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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 누가 비열한가?

'트로츠키주의자'의 정의(定義)는 레프 트로츠키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나 분파쯤 될 것이다. 트로츠키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매우 길고 복잡한 서술이 필요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서구에서의 혁명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는 '영구혁명론'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러나 레닌이 죽은 뒤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트로츠키가 패하면서 트로츠키주의는 그런 가치중립적 의미를 박탈당하고 '배신자'와 동의어가 됐다. 이때부터 각국 공산당은 자신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공산주의자를 '트로츠키주의자'인지와 상관없이 '트로츠키주의자'란 딱지를 붙였다. '트로츠키주의자'는 만능패가 된 것이다.대표적인 예가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반란군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한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의 숙청이다. POUM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트로츠키의 비서를 지낸 적이 있지만, 1935년 트로츠키와 결별했다. 그럼에도 당시 소련의 지도를 받고 있던 스페인 공산당은 공산당 이외의 좌파 세력 제거를 위해 POUM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말살했다. 안드레스 닌도 체포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스탈린이 보낸 하수인에 의한 암살도 그중 하나다.1930년대 공산권을 횡행했던 '트로츠키주의자'와 비슷한 만능패가 21세기 한국의 대선판에도 등장하고 있다. 바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자신의 안보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꺼내 드는 '색깔론'이다. 그 방식은 자동반사적이다. 불리하면 "또 색깔론이냐"는 식이다.문 후보는 "북한이 주적(主敵)이냐"는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질문에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국방부가 할 일이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보수 진보를 떠나 문 후보의 안보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문 후보 측은 "현재 국방백서에서 주적 개념은 삭제된 것"이라며 "이 문제는 안보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색깔론에 가까운 정치 공세"라고 했다.'팩트'부터 틀렸다. '주적'이 '우리의 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적'이 삭제됐기 때문에 북한이 주적이냐고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주적'과 '우리의 적'이 어떻게 다른지 확실한 개념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국방백서가 '우리의 적'으로 명시한 대상은 '북한 정권과 북한군'뿐이다. '주적'이나 '우리의 적'이나 그게 그거라는 것이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식으로 말한다면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라는 기의(記意)의 기표(記標)가 '주적'에서 '우리의 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 노무현정부가 북한에 물어보고 기권했다는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의 주장에 대해서도 문 후보는 '색깔론'으로 비켜간다. 문 후보는 문제의 주장이 담긴 송 전 장관의 회고록이 공개된 뒤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송 전 장관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건'을 다시 공개하자 문 후보는 '비열한 새로운 색깔론'이라고 했다. 23일 TV토론회에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거짓말을 하면서 계속 말 바꾸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 데 대한 반응도 "구태의연한 색깔론"이었다.색깔론은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도자의 색깔이 국가의 정책과 국민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면 '색깔 검증'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색깔론'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색깔을 감추기 위한 '역색깔론'일 뿐이다. 그러면 문 후보의 색깔은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일까? 문 후보의 TV토론단장인 진성준 전 의원의 말은 그 판단 기준이 될 듯하다. 그는 22일 "북한 인권결의안에 대한 입장을 북한 당국에 물어봤다 쳐도, 그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라고 했다.이쯤 되면 누가 비열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 후보의 안보관을 검증하려는 측이 비열한가 아니면 그것을 '비열한 색깔론'으로 모는 문 후보가 비열한가?

2017-04-25 00:05:24

[세풍] 누가 독립운동하랬냐

"짐(朕)은 다시 말하지 않겠으니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500년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눈치를 보며 조칙(詔勅)이라는 임금의 말을 백성들에게 여럿 내렸다. 군대를 없애라는 조칙도 있다. 1907년 7월 31일이다. "우리 군대는…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다.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일제의 침탈에 순수 민병(民兵)인 의병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8월 1일 군대 해산으로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해산 군인까지 더해 전국이 의병 '소요'로 들끓자 9월 18일 조칙을 또 내렸다. "무장을 풀고 집에 돌아가서… 부모 처자와 함께 태평스러운 행복을 함께 누릴지어다"며 타일렀다. 의병을 해산하고 일본군과 싸우지 말라는 뜻이었다.그래도 13도 의병이 이어지자 12월 13일 '반란으로 소요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백성'과 '무도한 백성'에게 귀순(歸順)의 조칙을 다시 내놓았다. "날씨는 춥고 해가 저물어 얼음과 눈 속에서 허덕"이느라 "부모는 동구에 나아가 울고 처자들은 배고파 울면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귀순하라 했다. 그러면서 "순종하지 않는 자는 법에 의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겁까지 줬다.이토 통감의 지시(?)에 순종한 순종의 왕명에도 말발이 먹히지 않자 일제는 앞선 화력과 대규모 병력, 그동안 기른(?) 한국인 앞잡이를 내세워 대토벌에 나서 완전 진압을 눈앞에 두었다. 일제는 순종의 이용 가치도 떨어짐에 따라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통째로 삼켰다. 경술국치 패망, 흑역사(黑歷史)의 시작이다.그런데 지금, 대구에서는 순종이 부활하고 있다. 대구 중구청이 지난 2013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70억원을 들여 순종을 기리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다. 이는 순종이 1909년 1월 7일 첫 방문에 이어 부산과 마산을 둘러보고 12일 다시 대구에 들른 일을 기념해서다. 그러나 대구에 와서 순종은 '소요' 때문에 골치였다. 그래서 "지방 소요는 가라앉지 않고 서민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니 가슴 아프다"며 '난국을 구하려' 이토 통감과 남쪽을 둘러보고 있다는 조칙을 발표했다.순종의 대구 방문은 오히려 이토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 기회였다. 이토는 일본 기녀를 끼고 놀았고 일장 연설의 호기까지 부렸다. 당시 대구 일본인들은 환호했고 숙소에 이르는 길을 화려한 등불로 장식했다. 대구에서 맘껏 부린 이토의 호기는 거기까지였다.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손에 의해 중국 하얼빈에서 악행의 심판을 받아서다.이런 흑역사 기리기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대구에서 참으로 믿기 어려운 기막힌 일이 지난주 매일신문에 보도됐다.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망한 나라를 구하겠다며 젊음을 내던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이상정 장군 손자의 힘든 삶이다. 일흔을 눈앞에 둔 손자 이재윤(69) 씨. 그는 1950년 3세 때 소아마비로 장애가 된 불편한 몸으로 월세방에서 힘겨운 삶을 버티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특히 그의 삶이 아린 것은 마침 대구 도심에서 할아버지 4형제(상정'상화'상백'상오)와 이들을 뒷바라지했다는 종증조부 이일우 등 소위 이일우 집안을 일컫는 '이장가'(李庄家)의 업적을 조명하는 행사가 열리는 터여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올 4월은 정부가 할아버지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아 온 나라에서 기리는 달이지 않은가.70억원짜리 '순종황제어가길' 조성 사업으로 이일우가 운영한 우현서루 터와 여러 곳을 새 단장하느라 돈이 아낌없이 쓰이고 있다. 이장가 사업 홍보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는 누구를, 무엇을 위함인가. 그나마 시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 어제 손자에게 성금을 전달했다니 다행이다. 이것만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가슴 답답한 현실이다. 박중양과 이완용이 "그래, 누가 독립운동하랬냐"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듯하다.

