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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 너머는

문재인 대통령, 지금까지는 성공이다. 촛불 민심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수 끝에 당선, 바라던 자리에 올랐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 비리 수사도 이제 끝이 보인다. 이 전 대통령 역시 머잖아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을 비켜나지는 못할 것 같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에 대한 적폐 청산은 이로써 절정을 이룰 것 같다. 체육 교류를 통한 남북 관계 복원도 그렇다. 출발은 지난해 6월 24일 무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다. 문 대통령은 "남북단일팀을 구성해 최고 성적을 거뒀던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의 영광을 다시 보고 싶다"며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여한다면 인류 화합과 세계평화 증진이라는 올림픽 가치 실현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남북선수단 동시입장으로 박수갈채를 받았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북한 응원단도 참가해 남북 화해의 전기를 마련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남북 단일팀과 공동입장에 대한 '평창 구상'을 거듭 밝혔고 북한의 올림픽 참여를 바랐다. 마침내 북한의 응답이 시작됐고 하나씩 결실을 맺었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선수단, 예술단, 태권도 시범단, 응원단 등이 파견됐다. 개회식에는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폐회식에는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평창 구상은 다른 성과도 낳았다. 이는 김여정이 시작했다. 김여정은 지난달 10일 특사 자격으로 문 대통령을 만나 김정은 위원장 친서를 전달하고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대통령 대북 특사를 1박 2일 북한에 보냈다.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이 체육 교류에서 정치 분야로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문 대통령의 평창 구상 이후 일은 의미를 둘 만하다. 전설 같은 1970년대 '탁구 외교', 소위 '핑퐁 외교'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냉전(冷戰)으로 으르렁거리던 미국과 중국이 2g쯤의 탁구공 하나로 외교 관계 정상화의 신화를 이뤘으니 말이다. 시작은 1971년 3~4월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참가 미국 선수 글렌 코완이 중국 선수단 버스를 우연히 탔고 '중국에 가 보고 싶다'고 한 말이 씨가 됐다. 이후 1971년 4월 미국 대표 선수단 15명의 첫 중국 방문,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모택동 주석과의 만남, 1973년 양국 연락사무소 개설, 1979년 등소평의 미국 답방과 수교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걱정이다. 나라 안팎 사정은 험난하다. 먼저 주변 나라이다. 남북 관계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탁구 외교 신화의 주역 미국과 중국처럼 스스로 뜻을 펼칠 만큼 강국이 아니다. 주변국 입김이 산 넘어 산이다. 북핵 문제는 더하다. 게다가 주변국은 남북 관계를 자국 이익 극대화의 기회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과 손잡고 대만을 헌신짝 취급한 미국의 요즘 대한(對韓) 군사'통상 압박은 그 분명한 사례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성주 배치를 공격한 중국, 문 대통령의 3'1절 위안부 문제 발언 등을 빌미로 갈등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국내 사정도 역시다. 무엇보다 야당이 평창 구상과 이후 펼쳐진 일에 호의적이지 않다. 공격과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6월 지방선거를 겨냥한 정치 공세일 수도 있지만 국민 지지가 만만찮은 대통령 힘을 빼는데 북한 문제는 더없는 호재일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후유증과 청년 일자리 문제 등 풀리지 않는 경제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힘들지만 대통령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평창 구상의 결실은 탁구 외교 신화까지는 아니지만 남북 문제를 풀 디딤돌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우선 나라 안부터 힘을 모으자. 가장 모퉁이 약소국 신라가 이룬 미완(未完)의 민족 첫 통일 위업은 민심, 외교, 더 물러날 곳 없다는 절박한 불퇴전(不退戰)의 각오가 바탕이었음을 안다면 말이다.

2018-03-06 00:05:04

[세풍] '마음은 콩밭에' 공직자의 출마

지방선거 실시 바로 전 해 12월이 되면 광역자치단체장은 골머리를 썩는다. 간부직 정기인사를 해야 하는데 지방선거 출마를 저울질하는 일부 간부 공무원들의 모호한 처신 때문이다. 대구시의 경우 권영진 시장이 지난해 12월 15일까지 출마 의사를 분명히 표명하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연말 정기인사 이후 두 달도 안 돼 부구청장 2명이 지방선거에 출마하겠다며 사표를 던지면서 결원이 생겼다. 부구청장 인사란 것이 그리 녹록지 않다. 부구청장 인사를 하려면 해당 지자체장과 협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권 시장은 시의 모 국장을 보내려 했지만 구청장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골라 보냈더니 이번에는 공무원 노조가 들고 일어났다. 부구청장을 내려 보냈으니 인사교류 협약에 따라 시가 구청 공무원을 받아줘야 한다며 시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권 시장의 마음이 많이 상했던 것 같다. 급기야 지난 20일 그는 전공노 간부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조가 출마를 위해 공직을 버리고 떠난 부단체장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하는 게 옳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앞으로 선거에 출마하려는 공직자를 부단체장으로 절대 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지방선거를 앞둔 선출직 시장이 노조와 설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담스러웠을 텐데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발언이었다. 사실, 공직자의 지방선거 출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많다. 행정 공백 부작용 때문이다. 수성구의 경우 구청장이 일찌감치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한 상황에서 부구청장마저 구청장 선거에 나서겠다며 중도 퇴임했다. 구청장이 3선 연임 제한에 걸려 있는 남구도 부구청장이 출마를 위해 중도 퇴임했다. 단체장이 중도 사퇴하거나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상황이라면 부단체장이 권한대행을 맡아 조직을 추슬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구청장과 부구청장 모두 사표를 던지면 공직기강은 누가 잡고 우스갯소리로 소는 누가 키우나? 경북에서도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공직자 사퇴가 줄을 이었다. 김관용 도지사가 3선 연임 제한에 걸린 상황에서 두 명의 부지사 모두 출마하겠다며 사퇴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당사자들이야 주어진 업무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수행하고 있다고 항변하겠지만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터이다. 공직자 출마의 또 다른 부작용은 과도한 고향 챙기기다. 휴일마다 '위수지역'을 벗어나 고향에서 표를 관리하는 것은 애교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공직자가 평소에 선심성 예산과 사업을 고향에 대거 배정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뒷말이 많다. 막대한 선거 비용이 드는 후진적 정치 풍토도 공무원 출마에 우호적이지 않다. 최소 10억원 이상의 '실탄'이 필요하다고 알려진 기초단체장 선거판에 고민 없이 뛰어들 공직자가 과연 있을까. 결국 선거자금 마련 때문에 '검은돈'의 유혹에 빠지고, 당선 후 본전을 찾겠다며 이권에 개입하거나 부하직원으로부터 돈을 받아챙기다 뒤탈이 나는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물론, 공무원 출마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공무원은 오랜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고향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지방선거를 통해 토호가 단체장이 된 뒤 이권개입 등 물의를 일으킨 사례를 보면 공무원 출신이 상대적으로 낫다는 평가도 많다. 제7회 지방선거가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역일꾼을 뽑는 아주 중요한 선거다. 하지만 일신영달이 아니라 고향 발전을 위해 선거에 뛰어드는 공직자라면 현직 프리미엄에 기대지 않을 것이다. 관용차를 타고 지역구 표밭 관리를 하는 모습이 유권자 눈에 좋게 비칠 리 없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오는 6'13 지방선거 입후보 공직자는 3월 15일까지 사퇴해야 한다. 하지만 그날까지 미적댈 일은 아니다. 출마 결심을 굳혔다면 빨리 사퇴하는 게 옳다. 그게 지금 몸담고 있는 조직과 출마할 지역 모두에 이롭다.

