받고 싶어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해방 후 분단되며 가난 경쟁을 하던 북한과도 철저히 대비된다. 북한은 여전히 세계 최빈국에 속해 있다. '독재국가'이자 '빈곤국가'고, 인권 사각지대인 '불량국가'로 국제사회에 낙인 찍혀 있다. 남북의 차이는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과거를 딛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갈렸다. 이런 한국을 두고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독일은 2등을 위해 뛰지 않는다"고 아낌없는 칭찬을 보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과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까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성장한 한국이 보여준 경제적 성과에 대해 찬사를 보낸 바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기성세대가 꾸었던 꿈을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무작정 함께 나누자고 할 수 없다. 경제 기적을 이룬 시대가 꾸었던 꿈은 오늘날 젊은 세대가 꾸어야 할 꿈과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 삶의 바탕이 된 기적의 과정을 안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를 지우려는 움직임이 현 정부 들어 노골화하고 있다. 문 정부가 추진 중인 새 역사교과서에서 새마을운동, 중동건설 등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요소들이 사라질 전망이다. 아직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진 시안이라고는 하나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든 기록들이 빠지는 모양이다. 한국 발전의 토양이 됐던 '자유민주주의'도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로 대체될 태세다. 이리하여 등장할 '민주주의'는 북한이 주장하는 소위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 과거는 묻을 수 없다. 하지만 문 정부는 묻으려 든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과거를 청산 대상으로 여기는 듯하다. 과거를 부정하다 보니 경제도 뜬금없이 소득 주도 성장론을 내놨다. 실질임금이 증가하면 소비와 투자가 증가하고, 노동생산성이 증가해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이상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주장이다. 그 시험대인 최저임금은 도리어 걱정거리다. 근로자를 위한다는 정책이 되레 근로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된 안정적 에너지 공급원이던 원자력발전은 졸지에 적폐가 됐다. 대통령의 '탈원전' 한마디에 진퇴의 기로에 섰다. 가동 가능한 원전의 38%를 멈춰 세운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부터 당장 적자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후유증은 고스란히 미래 세대 몫이다. 불량국가 북한에 대한 구애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은 '코리아 패싱'을 노골화하고 있다. 남북 차이를 불러온 우리 과거는 악착같이 지우려 들면서 북한 정권의 과거와 3대 세습,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리도 않는다. 남북대화를 위해서라면 비핵화 주장도, 한미군사훈련도 접을 태세다. 이 모든 것이 미래를 생각지 않아서다. 과거를 딛고 현재를 희생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2018-02-19 00:05:00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중개인(agent) 아닌 협상가가 되라(negotiator)