2017-04-18 00:05:05

[세풍] 레이저 눈빛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는 눈빛이 날카롭기로 유명했다. 일설에 의하면 심약한 사람은 그 눈빛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꺾였다고 한다. 안광(眼光)에 관한 한 속칭 '넘사벽'인 황희 정승을 좌절시킨 존재가 있었다. 뜻밖에도 사람이 아니라, 삽살개였다. 황희의 형형한 눈빛을 받고도 삽살개는 전혀 꿀리지 않고 매섭게 황희를 노려봤다. 삽살개가 귀신을 쫓는다는 옛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삽살개를 눈싸움으로 제압하지 못한 황희는 한탄했다. "나도 이제 죽을 날이 다 되었구나!"황희 정승은 타인의 눈을 수시로 응시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웬만해서 남과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쳐서는 안 된다. 동물 세계에서는 눈을 응시하는 행위 자체가 싸우자는 의사 표시로 해석되며 여기에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동물이든, 사람이든 노려보는 시선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자라면 그 눈길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는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의 눈길을 경험했던 선사시대 인류의 본능 탓이다. 포식동물의 눈동자는 수직형인데 아주 매섭게 느껴진다. 수직형 눈동자는 전방의 물체에 집중하는 데 유리하게끔 진화된 결과다.반면,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는 순해 보인다. 소나 말과 같은 초식동물의 눈이 그렇다. 둥그런 눈동자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초식동물의 눈은 포식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내기 쉽게끔 진화했다. 크고 둥근 눈동자에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초식동물의 눈길 자체가 위협이 아니라는 본능적 직감 때문이다.눈은 영혼의 창이자 드러난 뇌라고 했다. 눈동자로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기에 우호적인 마음을 눈길에 담는 것이 인간관계에 좋다. 그런데도 눈에서 레이저라도 쏠 듯이 사람을 노려보는 이들도 있다. 직장 상사가 그렇고, 을에 대한 갑의 눈길이 그렇다.레이저 눈빛에 관한 한 박근혜 전 대통령만큼 많이 회자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레이저 눈빛을 받고 등골 오싹한 경험을 한 각료들이 적지 않은데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정유라 승마 지원에 대한 불만과 질책을 듣고 "대통령이 화났을 때 눈빛이 레이저를 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측근들에게 토로했다고 한다.그러나 눈에서는 레이저는커녕 그 어떤 빛도 나올 수 없다. 눈빛은 눈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경험한 레이저 눈빛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막강한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고 강한 사람이 노려보면 사람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게 돼 있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슈퍼 갑 중 슈퍼 갑인 이 부회장 역시 알게 모르게 아랫사람들에게 눈빛 레이저를 쏘아댔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레이저 눈빛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레이저 눈빛을 가능케 하는 것은 권력이고 그 이면에 권위주의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황희 정승도 눈빛이 날카롭다고 소문날 수 있었던 것은 왕 못지않은 그의 권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세가 사람에게 통했는지는 몰라도 물빛 모르는 삽살개에게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 아닐까.여기 레이저 눈빛에 관한 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다. 지난해 11월 검찰에 출두했을 때 그는 혐의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는 기자를 향해 강렬한 눈 레이저를 쏘아댔다. 청와대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야 그의 눈빛이 오금을 저리게 했을는지 모르지만, 끈 떨어진 그가 쏘는 눈빛은 그저 예의 없는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최근의 세 번째 검찰 출두에서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친정인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마저 청구된 상황이니 눈빛도 힘을 잃을 만하다. 그래서 화무는 십일홍이고 권력은 무상한 것이다.

2017-04-11 04:55:01

[세풍] 대선을 보는 또 다른 시각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니 오래전에 맛보았던 낭패감이 다시 떠오른다. 누가 당선될지도 모르면서, 기자랍시고 함부로 떠들던 그 치기와 미숙함을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진다.2002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퇴직한 선배 언론인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분이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 대선에 누가 당선될 것 같은가?" 필자는 '왜 이렇게 뻔한 질문을 하시나'는 생각에 말장난이나 유머를 날리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멈칫했다. 그러면서 "해보나 마나 같은데요. 이회창 씨가 되겠지요"라며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대선이 서너 달 남은 때였지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경쟁은 거인과 코흘리개 아이의 싸움처럼 보였다. 이회창 씨는 이미 대통령이 된 듯 선거일만 손꼽아 기다렸고, 노무현 씨는 김대중 대통령 아들의 비리사건, 지방선거의 참패에다 당내 내분까지 겹쳐 전전긍긍했다. 여론조사 예측도 이회창의 승리 일색이었다. 이런 배경을 아는 필자의 대답은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선배 언론인의 예측은 달랐다. "내 판단으로는 노무현 씨가 이길 거야."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분의 말씀은 이랬다. "월드컵 때 붉은악마를 떠올려봐. 그 젊음의 에너지와 열정이 이제 어디로 표출될지 상상해보게."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해 투표소에는 젊은 유권자들이 줄을 서 기다릴 정도였으니 그분의 예측은 너무나 정확했다. 노무현의 당선은 기적이 아니었고,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언론에선 노무현의 매력이나 이회창의 실책이 승부를 가른 요인이었다고 떠들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본질은 아니었다. 그해 월드컵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젊음의 열정과 에너지는 기록에도, 통계에도, 수치에도 잡히지 않지만, 한국 정치의 향방은 물론이고 국가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다. '젊은이의 열정은 거칠고 미숙한 듯하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다.흥미로운 사실은 '젊은 세대의 반란'이 15년을 주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2002년 월드컵, 2017년 촛불집회는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씨를 당선시켰고, 2002년 16대 대선은 노무현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났다.이번 대선에서 젊은 세대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촛불집회에 모인 젊은 층의 열정을 떠올리면 그 해답은 분명하다. 젊은 세대는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련하는 기회를 잡았다.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이 현실 정치에 눈뜨면서 적극적인 투표 행사층으로 바뀔 것이다. 이번 대선은 젊은 세대의 성향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나이 드신 유권자에게는 기분 나쁜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대선의 주연은 젊은 층이다. 젊은 표심이 움직이면 진보 색채의 후보 당선으로 이어질 테지만, 좋든 싫든 대한민국의 운명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15년 주기론'은 뜬금없는 논리지만, 대통령 선거 세 번 하고 나면 사회적인 격변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 모순과 병폐가 집적돼 있다가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후진적 구조를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결혼과 경제적 불평등에 고민하면서 극심한 좌절과 분노를 맛보고 있는 세대다. 촛불집회는 평화롭게 끝났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사정과 기득권층의 이기주의를 볼 때, 다음에는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차기 대통령은 젊은이의 분노와 좌절을 보듬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젊은 세대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2017-04-04 04:55:02