2018-02-27 00:05:00

[세풍] 거짓말 공장

얼마 전 대학교수 출신 어르신과 나눈 대화다. 그분은 필자에게 "풍계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북한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는 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장소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그곳을 타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처음 듣는 황당한 뉴스에 필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그분은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풍계리를 폭파시켰는데, 바로 다음 날 김정은이 평창올림픽을 들먹이며 한국에 대화를 제안했다고 하네." 전형적인 가짜뉴스였지만, 그분의 말씀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헨리 키신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데 조만간 미군은 철수하고 미국은 북한을 타격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궁금증이 일어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정보를 들었느냐고 캐물었다. 며칠 전 업무차 서울에서 만난 70대 장군 출신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연세가 좀 많다고는 하지만,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 출신과 국방부 주요 보직을 거친 장군 출신이 '이스라엘 특공대'를 믿고 언급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가짜뉴스 신봉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무리 황당한 소설 같은 얘기라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하면 '옳거니' 하고 믿어버리니 어떻게 설득할 방법이 없다. 40, 50대만 해도 가짜뉴스를 그리 많이 믿지 않지만, 60대 이상 연령대에는 신봉자가 수두룩하다. 어르신들과 가짜뉴스를 놓고 논쟁을 벌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해 모른 체하는 것이 편하다. 모두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있으니 토론과 논쟁은 더는 소용없는 세상이 된 듯하다. 21세기라면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 같은데, 거꾸로 퇴보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 가짜뉴스가 사회문제화돼 시끄럽지만, 한국만큼 그 정도가 심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진보·보수로 갈려 이념대립이 심각한데다 한국인 특유의 거짓말과 허세, 디지털 기술까지 더해져 갈수록 그 위세가 대단하다. 지난해 말 한 방송사가 '시청자들이 뽑은 2017년 올 한 해 최악의 가짜뉴스 10'을 방송했을 정도이니 그 폐해와 파급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가짜뉴스를 마구 찍어내는 곳은 극우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진보세력도 비슷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는 한국에서 가짜뉴스가 처음으로 위력을 발휘한 때였다. 인터넷에는 연일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어떻게 되고, 광우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느니 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명박 정권을 미워하고 미국을 싫어한 진보세력이 광우병 문제를 왜곡·과장했고,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당시 주장·목소리 가운데 맞는 것이 거의 없는 걸 보면 가짜뉴스의 전형이다. 가짜뉴스는 소수파 정치세력이 정권 탈취나 세력 확장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로 정권과 집권층을 욕하고 비방해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일종의 사기행위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부터 '가짜뉴스 신고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일주일 만에 2천 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왔다니 가짜뉴스의 전파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가짜뉴스를 마구 찍어내는 공장은 곳곳에 널려 있다. 익명의 가면을 쓴 채 숨어서 가짜뉴스를 만드는 행위는 범죄다. 교묘한 거짓말로 집단과 세대·계층을 반목하게 하고, 특정인을 증오하게 만들고, 이웃을 공포에 떨게 하는 이들은 '열린 사회의 적'이다. 가짜뉴스에 동조하는 행위는 자신도 모르게 범죄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정치적 측면에서 소통과 직접민주주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거짓말과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는 걱정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과 힘센 자,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꼭 필요하지만, 거짓과 속임수로는 안 된다. 정직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2018-02-20 00:05:00

[세풍] '천천히 오세요'

내일 오후면 몸보다 마음이 더 바빠진다. 떨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얼굴을 맞대는, 재회의 시간을 앞두어서다. 귀성길이 막혀 고생해도 가슴은 설레고, 운전대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한국인에게 무조건 반사의 영역인 까닭이다. 365일이 명절을 앞둔 심정과 같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과 일상은 그렇지 않다. 저마다 삶의 조건과 처지가 다르지만 늘 시간과 성과에 쫓기는 건 같다. 매일 서로 부대끼며 갈등하고 싸운다. 살아남기 위해 남을 밀쳐내는 일도 다반사다. 미세먼지처럼 반칙과 편법은 이미 우리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직장과 학교, 가정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상승 곡선만이 지상과제다. 이런 강박감의 틈바구니에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급기야 최고'최선으로 둔갑하고 세상을 지배한다. 조급함과 각박한 세태가 만든 결과다. 성취하려는 노력과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이 옳은 것인지 따져보면 답이 궁해진다. 어느 배달 서비스 회사가 택배 배송기사들에게 물었다. 고객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나 행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57.3%가 답했다. '천천히 오세요'라고.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 조심해서 오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가 택배기사들 마음을 움직인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보다, 음료수를 챙겨주는 적극적인 친절보다 '천천히'라는 말의 울림이 더 크다. 지극히 평범한 말에 이런 힘이 있다니 놀랍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감정의 골을 메우고 서로를 연결한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천천히 와도 괜찮다'는 말이 그만큼 듣기 힘들다는 뜻이다. 1960년, 2천500만의 한국인이 저마다 손에 쥔 돈은 고작 158달러였다. 지금은 3만달러에 가깝다. 돈의 부피가 달라지는 동안 거꾸로 인정은 줄어들고, 돈과 권력의 얼굴은 더 두꺼워졌다. 정치가 분열하는 동안 세태는 물 먹은 가죽처럼 딱딱해지고 모질어졌다. 더 슬픈 일은 생계가 달린 아파트 경비 자리가 사라져도, 좌절한 청년들이 암호화폐에 매달려도 뾰족한 대안도 문제를 풀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간간이 '함께 살자'는 선의의 외침도 '내가 먼저'라는 고함 앞에서는 그저 위태롭다. 미국 유명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가 평창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WP)에 칼럼을 실었다. '한국에 금메달을 주라'(Give South Korea a gold medal)는 제목의 칼럼이다. 그는 한국이 역경을 딛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뤄낸 결정적인 동력을 분석하면서 '한국의 성공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썼다. 이 칼럼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한국이 현재 서 있는 위치가 아니라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따져본다면 한국은 가장 성공한 국가'라는 대목이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매우 가난했고, 자원도 빈약했으며 더욱이 북한의 위협은 일상적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올바르게 정책 결정을 했고, 교육과 인프라 투자, 자유로운 시장과 교역을 옹호했다. 이것이 한국의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국가나 사회는 없다. 그러나 이 칼럼의 요점은 '한국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중단없이 앞으로 나아갔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도전과 위기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맞서면서도 조금씩 함께 풀어나간다면 별로 어렵지 않다. 소통과 합의를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이라면 근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관용과 배려가 없는 사회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치와 경제가 불화의 씨앗만 뿌리고, 돈과 탐욕의 그릇만 넓혀간다면 미래는 어둡다. 이제 정치는 국민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국민도 정치를 향해 주문해야 한다. '천천히 오라'고. 적폐든 양극화든 남북대화든 문제 해결 의지보다 독선과 탐욕이 앞선다면 답은 뻔하다. 그런 한국이 금메달 받을 자격이 있다고?

2018-02-13 00:05:00

[세풍] 소망으로 쌓아올린 허구의 탑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일본의 열두 배에 가까웠다. 군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철강이 그랬고, 자동차 보유 대수는 160배, 석유는 무려 776배나 됐다. 일본의 필패는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 군부의 도상연습(圖上演習)에서도 확인된 바였다. 당시 일본 해군대학은 미국과의 도상 전쟁을 몇십 회나 해봤지만, 일본이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결행했다. 그 무모함의 뿌리는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진주만 기습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18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총리가 되면서 천황에게 전쟁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육해군 참모들에게 지시해 만든 '대미영란장(對美英蘭蔣) 전쟁 종말 촉진에 관한 복안'이란 문서다. '미영란장'이란 미국, 영국, 네덜란드, 장제스(蔣介石)의 충칭(重慶)정부-일본은 왕자오밍(汪兆銘)의 친일 난징(南京)정부를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있었다-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전쟁 중인 독일과 소련을 중재해 화평을 이끌어내고, 독일의 전력을 영국과 싸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영국이 굴복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전쟁 의지도 약해질 것이다. 그때 미국과 협상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 현실은 전혀 달랐다. 독일의 전쟁계획에 소련과 화평은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 종결 구상의 핵심인 영국의 굴복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 문서가 작성되기 1년 전인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패배하면서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전쟁 종결 구상의 전제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착각에 대해 일본 역사소설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추상적인 관념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이성적인 방법론을 전혀 검토하려 들지 않았다. 먼저 자신에게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능숙한 작문으로 공중누각을 쌓는 것이 일본인의 특기인 것 같다. 모든 일들이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한다.('쇼와사 1') 일본의 전쟁 계획은 소망으로 겹겹이 쌓아올린 허구의 탑이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올림픽' 구상은 이를 그대로 재연하는 듯하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제의로 재개된 남북대화를 모멘텀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구상이다. "평창올림픽을 통해 북한이 예전과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받고 싶으면 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올림픽 기간에 깨닫지 않겠느냐"는 문정인 대통령 안보특보의 '해설'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한마디로 북한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이란 얘기다. 소망이 현실을 대체하고 객관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관적 작문이 꿰차는 소망적 사고의 전형이다. 이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문 대통령의 생각을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도 있다. '북한이 변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올림픽을 통해 정상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대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달라질 것이라는 현실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북한은 핵 보유가 유일 체제 보장에 득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평창올림픽이 그 계기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상식에 더 부합한다. 오히려 올림픽 참가가 핵무장 완성을 위한 시간벌기라는 의심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평창올림픽은 문 정부에게 잠시나마 소망의 실현이란 꿈에 부풀게 한 단막극일지 모른다. 연극이 끝나고 불이 켜진 뒤 문 정부는 어떤 현실과 마주할까. 그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환멸의 현실일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 개막 하루 전의 평양 열병식은 그 예고편일 것이다.