북측 김정은'여정 30대 초반의 '백두혈통' 남매가 최근 며칠간 남측 평창을 지배했다. 평화의 제전이어야 할 올림픽을 핵 정치'국제정치 게임판으로 확 바꿔버렸다. 삼지연관현악단과 대규모 응원단으로 꾸려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미녀 군단'은 핵 도발과 인권유린, 봉건적 세습체제로 각인된 북측의 이미지를 일순간 잊게 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여동생을 특사로 보내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제안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미국을 죽일 듯, 집어삼킬 듯 위협하더니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대화를 하자고 한다. 미국의 핵 항모에 맞서 북측은 만경봉호에 미녀 예술단을 태우고 내려와 남한과 전 세계를 향해 미소 공세를 폈다. 남북정상회담 한 방으로 한'미'일의 허를 찌른 김 위원장은 적어도 올림픽 초반 기간만은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승자이자, 평창의 지배자였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도 공세적으로 나올 것이 자명하다. 북측의 숨통을 조이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면서 체제 위기로까지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북의 고통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은 돌파구 마련이 시급해졌다. 앞으로 북측은 이산가족상봉,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가동, 이미 제안한 남북정상회담 조속 개최 등 파상적인 대화 공세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다. 아버지 김정일과 김 위원장은 핵 무력이 없었던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처참하게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핵이 없으면 미국으로부터 언제든지 참수될 수 있다는 망각에 시달릴 법했다. 김 위원장에게는 핵을 지렛대로 미국의 침공을 막거나 최소한 체제 보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는 '핵이 있는 평화'만 있을 뿐이다. 김 위원장의 운명은 남북정상회담이 그 분수령이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한반도 위기를 해소하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남북이 2000년 6'15선언(김대중), 2007년 10'4선언(노무현)을 했지만 북측은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등으로 남한을 기만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요건 없는 북미 대화만 요구하고 있다. 대화는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북측, 아니 김정은의 핵 포기다. 북핵으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의 가장 큰 피해 당사자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민과 한국 정부다. 문 대통령은 북측에 비핵화 원칙을 수용한 뒤 미국과도 대화를 시작하라는 요구를 강력히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촉구는 협상이 아닌 중개인의 역할에 다름없다. 중개인(agent)이 뭔가. 제3자로서 두 당사자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고 소정의 대가를 받는 장본인이다. 반대로 협상가(negotiator)라면 어떤 목적(핵 없는 평화)에 부합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선택을 요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서로 의논(남북한과 미국)하는 당사자이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한반도의 운전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인 한국이 중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협상을 주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은 아쉬울 게 없다. 정상회담이라는 미끼로 시간을 벌며 핵탄두를 늘리고, 실전배치까지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협상가가 아닌 중개인에 머물 경우 한반도 종전 선언과 북미 수교, 주한미군 철수 등 북한의 목표대로 한반도의 운명이 흘러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부디 문 대통령의 안보와 외교 해법이 '핵 없는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민의 목표로 연결되기를 기대한다.