[세풍] 알뜰한 지도자

버락 오바마는 성공한 대통령이다. 미 의회방송(C-SPAN)이 얼마 전 역사가와 정부 전문가 91명에게 물은 결과 역대 미국 대통령 중 12번째로 손꼽았다. 케네디나 레이건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첫 흑인 대통령의 지도력과 도덕성 등을 높게 쳤다. 이런 호평은 그가 괜찮은, 매력 있는 정치 지도자라는 뜻이다.일반 미국인 대상의 조사 결과도 다르지 않다. '현직보다 나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취임 직후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30%대로 추락했다. 반면 옷을 벗은 오바마 지지율은 60%대를 넘나든다. 프랑스에서 수만 명이 "제25대 공화국 대통령으로 모시자"며 온라인 청원에 서명할 정도면 속된 말로 '그놈의 인기'라는 말도 나올 법하다.돌이켜보면 대통령에 도전한 오바마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이상한 이름만큼 생경했다. 2008년 선거 때 민주당 분위기는 싸늘했다. 저평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롱하고 비판했다. 러닝메이트인 조 바이든 부통령은 오바마와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 빌 클린턴은 대놓고 깎아내렸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 커피 심부름이나 했을 인물"이라며 비아냥댔다. "피부색이 너무 검지 않고 니그로 방언도 쓰지 않는다"며 은근히 무시한 민주당 거물급 인사도 있었다. 기자들이 미국 대선 막후를 조명한 책 '게임 체인지'에서 이 에피소드를 공개해 파문이 컸다.대선 후보 오바마는 조직력도 처졌다. 하지만 미국의 정신과 비전, 희망과 통합을 강조하며 침착하게 선거 캠페인을 진행했다. 오바마 캠프는 고비 때마다 단결했고 변화를 외쳤다.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의 오바마는 힐러리 대세론도 무너뜨렸다. 공화당은 적수조차 되지 못했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체면을 구긴 매케인 후보나 '급조된' 세라 페일린은 오히려 오바마를 돋보이게 했다. 말 그대로 '포일(Foil) 효과' 수준이었다. 오바마의 승리는 권력이 아니라 미국을 본 결과다. 유권자들은 온유한 자신감과 진정성이 배어 나오는 오바마의 맑은 눈빛과 미소 띤 얼굴, 울림이 큰 연설에 표로 화답했다.재임 중 공화당이라면 치를 떨 만큼 분노하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 언제든 적에게도 손을 내밀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는 백악관의 말단 직원, 소시민 누구와도 주먹을 부딪치며 소통했다. 정중하면서도 소탈하고 인간미가 넘쳤다.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끈 리더십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8년 임기를 마무리한 오바마에게 허접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우리 대선이 코앞이다. 장미꽃이 한창인 5월에 치른다고 '장미 대선'이라고 부르지만 장밋빛 미래를 여는 선거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비정상의 국가 시스템을 정상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도자가 뽑힌다면 만족이다. 적어도 물결을 잘 살피고 배를 바르게 몰아가는 선장이면 됐다.2017년 현 대한민국이 바라는 지도자는 프랑스 대혁명 초기 '국가가 파산했다'라는 연설로 주목받은 콩트 드 미라보 같은 인물이 아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현실을 꿰뚫어보고 잘못된 것을 하나씩 바꿔나가는 지도자, 신중하면서도 바른 결단력을 가진 '알뜰한'(참되고 지극한) 대통령을 원한다.문재인 후보가 대세론을 업고 대선 레이스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그가 국민을 풍파로 몰아넣지 않을 지도자인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 "검증된 후보"라고 말하지만 글쎄다. 대다수 국민은 그의 리더십과 비전, 도덕성과 국정 수행 능력을 알지 못한다. 그를 떠받치는 세력의 극성맞음 정도만 안다.40여 일 후 장미 대선이 국민이 진정 주인 대접을 받는 선거가 될지, 아니면 노랫말 처연한 '봄날은 간다'를 읊조리는 선거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겨우 악몽에서 벗어난 국민이 또다시 가위눌림에 허우적댄다면 '봄날'은 없다.

2017-03-28 04:55:05

[세풍] 文의 이중 잣대가 적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진(自盡)은 계산한 것이라는 손혜원 의원의 발언은 '사건'이었다. '사건'인 이유는 '천기누설'이기 때문이다. 천기란 문재인과 그쪽 진영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손 의원의 발언은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해줬다. 손 의원을 포함해 그 누구도 노 전 대통령이 '계산'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계산이 사실인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그들의 방식이다. 그 방식이란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득이 되느냐를 계산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쯤 될 듯하다. 그들은 무슨 소리냐고 눈을 부라리겠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불복 예고'와 '승복'을 오간 그들의 언행은 이를 잘 보여줬다.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한 뒤 그들의 입에서 일제히 나온 말은 '승복'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사저(私邸)로 퇴거하면서 기대했던 "승복" 대신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하자 문재인은 "국민과 헌법에 대한 모독"이라며 "사죄와 승복"을 요구했다. 촛불집회에 빠짐없이 나가 "탄핵 인용"을 선동하고, "기각이면 혁명밖에 없다"며 헌재를 겁박했음을 상기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는 헌재가 '기각'이나 '각하'를 결정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왔을지를 가늠케 한다. '불복의 촛불'로 헌재를 태워버리려 했을 것이다.이러한 '선택적 승복'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북한은 북한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종북주의자들의 '내재적 접근'이다.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보면 북한은 전혀 이상한 나라가 아니듯이 '문재인들'의 언행도 같은 도구상자에 넣어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일관된 논리는 우리에게 득인가 실인가라는 '계산'이고, 이는 그들의 '세계'에서 공기만큼이나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그 자체로 존중하고 따라야 할 근본적 가치나 규범은 없다. 우리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다. 탄핵 심판도 마찬가지다.노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문재인의 소회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지난 대선 출마를 앞두고 펴낸 자서전 '운명'(2011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는 다행히 기각됐다. 하지만 만약 인용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실제로 헌법재판관 2명은 인용 의견이었다. 같은 의견을 가진 재판관이 다수였다면 대통령은 탄핵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줬을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이 논리대로라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은 정당하지 않음은 물론 앞으로도 다른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도 탄핵할 수 없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고 헌재 재판관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엄청난 결론에 이른다. 재판관을 투표로 뽑지 않는 한 헌재는 존재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그러나 문재인은 그렇게 정당하지 않은 헌재의 판결을 쌍수로 환영했다. 2004년 노 전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자 "건강한 헌재의 결론이 일반 국민의 상식과 똑같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같은 해 노무현정부의 행정수도 이전에 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리자 180도 달라졌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에 맞서는 것이다."이뿐만 아니다. 박근혜정부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재에 청구했을 때 문 전 대표는 정부의 '성급함'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석기 내란 음모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보지도 않고 해산을 청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탄핵에서는 전혀 달랐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시작도 안 했다. 그럼에도 탄핵을 밀어붙였다. 참으로 편리한 이중 잣대다. 그래서 문재인의 승복 요구는 공허함을 넘어 기만적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보고 배울까 겁난다. 문재인은 적폐 청산을 얘기하지만 자신의 이중 잣대부터가 적폐다.

2017-03-21 04:55:03

[세풍] 물망(勿忘)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인을 여러 번 만났다. 유학과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주변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연히 국내 정치 관행(?)에 어두웠다. 2006년, 선거에서 공천을 받을 때 일이다. 당시 공천 특별 헌금이 필요하다는 당 간부의 귀띔에 내키지 않았지만 5천만원을 우선 입금시켰다. 그런데 며칠 뒤 깜짝 놀랐다. 은행 통장으로 5천만원이 고스란히 송금됐기 때문이다.사연을 알아본 결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돈 공천 불가 방침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박 전 대통령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생각하며 빛바랜 오랜 은행통장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불통'(不通)과 '수첩공주' 등과 같은 여론의 비난과 비판이 난무할 때도 그랬다. 그에게 박 전 대통령 이미지는 세상을 뒤덮은 부정적인 소문에도 여전히 깨끗한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과 탄핵 심판 과정에서 불거진 부정과 비리 의혹이 세상에 드러난 지금 그의 심정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우리 역사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이들로 이뤄진 위정자들의 부패와 비리는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이다.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흘러도 변함없다. 그만큼 뿌리가 깊고도 넓다. 고조선 시대 팔조금법(八條禁法)이 생긴 이래 처벌도 다양하고 많아졌다. 기록이 시작된 이래 부족했던 적이 없다. 되레 반대였다. 의도적이었지만 그래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전한 우리 자료에는 유독 부패와 비리 이야기가 넘치고 남는다. '지방수령을 한 번 하면 3대(代)가 지낸다'거나 '관찰사 특히 경상도관찰사를 한 번 지내면 7대(代)가 먹고산다' '관리에게 진공(進供)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등의 기록이 그렇다.경계 글도 넘쳤다. 조선 8도(道)에서 가장 크고 넓은, 72고을의 경상도 감영이 그렇다. 물(?)도 좋은 만큼 집권 세력의 관리가 선호한 곳으로 비리도 당연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최고 관리인 관찰사가 머물던 대구감영(監營)에 조심하라는 글까지 내렸을까? '네가 받는 월급은 백성의 기름이고(爾俸爾祿民膏民脂), 아래로 백성을 괴롭히기는 쉬우나 위로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네(下民易虐上天難欺)'라는 글이다.이런 우리의 부패 역사로 1~16대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비리 척결을 약속했다. 물론 지켜지지 않았음을 국민들은 경험했다. 그래서 17대 이명박'18대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때 직접적인 부패 비리 근절 약속이 없어도 무신경했다. 약속해도 지켜지지 않아서다. 어김없이 17'18대 두 직전 대통령 재임 시절, 비리는 터졌고 뭇 측근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지금도 그렇다. 박 전 대통령 관련 비리는 재판 중이다. 박 전 대통령도 숱한 의혹과 관련한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다. 앞선 정치인처럼 박 전 대통령을 깨끗한 정치인 상징으로 여긴 국민 심정은 참담하다.역대 대통령의 수난사는 왜 못 막을까? 2012년 12월, 서울지사장 재직할 때 경기도 파주의 나남 출판사 조상호 대표와의 만남이 떠오른다. 처음 만난 필자에게 3권짜리 '소설 징비록, 왜란'을 주면서 독후감을 부탁했다. 필자의 독후감은 '물망역사'(勿忘歷史) 즉 '역사를 잊지 말자'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조 대표의 미소가 생각난다.필자는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작가가 소설 끝에 쓴, 징비록 저자 류성룡이 1607년 66세로 죽기 직전, 선조에게 올린 유소(遺疎)에서 '난리는 언제나 일어날 것이니, 먼 장래까지 대비하소서. 신하들을 깊이 관찰하시어 바른 정사를 세우소서. 백성을 고이 기르시고 어진 이를 등용하소서. 군정을 밝게 하시고 훌륭한 장수를 골라 쓰소서'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아서다.그렇다. 대비는 지난 잘못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부패와 비리도 다르지 않다. 이번 대통령 탄핵과 파면에 이르기까지 저질러진 잘못과 비리도 잊지 않으면 충분히 처방이 될 것이다. 물망 최순실, 물망 탄핵. 이것만으로도 뒷사람 경계에 모자라지 않는다.