2018-02-06 00:05:00

[세풍] 다물(多勿) 한배(同舟)

'우리는 인민에 진정 충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경치가 더 좋아지고 농업에도 이로울 것이다…우리 인민 모두에게…젊은이와 어린이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낸다….'베트남의 독립운동과 통일에 평생을 바친, '호 아저씨'로 통하는 지도자 호찌민은 통일(1976년)을 보지 못하고 1969년 9월 2일 숨졌다. 1945년 외세 침략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지 24주년 기념일 때다. 그는 죽기 4년 전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 자유, 행복, 75회 생일에 부쳐'라는 제목의 유언을 남겼다. 비록 그의 몸은 재가 되지도, 산하에 뿌려지지도 않았지만 뒷 지도자들은 '인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 마침내 남북통일을 일궈냈다.지난해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호찌민-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7' 행사 때의 한국인 사업 관계자와 현지 한국인 증언은 잊을 수 없다. "베트남은 지금 경제가 처지고 부패가 심하지만 미국, 중국, 일본 등 누구에게도 쫄지 않는, 자존심 센 나라다. 호찌민의 지도력이 낳은 통일 베트남의 힘이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을 빼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야말로 '국부'(國父)이다."물론 그의 다른 모습도 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빚어진 물리적 충돌이다. 특히 자신의 고향 응에 안 성(省)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토지개혁 폭동으로 사망자만도 수만~10만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최소 5천~5만 명의 관리가 처형됐다는 연구도 있다. 그의 부정적 행적이다. 그럼에도 친근한 '호 아저씨', '호 할아버지'로 불리며 국부 대접인 까닭은 무엇일까.아마 독립과 통일 조국의 앞날을 위한 사심없는 지도력과 나라 사랑일 것이다. 그는 75~169개 이름 중 끝엔 '응우옌 탓 호찌민'(阮必勝)에서 '꼭 이긴다'는 호찌민을 썼다. 사회주의에 기댔지만 독립과 통합을 위해 민족주의도 수용했다. 그의 첫 번째는 독립과 통합, 사상 이념은 다음이었다. 옛 소련과 중국, 식민과 침략 지배자인 프랑스와 일본, 미국 사이의 등거리 외교와 실리적 거래도 그래서였다. 삶조차 청빈했으니 뒷사람의 거울이었다. 결과는 통일 베트남, 오늘날 베트남 힘의 원천이다.우리도 백범 김구 등 훌륭한 지도자가 넘쳤다. 오직 독립을 위해 일제 식민 지배세력과 목숨을 건 항쟁을 한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는 숱했다. 저마다 베트남처럼 민족주의, 사회주의로 나눠 제 역할을 다했다. 다만 외세에다 호찌민을 괴롭히던 '일본 적군에게 아첨하며 해롱거리는 소수의 주구(走狗)' 같은 무리 탓에 우리는 두 진영을 통합할 지도자를 너무 일찍 잃었다. 좌우 통합은 좌절되고 강산은 허리가 잘렸다.호찌민 같은 걸출한 뭇 지도자를 가졌음에도 우리의 남북은 되레 멀어지고 있다. 왜. 정치 지도자가 고만고만해서다. 저마다 잘난 질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와 북핵은 물론,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우리 강산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국제 정세는 숨이 막힌다. 여러 나라 세력의 무리 틈에서 살길을 어디에 찾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그런데 여야는 서로 딴 배다. 동주(同舟)는 없다. 더욱 답답한 노릇은 최근의 여야 정치다. 너나없이 극복에 나서야 할 충북 제천과 경남 밀양 화재와 같은 재난조차 정쟁(政爭) 삼아 힘과 시간을 헛쓰니 그저 놀랄 뿐이다.지금 여야에게 주문하고 싶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관련 한 기사를 읽는 일이다. '사대주의자'로 공격받는 김부식조차 우리 옛 땅을 잊지 말라며 '고구려 말로 고토(古土) 회복을 뜻하는 다물(多勿)'이란 말을 굳이 기록에 남긴 부분이다. 싸울 미력이라도 남았으면 옛 강토와 통일을 그리며 앞선 지도자처럼은 될 수 없을지언정 나라의 앞날을 위해 여야, 보수 진보 넘어 '다물 동주'로 통합에 나설 것을 바란다면 꿈일까.

2018-01-30 00:05:00

[세풍] 대구시장의 대권 도전기

미국에서는 유력 지방자치단체장이 대통령직으로 가는 유력 코스가 될 수 있다. 주지사를 지낸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이 단적인 예다. 지자체를 잘 경영한 경험을 토대로 둘은 대통령직도 잘 수행했다. 퇴임 후 매겨진 평가도 역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상당히 높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자체장의 대권 도전이 녹록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정치판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는 탓에 지자체장이 파고들 틈새가 거의 없다. 단, 서울시장은 예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거쳤듯이 수도 프리미엄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대중적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높지 않은 지자체장이 대권 도전에 나섰다가는 '투명인간' 취급받기 십상이다. 지난해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든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 TV토론 시작 전 스튜디오에 일찌감치 도착한 김 지사를 곁에 두고도 방송작가는 경북도지사를 찾았다. 김 지사는 자신의 얼굴이 신분증이나 다름없는 대구경북과 사뭇 딴판인 서울의 분위기를 그때 실감했다고 한다."중앙지들이 경기도지사 기사는 잘 안 실어줘요. 어쩌다 기사가 나오면 꼭 그게 사회면이더라고요." 몇 년 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대개가 비판 논조인 사회면 기사가 정치인에게 달가울 리 없다. 명색이 수도권 광역단체장이자 국회에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쌓아온 그마저 이런 소외감을 느끼는 마당이니 여타 지자체장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우리 대구경북의 경우 대권주자는커녕 거물 정치인 기근 현상에 시달린 지 꽤 오래다. 지난 대선 당시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홍준표 등 다른 지역 지자체장들이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대구경북민들은 부러움 반, 자조감 반을 느꼈다. 지역민들의 이런 상실감을 헤아렸는지 지난 대선 때 김관용 지사가 대권 도전에 나선 데 이어, 권영진 대구시장이 대구시장 재선에 성공하면 대권에도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최근 밝혔다.그런데 권 시장은 이 발언으로 큰 홍역을 치를 줄 몰랐던 것 같다. 발언 이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자체장들이 중앙정치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강도 높게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대구시장 일이나 잘하라"는 사실상의 타박이었다. 대구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차기 대선에서의 재수를 노리고 있는 홍 대표 입장에서 대구시장의 대권 도전은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홍 대표의 발언에는 지자체를 정당의 아래로 보는 우월 의식이 느껴진다. "공천 안 주면 재선조차 불투명한 대구시장이 감히 대권 도전을 운운해?"라는 오만함 말이다. 홍 대표의 발언은 평소 거침없는 어투를 감안하더라도 매우 유감스럽다. 대권 도전 선언 공방이야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권 시장을 공격한 사유 중 하나가 지방분권개헌 국민투표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6월 지방선거 때 지방분권개헌을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는 대구시민 뜻을 받들어야 하는 대구시장으로서 당연히 내야 할 목소리다. 그런데 이를 놓고 홍 대표는 "용서치 않겠다"는 극언마저 쏟아냈다. 공천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겁박과 무엇이 다른가.홍 대표는 대구에 정치적 둥지를 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구 북구을 당협위원장까지 맡았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거물 정치인이 지역에 오겠다는 것이 반갑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색이 당 대표라는 사람이 험지를 외면하고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했다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홍 대표의 대구행이 대구 정치판에 어떤 손익을 가져다줄지 현재로서는 예단키 어렵다. 하지만 그가 대구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대구 사람들의 마음부터 헤아리겠다는 자세다. 지방분권개헌 요구 같은 지역민의 대표적인 열망을 외면하는 한 그는 대구경북 사람들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2018-01-23 00:05:00

[세풍] 문제는 홍 대표의 '입'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대구로 오는 이유는?' 몹시 아리송하다. 홍 대표가 그렇게 욕을 먹어가면서 꿋꿋하게 대구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만큼이나 그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다. 대구시민들이 분명하게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는데도, 굳이 강행하려는 의도에 대해 속어로 표현하면 정말 '아리까리'하다.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당협위원장만 맡겠다고 선언한 대목에 이르면 황당함의 극치다.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뭐하러 당협위원장을 맡는다는 말인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간판만 걸어놓고 놀러다닐 것도 아닐 텐데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다.두 달 전 홍 대표가 대구행을 밝히면서부터 대구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제 와 대구에서 뭐 하려고?' 하는 반응이었다. 제1야당 대표가 험지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텃밭에 내려와 안락한 생활을 즐기려는 것처럼 보이니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마련이다. 지난해 말 한 언론사가 대구시민들에게 홍 대표 거취를 물어보니, 민심이 얼마나 냉소적인지 알 수 있다. 응답자의 13%만 '대구에서 당협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했고, 나머지 73.8%는 당 대표 역할에 전념하거나 서울지역 재보궐선거에 출마해야 한다고 답했다. 시민들이 홍 대표에 대해 아예 대놓고 '문전축객'(門前逐客)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주위에서 떠들고 욕해도 끄떡도 않던 홍 대표가 이 대목에서는 부담을 느꼈던지, 며칠 전 대구'경북 신년교례회, 기자간담회 등에서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갖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정치를 하고 싶다' '과거 대구에서 3번이나 출마할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 등등….그게 효과가 있었던지, 대구의 비판 여론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다, 그렇게 대구행에 목매달며 애원하는 상황에서 더는 막을 수 없지 않나 하는 분위기다. 여기에서 대구사람 특유의 순수성과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에 약하고 실리에 밝지 못하니 매사를 냉철하게 살피지 못한다.그래서, 홍 대표가 왜 대구행을 고집하는지 주변 인사들에게 물었다. 홍 대표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 정치인이긴 하지만, 교묘하게 의도한 어법을 구사할 때도 많다. 대구행에 관한 그의 어법은 지극히 계산적이다. 그 속내는 이런 것 같다. '대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는 안 나간다. 그러나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한다.' 홍 대표의 수차례 설명에도, 이 뒷말은 빠져 있다.홍 대표가 지난해 19대 대선에서는 탄핵정국에 별다른 준비 없이 나섰다가 실패했지만, 이제부터 대구에서 차분하게 준비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특정 지역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권을 잡은 만큼 대구경북을 교두보로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뜻이다. 대권을 염두에 둔 마당에 국회의원 자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홍 대표가 그렇게 무리해가며 당협위원장을 맡으려는 이유가 자연스레 설명된다.홍 대표가 대권을 목표로 계획하고 움직이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홍 대표와 그 비서실장인 강효상 의원이 대구사람을 만만하게 다룰 수 있는 이용 대상쯤으로 여기고 내려온다고 치자. 선례에 비춰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정치력이나 이데올로기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홍 대표의 가벼운 입과 처신은 대구사람을 창피하게 만들지 않을까 정말 걱정스럽다.유들유들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인 농담을 예사로 툭툭 던지는 그 '입'이 문제다. 발언록을 보면 '돼지 발정제'부터 '젠더폭력이 뭐냐?' '거울 보고 분칠이나 하는 후보는 안 된다'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서 애나 봐라'까지 유치찬란하다. 그가 혹시라도 대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되고, 타지에서 대구의 전형적인 '꼰대'로 보지 않을지, 그것이 두렵다. 대권도 좋지만, 그 경망한 입과 처신을 고치기 전에는 대구에 오지 말 것을 권한다.