2018-02-12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장관이 아니라 정책이 문제다

세계 경제는 호황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IMF는 올해 전 세계 평균 성장률을 3.9%까지 높여 잡았다.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것은 미국 유럽 일본 등 경제 강국들의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중국 베트남 등 신흥국들 역시 6%대의 고속 성장을 지속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호황은 미국 중국 등 몇몇 경제 대국의 지도자들이 이끈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이룬 경제성장이 세계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성장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각 나라의 아귀다툼도 치열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우리는 지금 '새로운 미국의 순간'을 맞고 있다"고 역설했다. '안전하고, 강하고, 자랑스러운 미국'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연설 내내 자신이 이룬 경제적 성과를 조목조목 짚었다. "240만 개의 새 일자리를 창출하고 실업수당은 4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줄여 미국 기업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했다" "애플이 조금 전 미국에 총 3천500억달러를 투자하고 2만 명의 추가 인력을 고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강조했다. 80분 연설 동안 115차례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역대 미 대통령 국정 연설 중 두 번째로 많은 박수 세례였다. 이를 4천560만 명의 미국인이 지켜봤다. 그리곤 70%의 응답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지난해 5월 당선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못지않다. 그는 지난달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프랑스가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한때 국민소득 4만달러를 넘었던 프랑스이지만 강성 노조와 요지부동 철밥통 공직 때문에 역성장하며 한때 '유럽의 병자'란 소리까지 나왔다. 마크롱은 취임 8개월 만에 이런 부정적 여론을 불식시켰다. 취임하자마자 노동개혁에 착수해 병을 고치더니 다시 귀환을 선언했다. 이젠 평생 고용과 자동 승진으로 점철된 요새라 불리는 공직사회 대개조에 나섰다. 2022년까지 공무원 12만 명을 줄이기로 했다. 마크롱이 '프랑스가 돌아왔다'고 기염을 토하던 때 문재인 대통령은 '청년 일자리가 국가 재난 수준'이라며 장관들을 질책했다. 일자리 전광판까지 만들며 청년 일자리 창출을 독려했지만 성과가 없자 애꿎은 장관들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세계 주요 선진국은 경기 개선 훈풍을 타고 완전고용 운운할 정도로 청년 실업률이 회복세인데 한국은 오히려 악화 일로를 걷고 있으니 그럴만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통령의 질책에 공무원들은 아낌없이 돈을 더 쓰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올해 일자리 예산으로 책정된 19조2천억원으로도 모자라 추가 재정 투입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재원으로는 정부가 추진하는 기금이 거론된다. 돈으로 청년 일자리를 사겠다는 발상이다. 트럼프와 마크롱,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비슷한 시기에 취임했다. 트럼프의 취임이 세 달 정도 빨랐다. 이후 트럼프와 마크롱은 경제에 관한한 모범국가를 만들었고 한국은 대통령이 장관을 질책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일자리는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나간 우리 기업을 다시 불러들여야 만들어진다. 그런데 현실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증가로 일자리 감소란 역풍을 맞고 있다. 탈원전에 따른 전기료 인상 요인은 기업의 귀환은 물론 해외기업 유치도 망설이게 한다. 공무원 늘리기는 단기 처방은 될지 모르나 미래 세대엔 두고두고 부담이다. 국가라는 배의 노를 젓는 것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그 배의 키를 잡고 있는 것은 지도자다. 지도자가 키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온 국민이 위험해진다. 지금 그 지도자가 우리가 탄 배의 키보다 북한 김정은이 탄 차의 운전대에 관심이 더 쏠려 있다. 그 바람에 배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다. 한때 한국은 세계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세계 경제성장을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 대통령이 운전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루빨리 능숙한 키잡이가 되어 '한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할 수 있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2018-02-05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우리만 거꾸로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해 미국에선 한 해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생겼다. 반면 실업률은 4.1%까지 뚝 떨어졌다. 최근 17년 사이 최저다. 1년 새 평균 급여는 2.5% 늘었다. 일자리는 늘고 임금도 오르는 선순환이다. 2016년 감소세로 돌아섰던 제조업에서만 지난해 2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 비록 잦은 도발적 언행으로 인기는 바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일자리'는 그렇게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자리가 늘긴 했다. 지난해 12월 총취업자 수는 그 전해 대비 25만3천 명이 늘었다. 그런데 질이 다르다. 증가 폭이 10년 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다. 박근혜 정부 4년간 연평균 취업자 증가 44만 명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실업률은 절망적이다. 6개월 이상 구직 활동을 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소위 장기 백수는 14만7천 명으로 역대 가장 많다. 청년실업률은 3년 만에 9.9%까지 치솟았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9개월이 지났지만 '청년 일자리'가 늘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전광판까지 만들어가며 챙긴 결과치고는 옹색하기만 하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반대로 달린 결과다. 미국이 일자리 창출을 민간 기업에 기댔다면 한국은 관에 기댔다. 미국이 기업을 유혹했다면 한국은 기업을 적대시한다는 의심을 샀다. 거꾸로 가는 것이 일자리뿐 아니다. 과거 전자, 자동차, 제철, 원자력 같은 핵심산업을 키워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 우뚝 선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원전은 세계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거대시장으로 커질 것이다. 그만큼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친환경적인 에너지원을 현재로선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앞으로 20~25년에 걸쳐 총 16기의 원전을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사업비 규모만 100조원을 넘어선다. 석유산업이 중심인 나라가 석유 아닌 원전을 미래 에너지원으로 택했다. 이 원전 수주에 우리나라와 중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뛰어들었다. 하나같이 원전 강국들이다. 이 가운데 탈원전을 선언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러고선 원전을 수주하겠다고 나섰다. 누가 믿어줄 것인가. 폴란드 원전은 이미 중국이 가져갔다. 또 있다. 세계는 감세 전쟁 중이다. 전쟁은 주로 법인세 인하를 두고 벌어진다.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나간 기업을 되돌리려는 전쟁이다. 트럼프는 향후 10년간 1조5천억달러의 세금을 줄여주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자극받은 일본 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최대 10%포인트 낮추기로 했다. OECD 회원국들이 법인세 낮추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19%, 아이슬란드는 12.5%, 헝가리는 9%를 매긴다. 중국은 최첨단 기술산업에 15%의 우대세율을 적용해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말 최고세율(과세표준 3천억원 초과)을 22%에서 25%로 올렸다. 역주행한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최근 발간한 '2017 산업 R&D투자 투자스코어보드'를 보면 우리나라 기업은 불과 70개만 포함했다. 2년 전 80개에서 뒷걸음질쳤다. 일본 365개는 물론 대만의 105개보다 더 적다. 한국기업의 R&D 투자 액수는 불과 1.9% 증가했다. 중국의 18.8%, 미국 7.2%를 크게 밑돈다. 세계 전체 평균 5.8%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계가 4차 산업혁명 관련 정보를 중심으로 R&D 투자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거꾸로 갔다. 세계는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념에 빠져 있다. 전 세계가 미래를 향해 달리는데 우리나라는 과거로 달려간다. 전 세계가 북핵 해결을 위해 공조하는데 우리나라만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에 목을 맸다. 거꾸로 가는 것은 이만하면 족하다. 지나치면 60%가 넘는 지지율은 신기루가 된다. '이념'과 '이상'에 치우쳐 내린 결정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과 후유증을 안겨줄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다.