2017-03-14 04:55:01

[세풍] 김관용의 대망

언론사에 있으면 정보를 많이, 그리고 깊숙이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최근 지인 여러 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김관용 경상북도지사가 대권에 도전한다는데 출마하려는 진짜 이유가 뭐요?"누가 보더라도 김관용 도지사의 대권 도전이 무모하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는 질문이 아닌가. 지금의 여론 지지율로 볼 때 유력 주자로 평가받지 못하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 왜 나서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세간의 인식을 담은 물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 지사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나 역시 아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다.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가장 정확하겠지만 요즘 김 지사가 대권 행보하랴, 도정 챙기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고 하니 연락 닿기가 쉽잖다. 또한 대권 도전 의사를 이미 내비친 마당에 면전에서 그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결례일 수 있겠다 싶어 결국 간접 취재에 나섰다. 경상북도 고위 공무원이나 도지사 측근이라 불릴 만한 인사를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변은 거의 비슷했다. "대권 도전 의지가 아주 강하다." "스스로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김 지사가 얼마 전 간부 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대권 도전에 대해 냉소적인 공무원들이 많다며 한 소리 했다고 하더라."적어도 김 지사의 대권 도전은 '쇼'가 아닌 것 같다. 3선 임기 말에 접어든 요즘 '도정 레임덕'을 막기 위해 대선 출마 카드를 만지작거린다거나 퇴임 이후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추측은 그의 내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이다.항간의 시선과 달리 김 지사 본인은 이번 대선을 해볼 만한 승부처라고 믿으며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해온 것 같다. 이런 자신감은 그의 정치 여정과 무관치 않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 유일무이한 6선 단체장(기초 3선'광역 3선)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치러진 6번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이다. 구미시장 3선을 끝내고 도지사 선거 출사표를 던질 때에도 친이계 후보에 뒤진다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만류했지만 경선에 나섰고 판세를 뒤집어 도지사에 당선됐다.단체장으로 보여준 역량과 뚝심을 볼 때 정치인으로서 그는 부족함이 없다.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과 이슈 중심에 서는 감각도 뛰어나다. 또한 목표를 설정하고 나면 될 때까지 집중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경북도청 이전을 임기 내에 이룬 것만 보아도 그렇다.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연설 솜씨가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구미시장에 처음 출마했을 때 대중 앞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른 경험을 한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연설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연설 강사로부터 특별레슨까지 받았다.김 지사는 박근혜정부의 실정으로 여론이 극히 악화돼 있지만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면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선거가 시작되면 보수 성향 표심이 집결하면서 박빙의 싸움이 될 것이고 보수 진영 단일 후보가 되기만 하면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것이 그의 판세 분석이다. 향후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대구경북 입지의 급격한 약화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경북도지사가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것 자체도 지역에는 나쁜 그림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인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무엇보다 'TK 3선 광역단체장'과 '친박' 타이틀이 지금까지는 그의 정치적 자산이었지만 대권 가도에는 큰 핸디캡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구경북이 아닌 타지역에서 대중적 인지도 정체 현상도 넘어야 할 산이다. 김 지사보다 늦게 대선 판도에 뛰어든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지지율이 두드러지게 오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보수 진영 경선을 통과할 비책과 정치적으로 새로운 핵심 브랜드 발굴이 김 지사에게는 절실해 보인다. 제19대 대선에서 대구경북의 광역단체장이 군소 후보 취급을 받는 일만은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2017-03-07 04:55:01

[세풍] 대구와 부산, 그 차이는?

대구와 부산. 가깝고도 먼, 미묘한 관계다. 같은 경상도여서 뭔가 동질감이 있을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국책사업이나 경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으니 감정의 골이 자꾸 패는 듯하다.지난해 대구와 부산은 영남권 신공항을 두고 충돌했으나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났다. 부산의 판정승이었다. 반면, 대구는 'K2'대구공항 통합 이전'이라는 다소 황당한 결과물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 민심을 달래기 위해 내려준 것이 이전터를 팔아 그 비용으로 공항을 옮기라는 결정이었다. 군공항이전특별법에 따른 '기부 대 양여' 방식이어서 한 푼의 국비 지원도 없다. 대구로서는 하늘길을 열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이를 수용했지만, 그 과정은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천문학적인 이전 비용 7조2천50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전터를 아파트'상가 부지로 팔아야 하고, 건설비 선(先)조달을 위해 대구시의 지급보증까지 필요해 잘못하다간 대구 재정이 파탄날 수 있다. 정권을 창출해놓고도 혜택은커녕 이런 대접을 받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만, 대구 사람의 정서가 워낙 합리적(?)이다 보니 그냥 넘어갔다. 여전히 '법에 따라야 한다'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들먹이며 자위하는 분위기를 보이니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이성적이라고 해야 할지, 바보스럽다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부산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대구 통합 신공항 건설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대구의 통합 신공항을 김해 신공항 성장의 걸림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산의 한 유력 일간지는 2월 24일 자에 대구의 통합 신공항 건설에 대한 기사를 1, 3면에 걸쳐 크게 보도했다. 기사 제목부터 '김해' 대신 대구 신공항,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뽑았다. 기사는 '정부가 김해공항 확장을 결정해놓고, 대구의 통합 신공항을 크게 지으려고 하니 정부에게 속았다'는 내용이다. 대구'경북에는 신공항이 필요 없으며, 가덕도 신공항을 재추진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언론계에서 사용하는 속어 가운데 과장'뻥튀기를 뜻하는 '초를 치다'라는 말이 있다. 여론을 몰고 가거나 결론을 정해놓은 경우에 가끔씩 쓰는데, 위의 사례는 '초 치는 기사'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향토애의 발로에서 쓴 기사이기에 뭐라고 비판하기 힘들지만, 이 기사에서 꿰뚫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부산 사람들의 정서와 기질이다. 부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시선이나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한 프로야구 해설자는 대구 사람과 부산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야구장에 가면 기질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대구 사람은 군데군데 떨어져 앉아 차분하게 응원하지만, 부산 사람은 신문지'비닐봉지 같은 도구를 이용해 집단적으로 화끈하게 응원한다." 대구 사람은 명분을 내세우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뚜렷하지만, 부산 사람들은 실리를 앞세우고 집단적인 성향이 강하다. 내륙문화와 해양문화의 차이일 수 있지만, 이런 성향끼리 부딪히면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하다. 언제나 싸움을 시작하는 쪽도, 이기는 쪽도 부산이다. 기백과 투지 면에서 부산이 대구를 압도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삼성자동차, 1996년 위천국가산업단지, 2016년 영남권 신공항 갈등의 결과물이 이를 잘 보여준다.요즘 대구 통합 신공항을 방해하는 부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정권이 바뀌면 부산의 요구대로 통합 신공항이 '동네 공항'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두 도시가 다퉈봤자 일시적인 이득은 챙길지 모르지만, 국가의 미래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제2, 제3의 도시가 힘 모아 수도권 비대화에 대항해도 모자랄 판에 '치킨게임'이나 벌이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이럴 바에는 대구와 부산은 서로에게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길만 묵묵히 가는 것이 최선이다. 부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2017-02-28 04:55:05