2018-01-16 00:05:00

[세풍] 3만달러 시대의 상식

일본항공(JAL)의 승무원 잡지에 이런 유머가 실렸다. '아마존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일본과 프랑스, 러시아인 각각 2명씩 승객 6명만 살아남았다. 며칠 밀림을 헤매다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우스갯소리에 정답이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정답 풀이를 보면 그럴 듯하다.러시아인은 '룰렛 담판'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사람은 미인을 애인으로, 또 한 명은 연인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도쿄 본사에 연락해 처리 방법을 묻는다는 게 잡지가 내놓은 답이다. 만약 이 유머에 한국인을 끼워넣는다면? 미인은 제쳐두고 먼저 비행기 추락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물론 유머다.그런데 한낱 유머에도 국민 특성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런 이미지나 시각이 일정 부분 보편에 근접했거나 아니면 편견이 굳어져 집단 특성으로 잘못 매겨진 경우다. 관찰자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과 인식이 드러나는 경우를 보면 '보편화의 오류'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면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과 같은 F조에 속한 축구 독일대표팀 수석 전력분석관이 본 한국 인식이다. 그는 독일과 다툴 한국, 스웨덴, 멕시코 대표팀 전력에 국민 특성을 반영해 상관관계를 분석했다.그저께 일간지 '함부르거 아벤트블라트'에 소개된 인터뷰에 따르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와 국민, 정신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한국과 스웨덴, 멕시코를 여행해 보면 차이점이 분명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는 "한국인은 아주 열심히 일한다. 규율도 아주 잘 지킨다. 또 맡은 임무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거의 다 완수한다"고 평가했다. 얼토당토않은 분석은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인식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몇 해 전부터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크게 부각된 '헬조선'이라는 용어에서 우리의 상황 인식이 어떤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가진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게 두드러지거나 열패(劣敗) 의식이 점차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심각하다. 무엇보다 헬조선의 단초를 제공한 '정부와 국회, 사법기관 등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 이는 정치인과 공직자, 재벌의 부정부패와 특권의식이 사회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다.단순히 개인의 도덕'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더 많은 돈을 가질수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다듬고 키워나가야 할 가치나 공동체 의식을 망각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이런 그릇된 의식의 돌부리가 사회 발전과 공동체의 진보를 가로막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지난 연말, 충북 제천의 화재 참사는 '헬조선'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님을 증명했다. 사고 직후 화재 원인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결론은 우리 사회의 무사안일이었다. 상식이 벽에 막히고 법이 무력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수십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몇 년 전 세월호의 교훈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회라면 '헬조선' 푸념도 이제는 과분하다. 또다시 관련 법을 뜯어고치고 뒷북을 쳐도 집단의 속성이 바뀌지 않는데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합리적인 사고와 교양에 기초한 상식의 위력은 타율성에 뿌리를 둔 법의 효율을 크게 능가한다. 법보다 상식이 앞서는 사회가 더 건강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올해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호언했다. 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른 것은 분명 희소식이다. 하지만 주머니가 조금 더 두둑해진다고 선진시민, 선진사회가 될 수는 없다. 상식을 거부하고 기본을 무시하는 사회는 아무리 '선진'을 외쳐도 후진성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국정을 농단한 세력만이 적폐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우리 모두가 적폐의 근원이자 청산 대상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창문을 굳게 막고 털어낸 먼지와 적폐 청산이 다를 게 뭐 있나.

2018-01-09 00:05:00

[세풍] '합의'가 나쁜 걸 누가 모르나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25일밖에 안 지났지만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3월 말까지는 전쟁의 1단계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도 무리는 없게 됐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일본이 진주만 기습과 함께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으로 진격했던 다음 해인 1942년 첫날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宇垣纏)의 일기다. 연합함대는 일본의 핵심 전력이다. 그 참모장이란 사람이 1단계 전쟁 목표를 달성한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본은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라는 장기 비전 없이 개전(開戰)을 결정했다는 얘기다.개전은 극히 근시안적 동기로 결정됐다. 그것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응한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 조치다. 이에 따라 18개월 뒤면 연합함대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할 터였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앉아서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먼저 공격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선공(先攻)이 성공해도 장기전으로 갔을 경우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도 1943년 이후에도 전쟁이 계속될 경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개전은 '일단 저지른 다음 뒷일은 그때 생각하자'는 것이었다.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불인정' 천명은 이와 똑같은 무모함을 보여준다. 이제 문재인 정부의 선택지는 '합의 파기'와 '재협상' 두 가지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합의 파기는 한일 관계의 파국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잘 지내보자'는 것뿐이다. 일본이 잘도 '그러자'고 하겠다. 재협상은? 일본이 '최종적'불가역적 합의였다'며 거부하면 그만이다. 이미 아베 총리는 "1㎜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물론 제3의 선택지도 있다. 2014년 아베 정권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검증'한 뒤 "담화는 한일 간 정치적 흥정이었다. 그럼에도 계승한다"는 저질 코미디를 했던 것처럼 "합의를 인정할 수 없지만, 한일관계 경색을 고려해 유지한다"고 미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여론의 반발 때문에 쉽게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더라도 오래갈 수는 없을 것이다.'합의'가 나쁜 것임은 명백하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불인정'하여 '파기'하거나 '재협상'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만이 문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합의'는 북핵에 대응한 한미일 공조라는 안보 문제와 '엮여' 있다. 우리의 의사에 상관없이 그렇게 돼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완강히 버티다 결국 미국의 '합의' 중재를 수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 전 대통령인들 이 결정이 국내 여론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것임을 왜 몰랐겠나?안보 상황은 '합의' 당시보다 더 위중해졌다. 북한의 핵무장 완성까지 3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게 미 CIA의 판단이다. 한미일 공조의 필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해졌다. '합의' 불인정은 의도했든 안 했든 이와 반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위중한 시기에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국내정치용' 말고는 이유를 달리 헤아리기 어렵다.'합의'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누가 모르나.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기에 대중과 같은 도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도자로서 정치세계가 요구하는 '다른 도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자의 현명치 못한 행동은 설사 그것이 좋은 의도에서 행해졌어도 국가와 국민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정치의 법칙을 경멸하는 도덕적 오만으로 자신이 돌봐야 할 국가의 이익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비난받아 마땅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의 말이다. 공부 좀 하시길!