2018-01-22 00:05:00

이춘수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이종(異種) 보수의 대구 상륙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홍두깨' 같은 정치인이다. 그는 홍두깨처럼 작지만 단단하다. 말은 짧고도 강렬하다. 그의 언행은 상대를 송곳 찌르듯 자극적이고도 흥분케 한다. 사실이야 맞든, 아니든 상대는 크게 분노하고 상처받는다. 그래서 파괴력이 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홍 대표는 비난을 살 만한 정치적 발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못마땅할 때는 삿대질도 곧잘 한다. 제1 야당 대표의 무게감은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점잔 빼고, 때론 답답하기까지 한 대구경북(TK) 국회의원만 봐 온 시도민들에게는 속 시원하다는 느낌도 준다. 홍두깨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풀 먹인 천을 빳빳이 고를 때. 고기를 다질 때, 만두나 국수를 빚을 때 유용하게 쓰인다. 홍두깨가 이러하듯 홍 대표도 보수 진영에서 소금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홍 대표는 또 산전수전 다 겪었다. 권력을 향해 칼을 휘두른 검사, 서울에서 4선 국회의원, 두 차례의 경남도지사, 원내대표와 당 대표 경력이 말해주듯 정세 판단이 빠르고 전투력도 갖췄다. 이런 점에서 기존 TK 보수 정치인들과는 다른 야전형 보수 정치인이다. 이런 홍 대표가 대구에 새 둥지를 틀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홍 대표가 대구 북구을 입성을 공식화한 후 그 지역구의 홍의락 국회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측이 만세를 불렀다는 후문이다. 현지의 여성층과 30, 40대층에서 홍 대표에 대한 분위기가 아주 안 좋은 이유에서란다. 외지에서 정치를 하다 대구에 진출한 유력 정치인들은 다수 있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조순형 전 의원(2004년 17대 총선), 노무현 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 전 의원(2008년 18대 총선),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가 대표적이다. 조'유 전 의원과 김 장관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김 장관은 꽃을 피웠다. 반면 홍 대표는 TK를 자신의 정치 텃밭으로 삼아 차기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홍 대표의 선택은 TK 시도민들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다. 아직은 홍 대표를 TK 리더로 맞이할 준비가 안 된 시도민들에게 곤혹스러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6'13지방선거에서부터 시도민의 순수한 선택이 자칫 여야 정치권이 만든 프레임에 구속돼 'TK의 위대한 수성'이니 '보수의 볼모'니 하는 이분법적 잣대에 매몰될 수 있어서다. 왜 시도민과 지역 정치권이 홍두깨로 한방 얻어맞아야 했나. 온실 속에서 살아온 지역 정치권의 무능과 신념 부재, 몰(沒)유권자 의식 때문이다. 지역에서는 주류인 자유한국당 정치인 어느 누구도 "왜" "무엇을 위해" 홍 대표가 대구에 입성하는지를 묻는 이가 없다. 오히려 줄 서기에 바쁘고, 용비어천가를 부르기에 바쁘다. TK 정치인들이 공천만을 위해, 양지만을 좇았을 뿐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가"라는 골수에 사무친 철학 없이 정치를 해온 업보가 시도민들을 고민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지역 정치권의 자업자득이다. 홍 대표가 정치권을 향해 때론, 유권자를 향해 시도민 정서와 다른 언행을 보였을 때 지역 정치인들이 과연 바른말을 할 수 있을까. 홍 대표는 틀에 박힌 TK 정치인들과는 결이 다르다. 보수지만 왠지 낯선 홍 대표의 출현에 TK 시도민들은 이제부터 깊은 고민에 들어갈 것이다. '보수를 지키기 위해 TK에 입성한다'는 홍준표의 정치에 동의하는 것이 과연 TK는 물론 대한민국의 정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서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고 고달픈 TK 시도민들에게 올해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 그래도 지혜롭게 잘 풀어보자.