[세풍] 무능하든 후안무치하든

"나쁜 사람은 아니다.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큰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고 평가받는 정치인이 있다. 제29대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의 이야기다.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 조사에서 늘 선두에 서는 사람이다.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의 무능력자'라는 게 이유다.지나친 야심 때문에 '여공작'으로 불린 이혼녀와의 결혼이 정치판에 뛰어든 계기였다. 하딩의 뛰어난 대중 연설 능력도 한몫했다. 오하이오 주지사를 거쳐 연방 상원의원이 됐지만 하딩은 임기 6년을 허송세월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의회에 나간, 불성실한 정치인이었다.당시 집권 민주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공화당이 정권을 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공화당 후보 경선이 과열돼 후보 결정이 어려워지자 공화당 핵심부는 만만한 하딩을 대선 후보로 밀었다. 하딩의 거절에도 당은 그를 채근했고 결국 당선됐다.그는 자질이 없었다. 지도력도 위기관리 능력도 없었고, 도덕성과 인사관리는 더욱 엉망이었다. 포커 친구를 비서로 임명하는가 하면 '오하이오 갱'으로 불린 측근들은 부정부패로 원성이 높았다. 그러다 하딩은 1923년 재임 중 죽었다. 계속된 경제난에다 국정 난맥상으로 후임 대통령 쿨리지와 국민에게 큰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가 아직도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탄핵심판의 수레바퀴가 바삐 굴러가고 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24일을 최종 변론기일로 확인하면서 탄핵심판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아직 일정이 유동적이지만 박 대통령 입장에서 이번 주는 분명 '운명의 한 주'다. 탄핵 인용을 바라는 많은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언론은 3월 13일 이전에 인용과 기각, 양단 간의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데 무게를 싣고 있다. 그제 한 일간지 여론조사를 보면 '3월 13일 이전에 결정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78.1%로 나타났다. '그 이후에 결정해도 된다'는 16.6%였다. 국민 10명 중 7명 넘게 헌재의 조속한 판단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변수가 없지는 않다. 이른바 '태극기 민심'에 기대어 박 대통령의 "억지로 엮었다"는 주장에 동정론을 보태고 용을 쓰는 일각의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의 국민이 여전히 '촛불 민심'에 가깝다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물론 막판 뒤집기가 힘들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앞으로 보름 남짓 탄핵 정국의 흐름이 어떻게 변하든 국가 전체에 큰 멍자국을 남길 것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지금 5천만 국민은 피곤하다. 몇몇 사람의 '악한 행동' 때문이다. 안 건드린 데가 없는 무한 욕심이 사단을 불렀다. 마키아벨리는 '악한 행동은 그 상황을 통제하지 않는, 신뢰할 수 없는 지도자에 의해 야기된다'고 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몰랐다"는 박 대통령의 말이 진실이라고 쳐도 주변에서 일어난 추악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대통령의 책임이다. 유무죄는 헌재와 법원이 가리겠지만 지금까지 특검 조사에서 드러난 정황들은 대통령의 허물이자 국가의 어두운 그림자다.2008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국회 측 대리인단을 이끈 김기춘 의원은 지도자가 감내해야 할 책임을 직접 자기 입으로 확인했다. 그는 "공직자의 지휘'감독은 물론 부정'비리를 막지 못해도 탄핵 사유"라고 말한 바 있다. 사견이나 소위 '법꾸라지'의 발언임을 감안하더라도 법을 날개로 온갖 요직에 두루 몸담은 고위 공직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에는 뒤통수가 당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박 대통령의 도덕성과 능력에 대해 많은 국민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판단의 추는 이미 기울었다.박 대통령 주장대로 '완전 엮인' 대통령으로 후세에 동정을 살지, 아니면 무능하고 고집만 센 대통령으로 기억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문득 하딩이 차라리 속은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등 떠밀려 대통령이 됐으니 모두 내 책임은 아니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2017-02-21 04:55:01

[세풍] 문재인이 대답해야 할 것들

문재인은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해 있다. 안희정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지만 '추월'은 여전히 미지수다. 보수 쪽 사정을 보면 문재인의 차기 대권 근접도는 더욱 높아진다. 지리멸렬에다 지지율은 바닥을 긴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로선 '소망적 사고'에 가깝다. 문재인이 '대세론'을 호언할 만하다.그러나 대세가 대통령 자격의 보증서가 돼서는 안 된다. 대세에 매몰되면 또다시 '나쁜 대통령'을 뽑게 된다. 대통령 탄핵을 놓고 지금 나라는 둘로 쪼개져 있다. 이런 사태의 재연을 막으려면 차기 대선의 검증은 혹독하고 무자비해야 한다. 그는 지난 주말 대구를 찾아 "자신은 이미 검증이 끝났고 털어도 먼지 안 나는 사람임이 입증됐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 검증은 시작도 안 했다.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노무현정부가 북한에 물어보고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에 기권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북한 주민에 대한 배신이자 국가의 주권 행사를 적성국의 결정에 맡긴 '매국 행위'이다. 사실이냐는 물음에 문재인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안 받겠다' '기억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라'라는 말로 뭉갰다.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오자 "정치를 하다 보면 맷집도 세야 한다"고도 했다.'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송민순 증언'은 잊혔다. 하지만 잊혀서는 절대 안 되는 문제다. '증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이라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올바른 판단이었는지, 올바른 판단이라면 집권하면 또 그렇게 할 것인지, 잘못된 판단이라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는 그가 대통령 자격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문재인은 여기에 대답해야 한다.문재인은 공무원 81만 명을 늘리겠다고 한다. 무슨 일자리든 만들어내는 게 장땡이라면 못 할 것도 없다. 810만 명인들 왜 늘리지 못하겠나? 하지만 공무원은 세금으로 유지되는 일자리다. 돈을 버는 일자리가 아니라 돈을 쓰는 일자리다. 돈을 버는 일자리는 오직 민간 부문에서 나온다. 민간의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공무원을 늘려본들 돈을 쓰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다. 그 귀결은 국가 파산이다.고용 문제의 궁극적 해법은 경제 성장이다. 민간의 일자리는 경제가 성장해야 만들어진다. 이는 불가역적(不可逆的)이다. 고용이 적은 성장은 있어도 성장 없는 고용은 없다. 문재인은 지난 대선 때 이런 상식을 뒤엎는 경제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어 성장하자"고 했다. 공무원 81만 명 증원은 이런 사이비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것 같다. 그게 통한다면 국민의 4분의 1을 공무원으로 만든 그리스는 고용의 천국이 됐을 것이다. 공무원을 늘려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너무 쉽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대선주자라면 그런 것 말고 진정한 일자리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바로 경제를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다. 문재인은 여기에 대답해야 한다.문재인은 '사드'를 놓고 여러 번 말을 바꿨다. 지난해 한반도 배치 발표 직후 '재검토'공론화'를 주장한 이래 '북핵 완전 폐기를 위한 외교적 노력'→'차기 정부로 넘기라. 다만 철회가 전제는 아니다'→'한미 간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은 취소하기 쉽지 않다'로 계속 바뀌었다. 자신도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사드 배치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 중대 사안이다. 찬성인지 반대인지, 찬성한다면 이미 배치가 결정됐음에도 구태여 다음 정부로 넘겨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다음 정부로 넘긴다면 다시 논의해 배치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인지, 반대한다면 대안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밝히는 것은 선택권자인 국민에 대한 예의이자 의무이다. 문재인은 여기에 대답해야 한다. 이런 것 말고도 문재인이 대답해야 할 문제는 넘친다. 그러나 '탄핵 인용' 말고는 그 무엇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문재인은 대답해야 한다.