2018-01-02 00:05:04

[세풍] 3% 성장, 독과 약의 경계

취임 이후 내내 호흡이 가빴던 문재인 정부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뜻밖의' 성장세와 기업 실적 호조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귀한 손님'인 반도체 덕에 내리막길을 걷던 수출이 유턴하면서 마의 벽인 '3% 경제 성장'이 손에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른 것은 몰라도 먹을 복은 타고난 사람"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올해는 IMF 외환 위기가 터진 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당시 정부와 기업, 금융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김영삼 정부는 거시 경제지표를 들먹이며 '펀더멘털'만 외치다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지금 눈높이로 따지면 외환 위기 직전인 1996년 7.6%, 1997년에 5.9% 성장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방심한 사이 외환 위기가 들이닥쳤고 그 이후 국민의 곤궁한 삶은 알려진 대로다. 1998년 성장률이 -5.5%로 곤두박질 친 것은 그 서막이었다.한국 경제에 '구제금융'이라는 피주머니를 채운 외환 위기가 정부의 무능함이 초래한 급성질환이라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양상은 만성질환이다. 별 증상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체력이 떨어지고 상태가 나빠지는 꼴이어서다. 전문가들 사이에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가 우리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분기점이라는데 이견이 없다.이때부터 한국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하면서 OECD 국가 가운데 성장률 낙폭이 매우 큰 나라에 든다. 2001∼2008년까지 8년과 2009∼2016년까지 8년을 비교하면 우리의 평균 성장률이 4.6%에서 3.1%로 1.5%포인트나 떨어졌다. 2002년 7.4%의 경이적인 성장률은 그렇다 치더라도 2000년대 초반 4∼5%대와 지금의 2%대 성장률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외환 위기 때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의 외환 보유액이 18.4배 늘고, 코스피 지수는 6.7배나 오르며 대외 건전성이나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진 것은 맞다. 하지만 성장률이 2%대에 고정되고 넘쳐나는 가계 부채와 청년 실업, 저출산, 고령화 등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들이 즐비하다. IMF 때도 그러했듯 매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언제든 경제 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이유다.그저께 한국은행은 7~9월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기 대비 1.5%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분기 기준으로 2010년 2분기 1.7% 이후 7년 3개월 만에 최고치다. 4분기에 역성장해도 3년 만에 3%대 성장이 가능한 수치다. 정부와 집권 여당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까닭이다. 속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그뤠잇"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최근 '화려한 반도체 잔치는 끝났다'는 불길한 소식에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기준금리도 6년 5개월 만에 다시 반등했다. 불안한 한반도 안보 상황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상수가 된 지 오래다. 당장 내년에 한국 경제가 어디로 튈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폭풍 전야와 같은 불안감이 국민 일상에 무겁게 와 닿는다.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는 새 정부 5년의 어젠다가 빼곡히 담겨 있다. 물론 100대 과제에 경중(輕重)이 없겠지만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는 16번째에 등장한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좋은 일자리가 빈 바구니를 채우고 나아가 사회 안정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1, 제2 과제인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이나 '반부패 개혁으로 청렴한국 실현'과 비교해도 그 지향점이 같다.미국 경제역사가인 데이비드 란데스는 '국가의 부와 빈곤'(1998년)에서 이상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을 정리했다. 한 대목을 보면 '효율적이며 세금을 낮추고 사회적 잉여에 대한 정부 몫을 줄이는 정부 구현'이 눈에 띈다. 문재인 정부가 실천하려는 정책 과제와도 맥락이 같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명분만 좇다 디테일을 놓친다면 죽도 밥도 모두 잃게 된다. 1997년과 2008년의 잘못을 내년에는 되풀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017-12-05 00:05:02

[세풍] 시노모세키 조약 이전으로…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라면 그렇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지 않았다면?'이란 가정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한반도의 모습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통일국가가 들어섰을 수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속국화(屬國化)를 피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장제스(蔣介石)는 2차 대전 종전을 앞두고 일본 패망 후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 중국군도 파견해 한강 이남은 영국'미국군, 이북은 중국군의 관할 아래 둔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목적은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권 내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한반도 진주 연합군의 비율을 '중국군 4, 미'영국군 1'로 한다는 장제스 참모들의 구상이다. 단순한 전후 처리 참여라면 많은 비용을 들여 미'영의 4배나 되는 병력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런 목적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일본군의 항복 후 구성될 임시정부의 외교'국방'경찰 부문은 3년 기한으로 중국인 고문을 둔다는 '고문정치' 구상이다. 한반도 주둔 중국군을 지렛대로 외교'안보와 국내 치안까지 중국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것이다.장제스가 충칭(重慶)으로 옮긴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당시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이를 정확히 꿰뚫어봤다. "장제스가 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느냐"는 중국 주재 미국 대사 클러렌스 E. 고스의 질문에 조소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 패망 뒤 한반도를 중국의 종주권 아래에 두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1942년 2월 12일 자 미 국부무 외교문서)물론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지 않았다면 장제스의 구상이 실현됐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럴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장제스가 한반도 종주권 회복을 획책했다는 사실이다.지난 4월 시진핑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 것은 중국 정부의 색깔이 푸르든 붉든 종주권에 대한 집착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오쩌둥도 대장정 때 한반도에서 중국의 종주권 상실에 울분을 토했다.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집요한 반대는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킬 때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다.문재인 정부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갖고 있었어도 사드 배치를 놓고 그렇게 난리 치지 않았을 것이다. 사드를 '도둑 배치'했다고 떠들어댄 문 정부를 보고 시진핑은 종주권 회복이 실현 가능하다는, 그것도 자신의 시간표보다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을 것이다. 바랐든 안 바랐든 문 정부는 중국의 시간표대로 가고 있다.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3불(不)' 선언까지 했다.이는 안보주권을 중국의 처결에 맡긴 굴욕적 자해다. 문 정부는 '3불'이 '입장 표명'이라고 한다.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약속'이라 한다. 오만한 언사로 3불의 조속한 이행은 물론 '이미 배치된 사드 시스템의 사용도 제한해 중국의 전략적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하라'는 '1한(限)'까지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결국 입장 표명이든 아니든 문 정부는 엄청난 전략적 실수를 한 것이다.청일전쟁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고 돼 있다. 이는 조선의 자주독립국 지위 인정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위한 청이란 걸림돌 제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의미는 전자다. 어쨌든 우리가 처음으로 중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이 조약에 의해서였다. 중국의 일관된 목표는 한반도의 '현상'을 그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문 정부는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려 한다. 통탄할 일이다.

2017-11-28 00:05:05

[세풍] 메콩강 야자수를 보고

'프랑스와 중국과 영국은 우리들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이 나라를 짓밟았고,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한반도를 말하자면…그 토지가 비옥한데 인구는 희박하다…물산(物産)이 풍부하여 크게 우리 거류민의 이익 획득과 부력의 증진에 소위 천부(天賦)의 옥토(沃土)라 할 수 있다.'앞은 월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1983년 안정효가 쓴 소설 '하얀전쟁'에 나오는 장면으로, 월남인 촌장이 파월 국군과 나눈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뒤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3년 기록인 '대구부사'에 나오는 한국 거주 일본인 거류민의 생각을 적은 내용이다.한반도의 비옥함으로 일본이 침략했듯이 촌장 말처럼 베트남의 땅도 비옥했고 식민 제국(帝國)이 탐을 낼 만했다. 특히 옛 월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시) 남부 야자수 늘어진 메콩강 삼각주는 더욱 그랬다. 메콩 델타로 불리는 이곳은 베트남 곡창지대로, 베트남 전체 경지면적 740만㏊의 35%인 260만7천㏊를 차지할 만큼 최대 경작지다. 메콩강은 티베트에서 시작돼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을 적시며 바다로 스며드는 '동남아시아의 젖줄'이다. 동남아 최대의 강으로 길이만도 4천900㎞가 넘는다.이런 메콩강 곡창지대 등 베트남에서 국민 9천200만 가운데 6천만 농민이 1년 3모작으로 거두는 쌀은 연간 4천500만t(2016년). 태국 다음의 쌀 수출 대국이다. 이런 베트남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 농촌을 바꾸기 위해 농업의 3대 목표로 생산성 증대, 품질과 부가가치 증진을 잡고 있었다.이를 위해 베트남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 경북과의 협력에 적극적이었다. 지난 10일부터 3박 5일 경북도 농어업FTA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손재근)와 함께 들른 베트남 농업 현장은 이를 확인한 기회였다. 지난달 경북도를 직접 방문한 베트남 농업연구개발기획청 응우웬 트롱 우엔 지청장이 그랬다. 그는 손 위원장의 손을 맞잡고 경북도와의 협력을 바라며 협조를 부탁했고 손 위원장 역시 분야별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공조를 다짐했다.사실 두 나라는 오랜 동병상련의 인연을 갖고 있다. 가까운 역사 속 일만도 숱하다. 19C 말~20C 초 조선조 말 흉년 때 베트남은 안남미(安南米)를 수입하던 나라였고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가 활동한 곳이었다. 또 식민 지배와 독립, 남북 분단과 남북 전쟁의 아픔도 겪었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 국제결혼과 기업 투자에 따른 활발한 이주, 새마을운동 전파와 농업 교류, 엑스포 공동 개최까지 인연은 진행 중이다.이를 바탕으로 특히 경북은 베트남과의 교류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농어업 분야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주곡이자 식량 안보의 최후 보루인 쌀은 좋은 사례이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미국 등 해외에 팔던 경북 쌀이 올해 처음으로 상주 아자개영농조합법인에 의해 상주쌀 13t이 베트남에 진출해 하노이를 중심으로 판로 개척에 나섰다.올해 전체 경북 수출 쌀 221t 의 6%에 불과하지만 의미는 남다르다. 우리 쌀이 쌀 수출국에 팔 정도로 품질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베트남의 안남미(인디카종)는 우리쌀(자포니카종)과는 다른 품종이다. 하지만 교민을 비롯한 현지인에게도 팔 수 있는 길을 개척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이는 국내의 쌀 소비 감소와 논 면적의 축소에 따른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 즉 기상이변과 흉작 등에 따른 국제 쌀값 폭등과 식량 확보난과 같은 충격을 완화할 수 있어서다. 이는 결국 식량 안보의 바탕을 다지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경북 쌀 농민을 응원하는 까닭이다.이번 경북도 농어업FTA대책특별위원회의 방문으로 비옥한 땅을 가진 죄(?)로 역사의 아픔을 비슷하게 겪은 두 나라가 농어업을 통해 공동 번영을 위한 길을 트는 디딤돌 하나를 놓았으면 좋겠다. 손 위원장의 "메콩강 야자수 숲이 메콩 델타를 보호해 더욱 풍성하게 하는 듯하다"는 말처럼 두 나라 농어업을 야자수 삼아 베트남과 경북의 곳간이 풍성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2017-11-21 00:05:00

[세풍] 대구시장 현수막 어디 갔노?