2018-01-15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한반도 운전대는 누가 쥐었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를 시사'한 후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2년 전 끊겼던 남북 연락 채널이 복원됐다. 북이 '첫 수소탄 시험 성공'을 주장했던 4차 핵실험 후 끊겼던 채널이다. 9일 판문점에선 남북 고위급 대화가 열리게 됐다. 한반도 운전대론을 주창해 온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이 우리 제의에 호응한 것'이라며 반색이다. 내심이야 어떻든 트럼프 미 대통령도 '대화를 믿는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이처럼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남북대화에 정부가 흥분하고 있음을 읽기가 어렵지 않다. 북한에 한미 군사훈련 연기라는 선물을 안기고 시작한 것부터 그렇다.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지역 도지사는 북 선수단에 '크루즈를 보내주겠다'고 나섰다. '남북대표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동시 입장한다'는 섣부른 환상도 나온다. '책상 위에 핵 버튼을 올려두고 있다'는 위협은 간 곳 없고, 기다렸다는 듯 선물 목록만 펼쳐지는 모양새다. 역사는 어떨까. 남북 관계는 한 번도 그리 녹록한 적이 없었다. 도발과 제재, 대화 제의와 대화, 그리고 더 한 도발로 이어진 역사였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안다면 이번 북의 시사를 두고 운전대를 잡게 됐다며 흥분할 일은 없다. 오히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것이 교훈이다. 북은 지금 5차례에 걸친 핵실험 결과 유례없이 강한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 시간은 우리 편이다. '북한에 최대의 압박을 계속하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백악관이 '트럼프 대통령도 대화를 100% 지지했다'는 우리 정부보다 한 수 위다.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를 처음 선언한 것은 1991년 12월 31일이다. 당시 남한엔 다수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돼 있었고 북한엔 없었다.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 주요 내용은 이랬다. ▷핵무기의 시험'생산'접수'보유'저장'사용 금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핵 재처리 및 농축시설 보유 금지 ▷비핵화 검증을 위한 상호 동시 사찰. 그로부터 26년, 한국엔 핵 배낭 하나 없다. 한국은 약속을 지켰고 북한은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이제 북은 수소폭탄까지 지녔다며 큰소리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 26년은 이런 기막힌 반전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엔 남북대화와 스포츠 교류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북 핵개발의 역사는 남북 스포츠 교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국제대회에서 남북이 처음 단일팀을 구성하고 한반도기가 등장한 것 역시 1991년이다. 그해 남북은 '코리아'라는 명칭 아래 국기 대신 '한반도기'를 들고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온 국민이 금방 통일이 닥친 것처럼 흥분했지만 2년도 안 돼 북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핵개발 의지를 노골화했다. 2006년 2월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도 마찬가지다. 'COREA'라는 이름 아래 한반도기를 흔들며 함께 입장했다. 하지만 5개월이 안 돼 북은 장거리 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석 달 후에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스포츠 교류와 대화는 제재를 무력화하고 긴장의 고삐를 늦추는 데 이용됐을 뿐 핵개발 의지는 단 한 차례도 멈춘 적이 없다. 이제 김정은은 핵과 ICBM의 결합이라는 목표에 바짝 다가서 있다. 그만큼 국제사회의 제재도 숨통을 죄고 있다. 정권 안정을 위해서라도 대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평창올림픽 참가를 택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북이 내민 전략적 대화 카드를 두고 문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게 됐다는 호들갑을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뒷자리에 김정은이 타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우리로 보면 북의 평창올림픽 참가나 남북대화는 오직 북핵 제거를 전제로 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북핵과 ICBM 결합을 마무리할 시간만 벌어줄 뿐이다. 문 대통령이 "저는 과거처럼 유약하게 (남북)대화만 추구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다.