2017-02-14 04:55:05

[세풍] TK 정치 복원력의 결과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경상도, 특히 대구경북에 어울리는 글귀다. 예부터 경상도를 일컬으며 영남(嶺南)이나 교남(嶠南)이라 했다. 영(嶺)이나 교(嶠)와 같은 산악의 글자를 넣은 까닭은 지리 인문 환경을 반영해서다. 흔히 옛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을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빗대 말한 바탕도 그래서다. 높고 우뚝하고 잘 변치 않는 우직스러운 믿음의 긍정적인 뜻을 새길 수 있다. 완고스러울 만큼 고집스럽고 변화에 제대로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어두움의 색깔도 감출 수 없다.이런 태생적인 특징을 가진 영남, 교남의 본향(本鄕)이라 할 수 있는 대구경북이었던 탓에 일제의 엄청난 핍박과 탄압을 받았음은 마땅하다. 오로지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독립 광복이라는 한 생각에 빠져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까지 마다 않고 폭풍 흡입한 탓에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딱지까지 얻었다. 갖은 회유와 압제, 탄압에도 항복은커녕 씨알조차 먹히지 않았다. 일제가 오죽했으면 '고등경찰요사'라는 극비 특별 자료까지 만들기까지 했겠는가.1934년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가 반골로 무장한 대구경북의 독립투사인 불령선인(不逞鮮人'말 듣지 않는 조선인)만을 잡아 가두고 고문해 죽임도 서슴지 않는 고등경찰 즉 '고등계' 형사를 위한 비밀 자료집이다. 어느 곳에도 없는 자료집까지 만들 만큼 대구경북은 껄끄러운 곳이었다는 방증이다. '요사'에는 대구경북 항일 독립운동가 등 등장 관련 인물만도 2천500명이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일제는 영원한 한반도 식민지배를 위해 도저히 대구경북 사람을 그냥 둘 수 없었던 탓이다.일제 강점으로 우리는 남북 분단과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후유증은 광복과 함께 곧 나타났다. 좌우의 이념과 사상의 갈등, 대결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대구경북은 전혀 달랐다. 좌우를 넘어 3'1절 공동 개최와 좌우 4개 정당의 합작 공동위원회 구성을 통한 질서유지 활동, 공동 광복절 행사 개최 등을 이어갔다. 해방 공간에서의 좌우 연합은 미(美)군정 실패에 따른 1946년 10월 항쟁으로 끊겼지만 대구경북은 좌우 공조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반골과 저항, 이질적 사상과 이념의 수용 전통은 이어졌고 현대 정치사에서 그 드러남과 잠복은 되풀이됐다. 물론 특정 정치 세력에 기운 적도 없지는 않았다. 이는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잘못된 조타(操舵)로 화물이 쏠리면 곧 균형을 이루는 '복원력'을 상실해 배가 침몰했듯이 정치적 복원력을 잃은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속되게 비아냥대는 그런 꼴통 보수의 TK와는 딴판의 역사적 배경을 갖춘 곳이다. 정치인 김부겸의 등장 이후 2015년 대구시장 선거, 2016년 국회의원 선거로 대구는 균형의 정치 복원력을 회복 중이다.이런 정치적 균형의 복원력 회복 조짐 결과, 최근 정치인들의 대구경북 나들이도 잦다. 혹 치러질지도 모를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대선주자들의 발걸음이 그렇다. 대구경북 출신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더불어민주당의 김부겸 의원,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 등의 행보 외에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행보 역시 같다. 그는 한때 감옥살이를 한 뒤 충남지사에 거듭 뽑히는 정치 재기의 성공을 디딤돌로 대선까지 넘보게 됐다.그의 활동이 돋보임은 특히 같은 당 소속 문재인 대선주자와는 다른 경력과 모습 탓이다. 지방 수장으로서 수도권에 눌려 질식 상태인 우리만큼은 아닐지라도 지방의 소외를 겪은데다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으려는 행동, 대구경북에 대한 남다른 관심 등으로 그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여론조사 결과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런 호의적 분위기는 김부겸 의원 같은 앞선 이들의 노력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 정치 복원력을 되찾아가는 흐름을 잘 탄 것은 행운이고 결과는 그의 몫이다.정치 계절을 맞아 정치의 다양성과 균형된 정치 복원력을 회복 중인 대구경북에 애정을 쏟는 뭇 정치인들이 던지는 웃음이 결코 싫지 않은 요즘이다.

2017-02-07 04:55:09

[세풍] 샤이 TK

명절 때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사이에서 피해야 할 말들이 있다. 언제 결혼할 거냐, 취직 언제 할 거냐 하는 말이다. 정치 이야기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정치 논쟁에 말 섞다 보면 감정 상하기가 일쑤다.이번 설 우리 집에서도 차례와 세배 후 덕담이 오가다가 정치 이야기가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정국과 차기 대선 구도가 주제였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했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탄핵당할 정도의 잘못은 없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편이 갈렸다. 접점 없는 논쟁이 고성으로 확전되기 일보 직전, 보다 못한 여인네들이 이를 진압했다. "남자들이 말 참 많네. 마, 치아뿌고 떡국이나 드이소!"심리학에 '인지적 보수성'(Cognitive Miser)이라는 용어가 있다. 기존 관념을 바꾸려면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가기에 사람은 웬만해서 기존의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는 이론이다. 신념을 바꿀만한 충분한 사건이나 동기가 없으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본다.신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생겨난다. 시쳇말로 일종의 '멘붕'이다. 우리나라 현 정치 상황을 보면 인지 부조화를 유발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요즘 우리 국민 중에서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인지 부조화를 가장 많이 겪고 있는 듯하다. 정치인 박근혜에게 20년 가까이 무한한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에 유례없는 맹목적 애정이었다.그런 박근혜가 무너졌다. 지지자들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잘못이 있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뼈아픈 상황이 됐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5% 아래로 추락하면서 대통령을 드러내놓고 옹호할 사회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대구경북의 상당수 지지자들은 '샤이(Shy) 박근혜'로 숨어들었다.'샤이'하기는 TK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요즘 뉴스에서는 친박 정치인들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 혹자는 침몰하는 새누리호에서 탈출해 신생 보수 정당으로 옮겼고,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실세 친박 정치인은 당 쇄신 파동 속에 정치생명 연장의 꿈마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대구경북 정치인들의 존재감이 희박해진 이유는 고유의 정치적 자산과 철학 부재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그리 친하지도 않지만)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는 이유로 '친박 주자' 행세를 하면서 표를 얻은 정치인들이 이 혼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좌고우면뿐일 것이다. 특정 유력 정치인의 후광효과에 기댄 채 안이하게 정치를 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문제는 이런 정치인들이 허다한 나머지 대구경북의 정치적 미래 역시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졌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69년 헌정사에서 대구경북은 대통령을 5명이나 배출했지만 유산은 오간 데 없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 폐족 위기에 몰렸다. 입지는 척박해 황무지에 가깝고 찬 모래바람 휑하게 부는 정치적 공백 상황이다.이 와중에 대구시와 경상북도를 이끄는 두 수장의 정치적 포지션이 상이해 관심을 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TK가 중심이 되어서 당을 혁신하겠다며 새누리당 안으로 더 깊이 뛰어들었다. TK의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대권 도전을 향한 의지도 숨기지 않고 있다. 비박계로 정치를 시작한 권영진 대구시장은 여론 향배를 지켜보면서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구공항 통합이전을 차기시장 선거 승부수로 띄우면서 작금의 격변적 정치 상황에선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모양새다. 그는 일단 '샤이 박근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아무튼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헤매고 있을 때 중심 잡고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면 광역단체장이다. 두 사람 중에 누구의 판단과 선택이 옳은지, 나중에 누가 웃을지는 시간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2017-01-31 04:55:15