"내 현수막 어디 갔노?" 지난 추석날 대구 도심을 둘러보던 권영진 대구시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명절 하루 전 대구시내 주요 관문과 네거리에 자신의 이름으로 명절 인사말 현수막을 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도심엔 하나도 눈에 안 띄었기 때문이다.권 시장은 이 현수막들이 중구청에 의해 모두 철거됐다는 사실을 연휴 이후에야 알게 됐다. 광역단체장 명의의 현수막을 구청 공무원들이 철거하는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엄밀히 따지자면 구청 공무원들은 법과 규정에 따라 일을 한 것이었다. 명절 때마다 정치인들이 인사말 현수막을 곳곳에 내거는 것이 관행이지만 대부분 불법 게시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 명의의 현수막 철거는 이제 대구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과 원칙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세상이 왔다고 반색할 만한 일이다. 권 시장도 내심 당황스럽고 서운했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아니라며 별 대응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세간에는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현수막 철거가 내년 지방선거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공교롭게도 윤순영 중구청장은 내년 대구시장 선거에 뜻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른정당 소속인 윤 구청장은 자유한국당 소속인 권 시장과 당적도 다르다. 이 때문에 지역 정가에서는 대구시장 명의의 현수막 철거가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견제구가 아니냐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렇다면 대구 정치 생태계의 최근 변화가 빚어낸 생경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지금은 보수의 위기 시대다. 보수의 본산이라는 대구도 예외가 아니다. 보수 정치권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갈라져 있고 공교롭게도 두 당의 대표는 둘 다 대구에 정치적 기반을 자처하거나 둔 인물이다. 자유한국당 사정도 친홍과 친박, 비박 등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정 정당에 대한 지역민의 일편단심도 예전 같지 않다. 향후 선거에서 대구 유권자들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흐를지 가늠키 어렵다.이런 상황에서 내년 대구시장 선거는 전례없이 흥미진진한 경쟁 구도가 될 것 같다. 최초의 비(非) 경북고 출신 대구시장이라는 지평을 연 권영진 시장은 지난 3년 6개월 재임기간 동안 시정을 비교적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정작 압도적 지지율 우위를 점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더구나 자신의 대표적 역점 사업인 통합대구공항 이전과 대구취수원 이전 문제가 의도와 달리 성과가 아니라, 경쟁자들로부터 공격받는 카드가 되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보수의 위기를 틈타 더불어민주당은 대구에서의 약진을 도모하고 있다. 다른 지역만큼은 아니어도 민주당은 대구에서도 의미 있는 교두보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김부겸 장관의 내년 대구시장 선거 차출설도 숙지지 않는다. 김 장관은 이미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사실상 자력으로 40% 득표율을 기록한 바 있다. 민주당은 보수진영 후보들과의 양자 대결에서 김 장관이 우위에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고무돼 있다.민주당 고위 인사들이 대구 현안에 귀를 깊이 기울이거나 대구 예산을 챙기려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보수 궤멸을 막기 위해서 내년 대구시장 선거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어쨌거나 내년 대구에서의 지방선거가 전국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정 정당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되는 후진적 정치 풍토가 그동안 지역의 미래를 갉아먹어왔기 때문이다. 지역민의 선택이 아니라 중앙당 낙점을 받아 정치 생명 연장의 꿈을 꾸는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랴.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다. 누가 되든지 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되는 것이 지역과 유권자들에게도 좋다. 지금 대구는 '묻지 마 지지' 불모지에서 정치적 생태계 다양성이 피어나는 초입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

2017-11-14 00:05:04

[세풍] 문재인 정부의 저자세 외교

이제 보니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은 최순실이 아니었다. 사드 배치 결정과 한'일 위안부 합의는 국가에 재앙을 불러온 바보짓이었다. 이런 어리석은 선택은 한국 외교와 안보를 나락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데 기여를 했다.사드 1개 포대를 배치한 대가치고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너무 많이 겪었다. 기자가 북한의 핵 위협과 사드의 전략적 가치를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사드가 단숨에 북한 핵 위협을 잠재울 수 있으면 모르지만, 엄청난 분란만 일으켜 놓고는 제값을 하지 못할 것 같아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한국이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외줄 타기 외교를 해야 하는 것도, 미국과 중국에 굽실대고 머리 조아리는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드 때문일 것이다.당시 박 전 대통령이 미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압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항간에는 박 전 대통령이 모종의 이유로 '심경 변화'를 일으켜 갑자기 밀어붙였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해야 마땅하지만, 요즘 워낙 턱도 아닌 일을 많이 봐서 그런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박 전 대통령이 미국과 중국의 태도 및 보복 정도를 고려하지 않았거나 예상조차 못 했다면 뻘짓이라도 이런 뻘짓은 다시 없을 것이다.이제는 사드를 미국에 도로 가져가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만시지탄' (晩時之歎)이다. 언제까지 박 전 대통령 탓, 전 정부 탓만 하고 있어야 할까. 더 황당한 것은 문재인 정부마저 사드 문제를 떳떳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에 굽실대고, 저자세로 일관한다. 박근혜 정부를 부정하고 촛불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정부가 맞기나 한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대통령선거 때 그렇게 주장하던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긍지는 어디에 내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 사드의 환경영향평가 등을 운운하며 배치 반대 인상을 주더니만, 지난 6월 방미 때 상'하원 지도부를 만나 "사드 배치 번복은 없다"고 강조했다. 국내용 발언과 국외용 발언이 완전히 달랐다. 문 대통령은 미국에 줄곧 저자세를 취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구걸 외교'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지난달 말 정부가 중국과 사드 갈등 봉합 내용을 담은 이른바 '3NO' 협의문은 굴종 외교의 최고봉이다. 정부가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고, MD 체제에 참여할 의사가 없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구축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한 것은 정말 비상식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중국은 명분, 우리는 실리를 얻었다"고 자찬했지만,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추가적인 경제 피해를 막은 것은 위안이 될지 몰라도, 협의문에 최소한의 견제 장치나 사과문은 넣었어야 했다. 앞으로 중국이 한국의 행보에 폭력적인 경제 보복으로 사사건건 제동을 걸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때마다 이것저것 다 내주고 나면 무엇이 남겠는가. 극우 언론들이 정부 내 진보 세력들이 미국을 싫어해 중국 품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믿더라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자칫, 박 전 대통령의 결정 못지않은 중대한 실책이 될 가능성마저 있다. 고육지책이라곤 하지만, 국가를 위험 속에 빠트릴 수 있는 선례를 남겨놓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한 인사가 "진보 정권이 붕괴된다면 외교'안보 문제 때문일 것"이라 했지만, 정부가 미국과 중국을 대하는 자세를 볼 때 위태롭기 짝이 없다. 우왕좌왕, 말 바꾸기, 자신감 부족, 구걸과 굴종… 외교판에서 금기라는 것들이 모두 등장한다. 총체적 난국이다. 문 대통령은 이번 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잇따라 정상회담을 갖는다. 더 이상의 저자세와 굴종은 상대에게 얕보일 뿐이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한국 주도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당당한 자세로 회담에 임했으면 좋겠다.