2018-01-08 00:05:00

송힘

[매일칼럼] 알아줄까?

부산 광안리 근처에 복요릿집 골목이 있다. 예전 사무실 근처라 점심때면 자주 복지리를 먹었다. 복어 골목이라고 해서 복요릿집이 5곳 정도 있었는데 유독 한 군데만 줄을 서서 먹는 유명 맛집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남들 따라서 줄을 서서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무실에 손님이 왔는데 그 가게가 예약되는 곳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다른 복요릿집에 손님을 모시고 갔다. 근데 늘 줄 서서 먹던 유명 가게와 맛이 별다를 게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줄 서서 먹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한적한 가게에서 여유롭게 복지리를 즐겼다. 근데 식사를 하는 중에 콩나물 껍질이 나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머리카락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고 복지리에 복어보다 많이 들어가는 게 콩나물인데 콩나물 껍질 한두 개쯤이야. 그런데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콩나물 껍질이 한두 개씩 발견되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예전 줄 서서 먹던 집에서 복지리를 수없이 먹을 때 콩나물 껍질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나? 답은 없었다이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의 비결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나는 그날 분명히 알게 되었다. '콩나물 껍질을 100% 손질한다.' 예술가의 최대 관심사는 '알아줄까?'이다. 연주자는 나의 연주를, 화가는 나의 그림을, 무용가는 나의 춤을 알아줄까를. 처음 기획하고 제작하고 완성하고 무대에, 갤러리에 작품을 올리고 전시하는 내내 이 질문들을 하게 된다. 그런 예술가를 힘 빠지게 하는 말이 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사람들은 몰라"라는 말이다. 예전 다른 지역에서 공연하기로 해서 미리 공연 장소에 무대와 음향을 확인하러 갔었다. 무대는 괜찮았지만, 음향은 공연장에 설치된 것이 연주용이 아니고 연설용이라 음향 기기를 임차해야 할 것 같아 기획하신 분께 음향 렌털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분이 "이제껏 다른 연주팀도 다 이 음향을 사용했었다. 뭘 그렇게 까다롭게 그러느냐. 공연 보러 오시는 분들 시골분이고 노인분들이다. 들어도 잘 모른다. 그냥 해 달라"고 했다. 그 말에 수긍할 순 없었지만 뭐라고 더 이야기하면 정말 까탈스러워 보일까 봐 그냥 그 음향으로 공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은 엉망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소리가 들리지조차 않았다. 공연 후 주최 측에서 연주자에게 나가시는 관객에게 인사를 해주길 원했다. 실패한 공연에 민망함을 무릅쓰고 일일이 관객들께 인사를 드렸다. 그때 많은 관객이 우리에게 연주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음향이 안 좋았다고 예전에도 음향이 말썽이더니 아직도 그렇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랬다. 알고 계셨다. 그리고 알아주셨다. '알아줄 거야'라는 믿음은 예술가를 부담스럽게도, 힘 나게도, 세세하게 완성도를 높이게도 한다. 예술가만 그럴까?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 2018년 힘내자. 세상은 우리의 수고를 알아준다. 송힘