[세풍] 1970'80년대와의 결별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양철북'(1979년 작)은 스스로 성장을 멈춘 난쟁이 오스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오스카의 눈을 통해 나치 태동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의 독일 역사를 보여주는데, 주인공은 물론이고 부모, 이웃 등 등장인물 대부분이 기형적이고 극단적인 정신 상태를 갖고 있다.양철북을 치고 다니던 오스카는 세 살 때 어른들의 타락과 부정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독백한다. "어른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 나는 장래가 두려워서 성장을 멈추기로 했다." 오스카는 더 크지 않고 아기 때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른이었다. 오스카의 유아적 혹은 불구적 모습은 나치즘을 청산하지 못한 전후 독일 사회를 암시한 것이지만,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한국의 지도층에게도 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는 현상이다.한국에는 난쟁이 '오스카'처럼 1970, 80년대의 정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아병적 사고를 가진 이들이 수두룩하다. 1970년대는 산업화 시대, 80년대는 민주화 시대였고, 현재의 사회지도층이 학생'청년기를 보낸 때였다. 이들은 흘러간 시대를 맹목적으로 그리워하거나 그 시대에 습득한 철학과 지식을 '불멸의 진리'처럼 신봉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 탓인지, 공부를 하지 않거나 혜안이 없는 탓인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유독 정치인과 지식인 중에 이런 분이 많다.1970년대 시대정신에 머물러 있는 대표적 인물이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에게 국가 경영 노하우나 강단 있는 리더십을 배우지 못하고, 엉뚱하게 권위 의식과 강압적인 태도만 빼닮은 듯 답습했다. 그 시대의 치열함이나 고민은 전혀 알지 못하고, 구시대적 폐습만 잔뜩 익힌 탓에 문화계 블랙리스트, 국사 교과서 국정화 같은 시대역행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부모가 돌아가시기 직전 청와대에서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낸 기억 때문인지, '오스카'와는 반대로 '몸은 자랐지만 정신은 성장하지 않은' 경우가 아닐까.1980년대 시대정신에 머물러 있는 대표적 인물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대선후보 지지율 1위에 오르내리는 정치인이 구시대적 정신을 갖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는 '국가 대청소'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재벌과 언론을 바로잡고 국정 농단 공범을 색출하고 왜곡된 역사도 바로잡겠다고도 했다. 마치 1980년대 열렬 학생'노동운동가가 재림한 듯, 기백과 의기가 철철 넘친다.그 이상은 평가받을지 모르지만, 실현불가능한 구호에 그칠 것이 확실하다.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누구를 공격하고 특정 계층을 증오하고 편을 가르다간 싸움질로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해도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나을 것이 없는, 아류(?)에 불과한데도 왜 이런 행태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문 전 대표를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가슴은 있을지언정, 머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 전 대표가 대권을 잡고 싶다면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1980년대식 사고부터 버려야 한다. 언제까지 서로 찌르고 부수고 헤집어야 끝이 나겠는가. 반대 세력을 껴안고 함께 가는 길을 배우지 않는다면 문 전 대표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21세기 화두는 실용성과 개방성이다. 거기에 '글로벌 스탠더드'의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적폐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사회 변혁은 1970, 80년대 방식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방식으로 조용하고 합리적으로 이뤄야 가치가 있다.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니 많은 정치인들이 도전 의사를 밝히고 있다. 몇몇 분은 '구태와 결별하겠다' '새 시대를 열겠다'는 목소리를 낸다. 진정으로 시대정신에 투철한 것인지, 선두권 후보와의 차별성을 위한 선거전략인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과거를 갖고는 결코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면 유권자의 판단이 한결 쉬워지지 않겠는가.

2017-01-24 04:55:02

[세풍] 개헌 없이 국가 대개조 되나

요즘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용어는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은 앞으로의 상황이 유동적이고 변수도 많아 예측이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문제는 상황을 악화시킬 나쁜 변수가 훨씬 많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불확실성의 방향은 정해져 있다. 운이 좋다면 하향 곡선, 최악의 경우는 급전직하다.지금 우리 사회에 드리운 불확실성은 매우 악성이다. 인체로 치자면 복합골절이다. 치료가 쉽지 않고 자칫 골병이 깊어질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이 빚은 정치 혼란은 불확실성의 근원이다. 경제와 외교, 안보 등 대외 여건 악화도 불확실성의 플랫폼이다. 이런 불확실성의 다중 결합은 사회 불안과 격변의 발화점으로 작용할 확률이 그만큼 높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국가 부도 등 경제 위기나 기업 경영의 파탄, 가계소득 감소와 부채 증가로 인해 누구든 치명상을 입게 된다.최근 대구상공회의소가 지역 제조업체 200곳을 대상으로 '기업인이 꼽은 새해 희망 키워드'를 조사했더니 '안정'이라는 답이 62.8%로 가장 많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이다. '소통과 신뢰' '공정과 정의' '협력'도 키워드에 들었다. 기업인의 이런 소망은 시민 개개인이 바라는 희망과 다르지 않다. 나라와 사회, 기업, 개인의 살림살이가 불안하다면 리스크는 커지기 때문이다.1997년 외환 위기는 국가 리스크의 생생한 표본이다. 이 리스크로 모든 국민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또한 리스크 앞에 선진국도 예외가 아님을 증명했다. 문제는 이런 리스크가 일회성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적된 경제'사회적 모순의 표출 주기가 전 세계적으로 더 짧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이런 고민은 17일 개막한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인 다보스포럼의 올해 논제에서도 드러난다. WEF는 개막에 앞서 각국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2017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냈다. 향후 10년간 세계 성장과 발전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요인에 관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경제적 격차 증가'를 가장 큰 리스크로 꼽았다. 심각한 양극화 때문에 세계가 성장을 멈추고 퇴보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집단 지성의 이런 경고는 사회안전망으로서 기본소득 개념인 UBI(Unconditional Basic Income) 논의와 제도적 실험을 요구하는 단계에 왔다.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적 격차와 양극화 현상을 학술 논쟁거리로 여기고 그냥 묻어가는 수준에서 벗어났다. 심각한 경제 격차로 인해 사회 불평등 구조가 더욱 굳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가 44.9%로 아시아에서 경제적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다. 세계 주요국 중 미국(47.8%) 다음으로 크다. 요즘 유력 정치인들 입에서 '국가 대개조'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치 교체'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하지만 촉(觸)이 빠른 정치인들이지만 국가 개조와 정치 교체에 관한 해법은 찾기 힘들다. 박근혜정부의 문제점과 정반대되는 답을 내놓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국가의 존립 근거에 관한 정치인의 해독 능력은 국민보다 낮다 못해 거의 오독(誤讀)에 가깝다. 국가 경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도 원인과 개선책을 놓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법도 없다. '득표 구호'만 30년 넘게 줄곧 이어졌다. 그 결과 부패 구조와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권력 엘리트만 양산했다. 탄핵 정국의 마무리 카드로 등장할 대통령 선거가 걱정되는 이유다.세계는 이미 양극화와 경제 격차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대선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개헌이다. 개헌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토대여서다. 지금은 문(文), 반(潘), 이(李), 안(安) 그 누구도 구호만 쏟아낼 때가 아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국가'사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전략과 정책이 더 급하다. 자리 욕심 이전에 개헌에 담긴 뜻부터 다시 살펴보기를 권한다.