2017-11-07 00:05:00

[세풍] 적폐의 슈퍼 사이클

경제 이슈에 그리 밝지 않은 사람에게도 요즘 '슈퍼 사이클'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다. 슈퍼 사이클은 통상 20년 이상의 장기적인 가격 상승 추세를 일컫는다. 2000년대 초반 중국과 신흥국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폭등한 '원자재 슈퍼 사이클'은 가장 최근의 예다.지금 슈퍼 사이클의 주인공은 '메모리 반도체'다. '나 홀로 초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반도체 수요가 폭증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호령해온 우리 기업들이 돈방석에 앉았다. 순이익만 올해 100조원 이상을 넘보는데다 영업이익률은 40%를 웃돌아 '반도체 방석'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누구도 이런 초호황세를 예상하지 못했듯 조만간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하지만 적어도 반도체 덕에 거의 감겼던 한국 경제의 눈이 떠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말하자면 한국 경제가 반도체 호황이라는 심장박동기 세례를 톡톡히 본 셈이다.불과 1년 전만 해도 한국 경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중국의 사드 보복 여파로 유통'화장품 기업들이 휘청댔고 외국인 관광객은 급감했다. 2년 가까이 하락세를 거듭해온 수출과 내수 부진으로 '더블딥' 공포가 확산됐다. 천문학적인 가계부채는 정부와 국민 모두의 뒷골을 당기는 고질이었다. 한국 경제는 이래저래 회생 확률이 떨어지는 '언더독' 처지였다.부지불식간의 슈퍼 사이클에 얹힌 반도체 기업들이 '깜짝 실적'을 내면서 먹구름이 가득했던 기상도가 확 달라졌다. 실적 호전은 코스피 지수를 밀어올렸고 사상 최고치 2,500선도 뚫었다. 올 3분기 1.4%의 경제성장률은 7년 만에 최고치를 다시 써냈다. 일자리난에다 가계부채, 소득 감소에 시름이 깊은 국민들이 내심 곁불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다. 반도체 벼락에 온몸은 몰라도 곱은 손은 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커진 것이다.반도체 산업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지 모두 분석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다만 부지런한 기업이 더 많은 과실을 얻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올바른 선택과 투자, 혁신과 전략적 인내와 같은 마중물이 없었다면 슈퍼 사이클이 가능했을까. 웨이트 워처스의 창립자인 진 니데치의 '인생에서 정해진 운명은 없다. 우연이 아닌 선택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헌법과 국정을 도륙한 세력을 규탄하고 개혁을 기치로 내건 첫 촛불집회가 29일로 1년을 맞았다. 그때 전국의 거리를 뒤덮은 촛불은 노래로 국민의 상처를 보듬었다. "걱정 말아요 그대"라고. 꽃피는 5월,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제 국정 과제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적폐 청산이 바른 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문재인 시대, 우리 정치가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다. 꿈은 새 시대를 향하지만 우리 국민과 정치도 반도체와 같은 슈퍼 사이클을 맞을는지는 짐작 가능함의 밖이다.행운도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준비가 없으면 누릴 수 없다. 기본자세와 경쟁력이 없는데 행운이라고 비켜가지 않을 턱이 있나.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는 바닥도 한참 바닥이다. 경쟁력은 고사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게 한국 정치다. 여야 위치가 아무리 바뀌어도 '집안 싸움'에 '보이콧 국감'처럼 정치 풍경은 달라진 게 없다. 299명 의원 모두에게 오줌싸개 소금 꾸러 갈 때 쓰는 키라도 덮어씌워야 속이 풀릴까.사람의 힘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산업과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사람이다. 결국 사람을 만들어내는 힘은 바른 정치, 바른 사회 분위기다. 무능한 정치에서 뛰어난 사람이 날 수 없다. 잘사는 나라치고 정치와 사회가 어지러운 나라는 결코 없다. 적폐를 모두 도려낸다고 행운이 깃든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적폐는 적폐대로, 혁신 성장은 성장대로 만들어가야 한다. 수확철 간절한 농부의 심정이 아니면 슈퍼 사이클은 어렵다. 2017년 반도체 슈퍼 사이클은 행운인가, 아니면 예정된 잔치인가.

2017-10-31 00:05:01

[세풍] 문의 '문 워크'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진영이 프랑코에게 패배한 이유는 군사적 무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내분(內紛)이다. 이를 주도한 세력이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 공산당이다. 공화진영에 군사고문단과 다량의 무기를 지원해준 스탈린의 의도는 스페인의 민주화가 아니라 '공산화'였다. 공화진영을 도와 프랑코 반군에게 승리한 뒤 공화진영 최대 세력이었던 무정부주의자를 포함, 공산당이 아닌 모든 정치 세력을 제거한다는 것이다.스페인에 파견된 소련 군사고문단의 육군 담당 블라디미르 E. 코레프가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백색분자들(프랑코 반란군)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와의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가피할 것이다. 이 싸움은 매우 잔혹할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 싸움을 백색분자들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시작했다. 그 수법은 매우 비열했다. 공화진영이 무기 대부분을 소련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 공산당 소속이 아닌 공화군 병사에게는 지급하지 않았고, 부상자는 병원 치료도 못 받게 했다. 그리고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는 정파는 탈주자, 반역자,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다.대표적인 예가 한때 트로츠키의 비서를 지낸 안드레스 닌과 그가 이끌던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POUM)의 숙청이다. 닌은 트로츠키와 이미 결별했음에도 공산당은 그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고문 끝에 살해했다. 당시 POUM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던 조지 오웰도 그렇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 이러한 '내전 속의 내전'은 공화진영의 총체적 사기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고도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지금 이 땅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핵실험에다 각종 미사일을 펑펑 쏘아대는데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내부의 적' 때려잡기에 정신이 없다. 그 범위는 전(前), 전전(前前)도 모자라 전전전전전전전(前前前前前前前), 전전전전전전전전전(前前前前前前前前前) 대통령으로까지 소급한다. 모두 '문빠'들이 증오하는 전직 대통령들이다.청산 대상 적폐도 무한정이다. 적폐로 찍으면 무조건 적폐다. 다른 이유는 없다. 아산 현충사에 걸린 전직 대통령의 휘호도 적폐가 된 까닭이다. 세계가 찬탄하는 새마을운동도 적폐로 모는 마당이니 새마을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전직 대통령의 휘호를 적폐로 찍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청장은 눈치가 너무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말 대로라면 그런 적폐를 없애라고 문화재청장을 시켜줬기 때문이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안보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여건이 못 된다"고 했다. 지난 7월 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없고 합의를 이끌어낼 힘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무력해도 내부의 적 때려잡기에는 힘이 펄펄 넘치는 게 문 정부다. 밖에 나가서는 찍소리 못하면서 안에서는 큰소리치는 못난 가장의 모습 그대로다.이런 식으로는 우리 사회가 마주한 난제들을 풀어낼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안보 상황을 우리가 주도할 수 없다면서도 "내부가 제대로 결속되고 단합한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앞으로 걷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로 가는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moon walk) 춤 뺨치는 말의 기예(奇藝)다. 내부 결속과 단합은 문 대통령이 앞장서 깨뜨리고 있지 않은가?영국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는 '스페인 내전-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에서 "프랑코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별로 한 역할이 없다. 공화군의 용기와 희생을 헛되이 낭비함으로써 전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것은 공화군 지도부였다"고 했다. 공화진영은 스스로 무너졌다는 거다.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2017-10-24 00:05:05

[세풍] 이왕 돈을 쓰려면

'1928년 재일 경북인 4만9천358명이 고향으로 송금한 돈은 110만3천757원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액수.'일제강점기 시절 경북경찰부가 독립운동가를 감시, 체포, 고문하는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를 위해 만든 비밀교과서와 같은 '고등경찰요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일제 등쌀에 경북인들은 나라를 등졌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경북 사람 가운데 1928년 기준 일본에만 4만9천358명이 살았다. 1927년 말 재일 한국인 17만5천91명의 28%다. 재일 한국인 75%가 노동으로 버틴 것처럼 경북인도 그러했을 터이다.하지만 일본 속 경북 사람들은 고향의 가족에게 번 돈을 보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액수'인 110만3천757원은 1928년 대구부(大邱府)의 1년 세입(경상부+임시부) 98만7천372원보다 많다. 특히 송금된 돈은 독립자금으로 흘러갔다. 나라 안에서 독립군자금을 기꺼이 낼 백성은 이들 말고는 없었다. 상황이 그랬다. 당시 한국 경제의 80%는 일본인 몫이었다. 한국인 2천만 명의 80%가 문맹(文盲)이었다. 농민이 80%이고 이들의 70%쯤이 소작 등으로 가난했다. 독립군자금을 내놓을 사람은 뻔했다.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송금받은 백성과 일부 한국인 자산가를 빼면 누구도 돈을 낼 일은 없었다.이처럼 나라 밖으로 내몰린 한국인이 노동과 장사로 번 돈을 군자금으로 내놓은 사례는 숱하다. 이들의 활동, 특히 '인삼 행상'은 중국 상하이, 홍콩에서 태국, 싱가포르의 남양(南洋)에 이르기까지 '발을 디디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 또 '화교(華僑)가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지 한국 인삼 행상들의 존재를 찾을 수 있을'만큼 나라 밖 살길 찾기는 눈물겹다. 이렇게 번 돈은 독립자금으로 헌납되고 이들은 '총대 없는 상인독립군'이 됐다.이들 이야기는 흔히 중국 화교에 견줄 만하다. 일찍 나라 밖 남양으로 살길을 찾아 나선 중국인들이 뒷날 고국 혁명의 든든한 자금줄이 된 일과 같은 맥락이어서다. 해외 화교들이 혁명 인사를 도우면서 중국 혁명지도자 손문(孫文)의 말처럼 '화교는 혁명의 어머니'였다. 맨몸의 노동으로, 한국 특산품 '고려인삼'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번 돈을 독립운동가의 군자금으로 낸 노동자, 행상의 나라 밖 한국인은 총을 든 독립투사와 다르지 않았다.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지금 나라 곳곳에서 이뤄지는 청년지원 정책이 생각나서다.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이 나라 젊은이를 위해 전국 지자체마다 '청년수당'(서울시), '청년디딤돌카드'(부산시), '청년배당'(성남시) 같은 여러 이름을 붙인 예산을 지원하거나 그런 비슷한 일을 추진하는 듯하다. 대구시에서도 어제 '청년희망 공감토크 청년수당에 대하여'라는 주제의 행사를 갖고 대구 청년을 위한 지원 정책 마련에 나선 모양이다. 대구시 조사 결과,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16년간 대구를 떠나는 청년의 발길이 멈추지 않다 보니 이해할 만하다.청년 지원을 마다하거나 주저할 일은 아니다. 대구 청년이 대구를 떠나지 않고 머물며 고향을 지킬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떠나는 젊은이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대구를 등지는 만큼 이들을 붙잡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일시적인 예산 지원을 통해 청년의 대구 머물기를 유도하기보다 대구를 떠나서도 일자리를 찾도록 하는데 돈을 쓸 필요가 있다. 지금 경북도에서 2013년부터 시작한 '청년무역사관학교' 사례처럼 대구 젊은이가 나라 밖 무대를 향해 꿈을 도전하도록 하는 지원 말이다.옛 기록 특히 가장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대구 젊은이는 뛰어났다. 도전, 모험을 마다치 않았고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다. 지금의 대구 모습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그때보다 더욱 자유로운 지금, 대구 젊은이라고 굳이 대구와 나라 안에만 머물러야 할까. 이왕 돈을 쓰려고 했다면 나라 밖에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이들이 대구를 구할 '미래 독립군'이 될지 누가 아는가. 당국의 발상 전환을 바란다.