2018-01-04 00:05:00

정창룡 논설실장

[매일칼럼] 왜 지방분권개헌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다. 하지만 사실은 '서울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다. 그만큼 '중앙' 집권과 '수도권' 집중이라면 우리나라를 따를 나라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를 일찌감치 간파한 이가 주한 미국 외교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이었다. 그는 1968년 한국사 연구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책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국어 초판 2000년)를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나라 정치 체제를 두고 "중앙집권체제가 수도권 집중을 초래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정치 체제"라고 갈파한 바 있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매출 기준 우리나라 100대 기업 중 86개 기업의 본사가 수도권(서울 70개)에 있다. 예금의 70%를 가진 곳도 수도권이다. 2015년 기준 연구개발 투자(R&D)의 67%, 문화시설 역시 67%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전국 20대 대학의 80%가 몰린 곳도 수도권이다. 49.5%의 인구가 49.4%의 지역내총생산(GRDP)을 차지한다. '서울공화국'이란 말에 어찌 토를 달 것인가. 폐해가 적지 않다. 중앙 집권과 수도권 집중 완화 요구가 쏟아진다. 그래도 완화될 조짐은 없다. 2000년대 이후 수도권의 GRDP 성장률은 비수도권의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웃돌고 있다. 2014년 이후엔 성장률 격차가 1% 이상으로 더 벌어졌다. 고학력의 젊은 인력과 고급산업기술 인력이 수도권으로 이동한다. 2010~2016년 고급산업기술 인력 순증가의 59.1%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수도권 편중은 국가 균형 발전과는 상극이다. 2009년 EU 지역위원회는 지방분권지수와 국민소득 간에 정비례 관계가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지방분권이 잘된 국가일수록 국민소득이 높고 덜 된 국가일수록 낮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가 2006년 국민소득 2만달러에 들어선 지 10년이 넘도록 소득 3만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누구보다 지방분권에 적극적이다. 내년 지방선거에 맞춰 지방분권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늘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 때의 아픈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노 정부는 2005년 지방분권을 한답시고 빈곤층, 노인, 장애인 등에 대한 순수 복지사업 67개를 지방에 이양했다. 재원을 마련한답시고 '분권 교부세'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후 5년간 분권교부세 수입은 연평균 8.7%가 증가한 반면 복지비 지출은 연평균 18%씩 증가했다. 지방분권이란 허울 아래 지방재정난은 가중된 것이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이를 두고 '지방분권 사기극'이라고까지 힐난한 바 있다. 이런 사기극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지방재정권을 비롯한 지방분권이 개헌에 명기돼야 한다. 지방자치의 원조 유럽지방자치제도 헌장은 형식이 아닌 실질적 지방자치제도 보장을 위해 4가지 필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 4가지 중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지방자치정부의 기본적 권한과 책임 범위를 반드시 헌법 또는 법률로 정해야 한다는 것(제4조 1항)과 지방자치정부가 자율적으로 책임과 권한을 수행할 수 있는 재정적 자원(제9조), 자율적 인적 자원의 확보(제6조) 등 자치권 행사에 필수적인 수단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자치조직권, 자치재정권에 대한 규정이다. 우리나라 현행 헌법은 제117조와 제118조에서 지방자치를 규정하고 있긴 하나 지방정부를 자치의 주역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중앙정부의 하급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지방자치는 지방마다 다른 특성을 반영하고 이를 통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정책을 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지방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는 역할을 찾고 그 역할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지방 고유의 독창성이 다양성으로 이어지고 다양성이 국가 전체적으로도 조화를 이뤄야 국가 경쟁력이 커질 수 있다. 지방분권개헌이 필요한 때다. 우리는 지금 그런 골든타임을 보내고 있다.