2017-01-17 04:55:05

[세풍] '제왕적 국회'는 어쩌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는 현행 헌법 하의 대통령이 '제왕'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개헌 논의는 '제왕적 대통령제' 폐기로 모이고 있다. 대통령에게서 제왕적 권력을 박탈하면 탄핵을 불러온 '최순실 국정 농단' 같은 사태는 없을 것이란 논리다. 소박한 제도 만능주의다. 최순실 사태는 대통령이 제왕적이어서가 아니라 대통령 권력을 올바로 행사하지 못한 인치(人治)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제도만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모든 것이 잘 굴러갈 것이란 믿음보다 더 안이한 것은 없다. 제도는 스스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손을 통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제도도 인간의 고안물인 이상 완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인치의 가능성은 그 어떤 제도도 예외일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이 헌법만 지켰다면 제왕적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문재인의 개헌 반대 논리는 차기 대선 '게임의 룰'을 바꾸기 싫다는 속셈만 아니라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개헌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국회 권력의 제한에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에서 '제왕'이기로 치자면 대통령보다 국회가 훨씬 더 하다. 대통령은 국회의 협조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2011년에 제출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아직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예의 하나일 뿐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무기가 '국회선진화법'이다.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의사결정 무능력 양산'의 장치다. 이 법이 없어지지 않는 한 대통령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려면 국회에 구걸해야 한다. 물론 구걸도 통할 수 있다. 그 전제는 '국회가 정략과 진영 논리에서 벗어난다면'이다.하지만, 우리 정치권에는 그런 '큰 그림'이 없다. 모든 행동 기준을 자기 진영의 입맛에 맞추는 당파성만 판을 칠 뿐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대한 야당의 집요한 반대와 폐기 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당파적 국회 지형도 아래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회 권력과 대등한 위치에 서지 못한다. 이는 현행 헌법에 구조화돼 있다.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장관의 해임을 요구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이 없다. 여기에다 국회는 국정감사'조사권도 있다. 말 그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국회 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에 대해 얼마나 '을'(乙)인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인정했다.국회가 대통령에 대해서만 '갑'(甲)인 것은 아니다. 국민에게도 '갑'이다. 국회의원은 겉으로는 '국민의 종'임을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국민 위에 군림한다. 주민소환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잘못해도 국민은 파면할 수 없다. 국회의 권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공천권이란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국회 권력에 대한 지방 예속'의 제도화다.입법권의 남용은 더 심각한 문제다. 현행 헌법 하에서 국회의 입법권은 무제한적이다. 국회가 정하면 무조건 법이다. 이를 제어하는 장치는 대통령의 거부권뿐이다. 하지만 국회가 쏟아내는 법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외국은 다르다. 프랑스는 의원입법을 다층적(多層的)으로 규제한다. 법안 제출 때 입법영향분석서 첨부를 의무화하는 것은 물론 헌법재판소가 사전 위헌 심사를 한다. 일본도 행정부가 행정입법을 정부가 제정할 수 있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 의회는 재해 긴급사태, 건강보험 의료비, 국가행정조직 등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행정입법에 관여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국회와 같은 '입법 독재'는 꿈도 못 꾼다.이런 사실로부터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를 내세운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근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제왕적 국회'가 문제다.

2017-01-10 04:55:02

[세풍] 낮에 하고 밤에 얻다

'낮에 함이 있으면 밤에 얻음이 있다'(晝有爲 宵有得). 1960년대 서울 충무로에 있던 매일신문 서울분실 사무실 벽에 걸렸던 액자 속 글귀다. 촬영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 낡은 옛 사진 속 이 글귀를 해독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옛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한 가르침의 개인적인 소득이다.더듬어보면 1954년 2월, 서울에 첫 진출한 매일신문의 옛 선배들이 충무로 사무실에서 활동할 즈음 매일 한 번씩은 다졌을 각오를 드러낸 글이 아닐까 여긴다. 물론 옛 사람이 흔히 학문하는 자세를 이야기할 때 사용했던 글귀를 따온 것이다. 6'25전쟁이 끝나기 바쁘게 폐허 속에 첫발을 내디딘 당시 서울분실 옛 선배들은 척박한 낯선 서울 환경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낮과 밤을 이어 버틸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바로 그런 힘들고 고달픈 시련의 시절을 버티게 한 글로는 더없이 적합했던 모양이다. 액자 속 검은 먹글씨를 등대 삼아 지내온 앞선 사람들의 바탕이 있었기에 필자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지사장으로 무사히 근무하며 2014년 서울 진출 60년이라는 조촐한 자축까지 하고 내려올 수 있었다.그렇다. 이처럼 세상 일은 이어지고 연결돼 있다. 필자가 지난해 12월 초청받아 참석한 '구당회'라는 작은 모임의 송년회에서 겪은 일도 마찬가지다. '구당회'는 구미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구미로 옮겨 삶터를 이어가며 자신의 작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다양한 형태로 자원봉사에 나선 '이주'(移住)한 구미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이다.그런데 필자는 이 모임의 출발에 인연이 있다. 구미에 근무하던 시절인 2009~2011년 자원봉사에 참여한 70여 명의 보람된 삶을 알고 모두 30사례로 나눠 소개했고 2012년 '구미 당기는 구미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으로 엮어 선물해서다. 그리고 한동안 잊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변화는 이후였다. 2014년 2월, 책 속 주인공 10여 명이 '구당회'를 만들면서부터다.친목을 꾀하면서 따로였던 종전의 봉사활동을 연계해 시작하기로 뜻을 모으며 활동에 나선 것이다. 게다가 '구당회'는 지난해 송년회를 계기로 새로운 변신에 나섰다. 2017년부터 바로 자신들보다 나은 '제2의 구미 당기는 사람들'을 길러내자는데 뜻을 모았다. 이런 결의는 지난 2년 동안의 여러 '구당회' 활동을 통한 자신감에서 비롯됐다.구당회 회원의 돋보인 활동은 여럿이었다. 한 동네 어르신의 방과 후 청소년 돌보기 성공 이야기와 '학교 밖' 청소년 돌보기 사례, 어르신이 어르신을 보살피는 소위 '노노 보살핌'(老老 케어) 등이다. 특히 해평 낙산리 시골 동네 마을 어르신들의 어르신 보살핌 활동은 정부의 '힘센' 부처에서 사업 제안 요청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좀 더 내실있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민간 차원의 활동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방송의 자세한 소개는 덤이었다.일이 이어지고 연결됨이 이러하다. 우리가 지난 한 해 벌인 촛불 행위도 앞선 두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모습의 나라로 탈바꿈시켜 보고자 한 일이었다. 1천만 촛불이 2016년 부지런히 밤을 밝히는 '함'(有爲)이 있었기에 올해 2017년에는 '얻음'(有得)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 얻음은 바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결과와 그에 따라 새롭게 펼쳐질 앞날이다.헌재의 탄핵 심판이 인용으로 결론나면 곧 새로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제대로 된 대통령 뽑기를 통한 나라 바꾸기가 될 것이다. 기각 판정이 나게 될 경우 촛불 민심을 통해 표출된 성난 민심을 잘 받드는 정치다운 정치 혁신을 통한 나라 세움이다. 어떤 결정이 나오든 대한민국은 지금과는 달라져야만 한다. 나라 안팎에서 조여오는 국제 정세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서다.앞선 사람들의 땀으로 일궈낸 기업체나 사적 모임조차도 새로운 도약을 위한 나날을 보내는데 하물며 1천 번 가까운 외침(外侵)으로부터 지켜온 나라임에랴. 지난해 했으니 올해는 기필코 얻자.

2017-01-03 04: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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