2017-10-17 00:05:01

[세풍 世風] 그대, 경북도(道伯)백을 꿈꾼다면

물쓰듯 펑펑 쓴다는 비유도 있지만 사실 물만큼 귀한 자원도 없다. 지구상의 물 가운데 인류가 쓸 수 있는 양은 고작 0.03%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벼농사용 물 확보는 절박한 일이었다. 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식구가 아사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자기 논에 물을 대려는 농부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농부들 간의 물꼬 경쟁은 때로 칼부림으로까지 이어졌다.물로 인한 살벌한 경쟁도 있었지만, 마음 한쪽을 데우는 미담도 있다. 나그네가 우물에서 물 긷는 아낙네에게 물을 청한다. 여인은 섬섬옥수로 물 한 바가지를 전하는데 버들잎 한 장을 물에 띄운다. 나그네가 연유를 묻자 "목이 몹시 마를 때 급히 마시면 체하기 쉬우니 버들잎 휘휘 불어 천천히 드시라는 뜻"이라는 답이 돌아온다.성격 다른 두 이야기이지만 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담았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다. 두 이야기를 장황하게 거론한 이유는 10년째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대구 취수원 이전 문제에 관한 칼럼을 쓰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다. 1991년 구미 페놀 사건을 경험한 대구로서는 낙동강에 수돗물을 의존하는 것 자체가 큰 걱정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구시는 취수원을 구미로 옮기는 방안을 10년 전부터 모색하고 나섰다.대구시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20여 년 전 부산 시민의 극렬한 반대로 위천국가산업단지 조성이 무산된 전례를 통해 광역 수계 관리가 엄청난 지역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지 경험했음에도 대구시는 배운 것이 없었다. 대구시의 안일한 접근 방식은 구미 시민들의 극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되레 불신과 반목을 키웠다. 취수원 문제 해결을 위한 대구시의 상황 판단도, 시기도 적절치 못했다.우스갯소리로 대구 수성구'동구 주민들은 한여름에도 보일러를 튼다는 말이 있다. 수돗물로 공급받는 청도 운문댐 물이 하도 차서 데워 써야 한다는 것인데, 낙동강 물을 쓰는 달서구'북구'서구 사람들로서는 마냥 부럽기만한 소리다. 심지어 수성구에 낙동강 물이 공급됐더라면 취수원 문제는 진작 해결됐으리라고 보는 이조차 있다. 대구지역 리더들이 많이 사는 수성구 사람들에게 취수원 이전 문제는 관심 밖 사안이었고, 다선 국회의원이 많은 수성구'동구의 정치권도 사실상 힘을 보태지 않았다.정권이 바뀐 이후 국무총리가 뒤늦게 나섰다. 대구 시민들은 이제 문제 해결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지난달에는 총리 주재로 대구시와 구미시가 모여 대책을 논의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지만 열리지도 못했다. 회동 무산의 원인을 놓고 구미시와 경상북도가 거절했다는 설에서부터, 취수원 갈등의 폭발력을 간파한 총리실이 알아서 미뤘다는 설이 엇갈리는 등 진실 게임마저 펼쳐졌다.필자 혼자만의 상상인지 몰라도 이낙연 총리는 이 문제에 괜히 끼어들었나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광역수계 관리는 엄연한 국가사무, 즉 정부의 일이다. 지자체 갈등을 이유로 정부가 뒷짐질 사안은 결코 아니다.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해야 한다. 대구시도 노력을 다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절박한 만큼 더 주도면밀하게 사업을 추진했어야 했다. 구미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보듬고 취수원 이전에 따른 충분한 보상 방안도 이제 내놔야 한다.구미시도 구미산단에서 나오는 유해 화학물질이 대구 시민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 최근 남유진 구미시장이 차기 경북도지사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가 도백(道伯)을 꿈꾼다면 취수원 문제 해결을 선거 공약에 반드시 넣으라고 주문하고 싶다. 도지사 출마를 저울질하는 다른 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수원 이전 문제를 두고 대구와 구미 두 지자체가 보여준 반목과 불신은 유감스럽게도 농부들의 물꼬 다툼 모습과 겹친다. 물 한 사발에도 인심을 듬뿍 담아 나그네에게 대접한 우리 조상들의 넉넉한 인심이 그립다.

2017-10-10 00:05:01

[세풍] 권 시장의 리더십

역대 대구시장 가운데 대중친화력만 놓고 보면 권영진 시장이 단연 독보적일 것이다. 대중 앞에 서면 눈빛과 자세부터 달라지는 모습에서 과연 '정치인이 다르긴 다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런 만큼 권 시장은 시민이 많이 모이는 축제장에 가는 걸 아주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다.이달 초 대구삼성창조캠퍼스에서 열린 보자기 축제장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이날 가위바위보 대회가 열렸는데, 300명의 참가자 중 마지막에 세 명이 남아 권 시장과 겨루게 됐다. 권 시장은 이들과 등을 맞대고는 하늘 높이 손을 들어 계속 바위만 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시장님! 이제 다른 걸 내시죠"라는 사회자 말에 속아 가위를 냈다가 탈락했고, 둘은 계속 보를 내 권 시장을 이겼다. 권 시장은 우승자를 가린 후 마이크를 잡고는 "두 분이 시장인 저를 끝까지 믿어줘 너무나 고맙다"는 말로 좌중을 즐겁게 했다. 권 시장은 축제장에서 어떤 행동과 말을 해야 시민들이 좋아할지 훤히 꿰뚫어보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권 시장과 얘기를 나눠보면 그리 달변이 아님을 알게 된다. 대구 현안에 대해 설명은 곧잘 하지만, 논리적이거나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서울말과 안동 사투리가 섞여 그다지 듣기 좋은 목소리도 아니다. 마주앉으면 어중간한 말솜씨이지만, 대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확연히 달라진다. 세련되고 논리적인 말투로 바뀌고, 친근하고 다정한 멘트도 잘 날린다.대중 앞에 나서거나 악수하길 좋아하고 즉석연설도 은근히 즐기는 걸 보면 과거 시장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권 시장을 두고 '축제 시장' '행사 시장'이라고 비아냥댄다. 사무실보다는 행사장을 선호하고, '치맥축제' '컬러풀 페스티벌' 같은 축제에서 시민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신세대 시장'에게는 적이 많은 것 같다.권 시장은 공무원 일색의 역대 시장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취임 초부터 대구를 개방적이고 실용적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기대를 모은 만큼 바뀐 것이 제법 있다. 대구시청 분위기도 과거에 비해 좀 달라졌다. 시장이 아무리 대화와 소통을 하려고 해도 공무원 속성상 쉽게 바뀌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장실 주변에서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지르는 풍경은 사라졌다. 권 시장이 대구시 전체를 개방적이고 혁신적으로 이끌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시청 주변에는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그럼에도, 권 시장은 업무 능력과 성과 면에서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과도한 비판과 억측이 있기는 하지만, 시장 스스로 뚜렷한 업적이나 공적을 내세우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재임 3년여 동안 전기자동차, 로봇 등의 소소한 성과는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통합대구공항 이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권 시장에게 신공항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대구의 모든 현안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나 마찬가지다.모든 문제는 권 시장의 리더십에 기인하는 것 같다. 시장 본인은 의욕적이고 열성적이지만, 주위에 추진 동력이 거의 없어 힘을 모으지 못한다. 대구에서 오래 살지 않아 지원'지지 세력이 없는데다 일부에서는 '서울로 돌아갈 사람'이라며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는다. 축제'행사장을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금방 우군이 생기지 않는다. 시장 본인의 전술'전략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시장 반대파나 비판론자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권 시장 측은 초선 시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리더십 문제는 4년이 지나면 우군이 대거 생겨나기 때문에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는 것이다. 맞는 말인지 모른다. 대구 사람들이 시장 개인의 시행착오까지 기다려 줄 만한 여유가 있을 지가 관건이다. 내년 대구시장에 나서려는 분이 여럿 있지만. 두드러지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권 시장의 리더십이 의심받고 있으면 미래가 걱정스럽다.

2017-09-26 0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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