2017-12-04 00:05:00

이동관 편집부국장

[매일칼럼] 복수 수능은 어떤가

지진으로 1주일 미뤄 치러진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큰 탈 없이 지나갔다. 천재지변으로 수능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1주일 연기 조치에 수험생도 학부모도 지진으로 놀란 국민들도 모두 술렁거렸고, 일부에서는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참 잘한 결정이었다. 연기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도 안 된다. 올해는 이렇게 넘어간다고 치자. 그럼 내년에는? 후년에는? 비단 지진만이 아니다. 천재지변은 이번 지진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 천재지변뿐인가. 각종 인재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수능시험을 연기시킬 만한 요인은 도사리고 있다. 선례가 생겼으니 두 번 다시 연기란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수능시험은 대한민국 대학 입시의 근간이다. 논술, 학생부종합전형 등 다양한 보완재와 대체재들이 그럴 듯한 포장으로 나오지만 그것들은 모두 수능시험의 '파생상품'일 뿐이다. 본질은 역시 수능이다. 수능이 잘못되면 다른 걸로 만회가 잘 안 된다. 이날 시험을 망치면 1년 뒤를 기약해야 한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도 1년, 감기가 들어도 1년, 배탈이 나도 1년이다. 신변에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이다. 그러니 알아서 잘~하라고? 수험생에게나 학부모에게나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세상사 다 그런 거라고? 10대 후반 청소년에게 그건 너무 심하다. 수능의 충격을 완화시키기거나 분산시키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어설픈 입시정책의 변화나 수술이라면 곤란하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사교육업자들만 배불리는 일의 반복이라면 더더욱 안 된다. 창의적이고 융합적이고 21세기적인 인재를 기른다는 턱도 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나온 '듣보잡' 입시제도가 번번이 금수저나 소수를 위한 전형으로 변질되었음을 보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일이 커지게 된 원인은 단 하나다. 시험을 단 하루, 한 번만 치르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꼬박 8시간을 한자리에 앉아서 200개 안팎의 문제를 푼다. 그걸로 초중고 12년의 학습 성과 전체를 재단하니까 그렇다. 곳곳에서 무리수가 발생하는 거다. 수능의 이전 버전인 예비고사와 학력고사까지 포함하면 수십 년 동안 변화가 없다. 사실 고3 2학기가 되면 수능을 치르기 전까지는 시험 응시 능력 배양 기간이다. 학과목 진도는 여름방학 때쯤이면 대부분 끝이 난다. 또 진도 맞추기는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수능 날짜를 앞당겨도 된다는 말이다. 입시 사정을 위한 수능 데드라인이 11월이라면 그때까지 여러 번 치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두 번도 좋고 세 번도 좋다. 많으면 더 좋다. 전국 단위 모의고사 치르듯이 치르면 된다. 지금도 6월 모의고사와 9월 모의고사는 수능처럼 실력을 전국 단위에서 점검한다. 그렇게 수능을 여러 번 치르자는 거다. 여러 번 중에 제일 좋은 성적을 자기 성적으로 하면 된다. 평균도 좋다. 매년 11월이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드는 부담과 중압감을 분산시키거나 덜어주자는 거다. 시험 한 번 잘못 친다고 아이들 인생이 종 치는 거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제도가 아이들에게 그런 생각을 주입시켰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잘 치면 된다는 걸 가르치는 것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가르침이다. 인생이 '한 방'이 아니고 오래오래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도 수능은 한 번보다는 여러 번 치르는 게 맞다. 교육 당국은 시험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복수 수능에 난색을 표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문제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불가 의견을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도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육 당국인가? 포항 지진과 수능 1주일 연기 사태가 수능 복수 실시라는 대입제도의 혁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2017-11-27 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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